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케로의 의무론』을 읽는 재미가 여간 쏠쏠한 게 아니다. 평일엔 책을 별로 읽지 않는 편인데 이 책은 너무나 재미있어서 틈날 때마다 계속 붙잡고 읽고 있다. 책을 펼친지 며칠 되지도 않았는데 벌써 거의 다 읽었다. '도덕'을 다룬 옛 고전 가운데 이토록 재미있는 책도 다 있었나 싶다. 어느새 스무 쪽도 남지 않았다.

 

그런데 이 책이 이토록 재미있게 읽히는 이유 가운데 한 가지는 명백히 '요즘 뜨는 뉴스들' 덕분이다. 책 속에 끊임없이 등장하는 유명한 역사적 사례들이나 비유들을 읽으면 그때마다 어김없이 '현실 속 인물들과 상황들'이 자꾸만 겹쳐 떠오르니 어찌 책 읽는 재미가 없을 수 있겠는가 말이다.

 

이 책은 모두 3권으로 구성되어 있는데 제1권이 <도덕적 선에 대하여>, 제2권이 <유익함에 대하여> 제3권이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이다. 이렇듯 겉으로만 살피면 책의 내용이 여간 따분해 보이지 않는다. 그런데 막상 책을 읽어 나가다 보면 꼭 그렇지만도 않다. 제3권의 중반부에 실린 '도덕적 선과 유익함의 상충'을 다루는 부분까지 읽게 되면 너무나 흥미진진한 사례들이 망라되다시피 실려 있어서 책 읽는 재미가 정말 '깨가 쏟아지는 듯한' 느낌이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이다. 이런 책을 읽는 재미를 두고 저런 표현을 한다는 게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줄 알지만, 사실이 그런 걸 어쩌겠는가.

 

오늘 읽은 구절 가운데 정말 인상적인 대목 하나는 바로 다음 내용이다.(이 대목의 앞부분부터 인용하자면 너무 많은 부분을 끌어와야 하겠기에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끌어왔다.)

 

"전혀 그렇지 않다. 바다 한 가운데에를 항해할 때 선주는 배가 자기 소유라 해서 배에서 승객을 깊은 바다물 속에 절대로 내던져 버리려 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승객들이 운임을 냈을 때 그 배는 목적지에 도착하기까지 승객들이 빌린 거나 마찬가지이므로 선주의 것이 아니라 승객들의 소유이기 때문이다."

 

이 글을 읽을 무렵에 떠오른 '새로운 뉴스'는 바로 다음 내용이었다.(이 뉴스에 대한 인용 역시 앞부분과의 '형평'을 고려해서가 아니라, 그저 쓸데 없이 내 글이 자꾸만 길어질까 두려워 거두절미하고 '핵심'만 끌어왔다.)

 

또 "'주기장 내에서 겨우 17m 후진했다가 제자리로 돌아왔으니 항로 변경이 아니라는 말은 법을 제일 잘 아는 변호사들이 할 말이 아니다"며 "모든 변호사는 음주운전을 1m를 했든 10km를 했든 음주운전이라고 말할 것"이라고 말했다. 그러면서 "운항 중인 항공기를 위력으로 돌린 건 명백한 사실이며 팩트"라고 강조했다.

 

http://news.naver.com/main/ranking/read.nhn?mid=etc&sid1=111&rankingType=popular_day&oid=008&aid=0003405783&date=20150121&type=1&rankingSeq=1&rankingSectionId=101

 

물론 내가 책에서 인용한 내용과 뉴스에서 인용한 내용이 서로 정확히 맞대응을 하는 건 아니다. 다만 두 가지 모두 '땅콩 회항'을 연상시킨다는 명백한 공통점이 있다. 물론 나는 이 두 대목을 그저 억지로 연결시켜 보느라 이 글을 쓰는 게 결코 아니다. 내가 진정으로 얘기하고 싶은 얘기는 바로 키케로가 이 책에서 극구 주장하고 싶었던 내용과도 일치하는데, 그건 바로 '도덕적 선과 유익함은 결코 상충되는 게 아니'라는 것이다. (이게 무슨 뜻인가.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좀 복잡해 진다. 더군다나 키케로의 이 책을 전혀 읽어보지 못한 사람들에겐 더더욱 헷갈리는 얘기로 들릴지 모르겠다. 그러나 내가 얘기하고 싶었던 부분이 바로 그 얘기이니 이 글을 계속 써 보겠다.)

 

이쯤에서 이 책 내용의 핵심이라고 할 만한 내용을 직접 인용해 보겠다. (물론 이천 년 전에 쓰여진 책인 만큼 등장 인물들이나 속담 조차도 생소하게 들리는 대목이 적지는 않다.)

 

나는 어린 시절에 아버지께서 다음과 같은 말씀을 하는 것을 듣곤 했다. 콘술을 지낸 바 있는 가이우스 핌브리아가 정말로 도덕적으로 선한 로마의 기사인 마르쿠스 루타티우스 핀티아의 소송사건에서 재판을 하게 되었는데, 핀티아는 그의 재산을 내걸고 "만약 법정에서 자신이 선한 사람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게 되면," 그 재산을 몰수당해도 좋다고 말했다. 그러자 핌브리아는 핀티아에게 자신은 절대로 그 사건의 재판을 맡지 않을 것이라고 말했다. 그 이유는, 만약 그가 핀티아를 유죄로서 판결하게 되면 훌륭한 사람에게서 그의 명성을 빼앗는 것이 될까 두렵고, 또 반대로 무죄 판결을 내리게 되면 이미 수많은 의무 이행과 찬양받을 만한 업적으로서 명성이 자자해진 그를 새삼스레 선한 사람이라고 선언하는 것으로 생각될까 염려해서였다.

 

그런데 소크라테스뿐만 아니라 심지어 핌브리아가 알고 있는 이러한 사람에게는,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은 무엇이건 간에 절대로 유익한 것으로 보일 리가 없다. 따라서 이러한 선한 사람은 공개적으로 떳떳하게 밝힐 수 없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감히 행하려고 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정말 생각조차 하려 하지 않는다. 농부들조차도 의심이라고는 전연 하지 않는 이 윤리 문제들에 대해 철학자들이 의심한다는 것은 도덕적으로 옳지 않으며, 부끄러운 불명예의 일이 아닌가? 농부들 사이에서 생겨난, 이미 진부해진 오래된 속담이 있다. 즉 어떤 사람의 신의와 착실함을 칭찬할 때에,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그 사람과는 함께 어두운 데에서 손가락 수를 맞추는 놀이를 할 만해.'43) 이 속담이 주는 교훈은, 다름이 아니라 비록 네가 나쁜 짓을 해도 전연 다른 사람의 지적을 받지 않는 가운데 남의 재산을 자기 것으로 소유할 수 있다 할지라도 데코룸하지 않은 것은 결코 이롭지 않다는 것이다.

 

이 속담에 비추어 볼 때, 저 기게스나 내가 조금 전에 언급했던 손가락을 움직여 모든 상속자들의 이름을 지워버리는 그런 자에게는, 어떤 변명이나 용서의 여지가 전연 없다는 사실을 너는 보지 못하느냐? 진실로 도덕적으로 옳지 못한 것, 바로 그것이 아무리 잘 은폐된다 하더라도 그것은 절대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될 수 없는 것과 마찬가지로, 도덕적으로 선한 것이 아닌 바로 그것은 자연을 거역하고 자연과 상충하면서 유익한 것이 될 수가 없다.

 

43) 현대 이탈리아의 morra. 어두운 데에서 한 사람이 재빨리 자기 손가락의 수를 펼쳐 보이면서 맞추기를 원하면, 동시에 상대방도 자기 손가락의 수를 펴서 맞추어 보는 놀이.

 

인용문이 몹시도 길고 낯선 내용들이라 키케로가 주장하고자 하는 바를 속속들이 모두 이해하기는 어렵다 하더라도, 적어도 키케로가 무슨 뜻으로 저런 글을 썼는지는 누구라도 어렴풋이 짐작할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옮겨 보았다. 더군다나 그는 고대 로마에서도 가장 뛰어난 언변과 변론과 웅변술로 '법정에서 맹활약했던' 인물이었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땅콩 회항'을 두고 치열한 법리 공방을 벌이는 바로 지금의 '서울의 한 법정'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더구나 그 재판을 맡은 재판관은 '억울한 당사자'로 여겨지는 사람을 세심하게 배려하려는 차원에서, 결코 아무나 쉽게 상상하기 어려운 '기막힌 묘수'까지 들고 나왔다. (어쩔 수 없이 '불안한 약자' 신세로 내몰린 채 앞으로도 오랫동안 직장 생활을 계속해야 될 그 사람의 입장까지 고려하여 무소불위의 힘을 지닌 '재벌 총수'까지 재판정으로 불러낸 건 정말 흥미로운 일이 아닐 수 없다. 현대판 '솔로몬의 판결'이 나올지 지켜볼 일이다.)

 

키케로가 이 책에서 시종일관 주장하는 바는 결국 '도덕적으로 선함'을 포기하고 얻는 '유익함'은 결코 유익함이 아니라는 주장이다. 도덕적으로 선함과 유익함이 상충할 때 우리는 얼마나 많이 '유익함'을 먼저 앞세우기 쉬운가. 그런데 키케로가 이 책에서 제시하는 무수한 역사적 사례들을 부지런히 따라다니다 보면 결론적으로 '도덕적으로 선함과 유익함'이 결코 상충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깊이 깨닫게 된다. 키케로의 얘기를 조금 더 들어 보자.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명성을 포기하고 얻어야 할 만큼 이롭고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을까? 네가 이야기하고 있는 유익함이 선한 사람이라는 칭호와 신의와 정의로움을 빼앗아 간다면, 그에 상응하는 정도로 그 유익함이 너에게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은 무엇일까? 사람이 야수로 바뀌는 것과 사람의 외형만을 지닌 채 야수와 같은 잔인함과 야비함을 가지고 행동하는 것과는 어떤 차이가 있겠는가?

 

그런데 도덕적으로 올바른 모든 것을 무시하는 반면, 권력을 추구하는 사람들은 파렴치한 권력을 소유한 카이사르를 심지어 장인으로 모시려고 하는 폼페이우스와 같은 행동을 하고 있지 않은가? 그는 장인의 인기가 떨어지는 것이 자기에게 매우 유익한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것이 얼마나 도덕적으로 악하며 무익한 것인가를 그는 알지 못했다. 반면 장인 자신은 항상 포에니의 처녀들이라는 그리스의 시를 읊곤 했는데, 나는 정리는 잘 안되지만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말해 보겠다.

 

법이 범해져야 한다면,

왕이 되기 위해서나 범법이 행해져야 하리라.

다른 경우에는,

경건한 마음을 품고 범법하지 말지니.47)

 

모든 것들 가운데 가장 추악한 한 가지를 취한 사람은 에테오클레스48) 아니 오히려 유리피데스49)가 말하는 것처럼 죽어 마땅하도다.

 

47) Euripides: Phoenissae, 5, 524 

 

48) Eteocles: Thebes의 왕, Oedipus의 아들인 Eteocles와 Polynices 형제는 순서를 바꾸어가면서 통치하기로 하고 먼저 형인 Eteocles가 왕위에 올랐으나, 그는 혼자 통치하기 위해 약속된 임기가 끝난 후에도 동생 Polynices에게 왕위를 넘겨주지 않고 오히려 그를 추방하였다. 그 결과 형제가 전쟁을 하다가 서로의 손에 둘 다 죽었다.

 

49)Euripides(B.C. 480∼406): 아테네의 비극시인. Anaxagoras의 제자이며 Socrates의 친구.

 

위의 인용문에서 '키케로가 전달하고자 했던 뜻'을 좀 더 정확히 이해하기 위해서는 에우리피데스의 비극 작품 『포이니케 여인들』을 조금 더 들여다 봐야 한다. 그 작품을 소개하는데 천병희 선생님의 글만큼 명료한 것도 드물다.

 

『포이니케 여인들』작품 소개

 

오이디푸스의 두 아들, 에테오클레스와 폴뤼네이케스는 번갈아 가며 테바이를 통치하기로 약속하지만, 에테오클레스가 약속을 어기자 아르고스로 망명한 폴뤼네이케스가 이른바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를 이끌고 테바이를 공격하러 온다. 오이디푸스의 아내 이오카스테가 두 아들을 화해시켜보려 하지만 그녀의 노력은 수포로 돌아가고 전쟁은 피할 수 없게 된다. 예언자 테이레시아스는 이오카스테의 오라비인 크레온의 아들이 제물로 바쳐지면 에테오클레스와 테바이가 승리할 것이라고 예언한다. 크레온의 아들 메노이케우스가 아버지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조국을 위해 제물이 되기를 자청한다. 아르고스군의 공격이 격퇴되자, 두 형제가 일대일로 결투하여 분쟁을 끝내기로 결정한다. 결투에서 두 형제가 서로 죽이자 이오카스테가 절망하여 칼로 자결하고, 그들의 누이 안티고네가 이 소식을 오이디푸스에게 전한다. 크레온이 권력을 장악하고는 폴뤼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주지 말고, 눈먼 오이디푸스는 추방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크레온의 아들 하이몬과 결혼할 예정이었지만 결혼을 거절하고 아버지를 따라 유랑길에 오르며 돌아와서 폴뤼네이케스를 몰래 묻어주겠다고 말한다.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

 

이 유명한 비극이 바로 스티븐 핑커가 문학 작품에서 '영원한 공식'이라고 말한 그 '형제간의 비극'을 다룬 에우리피데스의 『포이니케 여인들』이다. 키케로의 책에서 인용된 '에테오클레스가 한 말'은 정확히 무슨 뜻일까. 겨우 네 줄만 인용된 저 '짧은 대목'만 읽으면 얼핏 '왕이 될 정도로 대단한 야심을 가졌을 경우에나 법을 무시할 일이지, 그 외의 다른 경우라면 그저 법을 지키며 조용히 살 노릇'이라는 것처럼 들린다. 그런데 사실 에테오클레스가 한 말의 참뜻은 그게 아니다. 자신의 동생에게 절대로 왕권을 내놓지 않겠다는 다짐의 말이다. 그 대목을 조금 더 끌고 와 보면 이렇다.

 

이오카스테

······

내 아들 폴뤼네이케스야, 네가 먼저 말하는 것이 좋겠구나.

너는 부당한 일을 당했다고 주장하며 다나오스 백성들의

군대를 이끌고 왔으니 말이다. 제발 신들 중에

한 분이 재판관이 되시어 이 불화를 중재해주시기를!

 

폴뤼네이케스

진리의 말은 원래 단순하며, 정당한 요구에는

현란한 설명이 필요 없어요. 그 요점이 명명백백하기

때문이죠. 하지만 부당한 주장은 속으로 병들어 있어

그것을 치유해줄 궤변이 필요하지요.

······

 

에테오클레스

······

제가 통치할 수 있는데, 저더러 이자의 노예가 되라고요?

그러니 불을 가져오고, 칼을 가져오고, 네 말들에

멍에를 얹고, 들판을 네 전차들로 메워보려므나.

그래도 나는 왕권을 너에게 넘겨주지 않을 거야.

불의한 짓을 해야 한다면, 왕권 때문에 불의한 짓을 하는 게

가장 아름답지. 그러나 다른 점에서는 경건해야 해.

 

 - 천병희 번역, 『에우리피데스 비극 전집2』

 

이렇게 길게 인용하고 보니 '인용문'이 전혀 다르게 다가온다. 알고 보니 삼모자(三母子)가 '왕권'을 다투기 위해 서로 피비린내 나는 전쟁을 코 앞에 두고 '한 치의 양보도 없이' 처절하게 싸우고 있는 형국에서 나온 '절박한 말들' 가운데 일부를 키케로가 인용한 것이었다. 결국 두 형제는 '서로가 서로를' 죽이는 엄청난 비극의 주인공이 되고 만다. 그들 형제의 아버지인 오이디푸스의 비극으로는 아직 충분하지 않았던 걸까. 어쨌든 오라비들의 싸움 때문에 어머니마저 잃고 졸지에 비극의 한가운데로 곧장 내던져진 저 가엾은 안티고네는 눈 먼 장님이 된 아버지 오이디푸스를 데리고 '머나먼 방랑길'을 오를 수밖에 없게 된다. 그러니 키케로가 저 대목에서  '아니 오히려 유리피데스가 말하는 것처럼 죽어 마땅하도다' 하는 말이 이쯤에서 좀 더 확실하게 이해되고 나면 이 책을 읽는 재미가 더욱 커진다.

 

- 장 앙투안 테오도르 지루스트, [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 1788년, 댈러스 미술관

 

 

어쨌든 나로서도 키케로의 책에서 등장한 '바다 한가운데를 항해할 때'의 얘기와 세간의 엄청난 관심을 불러 일으킨 땅콩 회항 사건의 그 '문을 닫고 비행에 나서기 시작한 때'의 상황이 묘하게 겹쳐 떠올라 이런 기나긴 글을 쓰게 되었다. 비록 '명쾌하게 정리는 잘 안 되지만 약간이나마 이해될 수 있을 정도로' 말이다. 이게 다 키케로의 책을 읽는 동안 자꾸만 현실 속의 뉴스가 서로 뒤엉켜 내 머리 속에 떠올랐기 때문이다.

 

어떤 책을 읽더라도 독자는 늘 자기 자신이 아니라면 적어도 자신을 둘러싼 주변의 인물들이나 상황을 함께 떠올리면서 그 책을 읽기 마련이다. 나로서는 이 책을 읽고 있는 동안에 함께 떠오른 여러 현재의 상황들 때문에 이 따분해 보이는 책을 읽는 일이 너무 즐거웠다. 마침 이 책은 키케로가 '그의 아들에게 보내는 편지' 형식으로 쓰여져 있다. 땅콩 회항 사건 때문에 수감된 딸을 면회하는 자리에서 그녀의 아버지가 딸과 나눈 이야기 속에서도 '책'이 빠지지 않았다. 이번 기회에 '책도 좀 읽고 수양의 기회로 삼아라'는 소식이 들려오니 하는 말이다.

 

이 책은 '서양의 논어'라고 불릴 정도이니 '수양'에는 더없이 어울리는 책이라 할 만하다. 가끔씩 너무 완벽한 '도덕 군자'를 만들려고 하는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지나치게 엄격한 도덕적 잣대를 내세우긴 하지만 말이다. 끝으로 '옮긴이의 말' 가운데 일부를 덧붙인다. 나도 이 책을 처음 읽기 시작했을 땐 이 책에 대해 '볼테르가 한 말'이 너무 지나치지 않나 싶어서 코웃음을 칠 뻔 했는데, 이 책을 거의 다 읽을 무렵부터는 그 사람의 말이 정말 틀린 게 조금도 없구나 싶은 마음이 한가득이어서 차마 그 얘기를 빼놓기 어려웠다. 이렇게 주렁주렁 책 속의 글을 끊임없이 덧붙이는 게 도대체 어디서부터 연유된 '욕심'인지 나도 정말 모르겠다. 그럼 이만 총총...

 

··· 그리하여 이 책은 서양인에게 가장 많이 읽힌 책 중 하나로서 서양인의 정신 세계를 지배하게 되었다. 예를 들어, 특히 페트라르카를 비롯한 르네상스 휴머니스트들은 키케로의 연구자 내지 찬양자들이었고, 근대 정치 사상가인 존 로크와 몽테스키외도 키케로에게 많은 영향을 받았다. 볼테르가 1771년 "아무도 이보다 더 현명하고 더 진실되며 더 유용한 어떤 것도 쓰지 못할 것이다.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만약 키케로의 《의무론》보다 더 잘 쓰기를 원한다면 그 작가는 허풍선이이거나 아니면 그러한 책들은 모두 이 책의 모작이 될 것이다"라고 한 말이나, 프레데릭 대왕이 "지금까지 씌어졌거나 씌어질 수 있는 도덕에 관한 최상의 책"이라고 극찬한 말은 모두가 진실이다.

 

아, 참, 하나만 더 이야기하고 넘어가자. 적어도 볼테르가 한 말에 어울릴 만한 사람들 가운데 '이후로 사람들에게 교훈을 주거나 훈시하려는 야심을 가진 어떤 작가'가 아예 없었던 건 결코 아니다. 나는 그런 사람들을 극소수는 알고 있다고 생각하는데, 그 중의 한 사람이 『도덕감정론』을 쓴 아담 스미스였고, 또 한 사람은 아마도『실천이성비판』을 쓴 칸트가 아니었을까 싶다. 내가 이 사람들이 쓴 책까지 이 글에서 언급한다는 건 완전히 미친 짓이고, 이 글을 정말 웃기게 만드는 꼴임에 틀림없을 것이다. 그러니 내 글은 여기서 정말 '끝'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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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원한 공식

자연은 살과 피를 나눈 사람들의 감정을 살짝 어긋나게 조율하는 잔인한 장난을 쳤지만, 그럼으로써 모든 시대의 소설가와 극작가들에게 끊임없는 일거리를 제공했다. 두 명의 인간이 동물의 세계에세 가장 강한 끈으로 묶일 수 있고 그와 동시에 때때로 서로에게 최선을 다하지 않을 수 있다는 사실은 연극적 가능성을 무한히 증폭시킨다. 비극적 이야기가 가족 관계에 집중되어 있다는 사실에 주목한 최초의 인물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가 지적했듯이, 두 명의 낯선 사람이 싸우다 죽는 이야기는 두 명의 형제가 서로 싸우다 죽는 이야기에 비해 조금도 흥미롭지 않다. 카인과 아벨, 야곱과 에서, 오이디푸스와 라이오스, 마이클과 프레도, 제이알과 바비, 프레지어와 나일스, 요셉과 형제들, 리어왕과 딸들, 한나와 자매들 ·······, 수세기에 걸친 드라마 목록에서 볼 수 있듯이, "일가의 증오"와 "일가의 적대"는 영원한 공식이다." (466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완벽에 가까운 작품

안티고네는 오이디푸스와 요카스타 사이에서 태어난 딸이지만, 아버지가 곧 오빠이고 언니가 곧 어머니라는 사실은 가족의 고난이 시작되는 출발점에 불과하다. 안티고네는 크레온 왕의 명을 어기고 형제인 폴리네이케스의 시신을 묻어 주는데, 이것을 알게 된 왕은 그녀를 산 채로 매장하라고 명령한다. 안티고네는 그를 속이고 먼저 자살하지만, 그녀를 미친 듯이 사랑했던 왕의 아들은 그녀의 사면을 얻어내지 못한 것을 애통해하며 그녀의 무덤 위에서 자결한다. 스타이너는 『안티고네』야말로 "그리스 비극의 최고봉이자 인간이 만든 어떤 예술보다 완벽에 가까운 작품"이라고 이야기한다.
(467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인간의 비극

인간의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공평한 이해 갈등에 있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위대한 소설에서도 쉽게 발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스타이너는『안티고네』에 대한 글에서, 그 불멸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조건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주된 갈등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755쪽)

 - 스티븐 핑커,『빈서판』 中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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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from Value Investing 2015-01-24 13:06 
    올해 초에 문득 집어든 아리스토텔레스의 『시학』을 읽고 나니 그 책 속의 작가들과 작품 속 인물들이 자꾸만 나를 '고대의 영웅들이 숨을 헐떡이며 분주히 돌아다니던' 어느 영광스러운 과거의 순간들로 끌어당기는 듯하다. 성난 바람을 안고 잔뜩 부풀어 오른 돛을 단 날쌘 함선이 갑자기 나타나 거센 바다 한복판으로 미끄러지며 내달리는 풍경이 어느새 내 눈앞에 가득 펼쳐진다. 벌써 나는 대략 2,500년 전쯤의 고대 그리스의 바닷가 어느 해안까지 한 순간에 훅
 
 
yamoo 2015-01-23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헐~ 오렌님의 이 글을 읽으니 키케로의 <의무론>을 바로 읽어야 겠습니다. 책도 바로 잡히는데 있거든요..ㅎㅎ
좋은 글 감사합니다!

oren 2015-01-24 13:05   좋아요 0 | URL
yamoo 님께서는 이미 손에 잡힐 만큼 가까운 곳에 이 책을 놔두고 계셨군요. 아무쪼록 이번 기회에 이 책을 후딱 읽으셨으면 좋겠습니다. 사실 `라틴어 원문`을 빼면 책의 분량이 그리 많지도 않지요..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는데, 제 생각으로는 `보통이 아닌 사람들이 겪는 갈등` 때문에 `글을 쓰는 보통 사람들`의 손과 가슴까지 뜨겁게 만드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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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의 비극

인간의 비극은 모든 인간 관계에 본래부터 존재하는 불공평한 이해 갈등에 있다는 것이 나의 마지막 주제이다. 나는 그것을 어떤 위대한 소설에서도 쉽게 발췌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조지 스타이너는『안티고네』에 대한 글에서, 그 불멸의 문학 작품이 ˝인간의 조건에 항상 존재하는 모든 주된 갈등들˝을 표현하고 있다고 썼다. 존 업다이크는 ˝보통 사람들이 경험하는 갈등이 글을 쓰는 우리의 손과 가슴을 뜨겁게 한다.˝라고 말했다.
- 스티븐 핑커, 『빈 서판』

붉은돼지 2015-01-29 0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빈서판도 읽어봐야겠어요
네이버 지식인의 서재에서도 여러분이 추천하고 있지만 왠지 손이 안갔는데 오렌님 글을 보니 문득 읽고 싶은 생각이...ㅎㅎ
키케로도 물론이구요.

oren 2015-01-29 16:48   좋아요 0 | URL
『빈서판』에는 정말 `많은 것들`이 담겨 있는 책이라 여겨져요. 그 책을 쓴 저자가 워낙에 `문학작품들`을 두루 섭렵해서 그런지 수많은 소설들과 그 주인공들을 함께 만나는 즐거움도 적지 않더라구요.
키케로의 책 속엔 고대의 역사적 인물들이 끊임없이 등장하고 있어서, 그런 인물들에 대해 키케로가 어떤 판단을 내리는지를 읽는 재미가 특히 좋구요. 암튼 두 책 모두 즐겁게 읽으시길 바랄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