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마천의 사기 세가(史記世家) 중 진 세가(晉世家)뽕나무 아래의 굶주린 자에 의해 목숨을 구하다에 나온 내용이다. 조순(趙盾)은 양공과 영공(靈公) 때에 정권을 잡았다. 조순이 사냥을 나갔을 때, 뽕나무 아래에 굶주린 사람(시미명)이 있는 것을 보고 밥과 고기를 주었다.

 

사치스럽고 성정이 나쁜 영공은 간언하는 조순을 근심거리로 여겨 조순에게 술을 마시게 하고 병사를 매복시켜 죽이려고 했다. 영공의 주방장이 된 시미명은 조순이 떠나가게 해 화가 미치지 않도록 했다. 병사들은 조순을 죽이려고 맹견을 풀어 놓았는데 시미명이 개를 묶어 죽였다. 병사들이 조순을 뒤쫓아 죽이려고 했지만 시미명이 반격을 가하고 조순은 탈출했다. 조순은 그제야 그를 도와 살려준 사람이 뽕나무 아래에서 굶주리고 있던 시미명이라는 것을 알았다.

 

도망간 조순은 국경을 벗어나기 전에 사촌동생 조천으로 하여금 영공을 시해하게 하고, 영공이 죽자 양공의 동생 성공(成公)을 추대하였다. 조순은 다시 돌아와 국정을 맡게 되었다.

 

 

사기 세가 중 조 세가(趙世家)아이 울음소리에 종족의 존망이 달려 있다에 나온 내용이다. 조순이 죽고 그의 아들 조삭(趙朔)이 뒤를 이었다. 삭은 성공의 누이와 결혼하였다.

 

성공이 죽고 그의 아들 경공(景公)이 왕이 되었다. 경공 3, 대부 도안고(屠岸賈)가 조순이 영공을 시해했다는 이유로 그의 아들 조삭을 주살하려고 했다. 한궐은 반대하고 조삭에게 달아나라고 했지만 조삭은 조씨 가문의 제사를 끊어지게 하지 않기만을 당부하고 죽었다. 도안고는 조삭의 씨족을 모두 죽였다. 임신하고 있었던 조삭의 아내는 그때 아들을 낳았는데 도안고가 아이를 찾아내려고 했다.

 

[조삭의 아내인 공주는 갓난아이를 속바지 가랑이 사이에 넣고는 축원하여 말했다.

조씨 종족이 멸망하려면 네가 큰 소리로 울고, 멸망하지 않으려면 아무 소리 내지 마라.”

{아이를} 찾아내려 했을 때 아이는 결국 소리를 내지 않았다.

-p.477, 사마천 지음, 김원중 옮김, 사기세가, 진세가, 민음사]

 

다행히 울지 않아 아이는 살아났지만 도안고는 포기를 모르고 아이를 찾아 죽이고자 했다. 조삭의 문객 중 공손저구(公孫杵臼)는 조삭의 친구 정영(程嬰)에게 고아를 부탁하고 다른 사람의 아이를 조씨의 고아라 속이고 아이와 함께 죽었다. 정영은 진짜 조씨 고아와 산 속에 숨어 있었다.

 

15년이 지나고 경공이 병이 들어 점을 쳐 보니, 후대가 제사를 제대로 지내지 않아 재앙이 생긴다고 해서 한궐과 의논하여 이름이 무()인 조씨 고아를 데려 온다. 여러 장수들은 정영, 조무와 함께 도안고를 쳐 그 종족을 멸한다. 정영은 스스로 목숨을 끊는다. 조무는 정영을 위해 봄가을에 제사를 지내고 대대손손 끊어지지 않게 했다.

 

(*사기 세가의 내용은 민음사 판 사기세가진세가(p.315~327)’조세가(p.474~481)’에서 발췌, 정리하였습니다.)

 

 

 

중국 원나라 희곡 작가 기군상(紀君祥)의 작품인 조씨 고아는 사기의 진 세가와 조 세가의 내용을 토대로 한 비극 작품이다. 조씨 고아의 주인공은 정영이다. 이야기는 배경을 생략한 채, 도안고가 사이가 좋지 않은 조순을 해치려는 것으로 시작한다. 도안고는 조순의 삼백 명이나 되는 일족을 모두 죽인다. 조순의 아들 조삭은 부마였는데, 임신하고 있는 공주에게 아이의 아명을 조씨 고아라 지어주고 원수를 갚아 달라 유언하고 죽는다. 공주는 떠돌이 의원인 정영에게 조씨 고아를 맡기고 자살한다.

 

조씨 고아는 복수의 이야기이다. 하지만 셰익스피어나 고대 그리스의 대표적 복수 비극인 아이스퀼로스의 오레스테이아 3부작과는 결이 다르다. 동양의 정서가 많이 가미되어 있는 이 희곡에는 자신의 욕망보다는 한 집안의 복수를 위한 씨앗 하나를 살리고자 하는 사람들의 이해할 수 없는 희생이 주를 이룬다. 한 아이를 살리기 위해, 단지 조씨 집안의 복수를 위해 정영을 비롯해 모든 사람이 죽음을 불사하고도 아이를 살리려고 한다.

 

기군상은 사기 세가에 없는 내용을 절절하고도 절묘하게 희곡에 넣는다. 정영은 마흔 다섯이 되어서야 귀한 아들을 보았는데 그 아들을 조씨 고아라 속여 대신 죽게 하고 자신은 20년 동안 조씨 고아를 돌본다.

 

조씨 고아(정발)가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정영은 예전에 억울하게 죽었던 충신과 명장을 한 권의 두루마리에 그려 내 그동안의 일을 정발에게 자세히 알려 준다. 정발은 이러한 사실을 주공에게 알리고 왕은 도안고의 집안 일족 가운에 어린 아이 하나 남기지 말고 다 죽이라고 한다.

 

[정발이 노래한다.

 

<탈포삼(脫布衫)>

저놈(도안고)을 형틀에 목 박아 형장에서 끌어내되,

바로 목을 치고 가슴을 쪼개지는 말라!

저놈을 다지고 다져 한 움큼

고기즙으로 만든다 해도,

내 가슴 가득한 이 울분은

결코 지워 버릴 수 없으리라!

p.112]

 

도대체 복수가 무엇이기에 저렇게 많은 무고한 사람이 죽어야만 하는가? 정영이 무엇을 위해 자신의 아이를 희생하면서까지 조씨고아를 살려야 했는지 이해가 잘 안 된다. 조씨 고아가 장성해 행한 복수는 결국 도안고 일족 전체를 죽이는 것이었다. 조씨 고아 또한 나머지 삶을 사는 내내 그들에게 또다시 복수를 당하지 않을까 걱정해야 하고, 그들에게 남겨진 마지막 씨앗이 있는지를 계속 의심해야 할 것이다. 복수는 복수를 낳고, 그것은 끝이 없다.

 

기군상의 희곡은 셰익스피어나 고대 그리스 비극보다 훨씬 가독성이 좋았고, 많은 것이 생략되고 절제되어 있지만 거기에 들어있는 의미를 잘 이해할 수 있어 좋았다. 설자(楔子)가 있어 계속 내용을 복기시켜 주었고, 고대 그리스 극의 코러스 역할과 비슷한 노래()가 배우의 마음을 표현해 주었다.


국립극단의 대표 레퍼토리 조씨고아의 연출가 고선웅의 연출과 각색은 너무 좋았다. 고선웅 연출가는 기군상의 원대(元代) 희곡 내용 중 현대인이 잘 납득할 수 없는 부분을 거의 완벽에 가까운 수준으로 각색해 관객을 이해시켜 주었다.

 

또한 기군상이 정영의 자식을 등장시켜 사기 세가의 내용을 뛰어 넘는다면, 고선웅은 거기에 더해 정영의 아내를 등장시켜 훨씬 더 절절하고 먹먹하게 기군상을 기절시켜 버린다. 정영이 조씨 고아와 자신의 아들을 바꾸기 위해 집으로 왔을 때, 그의 아내는 정영을 이해하지 못하고 정말 억울해 한다. 그런 마음을 담은 정영의 아내의 절규, 남편에 대한 실망과 원망, 그럼에도 기어이 아이를 데리고 나가 죽임을 당하게 할 때, 모든 관객이 울었다. 내 옆의 남자 분은 정말 많이 울더이다.

 

20년 동안 조씨 고아를 길러내고 도안고에 대한 복수가 마무리 되었을 때, 정영은 이제 아무것도 남은 것이 없구나라고 말한다. 늙어빠진 왕은 조씨고아에게 도안고 일족 모두를 죽여주겠다고 하고, 남은 뿌리조차 없도록 하겠다고 할 때 정영은 허탈하게 왕을 바라본다. 권력과 욕망, 인간의 삶 모두가 부질없고, 인생은 잠깐뿐이라는 사실을 새삼스레 느끼게 해주었다. 지금도 계속되고 있는 끊임없는 전쟁이 생각되는 순간이었다.


이번 연극에서 하성광배우를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드라마 며느라기에서 약간 얄미운 작은 아버지역으로 나온 분이었다. 정영을 연기한 하성광 배우는 연기를 신들린 것처럼 했다. 딱 정영이었다. 그가 아내에게 자신의 아들을 기어코 빼앗아 오는 장면, 자기 아들의 무덤에서 뼛가루(의견이 분분하다)를 칠하는 모습, 조씨 고아에게 두루마리를 펼쳐놓고 그 간의 사연을 얘기하는 연기를 넋을 잃고 보았다. 커튼콜 때 나를 포함한 관객의 기립박수는 그의 연기에 대한 아낌없는 칭찬과 감탄이었다. 심지어 나는 아이돌 가수의 팬처럼 큰 소리로 환호했다.

 

조씨고아마지막 장면에서의 그의 대사가 묵직하게 마음에 남는다.

 

[이 세상은 꼭두각시의 무대

북소리 피리소리에 맞추어 놀다보면

어느새 한 바탕의 짧은 꿈

갑자기 고개를 들어 보니 늙었네

이 이야기를 거울삼아 알아서 잘들 분별하시기를

우환을 만들지도 당하지도 마시고

부디 평화롭기만을

금방이구나 인생은

그저 좋게만 사시다 가시기를]


연극을 보고 나오면서 아리스토텔레스가 시학에서 말한 감정의 카타르시스의 실현이 떠올랐다. 어떤 씻김굿을 하고 나온 기분도 들었다. 사람 사는 것이 늘 거기서 거긴데, 왜 매번 내 마음엔 미움이 싹트고, 분노와 욕망이 생기는지....다 부질없다는 생각을 했다. 지금부터라도 마음에 담고 있는 타인에 대한 미움을 없애고, 용서하고 용서받고, 욕심내지 말고 살기로 결심했다. 대형 크리스마스트리가 설치된 저녁 어스름의 명동은 활기찼다. 나를 포함한 그곳의 모든 사람들에게 평화가 있기를, 지금 전쟁을 하고 있는 세상의 모든 나라가 전쟁을 멈추기를 진심으로 바랐다

복수는 그저 허무한 복수를 낳을 뿐이다.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5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거리의화가 2023-12-14 18:2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고선웅 연출 믿고 본다고^^ 저는 2019년 오페라를 봤었습니다. 조씨고아전 정말 재밌겠어요. 원작과는 다른 각색을 보는 것이 연출의 힘인 것 같습니다!

페넬로페 2023-12-14 18:52   좋아요 1 | URL
고선웅 연출가가 뮤지컬도 연출했군요. 좋았을 것 같아요. 조씨고아는 원작도 괜찮았는데, 연극이 넘 좋았어요.
먹먹하고 재미있고~^
연출과 배우의 연기가 잘 어우러졌더라고요.

Falstaff 2023-12-14 18:4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조씨고아>는 을유세계문학전집 78번으로 나온 <원잡극선>에 나옵지요. 물론 여러가지 판본이 있겠으나 어느 것을 읽어본들 원래 텍스트가 조금 낡았다는 생각을 안 할 수 없을 거 같습니다.
그래도 중국의 현대극이 부러운 건 계속해서 과거 행적을 지양하려고 다양한 모색을 하고 있다는 점입니다.
민음사 <사기세가>는 조심해서 읽으셔요. 역자 김원중이 설마 그랬겠습니까만 의심스러운 곳이 하필이면 중요한 곳에 있더라고요. 교정/교열할 때 잘못한 거겠지요.

페넬로페 2023-12-14 18:58   좋아요 1 | URL
을유판 조씨고아도 있군요. 찾아봤더니 무려 836페이지네요.
번역자가 다르니 한 번 읽어봐야 겠어요.
원작의 내용은 현대인이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많죠. 그냥 그것이 주는 의미가 무언지 생각하고 배워야 될 것 같아요.
제가 사기세가를 읽을 때, 번역가의 진의를 알 만큼의 소양을 갖추지 못했어요 ㅠㅠ
그저 주는대로 받을 수밖에요.
그러니 폴스타프님께 언제나 의탁하고 있습니다.
잘 이끌어 주십시요^^

꼬마요정 2023-12-14 19:12   좋아요 1 | URL
<사기세가> 어떤 부분인가요? 요새 조금씩 읽고 있습니다. 혹시 <사기본기>에는 없나요? 좀 반항심이 드는 부분이 있긴 했거든요...

Falstaff 2023-12-15 05:51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 님: 을유판 읽으실 필요가 있을까 싶습니다. 836페이지에 달하는 원나라 시대 곡曲 대본입니다. 원곡이 베이징 오페라라고 하는 북경 경극의 원류라고 하지만 천년 전의 뻔한 스토리라서 읽어보시라고 권하기도 쉽지 않습니다. 도서관에서 보신다면 좋을 듯합니다.
꼬마요정 님: 민음사에서 한문을 배우지 않은 세대, 중국사를 전공하지 않은 사람들이 교정, 교열에 참여한 거 같습니다. 나라 이름이 비슷비슷한데요, 진나라 만 해도 천하를 통일하는 秦만 있는 게 아니라 晉도 있고 陳도 있고 그런데요 이걸 헷갈리는 경우도 있습니다. 말을 했더니 인정은 하는데 그렇다고 수정을 하지는 않더군요.

꼬마요정 2023-12-15 12:42   좋아요 2 | URL
폴스타프 님 고맙습니다^^ 전 가끔 동북공정 때문에 화가 나서요ㅠㅠ 다행히 진 나라들이군요. 근데 솔직히 너무 헷갈립니다. <본기> 읽을 때도 진 나라 표기 잘못된 거 있었어요.

꼬마요정 2023-12-14 19:1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조씨 고아> 연극 보고 싶었는데, 결국 못 봤어요. 전 처음에 기군상의 희곡과 역사가 일치하는 줄 알고 기겁했답니다. 진짜 정영이 자기 아들 바꿔치기 한 줄 알고... 조씨 고아가 진짜 말 그대로 조씨의 고아란 뜻인 것도 한참 있다 알았죠... 중국은 나라도 크고 사람들도 많아서 이야기들도 참 많습니다. 자기들 것이 좋은 건데 그들은 잘 모르는 것 같기도 하구요.

마지막 대사 좋네요... 제발 전쟁이 모두 끝나기를...ㅠㅠ

페넬로페 2023-12-14 19:42   좋아요 1 | URL
조씨고아의 의미가 넘 직접적이죠? ㅎㅎ
기군상의 원작을 읽을 때, 사실 조씨고아가 바로 복수를 감행한다는 게 이해가 잘 되지 않더라고요. 근데 한편으로 그 시대에는 또 그럴 수 있지 않나 생각도 들더라고요.
연극이 주는 의미가 좋더라고요.
마지막 대사도 좋고요.

그레이스 2023-12-14 22:0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기 읽었던 기억이 이제는 가물가물하네요^^

페넬로페 2023-12-14 22:43   좋아요 1 | URL
아마 거의~~

호시우행 2023-12-14 23:58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구사일생으로 한 생명을 구출한 의미가 처절한 복수로 이어진다는 게 정말 참으로 허망하네요.ㅠㅠ

페넬로페 2023-12-15 00:16   좋아요 0 | URL
네, 그것이 이 희곡이 전하는 의미인 것 같습니다.
부질 없고, 허망하고요^^

희선 2023-12-15 02: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한사람도 아니고 한 집안에 하는 복수라니... 그렇게 사람을 다 죽이면 뭐가 좋을까 싶은 생각이 들기도 합니다 복수는 복수를 낳을 뿐이죠 그런 걸 보여주고 그걸 보는 사람은 복수할지 말지 생각하라는 걸지도 모르겠네요


희선

페넬로페 2023-12-15 10:10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그게 맞는데 사람 사는 것이 그렇지 않나봐요.ㅠㅠ
그때나, 지금이나요^^

새파랑 2023-12-15 07:3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첨들어본 작품인데 연극으로도 있고 유명한가 보군요~! 조씨 고아라라고 해서 성이 조씨인 고아에 대한 이야기? 인가 생각했습니다 ㅋㅋ 동양의 특성이 가미된 비극적 이야기라니 이건 재미가 없을수가 없겠네요 ^^

페넬로페 2023-12-15 10:11   좋아요 2 | URL
저도 처음 들어보는 작품이었어요.
연극 보러 가기 위해 책을 읽었는데 사연이 절절했고 먹먹했어요.
서양의 비극과 약간 달랐어요^^

cyrus 2023-12-15 10:1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이 공연 보고 싶은데 일정과 시간이 맞지 않네요. 서울에는 보고 싶은 공연이 너무 많아요.. ^^;;

페넬로페 2023-12-15 10:26   좋아요 1 | URL
공연 보려면 시간 맞추고 일정 조절하기가 쉽지 않죠.
또 예매하기도 어렵고요.
기회 되시면 보시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