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앙대 대학원신문에서 해외학술동향에 관한 기사를 옮겨놓는다. '이탈리아와 삶정치'를 주제로 다루고 있는데, 국내에 이미 소개된 아감벤과 네그리와는 다른 방향의 철학적 사유를 이끌고 있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의 철학이 소개되고 있다. 개인적으로 '삶정치'라는 번역어에는 유보적이지만 'biopolitics'가 갖는 다양한 함축을 어떻게 옮길 수 있을지는 더 생각해봐야 할 듯싶다(국내에서는 '삶정치' 외에 '생명정치' '생체정치' 등의 역어들이 쓰이고 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에스포지토, 아감벤과 네그리를 넘어서

<호모 사케르>로 유명한 조르조 아감벤은 삶정치를 권력이 아무런 매개 없이 순수한 생물학적 삶과 대면하게 되는 정치라고 엄격하게 규정한 바 있다. 이와 달리 <제국>의 안토니오 네그리는 늘 넘쳐나기 때문에 결국 전복적일 수밖에 없는 삶의 힘과 삶정치를 적극적으로 동일시한다. 비록 이탈리아 밖까지는 아직 알려지지 않았지만, <비오스: 삶정치와 철학>(2004)이라는 저서를 통해 기존의 삶정치 관련 논쟁에 핵심적이고 도전적인 문제를 제기하고 있는 로베르토 에스포지토는 또 다른 길을 제시하고 있다.

이탈리아 나폴리대학 정치철학 교수로 재직 중인 에스포지토는 삶정치라는 개념이 최근 학계 전반에서 큰 인기를 끌고 있지만 여전히 적절하게 범주화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 개념 자체가 근본적으로 다르게(혹은 상반되게) 해석될 수 있다는 점이 이 사실을 잘 보여준다. 가령 네그리가 ‘장밋빛’처럼 묘사하고 있는 삶정치는 아감벤이 ‘부정적’으로 비판하고 있는 삶정치와 극도로 대비된다.

면역화 패러다임으로 새롭게 본 삶정치
에스포지토는 이런 불일치를 설명하려면 미셸 푸코가 삶정치라는 개념을 처음 정식화했을 때부터 존재했던 개념상의 불확실성을 살펴봐야 한다고 주장한다. 실제로 푸코는 근대주권과 동시대 삶정치의 관련성 같은 핵심 쟁점에 명확하게 답하지 않았다. 푸코가 말한 근대주권과 삶정치라는 두 체제는 오직 죽음을 배경으로 해서만 각각의 의미를 획득할 뿐이기 때문에 양자가 서로를 배제하는지 안 하는지의 여부가 불확실하다. 한편으로 푸코는 삶정치의 지평 내에서 억압적인 주권 패러다임이 회귀하는 것처럼 말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강렬한 생명의 힘이 해방됨으로써 그 자체를 넘쳐흐르고 결국 그 자체에 맞서게 되면 주권적 질서가 궁극적으로 소멸된다”(에스포지토, “삶정치, 면역성, 공동체성”, <삶정치: 한 개념의 이야기와 현재성>, 2005, 159쪽)고 정반대의 가설을 제시한다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에 따르면 이런 난점은 푸코가 삶정치를 분석하면서 드러낸 더 심각한 문제의 부산물일 뿐인데, 푸코는 정치와 삶의 연관성을 외재적인 방식으로만 생각한다. 비록 정치와 삶이 서로에게 갖는 함의를 적절히 주제화하긴 했지만, 여전히 푸코의 작업에서는 “서로 분리되어 있는 궤도 내에서 근접해 있는 양극(삶과 정치) 자체의 윤곽이나 특성이 규정되어 있지 않다”(“삶정치, 면역성, 공동체성”, 160쪽)는 것이다.

에스포지토의 독창성은 ‘면역화 패러다임’을 통해 이처럼 모호하게 정의된 정치와 삶의 유기적 연계성을 탐구한다는 데 있다. 그는 임신-출산의 생물학적 과정을 예로 들어 면역화 패러다임을 설명한다. 산모의 면역체계는 자기 몸속에 존재하는 태아의 상이한 면역체계에 내성을 갖추고 있을 뿐만 아니라 태아를 유산의 위험에서 막아주기도 한다. 이 경우에 면역은 이질적인 것을 가로막는 방어벽이나 무기 같은 것이 아니라 우리가 이질적인 것과 상호소통할 때 사용하는 ‘여과장치’ 같은 것이다. 이렇게 보면 산모가 자신의 몸과 태아에게 실천하는 생명의 보호는 태아의 생명에 대한 순수한 긍정과 완벽히 일치하는 것으로서, 산모의 면역은 신생아에게 삶을 선물(munus)의 ‘형태’로 증여하는 것이자 나(산모)와 타자(태아)의 ‘집단적 현존’임과 동시에 ‘사회적 흐름’인 공동체성을 가능케 해주는 원인이다.

이런 면역화 패러다임에 입각해 삶(비오스)와 정치(노모스)의 관계를 보면, “양자는 한쪽이 다른 쪽의 세력권에 종속되는 외재적 형태로 덧붙여지거나 병치되기보다는 어떤 단일하고 확고한 전체의 두 가지 구성요소, 서로와의 관계맺음을 근거로 해서만 의미를 갖게 되는 두 가지 구성요소로 나타난다.” 요컨대 한 사회의 면역체계는 삶과 권력을 연결시켜주는 관계일 뿐만 아니라 삶이 지니고 있는 보존능력이기도 하다. 그렇다면 ‘특정한 시기’에 삶과 정치라는 두 구성물이 조우해 생겨나는 결과물로 이해된 기존의 삶정치 개념에서 전제되는 것과는 달리, “삶은 결코 권력관계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으며 이와 동시에 권력 역시 결코 삶의 외부에 존재하지 않는다. 정치는 삶을 살아가게 만드는 가능성, 혹은 도구일 뿐이다”(<비오스: 삶정치와 철학>, 41~2쪽).

물론 에스포지토는 자가면역성 질병의 예처럼 면역화의 과잉이 삶을 괴멸시킬 위험도 경고한다.  그가 보기에 오늘날의 국제정치는 ‘면역강박’에 의해 지배되고 있다. ‘테러와의 전쟁’이 그 전형인데, 면역강박이란 면역화가 한계를 넘어설 만큼 팽창된 탓에 그 자체가 삶을 위협하게 되는 상태이다. 이처럼 “삶에 ‘부과되는’ 정치”, 즉 삶을 자신에게서 분리된 종속적 대상으로 간주함으로써 역설적으로 면역화 패러다임의 근거 자체를 폐제하는 삶권력에 맞서서, 철학자들은 “삶에 ‘대한’ 정치” 혹은 “삶‘의’ 정치”, 즉 ‘긍정적 삶정치’를 정식화할 필요가 있다고 에스포지토는 주장한다.

긍정적 삶정치의 사유가 철학자들의 과제이다
또 한편으로 에스포지토는 출산이 ‘최악의 타나토폴리틱스’가 저지른 범죄를 정당화해주는 부정적인 삶정치의 범주로 악용될 수도 있다는 사실을 부인하지 않는다. 공식적인 유전적 규약을 활용해 독일을 갱생시키려고 했던 나치의 출산장려운동이 30만 명을 강제로 불임시킨 법률의 공표로 이어질 수밖에 없었던 것이 좋은 예이다. 그러나 그는 (르완다 내전에서 인종적 강간으로 이어진 ‘강제적 출산’ 같은 최악의 경우에서조차) 출산은 결국 “삶의 힘이 여전히 죽음의 힘보다 우세하다”는 사실을 보여준다고 주장한다. 이런 주장은 가장 전형적이고 고지식하고 심지어 반동적이기까지 한 기독교계의 낙태반대 주장을 놀랍도록 되풀이하는 것처럼 보인다. 그렇지만 이는 그가 왜 나치즘을, 무엇보다도 출산을 두려워한 죽음의 정치로 간주하는지를 잘 보여주기도 한다.

그의 주장에 따르면, “생명의 선(先)억압”(태어나지도 않은 생명을 미리 억압하는 것)이 나치의 가장 견고한 면역장치가 됐던 이유는 통제되지 않은 상태에서의 출산 자체가 나치의 인종 개념이 전제하는 ‘기원’의 “원초적 이중성”을 폭로함으로써 특정한 정체성(순수한 아리아족)에 근거한 나치 정치를 위험에 빠뜨리기 때문이다. 그가 보기에 제3제국에 거주한 사람들의 정치적 역할을 결정했던 것은 출생이 아니라 출생의 가치를 미리 결정해놓은 정치적-인종적 도식에서 그들이 차지했던 위치였다.(로렌조 키에사 / 영국 켄트대학 유럽문화·언어학부 교수)

로렌조 키에사(Lorenzo Chiesa)는 유럽 현대철학 전문가로서 올해 영국 켄트대학에서 개최된 국제심포지엄 ‘오늘날의 이탈리아 사상: 삶정치, 니힐리즘, 제국’을 기획·조직했다. 주요 저서로 <주체성과 타자성: 철학으로 읽는 라캉>(MIT Press, 2007) 등이 있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8. 10. 03) 이탈리아와 삶정치

현재 주요 삶정치 관련 논쟁의 진원지는 이탈리아이다. 이탈리아는 네그리, 아감벤, 에스포지토뿐만 아니라 지난 8년 동안에만 22권의 삶정치 연구서와 수백 편의 논문들을 선보였다. 이에 본지는 몇몇 주요 연구자들과의 서면인터뷰를 통해 이탈리아에서 삶정치 개념이 각광받고 있는 이유를 살펴봤다.

마이클 하트(듀크대학), 티모시 머피(오클라호마대학), 티모시 켐벨(코넬대학) 등은 1968년을 전후로 급격하게 변화를 거듭해온 이탈리아의 정치상황을 가장 큰 원인으로 꼽았다. 이탈리아 사상가들은 프랑스 현대철학을 활용해 이 급변의 시기를 돌파할 수 있는 급진적 정치프로젝트를 고안하려 애써왔는데, 최근의 삶정치 연구는 이런 노력의 또 다른 변형이라는 것이다.

한편 아감벤과 에스포지토는 유럽(북반부)과 지중해(남반부)의 문화가 혼합된 이탈리아의 ‘특수성’을 그 원인으로 제시했다. 이 특수성은 토마소 캄파넬라에서 안토니오 그람시에 이르기까지 이탈리아 학자들이 역사(정치)와 자연(삶/생명), 즉 인간의 삶과 세계의 삶이 맺고 있는 관계를 해명하는 데 천착하도록 강제했는데, 자신들의 연구는 이런 전통을 저마다의 방식으로 잇고 있다는 것이다.

한때 급진적 사유는 독일의 철학, 영국의 경제학, 프랑스의 정치학을 원천으로 삼았다. 그러나 오늘날에는 프랑스의 철학, 미국의 경제학, 이탈리아의 정치학이 급진적 사유의 젖줄이 되고 있다. 이 자원을 어떻게 활용할지는 우리의 몫으로 남겨져 있다.(이재원 편집위원)

08. 10.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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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ommer 2008-10-19 22: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기사를 읽고 다음날 그의 책 두 권을 대강 훑어 봤는데요,(communitas, immunitas) 그의 방법론이 아감벤과 유사하다는 것을 알고는 '이탈리와 효과'라고 명명해지는 게 어쩌면, 르네상스-스콜라적 방법론의 귀환인 건 아닐까 싶더군요. biopolitics이든 ausnahmezustand든 과잉기표를 정초시키고,그것으로 모든 현상을 설명해 내려는 시도라는 측면에서 말이죠. 한편으론 삶정치가 유럽에서 규범화의 차원에서 긍정적으로 검토되는 것을 보고 놀랐는데, 그 차이를 푸코의 저작에 내재한 것으로 파악하고 있으니 귀가 솔깃해지네요.

로쟈 2008-10-20 18:52   좋아요 0 | URL
저도 부정적인 쪽으로 생각하고 있었는데, 기사를 읽으니 양면성이 있다는군요...

나디스 2008-10-19 23: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푸코의 두 강의로부터 연유하는 biopolitics(저는 생정치라는 역어를 선호하는데...)의 흐름이 다소 도덕적 색체가 가미된 이탈리아식 '삶정치'의 흐름으로 뻗어나가는 듯 합니다. 똑같이 푸코를 경유하면서도 '정치학'보다는 '정치철학'에 방점을 찍는 듯한 이러한 흐름과 영국의 'Economy and Society'지를 중심으로 정치학, 경찰학, 행정학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방식과의 차이가 흥미롭습니다(소위 '통치성 학파'라 불리기도 한다죠.) 권력의 테크놀로지적 측면을 중시하는 푸코의 문제의식이 후자와 더욱 가깝다는 점에서, 국내에선 주로 전자가 소개되고 있다는 점도 흥미로운 지점이구요. 한국의 지식인들이 행정학보다 정치철학을 선호하긴 하는 듯...ㅎㅎ

로쟈 2008-10-20 18:54   좋아요 0 | URL
'삶정치'는 어색한 조어라고 생각합니다. 그리고 애초에 '벌거벗은 생명'(생체)이 갖는 뉘앙스를 못 살려주는 듯해요...

chasm 2008-10-20 00: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그래도 요즘 번역하는 책때문에 biopolitics의 번역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저도 위에 얀웬리님처럼 "생(生)정치"라는 번역을 더 선호하는데(일본에서 사용되는 일반적인 번역어이기도 하죠), 한자 生이라는 개념에 삶과 생명이라는 두가지 의미가 모두 포괄될 수 있다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biopolitics를 "삶정치"라고 번역하는 것은 아무래도 베르그송 식의 생기론적 사유에 맞닿아 있는 자율주의 진영의 해석이 너무 강하게 묻어나는 것 같습니다. 그렇다고 니콜라스 로즈나 통치성 학파의 입장(이분들은 최근 유전공학의 문제를 푸코의 틀로 해석하려고 시도하고 있죠)에 좀 더 가까운 "생명정치"라는 번역어도 그닥 정확하지 않은 것은, 푸코가 자신의 강의에서, biopolitics의 일차적인 대상은 출생, 사망, 질병관리같은 생명현상이지만 그 궁극적 대상은 단순한 being을 넘어선 인간의 well-being(bien-etre)전반, 즉 세속적 구원의 문제를 포함한 삶 전체의 관리라고 분명히 밝히고 있기 때문이지요.

고대 그리스에 박학했던 푸코가 zoe와 bios의 구분을 몰랐었을리는 없고, 그렇다면 푸코가 biopolitics이란 개념으로 지적하려 했던 건, 이 두 개념의 구분을 무화시키는 근대적 권력 형태, 즉 일차적으로 생명의 관리를 대상으로 하면서 폴리스적 삶의 영역까지 관리하는 두 영역의 연결 문턱에서 작용하는 권력의 형태였을텐데, 기본적으로 이 구분이 명확하지 않은 한자권의 사유에서, 둘 모두를 적절히 포괄하는 번역어는 아쉽게나마 "생"정도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듭니다. 이런 생각에 기반해 번역하는 책에서 biopolitics를 모두 생정치로 번역하고 있는데, 이 블로그에 드나드시는 분들은 어떻게 생각하시는지 궁금하네요.

로쟈 2008-10-20 21:43   좋아요 0 | URL
개인적으론 '생체정치'를 선호했는데, 중립적인 뉘앙스도 갖는다는 점에서 '생명정치'도 가능하다고 생각했습니다(아시다시피 <호모 사케르>의 역자가 '생명정치'라고 옮기죠). '생정치'도 '생철학'과 같은 조어론의 연장선상에서 고려할 수 있을 거 같고요. '삶정치'는 아무래도 어색합니다(조정환씨는 '삶문학'이란 표현도 쓰죠). 김지하식 어법의 '살림의 정치'라면 차라리 낫겠습니다('죽임의 정치'에 대응하는). 어차피 긍정적인 의미를 부여하려고 한다면...

나디스 2008-10-21 01: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생정치'와 유사한 의미론적 좌표를 구성한다는 점에서 '생명정치'에 한 표를 던집니다. 생정치보다 좀 더 쉽게 뜻이 와닿는다는 점에서도 장점이 있는 것 같네요. 다만 '생체정치'는 위엣분이 언급하신 것처럼 '신체(육체)'를 연상시킨다는 바로 그 이유로 부적절하다고 봅니다. 푸코가 생명정치 또는 생명권력을 개념화하면서 개인의 신체에 대해 작동하는 근대의 규율권력('감시와 처벌'의 분석대상인...)과 살아있는 사람들, 다시 말해 종으로서의 인간에 대해 작동하는 통제권력을 구분하는 데에서부터 출발하기 때문입니다. 생정치의 대상은 생명 고유의 과정인 출생과 사망, 출산, 질병 등을 아우르는 전체로서의 집합, 즉 '인구'입니다. 인체에 대한 해부-정치학과 인구에 대한 생명-정치학의 두 계열이 있는 셈이죠. 따라서 푸코는 생정치의 권력행사 방식을 드러내는 주요한 담론으로 서구에서 18세기 후반에 발전한 인구통계학을 듭니다. 절대주의 권력이 개인의 신체를 죽이거나 살리는('죽게 만들고 살게 내버려두는') 방식으로 권력을 행사했다면, 생명권력은 출생율을 높이고 사망율을 낮추며 질병을 예방하는 등 전체 살아있는 인구의 삶의 질과 상태를 보호하고 유지하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것이죠.('살게 만들고 죽게 내버려두는') 물론 그 두 가지 권력행사 방식은 서로 중첩되는 것인데, 예를 들어 '성'의 경우 어린아이의 자위를 금지하는 규율권력과 출산율을 조절하는 통제권력이 교차하며 작동합니다. 그렇다면 살아있는 사람들을 살게 만드는 이 권력이 왜 현실적으로는 '생명'(개인의 신체와 인구를 모두 포함하여)을 죽이는가 라는 문제의식에서 근대 '인종주의'의 발전을 얘기하는 것이구요...

로쟈 2008-10-21 08:48   좋아요 0 | URL
'생명'이 우리말에서는 전적으로 긍정적인 뉘앙스만을 갖기 때문에 푸코적인 의미의 'biopower'나 'biopolitics'는 '생체권력' '생체정치'가 더 적합하다고 생각합니다(처음 소개될 때는 '생체통제권력'이라고도 했죠). 다만 네그리 등이 거기에 긍정적인 색깔을 입히고 있기 때문에 다르게 번역해줘야 하는데, 같은 단어를 다르게 옮기자니 혼동의 여지도 있고 해서 '생명권력' '생명정치'란 중립적인(?) 용어를 떠올리게 되는 거구요. '삶정치'는 좀 어색한 조어입니다(푸코에게는 잘 맞지 않는)...

lefebvre 2008-10-21 10: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기획한 기사에 관심들이 많으시군요. 즐겁습니다. ^^ 에스포지토 전에 푸코 관련 기사를 수록했는데, 그 보조기사에서 biopolitics를 어떻게 번역할까에 대해 몇 자 적은 게 있습니다. 제가 이번 기획기사에서 (네그리의 뉘앙스가 많이 나는) 삶정치라는 역어를 고육지책으로 선택한 이유를 쓴 글입니다. 참고들 하시라고 덧붙여놉니다. "Biopolitics라는 개념은 그동안 국내에서 ‘생명정치’, ‘생체정치’, ‘삶정치’ 등으로 다양하게 번역되어왔다. 그리스어 비오스(bios)에서 파생된 ‘bio-’를 ‘생명’으로 옮겼을 때에는 인간을 포함한 모든 생명체, 더 나아가 생태계까지 지칭하는 뉘앙스를 풍긴다. 일례로 그리스에 위치한 환경보호단체 중 하나(Biopolitics International Organization)는 단체이름에 ‘Biopolitics’를 넣고 있다. 또한 ‘bio-’를 ‘생체’로 옮겼을 때에는 생물학이나 유전학과의 관련이 강조된다. 미국의 유명한 푸코 연구자이자 캘리포니아대학(버클리) 인류학과 교수인 폴 레비노우와 런던정경대학의 사회학과 교수 니콜라스 로즈가 이런 관점에서 연구를 진행 중이다.
아감벤이 <호모사케르>에서 그리스어 비오스와 조에(zoe)를 구분한 뒤로는 ‘bio-’를 ‘생명’이나 ‘생체’로 이해하는 것이 더욱 어렵게 됐다. 아감벤에 따르면 조에는 모든 생명체들에 공통된 ‘단순히 살아 있다는 사실’을 지칭하며, 비오스는 이런 저런 개체나 집단의 특유한 ‘삶의 형식이나 방식’을 가리킨다. 그리고 아감벤은 바로 이 조에가 비오스와 구분되어 정치에서 ‘배제되는 방식으로 포함되는’ 상황을 문제삼는다. 이런 까닭에 ‘살아 있다’는 동사의 명사형인 ‘삶’을 ‘bio-’의 역어로 선택하는 게 현재로서는 더 포괄적인 듯이다."

lefebvre 2008-10-21 10: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컨대 제 생각으로 중요한 것은 (1) 푸코가 원래 어떤 의미로 biopolitics를 썼느냐는 '이제' 부차적인 문제라는 점입니다. 왜냐하면 오늘날의 biopolitics 논의는 푸코에게 많은 빚을 진 건 사실이지만, 더이상 푸코의 그것이라고 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하게 분기되어 가고 있거든요. 바로 이게 제 기획의 포인트이기도 했고요. 아마 '기원' 개념을 싫어하는 푸코도 살아 있었다면 이런 데에는 별 신경을 안 썼을 것 같네요 ^^ 그렇다면 제 생각에 남는 문제는 (2) "삶정치'라는 조어가 다양하게 분기되고 있는 biopolitics 논의 일체를 (느슨하게나마) 포괄할 수 있는 조어냐, 라는 문제가 남습니다. 앞서 말했듯이, 이에 대한 제 생각은 '고육지책'입니다. 뭐랄까, 현재로서는 '삶정치'보다 포괄적인 표현을 찾지 못했다고나 할까요? 아마 연구자분들의 토론으로 이 문제가 해결될지는 모르겠지만 시간이 좀 걸리겠죠? 늘 그렇듯이......

로쟈 2008-10-21 23:00   좋아요 0 | URL
아감벤의 의미를 따르더라도 'bios'는 '삶'이라고 옮기기 어려운 게 아닐까요? 단순히 살아있다는 사실, 그게 '삶'이니까요. 'bare life' 혹은 'mere life'를 뜻하는. '조에(생명)-삶(비오스)'이라는 구도는 그래서 저로선 동의하기 어렵습니다. 그때의 '비오스'는 그냥 '삶'이 아니라 '가치 있는 삶'을 가리키는 것이니까요. 그리고 저는 푸코의 개념으로 처음 접하다 보니, 아무래도 '굴러온 돌'이 낯섭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