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평론가 김화영 선생의 새 평론집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문학동네, 2009)도 이번주 신간인데, 나는 서점에서 보고 두 가지 점에서 놀랐다. 첫째는 <소설의 꽃과 뿌리>(문학동네, 1998) 이후 11년만에 나온 평론집이란 점이고, 둘째는 그럼에도 분량이 300쪽이 채 되지 않는다는 점. 지난 10년간 발표된 국내 소설들을 거의 다 읽었다고 자부하고 있으므로 저자의 게으름과는 무관하다. 길을 묻고자 하는 '소설의 숲'이 울창하지 않았다는 반증으로 보인다. 적어도 저자가 보기에는. 인터뷰기사가 있기에  스크랩해놓는다. 

세계일보(09. 10. 31) “소설가 늘었지만 훌륭한 장편 없어”

문학평론가 김화영(68·사진)씨가 새 평론집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문학동네)를 묶어냈다. 프랑스문학 전공자로 유려한 미문과 자유로운 글쓰기를 통해 한국 문단에서 독특한 위치를 차지해왔을 뿐 아니라 번역자로서도 성가가 높은 그가 최근 10년 동안 읽어온 한국 소설에 대한 평문들을 집적한 책이다. “육체는 슬프도다, 오호라, 그리고 나는 모든 책을 읽었노라”는 말라르메의 시 첫 구절을 인용하며 “지난 10여년 동안 나는 이 나라에서 발표되는 거의 모든 소설을 다 읽었다”고 서문에 밝힌 그에게 그 기간 동안 한국 소설을 공통으로 관류한 특징이 무엇이냐고 물었더니, 신중한 답변이 돌아왔다.  

“긍정적인 건 소설가 수가 많아졌다는 점입니다. 작가들이 많다 보면 훌륭한 작품이 나올 가능성도 그만큼 높아지겠지요. 다른 한편으로는 그러다보니 너무 쉽게 쓰고 쉽게 책을 내는 환경이 돼버렸어요. 단편소설에 너무 진을 빼다 보니 이렇다 할 장편소설이 많지 않아요. 앞으로 해결해야 할 과제입니다.”

이 책의 1부에서는 신경숙의 ‘리진’과 조경란의 ‘혀’, 윤대녕의 ‘많은 별들이 한곳으로 흘러갔다’를 집중적으로 분석했고 2부에서는 박완서 박범신 은희경 하성란 오정희 전경린 김영하 윤성희 김연수 편혜영 정한아 등 그가 10여년간 ‘현장비평가가 뽑은 올해의 좋은 소설’ 선정작업에 참여하면서 특별히 주목했던 작가의 작품들에 대한 분석을 담아냈다. 마지막 3부는 한국의 시단과 독서계를 짚어보는 글을 모았다.

그는 서문에서 “이 나라 대학이 팽창하면서 문학비평이 일종의 ‘제도’ 속에 흡수 정착하는 과정에서 보이는 경화현상”을 적시하면서 “소설은 비평적 가설을 증명하기 위한 예문들의 저장고가 아니라 비평이 그 생명줄의 빨대를 박고 길을 찾아가야 할 실물대의 지형 그 자체”라고 강조했다. 제대로 소화되지 않은 수입 이론에 꿰어맞추기 위해 작품을 이용하는 행태에서 벗어나 “소설은 그 소설을 읽는 방법을 그 속에 암시적으로 내장하고 있다”는 믿음으로 읽기와 쓰기를 거듭해왔다는 부분은 각별히 인상적이다. 그는 토도로프의 말을 인용하면서 “문학비평가, 문학교수, 그 밖의 전문가들은 단지 거인들의 어깨 위에 올라선 난쟁이들에 지나지 않는다”고 단언한다.

김화영씨는 1986년부터 시작한 알베르 카뮈 전집 번역작업을 올해 안에 끝내고 내년 카뮈 사후 50주년을 앞두고 전20권을 완간할 예정이다. 그는 “카뮈는 평생 정의와 자유가 어떻게 서로 화해해야 할지 고민했지만 그래도 정의 이전에 자유의 편이었다”며 “세월이 흘러도 결코 낡지 않은 작가”라고 상찬했다. 월간 ‘현대문학’에 번역 연재 중인 프루스트의 ‘읽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는 앞으로도 최소한 10년 이상 걸릴 작업이란다. 그는 “남은 인생에서도 읽고 쓰고 번역하는 일은 여전히 중심에 놓여 있다”고 말했다.(조용호 선임기자) 

09. 10. 31.  

P.S. 카뮈 전집 출간에 이어서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를 완역하겠다는 저자의 계획이 눈길을 끈다. <현대문학>에 너무 조금씩 연재되고 있어서 '완역'되진 않을 걸로 알았는데, 10개년 계획이다! 원로 불문학자 홍승오 선생의 번역을 기다렸지만 소식이 없으며 프루스트와의 만남은 10년 뒤로 잡아야 할 듯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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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9-11-01 00: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자의 평론집이 나온것도 반갑고..프루스트를 완역하겠다는 계획도 반갑군요..
"길을 묻고자 하는 '소설의 숲'이 울창하지 않았다는 반증으로 보인다."..동갑입니다.

2009-11-01 11:00   URL
비밀 댓글입니다.

Elyot 2009-11-01 1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요즘 책방에 가면 나와있는 11권 짜리는 어떤가요 ? 너무 읽고 싶은 작품이지만, 번역이 어떤지 몰라서 늘 미루어 두었었는데요 ...

로쟈 2009-11-01 11:32   좋아요 0 | URL
나쁘진 않은 걸로 압니다. 하지만 7권짜리가 11권으로 쪼개진 게 마음에 안 들고(제가 갖고 있는 건 7권짜리이고요), 더 나은 번역으로 읽고 싶은 마음에 새번역을 기다리게 됩니다.
 
"동아시아 100권의 책"

어제 읽은 흥미로운 기사는 동아시아 100권의 책 선정 소식이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에서 동아시아 독자들이 함께 읽을 현대의 고전 리스트를 만들고 공동 번역 사업에 나선다는 것인데, '동아시아'란 게 무엇이며, '동아시아인'이란 정체성이 어떤 내용을 갖게 될는지 비로소 구체화될 듯싶다. 이후에 '동아시아의 소설들' '동아시아의 사회과학서들'이 더 기획될 수 있을 거라고 하니까 이제 첫걸음이다. 리스트를 보면 번역작업이 아주 지난하지 않을까 싶은데, 일단은 한국 선정 도서 26권의 리스트를 눈요기 해본다. 나머지 74권의 선정 도서가 차례로 번역돼 나오길 기대하면서...     

한국일보(09. 10. 30) 동아시아 독서 공동체, 끊겼던 맥 다시 잇는다 

동아시아의 독자들이 함께 읽게 될 현대의 고전 100권이 선정됐다. 한국, 중국, 일본, 대만, 홍콩 등 동아시아 인문출판사들의 협의체인 동아시아출판인회의(회장 김언호 한길사 대표)는 29일 전북대에서 제9회 동아시아출판인대회를 열고 '동아시아 100권의 책'을 발표했다.

100권의 책은 각국의 선정위원회가 고른 근ㆍ현대의 대표적 인문 도서로 한ㆍ중ㆍ일 각 26권, 대만 15권, 홍콩 7권으로 구성됐다. 이 책들은 2010년 선정 경위와 개요를 담은 해제집 발간을 시작으로, 각국 정부의 번역 지원을 받아 출간될 예정이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는 2005년 결성, 도쿄에서 열린 제1회 대회 때부터 100권의 책 공동 출판 사업을 추진해 왔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는 "근대 이전 동아시아는 한자를 기반으로 상당히 넓은 지적 교류를 해왔지만, 근대화와 냉전을 겪으며 그 교류가 끊어졌다. 현대 동아시아가 위치한 지적 기반을 확인하기 위해서는 서로의 좋은 책을 읽는 일이 시급하다"고 사업의 의미를 설명했다. 김언호 회장은 이날 대회 개회사에서 "책은 공유됨으로써 빛난다. 100권의 책 프로그램은 세계 출판계에 새로운 문제의식을 던져줄 것"이라고 말했다.

100권의 책에 포함된 한국 도서 26권은 <백범일지> <뜻으로 본 한국역사> <한국의학사> 등 3권을 제외하고는 모두 1970년대 이후에 출간된 책이다. 한경구 서울대 자유전공학부 교수(동아시아출판인회의 저작권위원장)는 선정 기준에 대해 "1950~60년대 분단과 전쟁의 소용돌이를 거치며 산업적 토대를 구축한 한국 출판계가 본격적 인문 단행본 출판을 시작한 시기"라고 설명했다. 한 교수는 이 밖에 ▦상업성보다 한국 사회에 지적ㆍ사회적 영향을 끼친 책 ▦한국적 특성을 드러내면서 동시에 세계적 보편성을 지닌 책 ▦번역이 가능하고 너무 전문적이지 않은 책 등을 선정 기준으로 들었다.

한국의 경우 2008년 7월 이후 학자, 출판평론가, 출판사 대표 등이 참여한 선정위원회를 운영해 왔다. 한 교수는 "모두가 만족하는 목록은 불가능했다. 숱한 토론과 타협을 거칠 수밖에 없었다"며 선정 작업이 지난했음을 털어놨다. 한국 선정 도서에는 이밖에 <한국 음악사> <한국 근대 문예비평사 연구> <한국 수학사> <지눌의 선 사상> <한국 유학 사상론> <옛 그림 읽기의 즐거움> 등 철학, 사회, 예술에 대한 현대의 저술이 다양하고 고르게 포함됐다. 시기적으로 가장 이른 것은 김구(1876~1949)의 <백범일지>이며, 가장 최근의 것은 2006년 출간된 김우창 고려대 명예교수의 에세이 <풍경과 마음>이다.

26권 가운데는 정치ㆍ사회적으로 진보적 관점에서 저술된 책도 눈에 띈다. 따라서 공공기관인 한국문학번역원의 지원을 받아 한국을 대표하는 책으로 해외에 소개되는 것을 놓고 논란도 예상된다. 박명림 연세대 교수의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최장집 고려대 명예교수의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 백낙청 서울대 명예교수의 <흔들리는 분단체제>, 김동춘 성공회대 교수의 <전쟁과 사회: 우리에게 한국전쟁은 무엇이었나?> 등이 목록에 포함됐다.

한 교수는 이에 대해 "한국의 1970~80년대는 민주화를 떼어놓고는 이해할 수 없다. 포함된 책은 산업화ㆍ민주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한 책들이다. 오히려 사상사적 중요성에도 불구하고 일본과 중국의 독자를 고려해 걸러낸 책도 있다"고 밝혔다.

중화권(중국, 대만, 홍콩)과 일본이 선정한 책은 자국의 역사와 문화를 소재로 저술한 학술서와 고급 교양서가 주를 이뤘다. 일본의 류사와 다케시 전 헤이본사 대표편집국장은 "'동아시아의 독자들이 공유해야 할 책이 어떤 것일까' 하는 것이 선정 기준이었다"며 "목록에 포함된 책들은 근래 50년 동안 발간된, 일본에서 현대의 고전으로 꼽히는 책들"이라고 설명했다. 동슈위 전 중국출판집단 싼롄서점 총경리는 "중국은 (문화대혁명 등의 이유로) 학술서가 출판되지 못하던 시절이 있어서, 1980~90년대 이후 신진 학자들의 저작이 많이 포함됐다"고 말했다.

동아시아출판인회의는 저작권ㆍ판권이 확보되는 책부터 순차적으로 100권의 책을 발간할 계획이다. 출간 작업은 각국에서 독립적으로 진행되지만, 표지 디자인이나 편집 등에서 통일성을 추구할 방침이다. 한성봉 동아시아출판사 대표는 "번역은 무척 힘들고 중요한 작업이라 언제 완간될지는 장담할 수 없다. 출판인회의에 소속되지 않은 출판사에게도 발간의 기회는 열려 있다"고 말했다. 

미국 예일대 출판사를 비롯한 비아시아권 출판계에서도 100권의 책에 관심을 갖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김 회장은 "100권의 책은 계속되는 프로그램"이라며 "'동아시아의 소설들' '동아시아의 사회과학서들' 등 다른 이름과 형태로 사업은 계속될 것"이라고 말했다.(유상호기자) 

 

09. 10. 31. 

P.S. 한국 선정도서들의 이미지를 나열해본다. <한국문학통사>만 제외하면 초판출간연대순이다. 한국의 인문서를 대표한다고 하지만, 시중에서는 구할 수 없는 '죽은 책'들도 여러 권 눈에 띈다. 알라딘에 이미지가 뜨지 않는 책은 제외했다(*표시를 했다).  

1. 백범일지  

 

2. 뜻으로 본 한국 역사 

 

3-6. 한국의학사, 한국과학사, *한국음악사, 한국근대문예비평사연구 

 

7-9. 한국수학사, 지눌의 선사상, 한국유학사상론 

 

10. 한국사회사연구

  

11. 갈릴래아의 예수

 

12. 한국전쟁의 발발과 기원  

 

13-15. 한국의 노동운동과 국가, *풍류도와 한국의 종교사상, 흔들리는 분단체제

  

16-17. 한국사신론,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18-19. 시간과의 경쟁,  전쟁과 사회

 

20-22. 한국문학사의 논리와 체계, 한국미술의 역사, 운화와 근대 

 

23-25. 한국인의 신화, 눈과 정신, 풍경과 마음 

 

26. 한국문학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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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동아시아 100권의 책 - 중국 쪽 선정도서
    from 일방통행로 2009-11-01 05:43 
    동아시아 출판인회의를 조직하여 "동아시아 100권의 책"을 선정한다는 말을 일전에 들었는데 29일에 선정 및 발표되었다. 동아시아 격변기 세계관 바꾼 ‘현대의 고전’ 한겨레 “거대한 독서공동체 복원 첫걸음” 한겨레 한·중·일 이어줄 ‘100권의 책’ 중앙일보 책에서 동아시아 문화 유전자 찾는다 중앙일보 내가 번역한 책도 후보에 올라와 있어 출간을 약간 미루고 있었는데 아쉽게도 최종선정에서 제외된 것으로 보인다. 후보 명단에 올라와 있던 책들은 지금..
 
 
바밤바 2009-10-31 14: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늘자 조선일보를 보면 프랑크푸르트 도서전에 100권을 선정할 때도 말이 많았거늘 26권으로 우리를 오롯이 드러내려는 시도에 대해 비판을 가하더군요. 무엇보다 선정도서의 편파성에 대해 불쾌한 내색을 감추지 않더군요. 선정 도서 목록을 몰라 왜 그러나 했는데 로쟈님 글을 보니 왜 그런지 알겠네요. ㅎ 조선이 좀 더 포용력을 가졌으면 합니다~ ㅎ

로쟈 2009-10-31 15:11   좋아요 0 | URL
전체적으론 통사류의 책이 너무 많아서 '책'보다는 '한국'에 더 초점을 맞춘 게 아닌가 싶습니다. '동아시아'나 '세계'를 다룬 책이 거의 없다는 점도 눈에 띄고요. 제한된 목록이니 모든 걸 충족시킬 수야 없겠죠...

열매 2009-10-31 22: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조선이 자기 입맛대로 책을 추천해된다면 그게 바로 '불한당들의 세계사'가 되지 않을까요^^;;

로쟈 2009-10-31 23:53   좋아요 0 | URL
자체적으로 구미에 맞는 목록을 뽑아서 문화부 지원하에 사업을 진행하면 되지 않을까 싶네요. 그 정도는 할 수 있지 않을까 싶은데요. 방송도 진출하는 마당에...
 

작년에 꼽은 '11월의 읽을 만한 책'을 보니 서두에 "주말에는 써야 할 원고들이 많아서 미리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놓는다."라고 적어놓았다. 딱 1년이 지났지만 처지는 마찬가지다. 주말에는 할일이 너무 많아서 야밤을 틈타 미리 '이달의 읽을 만한 책'을 골라놓는다. 11월은 2월과 마찬가지로 잘 눈에 띄지 않는 달이지만, 일정을 보니 매주 발표와 강연이 있다. 아마도 정신없이 보내다 12월을 맞을 듯싶다. 벌써 겨울인가?!..  

1. 문학 

신경숙 작가가 추천한 책은 줌파 라이히의 <그저 좋은 사람>(마음산책, 2009)이다. 이미 지난번에 '9월의 읽을 만한 책'으로 골라놓았으니 나로선 덧붙일 말도 없다. '그저 좋은 책'이고 나는 그제도 아는 분께 한권을 선물하기도 했다. 나대로 더 고른 책은 존 쿳시의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민음사, 2009)와 리비아 출신의 작가 히샴 마타르의 <남자들의 나라에서>(현대문학, 2009). <어느 운 나쁜 해의 일기>는 남아공 출신의 노벨상 수상 작가 쿳시가 2007년에 발표한 작품으로 쿳시의 작품 가운데 가장 실험적인 소설이라 한다.   

<남자들의 나라에서>는 작가의 데뷔작으로 쿳시로부터 "리비아 정치의 폭력성에 너무 어린 나이에 노출된 아이에 관한 통렬한 스토리"란 평을 들은 작품. 공통점을 더하자면 두 작품 모두 쿳시와 하진의 작품을 주로 옮겨온 왕은철 교수가 우리말로 옮겼다. "1979년 리비아, 푸른 지중해와 뜨거운 햇빛으로 둘러싸여 평화로운 나날을 보내던 아홉 살 소년 술레이만. 그의 어린 시절은 카다피 정권으로 인해 위기를 맞는다."는 것이 소설의 도입부로 작가 자신의 체험을 많이 반영하고 있는 듯싶다.   

2. 역사 

이덕일 소장이 추천한 역사분야의 책은 김진경의 <고대 그리스의 영광과 몰락>(안티쿠스, 2009). 국내서로는 드물게 고대 그리스의 역사와 문화를 다루고 있는 책으로, 추천자는 "이 책의 장점은 여러 가지가 있지만 무엇보다도 현재적 관점을 잃지 않고 있는 것이 크게 돋보인다. 노비를 포함해 인구 5만 명 정도의 폴리스들이 어떻게 그렇게 오랜 세월 동안 독립적 상태로 존속할 수 있었는지를 추적하고, 베일 속에 묻혀 있던 고대 그리스의 모습을 현대인의 시야로 끌어올린 최근 사람들의 이야기를 함께 싣고 있어 흥미진진하다."고 평했다. 아직 손에 들진 못했지만, 나도 바로 구입한 책. 저자의 다른 책으론 <지중해 문명 산책>(지식산업사, 1994/2001), 번역서로 키토의 <그리스 문화사>(탐구당, 1984/2004)가 있다. 정평있는 그리스 입문서인 키토의 책은 <고대 그리스, 그리스인들>(갈라파고스, 2008)이라고 따로 번역되기도 했다.   

 

3. 철학 

이달부터는 철학분야의 선정위원이 김형철 교수(연세대 철학과)로 바뀐 듯한데, 첫번째 추천도서는 장근영의 <심리학 오디세이>(예담, 2009)이다. 의외의 책인데, 소개에 따르면 "이 책은 저자가 역사상 위대한 업적을 남긴 심리학자들의 이론을 알기 쉽게 일반인들을 대상으로 쓴 것이다. 이해를 돕기 위해서 만화도 직접 그렸다." 분류하자면 교양심리학에 가깝겠다. 철학분야의 책을 고르자면,  노에 게이치의 <이야기의 철학>(한국출판마케팅연구소, 2009)과 김용석의 <서사철학>(휴머니스트, 2009)을 고르고 싶다. 모두 '이야기'에 대한 철학적 접근을 시도하고 있는 책으로 이야기란 무엇을 기록하는 것이며, 어떻게 이해할 수 있는가에 대한 좋은 통찰들을 제공한다.  

4. 정치/사회 

강정인 교수가 고른 정치/사회분야의 책은 김재명의 <눈물의 땅. 팔레스타인>(프로네시스, 2009)이다. "이 책은 팔레스타인 지역의 사람들이 겪고 있는 전쟁의 참상을 서구의 시각이 아니라 그들의 시각에서 충실히 전달함으로써 우리의 시각에 균형을 부여하려는 시도이다."라고 평하는데, 추천자에 따르면, 이 책의 메시지는 첫째, 팔레스타인 사람들이 겪고 있는 좌절과 분노이고, 둘째, 팔레스타인 지역에 평화가 정착되기 위해 미국 정부가 친이스라엘 일방주의를 거둬들이고, 유엔 평화유지군을 팔레스타인 지역에 파견하여 팔레스타인 지역의 유혈사태를 종식시켜야 한다는 것이다. 팔레스타인의 역사와 현실을 다룬 책으로 일란 파페의 <팔레스타인 현대사>(후마니타스, 2009)와 영화로도 만들어져 화제를 모았던 만화 <바시르와 왈츠를>(다른, 2009)을 꼽아두도록 한다.   

5. 경제/경영  

이준구 교수가 추천한 경제/경영서는 이몬 버틀러의 <시장경제의 법칙>(시아, 2009). 제목이 눈길을 끄는 건 아닌데, 추천자는 시장에 모든 것을 설명해주는 입문서로 강추하고 있다. "이 책은 시장의 모든 측면을 A부터 Z까지 샅샅이 설명해 주고 있다. 그리고 그 설명에서 경제 전문가의 어려운 말투는 거의 찾아보기 힘들다.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쓰는 평범한 언어로 어려운 경제학적 개념을 놀라울 정도로 쉽게 설명해 주고 있다. 이 책을 읽으면 진정한 대가는 쉬운 말로 설명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이라는 사실을 새삼 깨닫게 된다." 같이 읽어볼 만한 책으론 존 맥밀런의 <시장의 탄생>(민음사, 2007)과 시장경제로의 이행 문제를 다룬 조지 스티글리츠의 <시장으로의 길>(한울, 2009)을 골라놓고 싶다. 전자도 "어려운 전문용어 없이 상식적인 수준에서 모든 종류의 시장을 살핀다"는 책이다.     

6. 과학 

새로이 선정위원으로 참여한 최영주 교수(포항공대 수학과)가 추천한 과학책은 콘스탄스 루크의 <존 오듀본>(서해문집, 2009). "책은 미국 조류학의 아버지라 불리는 화가인 존 오듀본(1785-1851)의 열정과 일 그리고 자연에 관한 이야기"이다. '조류학의 아버지'라고 하니까 국내에선 가장 널리 알려진 조류학자 윤무부 교수가 생각난다. 찾아보니 <날아라, 어제보다 조금 더 멀리>(마음의숲, 2007)이란 자전적 에세이집이 나와 있다. 오듀본과의 차이라면 그림이 아닌 사진을 수록하고 있다는 점. 소개는 이렇다. "새와 사람 사이에서 대자연이 허락한 만큼 보고 느끼고 깨달았던 조류학자 윤무부 교수의 60년의 삶이 총망라되어 있는 에세이.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고 새를 통하여 우리의 잃어버린 날개, 즉 마음속에 있는 식지 않은 열정을 되찾게 하는 격려의 메시지를 담았다. 지은이가 직접 찍은 다양한 새 사진도 함께 수록되어 있다."  

7. 예술  

김춘미 교수가 고른 예술분야의 책은 임근혜의 <창조의 제국>(지안, 2009). '영국 현대미술의 센세이션'이란 부제를 곁들여야 내용을 짐작해볼 수 있다. 영국의 현대미술의 메카가 되고 있다는 사실을 현장중계를 통해 전달해주고 있는 책인 듯하다. 소개는 이렇다. "런던을 관광의 메카로 만들며 현대미술의 능력을 보여준 테이트모던 미술관, 시골 탄광촌을 일약 국제적 문화도시로 도약시킨 '북방의 천사', 런던 뒷골목까지 관광객이 찾게 만든 얼굴 없는 거리미술가 뱅크시, 그리고 경매 한 번으로 2천억 원어치 작품을 팔아치우며 피카소를 넘어선 데미언 허스트 등 yBa 아트스타들의 성공 스토리까지…"

 

yBa는 'young British artist'그룹을 가리키는 것으로 최근 세계미술계에 충격을 주고 있다고. 잠시 살펴본 작품들이 꽤 강한 인상을 심어준다. 이유가 뭔지, 어떤 사회적 배경이 있는 건지 궁금해진다.

예술분야의 나머지 두 권은 개인적인 관심도서로 채운다. 진중권의 <교수대 위의 까치>(휴머니스트, 2009)와 조선희의 <클래식 중독>(마음산책, 2009). 전자는 진중권의 그림 이야기이고, 후자는 조선희의 한국영화 이야기이다. '교수대 위의 까치'는 피터르 브뤼헐의 그림이다. 12점의 그림 가운데 어째서 이 그림이 책의 제목이 되었는지는 우리가 다 아는 바다. 이런 게 동시대인의 '특권'이라니!..    

 

8. 교양 

이한우 기자가 추천한 교양분야의 책은 소 알로이시오의 <가장 가난한 아이들의 신부님>(책으로여는세상, 2009)이다. 제목이 이미 많은 걸 짐작하게 해주는 책인데, 저자인 소 알로이시오 신부의 자서전이라 한다. 어떤 분이었나? "1957년 12월 8일 파란 눈의 젊은 미국인 신부가 일본 동경에서 비행기를 갈아타고 전쟁이 끝난 지 4년밖에 안 된 한국을 찾았다. 그의 첫 인상. "당시 한국의 모습은 세상의 종말처럼 보였다." 27살의 이 신부는 어릴 때부터 꿈이던 가난한 자, 그 중에서도 가장 가난한 자들을 보살피는 것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실천하려 했던 소 알로이시오. 루뱅의 신학교에서 유학할 때 알게 된 신부와 평신도들과의 인연으로 인해 그는 한국과 태국 중에서 한국을 선교지로 골랐다. 그리고 한국에서도 가난한 이들이 많았던 부산교구를 선택했다."  그런 선택 이후의 이야기가 책에 담겨 있다. '소 신부님'은 1992년 루 게릭 병으로 필리핀 소년의 집 근처에서 영면했다고 한다. 저자의 책으론 <굶주린 자와 침묵하는 자>(가톨릭출판사, 2002)도 출간됐었지만, 품절상태다. 알라딘에서는 '카톨릭 에세이'로 분류되는 이 책과 같은 분야의 책으론 고 김수환 추기경의 <바보가 바보들에게>(산호와진주, 2009)도 출간돼 있다.   

  

9. 실용

손주호 국민일보 논설위원이 꼽은 실용분야의 책은 <노년에 인생의 길을 묻다>(궁리, 2009)이다. '노년과 나이듦에 대한 여덟 개의 시선’이 부제. 저자들은 어사연(어르신사랑연구모임) 소속. 노인 문제에 관심이 없었던 탓에 이 책을 통해서야 '어사연'에 대해 알게 됐는데, 이런 곳이다. 

‘노인’과 ‘노인복지’ 분야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이라면 한번쯤 ‘어사연(어르신사랑연구모임)’이라는 이름을 들어봤을 것이다. 2000년 겨울 ‘노인복지의 끈을 놓지 않기 위해서’ 시작한 소박한 모임이 가늘지만 지속적으로 이어져 9년의 세월을 보냈다. 특히 ‘어사연’의 이름을 널리 알린 것은 한 달에 한 번 열리는 ‘어사연 공부방’ 모임. 2001년 2월 1회 세미나(노인과 운동에 대한 기본 이해/노인 방송 프로그램 모니터에 대하여)를 시작으로, 2009년 8월 100회 세미나(노인요양원에 살다 : 노인요양원 생활의 빛과 그늘)까지 노인문제와 관련 있는 다양한 주제들을 다루면서 노인 복지 현장의 생생한 목소리들을 전하고 있다.(http://cafe.daum.net/gerontology)   

인생에서나 책에서나 '노년'은 '청춘' 이상으로 큰 주제이지만 소홀하게 다뤄진 감이 없지 않은데, 노인 인구가 계속 늘어나고 있는 만큼 관련서들이 더 많이 출간되면 좋겠다. 노년에 대한 부정적인 시각을 교정해주는 책으로 김열규 교수의 <노년의 즐거움>(비아북, 2009)와 프랑스의 심리학자이자 심리치료사라는 마리 드 엔젤의 <살맛 나는 나이>(학고재, 2009) 정도는 기억해둠직하다. 마리의 한 마디는 이렇다.    

어떻게 하면 사랑받는 노년을 보낼 수 있을까? 늙음이 주위 사람들에게 행운의 부적이 될 수 있을까? 그렇다. 우리의 탐험을 인도할 길잡이 끈은 우리 안의 무언가는 늙지 않는다는 신념이다. 나는 그것을 마음이라고 부를 것이다. 물론, 시들고 메마른 심장이 아니라 사랑하고 갈망하는 능력을 말한다. 설명할 수도 없고 이해할 수도 없는 힘, 인간 존재를 살아 있게 만드는 이 힘을 스피노자는 '코나투스'라 불렀다. 우리가 두려움을 극복하고 노화의 힘든 시련 한가운데서 버티게 도와줄 수 있는 건 바로 마음이다.

 

10. 알함브라  

내 맘대로 고르는 주제는 '알함브라'로 정했다. 책상맡에 있는 달력의 11월 사진이 스페인 그라나다의 알함브라 궁정이라는 단 한 가지 이유만으로. 찾아보니 워싱턴 어빙의 기담소설 <알함브라>(생각의나무, 2009)가 출간돼 있기도 하다. 기타곡 알함브라 궁전의 추억도 생각나고, 시인 로르카의 죽음을 소재로 한 영화 <데스 인 그라나다>도 떠오른다...

 

알함브라 궁전에서의 하룻밤이라... 그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11월의 하룻밤 정도... 

09. 10. 30.  

P.S. 이달의 고전은 <뜻으로 본 한국역사>(한길사)이다. 학부시절에 건성으로 들춰보았을 뿐 정독하진 않은 책인데, 지난 봄에 함석헌 전집도 개정판이 나온 김에 독서계획을 잡아놓았었다(이달이 그달이다). <함석헌 평전>(삼인, 2001) 등의 관련서도 많이 출간돼 있다. 낙엽이 타는 냄새와 함께 고난에 찬 한국역사의 '뜻'에 대해서 궁구해보는 시간을 가져보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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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30 08: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벌써, 여기였던가요. 일때문에 외지에 왔는데. '바시르와 왈츠를' 후다닥 읽고 싶네요.

로쟈 2009-10-30 22:37   좋아요 0 | URL
노트북으로 접속하시나 봅니다.^^
 

오늘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이번주에 나온 강상중 교수의 <청춘을 읽는다>(돌베개, 2009)이다(원제는 '강상중의 청춘독서노트'). 책의 해제를 청탁받고 쓴 덕분에 출판사에서 보내온 것. 긴 분량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부담을 안고 고민하면서 보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강상중의 청춘적 독서'라고 제목을 붙인 해제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강상중 교수와의 첫 만남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산, 1997)를 통해서였다. 나는 강상중이란 이름보다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주제에 이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속표지엔 날카롭고 이지적인 모습의 일러스트가 저자의 사진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간략한 저자 소개는 그를 ‘정치사상사를 전공한 재일동포 지식인’ 정도로 분류하게 했다. 나는 그가 도쿄대학 교수이면서 일본 이름이 아니라 ‘강상중’이란 한국 이름을 쓰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재일동포’라는 정체성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저자의 개인사보다는 ‘근대문화 비판’에 더 관심이 있었고, 베버와 푸코, 그리고 사이드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무관심은 ‘적극적인’ 무관심이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이렇게 써놓은 것을 애써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2세인 나는 학생 때부터 언제나 한 가지 질문을 줄곧 던져 오지 않았던가 싶다. 그것은, 왜 내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하여 근대화의 낙오자로서 엄청난 희생을 강요받게 되었던 것일까 하는 물음이다.”  

나는 그의 물음을 나의 물음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만 읽었을 것이다. 사실 저자와 같은 세대라 할지라도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가 여전히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그것은 정서적인 한(恨)으로까지 경험되지는 않는다. 역사적 경험이자 공동체의 아픈 기억이긴 하지만 현실에서의 자기 체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세대에 무관심했다.   

생각이 조금 달라진 건 <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을 읽으면서다. 그사이에 강상중과 같은 세대의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의 책들을 즐겨 읽은 것도 재일 지식인들의 개인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문체로만 분류하자면 유려한 에세이들을 통해서 소개된 서경식이 ‘소프트’했고,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하여 내셔널리즘과 세계화 등 주로 ‘이즘’과 ‘이슈’에 관한 책들이 소개된 강상중은 ‘하드’했다. <고민하는 힘>은 그런 강상중에 대한 인상을 바꾸어놓았다. 그건 ‘소프트한’ 강상중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대중적 지식인이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발언 때문에 강연회를 할 때마다 극우파의 공격에 대비해 배에 신문지를 넣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내친 김에 나는 그의 자서전 <재일 강상중>(삶과꿈, 2004)까지 찾아서 읽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72년 처음 한국을 방문하고 일본 이름 ‘나가노 데쓰오’ 대신에 ‘강상중’이란 본명을 쓰게 된 사연과 독일 유학시절에 대한 회고 등이 흥미로웠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2세인 나는 학생 때부터 언제나 한 가지 질문을 줄곧 던져 오지 않았던가 싶다.”고 한 그의 말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재일 2세로서 강상중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자란 우리와는 다른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에게 피식민 지배의 굴욕적인 역사는 현실에서 그가 겪는 직접적인 모욕과 소외의 원인이자 원흉이었고, 따라서 그러한 역사를 낳은 ‘근대화’의 문제를 깊이 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근대화 이론의 태두라 할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대한 연구로 나아간다. 그 방향성을 규정한 것이 ‘개인’ 강상중이 아니라 ‘재일’ 강상중이라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선택은 동시에 ‘자유로운 선택’이자 ‘필연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되짚어보면, 강상중에게서 실존적 물음과 학문적 과제는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실존적 물음에 학문의 보편적 언어를 통해서 기술하고 해명하며 답하고자 했다. 나로선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지만, 말하자면 그런 것이 강상중의 학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태도가 강상중에게서 배울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과 학문을 일치시키려는 태도 말이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청춘을 읽는다>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의 그러한 태도를 다시금 읽는다.   

청춘을 읽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에서 출발하여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이르는 여정이기도 한 이 책을 손에 들면서 독자들이 제일 처음 던질 법한 질문이다. 한국어본의 부제가 된 책의 원제도 ‘강상중의 청춘독서노트’이다. 하지만 이미 <고민하는 힘>을 읽어본 독자라면 ‘청춘은 아름다운가?’란 장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본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청춘을 읽는다>와 <고민하는 힘>과 서로 짝이 될 만하다. <고민하는 힘>이 ‘고민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이들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멘토’로서의 강상중과 만나게 해준다면, <청춘을 읽는다>는 독서노트의 형식을 빌려서 강상중의 성장사와 함께 시대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그렇다, 이것은 독서록이면서 자서전이고 동시에 한 시대에 대한 증언이다. 그것을 뭉뚱그려서 강상중은 ‘청춘’이라고 말한다. 대단한 청춘 아닌가! 

강상중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청춘’을 ‘젊음’과는 구별되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청춘은 미숙하고 서툴더라도 진지하게 무언가를 찾아서 계속 방황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청춘은 단순히 ‘피부’와 ‘근육’의 문제로 따질 것이 아니다. 강상중이 청춘론이 문제삼는 것은 고민의 함량이고 방황의 진정성이다. ‘고민하는 힘’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여전히 청춘이다. 반대로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기업에 얼른 취직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친다면, 비록 나이는 청춘이더라도 청춘이 버거운, 이름만 청춘인 경우가 된다.   

<고민하는 힘>에 따르면, “타인과 깊지 않고 무난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구애되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한마디로 ‘요령이 뛰어난’ 젊음은 젊음이긴 하되 청춘은 아니다. 기껏해야 탈색된 청춘이다. 이런 생각에서 강상중은 심지어 ‘청춘적으로 원숙함’이란 표현까지 쓴다. 나이를 먹더라도 청춘의 문제의식과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보존하는 원숙함이다. 그리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강상중은 ‘표층적으로 원숙함’이라고 부른다. 고민 없이 나이만 먹은 경우다. <청춘을 읽는다>는 ‘청춘적 원숙’에 이르기 위한 길잡이이자 ‘청춘적 독서’의 모범적인 사례담이다.   

 

사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시절까지, 곧 ‘청춘기’에 저자가 읽은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하고 또 추천하고 있기도 하므로 ‘청춘’이란 말은 일차적으로 그 시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청춘’의 의미가 종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청춘을 되새기며 이야기하는 현재의 시간 또한 ‘청춘’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현재라는 시간이 그의 청춘 시대와 무척 닮았다고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마무리하며 그가 “나는 지금 제2의 청춘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고백한 것도 일방적인 생각이나 믿음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이면서 우리가 되사는 시간으로서의 청춘은 언제 시작되는가? 열일곱이다. 열입곱은 구마모토의 현립 고등학교에 다니던 강상중이 야구선수의 꿈을 접게 된 나이이면서 ‘은둔형 외톨이’ 시절을 보내며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접한 나이이다.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는 강상중의 글 「어른으로 향하는 외나무다리, 움츠리지 말고 건너가보자」가 가리키는 나이도 열일곱이다.  

그가 열일곱에 맞닥뜨린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경구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인상적인데, 이 걸출한 일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한 갑 성냥을 닮았다. 소중하게 다루는 건 어리석다.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강상중은 이 경구가 마치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선물이었다고 회고한다.   

아쿠다가와의 경구는 인생의 모순, 인생을 고민하는 청춘의 모순을 집약해주고 있다. ‘인생을 너무 소중히 다루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니 ‘인생을 소중히 다루지 말라’는 명제와 ‘인생은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곧 ‘인생을 소중히 다루라’는 명제는 서로 모순된다. 하지만 이 모순을 두 다리로 삼아서 우리는 깊은 계곡에 가로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가지 태도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인생이 너무 소중하다면, 우리는 그 위태로운 다리를 감히 건너갈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인생을 함부로 다룬다면, 우리는 신중하지 못하게 다리를 건너다 추락하고 말 것이다. 짐작컨대, 이것이 열입곱 살 강상중의 깨달음이지 않았을까.  

흥미로운 건 이 깨달음이 이후에 그의 정치적 입장과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을 ‘전위’가 아닌 ‘후위’에 위치시키는 입장이다. 후위라는 것은 물론 ‘재일’, 곧 ‘자아니치’로서의 정체성과도 관련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와 “자신을 너무 앞세우지 말라”는 상충적인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강상중 자신의 표현을 빌면, 현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떠한 ‘주의’나 ‘도그마’에도 붙들리지 않는 ‘리버럴’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한 입장을 강상중은 이렇게 요약해놓고 있다. 

“언제나 나는 나 자신을 후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앞에 아무도 없고 어느새 내가 전위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후위라고 생각하거니와 후위라는 사실을 영광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내가 마치 전위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만큼 일본이라는 사회가 변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강상중은 하나의 척도가 될 수도 있겠다. ‘후위’에 놓인 그의 입장이 전위로 보이는 만큼 한국사회도 일본의 변화를 따라잡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한 변화 속에서 ‘척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강상중 자신이 변화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따라서 ‘청춘의 독서’라고 하지만 이 책은 그에게 ‘일생의 독서’를 기록한 책이기도 하다. 사실 그럴 만하지 않은가. 그의 일생을 결정한 책들과의 만남이었으니까.  

강상중의 <청춘을 읽는다>를 통해서 우리는 “나는 야구도 못해. 친구도 없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 걸까?”라고 묻던 ‘시골뜨기’이자 <산시로>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길 잃은 양’이었던 한 재일 대학생이 어떻게 성장해가는가, 격동의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이 던진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찾아나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독자가 읽어나갈 몫으로 남겨놓는 것이 나의 소임인 듯싶지만, 한 가지 감상만은 덧붙이고 싶다. 그가 맺음말에서 이 책이 “청춘 독서노트인 동시에 또 하나의 도쿄, 또 하나의 일본을 모색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라고 적을 때, 우리 또한 자연스레 “또 하나의 서울, 또 하나의 한국”을 모색하는 우리의 ‘청춘 독서노트’를 떠올리게 되리라는 것. 그럴 때만 우리는 아직 청춘이리라.  

09.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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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 보따리의 책을 싸들고 귀가하면서 이동중에 읽은 책은 조선희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의 <클래식중독>(마음산책, 2009). 요네하라 마리의 <마녀의 한 다스>(마음산책, 2009) 2판의 러시아어 표기 감수를 맡은 덕분에 출판사에서 증정본으로 보내온 것으로, 실상은 내가 먼저 부탁한 책이다(검색해보니 '조선희'란 저자가 여럿이군). 한국영화(사)를 더듬는 김에 김혜리의 <영화를 멈추다>(한국영상자료원, 2008)와 이효인의 <영화로 읽는 한국 사회문화사>(개마고원, 2003)도 조만간 챙겨두어야겠다(그러고 보니 이효인 교수도 영상자료원장을 지냈군).

 

제목만 갖고는 무슨 책인지 짐작하기 어려운데, 부제가 '새것보다 짜릿한 한국 고전영화 이야기'이다. 씨네21의 첫 편집장을 역임한 저자가 3년간 영상자료원장으로 지내면서 거둔 소출 가운데 하나. 한국 영화감독론과 작품론도 겸하고 있는 책인데, 이런 유형으론 오래전에 읽은 이효인의 <한국의 영화감독 13인>(열린책들, 1994)을 떠올리게 한다. 그건 '고전영화' 감독들이 아니라 나름대로 동시대 감독이었던 이장호, 장선우 감독 이야기를 내가 먼저 읽은 탓이겠다.   

첫장에서 다뤄지고 있는 이가 '잊혀진 천재' 이장호 감독인데, 그의 문제작 <바람 불어 좋은 날>(1980)을 오랜만에 상기할 수 있어서 좋았다. 대학 1학년때 변두리 상영관에서 <바보선언> 등과 함께 보았던 영화로 나대로는 가장 좋아하는 한국영화 가운데 하나. 책에 대한 독후감은 다른 꼭지들도 읽은 후에 고려해보기로 하고, 일단은 얼마전 한겨레에 실린 저자 인터뷰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10. 10) “개봉은 잠깐…아카이브는 영원하죠” 

조선희(49) 전 한국영상자료원장은 최근 3년 임기를 ‘무사히’ 마쳤다. 하루도 에누리 없이 꼬박 3년이다. 그의 재임 기간이 새삼 관심을 끄는 건, 이명박 정부의 ‘전 정권 인사 일괄 퇴출 방침’의 쓰나미 속에서 살아남은 거의 유일한 사례이기 때문이다.

“낯선 곳으로 3년 동안 여행을 다녀온 느낌”이라는 조씨를 지난 7일 한겨레신문사에서 만났다. 그는 “고대 출신이라서 살려준 것이라는 둥, 여자 티오(할당 인원)라는 둥 턱도 없는 해석들이 많았다”며 “나는 고대 인맥에 구명운동을 한 적이 없으며, 이 정부 들어 양성평등 개념이 크게 후퇴했으니 여자 티오도 아닌 것 같다”고 말했다. 이어 “‘별로 중요하지 않은 기관이라서’라는 해석도 있는데, 어느 정도 맞는 말인 것 같다”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유인촌 문화체육관광부 장관의 개인적인 판단이었는데, 아무리 전부터 아는 사이였다고 해도 영상자료원이 영화진흥위원회처럼 정치적으로 중요한 기관이었다면 달랐을 것”이라고 했다.

업무 성과로만 본다면 그는 연임도 가능했다. 취임 당시 4년째 동결됐던 예산을 2배 이상 늘렸으며, 고전 영화를 대대적으로 발굴·복원했고, 복원한 영화들을 칸 영화제 클래식 부문에 3년 연속 진출시켰다. 100여편에 불과했던 독립영화 필름을 1600여편으로 늘려놓았고, 디지털 아카이빙을 시작했다. 각종 회고전과 특별전, 기획전으로 자료원 지하 1층 극장은 아연 활기가 넘쳤고, 인터넷으로 고전 영화를 볼 수 있는 온라인 브이오디(VOD) 서비스는 대중과의 거리를 좁혔다.

조씨는 자타가 공인하는 일벌레다. 무작정 열심히 한다기보다는 성과를 중시하고 또 즐긴다. 자료원 직원들은 조 원장 재임 시절을 “피곤했지만 행복하게 일했다. 무엇보다 성과가 있어서 신이 났다”고 회고한다. 자료원의 존재감이 가장 높게 부각된 시기라는 평이 다수다.

조씨는 “개봉은 잠깐이고 아카이브는 영원하다”는 말로 자료원의 중요성을 설명했다. “최근 한국 영화에 대해서는 어떤 종류의 열광이 있지만, 그마저도 개봉 1년만 지나면 차갑게 식어버리는 현상, 옛날 영화에 대해서는 비정상적으로 관심이 없는 분위기를 바로잡고 싶었다”고 했다.

퇴임에 맞춰 출간한 <클래식 중독>(마음산책)은 고전 영화의 향기에 취했던 지난 3년의 갈무리다. 그의 개인적 경험과 비평, 감독과의 대화, 스타들의 사생활 등으로 엮은 ‘살아 있는 한국영화사’다. <한겨레> 문화부 기자와 <씨네 21> 편집장, 한국영상자료원장을 거치며 길어올린 인간 조선희의 개인 아카이브를 구경하노라면, 거장 감독을 중심으로 분류한 한국 영화의 근현대사 속으로 자신도 모르게 걸어 들어가게 된다.

같은 책 말미에 그는 “기관장 일괄 퇴출 정책은 가까스로 구축한 합리적인 시스템(산하기관장 공모제와 임기제)을 한방에 무너뜨렸다는 점에서 더 문제”라며 “권력으로 못하는 게 없으면 그것이 파시즘”이라고 썼다. “이 문제에 관한 한 침묵할 수 없었다”고 조씨는 덧붙였다. 말이 나온 김에, 퇴임 직전까지 유 장관이 주재하는 문화부 산하 공공기관장 회의에 참석했던 그에게 이명박 정부 내부의 풍경을 물었다. 그러나 조씨는 “간첩 짓을 하기는 싫다”며 입을 닫았다.

깃드는 곳마다 족적을 남기는 그의 비결은 단순히 일에 대한 열정만이 아니라 의리와 성과를 존중하는 (어찌 보면 보수적인) 태도에 있는 것일까. 다음 인생 행로가 세번째 소설 집필이든, “재밌는 사업으로 돈을 버는 것”이든 그는 반드시 ‘성과’를 내고야 말리라.(이재성 기자) 

09. 10. 27.  

P.S. 기사 말미에도 언급이 있지만, 조선희 씨는 소설을 쓰기 위해 19년간의 기자생활을 그만 둔 이력이 있다(<클래식중독>을 읽으면서 언젠가 주워들은 기억을 상기하게 됐지만 소설가 김형경 씨가 저자의 여고 동창이다). <클래식중독>을 읽으며 저자의 두 소설, 장편소설 <열정과 불안>(생각의나무, 2002)과 단편집 <햇빛 찬란한 나날>(실천문학사, 2006)도 읽어보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독자로선 '재밌는 사업'보다 '세번째 소설'이 더 기대되는 건 물론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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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0-27 21: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양이를 부탁해(영화), 엄마를 부탁해(소설), 아가씨를 부탁해(드라마),,,
부탁하지 못한 제 성격은 능력없는 욕심쟁이 같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로쟈 2009-10-29 15:12   좋아요 0 | URL
아가씨를 부탁해도 있나 보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