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예 일반에 대한 놀라운 통찰을 보여주는 책
어떤 글을 읽다가 어떤 '가려움'을 느꼈다면 그 원인은 필시 다음의 두 가지를 포함하고 있으리라 생각된다. 글 속에 자체적으로 '가려움'이라는 요소를 지니고 있거나, 아니면 그 글을 읽는 사람이 스스로 '가려움'을 느꼈거나.
그런데 어떤 사람이 어떤 글을 읽다가 어떤 '가려움'을 느꼈다고 치자. 그러면 그 사람은 그 '가려움'에 대해 어떤 식으로 대처해야 옳을까. 이런 선택이 특히 어려운 경우는 그 '가려움'을 어떤 강도로 긁든지 관계없이 긁는 대상이 특정한 일반인으로 귀착될 경우이다. 우리가 긁고 싶은 대상이 가령 어떤 국가나 기업이라면 우리는 얼마나 쉽게 주저없이 그 가려움을 해소할 수 있을지는 각자의 경험이 충분히 알려준다고 믿는다. 또한 우리가 긁고 싶은 대상이 책임있는 자리를 떠맡은 공인일 경우에도 우리는 재빨리 그 가려움을 해소할 수 있다. 왜냐하면 '가려움'은 우리가 그만큼 가볍게 접근해도 좋을 만큼 가벼운 증상이기 때문이며, 긁히는 대상은 스스로 '가려움'을 제공했기 때문에 아무에게나 긁혀도 남들로부터 반감을 사기 보다는 공감을 얻기가 더 쉽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 가려움 때문에 긁히는 대상이 앞서 얘기했듯이 우리가 쉽게 긁을 수 있는 대상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 가려움을 대체 어떻게 풀어야 할까.
"당신의 글은 '여기'가 특히 가려우니, 앞으로는 제발 그런 가려움을 좀 없애주면 좋겠소" 라고 당사자에게 속시원히 얘기할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그런데 내가 그런 '가려움'을 결국 참지 못하고 남들이 보란 듯이 '새로운 글'을 통해 그런 가려움을 해소한다면? 아마도 나는 자칫 너무 옹졸한 사람으로 내몰려 금세 비판의 도마 위에 올려질지도 모르겠다. 옛부터 내려오는 속담처럼 '괜히 긁어부스럼을 만들게 뭐람' 하는 핀잔도 피하기 어려울 것이다. 게다가 그런 무모한 시도에서 가장 걱정스러운 부분은 바로 그 '가려운' 글을 쓴 사람을 살짝 꼬집어 준다는 것이 '기술적으로' 몹시 어려운 일일 뿐만 아니라, 정작 내가 아무리 '살짝' 꼬집고 싶더라도 막상 '긁히는' 당사자로서는 우리가 예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쎄게 꼬집힌다고 생각할 수 있다는 점이다. 사람에 따라서는 그건 꼬집히는 게 아니라 예리한 칼로 후벼댄다고까지 생각할 지도 모를 일이다.
이렇듯 여러 어려운 난점들을 포함하고 있더라도 내가 꼭 그런 가려움을 해소해야 옳은 일일까. 그 가려움이라는 것도 결국에는 남들이 별로 공감하지 못할 하찮은 '가려움'으로 판명난다면 그건 십중팔구 나만 바보가 될 게 뻔하다. 아무튼 그런 '가려움'을 언제 기회가 될 때 가볍게라도 한 번 꼬집고 넘어가지 않으면 그 가려움이 앞으로도 계속 되풀이될 듯한 느낌마저 든다면 내가 그걸 앞으로도 계속해서 참고 견디기란 여간 괴로운 일이 아닐 듯하다.
사실 나는 이 글을 쓰기 시작하면서 이미 마음속으로 어떤 대상을 좀 시원하게 긁어볼 작정을 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렇지 않았더라면 이런 글을 쓰지도 않았을 테니까. 그렇지 않아도 나는 이미 어디론가 찾아가서 내가 느꼈던 그 '가려운 대목'을 슬쩍 긁어왔을 뿐만 아니라, 내가 그런 가려움을 해소하기 위해 얼마간 필요하다싶은 '따끔함'까지도 이 글 속에 집어넣을 생각까지 갖고 있었다. 그런데 글을 이렇게 써내려 가다 보니 어느새 생각이 좀 달라졌다. 아무래도 내가 좀 가렵다고 해서 그 부분을 너무 쉽게 긁었다가는 긁히는 사람에게 너무 큰 상처를 남기지 않을까 하는 염려가 자꾸만 고개를 내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왕 여기까지 이런 글을 써 내려온 마당에 이번에 이 점 하나만은 꼭 짚고 넘어가고 싶다. 아무리 세상이 분초를 다투는 시대라고는 하지만 제발 좀 이곳 공간에서만이라도 '뜸'을 좀 들이고 글을 썼으면 어떨까 싶다. 한 눈에 보더라도 '졸속'이 철철 넘쳐 흐르는 글을 어찌 아무런 '가려움'조차 느끼지 않고 그냥 읽을 수 있단 말인가. 꼭 옛날 선비들처럼 의관을 정제하고, 연적에 담긴 물을 벼루에 옮겨 붓고, 마음을 가다듬으며 먹을 갈고, 붓을 들어 찬찬히 자신의 생각을 써내려갈 필요까지는 없다손 치더라도, 최소한의 '밀고 두드림 사이의 고민' 즉 얼마간의 '퇴고'는 좀 했으면 싶다는 얘기다. 무슨 당나라 때 달빛 소나타 같은 얘기를 들먹거리느냐고 누가 반문할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요즘같이 편리한 시대에 하도 어이가 없는 '졸속'을 너무 자주 접하다 보니 하도 보기에 딱해서 하는 말이다. 도대체 퇴고(推敲)도 아니고 추고(推敲) 도 아니어서 인터넷으로 뒤져보니 '검색한 결과가 없습니다'라는 그런 황당한 답변이 나오는 '엉뚱한 창작'은 제발 좀 하지 말자는 얘기다.
'가려움'에 대한 나의 유별난 감정은 아마도 내가 최근에 읽은 아리스토텔레스의『시학』에서 발견한 여러 주옥같은 글귀들에 자극을 받아서 그 정도가 약간 더 심해졌는지도 모르겠다.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그러나 범용한 시인들에 관하여 말하자면, 인간도 신도 서점(書店)의 진열창도 그들을 용납하지 않습니다. 즐거운 향연에 듣기 싫은 음악을 연주하거나, 진한 향유가 나오거나, 사르디니아산(産) 꿀을 친 양귀비 종자가 나오면 기분이 상하게 됩니다. 그런 것들 없이도 향연을 베풀 수 있었을 것이기 때문입니다. 마찬가지로 원래 영혼에 쾌감을 주기 위하여 만들어진 시도 정상에서 조금만 벗어나면 심연 속으로 굴러 떨어지고 맙니다. 격검(擊劍)을 할 줄 모르는 사람은 연병장에서 무기에 손대지 않으며, 구기나 원반 던지기나 굴렁쇠 놀이를 할 줄 모르는 사람은 관중에게 웃음거리가 되지 않기 위하여 뒤로 물러섭니다. 그런데도 시를 쓸 줄 모르는 사람은 이에 조금도 구애받지 않고 용감하게 시를 씁니다. 하긴 왜 못 쓰겠습니까? 그는 완전한 자유민일 뿐 아니라 재산상으로도 기사 등급에 속하는 것으로 평가되고, 품행에 있어서도 나무랄 데 없는 사람으로 간주되니 말입니다. (200∼201쪽)
(나의 생각)
쇼펜하우어가 그의 주저인『의지와 표상으로서의 세계』라는 책에서 시인에 대한 자신의 철학을 펼치는 부분도 인상적이다. 그가 '호라티우스의 시론'을 인용한 부분이 바로 위의 대목이다.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
사람도 신도 서점의 기둥도
시인이 평범하게 되는 것은 허락하지 않는다.
- 호라티우스, 《시론》
이 평범한 시인들의 소동이 자기들과 타인의 시간과 종이를 얼마나 망쳐 놓으며, 또 그 영향이 얼마나 해로운가 하는 것은 신중히 고려해 보아야 한다. 왜냐하면 대중은 한편으로는 언제나 새로운 것을 붙잡으려 하고, 또 한편으로는 자기들과 동질인 불합리한 것과 범속한 것에 기울어지는 성향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이 평범한 작가들의 작품은 대중을 참다운 걸작에서 멀어지게 하고, 그러한 작품들로 대중의 교양을 억제한다. 따라서 천재의 좋은 영향을 정면으로 방해하고,좋은 취미를 점점 해쳐서 시대의 진로에 역행한다. 그러므로 비평이나 풍자를 할 때는 용서나 동정을 하지 말고, 평범한 시인들에게 혹평을 가해서, 그들이 졸작을 쓰기보다는 좋은 작품을 읽는 데에 여가를 이용하도록 해야 할 것이다. 왜냐하면 천재적인 재능이 없는 시인들의 졸렬한 작품은 온화한 시신인 아폴론까지도 마르시아스의 껍질을 벗기게 할 정도로 격노하게 한다. 나는 평범한 시가 관용을 요구하는 것이 어디에 근거를 둔 것인지 알 수 없다. (776쪽)
(노파심에서 하는 말이지만 이 인용글은 꼭 '시'에 대해서만 얘기하는 것은 아니라 믿고 옮겨본 내용이다)
9년 동안
그대는 언행에 있어서 결코 미네르바의 정신을 거역하지 않으리라고 믿습니다. 그대에게는 그만한 판단력과 분별력이 있기 때문입니다. 그대가 언젠가 무엇을 쓰게 되면 그대의 부친과 나의 면전에서 비평가 마이키우스에게 낭독해주시오. 그리고 그 원고를 9년 동안 서랍 속에 넣어두시오. 발표하지 않은 것은 없애버릴 수 있지만 일단 입 밖에 나온 말은 돌이킬 수 없기 때문입니다. (201쪽)
* * *
내가 '가려움'을 참지 못하고 그 '가려운 부분'을 좀 긁기 위해 이 글을 시작하기도 전에, 보다 정확히 말하자면 가려움을 좀 더 확실하게 느낀 이후에 막연히 어떤 글로라도 좀 표현하고 싶다는 걸 느끼고 난 시점에 가장 먼저 떠올렸던 '책 속 구절들'은 다음의 두 가지였다. 내가 예전에 썼던 어느 글에서도 인용한 적이 있었지만 '알라딘의 풍경'이 너무 많이 바뀌었다는 점과 '졸속'이 너무 만연해 있다는 점이 떠올라 찾아본 대목이다.
잠행성 정상 상태(creeping normalcy), 풍경 기억 상실(landscape amnesia)
불규칙한 변동으로 인해 느리게 진행되고 있는 변화가 잘 드러나지 않는 현상을 정치학자들은 '잠행성 정상 상태(creeping normalcy)'라고 부른다. 경제 문제, 교육 문제, 교통 체증 문제, 혹은 그 어떤 문제가 매우 천천히 악화되고 있을 경우 한 해의 평균 수준이 그 전 해에 비해 아주 약간 낮아졌다는 사실을 깨닫기 힘들며, 따라서 미세하지만 한 사람이 정상(normalcy)이라고 생각하는 기준도 매년 조금씩 변동하게 된다. 이와 같은 변화는 사람들이 깨닫는 순간까지 수십 년간 계속 진행되어 어느 순간 몇십 년 전에는 지금보다 훨씬 나은 상태였으며, 현재 정상으로 받아들여지고 있는 상태가 사실은 악화된 상태임을 알게 되고는 갑자기 놀라게 되는 것이다.
'잠행성 정상 상태'와 관련 있는 또 다른 용어는 '풍경 기억 상실(landscape amnesia)'이다. 이는 변화가 매년 매우 느리게 진행됨으로써 50년 전의 풍경이 지금과는 얼마나 달랐는지 깨닫지 못하는 현상을 말한다. 지구 온난화로 인한 몬태나 빙하 및 설원의 용해 현상을 그 예로 들 수 있다. (581쪽)
분노와 졸속
생각건대 분노와 졸속은 깊고 신중한 생각과 전혀 상반된 것으로, 분노는 어리석음을 동반하기 쉽고, 졸속은 조잡함과 짧은 생각을 낳기 쉽습니다. 또 토론이 실제 행동의 지침이 되지 않는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은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혹은 뭔가 개인적인 이익을 노리고 있는 사람들이라고 생각됩니다. 그들이 어리석은 사람들이라는 것은, 장래에 대해 확고한 생각을 갖지 않은 채 뭔가 다른 방법으로 장래의 지침을 보여줄 수 있다고 생각하고 있기 때문이며, 또 그들이 사리사욕을 노리고 있다는 것은, 그들이 불명예스런 일을 설득하려 하며, 좋지 않은 일에 관해 교묘하게 잘 둘러댈 수 없다고 생각해서 자신들의 반대자나 청중을 놀라게 하거나 위협하기 때문입니다.(271쪽)
내가 가끔씩 속으로 자꾸 주저하면서 '꾸물거릴 때' 생각나는 책이 피터 번스타인이 쓴 리스크이다. '위험, 기회, 미래가 공존하는' 이라는 부제가 붙은 책인데, '결과가 불확실할수록 그만큼 지연(꾸물거림)의 가치는 커진다'는 대목이 쉽게 잊혀지지 않기 때문이다. 결국 나는 이번에도 얼마쯤 꾸물거리면서 개인적인 '가려움'을 반쯤은 참아내고 '긁는 일'도 얼마쯤 포기하면서 내 스스로 떠안을 위험은 얼마쯤 피하게 되었다.
'위험, 기회, 미래가 공존하는' 곳엔 언제나 리스크도 함께 공존한다. 알라딘 역시 예외가 아니며 알라딘에서 글을 읽고 쓰는 사람도 한 배를 탔으니 가끔씩 '풍경 기억'을 떠올리며 자주 안타까운 생각이 들 때마다 '공유지의 비극'이나 '공멸'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어서 이런 '가려운' 글을 쓰게 되었다. 그것 뿐이다. 나의 가려움은 어느 정도 해소되었지만 내 글이 또다른 '가려움'을 유발하지나 않았을까 걱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