엊저녁에 뒤적거린 책은 <해럴드 블룸의 독서기술>(을유문화사, 2011)이다. 도서관에서 <교양인의 책읽기>(해바라기, 2004)를 대출해서 비교해가며 몇 장을 읽었는데, 번역이 더 나아지긴 했지만 여전히 만족스럽진 않아서(블룸의 문장을 만족스럽게 옮기는 것이 가능한지는 장담할 수 없지만) 원서를 주문했다. 완역본이 아니어서 제쳐놓았던 <세계문학의 천재들>(들녘, 2008)도 할인판매를 하길래 주문하고(예전에 도서관에서 잠깐 빌려서 보긴 했는데, 그 또한 원서를 구해야 할지는 더 생각해봐야겠다).
그리고 오늘 잠시 들여다본 책은 마이클 폴리의 <행복할 권리>(어크로스, 2011)다. 제목대로라면 관심이 덜했을 텐데, 원제가 '부조리의 시대'이고, '행복의 부조리'에 대한 성찰이 주제다. '부조리'라면 또 관심사에 든다. 당장은 아니지만 대린 맥마흔의 <행복의 역사>(살림, 2008)와 대니얼 길버트의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김영사, 2006)와 같이 묶어서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든다.
아마존의 미리보기를 참고하여 앞부분만 읽어보니 '당신이 찾는 행복은 없다'는 1장의 원제는 '행복의 부조리'이다. 번역본에서는 구분이 사라졌지만 전체 4부 구성에서 1부가 문제의 제기(The Problems)이고 1장이 1부에 해당한다. 무엇이 '행복의 부조리'인가? 행복 추구의 모순을 잘 정리해준 이는 존 스튜어트 밀이다. 그는 <자서전>에서 이렇게 말했다.
"그들 자신의 행복 이외에 다른 대상에 정신을 집중하는 사람들... 만이 행복하다... 그렇게 다른 어떤 것을 목표로 하는 도중에 그들은 행복을 발견한다... 행복이 아니라 다른 어떤 목적을 삶의 목표로 설정하는 것만이 행복해지는 유일한 기회다."(14쪽)
즉 행복을 목표로 삼아서는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 '행복의 부조리'이다. 그것은 오직 부산물로서만 얻어진다는 것이다. 인생의 목적이 행복이라고 말했던 아리스토텔레스의 경우에도 행복은 어떤 상태가 아니라 과정이고 '행위'였다. 그리고 '행복'이라 번역되는 '에우다이모니아'는 오히려 '번영(flourishing)'이란 의미에 더 가깝다('행복학'이란 조어에 가장 강력한 후보는 '에우다이모닉스Eudaimonics'이다. 번역본에서 '에우다이모닉'이라고만 음역한 것은 좀 인색하다).
히말라야에 있는 부탄왕국에서 전국행복위원회라는 걸 만들었는데, 저자가 일러주는 바에 따르면 그 위원회의 첫번째 임무는 행복을 정의하는 것이었다고. 하지만 역시나 만만찮은 일이어서 위원회의 대변인이 이렇게 토로했다.
"지난 세기에는 젊은이들에게 영웅이 누구인지 말해보라고 하면 거의 예외 없이 왕을 꼽았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랩 음악가를 꼽는 사람이 50%에 달한다."(12쪽)
호응관계가 맞지 않는 듯싶어 확인해보니 '랩 음악가를 꼽는 사람이 50%'란 말은 'rap artist 50 Cent'를 잘못 옮긴 것이다. 50 Cent는 1975년생의 래퍼다. 요즘 젊은이들의 꿈은 왕이 아니라 래퍼라는 것. '주관적인' 요소가 개입되는 만큼 행복을 정의하기란 요령부득이다. 플로베르의 한마디가 그래서 핵심을 짚은 듯이 보인다.
"어리석음, 이기심, 건강은 세 가지 선결조건이다. 하지만 어리석음이 부족하다면 다른 것이 있어도 소용없다."(15쪽)
그대, 행복을 원하는가? 일단은 어리석고 볼 일이다...
11. 05. 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