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시 독일 경제가 회복되는 데는 이 원조보다 독일 본래의 잠재력이 훨씬 더 결정적 역할을 했다. 독일의 1948년 불변가격 자본 스톡은 전시의 파괴를 제하고도 1936년보다 10퍼센트 높은 수준이었다. 이는 독일 내에서 1930년대 말 이래 있은 투자 덕분이었다.

서독의 공공 부문은 대부분 나치 정권 시절부터 비롯되었다. 2차 대전 중 독일 합자회사 자본의 거의 절반이 직, 간접적으로 공기업 자본이었다. 사회민주주의자는 물론 기민당까지도 이를 추진했다.

서방세계의 복지국가는 부자에게서 세금을 거둬 가난한 자에게 이를 재분배하는 방식이라기보다는 개인의 돼지저금통을 적절히 관리하는 기능을 했다. 즉 보험, 연금, 교육 제도 운영 방식을 통해 국가가 적극적으로 나서서 개인의 일생 동안의 소득을 적절히 조정한 것이다

합스부르그는 유럽의 강대국으로 부상했다. 막시밀리안 1세는 부르고뉴와 네덜란드 귀족들에게 자극받아 행정 근대화를 추구했다. 인스부르그에 재무성을 창설하고 오스트리아 내 최초의 정부 자문 회의를 설치하는가 하면 대외 정책을 모색하기도 했다.

프로이센과 달리 합스부르그제국에서는 토지 귀족이 국가기구에 편입되어 있지 않았다. 그래서 결과적으로 이들에게 불리한 개혁을 제국이 시도할 수 있었다. 그런데 바로 이 점이 제국을 내적으로 취약하게 한 원인이었다. 문화적, 사회적으로 토지 귀족과 분리되어 있던 도시 출신 관료를 통해 제국이 귀족의 집단적 이해관계를 직접 침범하자 귀족들이 제각기 사나운 자기네 본성을 드러내기 시작한 것이다. 이 시대에 제국은 반혁명의 보루였으나 제국 자체는 무기력했고 표류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첨언하자면, 고대 전 시기에 걸쳐 살림살이 개념은 비교적 불변하는 사회적 규범에 구속되어 있었다. 고대에 이해한 바로는, ‘오이코노미아‘ 혹은 다른 그 어떤 개념도 각각 개별적인 단위의 경제활동을 총칭하는 개념이 되지 못했다. 그러므로 고대가 비록 그 용어를 근대에 전해주고 살림살이 활동에 대한 여러가치판단으로 큰 영향력을 끼쳤지만, ‘단 하나의 살림살이 개념을 전해준 것은 아니었다. - P43

요컨대 ‘살림살이‘와 ‘경제‘라는 한 쌍의 개념이 하나의 영역에둥지를 틀었다. 거기에서 사실상 물질적 생활토대가 형성될 뿐만아니라, 생계유지, 재산, 생업도 실질적으로 이루어졌다. 그렇기때문에 근대적인 용어의 변천에 대한 연결고리가 거기에 존재했다. 달리 말하면 당시에는 두 가지 연결고리가 존재했다.  - P97

요컨대 ‘상업Kommerzien‘과 ‘거래Handel‘ 라는 제목 하에서 다루는 영역이 독자적이고 전반적으로 긍정적으로 평가받는 분야로발전했다. 이미 이것은 대부분 근대적인 경제활동의 분야와 일치하며, 근대경제학의 ‘시장‘, ‘가격‘ 그리고 ‘통화‘와 같은 상업적범주도 등장했다. 18세기까지는 ‘상업‘이라는 단어가 가장귀감서와 농업을 특징으로 삼았던 ‘살림살이‘라는 단어와 나란히 사용었지만, 이제 전자가 상위 개념으로 자리를 잡아가는 유리한 계기가 마련되었다.  - P116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정파·나이·종교의 차이를 불문하고 선거 관련 음모론을 사람들이 찾는 이유는 그것이 패배의 억울함과 고통을 살뜰히 다독이기 때문이다.

형식의 측면에서도 세 가지 정보는 나름의 독특성을 보인다. 먼저 루머는 휘발성이 강한 구전mouth-to-mouth 커뮤니케이션이 중심이고, 가짜뉴스는 뉴스의 외관을 갖춘 루머나 음모론이랄 수 있고, 음모론은 나름의 완결된 스토리 라인을 갖춘 이야기 성격이 강하다.

음모론은 다음의 세 가지 요소와 세 가지 배역으로 구성된 이야기다. (1) 세상에 우연은 없다. (2) 모든 건 서로 연결되어 있다. (3) 보이는 게 다가 아니다.

음모론은 고통을 인지적·감정적·도덕적으로 설명하는 이론이다. 도저히 납득할 수 없는 현실의 고통과 그에 관심도 없는 위선적인 기득권자들에 대한 도덕적 분노가 사그라지지 않는 한 음모론은 계속 생존할 것이다.

그렇다면 그런 음모론은 어떻게 전파되어 사람들의 관심을 끌까? 비결은 반복에 있다. 소셜 미디어의 시대에 중요한 것은 증거가 아닌 ‘리트윗·리포스트·좋아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19세기에 내셔널리즘은 긍정적, 부정적으로 유럽의 신생국가 통합에 기여했다. 1914년 전야까지 유럽 국민국가들 내에서 보수 귀족과 중산층 그룹 간에 국민적 일체감이 다져졌다. 반면에 이들과 혁명적 사회주의 집단 간에는 갈등이 증폭되는 듯이 보였다. 그렇다면 소위 국가를 초월한다고 하는 사회주의가 독일의, 그리고 나머지 다른 국민국가들의 존립을 저해했던가?

이처럼 1914년 이전에 독일의 사회당은 입으로는 혁명을 말했지만 이 같은 거대한 독일 노조의 영향을 받아 실제로는 개혁을 추구했다. 제1, 제2 인터내셔널처럼 사회주의 자체가 국제적으로 통합되는 듯 보이는 이면에서 나라별로 다양한 모습으로 발전하고 있었다.

히틀러는 히틀러가 초래하지 않은 대공황의 산물이었다. 이 사실은 경제사적으로 의미심장하다. 나치 정권하에서 공식적으로 실업은 해결되고 노동력 부족 사태까지 낳았다.

파시스트 우파와 비非파시스트 우파 간에는 중요한 차이점이 있다. 즉 파시즘은 밑으로부터 대중을 동원하여 등장했다. 대표적 파시즘 정권이라 할 나치 정권 역시 비파시스트 우파 세력과 달리, 일반 대중에게서 확산된 민심을 동원하여 등장했다. 그런 다음 모든 정적을 물리력으로 제거했다.

왜 1차 대전 후에 급진 우파가 급격히 부상했는가? 그것은 1차 대전으로 사회구조가 붕괴되는 가운데 그 붕괴된 사회의 일원이던 중간 계층과 소시민층 출신 민족주의 청년들이 파시즘에 매력을 느끼기 시작했기 때문이다. 파시즘은 사실상 현실로 받아들여졌던 사회혁명과 노동계급의 위력에 대한 대응이기도 했다.

파시즘은 독점자본(혹은 대기업)의 표현도 아니다. 파시즘은 결과적으로 비자유주의적 방식으로 자본주의경제를 운영하는 체제였다. 공산주의와 달리 사유재산은 인정하되 이를 국가가 대대적으로 통제했다. 이들은 대공황을 효과적으로 이겨내고(독일), 마피아를 제거하면서(이탈리아) 노동운동을 파괴했다. 파시즘은 자유주의적 자본주의 체제가 맞은 위기의 산물로 등장한 정치체제였다. 그러므로 자유주의적 자본주의를 확실히 발달시켜본 경험이 없는 나라의 정권에게는 파시즘 개념을 적용할 수 없다.

케인스에 따르면, 1914년 이전에 유럽 번영의 대부분은 독일의 경제성장에 의존한 것이었으므로 독일을 경제적 장애자로 만드는 것은 현명한 처사가 아니었다. ‘독일에 천문학적 규모의 전쟁배상금을 부과한 조항이 경제 대국인 독일 경제를 몰락시키고 결국 주변 나라를 모두 가난에 빠뜨릴 것’이기 때문에 이 조약은 어리석은 것이었다.

‘핫머니’가 채무국에서 채권국으로 급격히 이동하도록 자극한 요인으로는 1930~1931년의 금융 위기, 여러 나라 경제의 안정성에 대한 신뢰 상실과 통화가치 상실 등을 꼽을 수 있다. 자산 보유자는 단순히 자기네 투자가치를 보호할 목적에서 엄청난 금액을 인출했다. 그러자 많은 나라가 금과 외환 준비금을 방어하기 위해 외환 통제를 단행하기 시작했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몸젠의 로마사 5 - 혁명 : 농지개혁부터 드루수스의 개혁 시도까지 몸젠의 로마사 5
테오도르 몸젠 지음, 김남우.성중모 옮김 / 푸른역사 / 2020년 7월
평점 :
장바구니담기


 아프리카와 희랍, 아시아이 국가들은 공식적인 독립과 사실적인 종속의 중간이라는 매우 불리한 상황에 처해 있었다. 이들은 로마가 카르타고, 마케도니아, 쉬리아 등과 벌인 전쟁과 전후 처리 과정에서 로마 패권의 영역 안으로 귀속되었다. 독립국가라면 그래야만 할 때 전쟁의 수고를 부담할 것이고 독립 유지의 이런 대가는 그다지 크다고 할 수 없다. 또 독립을 잃은 국가라면 상실의 보상으로 적어도 주변국들로부터의 안전을 보호국에게 보장받을 수 있다. 하지만 로마의 피호국가들은 독립도 안전 보장도 얻지 못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8


 테오도르 몸젠 (Theodor Mommsen, 1817~1903)의 <몸젠의 로마사 Romische Geschichte 5>에서 우리는 제국(帝國)의 길로 가는 로마를 확인할 수 있다. 카르타고 전쟁에서 멸망의 위기를 겨우 넘겼던 이들은 마음의 여유도 없었던 것일까. 카르타고와 코린토스 등 한때 번영했던 도시와 국가들은 모두 잿더미로 만들면서, 지중해연안을 로마의 세력권으로 만드는 것에 성공한 로마시대가 새롭게 열린다.


 원로원은 사령관에게 카르타고 도시와 도시 외곽의 마갈리아를 철저히 파괴할 것과, 마지막까지 카르타고에 협력한 모든 지역도 남김없이 파괴할 것을 명했다. 또한 카르타고 땅을 갈아엎을 것을 명했다. 이는 이후로 법적 형태의 도시가 존립할 여지를 없애기 위한 것이었는바, 카르타고 땅을 영원히 황무지로 만들어 주거와 경작이 일체 불가능하게 만들고자 하는 것이었다. 원로원의 명령은 그대로 시행되었다. 17일 동안 카르타고는 불탔고 폐허를 남겼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55


 희랍의 첫째가는 무역도시인 번영의 코린토스를 아무 동기 없이 파괴한 것은 로마 연보의 커다란 오점으로 남았다. 원로원의 확고한 명령에 따라 코린토스 시민들은 구금되었고 목숨은 부지했지만 노예로 팔려갔다. 도시 성벽과 성채는 파괴되었다. 장기간 도시에 주둔할 의사가 없었을 때 불가피한 일이지만, 도시는 초토화되었고, 황폐한 폐허 위에 모든 재건 행위를 일체 금지하는 일반적 저주가 내려졌다. 도시의 일부는 시퀴온이 코린토스를 대신하여 이스트미아 축제의 비용을 떠맡는다는 조건으로 시퀴온의 영토가 되었고, 도시의 대부분은 로마 공동체의 소유로 선포되었다. 이리하여 한때 수많은 도시국가들로 가득했던 희랍 땅의 마지막 남은 소중한 보물, '희랍의 눈동자'가 빛을 잃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74


 로마에게 패권을 안겨준 카르타고 전쟁과 마케도니아 전쟁이었지만, 두 전쟁의 성격은 달랐다. 이탈리아를 포함한 서지중해 전역이 전장이었던 카르타고 전쟁과는 달리 로마에서  멀리 떨어진 그리스와 아시아 일대에서 벌어진 마케도니아 전쟁을 거치면서 로마군은 빠르게 명성을 잃으며 심하게 흔들리는 모습을 보이게 된다. 그리고, 그 원인은 상층부인 원로원의 폐쇄성과 하층부 자영농의 몰락에 있었고, 이를 중심으로 한 체제 개혁의 필요성은 지속적으로 주장되었다.


 실현 가능한 유일한 방안은 이들 피호 국가들을 로마의 속주로 변신시키는 것뿐이었다. 그리고 실현 가능성을 더욱 높이는 방안은, 로마의 속주 정책을 크게 나누어 속주 총독은 오로지 군사 영역을 관장하고 주요 행정과 재판은 속주 공동체에 맡기거나 맡겨야 한다고 천명함으로서 과거 정치적 독립을 누리던 것들 가운데 계속해저 존립하는 것은 공동체 자유의 형식으로 유지하는 것이었다. 누구도 이런 행정 개혁의 필연성을 모를 수 없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31


 만약 통치를 현안의 처리를 넘어서는 무엇이라고 한다면, 이 시대의 로마에 통치는 전무했다. 통치집단의 유일한 주요 이념은 오로지 그들 특권의 유지, 가능하다면 확대에 있었다. 국가는 최고 관직에 최선의 올바른 인물을 천거할 권리를 가지지 못했지만, 통치집단의 구성원 모두는 최고 국가관직의 출마 권리를 태생적으로 가졌다. 이 권리가 내부자들의 부당한 경쟁이나 국외자들의 합류로 결코 위축되지 않아야 했기에, 이들 당파는 집정관의 재선을 제한하거나 '신인'의 배제를 가장 중요한 정치적 목표롤 삼았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04


 이러한 체제의 문제점을 지적한 이들이 유명한 그라쿠스(Gracchus) 형제들이다. 귀족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민중을 위해 호민관에 재직하며 개혁을 주도하다가 몰락한 애석한 인물들. 그라쿠스 형제에 대한 일반적인 평가지만, 몸젠은 이들에 대해 다소 냉혹한 평가를 내린다.


 토지 자본가들은 계속해서 자유민 노동자가 아니라 노예를 고용했는데, 후자는 전자와 달리 군복무를 하지 않기 때무니었다. 그리하여 자유민 무산계급은 노예와 비슷한 수준의 가난으로 내몰렸다. 자본가들은 계속해서 품삯에도 못 미칠 정도로 저렴한 시킬리아 노예 곡물을 들여와 수도 로마의 시장에서 이탈리아 자유민 곡물을 밀어냈고,  결국 이탈리아 자유민 곡물은 이탈리아반도 전체에서 가격 하락을 겪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21


 몸젠은 그라쿠스의 개혁을 '토지 개혁이라는 이슈를 통한 대중의 지지로 호민관 지위를 활용한 독재정'의 시도로 바라본다. 농지개혁법 시행을 위해 호민관 재선을 추진하다가 죽음을 당한 티베리우스 그라쿠스(Tiberius Sempronius Gracchus, BCE 163 ~ 132)와 형이 추진한 정책과 식민도시 건설을 통해 현 위기를 타파하고자 했던 동생 가이우스 그라쿠스 Gaius Sempronius Gracchus, BCE 154 ~ 121) 모두 폐쇄적 엘리트 통치를 대신한 새로운 체제를 제안했다는 점에서 의미를 갖지만, 그들의 개혁을 자신들의 야망을 위한 수단으로 본다는 점에서 몸젠의 평가는 신선하면서도 다소 박하게 느껴진다.


 그락쿠스 혁명의 본질적 오류는 한 가지, 다시 말해 당시 민회의 성격을 지나치게 빈번히 간과했다는 점이다. 지난날의 로마는 함께 모여서 함께 토론할 수 있던 도시국가 공동체였지만, 현재의 로마는 그 구성원을 하나의 민회에 모으고 그 민회로 하여금 결정을 내리도록 할 경우 통탄스럽기도 하고 우스꽝스럽기도 한 결과에 도달하게 될 거대 국가였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41


 민회라는 녹슨 장치를 선거와 입법에 활용한다는 사실 자체가 이미 충분히 해로운 일이었다. 하지만 이런 군중, 그러니까 민회, 사실적으로 대중 집회가 정부를 공격하도록 허용되고 이런 공격의 방어장치를 원로원은 빼앗겼을 때, 이런 소위 시민체가 자신을 위해 모든 부속물을 포함한 농지를 국고에서 빼내 처결하게 되었을 때, 무산자들에 대한 관계와 영향력을 얻은 어떤 자가 골목길을 몇 시간 지배하게 허락되어, 그의 계획에 주권적 인민의 의지라는 법적 직인을 찍을 가능성을 가지게 되었을 때, 그것은 인민자유의 시작이 아니라 종말이었는 바 민주주의가 아니라 독재에 이르렀다. 때문에 앞선 시대에 카토와 그의 동지들은 이런 문제를 결코 민회에 회부하지 않았고 오로지 원로원에서만 다루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43


 가이우스 그락쿠스는, 과거와 현재의 많은 선량한 사람이 믿었던 것과 달리 로마 공화정을 새로운 민중적 토대 위에 재건한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는 로마 공화정을 철폐하고, 지속적인 재선의 종신 관직으로, 형식적 주권체인 민회들을 절대적으로 통제하는 절대적인 힘을 가진 관직으로, 그러니까 무제한적 권한의 종신 호민관직으로 공화정 대신 독재정을 이룩하고자 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173


 이러한 위기 속에서 북아프리카 누미디아왕 유구르타(Jugurtha, BCE 160 ~ 104) 전쟁은 공화정의 한계를 극명하게 드러낸다. 그리고, 이 전쟁을 통해 로마 원로원에 의한 통치가 결코 철인(哲人)통치가 아닌 수많은 로비의 결과물임이 드러나면서 공화정에 대한 회의가 커지고, 병농일치(兵農一致) 체제가 무너지면서 전문 전투집단이 등장하게 된다. 개혁을 통한 과저 체제에 대한 연착륙이 불가능해진 이후 등장한 두 인물, 마리우스(Gaius Marius, BCE 157 ~ 86)와 술라(Lucius Cornelius Sulla Felix, BCE 138 ~ 78)은 다음 시대를 이끌게 된다.


 아프리카 피호국의 순치보다 중요한 것은 유구르타 전쟁의, 혹은 유구르타 반란의 정치적 결과들이다. 물론 흔히 너무 크게 부각되곤 한다. 무엇보다 정부의 모든 약점이 적나라하게 세상에 드러났다. 이제 공공연해졌고 소위 최종 판결된 바, 로마의 모든 통치귀족들에게 평화조약은 물론 거부권, 주둔 요새, 병사들의 목숨까지, 모든 것이 매매 가능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37


 일시적인 위기 동안 유일하게 등장한 새로운 요소가 있다. 그것은 군사적 능력자들과 군사적 권력이 정치혁명에 개입했다는 것이다. 마리우스의 등장이 직접적으로 과두정을 몰아내고 독재정을 세우려는 시도의 계기가 되었는지, 혹은 여러 유사한 사례들처럼 그저 권력의 특권을 향한 개별적 공격이었으며 이렇다 할 결과 없이 지나가버린 사건이었는지는 아직 분명하지 않다. 하지만 예견할 수 있었던 것은, 두 번째 독재정의 씨앗이 싹을 틔울 때, 그 독재정의 수장은 가이우스 그락쿠스처럼 정치가가 아니라 군인이 될 것이라는 점이었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39


 공화정 국제는 무엇보다 시민이 병사요, 병사가 시민이라는 사실에 기초한다. 이것이 군사제도의 혁명과 함께 사라졌고, 이제 병사 신분이 형성되었다. 여기에 새로운 군사훈련 교본이 직업적 검투사 교본에서 빌려온 군사훈련과 함께 도입되었다. 전쟁 복무가 점차 전쟁 직업으로 바뀌었다.(p297)... 만약 좀 더 중요한 문제에서 군대와 사령관의 이해관계가 반(反)국헌적 욕망에서 서로 일치할 경우, 어떤 법률이 전장의 소음 때문에 들리지 않는 일이 또다시 벌어지지 않으리라고 과연 누가 장담할 수 있을까? 상비군이 생겨났고, 병사 신분이, 경호부대가 만들어졌다. 사회제도에서처럼 이제 군사제도에서도 미래의 독재정을 위한 기둥들이 이미 세워졌다. _ 테오도르 몸젠, <몸젠의 로마사 5>, p298


 개인적으로 <몸젠의 로마사 5>에서 가장 인상적인 부분은 그라쿠스 형제 개혁에 대한 몸젠의 평가다. 실패한 개혁가로서 후대에 여러 면에서 아쉬움을 남기는 이들이지만, 몸젠은 그들을 '포퓰리스트(Populist)'로 규정한다. 물론 그들의 개혁 조치가 후대의 카이사르  Gaius Julius Caesar BCE 100 ~ 44)에 의해 상당부분 실현되었다는 점에서 만약 그들의 개혁조치가 성공을 거두었다면 로마의 제정이 더 일찍 시작되었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에 한편으로 수긍한다. 그렇지만, 역사에서 패자로 남겨진 그들에 대한 평가가 너무 냉혹한 것은 아닐까. 못다 이룬 첫사랑이 생각나고 아름다운 추억으로 기억에 남는 것처럼, 역사 속에서 수많은 이들을 좌절시킨 정치경험 안에서 그라쿠스와 같은 이들에 대한 아쉬움과 미련은 허용되어도 좋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피호 국가들은 우선 모든 국가와 전쟁을 할 능력이 안 되는 국가는 누구와도 전쟁을 할 수 없다는 사실, 그리고 모든 피호 국가의 소유관계와 권력관계가 사실상 로마의 보장으로 존립하기 때문에 모든 갈등에 있어 그들에게 남은 선택지는 이웃 국가들과 호의적으로 해결하거나 아니면 로마에 판결을 요청하는 것뿐이라는 사실을 진작 깨달았어야 했다. - P29

국가를 이탈리아반도에 국한하며 이탈리아 밖은 다만 피호 관계를 통해 지배한다는 카토 시대의 원칙이 지켜질 수 없음을 다음 세대의 지도자들은 정확하게 이해했고, 또 이들은 이런 피호 관계가 아니라, 독립 공동체를 보장하면서도 로마 직접 통치의 관철이 필연적임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 신 질서를 확고하게, 신속하게 , 일관되게 도입하지 않았다. - P98

칸나이 패자와 자마 승자의 아들과 손자가 아버지와 할아버지와는 전혀 다른 종류의 사람이었다는 것은 아니다. 현재 원로원에 앉아 있는 사람들도 다른 때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확고한 부와 물려받은 정치적 지위를 가진 소수의 폐쇄적 가문들이 정부를 이끄는 곳에서, 이들은 위기의 시대에는 무엇과도 비교될 수 없는 끈질긴 일관성과 영웅적 희생정신을 발휘했고, 평화의 시기에는 근시안적이고 이기적이고 느슨하게 국가를 운영했다. 그런데 문제의 핵심은 다른 것들과 마찬가지로 세습과 동료제에 있었다 - P103

이제까지는 국가를 구성하던 두 권력, 통치하고 조정하는 권력인 정부와 입법 권력인 민회가 법정을 나누어 지배했다면, 이제부터는 물질적 이해관계의 굳건한 토대 위에 단단히 결합된 특권계급을 형성한 자본귀족이 재판하고 조정하는 권력으로 등장했다는 것이다. 이들은 통치하는 귀족계급과 거의 동등한 위치를 가지게 되었다. - P169

로마의 군사제도를 징병제에서 모병제로 수정하는 일을 마리우스는 5년 동안 내리 집정관직을 맡은 동안 - 그가 임명 조건이 아니라 시대적 요구였던 무제한적 최고 명령권을 쥐고 있을 때에 - 착수하여 완성했는데, 이는 민중당파의 장군이 가진 비(非)국헌적 최고 명령권이 남긴 깊은 상흔으로 영원히 지워지지 않았다. - P276

민중당파의 개혁가들을 쓸어버렸던 똑같은 폭력적인 처참한 최후가 이제 귀족계급의 그락쿠스에게도 찾아왔다. 여기에 깊고 슬픈 교훈이 놓였다. 귀족계급의 저항이든 유약함이든, 개혁의 시도가 같은 계급에서 시작되었는데도 개혁은 실패했다. - P330


댓글(0) 먼댓글(0) 좋아요(4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