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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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맑고 청아한 웃음소리와 함께, 은쟁반에 옥구슬 굴러가듯 또르르 아름다운 문장들이 가슴속에 들어온다. 철창에 갇힌 늑대에서 하늘을 날아가는 종달새가 된 뤼시처럼, 이 책을 읽고 난 독자도 한결 가벼워지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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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벼운 마음
크리스티앙 보뱅 지음, 김도연 옮김 / 1984Books / 202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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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내게는 비밀이 하나 있다. 삶이 나를 정말로 사랑한다는 것이다. 삶은 언제나 내가 그것을 잊으려는 찰나에 나를 만나러 온다. 그러니 무엇 하러 인생을 걱정하겠는가?    - 162쪽 



새벽에 깬 나는 고양이처럼 살금살금 집안을 걸어다닌다, 라고 쓰고 싶지만 사실이 아니다. 발바닥이 방바닥에 붙었다가 떨어지는 소리와 옷자락이 바스락거리는 소리, 무게와 기척 어느 하나 고양이와 비슷하지 않다. 인간은 왜이리 소란스러운가. 인간과 함께 사는 고양이라면 그 점을 신기하고도 가련하게 생각할 법하다. 게다가 육신의 무게를 더 육중하게 만드는 마음이 있다. 지리산 종주를 떠나는 등반객이라도 되는 것마냥 어깨에 등에 꽉꽉 채운 걱정과 불안, 다짐과 후회, 책임감과 죄책감들. 그 배낭을 메고 사뿐사뿐 걸으려 해봐야 헛수고다. 인간은 왜, 담벼락과 담벼락 사이를 뛰어넘는 고양이의 도약처럼 분침과 분침 사이를 퐁퐁퐁 뛰어 다니지 못하는가, 가벼운 마음으로. 


뤼시는 현대의 인간이 가지지 못한 모든 것이다. 그녀는 인간의 한계를 뛰어넘지 않는다. 가정이 있고, 친구가 있고, 학교에 가고, 결혼을 하고, 일을 한다. 그러나 어떤 일도 가벼운 도약 한번에 뛰어넘을 수 있는 마음은 한없이 자유롭다. 


나는 뤼시가 극강의 ENFP가 아닐까 한다 ㅋㅋ 이 성향은 어머니에게서 온 것인데, 완전히 반대인 ISTJ로 보이는 아버지는 어머니와 딸로 인해 미칠 지경이다. 나는 아버지 쪽에 더 가까운 인간으로서 이런 사람들을 가족으로 둔다는 것이 얼마나 괴로운 일일지 상상이 된다. 그러나 또한 극과 극은 끌리기도 하는 법. 자유로운 영혼을 동경하는 마음이 내 안에도 있다. 자유로운 영혼, 자연과의 교감, 하면 떠오르는 사람(작품)- <그리스인 조르바>를 참 좋아했지만, 여성혐오의 시선이 짙어서 거리낌없이 좋아하기가 꺼림칙했다. 이제 뤼시로 조르바를 대체한다. 뤼시를 동경하는 데는 거리낄 것이 없다. 늑대를 사랑하고, 단풍나무를 사랑하는 뤼시. 


심각한 상황에서도 곧잘 웃음을 터뜨리는 어머니. 뤼시 또한 "때로는 가장 깊은 감정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감정에는 지울 수 없는 희극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115쪽)면서, 가벼운 마음의 계보를 이어간다. 결혼하겠다는 뜻을 알려온 뤼시에게 어머니가 보낸 편지는 놀랍다. "감방은 매력적이고 편안하다고 해도 여전히 감방일 뿐"이라며, "교도관도 없고 문도 없고 창살도 없고 자물쇠도 없지만, 감방은 그래도 감방이지."(97쪽)라고 하는 어머니. 더욱 놀라운 것은 이 부분이다.



그래도 네가 내 말을 듣지 않아서 기쁘다. 나는 그게 좋아. 아주 좋은 신호야. 우리가 너를 잘 키웠고, 오로지 자기 마음에만 귀 기울이는 법을 가르쳤다는 얘기니까. 내가 틀리면 좋겠지만, 나는 내가 틀리지 않았다는 걸 알아. 하여간 자식에게 좋은 길은 결코 부모를 위한 길이 아니지. 절대로 아니야.     - 98쪽 


아니 이런 대인배가... 내가 과연 내 자식들에게 훗날 이렇게 말할 수 있을까? 못할 것 같다. 내가 느낀 이 '대인배다'라는 감상을, 뤼시는 이렇게 적는다. 


내 어머니는 자식들이 무엇을 하든 언제나 기뻐했을 것이다. (...) 우리가 천사가 아니라는 사실을 그녀는 아주 잘 알고 있다. 하지만 그건 그녀 혼자만의 비밀로 남아 있을 뿐이다. 누가 됐건, 제아무리 남편이라고 할지라도, 우리의 행동을 조금이라도 비난하는 건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우리를 비판할 권리를 가진 사람은 오직 그녀뿐이다. 그것이 엄마로서 그녀의 특권이며, 그 특권을 결코 사용하지 않는 것이 그녀의 배포다.   - 151쪽 



뤼시는 원하는 모든 것을 경험하며 자란다. 서커스단에서 크면서 남들이 겪을 수 없는 경험들을 하게 되지만, 스스로도 틈만 나면 가출을 행해서 낯선 사람들과 사귄다. 

아이들의 호기심은 대단하다. 아기 때부터 모든 걸 손으로 만지고 입으로 가져가 맛보려 하고, 커가면서 궁금한 게 수없이 많이 생긴다. 사실 호기심을 채우기 위해 어른에게는 허용되지 않는 수준의 일까지도 해볼 수 있는 것이 아이들만의 특권이 아닌가. 하지만 요즘 아이들에게는 그런 특권이 없다. 위험하다거나 다른 사람이 싫어한다거나 하는 이유, 보다 솔직히는 '내가 귀찮아서' 못하게 한 수많은 일들. 어떤 아이들은 방치된 상태로 자유를 누리지만 아이들에게 너그럽지 못한 사회로부터 크게 혼이 난다. '노 키즈 존'까지 만드는 사회에서 뭘 바랄까. 


뤼시는 후의 일은 그때 가서 생각한다는, 어찌 보면 게으른 마인드에 입각해 결혼까지 한다. 뤼시는 로망을 사랑하지 않고, 로망은 뤼시를 사랑한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자기 자신에게 빠져 있다.그걸 알기 때문에 후에 이별을 고할 때도 뤼시는 가볍게 그 과정을 통통 지나간다. 사랑에 빠진 같은 아파트에 사는 남자와 헤어질 때도.



그렇다. 때로는 가장 깊은 감정이라 할지라도, 우리의 모든 감정에는 지울 수 없는 희극적 요소가 존재하는 것처럼 보인다. 감정의 깊이는 사랑과 아무런 관련이 없을 때가 많고, 모두 이기심과 연관되어 있는 게 틀림없다. 우리가 우는 것은 자기 자신 떄문이고, 우리가 사랑하는 것은 오로지 자신뿐이다. 이 생각 자체는 그리 어리석지 않지만, 그런 생각 뒤에 슬픔이 따라온다면 어리석은 일이 될 것이다.    - 115, 116쪽 



이 소설은 뤼시가 어떻게 자기 자신을 형성해가는지에 관한 이야기다. 

유년에 만난 늑대의 눈에서부터 형체를 갖추기 시작한 뤼시의 기질은 스스로 '수호천사'라고 부르는 존재로 의인화되는데, 그가 주로 하는 일은 하품이며, 뤼시에게 "강력한 수면 욕구를 주어서 세상으로부터 (그리고 나로부터) 나를 떼어 놓는 것"(175쪽)이다. 잠시 기질과 어긋나는 길- 성공을 향해 사다리를 올라타는 일에 매진해보기도 하지만, 결국 수호천사의 부름에 따라 그녀는 사다리를 걷어차고 혼자 호텔에서 글을 쓴다. 그렇게 그녀는 성장하는데, 바로 어머니가 편지에서 말한 것처럼, 뤼시는 그녀를 사랑하는 사람들로부터 떨어져 나와 혼자가 되고 나서야 성장할 수 있었음을 깨닫는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과 함께 성장할 수 없다. 우리는 그들이 우리에게 품은 사랑, 우리를 충분히 안다고 믿는 사랑에서 벗어나야만 성장할 수 있다. 우리는 그들에게 말하지 않을 것들을 할 때야 비로소 성장할 수 있다. 설사 그들에게 말한다 해도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그런 것들은 보이지 않고, 붙잡을 수 없고, 그들이 던져준 사랑의 망토로 덮을 수 없으며, 우리 속에 머물러 우리의 일부를 이루기 때문이다.   - 177쪽 


뤼시의 가벼움은 경박함이 아니다. "카르페 디엠, 순간을 즐겨라"와 비슷하려나. "모든 건 처음부터 사라지며 소멸해 간다는 것이다. 이런 생각으로 절망할 필요는 전혀 없다. (...) 그 때문에 오히려 주저하지 않고 사랑할 수 있으며, 그 생각으로 나는 이 순간에도 노래 부를 수 있다."(154쪽)는 태도. 아무 생각 없이 즐기는 것이 아니라, 삶을 비극으로 만드는 인간의 모든 한계들을 인식하고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니 오히려 그렇기 때문에 더욱, 그 삶을 가벼운 발걸음으로 노닐듯 지나갈 수 있다는 것. 

책을 읽는 내내 아름다운 문장들이 내 속에서 뛰노는 듯했다. 어쩔 수 없는 엄마인 나는, 아이들을 키울 때 지켜야 할 '거리두기'를 생각한다. 너무 가깝지 않게, 너무 멀지도 않게. 아이들은 혼자 있을 때 성장한다는 것을 유념하도록.  



누구도 아닌 나의 신이여, 나에게 매일 일상의 노래를 주소서. 어릿광대이신 나의 신이여, 경의를 표합니다. 나는 당신을 전혀 생각하지 않지만, 그 밖의 모든 것을 생각합니다. 그걸로 이미 충분합니다. 아멘.   - 146쪽 



* 역시 믿고 읽는 자냥오별이었다 ㅋㅋㅋ 

나는 어머니의 말 이후, 그것에 대해 깊이 생각했다. 만일 내가 더는 사라지지 않는다면, 그건 나에게 사라질 필요가 더는 없다는 뜻이다. 결혼은 여전히 여성이 보이지 않게 되는 가장 좋은 방법이다. - P120

생각해 보면 아마도 우리는 서로가 서로에게 던져버린 이 생애 안에 있는 것 같다. 나는 가장 위대한 기술은 거리두기의 기술이라고 생각한다. 너무 가까우면 불타오르고, 너무 멀면 얼어붙는다. 정확한 지점을 찾아서 유지하는 법을 배워야 한다. 그건 현실 속의 모든 배움처럼 비용을 치러야만 배울 수 있다. - P1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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책읽는나무 2022-10-27 21: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mbti가 ENFP와 ISTJ가 서로 극과 극이어서 힘들다구요?? 맞는 말 같기도 합니다.
저희 부부는 INFP와 ESTJ거든요.
앞이 서로 바뀌어도 엄청 힘들거든요ㅜㅜ

독서괭 2022-10-28 17:55   좋아요 2 | URL
극과 극은 힘들기도 하지만 끌리기도 하는 것 같습니다^^
요즘 MBTI 놀이(?)에 재미를 붙이다보니, 소설 읽으면서도 MBTI가 뭘까 생각하게 되네요 ㅋㅋ
책나무님도 배우자와 완전 반대시군요! 서로 다른 거 맞춰가느라 고생하셨겠어요^^;;

미미 2022-10-27 21:38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괭님!! 저 엔프피인데ㅋㅋㅋㅋㅋ사랑스럽고 자유로운 뤼시 너무 좋았어요.
뤼시의 엄마가 진짜 대인배는 대인배죠. 아빠가 그렇게 독불장군처럼 굴어도 늘
웃어주고...그런데 삶의 철학은 또 이리 남다르니. (놀라운 결혼관)그런걸보면
뤼시엄마가 혈액형은 AB형이 아니었을까요? AB형이 타고난 철학자라고 하더라구요.^^*


독서괭 2022-10-28 17:56   좋아요 2 | URL
미미님 엔프피 ㅋㅋㅋ 사랑스럽고 자유로운 미미님이닷!
뤼시엄마 진짜 신기했어요. 본인이 자유로운 건 그럴 수 있는데, 아이를 방치하는 것도 아니고, 사랑하면서 그렇게 자유롭게 풀어주는 거요. 현실에 있기는 하지만 많지 않은 캐릭터 같아요.
저 고등학교 때 제일 친했던 친구도 엔프피더라고요^^

새파랑 2022-10-27 22:2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마지막 문장이 핵심이네요 ^^ 아름다운 문장들이 많다고 하시니 읽어보고 싶네요~!!

잠자냥 2022-10-27 23:46   좋아요 4 | URL
마지막 문장이라면 자냥오별?! ㅋㅋㅋㅋㅋㅋ

새파랑 2022-10-28 06:05   좋아요 4 | URL
맞습니다 ㅋ 믿고 보는 잠자냥님 별 다섯이죠 ㅋ

독서괭 2022-10-28 17:57   좋아요 4 | URL
역시 새파랑님 핵심을 알아보시는 능력이 훌륭하십니다 ㅎㅎㅎ
시적이고 잔잔해요. 새파랑님도 읽어보심 좋을 듯 합니다^^

잠자냥 2022-10-27 23:45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뤼시 ENFP설에서 빵터졌습니다. ㅋㅋㅋㅋㅋㅋ 진짜 그럴 거 같기도. I로 시작하는 저는 뤼시 같은 딸래미나 배우자 있으면…….. ㅋㅋㅋㅋㅋㅋㅋㅋ

독서괭 2022-10-28 17:58   좋아요 3 | URL
‘극강의‘ ENFP 라고 부연합니다 ㅋㅋ 저도 I로 시작해서요, 또 끝이 J인 사람들은 P의 즉흥성에 많이 당황할 듯.. 뤼시도 뤼시엄마도 좋지만 막상 내 가족이면 너무 스트레스 받을 것 같습니다 ㅎㅎㅎ

다락방 2022-11-04 08:41   좋아요 1 | URL
안녕하세요, ESFP 입니다!!

독서괭 2022-11-04 16:22   좋아요 0 | URL
ㅋㅋ 한끗차이 다락방님!!

mini74 2022-10-30 11:4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런 비빌이라면 진짜 좋겠어요 한 백개쯤 갖고 싶은 비밀 ~ 믿고보는 자냥오별 ㅎㅎ 북플의 새로운 사자성어 인가요 자냥오별 !!!

독서괭 2022-11-03 14:42   좋아요 1 | URL
그러게요 저도 그런 비밀 갖고 싶습니다 ㅎㅎㅎ 자냥오별은 사랑입니다. 후회가 없어요! 미니님 추천 영상도 믿고 보는 쏘스입니다^^
 
토지 8 - 2부 4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8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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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지 7, 8권에 걸쳐 흥미진진, 통쾌한 장면은 역시 서희의 지령을 받은 공노인이 임역관, 김환과 손잡고 조준구를 들었다 놨다 농락하는 부분이다. 공노인 이사람, 처음 월선이가 인삼장수 따라갔다고 했을 때 그 인삼장수로 월선이의 삼촌 되는 사람인데, 이때만해도 월선이 떠나 미친놈 된 용이 얘기로 스쳐 지나가는 줄 알았지, 용정이 배경이 되었을 때 이렇게 큰 비중을 차지하는 인물일 줄이야. 이곳저곳 떠돌며 안 해 본 것이 없다는 공노인은 용정에 자리잡고 객주업을 하면서 거간일(중개업)을 하고 있는데, 능력도 좋지만 신망이 두터운 사람, 한마디로 믿을 수 있는 사람이다. 그런데 조준구를 상대할 때는 어찌나 능구렁이 같이 연기를 잘하는지ㅋㅋㅋ 서희를 위해 시작했지만 나중엔 자기가 성 함락하듯이 재미를 붙인다. 하지만 막상 조준구로부터 빼앗겼던 땅을 되찾고 조선으로 돌아갈 일만 남은 서희, 그리고 그를 떠나보낼 공노인은 왠지 마음이 허탈하다. 왜일까. 


그건 실은 중요한 건 땅보다 복수보다 곁에 있는 사랑하는 사람이기 때문이 아닐까 한다. 

공노인이 오랫동안 조선을 들락날락하다가 돌아와보니, 아끼는 조카딸 월선이는 오늘내일 하며 병세가 악화되어 있다. 죽을병이라는 진단을 받은 후에도 월선은 공노인의 집으로 오라는 제안을 거절하고 홍이와 함께 머문다. 사랑하는 양엄마가 죽어가는 모습을 지켜보는 홍이의 괴로움은 아버지 용이가 도통 용정에 오지 않아 배가된다. 참다 못한 홍이가 편지를 보내기도 하고, 겨울철 벌목일을 하기 위해 산판으로 떠난 용이를 거기까지 찾아가며 부자의 연을 끊겠다고 협박까지 하지만, 그래도 용이는 산판 일 끝내고 가겠다고 할 뿐이다. 그제야 월선이 죽을병에 걸렸음을 알게 된 영팔이 용이에게 크게 화를 내고 홍이를 따라간다. 어떤 사람(영팔이나 방씨 부인, 홍이)은 용이를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 하고, 어떤 사람(길상)은 알 것 같다 한다. 나도 알 것 같았다. 내가 가기 전에는 월선은 죽지 않을 것이다. 일찍 가면 죽음을 앞당기게 될 것이라는 믿음. 

결국 용이는 산판 일을 마치고 월선에게 간다. 월선과 용이의 마지막 이별은, 내가 예상했던 것보다 더 애절하고 슬퍼서, 눈물을 죽죽 흘리며 들었다. 용이 이 나쁜 놈. 용이를 참 많이 욕했지만, 그래도 월선이에 대한 사랑은 진짜였다. 그는 참 한결같고 미련한 인간이었다. 


서희는 어떤가. 서희와 길상의 결혼생활은 서로를 더욱 외롭게 만든 듯하다. 길상은 서희의 조선에 돌아가기 위한 준비과정을 모른 체 하다가, 독립운동가들과 만남을 갖기 시작하더니 결국 어느날 떠나버린다. 이들은 끝까지 서로에게 속내를 터놓지 못한다. 8권의 마지막에서 서희는 마침내 조선으로 떠난다. 떠나기 직전, 첫째 아들 환국이가 사라져 한바탕 소동이 벌어진다. 겨우 환국이를 찾아낸 서희에게, 여섯살 아이는 아버지 없이는 떠나지 않겠다며 소리지른다. 아버지는 곧 뒤따라 오실 거라고, 형님이 없으면 우리 윤국이는 어떡하지, 하고 아이를 달래며 목놓아 우는 서희를 보며, 길상이가 너무너무 미워졌다. 길상이가 최참판댁 머슴살이를 하게 된 것도, 서희와 결혼하게 된 것도 그에게는 족쇄였다는 걸 안다. 서희를 사랑하지만 그녀 곁에서는 그는 영영 자기 자신일 수 없어 괴로워했다는 걸 안다. 그렇지만, 일단 가정을 이루고 아이까지 낳았으면, 떠나더라도 충분한 설명의 노력이 있어야 했다. 환국이가 자기를 찾으리라는 걸 뻔히 알면서, 상처를 주리라는 걸 알면서, 그냥 휙 떠나는 법이 어디 있나. 울음을 터뜨린 환국이를 안으며 서희는 "절대로 당신 용서하지 않겠다"고 마음속으로 뇌까린다. 


<토지>를 이루는 큰 줄기 중 하나였던 용이와 월선이의 사랑은 이렇게 끝을 맺었다.

서희와 길상이의 사랑은 제대로 꽃피워지지도 못한 채 바스라져 간다. 

사랑은 왜이리 어려운가. 이별은 또 왜이리 서러운가. 누군가를 떠나보낸 빈자리, 용이와 서희는 각자의 가슴속 빈자리를 어떻게 감당해 나갈지. 

이제 이들은 고향으로 돌아간다. 



그 빈자리 

                             유하


미루나무 앙상한 가지 끝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바로 그 자리

방울새 한 마리 앉았다 날아갑니다

문득 방울새 앉았던 빈자리가

우주의 전부를 밝힐 듯

눈부시게 환합니다


실은, 지극한 떨림으로 누군가를 기다려온 

미루나무 가지의 마음과

단 한 번 내려앉을 그 지극함의 자리를 찾아

전 생애의 숲을 날아온 방울새의 마음이

한데 포개져

저물지 않는 한낮을 이루었기 때문입니다


내 안에도 미세한 떨림을 가진

미루나무 가지 하나 있어

어느 흐린 날, 그대 홀연히 앉았다 날아갔습니다

그대 앉았던 빈자리

이제 기다림도 슬픔도 없습니다

다만 명상처럼 환하고 환할 뿐입니다

먼 훗날 내 몸 사라진 뒤에도

 그 빈자리, 그대 앉았던 환한 기억으로

저 홀로 세상의 한낮을 이루겠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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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람돌이 2022-10-26 16: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젊은 시절 읽었을 때 용이와 월선의 사랑은 안타깝더니 지금은 용이놈 용서가 안되고요. 나쁜 놈 ㅠ.ㅠ
길상과 서희의 사랑은 왜 잘 안되는지 이해가 안되더니 지금은 너무 잘 이해가 잘돼서 안타깝습니다. ㅠ.ㅠ

독서괭 2022-10-27 19:57   좋아요 0 | URL
저도 10여년 전 읽었을 때보다 훨씬 여러가지가 보이고 느껴지는 듯합니다. 월선이 너무 불쌍해요 ㅠㅠ 길상과 서희는 고구마 먹는 듯하지만 저도 이해는 가더라고요.. 어휴.. ㅠㅠ 바람돌이님, 감사합니다!

scott 2022-10-27 23:4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용이 길상이 전부 별루 ㅎㅎㅎㅎ

그저 서희의 인생이 불쌍하고
서희 집에서 죽도록 일하다 죽은 이들이 불쌍합니다 ㅠ.ㅠ

독서괭 2022-10-28 17:59   좋아요 2 | URL
스콧님, 저도 길상이도 점점 미워지더라고요 ㅠㅠ 불쌍하기도 하고요.
서희 집에서 죽도록 일하다 죽은 이들, 정말 서글프지요. 에효. 인생.. 인간.. 뭔가, 싶네요 ㅠㅠ
 
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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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내 열정을 일일이 설명하고 싶지는 않다. 그것은 정당화되어야 할 실수나 무질서로 여겨질 수도 있다. 나는 다만 있는 그대로 보여주고 싶을 뿐이다.   - 27쪽 


작가는 어떻게 이렇게 솔직할 수 있었을까. 자기가 겪은 일을 쓰더라도, 소설이라는 형식 뒤에서, 이야기를 변형하고 캐릭터를 꾸며내어 자신을 숨기고 싶은 마음이 없었을까? 나를 온전히 드러내기를 꺼려하는 나로서는, 작가의 용감함이 의아할 만큼 신기하게 느껴진다. 강인하구나. 절절한 사랑이야기로 쓸 수도 있었을 테고, 낭만적이고 비극적인 이별이야기로 쓸 수도 있었을 테고, 도덕적 비난에 대한 변명을 할 수도 있었을 텐데, 작가는 오로지 벌거벗은 몸만을 남겨두었다. 아내가 있는 남자와의 짧고 불규칙한 만남과 격렬한 정사, 그리고 그 시간 사이를 채우는 기다림 속에서 미친 사람처럼 갈구하는 욕망의 비이성... 작가는 '나'의 행동을 합리적이고 타당하게 설명하려고 하지 않는다. 그저 그 시간 동안 그녀가 행한 비이성적 행위들을 있는 그대로 보여준다. 욕망의 민낯이랄까. 허울을 다 벗겨낸 그것을 직시하는 일은 조금은 낯부끄럽게 느껴지지만, 나이든 여성의 성적 욕망을 수치심 없이 꺼내 놓았다는 점에서 통쾌하기도 하다. 내 몸을 들여다보고 진정한 욕망을 꺠닫는 일이 중요하다는 생각 또한 들게 한다. 작품을 읽다 보면, 도덕적 잣대가 내 손에 쥐어져 있음을 느낀다. 작가는 내 손을 슥 밀어내며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의 열정은 안녕하십니까?" 나는 아직 내 욕망을 샅샅이 파헤질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았다. 



나는 내 온몸으로 남들과는 다르게 시간을 헤아리며 살았다.

나는 한 사람이 어떤 일에 대해 얼마만큼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지도 알게 되었다. 숭고하고 치명적이기까지 한 욕망, 위엄 따위는 없는 부재, 다른 사람들이 그랬다면 무분별하다고 생각했을 신념과 행동, 나는 이 모든 것들을 스스럼없이 행했다. 그 사람은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나를 세상과 더욱 굳게 맺어주었다.   - 66쪽 


그동안 궁금했고, 한권 사두었지만 읽지 못하고 있던 이 책을 이번 노벨문학상 수상을 계기로 읽게 되어 좋았다. 

하지만 뒤에 실린 해설을 읽으니, <부끄러움>을 비롯하여 '경계인이 느끼는 불편한 자의식'을 그려냈다는 작품들 쪽이 더 궁금해진다. 출신에 대한 수치심이 다시 수치심을 낳는 과정을 그려냈다고 하는데, 얼마나 또 민낯을 드러내 놓았을지. 



'출신 성분과 고향을 버리고 딴 세계에 유배된 망명객'이라는 자의식은 그녀의 작품에서 집요하게 반복된다.(...) 아니 에르노의 작품에는 하층민과 중산층 사이에 낀 경계인이 느끼는 불편한 자의식이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기 때문이다. - 76쪽(해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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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2-10-21 18:1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에르노 전 작품 추천 하고 싶지만
괭님에게 부끄러움-한 여자-남자의 자리
추천합니다 🤗

독서괭 2022-10-24 13:10   좋아요 2 | URL
스콧님 감사합니다^^ 부끄러움이 많이 궁금하더라고요! 다음번 작품은 이걸로 해야겠어요^^

수이 2022-10-22 00: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스콧님 말씀에 한표 던져요 독서괭님. 이 작품으로 아니 에르노를 시작했지만 저 역시_ 만일 다른 작품으로 시작했더라면 아니 에르노에 대한 오랜 오해가 쉽사리 사라졌을 거 같아요. 물론 오랜 시간이 흘러서 그런 오해 따위 모두 사라졌지만요. 저도 다시 읽고 있어요.

독서괭 2022-10-24 13:11   좋아요 2 | URL
오 vita님도 <단순한 열정>으로 아니 에르노를 만나셨군요! 오랜 오해라, 궁금하네요. 해설 읽어보니 그전 작품들과 결이 달라 말이 많았던 것 같던데, 다른 결의 작품들을 만나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새파랑 2022-10-22 10:3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전 아니에르노 책은 두편밖에 안읽었는데 이 책도 읽었는데 ㅋ 뭔가 솔직해서 좋았습니다 ^^ 뭐든 단순한게 좋은거 같아요 ㅋ

독서괭 2022-10-24 13:12   좋아요 2 | URL
ㅎㅎ 새파랑님, 저도 솔직하다는 면에서 좋았습니다. 특히 여성의 욕망을 그렸다는 부분에서요. 저도 더 읽어봐야겠어요. 감사합니다^^
 
단순한 열정 (무선) -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99
아니 에르노 지음, 최정수 옮김 / 문학동네 / 2012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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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덕적 잣대를 들고 다가가는 사람의 손을 슥 옆으로 밀어내며, 이 책은 이렇게 묻는 듯하다. ˝당신의 열정은 안녕하십니까?˝ 불륜에 대한 가치판단도, 정서적 교감에서 오는 낭만성도, 나이도, 사회적 지위도, 모든 걸 가지치기 하듯 쳐내 버리고 오로지 몸과 몸 사이의 끌림을 써내려간 독특한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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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10-22 19:41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몸 정… 난 읽으면 안되겟군….

독서괭 2022-10-24 13:12   좋아요 0 | URL
ㅋㅋㅋ 왜요 ㅋㅋ

얄라알라 2022-12-11 17:4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방금.이 책.다.읽고.다른분들은 이 혼란스런 (독자의) 마음을 어떻게 정리하셨을까 궁금해서 들어 왔는데 놀라워요 괭님 100자평으로 제 혼란 정리됨....넘 멋진100자평!!!^^

독서괭 2022-12-13 18:36   좋아요 0 | URL
앗 얄라님 과찬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