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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 - 1부 3권 ㅣ 박경리 대하소설 토지 (마로니에북스) 3
박경리 지음 / 마로니에북스 / 2012년 8월
평점 :
구판절판
이 글에는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토지> 3권에서 단연 돋보이는 것은 선의(善意)다.
2권에서 흥미진진하게 진행되던 귀녀-평산-칠성의 '최참판댁 살림 먹기' 프로젝트가 발각되어 세 사람은 최치수 살인죄로 모두 사형을 당한다. 귀녀는 강포수와 사이에 생긴 아기를 출산한 후 사형 집행을 당하고 그 아기는 강포수가 데려간다. 평산의 아내 함안댁은 목을 맨다. 칠성의 아내 임이네는 도망치듯 마을을 떠난다.
함안댁이 죽고 '살인죄인의 자식'이 된 거복이와 한복이는 멀리 친척집으로 떠난다. 그러나 얼마 뒤 한복이는 걸어서 평사리에 나타난다. 두만네는 한복이를 딱하게 여겨 집으로 데려가 밥을 챙겨 먹이고 재워 준다. 두만이가 처음 한복이를 보고 '살인죄인의 자식인데'라며 불만을 표하자 두만네는 무섭게 화를 낸다. 그 엄마에 그 자식이라고, 엄마 닮아 맘이 고운 두만이는 금세 반성하고 한복이를 때리는 마을 아이들에게 맞서기도 한다.
마을에서 상당히 중요한 인물로 보이는 두만네 부부, 특히 두만네(두만이 엄마)는 인정 많고, 남의 말을 함부로 하지 않는 바른 성품이다. 쫓겨갔던 임이네가 돌아왔을 때도 두만네는 '살인죄인의 아낙/자식'이라는 다른 이들의 눈총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임이네에게 일거리를 주며, 그 아이들을 위해 밥을 꾹꾹 눌러담아 퍼준다.
3권에서는 작가님께서 등장인물들을 가차없이 죽이는데.. 아니 작가님.. 이럴 거면 정들게 하지라도 말지.. 하는 원망이 들 정도로 좋은 사람들이 '호열자'(콜레라)에 걸려 픽픽 죽어나간다. 맨 처음이 최참판네 기둥역할을 했던 김서방(ㅠㅠ)이고, 뒤이어 역시나 든든한 기둥이었던 봉순네(ㅠㅠ), 훌륭한 의술을 펼치던 문의원(ㅠㅠ)... 결정적으로 윤씨부인(ㅠㅠ!!!)... 이들이 다 죽어버리며 최참판네는 마구 흔들린다. 서희와 길상이, 봉순이는 간신히 살아나지만 기둥이 되어줄 만한 어른들이 다 사라지고.. 최참판네는 조준구와 아내 홍씨의 손에 들어간다.
그 와중에도 인간의 선의는 빛난다. 쓰러진 김서방을 보며 근처에도 안 가려고 하는 놈(삼수놈..!)이 있는가 하면, 전염병이든 뭐든 신경 안 쓰고 들어다 방으로 옮겨주는 수동이, 무서워하면서도 거들어주는 복이나 돌이 같은 이들이 있다. 또 윤보(곰보목수)는 어떤가? 호열자에 죽은 강청댁(용이 아내) 시신을 무섬증이 돋아 들여다보지도 못하는 용이에게 찾아가 염을 해준다. 윤보와 용이는 함안댁이 죽었을 때도 목매단 나무의 나뭇가지나 새끼줄 따위를 챙기기에 급급한 놈(봉기!)과 달리 영팔, 서서방과 함께 무덤을 만들어 준 바 있다. 한복이는 이때 어머니를 묻어준 어른들에게 나중에 커서 보답할 상상을 하는 게 즐거운 공상이라고 말하는데(이건 4권에 나오는 듯), 이토록 힘든 일을 겪은 아이가 이렇게 예쁜 마음을 품고 있다니 얼마나 또 기특한지..(울컥)
그러고 보면 윤보가 진짜 괜찮은 인물인데. 하늘이랑 땅에 매달려 사는 농사꾼도 아니고 종도 아니고, 실력을 인정받은 목수- 전문가다! 정의롭고(동학당이었음) 힘도 세고 말도 잘하고, 또 자기랑 생각이 다른 사람(예를 들어 김훈장)과도 반장난처럼 말장난을 주고 받으며 지낼 줄 안다. 조준구가 흉년에 기미쌀을 자기 편이 될 법한 사람들에게만 나누어 주는 장난을 쳤을 때, 도끼 들고 찾아와서 조준구를 놀려먹는 장면에서는 증말 통쾌했다 ㅋ 근데 윤보는 얼굴이 얽었다고 그런가 여자한테 인기는 없는 듯.. 얼마나 얽었길래.. 얼굴이 그리 중요한가.. 물론 중요하긴 하다.. 슬픔..
<토지>에서 미남을 꼽아 보자면 용이, 구천이, 길상이 같은데, 길상이는 아직 어리고, 구천이는 너무 아픈 과거를 품은 불쌍한 남자고, 용이? 용이.. 그래도 이만하면 괜찮은 줄 알았다. 비록 월선이와의 첫사랑에서 헤어나오지 못하고 아내를 서럽게 만들기는 하지만 강청댁도 어지간히 그악스러워야지.. 하지만 용이, 갈수록 "아니 이 쉐끼가?" 하게 만든다. 애초에 기대가 없었던 평산이나 조준구, 삼수 같은 인물은 나쁜 짓을 해도 그러려니 하는데, 용이는 괜찮은 놈 같다가도 한번씩 미친짓을..
임이네랑 일 친 걸 보고 알았다. 용이 이놈은, 우는 여자, 가녀리고 구슬픈 여자에게 빠지는구나. 건강미 넘치고 너무나 예뻤던 시절의 임이네가 은근슬쩍 눈길을 보내도 꿈쩍도 안하더니, 불쌍한 처지가 되어 훌쩍훌쩍 우니까 갑자기 막 욕망을 느껴.. 임이네가 다시 형편이 좋아져서 생명력 뿜뿜하니까 다시 안 좋아져.. 강청댁도, 신혼 때 보니까 첨부터 그렇게 그악스럽지는 않았다. 순수하고, 귀여웠다. 강청댁도 불쌍하네.. ㅠㅠ 고새를 못참고 임이네랑 일을 쳐서 애를 만들고 그래서 여전히 월선이는 첩 같은 신세. 월선이도 불쌍하기도 하고, 왜 저러나 미련스러워 보이기도 하고.. 용이, 미친넘..
정말로 미치게 된 인물이 하나 있는데, 이거야말로 기가 차게 가여운 사연이다.
앞서 함안댁 묻어줄 때 함께 했다는 서서방이다. 호열자에 이어 지독한 흉년이 찾아오고, 서서방과 서서방댁을 모시고 사는 며느리 안산댁은 곡식을 얻기 위해 친정에 간다. 사흘이면 다녀온다고 하고 나섰는데, 친정에 가서 병이 나고 만다. 자리를 털고 일어나 보니 이미 열흘이 지나 있었다. 시부모님이 걱정되어 쉼없이 걸음을 재촉해 돌아갔는데, 서서방댁은 굶어 죽었고 서서방은 정신이 혼미한 상태. 서서방은 살아나지만 금슬 좋던 부부 사이, 부인의 죽음에 충격을 받은 나머지 정신이 나간다. 그는 안산댁에게 "시어미를 굶겨 죽인 년"이라고 욕설을 하며 저년이 주는 밥을 어찌 먹냐고 나가서 걸식을 하고 돌아다닌다. 안산댁 너무 불쌍 ㅠㅠㅠ
이렇게 호열자에 흉년에, 몰아치는 불운 속에서 평사리 마을의 인심도 날이 갈수록 팍팍해진다.
조준구가 점점 더 위세를 키워가는 와중에, 서희의 앞날은 어찌 될 것인가?
현재 1904년 정도인 것 같은데, 러-일 전쟁 여파에 평사리는 어찌 될 것인가?
평사리에서 또 누가 죽어나갈 것이며 ㅠㅠ 누가 미칠 것인가 ㅠㅠ ?
이야기 자체도 너무 재밌고, 장면 묘사는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고,
이야기를 진행하는 방식이 얼마나 세련된지, 장면 전환이 기가 막히고,
다만 김훈장이 탁상공론하는 게 좀 듣기 힘들긴 한데 ㅋㅋ 정말 너무 훌륭한 소설이다.
박경리 선생님 만세. 오디오북 만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