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지 3 - 1부 3권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3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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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지> 3권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선의(善意)다. 


2권에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던 귀녀-평산-칠성의 '최참판댁 살림 먹기' 프로젝트가 발각되어 세 사람은 최치수 살인죄로 모두 사형을 당한다. 귀녀는 강포수와 사이에 생긴 아기를 출산한 후 사형 집행을 당하고 그 아기는 강포수가 데려간다. 평산의 아내 함안댁은 목을 맨다. 칠성의 아내 임이네는 도망치듯 마을을 떠난다. 


함안댁이 죽고 '살인죄인의 자식'이 된 거복이와 한복이는 멀리 친척집으로 떠난다. 그러나 얼마 뒤 한복이는 걸어서 평사리에 나타난다. 두만네는 한복이를 딱하게 여겨 집으로 데려가 밥을 챙겨 먹이고 재워 준다. 두만이가 처음 한복이를 보고 '살인죄인의 자식인데'라며 불만을 표하자 두만네는 무섭게 화를 낸다. 그 엄마에 그 자식이라고, 엄마 닮아 맘이 고운 두만이는 금세 반성하고 한복이를 때리는 마을 아이들에게 맞서기도 한다. 

마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두만네 부부, 특히 두만네(두만이 엄마)는 인정 많고, 남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바른 성품이다. 쫓겨갔던 임이네가 돌아왔을 때도 두만네는 '살인죄인의 아낙/자식'이라는 다른 이들의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이네에게 일거리를 주며, 그 아이들을 위해 밥을 꾹꾹 눌러담아 퍼준다. 


3권에서는 작가님께서 등장인물들을 가차없이 죽이는데.. 아니 작가님.. 이럴 거면 정들게 하지라도 말지.. 하는 원망이 들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픽픽 죽어나간다. 맨 처음이 최참판네 기둥역할을 했던 김서방(ㅠㅠ)이고, 뒤이어 역시나 든든한 기둥이었던 봉순네(ㅠㅠ), 훌륭한 의술을 펼치던 문의원(ㅠㅠ)... 결정적으로 윤씨부인(ㅠㅠ!!!)... 이들이 다 죽어버리며 최참판네는 마구 흔들린다. 서희와 길상이, 봉순이는 간신히 살아나지만 기둥이 되어줄 만한 어른들이 다 사라지고.. 최참판네는 조준구와 아내 홍씨의 손에 들어간다. 


그 와중에도 인간의 선의는 빛난다. 쓰러진 김서방을 보며 근처에도 안 가려고 하는 놈(삼수놈..!)이 있는가 하면, 전염병이든 뭐든 신경 안 쓰고 들어다 방으로 옮겨주는 수동이, 무서워하면서도 거들어주는 복이나 돌이 같은 이들이 있다. 또 윤보(곰보목수)는 어떤가? 호열자에 죽은 강청댁(용이 아내) 시신을 무섬증이 돋아 들여다보지도 못하는 용이에게 찾아가 염을 해준다. 윤보와 용이는 함안댁이 죽었을 때도 목매단 나무의 나뭇가지나 새끼줄 따위를 챙기기에 급급한 놈(봉기!)과 달리 영팔, 서서방과 함께 무덤을 만들어 준 바 있다. 한복이는 이때 어머니를 묻어준 어른들에게 나중에 커서 보답할 상상을 하는 게 즐거운 공상이라고 말하는데(이건 4권에 나오는 듯), 이토록 힘든 일을 겪은 아이가 이렇게 예쁜 마음을 품고 있다니 얼마나 또 기특한지..(울컥) 


그러고 보면 윤보가 진짜 괜찮은 인물인데. 하늘이랑 땅에 매달려 사는 농사꾼도 아니고 종도 아니고, 실력을 인정받은 목수- 전문가다! 정의롭고(동학당이었음) 힘도 세고 말도 잘하고, 또 자기랑 생각이 다른 사람(예를 들어 김훈장)과도 반장난처럼 말장난을 주고 받으며 지낼 줄 안다. 조준구가 흉년에 기미쌀을 자기 편이 될 법한 사람들에게만 나누어 주는 장난을 쳤을 때, 도끼 들고 찾아와서 조준구를 놀려먹는 장면에서는 증말 통쾌했다 ㅋ 근데 윤보는 얼굴이 얽었다고 그런가 여자한테 인기는 없는 듯.. 얼마나 얽었길래.. 얼굴이 그리 중요한가.. 물론 중요하긴 하다.. 슬픔.. 


<토지>에서 미남을 꼽아 보자면 용이, 구천이, 길상이 같은데, 길상이는 아직 어리고, 구천이는 너무 아픈 과거를 품은 불쌍한 남자고, 용이? 용이..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은 줄 알았다. 비록 월선이와의 첫사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아내를 서럽게 만들기는 하지만 강청댁도 어지간히 그악스러워야지.. 하지만 용이, 갈수록 "아니 이 쉐끼가?" 하게 만든다. 애초에 기대가 없었던 평산이나 조준구, 삼수 같은 인물은 나쁜 짓을 해도 그러려니 하는데, 용이는 괜찮은 놈 같다가도 한번씩 미친짓을.. 

임이네랑 일 친 걸 보고 알았다. 용이 이놈은, 우는 여자, 가녀리고 구슬픈 여자에게 빠지는구나. 건강미 넘치고 너무나 예뻤던 시절의 임이네가 은근슬쩍 눈길을 보내도 꿈쩍도 안하더니, 불쌍한 처지가 되어 훌쩍훌쩍 우니까 갑자기 막 욕망을 느껴.. 임이네가 다시 형편이 좋아져서 생명력 뿜뿜하니까 다시 안 좋아져.. 강청댁도, 신혼 때 보니까 첨부터 그렇게 그악스럽지는 않았다. 순수하고, 귀여웠다. 강청댁도 불쌍하네.. ㅠㅠ 고새를 못참고 임이네랑 일을 쳐서 애를 만들고 그래서 여전히 월선이는 첩 같은 신세. 월선이도 불쌍하기도 하고, 왜 저러나 미련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용이, 미친넘.. 


정말로 미치게 된 인물이 하나 있는데, 이거야말로 기가 차게 가여운 사연이다. 

앞서 함안댁 묻어줄 때 함께 했다는 서서방이다. 호열자에 이어 지독한 흉년이 찾아오고, 서서방과 서서방댁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 안산댁은 곡식을 얻기 위해 친정에 간다. 사흘이면 다녀온다고 하고 나섰는데, 친정에 가서 병이 나고 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보니 이미 열흘이 지나 있었다. 시부모님이 걱정되어 쉼없이 걸음을 재촉해 돌아갔는데, 서서방댁은 굶어 죽었고 서서방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 서서방은 살아나지만 금슬 좋던 부부 사이, 부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정신이 나간다. 그는 안산댁에게 "시어미를 굶겨 죽인 년"이라고 욕설을 하며 저년이 주는 밥을 어찌 먹냐고 나가서 걸식을 하고 돌아다닌다. 안산댁 너무 불쌍 ㅠㅠㅠ 


이렇게 호열자에 흉년에, 몰아치는 불운 속에서 평사리 마을의 인심도 날이 갈수록 팍팍해진다. 

조준구가 점점 더 위세를 키워가는 와중에, 서희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현재 1904년 정도인 것 같은데, 러-일 전쟁 여파에 평사리는 어찌 될 것인가? 

평사리에서 또 누가 죽어나갈 것이며 ㅠㅠ 누가 미칠 것인가 ㅠㅠ ? 


이야기 자체도 너무 재밌고, 장면 묘사는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이 얼마나 세련된지, 장면 전환이 기가 막히고, 

다만 김훈장이 탁상공론하는 게 좀 듣기 힘들긴 한데 ㅋㅋ 정말 너무 훌륭한 소설이다. 

박경리 선생님 만세. 오디오북 만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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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2-06-22 21:2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박경리 선생님 만만세!! 오디오북으로 들을 수 있군요?
많이 그렇겠지만 <토지>는 사는동안 꼭 읽어야지 하던 소설이예요. 꼭 해야할 숙제같은? 일단 많이들 죽으니 캐릭터에 정주지 말아야겠어요ㅎㅎ

독서괭 2022-06-22 21:48   좋아요 2 | URL
네 윌*오디오북에서 듣고 있는데, 너무 재밌어요^^ 성우들 목소리에 적응 되어서 누가 누군지 맞출 정도가 되었는데, 대규모로 죽어버렸.. ㅠㅠ !! 하지만 아직도 갈길이 머니, 앞으로 정 줄 캐릭터들이 또 많이 나오겠지요? ㅎㅎ

건수하 2022-06-22 21:4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오디오북으로 듣고 계시군요 ^^ 독서괭님 정리하신 줄거리를 보니 옛날 생각 나면서.. 언젠가 다시 읽어볼 수 있을까 싶네요 :)

독서괭 2022-06-22 21:49   좋아요 3 | URL
ㅎㅎ 이미 읽으신 분들이 많을 것 같아서, 읽으며 기억을 더듬어보시라고 괄호 안에 누군지 설명을 넣기도 했어요. 오디오북으로 들으니 드라마 보는 것처럼 재밌어요^^

페넬로페 2022-06-22 23: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토지는 오래 전 드라마로 접했는데,
열받아서 끝까지 보지 못했어요.
언젠가는 읽어야지 해요.

독서괭 2022-06-23 16:28   좋아요 2 | URL
페넬로페님, 열받아서 ㅎㅎㅎ 열받는 이야기지요, 이 시절 우리 역사란 ㅠㅠ
저도 중도 포기 했었는데 이번에는 끝까지 가보렵니다~!!

새파랑 2022-06-22 23:3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토지는 드라마로만 봤는데 만세! 할 정도라니 재미있나봅니다 ㅋ 오디오북은 구매로 카운트 안하시나요? ㅋ

독서괭 2022-06-23 16:28   좋아요 3 | URL
오 새파랑님 드라마를 보셨군요. 전 드라마는 못 봤어요. 아주아주 재미납니다^^
오디오북은 처음부터 예외로 설정해 두었습니다 크크킄

scott 2022-06-23 00:1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토지 9권에서 멈춘지 N년째인데!
괭님 오디오북으로!

완독!완청 응원합니돠!^^

독서괭 2022-06-23 16:29   좋아요 2 | URL
스콧님이 다 못 읽으신 책이 있었다니!! 저도 9권인가 10권에서 멈춘지 N년째였는데, 이번에 오디오북으로 다시 도전하게 됐어요. 꼭 완청해 보겠습니다~^^

다락방 2022-06-23 08:3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저는 토지 전권 완독을 하긴 했었으나(집에 아직도 책 다 있어요) 왜 적어주신 내용은 기억이 안날까요? 하하. 책 도대체 왜 읽는지. 저도 읽는 내내 박경리 작가에게 감탄했었어요. 천재냐, 천재다 진짜.. 어떻게 이렇게 모든 인물들을 각각의 개성을 가진 생생한 인물로 그릴 수 있을까. 각각의 스토리가 어떻게 이렇게 찰지게 구성되어 있을까 하고 말이지요. 정말 대단한 작가에 대단한 작품이라고 생각합니다.

저는 별당아씨가 구천이에게 진달래 화전 만들어주고 싶다던 이야기 좋아해요. 이게 아마 6권인가 그랬던 것 같은데. 그거랑 나중에 뒷편에 그런 얘기 나와요. 등장인물들 이름은 생각 안나지만 ‘널 잊는것은 나의 의지지 마음이 아니지 않냐‘ 이런 뉘앙스의 대화였는데 그 때도 어휴 막 가슴을 치고 그랬어요. 아, 쓰다보니 토지도 다시 읽고 싶은데 세상에 읽고 싶은 책 너무 많아서 미치겠네요 ㅠㅠ

독서괭 2022-06-23 16:32   좋아요 3 | URL
오오 전권 완독자!! 저도 책 집에 다 있습니다 ㅋㅋ 9,10권 정도까지 읽었었는데, 몇몇 내용 밖에 기억이 안 나더라구요? ㅠㅠ 이번에 다시 들으니, 나이가 더 들어서 그런지 몰라도 최참판네 주요 인물들 사연 보다도 평범한 마을 사람들 이야기에 눈이(귀가?) 가더라구요. 개성, 찰진 구성, 정말 공감합니다.
저도 별당아씨 구천이 진달래 화전!! 그건 아직도 기억하고 있어요. 넘 슬픈 부분 ㅠㅠ 그게 엄청 인상적이어서 별당아씨와 구천이 러브스토리를 메인처럼 기억하고 있었는데 2, 3권에는 거의 안 나오더라구요. 가끔 한번씩 구천이를 어디서 봤다더라, 이런 얘기만.. 6권쯤 가야 나오는군요? 다시 들으면 어떨지 궁금해요. 제가 거기까지 꼭 들어서 리뷰 쓰겠습니다 ㅋㅋ

mini74 2022-06-24 17:1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전 20살에 봤는데 분노하며 읽었던 기억납니다. 기억이 가물가물한데 무거운거 들게 해서 밑이 빠진 ㅠㅠㅠ 시대도 삶도 인물들도 ㅠㅠ 이게 만화책이 있더라고요. 청소년이 읽는 토지? 왜? 몇 몇 내용 빼고 이런 식으로 굳이 청소년들이? 좀 커서 읽으면 되는데 왜 라는 생각들었던 적 있어요. ㅠㅠ

독서괭 2022-06-27 11:09   좋아요 0 | URL
스무살에 읽으셨군요! 무거운 거 들게 해서 밑이 빠졌어요??ㅠㅠ 그건 아직 안 나왔나봐요.
청소년 용으로 줄여서 만화로 만든 게 있군요. 흠,, 그래서는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게 얼마나 전달이 될런지 우려스럽네요;; 줄거리만 압축하면 사실 아침드라마 스럽기도 한데^^;;
스무살에 읽으셨으면 지금 다시 읽으시면 또 느낌이 다르실 것 같아요!
 
곰스크로 가는 기차 (양장)
프리츠 오르트만 지음, 안병률 옮김, 최규석 그림 / 북인더갭 / 2010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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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읽는데, 어? 나 이거 읽었다??
검색해보니 이 책을 산 게 2011년인데, 이때 같이 주문했던 책이 <천국의 열쇠>, <사랑이라니, 선영아>, <내 심장을 쏴라> 였고 이 책들은 확실히 다 읽었다.
그러니 곰스크도 그때 읽었나 보다.. 어쩌면 표제작만 읽은 건지도 모르겠다. 그러고 보니 이때는 정말 소설 편향이었군.
표제작만 읽고 일단 뭔가 쓰고 싶어져서 리뷰를 쓴다.

표제작 '곰스크로 가는 기차'를 읽는데, 이거..
이 남자는 N이고, 이 여자는 S다. 틀림없어! 남자는 계속 저 멀리 곰스크를 바라보고 있고, 여자는 안락의자(새우깡)를 구한다. 
- 자꾸 새우깡 얘기를 하게 되는데 모르시는 분은 아래 링크 참고 

아내 역시 우리가 언젠가는 곰스크로 가게 될 것임을 인정했다. 하지만 그곳이 너무나 멀리 떨어져 있었기 때문에 그녀에게는 어떤 느낌이나 희망, 걱정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 같았다. 마치 젊은 사람이 죽음에 관해 생각하는 것처럼.  - 34쪽
​10년 전에 읽을 때는 어땠는지 모르겠는데, 아마도 이 남자의 마음에 이입해서 안타까워 했을 것 같다.
하지만 지금의 나는 여자에게 이입해서 빡친다. 곰스크는 내 꿈이 아니야, 네 꿈이잖아! 왜 자꾸 "우리"라고 하지? "우리가 그렇게 기다리던 시간이 마침내 다가온 거야!"(39쪽)라니, 아내는 결코 그 시간을 기다리지 않은 것 같건만. 심지어 곰스크로 갈 생각에 골몰해 아내가 배가 불러오는 것도 모른다. 아니 언제든 떠날 생각이었으면 그것도 조심했어야지. 이 화상아.. 
"(...)나에게 안락의자 따윈 필요없어! 당신한테 여러번 얘기했잖아! 나는 곰스크로 갈 거라고, 이 빌어먹을 촌구석을 떠나서 곰스크로 갈 거라고 말이야." - 37쪽
"그러면 당신은 여기서 조금도 행복하지 않았다는 말인가요? 당신에게는 내가 있었잖아요! 당신은 오직 곰스크만을, 우리가 함께 살아온 이곳에서 등을 돌리게 될 그날만을 기다리지 않았나요?"  - 40, 41쪽 
곰스크가 어떤 곳인지조차 모르면서, 그는 지금 여기는 '빌어먹을 촌구석'이고 곰스크는 멋진 곳일 거라고 여긴다. 지금 이곳을 언제든 떠나려고 엉덩이를 들썩거리며 주변을 제대로 살피지 않는 그와 달리, 그녀는 완전히 이곳에 정을 붙이고 뿌리를 내리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이라는 결정타가 이들을 이곳에 정착시킨다. 
그러나 여전히 그는 곰스크에 사로잡혀 있다. 그의 한구석에는 떠나고 싶은 열망이 있고 그 열망이 그를 고독하게 한다. 
이게 참 전형적인 남성 서사 느낌이긴 한데(게다가 번역은 왜 남편은 반말하고 아내는 존대하는지?), 성별을 떠나 누구에게나 적용될 수 있는 고민이다.
'곰스크'로 표상되는 어떤 이상, 꿈, 그런 것들을 남편만 가지고 있고 아내는 가지고 있지 않은 게 아니라, 아내는 자기만의 곰스크를 이곳에서 찾았다고 생각한다. 지금 이곳, 현실의 가까운 곳에서 행복과 의미를 찾는 것- 나는 아내 쪽에 가까운 사람이다. 
현재에 대한 불만이 더 나은 세상을 만들어내기도 한다. 하지만 그냥, 막연하게, 무조건, 지금 이곳, 현실의 가까운 곳에는 만족하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
뭐, 남편이 어릴 적부터 아버지 얘기를 듣고 꿈꾸어 온 이상을 찾아 떠나는 것은 좋다. 
근데 그럴 거면 똑같은 꿈을 꾸는 사람을 만나든지 일단 곰스크에 가서 배우자를 찾든지 했어야 할 것 아니야? 
마치 아내와 아이가 자기의 꿈을 이루지 못하게 하고 시골에 주저앉게 만든 것처럼 여기며, 기적소리가 들릴 때마다 다락방으로 올라간다는 이 남편의 모습은 내게 하등 가여워 보이지 않는다. 

애들 키우는 아내 입장에 이입하여 화난 리뷰를 쓰긴 했지만 ㅋㅋ 이 소설이 좋지 않은 소설이라는 건 아니다. 이상을 꿈꾸며 현실에 머무르는 인간의 한계와 어리석음을 우화처럼 잘 보여준다. 지금 이 현실을 부정하고 싶어도 이것은 결국 내가 선택한 운명이라는, 선생의 입을 통해 지혜를 들려줘도 여전히 곰스크를 놓지 못하는 미련까지 말이다. 
나머지 단편들은 천천히 읽어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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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쟝쟝 2022-06-11 09:0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니 여기서도 새우깡 논쟁을 하고 있어요 ㅋㅋㅋ 왜 ㅋㅋㅋ 사실 f 냐 t냐가 논란의 중심인데 ㅋㅋㅋㅋㅋ 새우깡이냐 이상이냐도 ㅋㅋㅋㅋ 인간 실존의 진한 논쟁이 될 것 같아여 ㅋㅋㅋ 저는 n ㅋㅋㅋㅋ 내 친구들은 sㅋㅋㅋㅋㅋ 다행임 ㅋㅋㅋ

그런데 저번부터 남편 ㅋㅋ 진짜 아오 ㅋㅋㅋ 딱밤 좀 ㅋㅋㅋ

독서괭 2022-06-13 12:03   좋아요 1 | URL
아 f냐 t냐가 논란의 중심이예요? t는 머리로 이해가 되어야 공감을 하는 유형이라던데 ㅎㅎ 저는 f입니다. 쟝쟝님 t죠? ㅋㅋ 전 저 갈매기 새우깡 만화에 꽂혀서 S랑 N이 재밌더라구요 ㅋㅋ N끼리만 모여 있으면 밥을 제대로 못 챙겨 먹을 것 같아요 ㅋㅋ S 친구들 잘 두셨습니다!

공쟝쟝 2022-06-14 17:14   좋아요 1 | URL
네 ㅋㅋㅋ T가 공감을 잘 못한다고 사람들이 많이 오해를 하시는 데 말이죠? 제가 말입니다.. 공감을 원한다고 먼저 말해주시면 공감능력 동기화가 되는 그런 훌륭한 티입니다. 근데 버튼 안눌러주시면 계속 팩폭 들어갑니다 ㅋㅋㅋㅋㅋㅋㅋ
저의 S 친구들은 제가 흥분해서 푸코나 아렌트 따위를 떠들고 있으면, 그 와중에 고기 구워서 입에 넣어주고, 누룽지 시켜주고 그러더라고요.... 제 이야기를 듣는지는 모르겠지만 대체로 S는 멀티가 되는 종족이 아닌가.... (멀티 안되는 사람 ㅋㅋㅋ)

다락방 2022-06-14 17:27   좋아요 2 | URL
새우깡이 중요하다니까!!

공쟝쟝 2022-06-14 17:32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ㅋㅋㅋ 먹어 ㅋㅋㅋ먹고 말해 ㅋㅋㅋ 먹어 ㅋㅋ 쟝님 좀 먹어요 ㅋㅋㅋㅋ ㅋㅋㅋ 아 ㅋㅋㅋ 귀에 쟁쟁해 ㅋㅋㅋㅋ ㅠㅡㅠ

다락방 2022-06-14 17:33   좋아요 1 | URL
쟝님은 새우깡보다 저 너머를 궁금해하더라고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공쟝쟝 2022-06-14 17:36   좋아요 1 | URL
저는 떨어진 새우깡 앞에서 쉬운 선택을 하는 갈매기 존재의 생겨먹음이 궁금합니다. 예속과 억압을 끊어내고 자신의 몫의 새우를 스스로 사냥하는 갈매기의 자립적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구조… 그 구조를 가늠하는 언어…(그만해…) 잠이나 자야겟다 쿨쿨

독서괭 2022-06-14 17:36   좋아요 1 | URL
ㅋㅋㅋㅋ 쟝쟝님 철학하다 먹는 거 까먹어서 굶을 판.. 옆에서 입에 고기 넣어주는 다락방님과 계속 친하게 지내세요, 꼭 ㅋㅋ

독서괭 2022-06-14 17:42   좋아요 1 | URL
쟝쟝님, 제 N인 친구 하나도 새우깡 만화 보고 새우깡 갈매기는 그냥 개그인 줄 알았대요. 어떻게 저럴 수가 있냐고 ㅋㅋㅋㅋ <갈매기의 꿈> 얘기를 하는데, 그 책 저도 10대 때 좋아했거든요? 조나단이 N이라는데,, 맞아, 그렇지, 근데 나 조나단 좋아해 - 지금 깨달았어요. N은 아니지만 N을 좋아할 수는 있다는 것을 ㅋㅋ

공쟝쟝 2022-06-14 17:45   좋아요 0 | URL
저는 주변에 s없었으면 맨발의 소크라테스가 되어서 (참)이슬먹고 살다가 굶어죽었을 거예요. 제게 청약통장도 존엄사 적금도 (그거 아냐;;;;) 현생의 쾌락도 알려주는 모든 s들에게… 이자리를 빌어 감사를….

다락방 2022-06-14 17:47   좋아요 0 | URL
나르치스…

미미 2022-06-11 09:40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확실히 재독하면 기존에 못보던 다른것들이 보일때가 있더라구요
그래서 저의 목표는 소장가치있는 100권만 남겨서 재독하기인데 지금 읽는 속도와 사모으는 빛의속도를 봤을때 기약이 없네요ㅋㅋㅋㅋ
갈매기 만화 다시봐도 재밌어요ㅋ

독서괭 2022-06-13 12:04   좋아요 2 | URL
미미님, 소장가치 있는 100권만 남겨서 재독하기- 멋진 목표인걸요?? 하지만 실현은 불가능할 것 같습니다 ㅋㅋㅋ 소장가치있는 책이라는 게 또 계속 나오지 않겠어요? ㅠㅠ 그냥 원없이 많이 보자구요 ㅎㅎ
갈매기 만화 저 너무 꽂혀서 계속 새우깡 얘기를..;;

새파랑 2022-06-11 12:0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는 확실히 N이 맞는거 같아요 ㅋ 새우깡 이야기 다시봐도 재미있네요 ^^ 그런데 책 좋아하는 분들은 대부분 N일거 같아요 ㅋ

역시 소설 읽을때는 감정이입이 중요한거 같아요 ^^

독서괭 2022-06-13 12:05   좋아요 2 | URL
새파랑님, 새우깡 글에 댓글 보시면 은근히 S도 많습니다 ㅋㅋ 저는 애 낳아 키우면서 점점더 S가 되어가는 것 같아요;;
나(보코프)교수님은 감정이입 하지 말라셨다던데, 전 역시 감정이입을 하게 되더라구요. 이번에 아내에게 너무 감정이입이 빡 되어 버렸습니다 ㅋㅋ

다락방 2022-06-14 15:1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는 이 단편집 너무 좋아하는데요, 니가 곰스크에 가고 싶어하지만 지금 여기에 머무르고 있는 것은 너의 선택이다, 너가 선택해서 지금 이 삶을 살고 있는거다, 라고 동네 선생님이 말해주는 그 장면을 정말 좋아합니다. 아무렴요.

독서괭 2022-06-14 15:39   좋아요 0 | URL
제가 다락방님 책에서 이책 쓰신 부분 찾아봐야지 생각했다가 잊고 있었는데, 이 댓글 보고 방금 찾아봤습니다(준비된 독자)! 목차 보고 짚었는데 한번에 맞췄어요 ㅋ ˝그건 나쁜 삶이 아닙니다˝!! 저도 이 책이 주려는 메시지는 좋아요, 좋은데,, 자꾸 읽으며 아내에게 이입을 해버려서 ㅋㅋㅋ 아기 안고 남자 발목 잡아 주저앉히는 고런 느낌 ㅠㅠ 성별이 중요한 게 아니라 메타포라고 생각하려 해도 이미 이입이 돼서 어쩔 수가 없네요 흑흑. 다락방님이 좋다 하셨던 마지막 단편 ‘럼주차‘만 남겨놓은 상태인데, 요거 잘 읽어보겠습니다^^

다락방 2022-06-14 15:54   좋아요 2 | URL
저도 읽은지 벌써 십년이 된 단편이라 지금 읽으면 완전히 다른 감상을 갖게 될지도 모릅니다. ㅎㅎ
저는 <럼주차> 되게 좋아했어요. ㅎㅎ

독서괭 2022-06-14 17:37   좋아요 0 | URL
다시 읽으시면 어떻게 느끼실지 궁금해요^^
 
나는 고백한다 1 민음사 세계문학전집 369
자우메 카브레 지음, 권가람 옮김 / 민음사 / 2020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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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면전환이 아무 예고 없이 이루어져서 처음에 좀 혼란스럽지만, 곧 적응되고 점점 흥미로워진다. 아드리아의 사랑없는 유년기도 비알에 얽힌 역사도 다 무거운데, 역시 아직 어린 소년이다 싶은 생각들과 툭툭 던져지는 유머들 덕분에 예상보다 훨씬 재미있게 읽을 수 있다. 다음 권이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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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ni74 2022-06-04 23:07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역시. ㅎㅎ 독서괭님 별도 다섯개 *^^*

독서괭 2022-06-05 22:28   좋아요 2 | URL
네 기대를 저버리지 않더라구요~^^

새파랑 2022-06-05 11:13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책 구매해 놓고 읽어야지 읽어야지 하고 있었는데~~ 이 책이 어디에 있는지 찾아봐야 겠어요~!!

독서괭 2022-06-05 22:28   좋아요 2 | URL
ㅎㅎ 어서 찾아 읽어보세요! 이번 여름휴가 때 읽으셔도 좋을 듯요^^

scott 2022-06-06 00:40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2편의 고비를 넘으시면
괭님 유월은 나는,나는 고백하고 싶어집니다
여기, 알라딘 서재방에서

┻┳|
┳┻|__∧
┻┳|•﹃ •)
┳┻|⊂ノ
┻┳|J

독서괭 2022-06-07 12:02   좋아요 2 | URL
으앗, 뭔가 고백해야 하는 건가요? ㅎㅎㅎ
담벼락 고양이 넘나 귀엽습니다♥

단발머리 2022-06-07 20:19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장면 전환 때마다 저도 무릎을 치고는 했어요. 절묘하기 그지 없습니다!! ㅎㅎㅎㅎ

독서괭 2022-06-10 10:35   좋아요 0 | URL
너무 자연스럽게 넘어가서 헷갈리기도 하더라구요. 2권 초반부는 많이 헷갈리던데 정신 바짝 차리고 읽어야겠습니다 ㅎㅎ
 
[세트] 파친코 1~2 세트 - 전2권
이민진 지음, 이미정 옮김 / 문학사상 / 2018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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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파친코>의 중심은 선자다. 

선자는 파친코의 처음부터 끝까지, 그 모든 역사를 겪어내며 살아나간 인물. 작가는 선자를 큰 줄기로 해서 여러 인물들의 삶을 가지로 뻗어 보여준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지만 그래도 상관없다"라는 이 소설의 첫 문장은 100여년을 관통해가는 이 소설이 독자에게 하고 싶은 말인 듯하다.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다"는 자각, "그래도 상관없다"는 의지. 


역사는 어떻게 선자와 그 주변 인물들을 망쳐놓았는가. 

선자의 부모 훈이와 양진의 이야기부터 마지막에 이르기까지 이들은 역사의 흐름에 속절없이 휩쓸려간다. 혹은 태생적인 운명에 의해, 혹은 딱히 다른 선택지가 없었던 선택에 의해. 

부산 근처 영도라는 작은 섬에 살면서 어머니와 함께 하숙집을 운영하는 선자는 어느날 장에 다녀오던 길에 일본인 남자애들에게 추행을 당한다. 그때 고한수가 나타나 그녀를 구해준다. 고한수가 없었다면 그놈들에게 더 몹쓸 짓을 당하여 그들의 아이를 가지게 되었을 지도 모를 일. 게다가 아버지의 장애 때문에 혼인에 어려움이 있는 선자는 솔직한 호감을 보이는 고한수에게 끌릴 수밖에 없다. 그의 아이를 가지게 된 선자는 일본에 아내와 딸들이 있어 결혼은 할 수 없지만 너와 아이를 잘 돌봐주겠다는 고한수의 제안을 거절한다. 고한수가 선자가 자신이 유부남인 걸 알아도 관계를 가질 거라고 믿었다면, 선자가 아이를 가질 때까지 그 사실을 숨겼을 리가 없다. 진짜 써글놈이다. 


선자의 하숙집에 머물고 있던 목사 백이삭이 그녀의 사정을 알게 되고, 결혼하여 함께 일본으로 가자고 청한다. 이때 백이삭을 따라간 것이 선자의 삶의 방향을 결정적으로 바꾸어 놓았다. 어느 쪽이 더 나았을지는 결코 알 수 없지만. 일본에서 백이삭의 형 요셉과 그의 아내 경희와 함께 지내면서, 선자는 무사히 노아를 낳는다. 몇 년 후, 백이삭과 사이에서 생긴 아들 모자수도 낳는다. 그러나 백이삭은 그의 교회에서 일하는 소년이 일본 신사에서 천황을 위한 뭔가를 외우지 않았음이 발각되는 바람에 투옥되고, 오랜 시간이 흘러서야 만신창이가 되어 집에 돌아온다. 


이 모습을 처음으로 본 노아, 희미한 기억 속에 그리워했던 아버지가 고문으로 엉망이 된 모습으로 돌아온 걸 본 노아는 어땠을까? 원래도 영리한 노아였지만, 아마 이때부터 그는 완전한 일본인이 되어 멸시당하지 않고 부당한 대우를 받지 않겠다고 마음 먹었을 것 같다. 이 작은 노아를 떠올리면 가슴이 아프다. 결국엔 선자의 가슴에 대못을 박고 마는 노아.. 그건 저 뒤의 일이지만.


어려운 생활을 꾸려나가기 위해 선자와 경희는 김치장사를 시작하고, 그러던 중 큰 고깃집에서 전속으로 김치를 담가달라는 제안을 받는다. 전쟁이 터지고, 요셉이 크게 다치고, 고한수가 나타나고, 그의 도움으로 피신했다가 돌아오고, 노아는 일하며 열심히 공부해 와세다대학에 입학하고, 모자수는 파친코에서 일하게 된다. 

파친코. 드디어 나오네? 당시 일본인들이 보통의 직장에서는 조선인을 써주지 않았기 때문에, 많은 조선인들이 파친코 사업에 관여하게 되었다고 한다. 와세다대학에 들어갔던 노아도 결국은 객지에서 파친코 직원이 되고, 모자수의 아들 솔로몬은 콜롬비아대학에 가서 경제학을 전공했지만 결국에는 일본에 돌아와 파친코에.. 참으로 씁쓸한 순환이 아닐 수 없다. 그들은 제약을 뛰어넘고자 그저 열심히 달렸지만, 일본과 조선의 역사가 이들을 좌절시켰다. 


한국에 가면 일본인이라고 욕을 먹고, 일본에서는 아무리 일본에서 나고 자랐어도 3년마다 등록증을 받아 목에 걸어야 하며 조선인에 대한 혐오의 시선을 받아야 하는 이들. '디아스포라'라고 일컫는 그 정서는 인종혐오, 정치적박해, 빈곤 등 다양한 이유로 모국을 떠나 자리를 잡아야만 했던 전세계 많은 사람들의 마음까지 울린 모양이다. 


내게 가장 마음 아팠던 장면은 선자가 노아를 생각하며, 노아가 그렇게 모든 걸 완벽하게 해내면 상황이 바뀔 거라는 희망을 갖게 해서는 안 됐던 게 아닐까, 후회하던 거였다. 그 믿음이 무너지고, 아슬아슬하게 쌓아올린 거짓된 삶조차도 무너질 위험에 처하자 노아는 목숨을 끊어버렸으니까. 하지만 어떻게 엄마가 그럴 수 있었겠는가. 아직 어린 아이에게, 앞날이 구만리 같은 아이에게, 희망을 가지지 말라고, 어차피 우리는 여기가 한계라고,, 그런 말을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노아가 밉고 불쌍하다. 노아가 조선인임을 속이고 일본인인 척 하며 결혼한 일본인 여성은 그 아버지(?)가 자살했기 때문에 안 좋은 시선을 받으며 살아온 사람이었다. 남편마저 자살해버린 후 그녀가 아이들과 꾸려나갔어야 했을 삶은 얼마나 팍팍했을지. 고한수와 관계했다는 이유로 엄마를 비난한 노아는, 결국 그 결과물인 자기 자신을 견딜 수 없었을 것이다. 


마지막 장면에서 선자는 남편 백이삭의 무덤에 간다. 일본경찰의 고문에 죽어간 백이삭의 무덤에서 이야기를 끝내는 것은 의미심장하다. 비록 일본에서 자리를 잡아 풍족하게 생활하고 있지만 역사를 잊지 않겠다는, 잊지 말자는 작가의 외침일까. '역사가 우리를 망쳐놨다'는 것을 잊지 않은 채, 그러나 '그래도 상관없다'는 마음으로 앞을 바라봐야 한다고. 혈연으로 이어지지 않았지만 누구보다 선자와 서로 의지하고 살아온 가족 경희가 기다리는 집으로 돌아가는 선자의 모습에는, 꿋꿋하게 세월을 견뎌내온 소나무 같은 기상이 있다.  


리뷰의 제목을 고민하다 문득 푸쉬킨의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가 떠올랐다. 

부당한 상황에서 개인의 믿음으로 뚫고 지나가라는 식의 이야기를 좋아하지 않지만, 세상의 흐름에 휘둘리는 작은 인간에게는 존엄을 지킬 수 있는 마지막 방법일 수도 있다. 

하지만 나는 삶이 나를 속일 때 마음껏 슬퍼하거나 노여워 하겠다. 그러고 나면 지나보낼 수 있을 것이다.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우울한 날들을 견디면

믿으라, 기쁨의 날이 오리니


마음은 미래에 사는 것

현재는 슬픈 것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그리고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


- 최선 옮김, 민음사, 1997 (네이버 지식백과 '세계의 명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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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2-06-03 12:53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 책 좋았는데 독서괭님 리뷰 읽으니 여러 장면들이 겹쳐져서 참 좋네요. 전 이번에 3년에 한 번씩 재일한국인이 일본정부에 등록하는 일(지금은 어쩐지 모르겠네요)에 대해 읽으면서, 그렇게 생김새가 비슷한데도 심지어 일본에서 태어났고 자랐고 그런데도 ‘구별‘하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의 마음은 뭘까 하는 생각이 들었고요. 한편으로는 우리도 외국에서 온 분들이 많아지고 있는 상황이지만 그들에 대한 편견이 맘 속 깊이 있는건 아닌가, 아니 대놓고 무시하고 임금을 착취하고 있지는 않은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참 그렇더라구요. 집 떠나면 우리 모두 나그네인데 말입니다.

마지막 시도 참 좋네요. 저는 여기가 좋아요.

모든 것은 순간적인 것, 지나가는 것이니......

독서괭 2022-06-03 12:56   좋아요 2 | URL
네 ‘구별‘하고 싶어하는 일본인들의 마음.. 우리도 똑같은 것 같아서 씁쓸합니다ㅠㅠ 차라리 외국인이라고 다 똑같이 차별하면 나은데, 외국도 외국 나름으로 차등을 두어 대우하니까요.. 말만 글로벌 시대지 마음이 열리는 건 아직 갈 길이 먼 것 같습니다.
저는 이 시 둘째 연은 낯설던데, 단발님이 좋다 하신 그 다음 행, ˝지나가는 것은 훗날 소중하게 되리니˝가 맘에 와닿아요^^
단발님 댓글에 좋아요 누르려다가 잘못 해서 제 글에 좋아요를 눌렀더니 ˝자신의 글을 좋아요 할 수 없습니다˝라는 알림이 떠서 부끄러웠네요 ㅋㅋ

단발머리 2022-06-03 13:05   좋아요 2 | URL
ㅋㅋㅋㅋㅋㅋ 좋아요,는 저한테 맡기세요 ㅋㅋㅋㅋㅋ 독서괭님 댓글도 좋으니까요!!

거리의화가 2022-06-03 13:1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아... 노아의 마지막을 생각하니 또 한번 가슴이 무너지고 마네요. 괭님 리뷰 잘 읽었습니다. 푸쉬킨의 시와 파친코의 내용이 잘 어우러진다는 생각이 듭니다. 차별과 억압을 벗어나고자 했지만 결국 쳇바퀴처럼 돌아오고 만 여러 조선인들을 생각하게 만드네요~ㅜㅜ

독서괭 2022-06-03 22:35   좋아요 1 | URL
노아의 마지막에 읽다가 소리내서 헉! 했어요 ㅠㅠ 선자 얼마나 괴로웠을지..
결국 쳇바퀴처럼 돌아오고 말았다는 말씀이 딱 맞네요. 이 책이 그분들 마음에 많은 위로가 되었을까요?

scott 2022-06-03 15:02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자이니치들은 여전히 일본 주류 사회 진입이 어렵습니다 요식업-유흥업-연예계로 진출하는 것 이외에는 좋은 학교를 나와도 일본에 뿌리 내리지 못하게 해놨어요 현재도 일본 파친계는 자이니치들이 꽉 잡고 있다고 ,,,

독서괭 2022-06-03 22:37   좋아요 1 | URL
그렇군요 지금도 그렇군요 ㅠㅠ 일본 상황도 잘 아시는 스콧님!👍 파친코를 잡고 부유해졌지만 끊임없이 차별을 받는 것이.. 갑자기 유대인이 떠오르네요. ㅠ

새파랑 2022-06-03 16:1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푸쉬킨과 연결되는 파친코네요~!! 전 개정판 나오면 꼭 읽어보겠습니다~!! 별 다섯이니 완전 기대되네요 ㅋ

독서괭 2022-06-03 22:37   좋아요 1 | URL
개정판 8월에 나온다니 얼마 안 남았네요! 8월엔 18권 읽으실 듯한데 그중 2권은 파친코로 ㅎㅎㅎ
 
돌이킬 수 있는
문목하 지음 / 아작 / 2018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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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반까지는 그럭저럭 재밌게 봤는데 후반부는 지루했다. 뭐랄까, 스토리랑 설정은 있는데 캐릭터가 없는 느낌? 캐릭터 입체감과 매력이 부족하다. 비장함도, 감동도 오히려 너무 공들인 설정에 묻힌 것 같다. 시간 관련 능력은 꽤 좋아하는 설정인데 아쉬움. 데뷔작인 걸 감안하면 시도는 좋았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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