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정민씨는 <시사IN>과 만난 자리에서 다른 시민들에게 호소했다. "자기 가족이 인파 많은 곳에 가면 혹시나 싶어다들 불안하지 않겠습니까. 조금이라도불안함을 느낀다면 이건 절대 남의 일이아닙니다. 책임질 사람이 책임지고 무거운 자리에 앉은 사람이 무거운 책임을 인지할 때에야 이 전 국민적 트라우마를 내려놓을 수 있지 않겠습니까." - P17

트라우마를 겪으면 쉴 수 있는 시간이주어져야 하지만 현재로선 불가능하다.
유 대원은 참사 이후 내리 15일 동안 격일로 24시간 근무, 24시간 휴식을 반복했다.
휴직으로 빠진 동료의 빈자리를 메우기위해서다. "내가 참사 때문에 힘들다고 특별휴가 받아서 나가면 누군가 또 24시간근무에 들어가야 한다. 인원이 확충되고나서 빠진 인원의 업무를 대신하는 시스템이 아닌 이상 휴가는 무의미하다." - P18

몸이 아프고 피곤한 것은 견딜 수 있다. 그보다 추모공간을 지키기 위해 실랑이를 해야 하는 게 더 힘들다. 강 팀장은용산구청 직원, 해밀톤호텔 관계자들이
"(추모 물품을) 언제 치울 거냐‘라고 물을때마다 "내가 왜 (추모 물품을) 치우는사람이 됐냐"라고 되묻는다고 했다. 강팀장이 잠을 줄여가며 지키려 한 추모 물품은 ‘이태원 참사를 기억하는 행위‘ 자체다. 이들에겐 그저 치워야 할 ‘행정 대상‘처럼 취급받는 게 싫었다.  2주 전엔 추모물품을 건드리는 취객을 말리다 넘어져휴대전화 액정이 깨지고 무릎을 다쳤다. - P21

복싱 동작인 어퍼컷은 경기를 한순간에 뒤집는 필살기다. 정치권에서 윤석열 대통령의 세리머니는 법과 원칙의 ‘강골 검사‘라는 본인 이미지를 각인시키기 위한 수단이자, 국정을 이끌어갈 자신감의 표현이라는 해석이 나왔다.
문재인 정부에 대한 심판, 정권교체를 강조하는 유세에서 어퍼컷을 한 만큼상대를 공격하는 의미로 보일 수 있다는 부정적 평가도 함께 나왔다. 선거운동이 경기 전 ‘몸풀기‘라면 대통령 취임은 ‘링‘ 위에 올라섰다는 뜻이 된다. 실전에 돌입한 윤석열 대통령의 어퍼컷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 P38

‘그런데 박근혜는 도대체 왜 사면된걸까? 박근혜를 사면하면 국민이통합된다고? 팬클럽이 머글과 통합되는 일도 있나?"
난데없이 떨어진 도돌이표 때문에시간이 5년이나 뒤로 갔다. 다시 폭주하는 독재 권력의 후예를 민주화된 제도와 절차로 단죄한 세계사적사건도 은근슬쩍 없던 일이 되고 말았다. 민주주의가 원래 그런 거라지만, 이 나라의 시간은 올해도 참 기묘하게 흘렀다.  - P45

도리어 ‘장애인이 왜 출근 시간에 지하철을 타려고 하느냐‘며 사과를 요구한다. 비장애인 남성 (이준석)이 SNS에서 혐오와 차별 발언으로 권력을 확장할때 장애인 여성(김예지)은 현장에서 무릎 꿇고 사과한다. 교통약자의 시기는모두에게 주어진다. 그 누구도 영원히 건장한 성인으로만 살아갈 수는 없다.
조금 늦더라도 천천히, 마지막 한 명까지 같이 살 수 있는 사회를 만들자는 요구는 모두를 위한 것이다. - P70

부모의 일방적인 결정으로 아이가 해외로 입양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 미혼의젊은 여성에게 그녀의 부모는 말한다. 너와 네 아이의 행복을 위한 선택이었노라고, 긴 세월 떨어져 사는 동안 엄마와 아이는 각자의 삶에서 슬픈 의문을갖게 될 것이다. 과연 이런 삶이 행복일까. 행복을 왜 타인이 결정하는가 아이를 낳았지만 키우지 못했다는 죄책감, 부모에게조차 버림받았다는 외로움과 분노를 누가 감히 행복으로 치환했던가. - P7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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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 개념은 처음에는 어느 정도 정적인 성격을 띠었다. ‘통일‘은 이미 주어진, 종종 의식되지 못한 은폐된 통일을 나타냈다. 예술작품의 통일은 예술작품을 결정하고 예술작품과 함께 제공된다. 예술작품을 포괄하는 더상위의 통일, 즉 한 나라 안에서 한 시대 안에서의 예술의 통일, 문학의 통일도 역시 요구되는 것이 아니라 하나의 현존하는 현상으로 확인된다.  - P82

‘통일‘은 이제 빈번히, 특히 미래의 기대 속에서, 다름 아닌 질서, 조화, 정의, 행복의동의어로 나타났고, 이러한 의미에서 통일은 극우주의자들부터급진적인 좌파 세력에 이르기까지 모든 정치적 집단들에 의해 간절히 요구되었다. 그래서 그 단어가 갖고 있는 비합리적인 열광적힘이 우리 세기에도 현실의 이념적인 은폐에서뿐만 아니라 대중들의 동원에서도 입증될 수 있었다. - P8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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슬라브 사회는 지배계급(전사 귀족) 내에서 서유럽식 규범에 점차 적응하는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서유럽과 같은 조건적 토지 보유제(상급자에게 충성을 바치고 토지를 보유하는 일)나 법적 전통, 계약 이념(보호를 받는 조건으로 하는 복종) 등은 잘 확립되지 않았다. 자유도시가 발달하기도 어려웠고 귀족에게 면세권이 없었다. 이것이 의미하는 바는 동유럽 일대 지배계급의 응집력이 서유럽보다 훨씬 미약했고, 귀족이 너무 광대한 땅에 흩어져 있어 왕조가 이들의 충성을 확보하기 어려웠으며, 그 결과 훗날 귀족의 반동이 오래 지속되면서 근대적 국가조직을 창출하기 어려웠다는 것이다.

1차 대전에 얽힌 복잡한 사정은 이미 7장에서 다 얘기했다. 하지만 다민족국가 오스만제국이 결국 내셔널리즘 때문에 유럽 지역에서 밀려난 것을 옆에서 지켜보던 오스트리아가 자기네 역시 내셔널리즘으로 인해 붕괴될 것을 우려하여 자포자기 심정에서 상당히 의도적으로 전쟁 발발을 자초한 면이 있다는 지적은 여기에서 다시 해도 좋으리라.

헝가리는 동유럽에서 가장 개혁 지향적인 국가였다. 1956년 사건 이후 모스크바의 간섭이 있긴 했지만 시장경제를 도입하려는 노력과 개혁은 계속 진행되었다. 브레즈네프는 카다르의 충성심을 신뢰하며 헝가리 국내 개혁을 용인했다. 카다르 정권은 시장 지향적 개혁 정책을 추진하고 소련식 계획경제를 폐지했다.

슬라브 농업은 쟁기와 윤작을 도입하여 생산성이 향상되었다(500년 무렵). 이에 따라 제조업(특히 은세공)이 가능해지고 더 부유한 인근 지역과 교역하면서 새로운 부가 창출되기 시작했다. 무슬림 칼리프들과의 노예무역이 슬라브족이 쌓은 중요한 부의 원천이었다(8세기, 중부 유럽에서 아랍 은화가 많이 발굴됨).

전반적으로 동유럽 지역은 군주와 기사 계급 간에 중간 단계의 영주권이 없고, 공권력도 제한되거나 분할되어 있지 않았다. 농민에 대한 영주의 권력이 단일 장원의 권력에 영역적, 인신적, 경제적으로 집중되었다. 농민은 순수 노예에 근접한 수준의 인신적 예속 상태에 있었다. 동유럽 모든 지역에서 지방 행정직은 세습제가 아닌 임명제였다.

동유럽의 곡물이 서유럽으로 향하는 곡물 무역이 시작되고(13세기 중엽), 독일의 팽창 등으로 인해 동유럽은 서유럽 문명에 더욱 긴밀히 연계되었다.

13세기 말부터 유럽 전역에 위기가 찾아왔다. 위기란 인구 정체, 기후변화, 흉작, 대기근, 흑사병 창궐 등을 말한다. 동유럽은 자유로운 상업도시 같은 위기 충격 완화 장치가 별로 없어 서유럽보다 타격이 훨씬 컸다(14세기). 자치권이 확보된 자유도시도 없고, 별로 잘 발달하지 못했지만 명목상의 도시 생활도 거의 사라졌다.

흔히 나치가 반유대주의의 온상인 줄 알지만, 사실 반유대주의는 그 이전에 이미 중, 동부 유럽 농민들 사이에서 훨씬 더 폭발적인 호소력을 지녔다. 이들에게 유대인은 자본가, 교육받은 전문직의 상징이었다.

크림전쟁(1854~1856년)에서의 패배를 계기로 러시아제국 내에서도 근대화의 필요성이 부각되었다. 재판 절차의 자유화, 젬스트보(농촌 귀족의 자치 기구)와 도시 자치회, 개병제 등이 도입되었다. 국가가 군대를 재조직하려면 농민을 귀족이 아닌 국가가 직접 통제할 필요가 있었다. 이에 따라 알렉산드르 2세가 농노해방령(1861년)을 선포하여 모든 농노는 인신적으로 해방되었다.

러시아의 공업화는 1890년쯤 정점을 이루며 직물업, 주로 군사력과 관련된 중공업, 운송 부문에서 성과를 거두었다. 러시아에는 예로부터 공업화가 가능하지도 바람직하지도 않고 농업만으로도 살 수 있다는 주장이 분분하기도 했으나, 재무장관 비테Witte(재임 1892~1903년)는 공업화 수준이 낮으면 결국 국가가 위협받는다고 생각했다. 그는 서유럽을 따라잡기 위해 서유럽의 기술, 자본을 대거 유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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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요하네스 부르크하르트 외 지음, 오토 브루너 외 엮음, 송충기 옮김, 한림대학교 한림과학원 / 푸른역사 / 2022년 10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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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새로운 자연과학이나 자연과학과 철학적으로 논쟁을 펼쳤던 저자들은 반동이라는 이 개념을 점점 더 빈번하게 사용했는데, 이런 현상은 뉴턴 Newton 제3법칙이 공표되고 나서 이 법칙이 공개적으로 정착할 때까지 지속되었다. "모든 작용에는 항상 그것에 맞서서 작용하는 같은 크기의 반작용이 있다. 또는 두 물체의 서로에 대한 상호작용은 항상 크기가 같으면서 반대 방향을 향한다. 이후, 잘 알려져 있다시피, 계몽주의 시대 뉴턴 수용의 중요한 동반 현상으로서, 이 자연 과학 기본 개념들은 재해석되어 생물학, 인류학, 정치학 등의 영역으로 전이된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17


 라인하르트 코젤렉(Reinhart Koselleck, 1923 ~ 2006)의 개념사 사전 22번째 주제는 반동 - 복고(Reaktion, Restauration)다. 개념어의 역사 속에서 '반동 - 복고'의 개념은 처음에는 물리적 힘에 대응하는 대칭 개념으로 시작되었으나, 프랑스 혁명(French Revolution, 1789 ~ 1799)이라는 역사적 분기점을 통해 의미 전환이 일어난다. 작용에 수반하는 동반 작용이 아닌, 처음의 물리적 작용 - 혁명 - 을 부정하고, 원상태로 복귀하려는 움직임으로 변이되는 움직임 - 반反혁명 - 을 확인하게 된다.


 프랑스 혁명은 '작용-반작용'이라는 개념쌍을 분리시켰다. 언어적 차원에서 '작용Aktion'의 자리에 '혁명'이 등장하면서, 이제 이 단어는 자체적인 활력을 갖게 되었고, 그와 동시에 반작용 개념의 정치화를 위한 전제가 만들어지게 된다. 왜냐하면 반작용 개념이 작용 개념과 언어적으로 단절되면서 자연과학적 은유와도 결별하게 되고, 이제부터는 실제적으면서 역사적/정치적인 기반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18


 그것은 단순한 의미 변화가 아니었다. '작용 - 반작용'의 관계에서 반작용은 작용에 대한 긍정과 이에 수반하는 부수작용이다. 이에 반해, 프랑스 혁명 이후 변화된 '혁명 - 반혁명'은 혁명에 대한 부정과 쇄신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또한, '작용 - 반작용'이 정적인 상태에서 일어난 시간적으로 미래를 향한 움직임인 반면,  '혁명 - 반혁명'이 인위적인 과거로의 퇴행이라는 점에서 이들은 서로 다른 시간적 방향성을 갖는다.


 복고가 단지 반동으로 축소된 것과 그래서 역사철학적 측면이 현격하게 변화된 것은 복고가 자신에게 요구된 정당성을 상실했음을 의미한다. 복고 이데올로거들은 법질서와 법적 연속성이라는 이념에 의존했으며, 그런 만큼 그들은 혁명을 자의적 권력 탈취와 권력 행사, 즉 불법적이고 비도덕적인 것으로 취급했다. 혁명에 의해 만들어진 실재 상황들은 복고로 하여금 옛 상황의 복구를 위해 폭력 동원을 강요했으며, 그런 만큼 복고는 그들 스스로가 자신들을 정당화하는 슬로건들을 어겼고, 이미 기존의 법규들을 위반했다는 비판을 어쩔 수 없이 받아들여야만 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40


 19세기 '혁명'이 자유주의 운동의 형태로 표현되었고, 이에 대항하는 '반혁명'은 구체제 기득권의 체제 유지의 움직임으로 극한 대립으로 치닫게 된다. 그렇지만, 이들의 갈등과 대립은 '빈곤'과 '계급'문제의 해결이 아닌 '독일 제국의 성립'으로 마무리된다. 중앙집권적인 독일제국의 성립은 반혁명 세력이 주도라는 점에서 복고 세력의 승리였고 다른 한편으로, 독일 제국 아래에서 자유주의 운동의 많은 주장들이 부분적으로나마 수용되었다는 점에서 자유주의 운동의 성과라 할 수 있었다. 제국 내에서 수많은 목소리를 하나로 결집시키려는 정치적인 노력은 성과를 거두게 되고, 독일 제국이    민족주의국가로 자리잡아 나가면서 '반동 - 복고'의 움직임은 점차 쇠퇴하게 된다.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반동적 진행이 썼던 가면을 벗기는 것은 궁극적으로 빈곤 문제와 계급투쟁에서 시민계급의 입장을 그 중요한 실마리로 삼아 이루어졌다. 이에 따라 우선은 사회적 민주주의의 최초의 몇몇 이데올로기 대변자들이 가졌던 사회적인 것을 정치적인 것보다 우선시하는 원칙이 반동 개념에 대한 앞에서 언급했던 무관심을 변화시키도록 영향을 미쳤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68

 우리는 '반동 - 복고'의 단어가 사용되어온 역사 안에서 자연법칙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들이 사회과학에서 차용되면서 본래의 의미와는 다르게 사용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생물다양성을 설명하는 단어인 '진화(進化)'가 사회과학에서는 '우생학(優生學)'으로 변질되었듯이, 물리적 작용을 설명하기 위한 용어가 기득권들이 자신의 체제를 수호하기 위한 이데올로기로 활용해 온 역사가 바로 '반동- 복고'의 역사가 아닌가 생각하게 된다...


 자유주의는 자신들 스스로 싸움에 뛰어들 필요도 없이 승리했기에 패배한 것이다. 국내의 반혁명은 국가적 사건에서 오는 압력이 아니라, 유럽적 사건들의 압력에 의해 제압당했던 것이다. 독일인들은 반동의 쇠퇴를 고맙게 생각하지만, 그것은 자신들 스스로의 힘으로가 아니라 오로지 하나, 즉 유럽적 연관성들 속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94


 반혁명세력이 이제 막 기대치 않았던 자신들의 성과에 따라 자유주의의 투쟁력에 영향을 미치기 시작하는 시점에서, 이들 반혁명세력에 의한 자유주의적 목표의 실현은, 반혁명세력으로 하여금 위상 강화에도 불구하고 스스로를 정체성의 위기에 빠지도록 만들었다. _ 라인하르트 코젤렉, <코젤렉의 개념사 사전 22 : 반동-복고>, P95

귀족정이나 과두정 같은 고전적 정치 전통을 갖는 개념들도 아직은 이 시기에 ‘반동‘ 대신 사용되었다. 이는 중요한 사실을 암시하는데, 즉 반동 개념이나 근대적 정치 용어의 최종적 관철은 고전 정치학 용어들의 폐기나 재해석으로부터 연유되었다는 것이다. 새로운 반동 개념에 대한 초기의 소극적 태도 또한 복수의 개념들이 널리 사용되었음을 반영한다. - P37

반동의 사회사적 골격 Physiognomie에서 결정적으로 중요한 것은 신분제적 세력들의 공조와 협력이 군주제의 조력을 받아서야 비로소 발현되게 된다는 것이었다. 군주제의 위력은 여전히 국가기구(군, 관료제)에 대한 직접적 컨트롤을 통해 유지되고 있었다. - P75

반동 개념과 반동에 대한 비난 간의 경제적 고려를 두고 맺어진 이 연계는 그 자체로서 혁명기의 정치적 실망 이후 시민계층의 주된 이해관계가 이동한 것의 표지이다. ‘반동‘에 대한 모욕적 언어 용법은 이 경우에는 새로운 정치적 행동에 대한 촉구라기보다는 언어적/정치적 회고담 Reminiszenzdlek이다. - P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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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amoo 2022-12-27 09:38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개념사 사전이 22권까지 나왔군요! 저는 11권까지 나왔을 때 7권만을 소장하고 있는데...
워낙 유명한 저작이다보니, 계속 출간되는 거 같습니다~ㅎ

겨울호랑이 2022-12-27 11:17   좋아요 1 | URL
^^:) 네 이번에 5차분 5권이 추가로 번역되었습니다. 처음 출간때부터 시간이 많이 지나 품절/절판된 책도 제법 되지만, 그래도 꾸준히 출간되고 있어 감사히 읽고 있습니다!
 

말라카는 일본의 류큐(Ryukyu)와 무역 교류가 있었다.
이 관계는 장기적인 관계를 의미하며, 활, 후추, 안장, 그리고 소금 등을 거래하였다.

정향은 몰루카(Moluccas)*에서 나왔다. 커피, 육두구(nutmeg), 그리고 백단(sandalwood)은 각각 보르네오, 반다, 그리고 티모르에서 생산되었다.

이슬람 무역상인들에 대한 이들 상품의 공급은 실제로 유럽인들, 특히 포르투갈인들의 눈을 사로잡았다. 향신료 무역은 포르투갈이 필사적으로 마카오를 차지하려고 했던 첫 번째 이유다. 기독교 복음 전파는 부차적인 이유였을 뿐이다. 그 당시 향신료는 음식의 맛을 좋게 하고, 음식을 보존하기 위해 모든 사람들에게 중요하였다.

고아* 무역상들은 1월에 말라카에 도착해서 4월에 돌아갔다. 그들은 고아와 말라카의 양쪽 항구 사이를 40일간에 걸쳐 항해하였다. 그들이 말라카에서 구입한 상품은 주로 구리, 단검, 금으로 코팅된 장식함, 금으로 된 동전, 사향, 비단과 칼 등이었다. 그들은 또한 알후추와 정향(cloves) 등도 구입하여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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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원 2022-12-27 08: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흥미로운 책이네요.

따뜻한 연말 보내시길 바래요.

겨울호랑이 2022-12-27 11:18   좋아요 0 | URL
<말라카>는 우리에게 잘 알려지지 않은 동남아시아 역사의 일부를 알려주는 책이라 여겨집니다. 다만, 양과 깊이가 조금 아쉽기는 합니다만... 초원님께서도 행복한 연말 되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