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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 선언 - 레드스타킹부터 남성거세결사단까지, 드센 년들의 목소리
한우리 기획.번역 / 현실문화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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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는 사람은 다 알고, 모르는 사람은 전혀 모르는, 발레리 솔라나스(1936~1988)의 저 유명한/악명 높은 <SCUM 선언문>(SCUM Manifesto, 1967)이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이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선언>(현실문화, 2016)에 번역·수록되어 국내 독자들에게도 드디어(!) 선보이게 됐다. <페미니즘 선언>의 기획자이자 옮긴이가 SCUM을 “남성거세결사단”으로 옮긴 것은 흔히 SCUM이 “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약자로 통용되어왔기 때문이다(옮긴이도 해설에 이 점을 밝히고 있다). 그런데 최근의 연구는 이 점을 다시 한번 생각해보게 만든다.

 

솔라나스는 이른바 ‘페미니즘의 제2의 물결’에 속한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1960년 초~1980년 초에 활동한 속칭 ‘급진 페미니스트’인데(사실상 이들의 전성기는 1970년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내노라 하는 다른 급진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론/신념에 충실하게(여기서 ‘충실하다’라는 표현은 좀 더 따져봐야 할 문제인데, 일단 넘어간다) 한 ‘남자’를 손수 무력으로 응징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수퍼스타였던 앤디 워홀(1928~1987)이 그 대상으로서, 솔라나스는 워홀을 저격했다.

​​

당연하게도, 워홀 피격 직후에 사람들의 관심은 “왜 솔라나스가 워홀을 저격했느냐?”에 쏠렸다. 이때 솔라나스의 행위를 설명할/이해할 핵심 참조점으로 주목받은 것이 바로 솔라나스가 집필한 <SCUM 선언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솔라나스 본인이 체포 직후에 “<SCUM 선언문>이 나의 변론 전부가 될 것이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솔라나스를 도와주려던 사람들조차 이 문서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당시까지 이 문서는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SCUM 선언문>의 최초 판본은 솔라나스 본인이 자비로 출판한 판본(등사기로 만든 등사판)이었다. 그 자비 출판본에는 발행 날짜가 “1967년 5월 19일”로 적혀 있지만, 6월 14일 솔라나스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 책을] 거의 다 썼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걸로 봐서, 실제로는 7월 초중순경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총 2천 부를 찍었다고 하는데, 솔라나스의 변호인/옹호자들이 당시에 이 문서를 쉽게 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미뤄볼 때, 모두 배본된 것은 아니고 그 중 일부만이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서점들을 중심으로 배본된 듯하다(또 일부는 솔라나스 본인이 직접 가두 판매했다).


<SCUM 선언문>의 최초 ‘공식’ 판본은 올랭피아출판사에서 나온 1968년판이다(여기서 ‘공식’이라 함은 기존의 출판시스템을 통해서 간행됐다는 의미이다). 이 올랭피아 판본은 8월경, 그러니까 솔라나스가 워홀을 저격한 1968년 6월 3일로부터 약 두 달 뒤에 ‘신속하게’ 나온 것인데,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올랭피아출판사의 사장인 모리스 지로디아스(1919~1990)라는 인물 때문이다(더 정확하게는, 지로디아스를 향한 솔라나스의 증오 때문이다).


(<SCUM 선언문>을 자비 출판한 지 얼마 안 된) 1967년 8월 29일, 솔라나스는 지로디아스와 소설 집필 계약을 맺는다. 그런데 이 계약서의 조항 중에 “책 분량의 다음 두 작품에 대한 우선권”(first refusal rights on her next two book-length works)을 지로디아스에게 준다는 조항이 있었다. 솔라나스는 이 계약서에 서명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이 조항에서 말하는 ‘다음’(next)이 “(계약한) 소설 집필 다음(에 쓰게 되는 작품들)”이 아니라 “계약서 서명 다음(의 시점부터)”이라는 의미였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자신이 이 계약서에 서명함으로써 그 이전에 이미 완성했던 자신의 두 작품, 즉 <SCUM 선언문>과 (워홀의 도움을 받아 무대에 올리려고 한창 안간힘 쓰고 있던) 희곡 <엿 먹어라>(Up Your Ass, 1965)의 판권을 지로디아스에게 양도한 셈이 되어버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후대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다소 표현이 모호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솔라나스의 이런 생각은 편집증의 발로였다. 실제로, 워홀을 찾아간 솔라나스는 워홀의 변호사로부터 그 조항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해석까지 들었다고 한다(이건 워홀의 친구였던 폴 모리세의 증언이다. 물론 모리세가 거짓 증언했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오히려 ‘바로’ 이 때문에, 솔라나스는 워홀이 지로디아스와 작당해 자신의 작품들을 훔치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또 다른 편집증을 발전시키게 됐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정말 ‘미친년’의 ‘망상’일 뿐이었을까? 솔라나스가 편집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른 (내 생각에 중요하지만 간과되어온) 사실 중의 하나는 지로디아스의 평소 행실(!?)이 그런 편집증을 부추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스스로 ‘포르노 제작자/판매자’(pornographer)라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던 지로디아스는 당대 미국 사회에서 ‘외설물’이라 비난받았던 작품들(대표적으로 <롤리타>, <벌거벗은 점심>, <O의 이야기> 등)을 연속으로 출판해 ‘명성’을 떨쳤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지로디아스 덕분에 검열이 철폐됐다고 평가하기까지 한다. 문제는 지로디아스가 그런 저자들의 인세를 숱하게 떼먹었고, 판권 자체를 저자로부터 빼앗으려고도 했으며, 기타 계약서상 불공정 조항 등으로 인해 수차례 고소도 당하는 등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는 것이다(훌륭한 책을 낸다고 해서 그런 책을 내는 발행인의 인격까지 ‘꼭’ 훌륭한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인간해방/노동해방 혹은 사회의 진보/변혁를 주장하는 책들을 내면서 자사의 노조를 탄압하는 사장님들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

물론 지로디아스의 이런 평소 행실이 솔라나스에게까지 실행됐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그러니까  저 문제의 계약서 조항을 넣었을 때, 지로디아스가 솔라나스가 생각한 그런 의도로 집어넣었는지 아닌지는 현재로선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오늘날까지 확인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래 지로디아스는 <SCUM 선언문>을 출간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그런 지로디아스가 이 책의 출간을 서두른 것은 워홀 피격 사건 때문이다. 지로디아스 본인이 인터뷰에서 직접 이렇게 얘기했다. 솔라나스가 워홀을 쏘지 않았다면 <SCUM 선언문>를 내지 않았을 거라고(실제로 지로디아스는 워홀의 ‘불행’을 철저히 판촉의 일환으로 써먹었는데, 위의 뒤표지 문구를 참조하라).

둘째, 1977년 올랭피아출판사가 파산할 때까지(그러니까 약 10년간), 솔라나스가 <SCUM 선언문>의 인세 명목으로 지로디아스에게 받은 돈은 ‘5백 달러’가 전부이다.

셋째, 올랭피아출판사는 1968년 판본말고도 1971년 판본(개정판 혹은 2판?)을 추가로 발행했고, 그동안 <SCUM 선언문>은 스웨덴, 아일랜드, 덴마크, 그리스 등에서 번역·출간됐다. 지로디아스가 해외 판권료로 얼마를 받았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넷째, 두 판본을 출간할 때 지로디아스는 텍스트를 변경했다. 물론 솔라나스의 동의 없이.

대충 이런 사정으로 훗날 솔라나스는 올랭피아출판사에서 나온 두 ‘공식’ 판본을 모두 철저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 두 판본이 ‘공식’적이라는 건 (위에서도 썼듯이) 기존의 출판시스템을 통해서 간행됐다는 의미에서일 뿐이지(비유를 들자면 ISBN이 찍혀서 나왔다는 의미라고나 할까), 저자의 승인을 받은 ‘결정판’(definitive edition) 같은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때 솔라나스가 부정한 내용 중에 “SCUM은 ‘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약자가 아니다”(1977년 <빌리지 보이스>와의 인터뷰)라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솔라나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런 해석은 올랭피아출판사의 사장 지로디아스의 판촉 혹은 홍보 아이디어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실 솔라나스는 1977년 이전부터, 더 정확히 말하면 1971년 6월 30일 석방되자마자(솔라나스는 1969년 6월 9일 3년형을 선고받았다) 줄기차게 이런 주장을 해왔다. 대표적으로 1975년 말경 뉴욕의 거리에서 우연히 솔라나스를 만나게 된 제인 카푸티(카푸티 역시 급진 페미니스트였다)는 자신이 이끌던 독서모임에 솔라나스를 초대했다. 그 모임에서 솔라나스는 이미 똑같은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SCUM=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공식 아닌 공식이 유포된 것은 ‘불완전한 여성’인 어느 남자 사람의 만행이였던 걸까?  

문제는 여기서부터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솔라나스 본인이 1967년에 자비로 출판한 등사판 표지(아래 사진)에서 이미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솔라나스가 각종 신문에 게재한 광고 문안(아래의 아래 사진)에도 이 표현이 나온다. 요컨대 올랭피아출판사 판본이 출간되기 전부터 솔라나스가 이 표현을 쓴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1971년 이후의 솔라나스’가 ‘그 이전의 솔라나스’를 부정(즉, 자기부정)한 셈일까? 우리는 이 점을 어떻게 봐야 할까?

​가장 손쉬운 답변은, 그냥 솔라나스는 ‘미친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좌우간 편집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 아닌가? 그래서 심신불안정 판정으로 3년형밖에 안 받은 게 아닌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여자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이런 답변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다. 그렇지만 솔라나스가 1년 365일 편집증 증상을 보인 것은 아니며(그러니 정신이 멀쩡할 때 위의 발언을 한 것이라면 어쩌겠는가?), 솔라나스의 지인들 말을 들어봐도 솔라나스는 알려진 것보다 굉장히 똑똑했다.

그렇다면 일단 솔라나스의 말을 진실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 전제 아래에서 저 ‘모순’(실제 행위와 사후 진술 사이의 모순)처럼 보이는 발언을 이해해보도록 노력해보자. 이렇게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즉, 솔라나스가 “SCUM(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고 표현했다면, 올랭피아출판사 판본은 “S.C.U.M.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 표현했다는 점이다. “SCUM이냐 S.C.U.M.이냐?” 즉, 이 “네 개의 대문자 뒤에 마침표가 있느냐 없느냐?”가 차이라는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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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핏 사소해보이지만 이것은 큰 차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마침표의 유무는 ‘등식(=)’의 유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요즘은 편의상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데) 보통 대문자 뒤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그 대문자가 특정한 단어의 두문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가령 U.S.A.는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뜻한다. 여기서 마침표는 각각의 대문자(U, S, A)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U=United, S=States, A=America임을 고정해주는 일종의 ‘누빔점’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U.S.A.를 “United Special Amy”(통합특수군)라고 (우리 마음대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마침표가 찍혀 있는 한, 우리는 그 마침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물어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약자의 읽기/이해하기는 자의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S.C.U.M.”과 “Society for Cutting Up Men”을 병기한다면 이 양자는 등식으로 고정된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해서 이런 것이다. “자, 여기서 S는 Society를 뜻하고, C는 Cutting을 뜻하고…….”

그럼 마침표가 없다면? “SCUM”과 “Society for Cutting Up Men”을 병기한다면? 내 생각으로, 이럴 경우에는 양자 사이에 등식이 성립된다기보다는 후자가 전자의 ‘가능한 한 가지 해석’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자, 저는 SCUM을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고 풀어봤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풀어보시겠어요?” 혹은 “자, 네 개의 대문자 S, C, U, M으로 자신을, 자신의 생각을 한번 표현해보세요.” 자,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일종의 ‘아크로스틱’(acrostic/akrostikhís)[흔히들 하는 ‘삼행시 짓기’ 놀이를 떠올리면 된다]이다. 즉, 일종의 유희이자, 유희로의 초대이다.  

이것은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물론 그렇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해한다면 1977년 올랭피아출판사가 파산한 직후 본인이 (다시 한 번) 자비로 출판한 ‘교정판’(correct[ed] edition)에서도 솔라나스가 여전히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표현을 버리지 않은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다. 솔라나스는 여전히 자신이 펼쳐놓은 전복적 유희의 장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요컨대 “SCUM은 ‘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약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솔라나스의 강조점은 “[단지 그것만의] 약자가 아니다”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표현 자체(혹은 자신이 그런 표현을 썼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솔라나스는 <빌리지 보이스>와의 인터뷰에서 SCUM을 “일종의 문학적 고안물[장치]”(a literary device)이라고 말했다…….


​물론 나의 해석은 추측일 뿐이다. 혹은 적어도 솔라나스가 SCUM을 아크로스틱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리고 자기가 했던 발언의 의도를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설명한 적도 없다(그러니까 주장만 있을 뿐 설명은 없었던 셈이다). 그러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확인된 사실들만을 나열해보도록 하자.


첫째, 솔라나스는 평생, 일관되게 SCUM이라고만 썼다. S.C.U.M.이 아니라.


둘째, 표지를 제외하고 본문 어디에서도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표현은 안 나온다.


셋째, 본문에서 SCUM이 “Society for Cutting Up Men”을 뜻한다는 구절도 안 나온다.


넷째, 솔라나스는 올랭피아출판사의 두 판본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다섯째, 솔라나스는 “SCUM은 ‘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약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솔라나스가 올랭피아출판사의 판본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977년, 그러니까 교정판을 내기 전에 솔라나스는 뉴욕공립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자신의 책의 1971년판을 대출해 거기에 손수 ‘교정’(이라고 쓰고 ‘낙서’ 혹은 ‘욕 퍼붓기’라고 읽는다)을 봤다! 아무튼 이런 저간의 사정으로 인해 연구자들은 일견 모순적인 솔라나스의 주장을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솔라나스가 자기부정을 한 가장 큰 이유는, 각종 언론매체가 앤디 워홀 피격에만 관심을 둘 뿐 정작 <SCUM 선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서이다. 관심을 보인 이들도 그 내용을 오해 혹은 왜곡했다. 솔라나스는 “S.C.U.M.=Society for Cutting Up Men”으로 읽히는 지로디아스의 표기가 이에 한몫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표현은 사람들의 관심을 ‘거세’(=워홀 저격)라는 ‘선정적’ 사건에만 쏠리게 할 뿐 정작 그 행위의 논리적·철학적 기반인 <SCUM 선언문>에 대해서는 함구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하여, 나의 결론은 이렇다. 즉, (나 같이 과격한[?!] 해석이 아니라) 이런 통상적인 해석을 따를 경우에도, ‘SCUM’을 ‘S.C.U.M.’이라 표기하고 ‘Society for Cutting Up Men’과 등치시켜 ‘남성거세결사단’이라고 옮기는 것은 (어쩌면) 솔라나스 본인의 의도(의사)를 도외시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외국의 출판사들은 표지에서 가급적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표현을 쓰지도 않고, ‘S.C.U.M.’이라고 표기하지도 않는다. 더 간단히 말하면, 한국어판의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이라는 번역은 좀 생각해볼 만한 문제라는 것이다. 나라면 그냥 “SCUM 선언문”이라 옮기고, ‘S.C.U.M.,’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표기/구절과 관련된 갑론을박을 (해설에서든 각주에서든) 소개했을 것 같다. 무엇보다 이런 갑론을박에 대한 소개가 누락된 채(그러니까 구체적인 맥락이 거세된 채) 이 텍스트가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으로 소개될 경우, 독자들이 (당대 미국 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솔라나스의 텍스트에 대한 어떤 오해 혹은 편견, 혹은 왜곡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지 않을까 ‘조금’ 염려된다.

 

그러나 지금까지 길게 쓴 이 한 가지 아쉬움(?!)만을 제외한다면, <페미니즘 선언>은 굉장히 훌륭한 책이다. 기획력이 훌륭하고, 편집이 훌륭하다. 관심 있는 분들의 일독을 권하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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Valerie Solanas: The Defiant Life of the Woman Who Wrote Scum (and Shot Andy Warhol) (Paperback)
Breanne Fahs / Feminist Pr / 2014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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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레리 솔라나스(1936~1988)는 이른바 ‘페미니즘의 제2의 물결’에 속한다고 알려진 인물이다. 그러니까 미국에서 1960년 초~1980년 초에 활동한 속칭 ‘급진 페미니스트’인데(사실상 이들의 전성기는 1970년대라고 할 수 있다), 당시 내노라 하는 다른 급진 페미니스트들 사이에서도 격렬한 논쟁을 불러일으킨 인물이다. 왜냐하면 자신의 이론/신념에 충실하게(여기서 ‘충실하다’라는 표현은 좀 더 따져봐야 할 문제인데, 일단 넘어간다) 한 ‘남자’를 손수 무력으로 응징했기 때문이다. 당대의 수퍼스타였던 앤디 워홀(1928~1987)이 그 대상으로서, 솔라나스는 워홀을 저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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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연하게도, 워홀 피격 직후에 사람들의 관심은 “왜 솔라나스가 워홀을 저격했느냐?”에 쏠렸다. 이때 솔라나스의 행위를 설명할/이해할 핵심 참조점으로 주목받은 것이 바로 솔라나스가 집필한 <SCUM 선언문>이었다. 그도 그럴 것이, 솔라나스 본인이 체포 직후에 “<SCUM 선언문>이 나의 변론 전부가 될 것이다”라고 공공연하게 말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솔라나스를 도와주려던 사람들조차 이 문서를 쉽게 구할 수 없었다. 당시까지 이 문서는 ‘공식적’으로 출판되지 않았기 때문이다.


<SCUM 선언문>의 최초 판본은 솔라나스 본인이 자비로 출판한 판본(등사기로 만든 등사판)이었다. 그 자비 출판본에는 발행 날짜가 “1967년 5월 19일”로 적혀 있지만, 6월 14일 솔라나스가 자신의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에 “[이 책을] 거의 다 썼다”라는 표현이 나오는 걸로 봐서, 실제로는 7월 초중순경에 인쇄된 것으로 추정된다. 총 2천 부를 찍었다고 하는데, 솔라나스의 변호인/옹호자들이 당시에 이 문서를 쉽게 구할 수 없었던 것으로 미뤄볼 때, 모두 배본된 것은 아니고 그 중 일부만이 뉴욕의 언더그라운드 서점들을 중심으로 배본된 듯하다(또 일부는 솔라나스 본인이 직접 가두 판매했다).

 

<SCUM 선언문>의 최초 ‘공식’ 판본은 올랭피아출판사에서 나온 1968년판이다(여기서 ‘공식’이라 함은 기존의 출판시스템을 통해서 간행됐다는 의미이다). 이 올랭피아 판본은 8월경, 그러니까 솔라나스가 워홀을 저격한 1968년 6월 3일로부터 약 두 달 뒤에 ‘신속하게’ 나온 것인데, 여기서부터 이야기가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올랭피아출판사의 사장인 모리스 지로디아스(1919~1990)라는 인물 때문이다(더 정확하게는, 지로디아스를 향한 솔라나스의 증오 때문이다).


(<SCUM 선언문>을 자비 출판한 지 얼마 안 된) 1967년 8월 29일, 솔라나스는 지로디아스와 소설 집필 계약을 맺는다. 그런데 이 계약서의 조항 중에 “책 분량의 다음 두 작품에 대한 우선권”(first refusal rights on her next two book-length works)을 지로디아스에게 준다는 조항이 있었다. 솔라나스는 이 계약서에 서명한 지 얼마 안 되어서 이 조항에서 말하는 ‘다음’(next)이 “(계약한) 소설 집필 다음(에 쓰게 되는 작품들)”이 아니라 “계약서 서명 다음(의 시점부터)”이라는 의미였다고 생각하기 시작했다. 요컨대 자신이 이 계약서에 서명함으로써 그 이전에 이미 완성했던 자신의 두 작품, 즉 <SCUM 선언문>과 (워홀의 도움을 받아 무대에 올리려고 한창 안간힘 쓰고 있던) 희곡 <엿 먹어라>(Up Your Ass, 1965)의 판권을 지로디아스에게 양도한 셈이 되어버렸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던 것이다.

후대의 연구자들에 따르면, 다소 표현이 모호한 구석이 있긴 했지만, 솔라나스의 이런 생각은 편집증의 발로였다. 실제로, 워홀을 찾아간 솔라나스는 워홀의 변호사로부터 그 조항은 그런 뜻이 아니라는 해석까지 들었다고 한다(이건 워홀의 친구였던 폴 모리세의 증언이다. 물론 모리세가 거짓 증언했을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겠다). 그러나 오히려 ‘바로’ 이 때문에, 솔라나스는 워홀이 지로디아스와 작당해 자신의 작품들을 훔치려고 하는 게 아닌가 하는 또 다른 편집증을 발전시키게 됐다.

그런데 이 모든 것은 정말 ‘미친년’의 ‘망상’일 뿐이었을까? 솔라나스가 편집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또 다른 (내 생각에 중요하지만 간과되어온) 사실 중의 하나는 지로디아스의 평소 행실(!?)이 그런 편집증을 부추기기에 모자람이 없었다는 점이다.


스스로 ‘포르노 제작자/판매자’(pornographer)라고 자랑스럽게 떠들고 다녔던 지로디아스는 당대 미국 사회에서 ‘외설물’이라 비난받았던 작품들(대표적으로 <롤리타>, <벌거벗은 점심>, <O의 이야기> 등)을 연속으로 출판해 ‘명성’을 떨쳤다. 그래서 일각에서는 지로디아스 덕분에 검열이 철폐됐다고 평가하기까지 한다. 문제는 지로디아스가 그런 저자들의 인세를 숱하게 떼먹었고, 판권 자체를 저자로부터 빼앗으려고도 했으며, 기타 계약서상 불공정 조항 등으로 인해 수차례 고소도 당하는 등 ‘악명’을 떨치기도 했다는 것이다(훌륭한 책을 낸다고 해서 그런 책을 내는 발행인의 인격까지 ‘꼭’ 훌륭한 것은 아니다. 우리 주변에도 그런 경우를 종종 볼 수 있다. 가령 인간해방/노동해방 혹은 사회의 진보/변혁를 주장하는 책들을 내면서 자사의 노조를 탄압하는 사장님들을 우리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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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론 지로디아스의 이런 평소 행실이 솔라나스에게까지 실행됐는지는 밝혀진 바 없다. 그러니까  저 문제의 계약서 조항을 넣었을 때, 지로디아스가 솔라나스가 생각한 그런 의도로 집어넣었는지 아닌지는 현재로선 확인할 길이 없다. 다만 오늘날까지 확인된 사실은 다음과 같다.

첫째, 원래 지로디아스는 <SCUM 선언문>을 출간할 의향이 전혀 없었다. 그런 지로디아스가 이 책의 출간을 서두른 것은 워홀 피격 사건 때문이다. 지로디아스 본인이 인터뷰에서 직접 이렇게 얘기했다. 솔라나스가 워홀을 쏘지 않았다면 <SCUM 선언문>를 내지 않았을 거라고(실제로 지로디아스는 워홀의 ‘불행’을 철저히 판촉의 일환으로 써먹었는데, 위의 뒤표지 문구를 참조하라).

둘째, 1977년 올랭피아출판사가 파산할 때까지(그러니까 약 10년간), 솔라나스가 <SCUM 선언문>의 인세 명목으로 지로디아스에게 받은 돈은 ‘5백 달러’가 전부이다.

셋째, 올랭피아출판사는 1968년 판본말고도 1971년 판본(개정판 혹은 2판?)을 추가로 발행했고, 그동안 <SCUM 선언문>은 스웨덴, 아일랜드, 덴마크, 그리스 등에서 번역·출간됐다. 지로디아스가 해외 판권료로 얼마를 받았는지는 알려진 바 없다.

넷째, 두 판본을 출간할 때 지로디아스는 텍스트를 변경했다. 물론 솔라나스의 동의 없이.

대충 이런 사정으로 훗날 솔라나스는 올랭피아출판사에서 나온 두 ‘공식’ 판본을 모두 철저히 부정하기에 이른다. 이 두 판본이 ‘공식’적이라는 건 (위에서도 썼듯이) 기존의 출판시스템을 통해서 간행됐다는 의미에서일 뿐이지(비유를 들자면 ISBN이 찍혀서 나왔다는 의미라고나 할까), 저자의 승인을 받은 ‘결정판’(definitive edition) 같은 것이라는 의미에서는 아니라는 말이다. 특히 주목할 만한 것은, 이때 솔라나스가 부정한 내용 중에 “SCUM은 ‘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약자가 아니다”(1977년 <빌리지 보이스>와의 인터뷰)라는 내용까지 포함되어 있다는 것이다.

 

솔라나스의 주장에 따르면, 그런 해석은 올랭피아출판사의 사장 지로디아스의 판촉 혹은 홍보 아이디어에 불과했을 따름이다. 그러니까 자신의 의사와는 전혀 다르다는 것이었다. 사실 솔라나스는 1977년 이전부터, 더 정확히 말하면 1971년 6월 30일 석방되자마자(솔라나스는 1969년 6월 9일 3년형을 선고받았다) 줄기차게 이런 주장을 해왔다. 대표적으로 1975년 말경 뉴욕의 거리에서 우연히 솔라나스를 만나게 된 제인 카푸티(카푸티 역시 급진 페미니스트였다)는 자신이 이끌던 독서모임에 솔라나스를 초대했다. 그 모임에서 솔라나스는 이미 똑같은 주장을 펼쳤다고 한다. 그렇다면 정말 “SCUM=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공식 아닌 공식이 유포된 것은 ‘불완전한 여성’인 어느 남자 사람의 만행이였던 걸까?  

문제는 여기서부터 복잡해진다. 왜냐하면 솔라나스 본인이 1967년에 자비로 출판한 등사판 표지(아래 사진)에서 이미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표현을 사용한 바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솔라나스가 각종 신문에 게재한 광고 문안(아래의 아래 사진)에도 이 표현이 나온다. 요컨대 올랭피아출판사 판본이 출간되기 전부터 솔라나스가 이 표현을 쓴 것은 분명하다. 그렇다면 ‘1971년 이후의 솔라나스’가 ‘그 이전의 솔라나스’를 부정(즉, 자기부정)한 셈일까? 우리는 이 점을 어떻게 봐야 할까?

​가장 손쉬운 답변은, 그냥 솔라나스는 ‘미친년’이라고 말하는 것이다. 좌우간 편집증을 갖고 있었던 것은 사실 아닌가? 그래서 심신불안정 판정으로 3년형밖에 안 받은 게 아닌가? 정신이 오락가락하는 여자의 말을 경청할 필요가 있을까? 물론 이런 답변에도 일말의 진실은 있다. 그렇지만 솔라나스가 1년 365일 편집증 증상을 보인 것은 아니며(그러니 정신이 멀쩡할 때 위의 발언을 한 것이라면 어쩌겠는가?), 솔라나스의 지인들 말을 들어봐도 솔라나스는 알려진 것보다 굉장히 똑똑했다.

그렇다면 일단 솔라나스의 말을 진실이라고 가정해보자. 그런 전제 아래에서 저 ‘모순’(실제 행위와 사후 진술 사이의 모순)처럼 보이는 발언을 이해해보도록 노력해보자. 이렇게 볼 때 가장 먼저 눈에 띄는 점이 있다. 즉, 솔라나스가 “SCUM(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고 표현했다면, 올랭피아출판사 판본은 “S.C.U.M.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 표현했다는 점이다. “SCUM이냐 S.C.U.M.이냐?” 즉, 이 “네 개의 대문자 뒤에 마침표가 있느냐 없느냐?”가 차이라는 말이다.

​​

얼핏 사소해보이지만 이것은 큰 차이일 수도 있다. 왜냐하면 마침표의 유무는 ‘등식(=)’의 유무와 관련이 있기 때문이다. 무슨 말인가? (요즘은 편의상 꼭 그렇다고는 할 수 없는데) 보통 대문자 뒤에 마침표를 찍는 것은 그 대문자가 특정한 단어의 두문자라는 것을 암시한다. 가령 U.S.A.는 “United States of America”를 뜻한다. 여기서 마침표는 각각의 대문자(U, S, A)가 다른 무엇이 아니라 바로 U=United, S=States, A=America임을 고정해주는 일종의 ‘누빔점’ 역할을 해주는 것이다.

물론 우리는 U.S.A.를 “United Special Amy”(통합특수군)라고 (우리 마음대로) 읽을 수도 있다. 그러나 일단 마침표가 찍혀 있는 한, 우리는 그 마침표가 무엇을 의미하는지 먼저 물어봐야 한다. 그렇지 않다면 모든 약자의 읽기/이해하기는 자의적이 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따라서 “S.C.U.M.”과 “Society for Cutting Up Men”을 병기한다면 이 양자는 등식으로 고정된다는 것이다. 더 쉽게 말해서 이런 것이다. “자, 여기서 S는 Society를 뜻하고, C는 Cutting을 뜻하고…….”

그럼 마침표가 없다면? “SCUM”과 “Society for Cutting Up Men”을 병기한다면? 내 생각으로, 이럴 경우에는 양자 사이에 등식이 성립된다기보다는 후자가 전자의 ‘가능한 한 가지 해석’이 될 수 있을 뿐이다. 그러니까 이런 말이다. “자, 저는 SCUM을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고 풀어봤습니다. 여러분은 어떻게 풀어보시겠어요?” 혹은 “자, 네 개의 대문자 S, C, U, M으로 자신을, 자신의 생각을 한번 표현해보세요.” 자, 이렇게 본다면 이것은 일종의 ‘아크로스틱’(acrostic/akrostikhís)[흔히들 하는 ‘삼행시 짓기’ 놀이를 떠올리면 된다]이다. 즉, 일종의 유희이자, 유희로의 초대이다.  

이것은 너무 지나친 해석일까? 물론 그렇다. 그렇지만 이렇게 이해한다면 1977년 올랭피아출판사가 파산한 직후 본인이 (다시 한 번) 자비로 출판한 ‘교정판’(correct[ed] edition)에서도 솔라나스가 여전히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표현을 버리지 않은 이유를 가늠해볼 수 있다. 솔라나스는 여전히 자신이 펼쳐놓은 전복적 유희의 장에 사람들을 초대하고 싶었던 게 아닐까? 요컨대 “SCUM은 ‘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약자가 아니다”라고 말했을 때 솔라나스의 강조점은 “[단지 그것만의] 약자가 아니다”에 있었던 것은 아닐까?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표현 자체(혹은 자신이 그런 표현을 썼다는 사실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실제로 솔라나스는 <빌리지 보이스>와의 인터뷰에서 SCUM을 “일종의 문학적 고안물[장치]”(a literary device)이라고 말했다…….


​물론 나의 해석은 추측일 뿐이다. 혹은 적어도 솔라나스가 SCUM을 아크로스틱이라고 말한 적은 없다. 그리고 자기가 했던 발언의 의도를 다시 한 번 명확하게 설명한 적도 없다(그러니까 주장만 있을 뿐 설명은 없었던 셈이다). 그러니 다시 원점으로 돌아가 확인된 사실들만을 나열해보도록 하자.

 

첫째, 솔라나스는 평생, 일관되게 SCUM이라고만 썼다. S.C.U.M.이 아니라.

 

둘째, 표지를 제외하고 본문 어디에서도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표현은 안 나온다.

 

셋째, 본문에서 SCUM이 “Society for Cutting Up Men”을 뜻한다는 구절도 안 나온다.

 

넷째, 솔라나스는 올랭피아출판사의 두 판본을 모두 인정하지 않았다.

 

다섯째, 솔라나스는 “SCUM은 ‘Society for Cutting Up Men’의 약자가 아니다”라고 말했다.

 

​솔라나스가 올랭피아출판사의 판본을 얼마나 싫어했는지 잘 보여주는 에피소드가 하나 있다. 1977년, 그러니까 교정판을 내기 전에 솔라나스는 뉴욕공립도서관에 비치되어 있는 자신의 책의 1971년판을 대출해 거기에 손수 ‘교정’(이라고 쓰고 ‘낙서’ 혹은 ‘욕 퍼붓기’라고 읽는다)을 봤다! 아무튼 이런 저간의 사정으로 인해 연구자들은 일견 모순적인 솔라나스의 주장을 통상적으로 다음과 같이 해석한다.


솔라나스가 자기부정을 한 가장 큰 이유는, 각종 언론매체가 앤디 워홀 피격에만 관심을 둘 뿐 정작 <SCUM 선언문>의 내용에 대해서는 충분한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서이다. 관심을 보인 이들도 그 내용을 오해 혹은 왜곡했다. 솔라나스는 “S.C.U.M.=Society for Cutting Up Men”으로 읽히는 지로디아스의 표기가 이에 한몫을 했다고 생각했다. 그러니까 이 표현은 사람들의 관심을 ‘거세’(=워홀 저격)라는 ‘선정적’ 사건에만 쏠리게 할 뿐 정작 그 행위의 논리적·철학적 기반인 <SCUM 선언문>에 대해서는 함구하게 만들었다는 말이다.

 

얼마 전 바로 이처럼 복잡한 역사를 가진 <SCUM 선언문>이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이라는 제목으로 <페미니즘 선언>(현실문화, 2016)에 번역·수록되어 국내 독자들에게도 드디어(!) 선보이게 됐다. 그런데 앞서 살펴본 통상적인 해석을 따를 경우에도, ‘SCUM’을 ‘S.C.U.M.’이라 표기하고 ‘Society for Cutting Up Men’과 등치시켜 ‘남성거세결사단’이라고 옮기는 것은 (어쩌면) 솔라나스 본인의 의도(의사)를 도외시하는 처사가 될 수도 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는 외국의 출판사들은 표지에서 가급적 ‘Society for Cutting Up Men’이라는 표현을 쓰지도 않고, ‘S.C.U.M.’이라고 표기하지도 않는다. 이런 갑론을박에 대한 소개가 누락된 채(그러니까 구체적인 맥락이 거세된 채) 이 텍스트가 “남성거세결사단 선언문”으로 소개될 경우, 독자들이 (당대 미국 독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솔라나스의 텍스트에 대한 어떤 오해 혹은 편견, 혹은 왜곡의 함정에 빠질 위험이 있지 않을까 ‘조금’ 염려된다.

 

Breanne Fahs의 이 책은 바로 이런 문제적 텍스트 <SCUM 선언문>을 이해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준다. 그와 더불어 간결하고, 쉽고, 꼼꼼하게 씌여진 이 책은 솔라나스의 삶을 통해 당대 페미니즘 운동의 한 풍경을 조망할 수 있게 해주기까지 한다. 관심 있는 분들의 필독을 권한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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Does Writing Have a Future? (Paperback)
Vilem Flusser / Univ of Minnesota Pr / 2011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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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일이 있어서 빌렘 플루서의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엑스북스, 2015)를 읽다가 1장의 처음 두 문단부터 턱 막혔다.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어판 <Does Writing Have a Future?>(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1)를 펼쳐들었다. 노트를 끄적이다 보니 분량이 꽤 되어서 아깝기도 하고, 또 다른 분들의 의견도 구하고자 이렇게 올려본다.

 

영어판에 의거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플루서가 처음 두 문단을 통해서 하려는 말은 다음과 같다. 즉, 자신의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writing about writing)인데, 이런 작업은 “Nachdenken”(=thinking something over)이 아니라 “Uberschrift”(=superscript)라는 것이다.

 

왜 이 간단한 말이 이해가 안 갔을까? 다시 한국어판을 펼쳐보고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어판 옮긴이는 “Nachdenken”를 “메타적 사유”로, “Uberschrift”를 “메타문자”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되는 두 표현의 접두사 “Nach-”와 “Uber-”를 모두 “메타(적)”로 옮겨놔서(내가 알기로 이 두 독일어 접두사의 의미폭은 동일하지 않다. 아니 겹치는 부분도 없다......아닌가?), 내가 이해하기에 서로 대비되는 두 표현이 서로 비슷한 표현인 것처럼 읽혔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어판만 보면 “writing about writing”=“Nachdenken”=“Uberschrift”처럼 읽힌다.그런데 1장 곳곳에는 그렇게 볼 수 없게 만드는 구절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니 이상할 수밖에.

 

그러고 보니 한국어판과 영어판은 첫 번째 문단의 네 번째 문장을 서로 정반대로 옮겨놨다. 한국어판의 “그래서 이와 같은 모험은 사유들이 사유 자신을 향해 겨냥하고 있는 메타적 사유(Nachdenken)와 비교될 수 있다”에 해당하는 영어판 문장은 “Such an undertaking cannot be compared with thinking something over, in which ideas are directed against ideas”이다. 즉, 한국어판은 긍정문(“비교될 수 있다”)으로, 영어판은 부정문(cannot be compared)으로 옮긴 것이다. 어느 한쪽은 분명히 틀리게 옮긴 것이리라? 어느 쪽일까?

 

일단 계속 나아가보자. 앞서 플루서는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는 “Nachdenken”이 아니라 “Uberschrift”라고 했는데 그 차이가 무엇일까? 더 간단히, “Nachdenken”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영어판에 의거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플루서는 “Nach-”의 두 가지 의미를 언급하며 설명을 이어간다. 하나는 “뒤에”(after)라는 의미이며 또 하나는“향해서”(to[ward])의 의미이다. 즉, (해당 접두사의 첫 번째 의미에서)“Nachdenken”는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보충적인 생각들을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 뒤에 따라붙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해당 접두사의 두 번째 의미에서) “Nachdenken”는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어떤 (새로운/보충적인) 생각들을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Nachdenken”은, “Nachdenken”의 [두 가지] 전략은 “글쓰기[이 맥락에서는 글로 쓰여진 것 혹은 글 자체]에 관해 글을 쓸 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왜냐하면 일단 글로 쓰였다는 것은 그 글을 구성하는 문자기호들 사이에 질서가 잡혀 있다는 말이며(그러니 따로 질서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문자기호들은 그 자체로 이미 흔적들(typoi)이기 때문이다(그러니 따로 흔적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

 

간단히 말하면, “글쓰기”(=글[문자]로 쓰여진 것) 자체에서 “Nachdenken”의 두 가지 전략, 혹은 두 가지 기능은 이미 완료됐다. 그래서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 이미 완료된 “Nachdenken”의 전략 혹은 기능을 새삼스레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란 무엇인가? 플루서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란 그 자체로 이런 종류의 사유, 그러니까 글쓰기에 관해 이미 사유된 생각들을 질서 있게 정돈하려는 시도, 이미 사유된 그런 생각들의 흔적을 더듬어 다시 쓰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Writing about writing is itself to be seen as thinking of a sort, that is, as an attempt to arrange those ideas that have already been thought about writing in an order, to track down these thoughts that have been thought and to write them down).

 

이 부분에서 좀 헷갈리는데, 이건 플루서 본인 때문이다. 요컨대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서도 “Nachdenken”에서와 마찬가지로 “질서”짓기와 “흔적” 더듬기가 관건이다. 그렇지만 “Nachdenken”에서와는 달리, (내가 이해한 바대로라면)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서는 새삼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뭔가 그 뒤에 따라붙여야 할 “보충적인 생각들”이 필요 없다(이런 점에서 “an attempt to arrange those ideas that have already been thought about writing in an order”는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겠다. “글쓰기에 관해 이미 질서 있게 사유된 생각들을 [재]배열하려는 시도”). 이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는 새삼 어떤 (새로운/보충적인) 생각들을 그것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시켜 더듬어야 할 흔적들이 없다. 흔적(=글로 쓰여진 것]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으니까.

 

하여,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는 “Nachdenken”과 (비슷하면서도) 구분되는 “Uberschrift”인데, 이 “Uberschrift”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플루서는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사실 “Uberschrift”라는 표현 자체가 1장을 제외하면 2~3번 정도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플루서의 다른 책들/언급들을 읽어보고 참조해봐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어서, 일단 독자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이하는 완전히 내 상상이다.

 

플루서가 말하는 “Uberschrift”처럼 새로운 것을 추가하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혹은 “이미 질서가 부여된 것들”[=글로 쓰여진 것들]에, 새로운 것을 추가하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내게 떠오르는 한 가지 방법은 “이미 질서가 부여된 것들”을 재/배치하는 방법이다. 비유를 해보자면, 농구팀에 새로운 플레이어를 넣는 게 아니라 기존 구성원들의 포지션을 바꾸는 방법이다. 혹은 발터 벤야민 식으로 말하면 “사유들로 이뤄진 어떤 성좌”의 내부 배치를 바꾸는 방법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아예 새로운 농구팀, 새로운 사유의 성좌를 얻을 수 있다. 나는 벤야민의 꿈, 즉 “인용만으로 이뤄진 책을 쓰는 것” 역시 이런 방법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쓰일 것이라 상상해본다. 혹은 나는 몽타주도 떠올려본다. 몽타주 역시 기존의 스틸컷들만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만약에 플루서가 말하는 “Uberschrift”가 정말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무엇이라면, 우리는 이 “Uberschrift”를 어떻게 옮겨야 할까?

 

앞서 적었듯이 “Uberschrift”를 영어판은 “superscript”로, 한국어판은 “메타문자”로 옮기고 있다. 일단 한국어판의 번역을 보자면, 그리스어 접두사 “meta-”는 흔히 인문학 분야에서 “~에 관한”(=about)으로 쓰이기 때문에 괜찮은 선택이다. 가령 “언어에 관한 언어”는 “메타언어”라고 불린다. 게다가 독일어 접두사 “Uber-”와 의미폭이 상당히 겹치기도 한다. 그러니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Schrift uber Schrift=Uberschrift)를 “메타문자”(혹은 메타글쓰기)로 옮긴 것은 괜찮은 선택 같다. 실제로 플루서의 주요 활동 무대 중 한곳이었던 브라질에서도 “Uberschrift”를 “metaescrita”로 옮기고 있다. 단, “Nachdenken”를 “메타적 사유”로 옮기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혹은 “Nach-”를 “Uber-”와 명백히 구분되는 표현으로 옮긴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왜냐하면 “meta-”에는 그저 단순히(그러니까 어원학적으로) “~이후”(=post[L.]=after)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즉 “meta-”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Nach-”와의 구분이라는 문제가 곧장 대두되는 것이다. 짐작컨대, 한국어판 옮긴이가 두 접두사 “Nach-”와 “Uber-”를 모두 “메타(적)”로 옮기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영어판 옮긴이가 “meta-script”라는 표현 대신에 “super-script”라는 표현을 쓰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영어판의 선택이 더 나은 것일까? “Uber-”를 “meta-”가 아니라 “super-”로 옮기면 확실히“Nach-”와 혼동될 여지가 (적어도 의미론상으로) 확 줄어든다. 그런데 문제는 영어판 옮긴이가 “Nachdenken”를 “thinking something over”로 옮기고 있다는 데 있다. 이 “over”가 문제이다. 영어 접두사 “over-”는 독일어 접두사 “Nach-”와 의미폭이 다르다. 하여, “Nach-”를 “over-”로 옮기게 되면, 플루서가 “Nach-”의 두 가지 의미(“뒤에”[after]와 “향해서”[to/ward])를 통해서 “Nachdenken”를 설명하는 부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혹은 무척 헷갈리게) 만든다. 게다가 “meta-”에는 “over”의 뜻도 있기 때문에 다시 “Uber-”와 의미론상의 구분이 희미해진다(물론 영어판 안에서는 “Nach-”=“over-,” “Uber-”=“super-”로 일관되게 구분되어 옮겨지고는 있다).


영어판에는 “Nachdenken”를 그냥 “reflection”(=성찰, 숙고)로 옮기는 대목도 있다. 그렇다면 일관되게 “Nachdenken”=“reflection,” “Uberschrift”=“superscript”로 옮겼으면 어땠을까? “Nachdenken”를 일관되게 “reflection”으로 옮길 경우에 문제가 되는 곳은 플루서가 “Nach-”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해서 “Nachdenken”를 설명하는 부분이 될 텐데, 차라리 그 대목에서도 “reflection”이라는 번역어를 쓰고 옮긴이 각주 등을 통해서 그 대목의 논리를 설명해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를 종합해 나의 견해 혹은 제안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Nachdenken”는 “반성”(反省)으로 옮기고, “Uberschrift”는 “메타문자” 혹은 “초(超)문자”(실제로 한국어판 옮긴이는 이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아예 새로운 표현을 쓴다면 나는 “덮어쓰기”(=overscript)를 선호할 것이다.

 

“反”에는 “되풀이하다, 반대하다”의 의미가 모두 있기 때문에 플루서가 말하는 “Nach-”의 두 가지 의미와 얼추 비슷한 의미폭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되풀이한다는 것은 되풀이할 무엇인가가 선행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이 행위는 선행된 그 무엇에 “뒤따라오는” 행위이다). 그리고 더욱 더 좋게는, 한자 문화권인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덮어쓰기”라는 표현을 쓰면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렇다, 저 유명한 “surdetermination”라는 표현이다. 그것은 위상학적으로 기존의 것 위에 무엇인가가 덮어 씌여지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것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덮어 씌여짐으로써 기존의 것들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끝)


덧붙임말.

 

1. 혹시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서 덧붙이는데, 한국어판의 번역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이런저런 평가를 하기에는 내가 이 책을 아직 충분히 읽지를 못했다). 플루서의 다른 번역본들에 비하면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의 가독성은 굉장히 높다.

 

2. 다만, 나라면 좀 다르게 번역했겠다, 싶은 대목이 눈에 종종 띄는데,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다른 또 하나의 예를 들면 “schrift”의 번역이다. 알다시피 이 독일어 단어는 (낱개로서의) “글자”와 (글자들의 집합체로서의) “글”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이런 단어를 번역할 때의 방법은 보통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병기이다. “글자/글” 혹은 (더 구분되게) “문자/글.” 나머지 다른 방법은 문맥에 따라 그때 그때 어울리는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가령 “Uberschrift”는 “메타문자”로 옮길 때 이해가 잘 되는 부분도 있고, “메타글[쓰기]”로 옮길 때 이해가 잘 되는 부분도 있다. (끝)

 

[주의] 움라우트(..)와 악상(/)이 깨져 있습니다. 왜 인식이 안 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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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
빌렘 플루서 지음, 윤종석 옮김 / 엑스북스(xbooks) / 2015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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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요한 일이 있어서 빌렘 플루서의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엑스북스, 2015)를 읽다가 1장의 처음 두 문단부터 턱 막혔다.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안 갔다. 그래서 할 수 없이 영어판 <Does Writing Have a Future?>(University of Minnesota Press, 2011)를 펼쳐들었다. 노트를 끄적이다 보니 분량이 꽤 되어서 아깝기도 하고, 또 다른 분들의 의견도 구하고자 이렇게 올려본다.

 

영어판에 의거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플루서가 처음 두 문단을 통해서 하려는 말은 다음과 같다. 즉, 자신의 이 책은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writing about writing)인데, 이런 작업은 “Nachdenken”(=thinking something over)이 아니라 “Uberschrift”(=superscript)라는 것이다.

 

왜 이 간단한 말이 이해가 안 갔을까? 다시 한국어판을 펼쳐보고는 그 이유를 깨달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한국어판 옮긴이는 “Nachdenken”를 “메타적 사유”로, “Uberschrift”를 “메타문자”로 옮기고 있었던 것이다. 문제가 되는 두 표현의 접두사 “Nach-”와 “Uber-”를 모두 “메타(적)”로 옮겨놔서(내가 알기로 이 두 독일어 접두사의 의미폭은 동일하지 않다. 아니 겹치는 부분도 없다......아닌가?), 내가 이해하기에 서로 대비되는 두 표현이 서로 비슷한 표현인 것처럼 읽혔던 것이다.

 

요컨대 한국어판만 보면 “writing about writing”=“Nachdenken”=“Uberschrift”처럼 읽힌다.그런데 1장 곳곳에는 그렇게 볼 수 없게 만드는 구절들이 수두룩하다. 그러니 이상할 수밖에.

 

그러고 보니 한국어판과 영어판은 첫 번째 문단의 네 번째 문장을 서로 정반대로 옮겨놨다. 한국어판의 “그래서 이와 같은 모험은 사유들이 사유 자신을 향해 겨냥하고 있는 메타적 사유(Nachdenken)와 비교될 수 있다”에 해당하는 영어판 문장은 “Such an undertaking cannot be compared with thinking something over, in which ideas are directed against ideas”이다. 즉, 한국어판은 긍정문(“비교될 수 있다”)으로, 영어판은 부정문(cannot be compared)으로 옮긴 것이다. 어느 한쪽은 분명히 틀리게 옮긴 것이리라? 어느 쪽일까?

 

일단 계속 나아가보자. 앞서 플루서는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는“Nachdenken”이 아니라 “Uberschrift”라고 했는데 그 차이가 무엇일까? 더 간단히, “Nachdenken”은 무엇일까?

 

(다시 한번 영어판에 의거해 내가 이해한 바에 따르면) 플루서는 “Nach-”의 두 가지 의미를 언급하며 설명을 이어간다. 하나는 “뒤에”(after)라는 의미이며 또 하나는“향해서”(to[ward])의 의미이다. 즉, (해당 접두사의 첫 번째 의미에서)“Nachdenken”는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보충적인 생각들을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 뒤에 따라붙이는 것이다. 그 다음으로 (해당 접두사의 두 번째 의미에서) “Nachdenken”는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의 흔적을 더듬기 위해, 어떤 (새로운/보충적인) 생각들을 “이미 (앞서) 사유된 생각들”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Nachdenken”은, “Nachdenken”의 [두 가지] 전략은 “글쓰기[이 맥락에서는 글로 쓰여진 것 혹은 글 자체]에 관해 글을 쓸 때에는 아무런 의미가 없다.”왜냐하면 일단 글로 쓰였다는 것은 그 글을 구성하는 문자기호들 사이에 질서가 잡혀 있다는 말이며(그러니 따로 질서를 부여할 필요가 없다), 문자기호들은 그 자체로 이미 흔적들(typoi)이기 때문이다(그러니 따로 흔적들을 찾을 필요가 없다).

 

간단히 말하면, “글쓰기”(=글[문자]로 쓰여진 것) 자체에서 “Nachdenken”의 두 가지 전략, 혹은 두 가지 기능은 이미 완료됐다. 그래서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 이미 완료된 “Nachdenken”의 전략 혹은 기능을 새삼스레 반복할 필요가 없다는 말이다. 그렇다면 도대체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란 무엇인가? 플루서의 말을 직접 들어보자.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란 그 자체로 이런 종류의 사유, 그러니까 글쓰기에 관해 이미 사유된 생각들을 질서 있게 정돈하려는 시도, 이미 사유된 그런 생각들의 흔적을 더듬어 다시 쓰는 시도로 간주될 수 있다 ”(Writing about writing is itself to be seen as thinking of a sort, that is, as an attempt to arrange those ideas that have already been thought about writing in an order, to track down these thoughts that have been thought and to write them down).

 

이 부분에서 좀 헷갈리는데, 이건 플루서 본인 때문이다. 요컨대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서도 “Nachdenken”에서와 마찬가지로 “질서”짓기와 “흔적” 더듬기가 관건이다. 그렇지만 “Nachdenken”에서와는 달리, (내가 이해한 바대로라면)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서는 새삼 그것에 질서를 부여하기 위해 뭔가 그 뒤에 따라붙여야 할 “보충적인 생각들”이 필요 없다(이런 점에서 “an attempt to arrange those ideas that have already been thought about writing in an order”는 이렇게도 이해할 수 있겠다. “글쓰기에 관해 이미 질서 있게 사유된 생각들을 [재]배열하려는 시도”). 이와 마찬가지로,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에는 새삼 어떤 (새로운/보충적인) 생각들을 그것의 반대 방향으로 진행시켜 더듬어야 할 흔적들이 없다. 흔적(=글로 쓰여진 것]은 이미 만천하에 드러나 있으니까.

 

하여,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는 “Nachdenken”과 (비슷하면서도) 구분되는 “Uberschrift”인데, 이 “Uberschrift”는 어떻게 작동하는 것일까? 이에 대해 플루서는 정확한 설명을 하지 않는다). 사실 “Uberschrift”라는 표현 자체가 1장을 제외하면 2~3번 정도밖에 나오질 않는다. 그러니 이 문제를 해결하려면 플루서의 다른 책들/언급들을 읽어보고 참조해봐야 할 텐데, 그러기에는 너무 시간이 없어서, 일단 독자로서의 상상력을 발휘해보려고 한다. 그러니까 이 이하는 완전히 내 상상이다.

 

플루서가 말하는 “Uberschrift”처럼 새로운 것을 추가하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이 무엇이 있을까? 혹은 “이미 질서가 부여된 것들”[=글로 쓰여진 것들]에, 새로운 것을 추가하지 않고, 질서를 부여하는 방법은 무엇이 있을까?

 

내게 떠오르는 한 가지 방법은 “이미 질서가 부여된 것들”을 재/배치하는 방법이다. 비유를 해보자면, 농구팀에 새로운 플레이어를 넣는 게 아니라 기존 구성원들의 포지션을 바꾸는 방법이다. 혹은 발터 벤야민 식으로 말하면 “사유들로 이뤄진 어떤 성좌”의 내부 배치를 바꾸는 방법이다. 그것만으로도 우리는 아예 새로운 농구팀, 새로운 사유의 성좌를 얻을 수 있다. 나는 벤야민의 꿈, 즉 “인용만으로 이뤄진 책을 쓰는 것” 역시 이런 방법과 그리 다르지 않은 방법으로 쓰일 것이라 상상해본다. 혹은 나는 몽타주도 떠올려본다. 몽타주 역시 기존의 스틸컷들만으로 새로운 의미를 만들어낼 수 있으니까.

 

그렇다면, 만약에 플루서가 말하는 “Uberschrift”가 정말 이런 방법으로 만들어진 무엇이라면, 우리는 이 “Uberschrift”를 어떻게 옮겨야 할까?

 

앞서 적었듯이 “Uberschrift”를 영어판은 “superscript”로, 한국어판은 “메타문자”로 옮기고 있다. 일단 한국어판의 번역을 보자면, 그리스어 접두사 “meta-”는 흔히 인문학 분야에서 “~에 관한”(=about)으로 쓰이기 때문에 괜찮은 선택이다. 가령 “언어에 관한 언어”는 “메타언어”라고 불린다. 게다가 독일어 접두사 “Uber-”와 의미폭이 상당히 겹치기도 한다. 그러니 “글쓰기에 관한 글쓰기”(=Schrift uber Schrift=Uberschrift)를 “메타문자”(혹은 메타글쓰기)로 옮긴 것은 괜찮은 선택 같다. 실제로 플루서의 주요 활동 무대 중 한곳이었던 브라질에서도 “Uberschrift”를 “metaescrita”로 옮기고 있다. 단, “Nachdenken”를 “메타적 사유”로 옮기지 않는다는 전제에서, 혹은 “Nach-”를 “Uber-”와 명백히 구분되는 표현으로 옮긴다는 전제에서 말이다.

 

그런데 내 생각에 여전히 문제는 남는다. 왜냐하면 “meta-”에는 그저 단순히(그러니까 어원학적으로) “~이후”(=post[L.]=after)라는 뜻도 있기 때문이다. 즉 “meta-”라는 표현을 쓰는 순간, “Nach-”와의 구분이라는 문제가 곧장 대두되는 것이다. 짐작컨대, 한국어판 옮긴이가 두 접두사 “Nach-”와 “Uber-”를 모두 “메타(적)”로 옮기게 된 이유가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또한 영어판 옮긴이가 “meta-script”라는 표현 대신에 “super-script”라는 표현을 쓰게 된 이유도 여기에 있지 않을까 한다.

 

그렇다면 영어판의 선택이 더 나은 것일까? “Uber-”를 “meta-”가 아니라 “super-”로 옮기면 확실히“Nach-”와 혼동될 여지가 (적어도 의미론상으로) 확 줄어든다. 그런데 문제는 영어판 옮긴이가 “Nachdenken”를 “thinking something over”로 옮기고 있다는 데 있다. 이 “over”가 문제이다. 영어 접두사 “over-”는 독일어 접두사 “Nach-”와 의미폭이 다르다. 하여, “Nach-”를 “over-”로 옮기게 되면, 플루서가 “Nach-”의 두 가지 의미(“뒤에”[after]와 “향해서”[to/ward])를 통해서 “Nachdenken”를 설명하는 부분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게(혹은 무척 헷갈리게) 만든다. 게다가 “meta-”에는 “over”의 뜻도 있기 때문에 다시 “Uber-”와 의미론상의 구분이 희미해진다(물론 영어판 안에서는 “Nach-”=“over-,” “Uber-”=“super-”로 일관되게 구분되어 옮겨지고는 있다).


영어판에는 “Nachdenken”를 그냥 “reflection”(=성찰, 숙고)로 옮기는 대목도 있다. 그렇다면 일관되게 “Nachdenken”=“reflection,” “Uberschrift”=“superscript”로 옮겼으면 어땠을까? “Nachdenken”를 일관되게 “reflection”으로 옮길 경우에 문제가 되는 곳은 플루서가 “Nach-”의 두 가지 의미를 통해서 “Nachdenken”를 설명하는 부분이 될 텐데, 차라리 그 대목에서도 “reflection”이라는 번역어를 쓰고 옮긴이 각주 등을 통해서 그 대목의 논리를 설명해주는 게 낫지 않았을까 싶다.

 

​하여, 지금까지의 모든 논의를 종합해 나의 견해 혹은 제안을 밝히면 다음과 같다. “Nachdenken”는 “반성”(反省)으로 옮기고, “Uberschrift”는 “메타문자” 혹은 “초(超)문자”(실제로 한국어판 옮긴이는 이 표현을 쓰기도 한다). 아예 새로운 표현을 쓴다면 나는 “덮어쓰기”(=overscript)를 선호할 것이다.

 

“反”에는 “되풀이하다, 반대하다”의 의미가 모두 있기 때문에 플루서가 말하는 “Nach-”의 두 가지 의미와 얼추 비슷한 의미폭을 갖고 있다. 무엇보다 되풀이한다는 것은 되풀이할 무엇인가가 선행되어 있다는 뜻이기 때문이다(그러니까 이 행위는 선행된 그 무엇에 “뒤따라오는” 행위이다). 그리고 더욱 더 좋게는, 한자 문화권인 우리에게 그리 낯선 단어가 아니다. “덮어쓰기”라는 표현을 쓰면서 내가 염두에 두는 것은, 그렇다, 저 유명한 “surdetermination”라는 표현이다. 그것은 위상학적으로 기존의 것 위에 무엇인가가 덮어 씌여지는 것이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기존의 것의 흔적을 간직하고 있는 것이며, 덮어 씌여짐으로써 기존의 것들의 의미를 변화시키는 것이기도 하기 때문이다. (끝)


덧붙임말.

 

1. 혹시 오해가 있을지도 몰라서 덧붙이는데, 한국어판의 번역이 나쁘다는 말은 아니다(이런저런 평가를 하기에는 내가 이 책을 아직 충분히 읽지를 못했다). 플루서의 다른 번역본들에 비하면 <글쓰기에 미래는 있는가?>의 가독성은 굉장히 높다.

 

2. 다만, 나라면 좀 다르게 번역했겠다, 싶은 대목이 눈에 종종 띄는데, 본문에서 언급하지 않은 다른 또 하나의 예를 들면 “schrift”의 번역이다. 알다시피 이 독일어 단어는 (낱개로서의) “글자”와 (글자들의 집합체로서의) “글”이라는 의미를 동시에 갖고 있다. 이런 단어를 번역할 때의 방법은 보통 두 가지이다. 첫 번째는 병기이다. “글자/글” 혹은 (더 구분되게) “문자/글.” 나머지 다른 방법은 문맥에 따라 그때 그때 어울리는 표현으로 번역하는 것이다. 가령 “Uberschrift”는 “메타문자”로 옮길 때 이해가 잘 되는 부분도 있고, “메타글[쓰기]”로 옮길 때 이해가 잘 되는 부분도 있다. (끝)

 

[주의] 움라우트(..)와 악상(/)이 깨져 있습니다. 왜 인식이 안 되는거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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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복의 형이상학
알랭 바디우 지음, 박성훈 옮김 / 민음사 / 2016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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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무나 매혹적인, 너무나 위험한 행복론

 

 

<행복의 형이상학>은 프랑스의 한 노(老) 철학자가 투척한 회심의 ‘폭탄’이다. 하여, 이 책을 아직 읽지 않은 독자들에게 권하건대, 핑크색 (반)양장본 껍데기나 속지에 속아 뭔가 말랑말랑한 책이라 생각하면 절대 안 된다. 알랭 바디우가 조제한 이 폭탄의 어마어마한 폭발력은 자칫 방심하면 당신 자신마저 삼켜버릴지 모를 만큼 강력하니까.

 

  

 

먼저, 이 폭탄은 행복에 대한 기존 통념을 산산조각 낸다. 바디우에 따르면, 흔히 사람들이 말하는 행복은 행복이 아니다. 요컨대 일상적 욕구를 채워주는 자잘한 보상들(“훌륭한 직업, 적당한 보수, 무쇠 같은 건강, 명랑한 부부 관계 …… 예쁜 아이들”)로 이뤄진 평온한 삶이란 행복이 아니라 ‘만족’이다. 이런 ‘만족’은 “행복의 유사물”일 뿐으로서 가상의 행복, 혹은 ‘상상적 행복’이다.

 

 

이 폭탄은 속칭 멘토들이 설파해온 ‘행복해지는 방법’도 여지없이 박살낸다. 그들은 행복해지기란 쉽다고, 욕심·집착을 버리고 주어진 것에 감사해 하면 행복해진다고 말해왔다. 그러나 바디우에게 행복해지기란 일종의 “도박, 선택, 절대적 결단 …… 시련”인바, “상당한 각오와 위험을 감수”해야 하는 것이다. 즉, 우리는 오직 과/감히 행복해지기를 바랄 수 있을 뿐이다.

 

뭘 이 정도로 호들갑이냐 하는 분들도 계실지 모르겠다. 그렇다. 웬만한 독자들이라면 이 정도의 폭발까지는 충분히 버텨내며 바디우의 논의를 따라왔을 게다. 문제는 그 다음이다.

 

 

바디우가, 대가를 치러야만,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얻어야 한다고 말하는 행복은 ‘만족’=‘상상적 행복’이 아닌 ‘실재적 행복’(bonheur réel)이다. 실로 이 책은 실재적 행복을 설명하는 책이며, 결론으로 수록된 21개의 정의도 이 점을 증명한다. 그런데 ‘실재적’이라는 게 도대체 무슨 말일까?

 

‘실재적’이란 ‘실질적’이란 뜻일까? 그러니까 ‘진정한 행복’이 따로 있다는 말일까? 그렇다면 그 행복이 진정한 것인지 아닌지는 어떻게 판별할 수 있을까? 혹시 ‘실재적’이란 ‘실재에 속한’이란 뜻일까? 흔히 실재란 상징화될 수 없는 것, 혹은 상징계 너머에 있는 것이라 정의된다. 그렇다면 그런 실재의 차원에 속한 행복에 우리는 어떻게 도달할 수 있을까? 아니면 ‘실재적’이란 ‘실재로 향하는’ 혹은 ‘실재를 엿볼 수 있게 해주는’이란 뜻일까? 요컨대 어떤 특정한 행복의 상태에 도달하면 우리가 평소에 가닿을 수 없는 실재와 (잠시나마?!) 접촉할 수 있다는 뜻일까? 그런데 왜 꼭 그래야 하나?

 

 

놀랍게도, 아니 당연한 것일 텐데, 바디우는 나름대로 이 모든 질문에 답변을 내놓는다. 이해가 되는 것도 있고 안 되는 것도 있지만, 동의할 수 있는 것도 있고 아닌 것도 있지만, 아무튼 그렇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 바디우가 한 가지 답변하지 않은 것이 있다.

 

바디우는 실재를 ‘불가능한 것’이라고도 말한다. 기존의 세계나 관점 안에서는 결코 포착할 수 없는 것이라는 점에서 그렇다(그래서 바디우는 “행복은 언제나 불가능한 것의 향유”라고도 말한다). 그렇기 때문에 실재는 ‘새로운 것’이기도 하다. 일단 그 모습을 드러내는 한, 적어도 기존의 이 세계나 관점 안에서는. 그런데 새로운 것이 꼭 좋은 것(bon)이라는 보장은 어디에 있나? 상당한 각오와 위험을 감수하며 겨우 얻어냈는데 그것이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이라면 어쩔 텐가?

 

실제로, 다른 곳에서, 이런 ‘실재에 대한 열정’이 지배한 지난 세기가 파괴의 세기이기도 했다고 말한 건 바디우 본인이다. 물론 그때 바디우는 실재에 대한 열정이 파괴의 방향이 아닌 또 다른 방향, 이른바 ‘벗어나는’ 방향으로 향할 가능성(기존의 것과 다른 최소의 차이, 그렇지만 절대적인 차이, 그래서 새로운 것으로 이어질 차이의 창출 가능성)도 동시에 언급했다. 하지만 그때에도, 그렇게 힘들게 도달한 실재=새로운 것에 대한 가치평가는 없었다. 지금 역시 마찬가지이다. 아니, 어쩌면 애초에 실재라는 것은 그 정의상 그런 가치평가 너머에 있는 무엇일지도 모르겠다…….

 

‘사건,’ ‘진리,’ ‘주체,’ ‘충실성’ 같은 개념을 통해 바디우가 (본인으로서는 최대한) 간결하게 펼쳐 보이는 논의를 이쯤까지 쭉 따라가다 보면 우리는 문득 이런 느낌을 갖게 된다. 뭐랄까, 바디우가 투척한 이 폭탄이 알고 보니 집속탄이고, 처음의 폭발로 떨어져 나와 곳곳에 흩어진 소폭탄들에는 시한장치마저 장착되어 있어서 예상하지 못한 때에, 정신없이 펑펑 터진다는 그런 느낌?

 

 

그렇다. “오로지 불행을 거부하는 데 순응할 것이냐, 아니면 행복을 구하는 모험을 강행할 것이냐?”라고 재촉하는 이 책 <행복의 형이상학>은 바로 이런 책이다. 행복에 관한 우리의 통념을 속 시원하게 박살내주기 때문에 너무나 매력적인 책. 그러나 더 읽으면 읽을수록 곳곳에서 끊임없이 질문의 질문의 질문을 낳게 하기에 우리의 평정심을 뒤흔드는 너무나 위험한 책.


더더욱 이 책이 너무나 위험하게 느껴지는 건, 이미 만사가 더할 나위없는 막장인 세상인지라, 실재적 행복을 향한 저 어려워 보이는 길조차도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인다는 점이다. 결국 그럴 만한 가치가 없는 것으로 판명될지언정, 아니 중도에 포기할지언정, 그 길을 향해 가봤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충분히 만족할 수 있을 만큼 바디우가 말하는 실재적 행복은 매력적이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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