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NOON 세트 - 전10권 열린책들 창립 35주년 기념 세계문학 중단편 세트
앙투안 드 생텍쥐페리 외 지음, 황현산 외 옮김 / 열린책들 / 2021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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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스또예프스끼, <백야> ; 이별의 정석


도스토예프스키(열린책들에 의하면 '도스또예프스끼'!) 탄생 200주년이라는데, 한 권은 읽어줘야지 싶어 전집 중 <백야>를 선택했다. 도스또선생의 책 중 내가 읽은 거라곤 <죄와 벌>이 전부다. 중학생 때 모종의 허영심의 발로 때문이었는지 뭔지 읽었는데 엄마에게 마구 하소연하며 - "혼자서 두 페이지 세 페이지씩 떠든다니까 글쎄" - 토할 것 같은 기분으로 꾸역꾸역 완독했던 기억이 나고, 서른 즈음에 다시 읽었을 때는 좀 힘들긴 했으나 꽤 재미있었다. 

<백야>는 도스또선생의 초창기 작품으로 뒤의 작품들에서 찾아보기 힘든 낭만성이 있어 주목 받는다고 해설에 적혀 있다. 말이 많은 건 비슷하지만 <죄와 벌>에 비하면 그야말로 가볍게 읽을 수 있는 즐거운 작품이었다. 


화자인 '나'는 몽상가이다. 그는 혼자 살며 사람과 교류하기보다는 사람을 관찰하고, 한번도 진짜 상대를 사랑한 적 없으나 몽상 속에서는 그 속의 상대를 지극히 사랑한다. 


그의 눈앞에 그토록 매혹적으로, 그토록 변덕스럽게, 그토록 광대무변하게 펼쳐지는 마술 같은 환영들을 보십시오. 그 마술 같은 생생한 화폭에서 전경을 차지하는 중심 인물은 물론 그 자신, 우리의 몽상가, 그 자신의 고귀한 존재입니다. 보세요, 얼마나 다양한 사건들이 펼쳐지는지, 환희에 찬 몽상의 대열이 얼마나 끝없이 이어지는지. 당신은 어쩜 이렇게 물을지도 모릅니다, 당신은 무엇에 관한 꿈을 꾸느냐고. 그러나 그걸 물을 필요가 어디 있겠습니까! 모든 것에 관해 꿈을 꾸는데......   - 47쪽 


어느 날 밤, 길거리를 배회하던 나는 울고 있는 여성을 발견한다. 우연히 불한당으로부터 그녀를 구해주게 된 나는 그녀가 울고 있던 사연을 듣게 되는데... 

나스쩬까, 눈 먼 할머니로부터 달아날 수 없는 슬픈 운명을 가진 소녀, 그녀는 할머니와 함께 사는 집에 하숙한 젊은 남자와 사랑에 빠진다.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 채 괴로워하던 그녀는 남자가 모스크바로 떠나기 전날 고백한다. 남자도 나스쩬까를 사랑하고 있었으나 형편이 어려우므로, 1년 뒤 꼭 돌아오겠다고 약속한다. 그러나 1년이 지난 지금, 남자는 이곳 뻬쩨르부르그로 돌아왔음에도 그녀를 찾아오지 않고 있는 것이다...

사연을 들은 나는 그녀를 도와주기로 약속한다. 마음대로 외출할 수 없는 그녀를 대신해 편지를 전달해주기로 한 것. 그러나 그 뒤에도 이틀 밤이나 남자는 나타나지 않고, 결국 나는 그녀에게 사랑을 고백한다. 나스쩬까는 당황하지만 서둘러 나의 사랑을 받아들이는데, 그 순간 운명적으로..!! 남자가 찾아온다. 나스쩬까는 그에게 달려간다. 


'백야'는 낮에도 밤처럼 꿈을 꾸던 남자의, 낮처럼 환하게 빛났던 세 번의 밤을 보여 준다. 진짜 현실의 여성과 마음을 나눈 환한 밤(백야)은 지나가고 이제는 밤은 다시 어둡고 낮도 예전같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나스쩬까로부터 그와 결혼하게 되었다는 편지를 받은 '나'의 마음을 들어보자. 


그러나 나스쩬까, 너는 내가 모욕의 응어리를 쌓아 두리라 생각하는가! 내가  너의 화사하고 평화스러운 행복에 어두운 구름을 드리우게 할 것 같은가, 너를 신랄하게 비난하여 너의 심장에 우수의 칼을 꽂을 것 같은가, 너의 가슴이 비밀스러운 가책으로 고통받고 행복의 순간에도 우울하게 고동치도록 만들 것 같은가, 네가 사랑하는 이와 함께 제대를 향해 걸어갈 때 너의 검은 고수머리에 꽂힌 저 부드러운 꽃 중에서 단 한 송이라도 나로 인해 구겨져 버리게 할 것 같은가...... 아, 천만에, 천만에! 너의 하늘이 청명하기를, 너의 사랑스러운 미소가 밝고 평화롭기를, 행복과 기쁨의 순간에 축복이 너와 함께하기를! 너는 감사하는 마음으로 가득 찬 어느 외로운 가슴에 행복과 기쁨을 주었으니까.   - 115쪽  


고작 사흘 밤의 인연이기는 했지만, 그야말로 차인 사람이 가져야 할 미덕이라 하겠다. '안전이별'이라는 말까지 생길 만큼 이별 후 각종 스토킹 행위에 시달리는 많은 여성들이 있으니. 제발 이 책 읽고 개과천선 합시다. 떠나는 사람은 곱게 보내 줍시다... 

아름다운 밤이었다. 우리가 젊을 때에만 만날 수 있는 그런 밤이었다. - P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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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21 23:1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전 백야 읽고 주인공의 마음에 공감이 가서 좋았어요 ㅋ 뒷끝없는 도선생님? 적당한 길이에 백야처럼 낭만적인 마무리 ㅎㅎ

독서괭 2021-11-21 23:32   좋아요 3 | URL
정말 뒤끝없어 좋더라구요. 겸허하고 너그러운 마음… 도선생 바람직하다..!!

mini74 2021-11-21 23:2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전 하루키 책 읽고 무턱대고 카리마조프가의 형제들을 겁도 없이 읽었지요 ㅎㅎ죄와벌보다 낫다니 저도 한 번 읽어볼까 하는 맘이 드네요 *^^*

독서괭 2021-11-21 23:33   좋아요 4 | URL
와~ 전 카라마조프 본가에 있긴 한데 분량이 겁나서 손을 못대겠어요^^; 죄와벌보다.. 분량면에서 확실히 낫지요 ㅎㅎㅎ 짧습니다.

scott 2021-11-22 16:23   좋아요 1 | URL
역쉬 하루키옹의 추천으로!
불후의 명작 완독을 !!👍

페넬로페 2021-11-22 01:28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올해가 가기전에 ‘백야‘ 읽을 예정입니다.
나와 그 남자^^
어서 읽어야겠어요~~

독서괭 2021-11-22 13:10   좋아요 2 | URL
올해 도스또 한권은 읽어야지~ 하는 분들, 올해가 얼마 안 남았으니 <백야>를 추천드립니다. ㅋㅋ

2021-11-22 12:3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2 13:1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22 13: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scott 2021-11-22 16:22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 어제 밤에 댓글을 분명 달았는뎅 ㅠ.ㅠ

괭님 도끼옹 중편작 중에 <백야> 좋아합니다!!

흑백 영화도 추천 합니다!ㅎㅎ
도끼옹 200주년 백치 완독! 괭님 추카~추카~

독서괭 2021-11-22 23:12   좋아요 1 | URL
앗 그러셨어요? 댓글이 어디 갔을까요 ㅜㅜ
영화도 있군요! 몰랐어요. 이 짧은 글을 영화로 어찌 만들었을지 궁금하네요.
백치는 내년에 읽어볼까봐요~ㅎㅎ
 

다락방님은 이때부터 현빈에 진심이셨던 것이다.. ㅎㅎㅎ
<독서공감, 사람을 읽다> 중 “우아한 연인” 꼭지를 읽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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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파랑 2021-11-18 18:34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진심 다락방님이죠 ㅋ 독서괭님 이책 시작하셨군요~!!

독서괭 2021-11-19 10:48   좋아요 1 | URL
저번 페이퍼에 쓴 <독서공감> 중 읽은 책에 관한 꼭지 먼저 읽었고, 이번에 <우아한 연인> 읽었기 땜에 그부분만 찾아 읽었어요^^

다락방 2021-11-18 18: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와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부끄럽기 짝이 없네요. 이게 뭔일이래요? 😱

독서괭 2021-11-19 10:49   좋아요 1 | URL
<우아한 연인> 읽고 이 꼭지 찾아 읽다가 마지막 현빈에서 막 웃었어요 ㅎㅎㅎ

수이 2021-11-18 19: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귀여워요. 역시 저때부터 현빈이었군요.

독서괭 2021-11-19 10:49   좋아요 0 | URL
ㅋㅋㅋ 현빈 찐팬 인증. 다락방님은 정말 귀여우십니다.

단발머리 2021-11-18 20:1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나도 거의 저 때부터 …..
현빈이었어요 🤭🤭🤭
다락방님, 찌찌뽕!!!

독서괭 2021-11-19 11:01   좋아요 0 | URL
오 단발님도~~ 저는 현빈이 <그들이 사는 세상>에 나왔을 때가 젤 좋았어요. 그 뒤에 너무 살이 빠졌.. ㅠㅠ

얄라알라 2021-11-18 20:2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 다락방님, 전 나름 다락방님 팬이라 생각했는데 이게 뭐랍니까? 저 북플 헛 클릭질하고 다닌 건가요? 독서괭님 덕분에 다락방님께서 이미 8년전에 내신 책을 이제서야 알다니요!!!!

독서괭 2021-11-19 11:02   좋아요 1 | URL
북사랑님, 팬으로서 좀더 분발하셔야겠습니다 ㅎㅎㅎㅎ 얼마전 새파랑님이 이 책에 쓰신 리뷰 읽어보시고 구매를 추천합니다~^^

그렇게혜윰 2021-11-19 07: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쉽게 변하지 않는다는 걸 새삼 알게되네요 ㅋㅋㅋㅋㅋ

독서괭 2021-11-19 11:03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이 일관성이 있으신 것 같아요. 현빈 이후 그를 뛰어넘을 자가 여태 없다는 것이 슬픈 포인트가 될 수 있다는 생각도 들지만요 ㅋㅋ

건수하 2021-11-19 09: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여전히 현빈을 좋아하시는건가요? ㅎㅎ

다락방 2021-11-19 10:02   좋아요 1 | URL
아... 아니... 뭐... 딱히 그렇다기 보다는.... 그러니까.........그게 아니고........

=3=3=3=3=3=3=3=3=3=3=3=3=3=3=3=3=3=3

독서괭 2021-11-19 11:03   좋아요 0 | URL
수하님, 찾아보시면 다락방님 얼마전 페이퍼에도 현빈이 등장한답니다 ㅋㅋ
 
같이 산 지 십 년 - 레즈비언 부부, 커밍아웃에서 결혼까지
천쉐 지음, 채안나 옮김 / 글항아리 / 202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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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혼한지 10년만에 법적으로 인정받게 된 타이완의 동성커플. 소소하고 일상적인 글들 속에서 정성을 들여 가꾸고 지켜온 단단한 사랑이 느껴진다. 한국의 동성커플에게는 위로와 희망을 줄 수 있겠고, 그 외 커플에게도 사랑을 돌이켜 볼 수 있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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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11-16 19:46   좋아요 6 | 댓글달기 | URL
독서괭님 100자평 읽고, 올해 읽었던 게다가 북토크까지 열심히 보았던 동성커플 결혼 과정을 그린 책 제목이 까맣게 떠오르지 않아 당황중입니다^^;;;
10년만에 인정받기까지 우여곡절과 애틋한 10년을 읽을 수 있겠네요

독서괭 2021-11-17 11:48   좋아요 1 | URL
엇 무슨 책일까요?? 저도 궁금하네요. 생각나면 알려주세요 ㅎㅎ
저도 십년동안의 투쟁과정을 그린 내용일 줄 알았는데, 물론 그런 내용도 나오지만 소소한 일상 이야기가 더 많습니다. 동성혼이라고 이성혼 커플과 다르지 않음을 조용하게 보여주는 것 같아요.

새파랑 2021-11-16 20:00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역시 퀴어문학 전문가 독서괭님 이시군요~!! 대만까지~!! 아 고독의 우물 읽어야 되는데 😅

독서괭 2021-11-17 11:50   좋아요 1 | URL
퀴어문학 전문가라기에는 너무나 부족해서 부끄럽습니다^^;; <자기만의 방> 각주에도 래드클리프 홀이 나오던데, 자기만의 방 재독하시고 <고독의 우물> 읽어보심이 어떨까요!
 
[전자책] 광기와 우연의 역사
슈테판 츠바이크 지음, 안인희 옮김 / 커뮤니케이션북스 / 2019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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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사 하이라이트 모음집! 기대보다 더 재미있었다. 오지혜배우님 낭독이 너무 좋아서 박수👏 희곡 나오는 부분 연기가 넘 훌륭해서 또 박수👏👏 최근 완역판이 새로 나왔던데 살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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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1-11-15 18: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낭독으로 듣는 광기와 우연의 역사라니 궁금하네요. 오지혜배우님 목소리 좋으시던데 *^^*

독서괭 2021-11-16 01:36   좋아요 1 | URL
목소리, 어투, 발음, 표현 뭐 하나 빠질 것 없이 좋더라구요!!^^

페넬로페 2021-11-15 18:56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저 이 책 집에 있는데 빨리 읽어야겠어요^^
이상하게 오디오북은 저랑 잘 안 맞더라고요**

독서괭 2021-11-16 01:37   좋아요 2 | URL
ㅎㅎ 오디오북은 운전할 때 듣는데 아무래도 약간 흘려듣는 부분도 생깁니다 ㅠ 어서 읽어보셔요^^

초딩 2021-11-15 19:43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정말 저 지금 두 번째 듣고 있는데
낭독 넘 넘 좋아요~ ㅎㅎㅎ

독서괭 2021-11-16 01:39   좋아요 1 | URL
초딩님이 왜 종이책까지 사셨는지 알겠더라구요~ 어제의 세계도 들어볼까 합니다^^

새파랑 2021-11-15 20:17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츠바이크 책 읽고 싶은데 이게 오디오북으로도 있군요ㅋ 독서괭님 완역판 사시고 평이 좋으면 사아겠어요 ^^

독서괭 2021-11-16 01:40   좋아요 2 | URL
앗 완역판 사도 제가 금방 읽을 것 같진 않습니다 쿨럭;; 저도 츠바이크 워낙 유명해서 한번쯤 읽고 싶었는데 요걸로 입문!!

잠자냥 2021-11-16 00: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아니 이게 오디오북?! 신기해요. ㅎㅎ 전 예전에 그냥 책으로 읽었을 땐 별 감흥이 없었는데, 오디오북으로 들으면 다른 느낌이겠죠?! 오잉

독서괭 2021-11-16 01:42   좋아요 2 | URL
역시 안 읽은 책 없는 자냥님 ㅎㅎ 전 요즘 잘 모르던 세계사에 관심이 생겨서 굉장히 재밌었어요. 낭독이 특히 훌륭하기도 하구요^^

건수하 2021-11-16 11:3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오, 예전에 사두고 안 읽었는데... 완역판이 새로 나왔나요 ㅋㅋㅋ
낭독은 어디서 듣는 거예요? +_+

독서괭 2021-11-16 18:02   좋아요 0 | URL
ㅎㅎ 안 읽다 구간되어버린 책이 수두룩 ㅠㅠ 제가 올린 이 책이 오디오북입니다. 한번 샘플 들어보셔요~^^

페크pek0501 2021-11-16 12: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거 오디오북으로 살까 말까 했어요.
아무래도 종이책은 꼭 사야 할 것 같아서 고민 중입니다.
낭독, 좋은 정보 받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독서괭 2021-11-16 18:03   좋아요 0 | URL
오디오북이 생각보다 더 좋았어요. 오지혜님 목소리가 명품이네요. 페크님도 종이책이든 오디오북이든 읽기 응원합니다~^*
 



이유경작가님의 이 글, '오지라퍼'라도 괜찮아-는 세상에 오지라퍼가 얼마나 필요한지 저자 자신의 경험을 통해 알려준다. 사실 이 글에 나온 에피소드는 결과적으로는 꼭 필요하지 않은 오지랖이었던 것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그게 꼭 그렇지만은 않다고 생각한다.

에피소드를 요약하면 이렇다(지금 책이 다른 데 있어서 기억에 의존).

네 살가량 여자아이가 보호자 없이 혼자 있다는 걸 깨달음 -> 불안하지만 오지랖이다 여기고 그냥 감 -> 그 아이와 닮았는데 좀더 큰 여자아이가 울면서 "동생 찾아올게!" 외치는 말을 들음 -> 으악 길 잃은 거잖아! 싶어 큰아이를 따라감 -> 동생을 찾았길래 한마디 해주고 싶어서 "동생 잃어버려서 많이 놀랐지?" 했는데 큰아이가 "그게 아니라, 오빠한테 사과하러 가야하는데 동생도 데리고 가야해서요. 친오빠는 아니고요."라고 함 -> 아니 대체 친오빠 아닌 그 오빠한테 왜 사과하러 가는거지?? 의문에 휩싸인 채 아이들을 보호해야 한다는 생각에 따라감 -> 놀이터에서 만난 그 오빠들은 별로 무시무시하지 않았고.. 동생이 먼저 욕해서 사과를 요구하던 중이었다 -> 당황하던 와중 아이들 엄마가 나타나 사건 종결 


작가님이 없었더라도 사건은 그대로 흘러갔을 테고 엄마가 마무리를 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아이들은, 그래도 우리가 위험한 줄 알고 따라와준 어떤 어른이 있었다고 기억하지 않을까? 나는 엄마의 입장에서 그 마음이 너무나 고마웠을 것 같다. 만에 하나라도 정말 위험이 닥쳤다면, 어른 한명의 관심은 아이들의 생명을 구했을 수도 있는 것이다. 


















지금 읽고 있는 <당신의 손길이 닿기 전에>(원제: Before We Were Yours)는 가슴 아픈 실화를 담고 있다. 1920년대부터 1950년까지 '조지아 탠'이라는 미국 여성은 미국 테니시주 멤피스에 테네시 보육원을 설립하여 운영하면서, 아이들을 보육하다가 입양을 원하는 가정에 보냈다. 하지만 실상은 아동매매였다. 그녀는 빈곤층 부부 등을 상대로 서류 내용을 속여서 서명하게 하거나 협박을 하는 등의 방법으로 아이들을 빼앗아 갔다. 조지아 탠은 정치인 등 유명인들과 가까웠고, 심지어 멤피스 가정법원의 카밀레 켈리 판사는 이혼 가정 엄마의 친권을 금지하면서 아이들을 탠의 시설로 보내는 방법으로 이 범죄행위에 가담했다. 그러나 조지아 탠은 합당한 처벌을 받기도 전에 암으로 사망했고 영향력 있는 사람들이 사건 종결을 원했기 때문에 그대로 종료됐다. 


관련 블로그 글 참조: https://kingshandle.tistory.com/547


소설은 1939년과 현재(아마도 2016년 내지 2017년?)를 오간다. 1939년 강가에서 살던 일가족은 끔찍한 위기에 처한다. 엄마가 출산 중 위험한 상황에 처하자 아빠는 다섯아이를 집에 두고 엄마를 병원으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부모가 떠난 집에 경찰로 보이는 사람이 들이닥쳐 다섯아이를 데리고 간다. 아이들은 엄마아빠를 보러 병원으로 가는 거라고 믿지만, 도착한 곳은 테네시 보육원. 순식간에 그들은 고아가 되어버렸고, 영문을 모른 채 보육원에서 힘겨운 생활을 이어나간다. 당시 열두살이었던 릴의 시점에서 그려지는 이 보육원 이야기가 너무 힘들어서, 소설이 정말 재미있음에도 자꾸 중단하게 된다. 릴은 동생을 하나둘 빼앗긴다. 보육원에는 아이들을 성폭행하는 악마도 살고 있다... 

그 와중에 보육원에 새로 일하러 온 젊은 여성이 릴의 이야기를 듣고 밖에서 릴의 부모를 찾아내 연락한다. 실낱같은 희망. 이미 동생 셋을 잃은 릴은 남은 동생 한명을 데리고 가기 위해 탈출의 기회를 미룬다... 아아ㅏ아.. 미뤄버린 탈출의 기회는 이제 다시 오지 않아 ㅠㅠ 슬픈 예감은 틀리질 않네 ㅠㅠㅠ 이 대목에서 또 힘들어서 중단. 


그러나 그 젊은 여성의 오지랖은 얼마나 큰 일을 했는가. 제 코가 석자인 상황에서 눈감고 귀 막고 그저 돈 받고 일하면 된다고 생각할 수도 있었을텐데. 그녀는 그러지 않았다. 운이 좋았다면, 아니면 조금만 이기적이었다면, 조금만 동생을 덜 사랑했다면, 그녀로 인해 릴은 부모의 품으로 돌아갈 수 있었을 것이다. 

오지랖. 아이들에게 어른들의 오지랖은 얼마나 중요한가..   



  나는 ‘남의 집 애‘라는 말이 좋았다. 그러면 나는 ‘남의 집엄마‘ ‘남의 집 아빠‘ ‘남의 집 이모 삼촌‘이 될 수 있지 않을까? 가까이에서 보고 배우고 좋아하고 샘내고 안심하고 걱정하면서 ‘남의 집 애’를 같이 키울 수 있을 것이다. 언젠가는 어떤 어린이의 ‘남의 집 할머니‘도 될 수 있다. 어린이의 초콜릿을 지퍼백에 넣어 주고, 어머니에게 어깨를 빌려 드리면서 나도 한몫을 할 수 있다. 양육자가 아니어도 ‘남의 집어른‘은 얼마든지 될 수 있다.

엄마가 된 친구와 나는 각자의 속도와 방향으로 살아간다. 부모가 된다는 것의 진정한 의미를 나는 끝까지 제대로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친구 역시 아이 없이 나이 들어가는나의 삶을 그저 짐작만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렇지만 이제는 우리 자리가 떨어져 있다는 것이 예전처럼 서운하지 않다.
언제든지 손 내밀 수 있는 자리에, 잘 보이는 곳에 내가 가있겠다고 생각한다. 여전히 내가 어른이 되지 못했다고 생각하는 친구가 있다 해도 상관없다. 어른은 그런 데 신경 쓰지 않는 법이다.       - <어린이라는 세계>, 181쪽



<어린이라는 세계>, 이 책이 특별히 좋았던 이유는 엄마로서가 아니라, 가족으로서가 아니라, 그냥 '남의 집 어른'으로서도 '다른 집 어린이'를 따스하게 바라볼 수 있다는 걸 보여주기 때문이었다. 어린이들에 대한 책임을 양육자(특히 주 양육자, 대부분 엄마)에게만 돌리고, 무슨 일이 생길 때마다 양육자를 비난하고, "코로나로 인해 돌밥, 힘들다"는 호소에 "지 자식 밥 차려주는 것도 힘들다고 난리냐 ㅉㅉㅉ"하는 댓글을 다는 사람들만 존재하는 게 아니라고. 이 세상에는 자기 자식이, 자기 조카가 아니라도 어린이들의 현재와 미래를 걱정해주는 어른들이, 오지랖이라고 한소리 들을 각오를 하고라도 손 내밀 준비가 되어있는 어른들이 있다고. 


그러고보니 나도 몇달 전 오지랖을 부려본 일이 있다. 

퇴근길에 늘 지나가는 빌라단지 옆 골목에서, 아이 둘이 있다가 한 명이 썡 빌라로 달려가고 한 명이 남아 울고 있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 말까 한참 고민하다 결국 가서 물어보니, 다리를 다쳐서 못 걷겠다고 했다. 곧 돌아온 다른 한 명이 형이라고 했다. 집에 갔다 왔는데 엄마가 못 나오니 둘이 알아서 오라고 했다고. 다친 동생쪽이 덩치가 더 컸고, "아줌마가 업어줄까?"했다가 거절당해서, 형인 아이와 내가 양쪽에서 부축해서 집까지 데려다줬다. 가면서 여러 생각이 들었다. 아이가 다쳐서 못 걷는데 집에서 나올 수 없는 엄마는 어떤 상황인 걸까. 아직 어린 동생이 또 있는 걸까, 치매 증상이 있는 노인이 있는 걸까, 본인이 몸이 불편한가.. 아무튼 집 앞에 무사히 갔고 형은 깍듯하게 내게 인사를 했다. 

퇴근길 그 빌라단지를 지날 때마다 그 아이들 생각이 난다. 다리는 잘 치료했겠지, 잘 지내고 있겠지. 아이들도 나를 떠올리기도 할까? 가끔은 나를 떠올리며 "그때 지나가던 어떤 아주머니가 우리를 도와줬지.", 그렇게 어른에 대한 믿음을 지탱해 줄 하나의 근거가 될 수 있다면 참 좋겠다.   


세상의 오지라퍼들이여! "잘 살고 있는 비혼자들에게 '언제 결혼하냐'고 묻는 명절 친척들"의 모습으로 '오지라퍼'의 의미를 축소시키지 말자. 세상을, 아이들을 구하는 것은 오지라퍼다. 출동, 오지라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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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1-11-15 14:44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유경 작가님도 독서괭님도 너무 멋지세요!
아이들에게 도움을 주려고 하는 마음이 막 반짝반짝 빛나네요!!
오지라퍼가 세상을 구원하리니!!!!

독서괭 2021-11-15 15:42   좋아요 1 | URL
사실 저는 아이들을 좋아하지 않았습니다..(갑자기 고백) 애를 낳고나니 다른 애들도 예쁘게 보이더라구요. 나이들면서 친구의 아이, 동생의 아이 등 가까운 아이들이 생기다 보면 점점 모르는 아이들도 눈에 들어오게 되는 것 같아요. 오지라퍼 화이팅!!

mini74 2021-11-15 15:1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이들을 온 동네가 키우던 때가 있었죠. 독서괭님 착한 오지라퍼! 👍 맘이 넘 예쁘세요 ~ 예전엔 동네아줌마들 할머니들 이해가 안됐는데 아이를 키우면서 아이들 관련해선 저도 오지랖을 떨게 되더라고요 ㅎㅎ 이제 그때 어른들이 이해가 됩니다 *^^*

독서괭 2021-11-15 15:44   좋아요 1 | URL
지금도 동네 분위기에 따라 많이 다르더라구요. 예전에 소규모 단지에 살 때는 서로 인사하고 아이들 데리고 같이 놀고 그랬는데 대단지로 이사오고 난 후에는 좀 냉담한 분위기라 아쉬울 때가 있어요. 저도 이제 예전 어른들이 이해가 되면서, 과거 쌩했던 자신을 반성하곤 합니다^^;;

다락방 2021-11-15 15:3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당신의 손길이 닿기 전에] 독서괭 님의 글만으로도 너무 아파서 저는 읽을 생각을 못하겠네요. 아니, 저걸 어떻게 읽으셨어요 ㅠㅠ 진짜 애들한테 나쁜 행동 하는 사람들 너무 싫어요 진짜 싫어요. 아 저 소설 책 내용 너무 싫으네요 ㅠㅠ

독서괭 2021-11-15 15:45   좋아요 1 | URL
아 저도 이거 쓰면서 다락방님이 절대 못 읽겠다고 하시겠다 싶었어요. 묘사를 자극적으로 한 것도 아닌데 왜 이렇게 읽으며 힘든지 모르겠어요. 실화라 그런가.. 저도 이럴줄 모르고 잡은 거라..ㅠㅠ 근데 중도에 그만두면 더 찜찜할 것 같아 끝까지 가보기로 했습니다.. 으...

잠자냥 2021-11-15 16:36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오오오, 이런 책들을 이렇게 연결지어 쓰신 글 참으로 멋집니다요.
그나저나 정말 아이들에게는 다정한 오지라퍼가 꼭 필요하죠. 다부장님 같은. ㅎㅎ

독서괭 2021-11-15 17:08   좋아요 2 | URL
앗 저도 이유경님 글 읽으며 다부장님을 떠올렸는데 이런 우연이..! 찌찌뽕!ㅋㅋㅋ

다락방 2021-11-15 17:11   좋아요 2 | URL
다부장님 만세만세 만만세!!

=3=3=3=3=3=3=3=3=3=3=3=3=3

독서괭 2021-11-15 17:19   좋아요 2 | URL
다부장님 자아분열의 현장 ㅋㅋㅋ

2021-11-15 18:06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1-11-16 01:43   URL
비밀 댓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