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세트 - 전3권
표도르 도스토옙스키 지음, 이대우 옮김 / 열린책들 / 2025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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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여섯에 어머니를 잃고, 열여덟에 아버지가 살해당하며, 스물넷에 첫 소설이 성공하고, 스물여섯에 첫 간질발작, 스물여덟에 사형선고를 받았다가 사형집행 직전에 황제 특사로 형 집행이 중단되어 그후 4년동안 수용소 생활… 그 뒤에도 끊임없이 글을 써서 계속 출판되지만 도벽으로 늘 가난하고 불안정한 삶을 살았던 사람… 바로 도스토예프스키다. 뭐 이렇게 파란만장한가. 도스토예프스키(너무 기니 도스토라고 하겠다)의 작품을 많이 읽지 않았지만 그 많은 장편들을 보며 대체 어떻게 이렇게 많이 썼나 신기했는데, 그냥 천생이 작가였던 것 같다. 연보에 녹여낸 정도의 정보만 봐도, 여러 사건들(특히 범죄)을 유심히 보아 작품에 썼고, 사람에 대한 관심도 특별했던 듯 하다. 거지 아이를 만나 계속 대화를 나눴다는 에피소드도 있다.
출판업자와 계약을 맺고 이행을 못하면 모든 작품에 대한 저작권을 갖는다는 조항을 넣었는데, 결국 3천 루블에 모든 작품의 저작권을 팔아버렸다는 44세의 에피소드를 읽고 풉 하고 뿜었던 이유는, ‘3천 루블’이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에서 계속 반복되기 때문이다.

천하의 쓰레기로 묘사되는 카라마조프 씨에게는 세 아들이 있었으니, 드미뜨리(미쨔), 이반, 알료샤다. 세 아들은 거의 방치되었는데 특히나 드미뜨리의 경우 어머니의 재산을 가로챈 아버지에게 계속 돈을 요구하여 얼마간의 돈을 받아냈으나 자신의 방탕한 생활로 인해 계속 돈이 부족하자 아버지에게 다시 돈을 요구하기 위해 고향을 찾는다. 이반은 둘 사이를 중재한다는 명목으로 고향에 온다. 아버지와 함께 살던 알료샤까지, 이들 가족은 오랜만에 한자리에 모인다.

(이하 스포일러 주의)

주된 줄거리는 아름다운 그루셴까를 둘러싼 아버지와 아들 드미뜨리 사이의 치정 사건이다. 돈 때문에 아버지에게 그루셴까를 빼앗길까봐 전전긍긍하는 드미뜨리와 이를 이용하는 하인 스메르쟈꼬프, 방관하는 이반으로 인해 절묘하게 참극은 벌어진다. 마지막 하권의 대부분은 친부 살해의 죄목으로 소환된 드미뜨리에 대한 법정 장면이 차지한다. 앞서 대심문관을 포함한 여러가지 이야기로 정신이 혼미하여 놓친 디테일이 법정장면에서 언급되면 엥 하고 앞으로 가서 다시 보게 되는, 추리소설이나 스릴러소설 적인 측면도 있다. 특히 문제가 되는 쟁점은 3천루블, 아버지가 그루셴까가 오면 주려고 봉투에 넣어놨다는 돈, 검사는 드미뜨리가 아버지에게서 강탈하여 그루셴까를 찾으러 간 도시에서 탕진했다고 주장하고, 변호사는 애초에 존재했다는 증거가 부족하다고 주장하는 그 돈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치정사건 법정드라마일 뿐이라면 이렇게 높이 평가받는 고전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도스토는 작품 전체에 종교적 고뇌와 러시아 민족이 나아가야 할 길에 대한 고심을 풀어넣었다. 종교도 러시아도 잘 모르는 나로서는 깊이 있는 이해가 어렵지만, 나름대로 이해한 바는 있다.

카라마조프 씨네 형제들 속에서 이반이 지었다는 서사시 ‘대심문관’은 그 자체로 유명해진 이야기 속 이야기다. 내내 침묵을 지키고 고난의 길을 걸으며 자신에게 고난을 주는 자에게도 사랑을 베푸는 그리스도의 모습은 대심문관과 대비된다. 인간에게 지나친 자유는 없느니만 못하니 자유를 뺏고 대신 빵을 주면 인간은 그 빵을 주는 자의 권위에 복종하면서 그안에서 행복하리라는 대심문관의 주장은 나름대로 일리가 있다. 그러나 도스토가 말하고자 하는 것은 그리스도의 그 자체로서의 모습, 수난을 겪으며 십자가에 매달린 영혼의 자유이다.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권세를 행하며 이단을 처단하는 데 힘쓰는 유럽의 종교재판소 재판관(또는 교황)이 대심문관의 모델로 보인다.

도스토가 추구하는 이상적인 종교지도자의 모습은 조시마 장로와 알료샤에게서 찾을 수 있다. 조시마 장로의 장례에서 사람들이 시신이 빨리 부패하는 것을 보고 조시마 장로의 신심을 의심하며 수군거리는 모습은 기적이 없으면 쉽게 흔들리는 사람들의 나약한 믿음을 보여준다. 그러나 알료샤는 마음의 흔들림을 극복하고 대지에 입맞추며 조시마 장로와 같은 길을 가게 된다. 이반이 던진 질문- 죄없는 아이들은 왜 수난을 겪어야 하는가? -에 대한 답을 알료샤가 스기료프의 아들 일류샤와 그 친구들을 바른 길로 인도하는 모습을 통해 보여주는 듯하다. 해설에서도 지적했듯이 이 부분은 다소 달콤한 감상주의의 냄새가 나긴 한다.

무신론자(혹은 불가지론자)인 나로서는 이반의 철학에 마음이 끌린 게 사실이다. 하지만 도스토는 무신론이 얼마나 위험할 수 있는지 제시한다. 이반은 신도 없고 내세도 없으면 사람들이 이 세상에서 더 열심히 사랑하며 살아갈 거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스메르쟈꼬프 같은 사람이 생각하듯 “모든 것은 허용된다”는 기치 아래 욕망에 무릎 꿇은 악행이 횡행할 우려가 있는 것이다. 묘하게도 신을 믿지만 매우 방탕하고 욕망에 충실한 드미뜨리가 아닌, 이반이 아버지를 죽인 꼴이 되었고 이반은 환각으로 사탄을 만나는 결말은 이러한 도스토의 시각을 보여주는 것 같다.


생각보다 재미있었지만 중간중간 대사가 너무 길어지는 순간들은 좀 힘들었다. 그 옛날 죄와벌을 읽으며 왜 한사람 대사가 한페이지를 넘어가냐고 투덜거렸던 기억이 난다… 러시아 사람들이 말이 많나요? 대체 왜 이름들은 이렇게 여러가지를 쓰는지 거참.
그래도 나중에 재독하고 싶긴 하다. 새로운 게 더 보일 것 같다.

* 내가 읽은 건 구판인데 구판은 세트가 없어서 신판으로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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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5-12-16 08: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신을 믿는 사람으로서 알료사의 입장에 더 가깝지만 이반의 입장이 더 정교하다고 생각해요. 그런 점에서, 도선생님 본인은 이반쪽이 아니었나 싶구요. 무겁고 어렵고 힘든 책인데 독서괭님 리뷰 읽고 나니 재독해도 좋겠다 그런 생각이 드네요.
좋은 글, 잘 읽고 갑니다. 올해의 쾌거 까라마조프 완독 축하드리고요!! 빵빠레~~😍😎🥳

독서괭 2025-12-16 17:21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읽으면서 오오 이반이 말하는 이것이 도스토의 입장인가?? 했는데, 다 읽고 해설까지 읽으니 그게 아닌 것 같더라고요?;; 이반의 무신론을 경계하는 입장 같습니다. 재독하시고 한번 평가해주시죠!! 축하 감사합니다😊

페넬로페 2025-12-16 09: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카라마조프~~완독 축하드려요.
저도 이 책 꼭 재독하고 싶어요. 첫 번째 독서는 그냥 읽는 데에 급급했던 것 같아요. 러시아 사람들은 진짜 말이 많은 것 같아요. ㅎㅎ

독서괭 2025-12-16 17:29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페넬로페님! 저도 좀 급급하게 읽긴 했습니다 ㅋ 다시 읽으시면 새로운 발견을 많이 하실 것 같아요! 러시아 사람들 왠지 무뚝뚝이미지인데 도스토 책 보면 너무 말이 많단 말예요? ㅋㅋ

잠자냥 2025-12-16 12: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선생이 작품을 쓰게 만든 원동력은 바로 도박빚...ㅋㅋㅋㅋㅋㅋㅋㅋ
3천 루블이 계속 나왔군요. 기억 희미 (/////_/////)
도선생 책 재밌어요. 근데 진짜 다들 말이 너무 많아서리...(도스토가 수다쟁이인가 싶기도) 좀 힘든 순간이 있기는 하지요?
자 다음에는 <네또츠까 네즈바노바>로 소녀 도끼를 만나보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나중에 독서괭 재독 안 한다에 천원 겁니다! 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12-16 17:36   좋아요 1 | URL
도박빚 진짜.. ㅋㅋㅋ 가족들은 얼마나 힘들었을까요? ㅜㅜ 하지만 그 덕에 노름꾼 등 명작이 나온 걸까요.. 수다쟁이 도스토.
네또츠까 네즈바노바.. 일단 담아두었습니다 ㅋㅋ
독서괭 재독 안 한다에 저도 천원 걸게요 (응?) ㅋㅋㅋ

잠자냥 2025-12-16 12: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괭 님 페넬로페 님 단발머리 님 카라마조프 재독 모임 결성하세요. ㅋㅋㅋㅋㅋㅋㅋㅋ

다락방 2025-12-16 15: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오 완독 축하드립니다! 재독 모임 결성합시다!!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5-12-16 17:37   좋아요 0 | URL
아..아..니 저는 한 5년 뒤에 생각해 보겠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