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번역 이야기다. 프랑스의 저명한 정신분석비평가 중 한 사람인 장 벨멩-노엘 교수는 국내 대학에서 초빙교수를 지낸 바 있어서 한국과는 인연이 없지 않다(나도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한국문학의 번역에도 관여한 줄은 이번에 알았다. 그가 지난주 방한하여 이 번역문제를 주제로 한 강연을 가졌다고 한다. 요점은 "해외에 한국문학을 소개할 때 너무 한국적인 것을 소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귀담아 들어볼 만하기에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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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일보(08. 10. 23) "한국문학 해외에 소개할 때, 한국적인 것에 집착 말아야"

"소주와 김치도 즐겨먹고 사물놀이도 신명난다. 그러나 여행가라면 모를까, 문학비평가의 입장에서 그런 민속적인 것들은 흥밋거리가 될 수 없다."

연세대 국문학BK21사업단 초청으로 지난주 방한해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에서 한국문학을 주제로 한 강연회를 연 장 벨맹-노엘(77) 파리 8대학 명예교수는 "해외에 한국문학을 소개할 때 너무 한국적인 것을 소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2000년 이후 벨맹-노엘 교수가 불문학자 최애영(47)씨와 함께 프랑스어로 번역한 한국 작가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런 발언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이인성의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낯선 시간 속으로>와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등이 그가 번역한 작품이다.

인간의 무의식, 욕망 등을 소재로 한 실험성이 강한 작품들로, 국내에서도 일반독자보다는 훈련된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작품들이다. "프랑스인이건 한국인이건 심층부의 무의식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는 벨맹-노엘 교수는 특히 "이인성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대해 총체적 탐험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작가"라고 평가했다. 김영하 역시 그가 눈여겨 보는 작가 중 한 명. 여성의 성(性) 문제를 천착한 단편 '피뢰침' '도마뱀' 등을 번역했는데 "구성이 섬세하고 작품이 열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평했다.

그렇다면 식민지 경험, 압축적 근대화, 냉전적 대결구조 등 한국의 독특한 현실 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호소력이 없을까? 그는 "분단과 통일이라는 상황은 독일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고, 길지는 않았지만 프랑스도 나치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의 정치ㆍ사회적 맥락은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며 "전쟁을 다루더라도 소재적 측면이 아니라 양질의 문학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문학의 특징을 '격렬함'으로 요약했다. 유교적 전통을 깨야 한다는 격렬함, 샤머니즘을 극복하자는 에너지를 극단으로 밀고 간다는 격렬함은 사무라이로 상징되는 일본문화의 격렬함과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가능성에 대해서 그는 "중국의 한자문화권 체제에서 벗어난 지 1세기 정도밖에 안되는 등 아직 한국문학은 굉장히 젊고 어려 좀더 무르익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글쓰기의 혁신성을 추구하는 몇몇 작가들은 주목된다"고 말했다.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파리 8대학 교수를 역임한 그는 국내에도 번역된 <정신분석학과 문학> <문학텍스트의 정신분석>등의 비평서를 냈다. 2000년 이후 한국문학을 번역하면서 2003년에는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초빙교수로 1년간 한국에 체류하며 강의하기도 했다.(이왕구기자)

08. 10. 22.

P.S. 이인성의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문학과지성사, 1996)은 나도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벨맹-노엘 교수가 선호하는 "인간의 무의식, 욕망 등을 소재로 한 실험성이 강한 작품들로, 국내에서도 일반독자보다는 훈련된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작품들"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대략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훈련된 독자들'을 위한 책이 앞으로도 계속 출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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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이에자이트 2008-10-23 17: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국적인 것을 한국에만 있는 것으로 해석하면 음...뭐가 있을까요...어느 스페인 작가에 대해서 "지나치게 스페인적인 것을 내세우지 않아서 전세계에 독자가 있다"는 내용을 본 적이 있는데 우리나라에 적용해도 될 주문이죠.

로쟈 2008-10-23 20:45   좋아요 0 | URL
식민지, 전쟁, 분단 등의 경험이 한국만의 특수성은 될 수 없다는 지적은 유효해 보입니다. 그러니까 소재로 승부해서는 안되고, 문제는 질(혹은 보편적 호소력)이라는 얘기죠...

노이에자이트 2008-10-25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스페인 내전이나 그리스 내전을 소재로 한 소설을 읽으면 거의 우리나라 소설과 비슷해요.우리나라 사람들이 이 세상 모든 고생은 혼자 하는 것처럼 엄살을 피우기는 하죠.

로쟈 2008-10-25 21:29   좋아요 0 | URL
그게 주관적 특수성일 텐데, 그걸 보편적 차원으로 끌어올리는 것이 작가의 몫이죠. 말보다 어려운...
 

내달 예술의전당에서 안톤 체호프의 <갈매기>가 개관20주년 기념 공연의 하나로 무대에 오른다. 자주 공연되는 작품이긴 하나 이번 공연이 주목되는 것은 러시아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 때문이다. 얼핏 생소한 이름이지만 지난 2003년 그가 연출한 <보이체크>를 본 관객이라면 '아, 그 사람!'이라고 기대를 가질 법하다. 러시아 최고의 연극상인 황금마스크상 연출가상 수상자이니 허명은 아니다. 곧 거장급 연출가로 성장하지 않을까 싶다. 아무튼 내달의 가장 기대되는 공연이다. 관련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한겨레의 관련기사는 http://www.hani.co.kr/arti/culture/music/317233.html 참조).

매일경제(08. 10. 20)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 연출가 유리 부투소프

"옷을 다 벗어보세요."

안톤 체호프의 연극 `갈매기` 연출을 맡은 러시아 대가인 유리 부투소프(43)의 갑작스러운 주문에 배우 김태우 씨(트레플레프 역할)는 적잖이 당황했다. 어머니의 애인에게 사랑하는 여자를 뺏기고 작가의 꿈마저 좌절된 트레플레프가 자살을 결심하는 순간 무대에서 옷을 갈아입으라는 지시였다. 얼굴 표정만으로 심리 상태의 변화를 보여주는 데 한계가 있기 때문에 과장되고 극단적인 설정을 도입하려는 의도다. 물론 대본에는 없는 장면이다.



이렇듯 부투소프의 연극은 연습 과정에서 끊임없이 진화하고 변하는 `생명체` 같다. 배우의 모습과 움직임, 무대 세트를 보면서 떠오르는 영감에 따라 대사와 장면을 바꾼다. 어떤 작품이 생산되는지는 오직 공연날에만 확인할 수 있다. 11월 7~23일 예술의전당 공연을 앞둔 그는 "국가와 민족에 따라 사람이 다르듯 배우에 따라 연극도 달라진다"며 "순간순간 나의 느낌을 무대에 올린다는 생각으로 연출한다"고 말했다.

원작의 향기를 살리기 싫어하는 `나쁜 연출가`인 그의 무대는 삐딱하고 파격적이다. 112년 전 작품을 올리면서 의상과 무대 세트, 언어를 현대적으로 바꿔버렸다. 보통 `갈매기` 무대 세트는 호수와 정원이 등장하지만 그는 7m 높이의 계단 두 개와 거대한 창문으로 꿈을 이루고 싶은 인물들의 욕망을 상징적으로 표현했다. 원작에서 검은 옷만 입는 마샤 역할의 내면 속에 들끓는 감정을 포착해 하얀 원피스와 노란 구두, 빨간 모자, 분홍색 선글라스를 착용하도록 했다.

도대체 부투소프는 `갈매기`가 어떤 작품이라고 생각하기에 이러한 과감한 변형을 시도하는 것일까. 그는 "죽음과 어머니에 대한 이야기다. 최근 나의 가장 큰 관심사이기도 하다"며 "연극을 보면 알 것"이라고 불친절한 답변을 내놓았다. 이에 메드베젠코 역할을 맡은 김경익 씨가 부연설명을 했다. 어머니는 탄생을 의미하며 죽음과 더불어 인간이 피할 수 없는 숙명이라는 것.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태어나고 죽게 되는 부조리한 삶이 복잡하게 얽혀 사는 세상을 체호프 특유의 언어로 들려준 작품이 바로 `갈매기`다.



체호프의 작품 세계와 연결 지점을 찾는 데 애를 먹었다는 부투소프는 "체호프는 첫 번째 부조리극 작가이자 의사의 눈으로 세상을 본 냉혹한 작가"며 "체호프보다 더 어려운 작가를 만나는 것도 어려우며 그가 말하는 우리 인생에 대한 진실은 불편하고 단순명료하다"고 설명했다. 그는 2003년 예술의전당에서 밀도 높고 강렬한 연극 `보이체크`를 선보인 후 서울에서 두 번째 작품을 올리게 됐다. 한국 배우들과의 작업에 대해 "느낌과 예감이 좋은 배우들이다. 배우려는 학생의 태도가 있고 발전 가능성도 높다"고 평가했다.



부투소프는 러시아를 비롯한 유럽 전역에서 가장 바쁜 연출가. 군더더기 없이 한 가지 주제에 집중하는 연출 스타일로 연극의 고전인 `고도를 기다리며`를 새롭게 각색해 러시아 최고의 연극상인 `황금마스크상 최고 연출가상`을 수상했다. `황금 소피트상`과 `스타니 슬라브스키상` 등 권위 있는 상을 휩쓸며 관객을 사로잡는 그에게 자신의 연극 속 매력을 이야기해 달라고 하자 "그건 관객에게 물어봐야 할 질문"이라며 "나는 상을 달라고 한 적이 없다"고 대답했다.(전지현기자)

08. 10. 20.

P.S. 아래는 부투소프가 모스크바예술극장에서 올린 <햄릿>의 한 장면. 그의 독특한 연출 스타일과 '색깔'을 엿보게 한다. 렌소비에트극장에서 공연한 <보이체크>의 한 장면은 http://kr.youtube.com/watch?v=ZSv8orC-2QI 참조. 한국에서의 공연을 떠올리게 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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urblue 2008-10-21 16: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젤 앞자리로 예매했습니다. 이제 갈매기를 읽어야겠지요. 학교다닐 때 봤던가 안 봤던가 기억도 안 납니다. ^^;

로쟈 2008-10-21 20:48   좋아요 0 | URL
너무 앞은 불편하실 듯한데요...^^;

심술 2008-10-21 21: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부투소프 씨, 되게 고집스럽게 생겼네요.

로쟈 2008-10-21 23:20   좋아요 0 | URL
실력 있는 고집은 괜찮습니다.^^
 

러시아 인구가 줄어들고 있다는 기사가 눈에 띄기에 스크랩해놓는다. 근래에 읽은 관련기사들 가운데 가장 흥미롭다. 인구학이 얼마나 많은 걸 이해할 수 있게, 또 예측할 수 있게 해주는지 다시금 확인시켜주는 기사이기도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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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일보(08. 10. 18) [해외논단]줄어드는 인구… 러시아의 위기

서방이 러시아의 국력 부활과 영향력 행사에 큰 관심을 기울이고 있는 지금 서방이 직면한 중대한 여러 가지 도전과 더불어 러시아에 관해 중기 및 장기 전망을 해보는 것이 필요하다. 러시아가 석유 판매로 부를 축적한 것은 사실이며 블라디미르 푸틴이 권력 장악을 위한 새로운 방식을 개발한 매우 창의적이고 야심적이며 무자비한 지도자로 등장한 것도 사실이다. 그루지아 침공 작전으로 판단하건대 러시아 군부는 1990년대의 최저점에서 다시 올라오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인구학적으로 말할 때 러시아는 아직 결정적 약점을 지닌 거인이다. 러시아는 인구가 급격히 줄고 있어 2050년이면 9900만명이 될 것으로 인구학자들은 내다본다. 일부 전문가들은 7700만명까지 내려갈 가능성도 있는 것으로 예상한다. 선진국들 가운데서 인구가 가장 많이 증가하고 있는 미국은 그 무렵 4억 1900만명이 될 전망이다. 21세기의 형태를 결정하는 데 어느 나라가 더 큰 영향력을 발휘할 것인지는 불문가지다.

미국의 관점에서 이처럼 희망적인 사태 전망을 할 수 있는 까닭을 최근 발표된 연구 보고서가 밝히고 있다. 리처드 잭슨과 닐 하우는 국제전략연구소가 펴낸 공저 "대국들의 노화: 21세기 인구학과 지정학"에서 그 이유를 설명했다. 러시아의 인구 감소는 그동안 인구학자들의 연구대상이었으나 이런 종류의 예측이 정치 토론의 주제로 널리 부각된 것은 최근의 일이다.

1970년대와 1980년대의 신 맬더스파 학자들은 인간 자체가 문제라고 서방의 정치가들과 학자들을 설득했다. 그들은 인구 증가가 바람직하지 않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이처럼 파괴적인 사고방식은, 서구 특히 러시아의 인구가 앞으로 수십 년 동안 급격히 줄어들 가능성에 의해 뒤집히고 있다. 잭슨과 하우는 "광범한 전염병이 발생하지 않은 상황에서 진행 중인, 역사상 전례가 없는 인구의 급격한 감소를 극복하는 것이 러시아의 과제"라고 쓴다.

러시아는 현재 매년 대략 70만명꼴로 인구가 줄고 있다. 이런 인구 감소는 선진세계에서 가장 먼저 시작되었다. 출산율의 급격한 하락과 더불어 평균수명이 증가하여 노령인구가 늘어나는 서유럽과 달리 러시아는 평균수명과 출산율이 동반하락하고 있다. 출산율은 현재 대략 1.2% 내지 1.3%이며 러시아 남성의 평균수명은 1950년대 수준인 59세로 내려가고 있다. 이는 일본보다 20년 적고 방글라데시보다 3년 낮은 것이다. 그 원인은 간단하다. 즉 의료보장제도가 극도로 빈약하고 알코올 남용이 광범하기 때문이다.



석유 수입으로 축적된 부 덕분에 러시아가 당장은 강력해보일지 모르나 인적 자산이 급격히 잠식된 결과 경제성장의 부진은 물론 사회 및 가족의 유대마저 약화되고 있다. 푸틴은 인구 감소가 "오늘날 우리나라가 직면한 가장 심각한 문제"라고 말했다. 잭슨과 하우는, 러시아의 인구 감소가 오늘날 정치현안이 되고 있다고 지적한다. 러시아의 무슬림 인구가 슬라브 인구에 비해 불균형적으로 증가하여 인구구성에 변화가 일어날 것이다. 무슬림 인구는 2050년에 러시아의 최대 인구집단이 될 전망이다.

위협을 받는 인종집단은 비진보적인 각종 정치적 해결책을 선호할 가능성이 있다. 푸틴의 영구 독재권력 구축 시도가 그런 정책의 예다. 비 진보적 정책은, 국내 문제에 대한 관심을 돌리기 위해 외국을 공격하는 결과를 빚을 수 있다. 그루지아의 경우가 그런 사례가 될 수 있다.

러시아와 서유럽의 인구가 감소하는 가운데 미국은 견실한 출산율과 이민유입으로 인구가 적절하게 늘어나고 따라서 선진세계에서 영향력이 커질 전망이다. 미국이 1820년에 선진세계에서 차지한 인구비율은 6%였다. 지금은 34%이며 2050년에 43%가 될 전망이다. 미국의 인구와 영향력 증대 전망이 실현되느냐 여부는, 자유와 기회가 보장되고 시민 사회가 번영하는 미국 사회를 보호하고 보존하는 데 달려 있다.(헬리 데일 美 칼럼니스트)

정리=오성환 외신전문위원
Russian decline
Helle Dale

As the West looks with great concern at a resurgent Russia and seeks ways of coping with its power projection, it is worth looking at the medium- and long-term perspective as well as the immediate and definitely sizable challenges we are facing.

It is true Russia is indeed flush with oil wealth, and in Vladimir Putin it found an ambitious and ruthless leader who is highly creative in finding new ways to hold on to power. Russia's military seems to be on the way back from its nadir of the 1990s, judging by its performance in Georgia (though the sheer size of the Russian military vs. that of Georgia must be factored in).

Still, Russia is a giant on feet of clay, demographically speaking. Russia is a country in such steep decline that it is estimated by demographers to decline to 99 million by 2050. Some even predict the figure as low as 77 million. By then the United States, whose population growth continues unparalleled among developed nations, will have an estimated 419 million people. Which nation do you think will be more powerful in shaping the 21st century?

The reasons for this rather hopeful state of affairs - looked at from an American point of view, of course are explored in a new study, recently published by the Center for Strategic and International Studies and authored by Richard Jackson and Neil Howe, "The Graying of the Great Powers: Demography and Geopolitics in the 21st Century." Russia's demographic decline has been the subject of demographers like Nicholas Eberstadt at American Enterprise Institute for some time, but predictions of this kind have only far more recently been a subject more broadly of interest in the political debate. Neo-Malthuseans of the 1970s and 1980s used to persuade politicians and scholars in the West that human beings themselves were the problem. Adding more therefore was far from desirable.

But this deeply destructive trend in thinking has now been reversed as populations in the West, particularly Russia, are very likely to plummet irreversibly in the coming decades. "Russia must cope with a rate of population decline that has no historical precedent in the absence of pandemic," the authors write.

Russia is currently losing population at a spectacular rate of 700,000 people per year, which will amount to 31 percent between 2005 and 2050. It is a decline that has started earlier than elsewhere in the developed world. Unlike Western Europe, where you can truly talk about graying populations as life-expectancy has grown in tandem with collapsing birthrates, Russians are experiencing declining birthrates as well as falling life expectancy. Birth rates are now around 1.2 to 1.3, while life expectancy for Russian men is now back to what it used to be in the 1950s - 59 years of age, a full 20 years less than Japanese men and three years less than Bangladeshi men. The causes are not far to seek - a dismal health-care system and vast alcohol consumption.

Oil wealth might make Russia look strong today, but its human capital is being inexorably eroded with consequences for economic growth as well as social and family cohesion. Mr. Putin has called population decline "the most acute problem facing our country today." Attending population decline, write the authors of the study, are political trends that we already see playing themselves out. Ethnic composition will change, for instance, as Russia's Muslim population will grow proportionately to its Slav population. Muslims may be in the majority by 2050. Tendencies towards illiberal political solutions may well be the choice of the threatened ethnic group, as we are indeed seeing in Russia today with Mr. Putin's authoritarian grab for perpetual power. And it may lash out against other nations in a diversion from internal problems - just ask the Georgians.

Meanwhile, the rather distinct silver lining in all of this for the United States is that while Russia collapses and Western Europe declines, the United States will experience healthy population growth due to sound fertility rates and immigration - and with it growing international influence among developed nations. In 1820, the United States held 6 percent of the population of the developed world; today it is 34 percent, and in 2050 it will be 43 percent. "In tandem," write the authors, "the influence of the United States within the developed world will likely rise."

All of this, of course, depends on preserving and protecting an American society where freedom, prosperity, opportunity and civil society flourish. If other countries have forgotten this, let us not do the same.

sisable:상당한 nadir:최저점 feet of clay:결정적 약점 attend:주목하다 lash out:비난하다

08. 10. 19.

P.S. 기사의 필자는 미국의 인구 증가에 대해서 긍정적인 전망을 피력하고 있는데, 그런 전망에 모두가 동의하는 건 아니다. 문제는 인구가 아닌 인구 구성이기 때문이다. 히스패닉 인구가 곧 백인 인구를 추월할 것이라는 사실에서 미국의 정체성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고 있는 헌팅턴도 그런 경우이다. 그의 <우리는 누구인가?>도 참고해볼 만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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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술 2008-10-20 18: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궁금해서 찾아보니 러시아 2008년 현재 인구는 1억 4000만 쯤이더군요.

로쟈 2008-10-20 18:58   좋아요 0 | URL
생각보다 많지 않습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에서 해외학술동향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탈리아와 삶정치'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국내에 이미 소개된 아감벤과 네그리와는 다른 방향의 철학적 사유를 이끌고 있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철학이 소개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삶정치'라는 번역어에는 유보적이지만 'biopolitics'가 갖는 다양한 함축을 어떻게 옮길 수 있을지는 더 생각해봐야 할 듯싶다(국내에서는 '삶정치' 외에 '생명정치' '생체정치' 등의 역어들이 쓰이고 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에스포지토, 아감벤과 네그리를 넘어서

<호모 사케르>로 유명한 조르조 아감벤은 삶정치를 권력이 아무런 매개 없이 순수한 생물학적 삶과 대면하게 되는 정치라고 엄격하게 규정한 바 있다. 이와 달리 <제국>의 안토니오 네그리는 늘 넘쳐나기 때문에 결국 전복적일 수밖에 없는 삶의 힘과 삶정치를 적극적으로 동일시한다. 비록 이탈리아 밖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오스: 삶정치와 철학>(2004)이라는 저서를 통해 기존의 삶정치 관련 논쟁에 핵심적이고 도전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대학 정치철학 교수로 재직 중인 에스포지토는 삶정치라는 개념이 최근 학계 전반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여전히 적절하게 범주화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개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게(혹은 상반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가령 네그리가 ‘장밋빛’처럼 묘사하고 있는 삶정치는 아감벤이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삶정치와 극도로 대비된다.

면역화 패러다임으로 새롭게 본 삶정치
에스포지토는 이런 불일치를 설명하려면 미셸 푸코가 삶정치라는 개념을 처음 정식화했을 때부터 존재했던 개념상의 불확실성을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푸코는 근대주권과 동시대 삶정치의 관련성 같은 핵심 쟁점에 명확하게 답하지 않았다. 푸코가 말한 근대주권과 삶정치라는 두 체제는 오직 죽음을 배경으로 해서만 각각의 의미를 획득할 뿐이기 때문에 양자가 서로를 배제하는지 안 하는지의 여부가 불확실하다. 한편으로 푸코는 삶정치의 지평 내에서 억압적인 주권 패러다임이 회귀하는 것처럼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생명의 힘이 해방됨으로써 그 자체를 넘쳐흐르고 결국 그 자체에 맞서게 되면 주권적 질서가 궁극적으로 소멸된다”(에스포지토, “삶정치, 면역성, 공동체성”, <삶정치: 한 개념의 이야기와 현재성>, 2005, 159쪽)고 정반대의 가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이런 난점은 푸코가 삶정치를 분석하면서 드러낸 더 심각한 문제의 부산물일 뿐인데, 푸코는 정치와 삶의 연관성을 외재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한다. 비록 정치와 삶이 서로에게 갖는 함의를 적절히 주제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푸코의 작업에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궤도 내에서 근접해 있는 양극(삶과 정치) 자체의 윤곽이나 특성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삶정치, 면역성, 공동체성”, 160쪽)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의 독창성은 ‘면역화 패러다임’을 통해 이처럼 모호하게 정의된 정치와 삶의 유기적 연계성을 탐구한다는 데 있다. 그는 임신-출산의 생물학적 과정을 예로 들어 면역화 패러다임을 설명한다. 산모의 면역체계는 자기 몸속에 존재하는 태아의 상이한 면역체계에 내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태아를 유산의 위험에서 막아주기도 한다. 이 경우에 면역은 이질적인 것을 가로막는 방어벽이나 무기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질적인 것과 상호소통할 때 사용하는 ‘여과장치’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산모가 자신의 몸과 태아에게 실천하는 생명의 보호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순수한 긍정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산모의 면역은 신생아에게 삶을 선물(munus)의 ‘형태’로 증여하는 것이자 나(산모)와 타자(태아)의 ‘집단적 현존’임과 동시에 ‘사회적 흐름’인 공동체성을 가능케 해주는 원인이다.

이런 면역화 패러다임에 입각해 삶(비오스)와 정치(노모스)의 관계를 보면, “양자는 한쪽이 다른 쪽의 세력권에 종속되는 외재적 형태로 덧붙여지거나 병치되기보다는 어떤 단일하고 확고한 전체의 두 가지 구성요소, 서로와의 관계맺음을 근거로 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는 두 가지 구성요소로 나타난다.” 요컨대 한 사회의 면역체계는 삶과 권력을 연결시켜주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삶이 지니고 있는 보존능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특정한 시기’에 삶과 정치라는 두 구성물이 조우해 생겨나는 결과물로 이해된 기존의 삶정치 개념에서 전제되는 것과는 달리, “삶은 결코 권력관계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와 동시에 권력 역시 결코 삶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가능성, 혹은 도구일 뿐이다”(<비오스: 삶정치와 철학>, 41~2쪽).

물론 에스포지토는 자가면역성 질병의 예처럼 면역화의 과잉이 삶을 괴멸시킬 위험도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국제정치는 ‘면역강박’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 그 전형인데, 면역강박이란 면역화가 한계를 넘어설 만큼 팽창된 탓에 그 자체가 삶을 위협하게 되는 상태이다. 이처럼 “삶에 ‘부과되는’ 정치”, 즉 삶을 자신에게서 분리된 종속적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면역화 패러다임의 근거 자체를 폐제하는 삶권력에 맞서서, 철학자들은 “삶에 ‘대한’ 정치” 혹은 “삶‘의’ 정치”, 즉 ‘긍정적 삶정치’를 정식화할 필요가 있다고 에스포지토는 주장한다.

긍정적 삶정치의 사유가 철학자들의 과제이다
또 한편으로 에스포지토는 출산이 ‘최악의 타나토폴리틱스’가 저지른 범죄를 정당화해주는 부정적인 삶정치의 범주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유전적 규약을 활용해 독일을 갱생시키려고 했던 나치의 출산장려운동이 30만 명을 강제로 불임시킨 법률의 공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는 (르완다 내전에서 인종적 강간으로 이어진 ‘강제적 출산’ 같은 최악의 경우에서조차) 출산은 결국 “삶의 힘이 여전히 죽음의 힘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가장 전형적이고 고지식하고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기독교계의 낙태반대 주장을 놀랍도록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그가 왜 나치즘을, 무엇보다도 출산을 두려워한 죽음의 정치로 간주하는지를 잘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생명의 선(先)억압”(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미리 억압하는 것)이 나치의 가장 견고한 면역장치가 됐던 이유는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출산 자체가 나치의 인종 개념이 전제하는 ‘기원’의 “원초적 이중성”을 폭로함으로써 특정한 정체성(순수한 아리아족)에 근거한 나치 정치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제3제국에 거주한 사람들의 정치적 역할을 결정했던 것은 출생이 아니라 출생의 가치를 미리 결정해놓은 정치적-인종적 도식에서 그들이 차지했던 위치였다.(로렌조 키에사 / 영국 켄트대학 유럽문화·언어학부 교수)

로렌조 키에사(Lorenzo Chiesa)는 유럽 현대철학 전문가로서 올해 영국 켄트대학에서 개최된 국제심포지엄 ‘오늘날의 이탈리아 사상: 삶정치, 니힐리즘, 제국’을 기획·조직했다. 주요 저서로 <주체성과 타자성: 철학으로 읽는 라캉>(MIT Press, 2007) 등이 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이탈리아와 삶정치

현재 주요 삶정치 관련 논쟁의 진원지는 이탈리아이다. 이탈리아는 네그리, 아감벤, 에스포지토뿐만 아니라 지난 8년 동안에만 22권의 삶정치 연구서와 수백 편의 논문들을 선보였다. 이에 본지는 몇몇 주요 연구자들과의 서면인터뷰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삶정치 개념이 각광받고 있는 이유를 살펴봤다.

마이클 하트(듀크대학), 티모시 머피(오클라호마대학), 티모시 켐벨(코넬대학) 등은 1968년을 전후로 급격하게 변화를 거듭해온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이탈리아 사상가들은 프랑스 현대철학을 활용해 이 급변의 시기를 돌파할 수 있는 급진적 정치프로젝트를 고안하려 애써왔는데, 최근의 삶정치 연구는 이런 노력의 또 다른 변형이라는 것이다.

한편 아감벤과 에스포지토는 유럽(북반부)과 지중해(남반부)의 문화가 혼합된 이탈리아의 ‘특수성’을 그 원인으로 제시했다. 이 특수성은 토마소 캄파넬라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학자들이 역사(정치)와 자연(삶/생명), 즉 인간의 삶과 세계의 삶이 맺고 있는 관계를 해명하는 데 천착하도록 강제했는데, 자신들의 연구는 이런 전통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잇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급진적 사유는 독일의 철학, 영국의 경제학, 프랑스의 정치학을 원천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프랑스의 철학, 미국의 경제학, 이탈리아의 정치학이 급진적 사유의 젖줄이 되고 있다. 이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이재원 편집위원)

08.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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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8-10-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를 읽고 다음날 그의 책 두 권을 대강 훑어 봤는데요,(communitas, immunitas) 그의 방법론이 아감벤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는 '이탈리와 효과'라고 명명해지는 게 어쩌면, 르네상스-스콜라적 방법론의 귀환인 건 아닐까 싶더군요. biopolitics이든 ausnahmezustand든 과잉기표를 정초시키고,그것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해 내려는 시도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한편으론 삶정치가 유럽에서 규범화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되는 것을 보고 놀랐는데, 그 차이를 푸코의 저작에 내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니 귀가 솔깃해지네요.

로쟈 2008-10-20 18:52   좋아요 0 | URL
저도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사를 읽으니 양면성이 있다는군요...

나디스 2008-10-19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의 두 강의로부터 연유하는 biopolitics(저는 생정치라는 역어를 선호하는데...)의 흐름이 다소 도덕적 색체가 가미된 이탈리아식 '삶정치'의 흐름으로 뻗어나가는 듯 합니다. 똑같이 푸코를 경유하면서도 '정치학'보다는 '정치철학'에 방점을 찍는 듯한 이러한 흐름과 영국의 'Economy and Society'지를 중심으로 정치학, 경찰학, 행정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식과의 차이가 흥미롭습니다(소위 '통치성 학파'라 불리기도 한다죠.) 권력의 테크놀로지적 측면을 중시하는 푸코의 문제의식이 후자와 더욱 가깝다는 점에서, 국내에선 주로 전자가 소개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구요. 한국의 지식인들이 행정학보다 정치철학을 선호하긴 하는 듯...ㅎㅎ

로쟈 2008-10-20 18:54   좋아요 0 | URL
'삶정치'는 어색한 조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애초에 '벌거벗은 생명'(생체)이 갖는 뉘앙스를 못 살려주는 듯해요...

chasm 2008-10-20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요즘 번역하는 책때문에 biopolitics의 번역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도 위에 얀웬리님처럼 "생(生)정치"라는 번역을 더 선호하는데(일본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번역어이기도 하죠), 한자 生이라는 개념에 삶과 생명이라는 두가지 의미가 모두 포괄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biopolitics를 "삶정치"라고 번역하는 것은 아무래도 베르그송 식의 생기론적 사유에 맞닿아 있는 자율주의 진영의 해석이 너무 강하게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니콜라스 로즈나 통치성 학파의 입장(이분들은 최근 유전공학의 문제를 푸코의 틀로 해석하려고 시도하고 있죠)에 좀 더 가까운 "생명정치"라는 번역어도 그닥 정확하지 않은 것은, 푸코가 자신의 강의에서, biopolitics의 일차적인 대상은 출생, 사망, 질병관리같은 생명현상이지만 그 궁극적 대상은 단순한 being을 넘어선 인간의 well-being(bien-etre)전반, 즉 세속적 구원의 문제를 포함한 삶 전체의 관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지요.

고대 그리스에 박학했던 푸코가 zoe와 bios의 구분을 몰랐었을리는 없고, 그렇다면 푸코가 biopolitics이란 개념으로 지적하려 했던 건, 이 두 개념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근대적 권력 형태, 즉 일차적으로 생명의 관리를 대상으로 하면서 폴리스적 삶의 영역까지 관리하는 두 영역의 연결 문턱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형태였을텐데, 기본적으로 이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한자권의 사유에서, 둘 모두를 적절히 포괄하는 번역어는 아쉽게나마 "생"정도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에 기반해 번역하는 책에서 biopolitics를 모두 생정치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블로그에 드나드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로쟈 2008-10-20 21:4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론 '생체정치'를 선호했는데, 중립적인 뉘앙스도 갖는다는 점에서 '생명정치'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아시다시피 <호모 사케르>의 역자가 '생명정치'라고 옮기죠). '생정치'도 '생철학'과 같은 조어론의 연장선상에서 고려할 수 있을 거 같고요. '삶정치'는 아무래도 어색합니다(조정환씨는 '삶문학'이란 표현도 쓰죠). 김지하식 어법의 '살림의 정치'라면 차라리 낫겠습니다('죽임의 정치'에 대응하는). 어차피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면...

나디스 2008-10-21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생정치'와 유사한 의미론적 좌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생명정치'에 한 표를 던집니다. 생정치보다 좀 더 쉽게 뜻이 와닿는다는 점에서도 장점이 있는 것 같네요. 다만 '생체정치'는 위엣분이 언급하신 것처럼 '신체(육체)'를 연상시킨다는 바로 그 이유로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푸코가 생명정치 또는 생명권력을 개념화하면서 개인의 신체에 대해 작동하는 근대의 규율권력('감시와 처벌'의 분석대상인...)과 살아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작동하는 통제권력을 구분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생정치의 대상은 생명 고유의 과정인 출생과 사망, 출산, 질병 등을 아우르는 전체로서의 집합, 즉 '인구'입니다. 인체에 대한 해부-정치학과 인구에 대한 생명-정치학의 두 계열이 있는 셈이죠. 따라서 푸코는 생정치의 권력행사 방식을 드러내는 주요한 담론으로 서구에서 18세기 후반에 발전한 인구통계학을 듭니다. 절대주의 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죽이거나 살리는('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면, 생명권력은 출생율을 높이고 사망율을 낮추며 질병을 예방하는 등 전체 살아있는 인구의 삶의 질과 상태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죠.('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물론 그 두 가지 권력행사 방식은 서로 중첩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성'의 경우 어린아이의 자위를 금지하는 규율권력과 출산율을 조절하는 통제권력이 교차하며 작동합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사람들을 살게 만드는 이 권력이 왜 현실적으로는 '생명'(개인의 신체와 인구를 모두 포함하여)을 죽이는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근대 '인종주의'의 발전을 얘기하는 것이구요...

로쟈 2008-10-21 08:48   좋아요 0 | URL
'생명'이 우리말에서는 전적으로 긍정적인 뉘앙스만을 갖기 때문에 푸코적인 의미의 'biopower'나 'biopolitics'는 '생체권력' '생체정치'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처음 소개될 때는 '생체통제권력'이라고도 했죠). 다만 네그리 등이 거기에 긍정적인 색깔을 입히고 있기 때문에 다르게 번역해줘야 하는데, 같은 단어를 다르게 옮기자니 혼동의 여지도 있고 해서 '생명권력' '생명정치'란 중립적인(?) 용어를 떠올리게 되는 거구요. '삶정치'는 좀 어색한 조어입니다(푸코에게는 잘 맞지 않는)...

lefebvre 2008-10-2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획한 기사에 관심들이 많으시군요. 즐겁습니다. ^^ 에스포지토 전에 푸코 관련 기사를 수록했는데, 그 보조기사에서 biopolitics를 어떻게 번역할까에 대해 몇 자 적은 게 있습니다. 제가 이번 기획기사에서 (네그리의 뉘앙스가 많이 나는) 삶정치라는 역어를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이유를 쓴 글입니다. 참고들 하시라고 덧붙여놉니다. "Biopolitics라는 개념은 그동안 국내에서 ‘생명정치’, ‘생체정치’, ‘삶정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왔다. 그리스어 비오스(bios)에서 파생된 ‘bio-’를 ‘생명’으로 옮겼을 때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 더 나아가 생태계까지 지칭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일례로 그리스에 위치한 환경보호단체 중 하나(Biopolitics International Organization)는 단체이름에 ‘Biopolitics’를 넣고 있다. 또한 ‘bio-’를 ‘생체’로 옮겼을 때에는 생물학이나 유전학과의 관련이 강조된다. 미국의 유명한 푸코 연구자이자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인류학과 교수인 폴 레비노우와 런던정경대학의 사회학과 교수 니콜라스 로즈가 이런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아감벤이 <호모사케르>에서 그리스어 비오스와 조에(zoe)를 구분한 뒤로는 ‘bio-’를 ‘생명’이나 ‘생체’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됐다. 아감벤에 따르면 조에는 모든 생명체들에 공통된 ‘단순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지칭하며, 비오스는 이런 저런 개체나 집단의 특유한 ‘삶의 형식이나 방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감벤은 바로 이 조에가 비오스와 구분되어 정치에서 ‘배제되는 방식으로 포함되는’ 상황을 문제삼는다. 이런 까닭에 ‘살아 있다’는 동사의 명사형인 ‘삶’을 ‘bio-’의 역어로 선택하는 게 현재로서는 더 포괄적인 듯이다."

lefebvre 2008-10-2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컨대 제 생각으로 중요한 것은 (1) 푸코가 원래 어떤 의미로 biopolitics를 썼느냐는 '이제' 부차적인 문제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biopolitics 논의는 푸코에게 많은 빚을 진 건 사실이지만, 더이상 푸코의 그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분기되어 가고 있거든요. 바로 이게 제 기획의 포인트이기도 했고요. 아마 '기원' 개념을 싫어하는 푸코도 살아 있었다면 이런 데에는 별 신경을 안 썼을 것 같네요 ^^ 그렇다면 제 생각에 남는 문제는 (2) "삶정치'라는 조어가 다양하게 분기되고 있는 biopolitics 논의 일체를 (느슨하게나마) 포괄할 수 있는 조어냐, 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에 대한 제 생각은 '고육지책'입니다. 뭐랄까, 현재로서는 '삶정치'보다 포괄적인 표현을 찾지 못했다고나 할까요? 아마 연구자분들의 토론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좀 걸리겠죠? 늘 그렇듯이......

로쟈 2008-10-21 23:00   좋아요 0 | URL
아감벤의 의미를 따르더라도 'bios'는 '삶'이라고 옮기기 어려운 게 아닐까요?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 그게 '삶'이니까요. 'bare life' 혹은 'mere life'를 뜻하는. '조에(생명)-삶(비오스)'이라는 구도는 그래서 저로선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때의 '비오스'는 그냥 '삶'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푸코의 개념으로 처음 접하다 보니, 아무래도 '굴러온 돌'이 낯섭니다....^^
 

주중에 한번 서점에 들렀을 때 좀 특이하다 싶었던 책은 로렌 포프의 <내 인생을 바꾸는 대학 - 작고 강한 미국대학 40>(한겨레출판, 2008)이다. 미국 대학 가이드북이 나온 거야 특이하지 않지만 책을 낸 곳이 한겨레출판인 것은 의외였다. 책은 자세히 훑어보지 않았고 주말 리뷰에서 내막을 읽을 수 있겠거니 했다. 그 '내막'을 알려주는 기사를 옮겨놓는다(대학교육의 목표에 대해서도 생각해보게 한다). 그러고 보니 우리도 수능이 얼마남지 않았고 진로와 대학 선택 문제로 고민하는 고3 가족들이 적지 않겠다. 우리에게도 좀더 많은 '작고 강한' 대학이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싶다...

한겨레(08. 10. 18) 미국 지식인들은 어떤 대학에 자녀를 맡길까

‘이 책을 기어코 번역하고, 또 서평까지 써서 한국에 알려야 하는가.’ <내 인생을 바꾸는 대학>이 번역된 뒤 리뷰를 쓰기 위해 그것을 손에 쥐었을 때 맨 먼저 스친 생각이다. 이 책이 전하는 소중한 교육현장들이 한국의 흉물스런 입시교육과 명문대 진학 욕구 때문에 훼손될 수 있다는 우려 때문이었다.

초등학교 때부터 토플과 에스에이티(SAT·미국 대학수학능력시험) 준비를 시키며 미국의 아이비리그 대학 등 이른바 명문대 입학전형도 맞춤형으로 돌파해 내는 한국의 학원들과 극성 학부모들에게 이 책이 소개하는 학교들은 좋은 먹잇감이 될 수 있다. 그래서 이 학교들이 정말 원하는, 또 이런 학교들을 정말로 필요로 하는 학생들이 누려야 할 기회를 빼앗는 결과를 낳을 수도 있지 않을까. <뉴욕 타임스> 교육담당 에디터를 지낸 로렌 포프가 쓴 이 책은 충실하고 인간적인 대학교육을 원하는 미국 사회의 학부모와 지식인들에게는 가장 유명한 대학입학 가이드이다.

이 책이 전하는 미국의 ‘작고 강한’ 40개의 대학 상당수는 명문 대학원 진학, 인명사전 <마퀴스 후즈 후 인 더 월드>에 이름이 오른 사회저명인사 배출, 교수 등의 학자 배출 등에서 아이비리그 대학을 능가한다. 동문 4명 중 1명이 박사이고 과학자 배출이 미국 전체 대학 중 1위인 리드대학(오리건주 포틀랜드), 졸업생의 70%가 명문대 대학원에 진학하는 말보로대학(버몬트주 말보로), 99%가 넘는 취업률의 가우처대학(메릴랜드주 타우슨), 최고경영자 배출에서 미국 전체 대학 중 4% 안에 드는 앨러게니대학(펜실베이니아주 미드빌), 여성지도자 배출 1위에다 과학자·학자 배출이 미국 대학 중 전체 10위권인 아그네스스콧대학(조지아주 디케이터) 등이 대표적이다.

학제 운영이 독특하고 다양해, 학생 스스로 전공을 설계해야 하는 대학이 있는가 하면 4년 동안 모든 학생이 똑같은 필수과목만 수강하는 대학도 있다. 대부분 대학은 해외 학기와 인턴십을 과감하게 운영하고 있다. 100권의 고전을 읽고 토론하는 것으로 4년 과정을 마치는 세인트존스대학(메릴랜드주 아나폴리스, 뉴멕시코주 산타페), 학년·학과·학점이 없고 각자 맞춤형 전공을 설계하는 햄프셔대학(매사추세츠주 애머스트), 교수-학생 공동 연구 기회를 미국에서 가장 많이 제공하는 호프대학(미시건주 홀랜드), 인턴십과 해외 수업에 3학기를 할애하는 칼라마주대학(미시건주 칼라마주) 등을 꼽을 수 있다. 지은이는 이 책에 소개된 세인트존스, 리드, 뉴, 말보로 네 곳을 미국에서 가장 지성적인 대학으로 꼽고 있다.

이 책에 소개된 모든 학교는 캠퍼스 구성원들이 가족처럼 친밀하게 지내고, 소수민족과 외국 학생을 포함해 출신 배경이 다양한 학생들을 보듬어 안는 공동체다. 무엇보다 자신의 연구가 아니라 학생을 가르치고 돌보는 일에 전념하는 교수의 역할이 강조된다. 이 책이 전달하고자 하는 이 대학들의 핵심가치이다. “이곳에서 가르침은 사랑의 행위다. 교수들은 학생들의 멘토이고, 하이킹 동료이자 스포츠 동아리의 팀원이며, 저녁 식사의 동반자이고 친구다. 배움은 경쟁이 아닌 협력의 작업이다. 전체가 부분의 합보다 더 커지도록 만드는 강력한 시너지 공간이다.”

그럼, 입시교육에 포로가 된 한국 학부모들과 학생들이 가장 관심을 갖는 사항을 말해보자. “그 학교 들어가기 힘들어? 입시성적이 얼마나 돼야 해?” 이 학교들은 아이비리그 등 명문대 입학에 필요한 그런 높은 시험점수를 꼭 요구하지 않는다. 공부하고자 하는 의지만 있다면 중위권의 에스에이티 점수로도 입학할 수 있다. “다양성의 혼합은 반드시 필요하다. A학점 학생들이 있어야 하는 것은 맞지만, B학점 C학점 학생들이 모여 있을 때 보다 생산적인 토론이 이뤄진다.”

이 책은 단순한 대학입학 가이드가 아니다. 점수와 간판에 찌든 한국의 교육을 반성케 하는 생생한 현장사례를 담고 있다. 학부모와 학생들에게 입시교육에서 좌절한 것이 결코 인생에서 좌절하는 것이 아님을 말해준다. 이 책이 한국에 소개된 이유이다. 1996년 이 책의 초판이 출간된 직후에는 비영리기관 `내 인생을 바꾸는 대학’(www.ctcl.org)을 설립했다. 아흔여덟 살의 지은이는 최근까지도 ‘경쟁이 아니라 협력을 통해 학생을 보듬어 능력을 키우는’ 교육철학을 전파하다가 지난달 노환으로 별세했다.(정의길 기자)

08. 10. 19.

P.S. 봄에 나온 책 존 터먼의 <미국이 세계를 망친 100가지 방법>(재인, 2008)에는 100가지 리스트 외에 '미국이 그나마 제대로 하는 일 10가지(Ten Things America Does Right)'가 더 붙어 있다. 아니 붙어 있어야 했다. 원서에는 있지만 국역본에는 빠졌는데, 좀 유감스럽다(전체 목차는 http://www.johntirman.com/The%20List.html 참조). 그 '제대로 하는 일' 리스트의 첫번째가 '세계 최고 수준의 대학'이었다. 미국에 대한 냉정하면서도 신랄한 비판자인 저자가 그래도 미국인으로서 자긍심을 갖고 내세운 항목이어서 인상적이었다. 물론 등록금은 독일이나 프랑스 대학과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비싼 게 흠이겠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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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두부 2008-10-20 10:52   좋아요 0 | URL
음..요즘 그런 생각이 들어요...우리사회에 대안초등, 중고등과정은 있는데 왜 대안 대학은 없을까? 정말 필요할꺼 같은데..특히 인문사회과학 분야는....쩝

로쟈 2008-10-20 18:51   좋아요 0 | URL
경제난 덕분에 혹 생길 수도 있겠죠. 어차피 먹고 살기 힘들다면 대안적인 공부라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싶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