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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기꾼
오노레 드 발자크 지음, 장인숙 옮김 / 지만지드라마 / 2023년 11월
평점 :
‘자신이 직접 보고 경험한 19세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것’을 재현하려는 발자크 소설의 소재 에 당연히 ‘돈’이 빠져서는 안 될 것이다. 왕정복고 후, 샤를 10세의 보수적 정치에 부르주아 계급은 반발하고 혁명(7월 혁명)을 일으켜 ‘루이 필리프’를 왕으로 추대한다. 부르주아가 거의 모든 권력을 장악했던 이 시기에는 누구나 할 것 없이 노골적으로 부를 추구했다. 발자크 역시 돈을 위해 사업을 벌였지만 매번 실패해 빚 독촉에 시달렸다. 빚을 갚기 위해 그는 엄청난 양의 커피를 마시며 글을 써야만 했다. 발자크의 희곡(희극)인 ‘사기꾼‘의 시점은 1839년이다. 발자크 자신이 살았던 ’현재‘의 일부분을 무대에 그대로 옮겨 놓았고, 주인공이자 투기자인, 빚 때문에 거의 파산 직전에 몰린 메르카데 역시 발자크의 분신일 것이다.
거짓된 정보를 가득 퍼뜨려 저가 주식이 앞으로 엄청나게 오를 것이라고 해 투자자를 모으는 주식 투기자이자, 주가 조작자인 오귀스트 메르카데는 좋을 때도 있었지만 지금은 빚더미에 놓여 있다. 메르카데는 1년 6개월 넘게 월세를 내지 못해 집에 있는 가구들 모두 집주인인 브레디프에게 저당 잡혀 있고, 조만간 그 집에서 쫓겨 날 처지이다. 날마다 찾아오는 채권자들을 온갖 핑계를 대고 피하지만, 어쩌다 마주치게 되면 다시 거짓되고 허황된 말로 자신의 설계가 곧 성공할 것이라고 큰소리를 친다.
[주인님의 금고 어디가 새는지 모르겠어! 아무리 채워 넣어도 빈 물컵이 되니! 어느 날 쓰러져 계시다가, 그다음 날이 되면 벼락부자가 되어 깨어나시지, 주무실 때도 무섭게 일을 하신다니까, 숫자를 세고, 계산을 하고, 먹이가 될 만한 광고 문구를 작성하고, 항상 주주들을 모으시지, 그러나 주인님이 아무리 일을 벌여도 채권자들이 생겨나서 집에 왔다 갔다 하는 거야. -p.23]
지금 메르카데가 빚더미에서 벗어나기 위해선 인도로 간 동업자 고도가 돌아오는 것이고, 딸아이 쥘리를 부자에게 결혼시키는 것이다. 그리 예쁘지 않은 쥘리(그녀의 아버지마저 본판은 변하지 않는다고 한탄한다.)는 가난한 회계사 미나르를 사랑하지만, 아버지의 상황을 알고는 자신의 사랑을 포기하려고 한다. 심지가 굳어 자존심이 세고 도자기에 그림 그리는 일을 해 돈을 벌 수 있는 능력이 있음에도, 돈이 최고였던 그 시대에는 결혼도 거래였기에 쥘리는 사랑을 지킬 힘이 없다. 돈을 우선으로 생각하는 메르카데 역시 사랑이 밥 먹여 줄 수 없고, ‘큐피드의 화살이 연금 쿠폰이라도 쏟아 보내 줄 줄 아냐며(p.55)’ 그들의 사랑을 철부지들이 하는 행동이라고 치부한다.
희극, 특히 몰리에르 식 희극의 전개를 따른 발자크의 『사기꾼』은 서로 속고 속이는 과정에서 위기와 갈등을 빚다가 한 번에 해피엔딩으로 정리된다. 기다리던 ‘고도’가 돌아옴으로써 메르카데의 빚은 청산되고, 고도의 아들로 상속자가 된 미나르를 사위로 맞아들일 수 있다. 메르카데와 메르카데 부인은 시골로 가 허영을 벗어나 인내와 절약으로 사는 미덕을 실천하자고 다짐한다.
[거짓과 술책이 떠도는 이런 분위기, 남에게 과시할 필요 없는 이런 허영에서 벗어납시다. 빵만 있으면 되잖아요. 그거라도 즐겁게 먹어요. 손해 본 주주들을 비웃으며 먹는 진수성찬처럼 우리 목구멍에 걸리는 일은 없을 거예요. -p.229]
책을 읽다보면 어떤 경우에는 책의 내용보다 나와 내 주변을 생각할 때가 더 많이 있다. 전형적 희극의 성격으로 전개되는 『사기꾼』의 소재가 ‘돈’과 ‘자본주의의 속성’에 관한 것이라서 그런지 몰라도 읽다가 계속 딴 생각을 했다. ‘돈이란 무엇인가?’에서부터 시작해 ‘돈이 중요한 요즘 시대에 어떻게 하면 잘 살 수 있을까?라는 생각까지.…부모에게 서울 소재의 건물을 물려받았지만 주식과 선물로 그것을 탕진하고는 이혼하고 술과 원망만으로 사는 남편의 친한 친구, 부모에게 끊임없이 돈을 받아 생활했지만 부모가 연로하시자 한창 활동하실 때 돈을 더 많이 못 받아낸 것에 대해 후회하는 나의 지인! 딱히 물려받을 것이 없는 딸아이가 앞으로 혼자 힘으로 살아내야 할 세상에 대해서, 그리고 많이 미안한 내 마음도 있었다.
이 책에는 실제로 등장하지는 않지만 계속 메르카데의 동업자인 ‘고도’의 이름이 나온다. 고도의 소식이 끊긴지 8년이 지났지만, 메르카데는 범선에 수많은 보물을 싣고 돌아오는 고도를 기다린다. 고도가 돌아와야 모든 고난이 없어지고 일이 해결된다. 고도는 메르카데 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을 살리는 역할을 한다. ‘고도’는 실제적으로 부를 가져다주는 사람이지만, 일확천금을 노리거나 미래에 희망을 거는 사람들에게 상징 같은 존재이기도 하다. 눈에 보이지 않지만 믿음으로, 언젠가는 자신에게 돌아오리라는 확신으로 사람들은 돈을 투자, 또는 투기한다.
[세상 모든 사람은 고도를 갖고 있어, 가짜 크리스토퍼 콜럼버스를!
-p.70]
사무엘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는 발자크의 『사기꾼』보다 훨씬 뒤에 출간(1952년)되었지만, 이 책을 읽는 내내 베케트의 ‘고도를 기다리며’가 연상되었다. 발자크는 뮈세의 중편소설, 《크루아실(1839)》에서 고도(Godeau)라는 성을 차용했는데(p.262) 우연의 일치인지 몰라도 베케트 희곡의 인물인 ‘고도’의 역할과 너무 비슷하다. 정작 베케트는 발자크의 『사기꾼』을 전혀 몰랐다고 주장했지만 ‘고도’라는 인물의 성격이 너무 닮아 이 단어의 출처가 궁금했었다.
정부는 올해 의대 정원을 2000명 늘리기로 해 의협과 갈등이 심하다. 정부가 이렇게 대책도 없이 많은 인원을 늘리기로 한 결정은 물론 의사가, 특히 지방에서 부족해서이기도 하지만, 성형외과나 피부과 등 특정 과목에 지나치게 지원자가 쏠림으로 인한 해결책을 제시한 것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은 단지 의사의 문제만은 아니다. 수요가 없는 곳에 공급이 있을 리 없다. 자본주의 사회에서 조성된 온갖 불안과 과시욕으로 사람들이 성형외과나 피부과를 많이 찾는 것에 근본 원인이 있는 것이다. 우리가 그곳에 가지 않으면 의사들이 몰리지 않을 것이다. 의사가 되어서도 보통 사람들보다 버는 돈이 그렇게 많지 않으면 학생들은 당연히 공대나 기초 과학 분야에 지원할 것이다.
메르카데는 자신의 부인에게 ‘오늘날 온정은 사라지고 그 자리를 돈이 차지하고, 가족은 없고 개인만 있다고 한다. 사람들은 탐욕으로 단숨에 부자가 되려 하며 투기자와 주주는 똑같은 존재라고 했다. 이기심과 욕심으로 일확천금을 좇는 사람들이 주식 시장에 모이고 그것이 메르카데 자신을 살리고 있다고 말한다.(p.35,39)’ 오늘날도 별반 다르지 않다. 사람들이 성형외과와 피부과에 득달같이 달려가니 의사들이 그곳으로 쏠린다. 노동으로 버는 돈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쉽게 벌기 위해 사람들은 투기를 한다. 거기에 늘 사기꾼은 존재하고 사람들은 그들의 말에 현혹되고 자신의 돈을 던진다.
재테크에 관심 없이 그냥 그럭저럭 게으르게 살아가는 나보다 훨씬 더 많은 돈을 가진 나의 지인들이 한결같이 나에게 하는 말이 있다. “다 빛 좋은 개살구야~~” 빛 좋은 개살구가 뭔지는 잘 모르지만 그들의 말 속에는 자신이 가진 부가 만족스럽지 않다는 뜻이 들어 있는 것 같다. 또한 그들보다 더 잘 사는 사람들의 부에 비해 자신들이 가진 부가 턱없이 부족하다는 의미도 있을 것이다.
고도는 끝내 오지 않는다고 생각하지만, 매주 로또 당첨자는 배출된다. 나에게는 절대 오지 않는 고도가 다른 사람에게는 온다. 처음부터 일확천금을 노리는 자가 있는가하면, 뒤로 넘어져도 코가 깨지는, 항상 운이 나쁜 사람이 인생의 부족함을 메우기 위한 방법으로 일확천금만이 답이 될 수도 있다. 어떤 방법으로 살 것인지, 뭐가 정답인지 모른다. 그저 사기꾼에게 속지만 않기를 바랄뿐이다. 그래서 내 인생이나 당신 인생이 탕진되지 않기를.…
[절대 투기를 없앨 수 없을 거야. 난 이 시대를 잘 알고 있어!…사람들은 미래를 팔아, 불가능한 행운의 꿈을 복권으로 팔듯이. 그러니까 증권 시장 회합에 앉아 있을 수 있게 날 도와주게, 거기서 그 꽉 막힌 속을 뚫어 보세! 이보게, 일확천금을 노리는 사람들은 아주 어렵게 그걸 찾아내, 하지만 노리지 못하면 결코 찾지 못한다네.…
-p.193~194]
지만지 출판사의 책은 여태껏 도서관에서 빌려 읽었다. 도서관에서는 보통 겉표지를 제거한 상태로(흰 색의 속표지) 대여해 준다. 올 봄에 친구가 발자크의 『사기꾼』을 선물해줬다. 처음으로 분홍색 겉표지가 있는 지만지 출판사의 책을 읽었다. 분홍색이 확실히 예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