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대로의 여행을 이끄는 초대장
오뒷세이아_11권 저승
그리스 비극 가운데 가장 유명한 작품은 단연『오이디푸스 왕』이다. 그런데 이 드라마의 소재는 어느 한 작가의 순수한 창작품이 아니며 소포클레스가 이 작품을 쓰기 전에도 이미 그 중요한 줄거리는 오랫동안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고 한다. 소포클레스보다 앞선 작가들인 핀다로스의 『올륌피아 송시』에도 '라이오스에게 주어진 신탁과 숙명적인 부자 상봉'이 등장하고, 아이스퀼로스의 『테바이를 공격한 일곱 장수』에서도 오이디푸스가 제 손으로 제 눈을 멀게 했다는 대목이 나온다.
그런데 여기서 이 유명한 이야기의 근원을 조금 더 파고 들면 우리는 이 드라마에 등장하는 인물들에 대해 훨씬 더 생생한 느낌으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오이디푸스가 온전히 '전설 속의 인물'에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혹시라도 어느 정도는 '실존 인물'이었을 가능성도 전혀 배제할 수만은 없기 때문이다. 이미 3,000년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신화와 전설'로만 존재하는 줄 알았던 '트로이아 전쟁'을 둘러싼 그 유명한 이야기가 실제로 19세기 말에 슐리만이 '트로이아와 뮈케네의 옛 성터'를 발굴한 뒤부터 역사적 사실에 훨씬 다 가까이 다가갔던 것처럼, 오이디푸스와 관련된 새로운 기록이나 유적이 발굴된다면 우리는 고대의 놀라운 이야기에 대한 '믿기지 않는 실재성'을 두고 다시금 많은 이야기를 새롭게 쏟아낼지도 모르겠다.
그런데 호메로스의 서사시 『일리아스』의 배경이 된 트로이아 전쟁이 놀라운 고고학적 발견에 힘입어 '어렴풋한 역사적 근거'를 얼마쯤 획득했다 하더라도 거기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주고받는 온갖 흥미진진한 대화와 사건들까지도 모두 '사실'이라고 흔쾌하게 받아들일 사람은 아무도 없다. 아주 오래 전부터 전해 내려오는 얘기는 결국 수많은 사람들의 입과 귀를 통해 이리저리 숱하게 옮겨지면서 자연스레 허구가 보태지고 상상력을 더했음은 새삼스럽게 얘기할 필요가 없다. 오래된 신화와 전설의 매력도 바로 그런 점에 기대고 있는지 모른다. 수많은 세월 동안 그 힘을 조금도 잃지 않았던 옛 이야기의 뿌리깊은 호소력은 결국 그것들을 꾸미고 전해온 사람들 모두가 느꼈던 '인류의 보편적 정서'에 바탕을 두고 있기 때문에 언제나 '실제와 허구' 사이의 팽팽한 긴장감을 조금도 흐트리지 않으면서 우리를 끊임없이 옛 이야기 속으로 끌어들인다.
오이디푸스의 이야기가 그저 허황된 전설로만 들리지 않는 이유를 나와 같은 풋내기 독자가 굳이 애써 찾아나설 필요는 없다. 다만 그를 둘러싼 이야기가 이미 어느 유명한 역사가의 책 속에 실제로 등장한다는 사실 하나만 발견하고도 나로서는 적잖은 충격을 받았고 다른 이유를 더 찾을 생각조차 금세 사라졌다. 어느새 오이디푸스는 그저 수없이 되올려진 '무대 속의 배우'로만 머물지 않으며 또한 그가 그저 단순한 '비극 속의 주인공'으로만 여겨지지도 않는다.
여기서 잠시 이 유명한 비극을 쓴 소포클레스에 대해 약간 고찰할 필요가 있다. 그는 호메로스와 달리 여러 문헌에 다양한 활동 기록들이 남아 있고 또 90세까지 오래도록 살았기 때문에 많은 일화를 남기기도 하였다. 그는 마라톤 전투(기원전 490년) 때 겨우 6, 7세의 어린아이였지만 10년 뒤 살라미스 해전에서 그리스 연합군이 페르시아의 대군을 물리쳤을 땐 '전쟁의 승리'를 신에게 감사드리는 찬신가를 선창한 소년합창단 멤버였고, 펠로폰네소스 전쟁(기원전 431∼404년)이 끝날 무렵까지도 살아 있었다. 쉽게 얘기하면 그는 '아테나이의 욱일승천과 서산낙일'을 모두 경험할 수 있을 만큼 장수한 인물이었다.
그가 서른이 안 된 나이에 참가한 비극경연대회에서 기존의 챔피언이었던 아이스퀼로스를 누르고 첫 우승을 차지한 뒤로 그는 통산 18번이나 우승했고(아이스퀼로스가 13번, 에우리피데스는 5번) 3등을 한 적은 한 번도 없었다고 한다. 그는 123편에 달하는 작품을 썼다고 하는데 그 가운데 온전히 남아 있는 것은 이 책에 실린 비극 7편이 전부다. 그만큼 왕성한 창작 활동을 했음에도 그는 높은 관직에도 자주 취임했고 어떤 전쟁에서는 델로스 동맹을 대표해서 페리클레스와 함께 '10인의 장군' 가운데 한 명으로 선출된 적도 있었다. 여기서 이 책의 '옮긴이 해설'에 담긴 한 대목을 인용해 보는 것도 흥미롭다.
"소포클레스는 당시의 여러 저명인사들과 접촉했는데, 당시 아테나이 시의 규모나 그의 인기로 보아 자연스러운 일로 보인다. 그는 페리클레스와 함께 관직에 있었고, 55세에는 역사가 헤로도토스에게 비가를 한 편 지어 헌정했다고 하며, 소크라테스는 이 노(老) 시인에게서 애욕으로부터 해방된 것이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는 말을 들었다고 주장하고 있다."
위의 인용문에서 소크라테스와 관련된 얘기는 플라톤의 『국가』1권에 담긴 내용인데, 나는 정작 플라톤의 그 책을 읽어본 적은 있었지만 그런 대목이 나오는지는 이번에 처음 알았다. 언젠가 나는 이 노시인의 얘기를 엉뚱하게도 키케로의 책을 읽다가 발견한 적이 있었고 마침 그때 용케도 어디다 붙들어 매어 놓은 덕분에 이름마저 비슷한 두 사람(소크라테스와 소포클레스) 사이의 대화를 아무때라도 생생하게 소개할 수 있게 되었다.
노인의 경우에는 쾌락의 쑤석거림 같은 것은 그리 크지 않다는 말인가? 그렇기도 하지만, 그런 것은 아예 바라지도 않는다네. 사람이 원하지 않는 것은 사람을 괴롭힐 수가 없지. 이미 노쇠기에 소포클레스는 아직도 성생활은 즐기고 있느냐는 질문에 이렇게 멋지게 대답했다네.
"이런 맙소사! 거칠고 포악한 주인의 손아귀에서 벗어난 것처럼, 거기서 빠져나오게 된 것을 기뻐하고 있는 중이오."
· · · · · ·
노년에, 말하자면 육욕과 야망, 투쟁, 적대감, 그리고 온갖 욕망에 대한 복무 기간이 끝나, 마음이 스스로 만족하는, 이른바 마음이 자기 자신과 함께 산다는 것은 얼마나 가치 있는 일인가! 정말 연구와 학문이라는 양식이 얼마든지 있다면, 한가한 노년만큼 즐거운 것도 없다네.
- 키케로, 『노년에 대하여』
내 얘기가 어느새 '불행한 오이디푸스의 손아귀'에서 너무 벗어난 듯하다. 다시 그에 관한 얘기로 되돌아 오는 길에 우리는 '옮긴이의 해설'에 슬며시 등장하는 역사가 헤로도토스를 놓치면 안 된다. 그가 '역사의 현장'에서 발굴한 '오이디푸스'에 관한 생생한 얘기는 들어볼 필요가 있다. 이 사람이야말로 '역사의 아버지'로 널리 인정받는 인물인데 그가 바로 자신이 쓴『역사』에서 '오이디푸스 가문'에 대한 얘기를 두 번씩이나 자세히 언급하고 있기 때문이다.
헤로도토스의 기록에 따르면 오이디푸스 왕가는 [오이디푸스-폴뤼네이케스-테르산드로스-테이사메노스-아우테시온-테라스-오이올뤼코스-아이게우스]로 이어지고, 스파르테의 주요 씨족인 이 가문의 남자들에게서 태어난 자식들은 늘 '요절'했으며, 그 때문에 후손들은 결국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의 원혼(怨魂)들'에게 사당을 지어주었다고 한다. 그는 도저히 믿기 어려울 만큼 드넓은 지역을 직접 돌아다니며 '역사 자료'를 손수 채집한 것으로 유명한데, 그가 보이오티아의 테바이 신전에서 직접 보았다는 세발솥에는 오이디푸스의 또다른 손자가 남긴 게 분명한 '라오다마스 왕이 아폴론 신전에 손수 봉헌했나이다'라는 기록까지도 '카드모스 시대의 문자'로 뚜렷이 새겨져 있었다고 밝히고 있다.
바로 그 무렵 테라스가 다른 곳에 식민시를 건설하려고 라케다이몬을 떠날 준비를 하고 있었는데, 그는 아우테시온의 아들로 테이사메노스의 손자요 테르산드로스의 증손이요 폴뤼네이케스의 고손이었다. 또한 테라스는 카드모스 가(家) 출신으로 아리스토데모스의 아들들인 에우뤼스테네스와 프로클레스의 외숙이었는데, 생질들이 아직 어릴 때는 섭정으로서 스파르테의 왕권을 행사할 수 있었다. ······
테라스의 아들이 아버지와 동행하려 하지 않자, 테라스는 아들을 '늑대 떼 속의 양'으로 남겨두는 것이라고 말했다. 그래서 이 말 때문에 젊은이는 '오이올뤼코스'라는 별명을 갖게 되었는데, 그는 본명보다 이 이름으로 더 잘 통했다. 이 오이올뤼코스의 아들이 아이게우스였는데, 스파르테의 주요 씨족인 아이게이다이 가(家)는 그에게서 이름을 따왔다. 이 가문의 남자들에게 태어난 자식들은 늘 요절했다. 그래서 신탁의 조언에 따라 라이오스와 오이디푸스의 원혼(怨魂)들에게 사당을 지어주었다. 그러자 아이들이 제명대로 살았는데 테라에 살던 아이게이다이 가의 후손들에게도 비슷한 일이 일어났다.
- 헤로도토스, 『역사』제Ⅳ권 147장∼149장
나는 실제로 보이오티아의 테바이에 있는 아폴론 이스메니오스의 신전에서 카드모스 시대의 문자를 본 적이 있다. 그 문제는 세발솥들에 새겨져 있었는데 대체로 이오네스족의 문자와 비슷했다. ······
세 번째 세발솥에도 다음과 같은 헥사메트론 시행이 새겨져 있었다.
라오다마스 왕이, 시력이 뛰어나신 아폴론 신이시여, 그대의 신전에
더없이 아름다운 장식이 되게 나를 손수 그대에게 봉헌했나이다.
에테오클레스의 아들인 바로 이 라오다마스의 치세 때 카드모스의 자손들은 아르고스인들에게 쫓겨나 엔켈레이스족에게 피신했고, 한편 뒤에 남았던 게퓌라이오이 가는 후일 보이오티아인들을 피해 아테나이로 갔던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자신들만의 신전들을 세웠는데, 다른 아테나이인들의 출입은 금지되었다. 그중 하나가 데메테르 아카이아의 신전인데 그곳에서는 비밀 의식이 행해졌다.
- 헤로도토스, 『역사』제Ⅴ권 59장∼61장
접힌 부분 펼치기 ▼
- 스핑크스의 수수께끼를 풀면서 테바이의 왕으로 추대되는 오이디푸스
- 그리스 비극 가운데 가장 비극적인 인물인 오이디푸스 왕과 그의 딸 안티고네
- 테바이 왕가의 가계도. 오이디푸스 왕의 두 아들 및 두 딸이 맨 끝줄에 등장한다.
이오카스테는 오이디푸스의 어머니와 아내로 '두 번' 나온다.
펼친 부분 접기 ▲
이제 다시 비극 작품으로 되돌아 올 차례다.『오이디푸스 왕』은 기원전 420년대에 초연된 작품이다. 무대장치와 음악은 물론 무대 위의 배우도 겨우 세사람쯤 등장할까 말까 한 이 고대의 비극이 디오뉘소스 비극경연대회에서 무려 15,000명에 달하는 대규모 관객들 앞에서 과연 어떤 모습으로 공연되었을지를 상상해 보는 일도 즐겁다. 그렇지만 나는 무엇보다도 이 비극시를 쓴 시인의 '인간에 대한 놀라운 통찰력'을 음미하는 일이 가장 흥미롭다.
사실 오이디푸스로서는 '단순 과실' 말고는 다른 잘못이 없다. 이 점에 대해서는 소포클레스의 또다른 작품인『콜로노스의 오이디푸스』에서 만나게 되는 '오이디푸스의 변명'을 통해 누구나 분명하게 파악할 수 있다. 굳이 그의 죄를 추궁하자면 애초에 그가 스핑크스가 던지는 놀라운 질문에 대해 '감히' 너무 쉽게 덤벼들었다는 것뿐이다. 그런데도 왜 신탁은 오이디푸스 뿐만 아니라 안티고네를 비롯한 그의 자녀들에게까지 인간으로서는 차마 견디기 힘든 가혹한 운명의 쇠사슬로 그토록 억세게 옭아 맸을까. 그리고 그런 절망적인 운명에 맞서 인간은 과연 어떻게 대응해야 옳은 일일까.
소포클레스의 이 유명한 비극은 불행한 인간에게도 '선택의 자유'가 있음을 드러내 준다. 곧 진실을 외면하고 파멸을 피할 길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의 명예와 내면적 가치를 위해 결연히 운명과 맞서 싸우는 불굴의 의지를 인간은 결코 쉽게 내려놓지 못한다. 이 작품은 한마디로 '인간의 의지와 신이 내린 운명의 대립' 속에서 저항하고 절망하고 고뇌하고 다시 일어서려다 끝내 파멸하지만 그래도 결국 '인간이 주역'임을 결코 포기하지 못하는, 그런 드라마다.
소포클레스의 일곱 작품에서 만난 인상적인 싯구절을 가득 베껴 놓았는데 오이디푸스 왕에게 너무 쎄게 붙들려 내 얘기가 너무 길어지고 말았다. 독자가 주절거리는 얘기는 아무리 귀를 기울여도 단 한 가락의 운율조차 들을 수 없다. 그리고 또 시간이 너무 많이 흘러 위대한 옛시인이 들려주는 노래조차 우리는 이미 그 옛날의 멋진 운율을 이해하기 어렵다. 사정이 이토록 곤란하더라도 우리는 여전히 '고대 시인이 쓴 멋진 시'를 통해 오이디푸스의 목소리를 희미하게나마 들어볼 수는 있다. 그의 목소리를 얼마나 뚜렷하게 들을 수 있을지는 오로지 우리의 상상력에 달려 있다.
* * *
테이레시아스
아아, 슬프도다! 지혜로운 자에게 지혜가 아무 쓸모없는 곳에서
지혜롭다는 것은 얼마나 괴로운 일인가! 잘 알면서 내가
왜 잊었던가!
- 《오이디푸스 왕》316∼318행
테이레시아스
단언하건대, 그대가 위협적인 말로
라이오스의 피살 사건을 규명하겠다고 공언하며
아까부터 찾고 있던 그 사람은 바로 여기 있소이다.
그는 이곳으로 이주해온 이방인으로 여겨지고 있지만
머지않아 토박이 테바이인임이 밝혀질 것이오.
하지만 그는 그런 행운을 달가워하지 않을 것이오.
앞 못 보는 장님이 되고 부자 대신 거지가 되어 지팡이로
앞을 더듬으며 이국땅으로 길을 떠날 운명이니까요.
그리고 그는 같이 살고 있는 그의 자식들의 형이자
아버지이며, 그를 낳아준 여인의 아들이자 남편이며,
그의 아버지의 침대를 이어받은 자이자 그의 아버지의
살해자임이 밝혀질 것이오. 안으로 드시어 그 일을
곰곰이 생각해보오. 그러고도 내 말이 틀렸거든
그때부터는 내가 예언에 관해 무식하다고 말하시오.
(테이레시아스는 소년에게 인도되어 퇴장하고 오이디푸스는 궁전으로 퇴장한다)
- 《오이디푸스 왕》449∼462행
코로스
오만은 폭군을 낳는 법. 오만은 시의에
적합하지도, 유익하지도 않은 부(富)로
헛되이 자신을 가득 채우고는
꼭대기로 기어 올라갔다가
가파른 파멸 속으로 굴러 떨어진다네.
거기서는 두 발도 무용지물이라네.
- 《오이디푸스 왕》872∼878행
오이디푸스
아아, 모든 것이 이루어졌고, 모든 것이 사실이었구나!
오오, 햇빛이여. 내가 너를 보는 것도 지금이 마지막이기를!
나야말로 태어나서는 안 될 사람에게서 태어나, 결혼해서는
안 될 사람과 결혼하여, 죽여서는 안 될 사람을 죽였구나!
- 《오이디푸스 왕》1182∼1185행
코로스
아아, 그대들 인간 종족들이여,
헤아리건대, 그대들의 삶은
한낱 그림자에 지나지 않노라.
대체 누가 행복으로부터,
잠시 보이다 사라져버리는
행복의 그림자보다
더 많은 것을 얻고 있는가?
그러니 불행한 오이디푸스여,
내 그대의 운명을 거울 삼아
인간들 중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기리지 않으리라!
- 《오이디푸스 왕》1186∼1195행
코로스
하나 지금은 누구의 이야기가 이보다
더 비참할까? 누가 삶의 굴곡에서
이보다 더 잔혹한 재앙과 고통의 동거인이
될 수 있을까? 명성이 자자한 오이디푸스여,
그대에게는 단 하나의 항구가
어찌나 넓었던지 아들과 아버지가
신랑으로서 들어갈 수 있었노라.
아아, 어찌하여 그대의 아버지가
씨 뿌리던 밭이 아무 말 없이,
가련한 자여, 그대를
그토록 오래 견딜 수 있었을까?
- 《오이디푸스 왕》1204∼1212행
사자
그분께서 마님의 옷에 꽂혀 있던 황금 브로치를 뽑아 드시더니
자신의 두 눈알을 푹 찌르시며 대략 이렇게 말씀하셨으니 말예요.
"이제 너희들은 내가 겪고 있고, 내가 저지른 끔찍한
일을 다시는 보지 못하리라. 너희들은 보아서는 안 될
사람들을 충분히 오랫동안 보았으면서도
내가 알고자 했던 사람들을 알아보지 못했으니,
앞으로는 어둠 속에서 지내도록 하라!"
이런 노래를 부르시며 그분께서는 손을 들어
한 번이 아니라 여러 번 자기 눈을 찌르셨어요.
- 《오이디푸스 왕》1268∼1274행
오이디푸스
하지만 내 이 두 눈은 다른 사람이 아닌
가련한 내가 손수 찔렀소이다. 보아도
즐거운 것은 아무것도 보지 못할진대,
무엇 때문에 보아야 한단 말이오!
- 《오이디푸스 왕》1331∼1335행
오이디푸스
모든 재앙을 능가하는 재앙이 있다면,
그것이 오이디푸스의 몫으로 주어졌던 것이오.
- 《오이디푸스 왕》1365∼1366행
오이디푸스
오오, 삼거리여, 그리고 후미진 골짜기여,
너희들은 내 손에서 내 자신의 피인 내 아버지의
피를 마셨으니, 아마 기억하고 있으리라.
너희들이 보는 앞에서 내가 어떤 일을 저질렀으며,
그 뒤 또 이곳에 와서 어떤 일을 저질렀는지!
오오, 결혼이여, 결혼이여, 너는 나를 낳고는 다시
네 자식에게 자식들을 낳아줌으로써 아버지와 형제와
아들 사이에, 그리고 신부와 아내와
어머니 사이에 근친상간의 혈연을 맺어주었으니,
이는 인간들 사이에 일어난 가장 더러운 치욕이로다.
- 《오이디푸스 왕》1398∼1408행
오이디푸스
그러나 불쌍하고 가여운 내 두 딸들은
밥상을 따로 차리지 않고 늘 이 아비와
함께하면서 무엇이든 내가 먹는 것을
나눠 먹었으니, 그 애들은 자네가 잘 돌봐주게.
그리고 가능하다면 내 이 두 손으로 그 애들을
만져보고 내 슬픔을 실컷 울도록 해주게. 허락해주게.
왕이여! 허락해주게, 마음이 고상한 자여. 내 이 두 손으로
그 애들을 만질 수만 있다면, 내 눈이 보이던 때처럼
그 애들이 나와 함께 있다고 생각할 수 있으련만!
- 《오이디푸스 왕》1462∼1470행
오이디푸스
재앙이 빠짐없이 다 갖추어지지 않았느냐! "너희들의
아비는 제 아비를 죽이고, 저를 낳아준 여인에게
씨를 뿌려 제가 태어난 바로 그 밭에서 너희들을
거두었지." 이런 비난이 너희들에게 쏟아지겠지.
그러니 누가 너희들과 결혼하겠느냐? 천만에.
그럴 사내는 아무도 없지. 얘들아, 필시 너희들은 자식도
못 낳고 처녀의 몸으로 시들어가겠구나.
- 《오이디푸스 왕》1496∼1502행
코로스
내 조국 테바이 주민들이여, 보시오. 저분이 유명한
수수께끼를 풀고는 더없이 권세가 컸던 오이디푸스요.
어느 시민이 그의 행운을 선망의 눈길로 바라보지 않았던가!
보시오, 그런 그가 얼마나 무서운 불운의 풍파에 휩쓸렸는지!
그러니 항상 생의 마지막 날이 다가오기를 지켜보며 기다리되,
필멸의 인간은 어느 누구도 행복하다고 하지 마시오,
그가 드디어 고통에서 해방되어 삶의 종말에 이르기 전에는.
- 《오이디푸스 왕》1524∼1530행(마지막 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