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 이번주에 나온 강상중 교수의 <청춘을 읽는다>(돌베개, 2009)이다(원제는 '강상중의 청춘독서노트'). 책의 해제를 청탁받고 쓴 덕분에 출판사에서 보내온 것. 긴 분량은 아니지만 나름대로 부담을 안고 고민하면서 보낸 시간이 주마등처럼 스쳐지나간다. '강상중의 청춘적 독서'라고 제목을 붙인 해제를 여기에 옮겨놓는다. 

 

강상중 교수와의 첫 만남은 <오리엔탈리즘을 넘어서>(이산, 1997)를 통해서였다. 나는 강상중이란 이름보다는 ‘오리엔탈리즘’이란 주제에 이끌려 책을 집어 들었다. 속표지엔 날카롭고 이지적인 모습의 일러스트가 저자의 사진을 대신하고 있었는데, 간략한 저자 소개는 그를 ‘정치사상사를 전공한 재일동포 지식인’ 정도로 분류하게 했다. 나는 그가 도쿄대학 교수이면서 일본 이름이 아니라 ‘강상중’이란 한국 이름을 쓰고 있다는 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고, ‘재일동포’라는 정체성에도 관심을 갖지 않았다. 저자의 개인사보다는 ‘근대문화 비판’에 더 관심이 있었고, 베버와 푸코, 그리고 사이드에 대한 생각이 궁금했을 뿐이다. 

돌이켜보면, 나의 무관심은 ‘적극적인’ 무관심이었다. 한국어판 서문에서 저자가 이렇게 써놓은 것을 애써 간과한 것이기 때문이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2세인 나는 학생 때부터 언제나 한 가지 질문을 줄곧 던져 오지 않았던가 싶다. 그것은, 왜 내 나라는 식민지로 전락하여 근대화의 낙오자로서 엄청난 희생을 강요받게 되었던 것일까 하는 물음이다.”  

나는 그의 물음을 나의 물음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그냥 눈으로만 읽었을 것이다. 사실 저자와 같은 세대라 할지라도 이러한 물음을 던지는 한국인은 많지 않을 것이다. ‘식민지 근대화’가 여전히 학술적 논쟁의 대상이 되곤 하지만, 젊은 세대에게 그것은 정서적인 한(恨)으로까지 경험되지는 않는다. 역사적 경험이자 공동체의 아픈 기억이긴 하지만 현실에서의 자기 체험은 아니기 때문이다. 단적으로 말해서, 나는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세대에 무관심했다.   

생각이 조금 달라진 건 <고민하는 힘>(사계절, 2009)을 읽으면서다. 그사이에 강상중과 같은 세대의 ‘재일 조선인’ 서경식 교수의 책들을 즐겨 읽은 것도 재일 지식인들의 개인사에 관심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다. 문체로만 분류하자면 유려한 에세이들을 통해서 소개된 서경식이 ‘소프트’했고, 오리엔탈리즘을 비롯하여 내셔널리즘과 세계화 등 주로 ‘이즘’과 ‘이슈’에 관한 책들이 소개된 강상중은 ‘하드’했다. <고민하는 힘>은 그런 강상중에 대한 인상을 바꾸어놓았다. 그건 ‘소프트한’ 강상중이었기 때문이다. 그가 텔레비전 토론 프로그램에 자주 등장하는 대중적 지식인이면서 “일본 사회에 대한 비판적 발언 때문에 강연회를 할 때마다 극우파의 공격에 대비해 배에 신문지를 넣고 다니는 것으로 유명하다”는 사실도 알게 됐다.  

내친 김에 나는 그의 자서전 <재일 강상중>(삶과꿈, 2004)까지 찾아서 읽었다. 일본 와세다 대학에 재학 중이던 1972년 처음 한국을 방문하고 일본 이름 ‘나가노 데쓰오’ 대신에 ‘강상중’이란 본명을 쓰게 된 사연과 독일 유학시절에 대한 회고 등이 흥미로웠다. “일본에서 태어나고 자란 재일 한국인 2세인 나는 학생 때부터 언제나 한 가지 질문을 줄곧 던져 오지 않았던가 싶다.”고 한 그의 말을 다시 읽을 수밖에 없었다.    

당연한 말이지만, 재일 2세로서 강상중은 한국인으로 태어난 자란 우리와는 다른 처지에 놓여 있었다. 그에게 피식민 지배의 굴욕적인 역사는 현실에서 그가 겪는 직접적인 모욕과 소외의 원인이자 원흉이었고, 따라서 그러한 역사를 낳은 ‘근대화’의 문제를 깊이 탐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그는 근대화 이론의 태두라 할 사회학자 막스 베버에 대한 연구로 나아간다. 그 방향성을 규정한 것이 ‘개인’ 강상중이 아니라 ‘재일’ 강상중이라는 점에서 그의 학문적 선택은 동시에 ‘자유로운 선택’이자 ‘필연적인 선택’이기도 했다.  

되짚어보면, 강상중에게서 실존적 물음과 학문적 과제는 서로 분리되지 않았다. 그는 자신에게 가장 절실한 실존적 물음에 학문의 보편적 언어를 통해서 기술하고 해명하며 답하고자 했다. 나로선 뒤늦게 깨닫게 된 것이지만, 말하자면 그런 것이 강상중의 학문하는 태도라고 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나는 그런 태도가 강상중에게서 배울 만한 부분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의 삶과 학문을 일치시키려는 태도 말이다. 이제 우리 앞에 놓인 <청춘을 읽는다>를 읽으면서도 나는 그의 그러한 태도를 다시금 읽는다.   

청춘을 읽는다? 나쓰메 소세키의 <산시로>에서 출발하여 막스 베버의 <프로테스탄티즘의 윤리와 자본주의 정신>에 이르는 여정이기도 한 이 책을 손에 들면서 독자들이 제일 처음 던질 법한 질문이다. 한국어본의 부제가 된 책의 원제도 ‘강상중의 청춘독서노트’이다. 하지만 이미 <고민하는 힘>을 읽어본 독자라면 ‘청춘은 아름다운가?’란 장을 자연스레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사실 일본에서도 거의 같은 시기에 발표된 <청춘을 읽는다>와 <고민하는 힘>과 서로 짝이 될 만하다. <고민하는 힘>이 ‘고민의 바다’에서 헤엄치는 이들을 자극하고 격려하는 ‘멘토’로서의 강상중과 만나게 해준다면, <청춘을 읽는다>는 독서노트의 형식을 빌려서 강상중의 성장사와 함께 시대에 대한 성찰을 보여준다. 그렇다, 이것은 독서록이면서 자서전이고 동시에 한 시대에 대한 증언이다. 그것을 뭉뚱그려서 강상중은 ‘청춘’이라고 말한다. 대단한 청춘 아닌가! 

강상중은 나이와 무관하다는 의미에서 ‘청춘’을 ‘젊음’과는 구별되는 의미로 사용한다. 그가 말하는 청춘은 미숙하고 서툴더라도 진지하게 무언가를 찾아서 계속 방황하는 마음이다. 그러니 청춘은 단순히 ‘피부’와 ‘근육’의 문제로 따질 것이 아니다. 강상중이 청춘론이 문제삼는 것은 고민의 함량이고 방황의 진정성이다. ‘고민하는 힘’을 잃지 않을 때 우리는 여전히 청춘이다. 반대로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공부해서 일류 기업에 얼른 취직하는 것을 인생의 목표로 친다면, 비록 나이는 청춘이더라도 청춘이 버거운, 이름만 청춘인 경우가 된다.   

<고민하는 힘>에 따르면, “타인과 깊지 않고 무난한 관계를 맺고, 가능한 위험을 피하려고 하며, 세상에서 일어나는 일에 별로 휘말리지 않으면서 모든 일에 구애되지 않으려고 행동하는”, 한마디로 ‘요령이 뛰어난’ 젊음은 젊음이긴 하되 청춘은 아니다. 기껏해야 탈색된 청춘이다. 이런 생각에서 강상중은 심지어 ‘청춘적으로 원숙함’이란 표현까지 쓴다. 나이를 먹더라도 청춘의 문제의식과 태도를 그대로 유지하고 보존하는 원숙함이다. 그리고 그것과 반대되는 것을 강상중은 ‘표층적으로 원숙함’이라고 부른다. 고민 없이 나이만 먹은 경우다. <청춘을 읽는다>는 ‘청춘적 원숙’에 이르기 위한 길잡이이자 ‘청춘적 독서’의 모범적인 사례담이다.   

 

사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시절까지, 곧 ‘청춘기’에 저자가 읽은 다섯 권의 책을 소개하고 또 추천하고 있기도 하므로 ‘청춘’이란 말은 일차적으로 그 시기를 가리킨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청춘’의 의미가 종결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 청춘을 되새기며 이야기하는 현재의 시간 또한 ‘청춘’이기 때문이다. 그는 한걸음 더 나아가 현재라는 시간이 그의 청춘 시대와 무척 닮았다고도 느낀다. 그런 의미에서, 책을 마무리하며 그가 “나는 지금 제2의 청춘을 살아가고 있는 듯한 느낌이 든다”고 고백한 것도 일방적인 생각이나 믿음만은 아닐 것이다.  

그렇게 반복되는 시간이면서 우리가 되사는 시간으로서의 청춘은 언제 시작되는가? 열일곱이다. 열입곱은 구마모토의 현립 고등학교에 다니던 강상중이 야구선수의 꿈을 접게 된 나이이면서 ‘은둔형 외톨이’ 시절을 보내며 보들레르의 <악의 꽃>을 접한 나이이다. 일본의 고등학교 국어 교과서에도 실려 있다는 강상중의 글 「어른으로 향하는 외나무다리, 움츠리지 말고 건너가보자」가 가리키는 나이도 열일곱이다.  

그가 열일곱에 맞닥뜨린 아쿠다가와 류노스케의 경구는 지금의 우리에게도 인상적인데, 이 걸출한 일본 작가는 이렇게 말했다. “인생은 한 갑 성냥을 닮았다. 소중하게 다루는 건 어리석다.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강상중은 이 경구가 마치 ‘하늘의 계시’와도 같은 선물이었다고 회고한다.   

아쿠다가와의 경구는 인생의 모순, 인생을 고민하는 청춘의 모순을 집약해주고 있다. ‘인생을 너무 소중히 다루는 것은 어리석다’, 그러니 ‘인생을 소중히 다루지 말라’는 명제와 ‘인생은 소중하게 다루지 않으면 위험하다’, 곧 ‘인생을 소중히 다루라’는 명제는 서로 모순된다. 하지만 이 모순을 두 다리로 삼아서 우리는 깊은 계곡에 가로놓인 외나무다리를 건너갈 수 있다. 중요한 것은 어느 한 가지 태도에만 의지해서는 안 된다는 점이다. 인생이 너무 소중하다면, 우리는 그 위태로운 다리를 감히 건너갈 생각도 하지 못할 것이다. 반대로 인생을 함부로 다룬다면, 우리는 신중하지 못하게 다리를 건너다 추락하고 말 것이다. 짐작컨대, 이것이 열입곱 살 강상중의 깨달음이지 않았을까.  

흥미로운 건 이 깨달음이 이후에 그의 정치적 입장과 활동에도 그대로 적용되는 듯싶다는 것이다. 그것은 한마디로 자신을 ‘전위’가 아닌 ‘후위’에 위치시키는 입장이다. 후위라는 것은 물론 ‘재일’, 곧 ‘자아니치’로서의 정체성과도 관련되는 것이지만, 동시에 “현실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라”와 “자신을 너무 앞세우지 말라”는 상충적인 요구 사이에서 균형을 잡은 결과이기도 할 것이다. 이러한 입장은 강상중 자신의 표현을 빌면, 현상과 거리를 유지하면서 어떠한 ‘주의’나 ‘도그마’에도 붙들리지 않는 ‘리버럴’의 입장이기도 하다. 그러한 입장을 강상중은 이렇게 요약해놓고 있다. 

“언제나 나는 나 자신을 후위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불현듯 정신을 차리고 보면 내 앞에 아무도 없고 어느새 내가 전위가 된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나는 언제까지나 후위라고 생각하거니와 후위라는 사실을 영광으로 여긴다. 그럼에도 내가 마치 전위인 것처럼 보이는 것은, 그만큼 일본이라는 사회가 변해버렸기 때문일 것이다.”

바로 그런 의미에서, 강상중은 하나의 척도가 될 수도 있겠다. ‘후위’에 놓인 그의 입장이 전위로 보이는 만큼 한국사회도 일본의 변화를 따라잡은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기에. 그러한 변화 속에서 ‘척도’의 역할을 할 수 있다면, 그것은 강상중 자신이 변화하지 않았다는 증거가 되지 않을까. 따라서 ‘청춘의 독서’라고 하지만 이 책은 그에게 ‘일생의 독서’를 기록한 책이기도 하다. 사실 그럴 만하지 않은가. 그의 일생을 결정한 책들과의 만남이었으니까.  

강상중의 <청춘을 읽는다>를 통해서 우리는 “나는 야구도 못해. 친구도 없어. 사람들은 왜 이렇게 정신없이 일하고 있는 걸까?”라고 묻던 ‘시골뜨기’이자 <산시로>의 주인공과 마찬가지로 ‘길 잃은 양’이었던 한 재일 대학생이 어떻게 성장해가는가, 격동의 한 시대를 살아가면서 자신이 던진 물음에 대한 해답을 어떻게 찾아나가는가를 엿볼 수 있다.  

그 자세한 내막은 독자가 읽어나갈 몫으로 남겨놓는 것이 나의 소임인 듯싶지만, 한 가지 감상만은 덧붙이고 싶다. 그가 맺음말에서 이 책이 “청춘 독서노트인 동시에 또 하나의 도쿄, 또 하나의 일본을 모색하는 출발점이기도 하다”라고 적을 때, 우리 또한 자연스레 “또 하나의 서울, 또 하나의 한국”을 모색하는 우리의 ‘청춘 독서노트’를 떠올리게 되리라는 것. 그럴 때만 우리는 아직 청춘이리라.  

09. 10. 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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