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번역 이야기다. 프랑스의 저명한 정신분석비평가 중 한 사람인 장 벨멩-노엘 교수는 국내 대학에서 초빙교수를 지낸 바 있어서 한국과는 인연이 없지 않다(나도 그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다). 하지만 그가 한국문학의 번역에도 관여한 줄은 이번에 알았다. 그가 지난주 방한하여 이 번역문제를 주제로 한 강연을 가졌다고 한다. 요점은 "해외에 한국문학을 소개할 때 너무 한국적인 것을 소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는 것. 귀담아 들어볼 만하기에 관련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국일보(08. 10. 23) "한국문학 해외에 소개할 때, 한국적인 것에 집착 말아야"
"소주와 김치도 즐겨먹고 사물놀이도 신명난다. 그러나 여행가라면 모를까, 문학비평가의 입장에서 그런 민속적인 것들은 흥밋거리가 될 수 없다."
연세대 국문학BK21사업단 초청으로 지난주 방한해 연세대, 고려대, 이화여대에서 한국문학을 주제로 한 강연회를 연 장 벨맹-노엘(77) 파리 8대학 명예교수는 "해외에 한국문학을 소개할 때 너무 한국적인 것을 소개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말했다.
2000년 이후 벨맹-노엘 교수가 불문학자 최애영(47)씨와 함께 프랑스어로 번역한 한국 작가들의 면모를 살펴보면 이런 발언의 맥락을 이해할 수 있다. 이인성의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 <낯선 시간 속으로>와 정영문의 <검은 이야기 사슬>등이 그가 번역한 작품이다.
인간의 무의식, 욕망 등을 소재로 한 실험성이 강한 작품들로, 국내에서도 일반독자보다는 훈련된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작품들이다. "프랑스인이건 한국인이건 심층부의 무의식은 누구에게나 동일하다"는 벨맹-노엘 교수는 특히 "이인성은 세계에 대한 우리의 인식에 대해 총체적 탐험을 하고 있다는 점에서 전혀 새로운 작가"라고 평가했다. 김영하 역시 그가 눈여겨 보는 작가 중 한 명. 여성의 성(性) 문제를 천착한 단편 '피뢰침' '도마뱀' 등을 번역했는데 "구성이 섬세하고 작품이 열려있다는 느낌을 받았다"고 평했다.
그렇다면 식민지 경험, 압축적 근대화, 냉전적 대결구조 등 한국의 독특한 현실 문제를 다룬 작품들은 호소력이 없을까? 그는 "분단과 통일이라는 상황은 독일에서도 목격할 수 있었고, 길지는 않았지만 프랑스도 나치의 경험을 했기 때문에 한국문학의 정치ㆍ사회적 맥락은 새롭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다"며 "전쟁을 다루더라도 소재적 측면이 아니라 양질의 문학성을 보여주는 작품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그는 그러면서 한국문학의 특징을 '격렬함'으로 요약했다. 유교적 전통을 깨야 한다는 격렬함, 샤머니즘을 극복하자는 에너지를 극단으로 밀고 간다는 격렬함은 사무라이로 상징되는 일본문화의 격렬함과 흥미로운 비교가 가능하다는 것이다.
한국 작가의 노벨문학상 가능성에 대해서 그는 "중국의 한자문화권 체제에서 벗어난 지 1세기 정도밖에 안되는 등 아직 한국문학은 굉장히 젊고 어려 좀더 무르익어야 할 시간이 필요하다"며 "글쓰기의 혁신성을 추구하는 몇몇 작가들은 주목된다"고 말했다.
파리고등사범학교 출신으로 파리 8대학 교수를 역임한 그는 국내에도 번역된 <정신분석학과 문학> <문학텍스트의 정신분석>등의 비평서를 냈다. 2000년 이후 한국문학을 번역하면서 2003년에는 서울대 불어불문학과 초빙교수로 1년간 한국에 체류하며 강의하기도 했다.(이왕구기자)
08. 10. 22.
P.S. 이인성의 <미쳐버리고 싶은, 미쳐지지 않는>(문학과지성사, 1996)은 나도 재미있게 읽은 작품이다. 벨맹-노엘 교수가 선호하는 "인간의 무의식, 욕망 등을 소재로 한 실험성이 강한 작품들로, 국내에서도 일반독자보다는 훈련된 독자들의 관심을 끄는 작품들"이 어떤 걸 의미하는지 대략 짐작해볼 수 있다. 하지만 '훈련된 독자들'을 위한 책이 앞으로도 계속 출간될 수 있을지는 의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