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년 여름 방한하기도 했던 미국의 고전학자이자 철학자(이자 법학자) 마사 누스바움에 관한 기사가 눈에 띄기에 옮겨놓는다. 개인적으로 관심을 갖고 있는 학자여서 더 많은 책들이 소개되길 바라지만 올해는 별다른 소식이 없었다(유행하는 용어로 하자면 그녀야말로 '통섭형' 학자이다).    

중앙대 대학원신문(09. 11. 04)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  

누스바움의 아카데미적 경력의 출발은 서양 고전 철학과 문학이다. 그녀의 박사학위 논문인 <아리스토텔레스의 동물의 운동에 관하여>는 아리스토텔레스 원전을 편집하고, 번역하고, 주석을 붙이고, 해석한 것이었다. 이후 그녀는 그리스 고전 문학, 아리스토텔레스의 철학, 헬레니즘 시기의 철학을 공부하면서 다양한 정치적 활동과 국제적 활동을 펼쳤다. 페미니스트로서 누스바움은 한낱 고전학자로서 대학 울타리에 머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이론을 현실의 영역에 적용하려는 실천적 철학자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그녀의 활동은 자신이 주장하는 내재적 실재론의 입장에 서는 것이다.  

우리는 사회 현상을 있는 그대로 관찰하는 것이 아니라, 관찰자인 인간이 세계를 바라보는 방식 혹은 세계를 해석하는 방식을 통해 이해하기 마련이다. 이러한 입장은 ‘철학함(philosophiern)’을 결국 공동체에 기초한 언어 사용과 관찰자의 공유된 경험에 한정된 사고방식으로 이해하게 만든다. 다시 말해 다양한 사회 현상을 우리의 관심사와 동떨어진 현상으로 보지 않고 늘 관심과 배려를 보내는 태도가 오히려 세계를 정확하게 판단할 수 있게 만드는 것이다. 이러한 철학적 관심이 그녀로 하여금 인문학적 범주를 넘어 사회과학적 관심의 영역으로 나아가게 해서 여성문제, 경제발전, 법, 윤리, 교육, 인간발전, 성역할, 인권과 같은 폭넓은 사회문제 영역을 탐구하게 했던 것이다.  

공감에서 비롯하는 실천적 지혜
왜 사는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 성공적인 삶이란 어떤 것일까.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잘 사는 것(to eu zen)’을 바라고, 그것을 목표로 하고 살아갈 것이다. 사람은 본능적 욕구에 따라서만 살지 않으며 일정한 합리적 원칙과 판단에 따라 행위하려 한다. 그래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인간을 ‘로고스적 동물’이라 정의했다. 여기서 이성이라는 뜻의 그리스어 ‘로고스’는 여러 측면의 인간의 정신 활동을 반영하는 말이다. 인간은 말을 하고, 말을 통해 타자와 의사소통하고, 자신의 욕구와 욕망을 타자에게 내보인다.

인간은 욕구를 가지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 욕구와 욕망을 통제하는 ‘합리적 선택’을 할 수 있는 능력을 가지고 태어났다. 인간은 로고스를 주고받으면서 복잡한 정치 사회인 폴리스를 구성해 살아가기 마련이다. 이런 관점에서 인간이 로고스적 동물이라는 것은 또한 정치적 동물이라는 것을 말한다. 한 사회의 구성원으로서 우리의 삶은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살아갈 수밖에 없으며, 타자와의 관계 속에서 인간은 윤리적 인간으로 거듭 태어날 수밖에 없다.

이처럼 인간은 공동체 속에서 선한 자와 악한 자의 감정 상태, 삶에 대한 이해, 동정과 공감, 연민과 같은 복잡한 감정 양태들을 배우고 이해하게 된다. 나아가 이런 감정적, 지각적 균형을 배우면서 도덕판단의 기반이 되는 상상력, 감수성, 통찰력을 통해 자신의 도덕적 의식을 성장·강화해 나간다.

전통적 합리주의자들은 객관주의, 탈맥락주의, 이성중심적 사고를 도덕판단의 기준으로 삼았다. 반면 현대에 들어 포스트모더니즘의 계열의 학자들은 맥락을 강조하고 인간의 감정에 기초한 도덕판단, 공감, 상상력, 언어 등을 더 중시해서 인간의 내재적 감정의 영역을 인간의 이성(로고스)에 연결시키고자 한다. 감정과 이성, 욕구와 윤리가 서로 별개의 영역이 아니라 긴밀하게 연결되어 있으며, 감정이 오히려 이성을 설득한다는 것이다. 그들은 도덕판단, 상상력의 토대가 인간의 지각 영역에 놓여 있다고 해석한다. 이런 점에서 가치판단으로서의 감정의 역할이 인간의 실천적 합리성의 중요한 요인이 된다는 것이다. 감정이란 한낱 몽매하고 불분명하며 모호한 영역의 어두침침한 내면세계가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생각과 판단에 의한 구체화된 믿음과 느낌의 혼합’으로 판단의 주체가 된다는 것이다. 이성주의자와 달리 이러한 입장을 취하는 누스바움은 감정이 가치판단에서 중요한 인자가 된다는 점을 강조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그의 <니코마코스 윤리학>에서 인간의 행위 영역 안에 이성의 지배를 받는 욕구의 영역이 있음을 밝히고, 인간의 적절한 행위를 판단하는 실천적 지혜(phronesis)를 강조한 바 있다. 감정은 이성과 대립되지 않는 실천적이고 합리적인 부분이라는 것이다. 그래서 실천적 지혜는 마땅한 때에, 마땅한 방식으로, 마땅한 사람에 대해, 마땅한 목적으로 적절하게 응답하게 만든다. 이러한 인격을 갖출 때 인간은 탁월한 인격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아리스토텔레스의 실천적 지혜 개념을 바탕으로 적절한 반응을 하는 인간의 감정의 능력을 누스바움은 ‘지각적 균형’이라고 불렀다. 우리는 타자에 대해서 무관심한 극도의 이기적인 합리성에 따라서 반응하는 것이 아니라, 실천적 지혜를 발휘하여 타자에 대해 공감과 연민과 같은 공속의 감정을 함께 나누는 것이다. 인간은 어떤 맥락에 따라 그 상황을 숙고하는 과정을 거쳐 판단하게 된다. 타자의 존재 양식을 인정하는 것도 타자와의 공감을 통해 이루어지고, 서로 간의 정서적 공감을 바탕으로 적절한 행동 양식을 찾아낸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지각적 균형을 갖춘 사람을 ‘예술적 지각을 갖춘 사람’이라고 말한다. 예술적 지각과 상상력은 도덕적 판단을 감소시키는 것이 아니라 더 높은 차원의 도덕성과 개별성에 대한 적절한 반응을 요구하며,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가’에 관한 질문에 민감하게 반응하도록 만든다. 요컨대 ‘지각적 균형을 가진 삶’이란 예술적 상상력을 가지고 살아가는 삶을 말하는 것이다.  

 

인간의 욕망을 치료하는 수단, 철학
누스바움은 문학과 예술에 대한 윤리적 비평이 예술의 다양성을 무시하고 엄격한 규범적 잣대로만 작품을 평가해 왔다고 비판한다. 나아가 그녀는 미학적 관심이 실천적 관심인 윤리적 관심과 별개라는 철학적 순수주의를 포기한다. 미적 판단과 윤리적 판단은 결코 충돌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윤리교육이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을 통해 이루어질 수 있다고 말한다. 문학 작품 속에 등장하는 인물들이 상상력과 지적 지각, 감성적 지각을 통해 다양하고 복잡한 상황 속에서 자신들의 윤리적 사유와 욕망을 적절하게 표현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스바움은 “만일 철학이란 것이 우리 자신에 대한 지혜를 탐구하는 것이라면 철학은 문학”으로 전환될 필요가 있다는 주장까지 내놓는다. 이런 생각은 이미 <자연의 거울>을 쓴 로티에 의해, 합리성을 강조하는 전통 철학은 문학과 해석학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고 말해진 바 있다. 

이러한 철학적 관점을 비춰볼 때 누스바움이 포스트모더니즘을 옹호하는 입장에 선 것 같지만, 한편으로는 푸코나 데리다를 비판하기도 한다. 포스트모더니즘이 우리가 직면한 현실 문제에 대한 통찰력을 주고 있기는 하지만 주장을 정당화할 만한 역사적으로 정확한 근거나 논리적 뒷받침은 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특히 푸코에 대해선 그의 철학적 문제 제기가 어느 정도 가치를 가진다는 점은 수긍하지만 그가 내세운 현대의 ‘성적 범주’에 대한 분석은 그리 설득력을 가지지 못한다고 비판하고 있다.

오늘을 사는 현대인들은 점점 복잡해지는 사회 속에서 왜소화되고 또 경제적 이유를 포함한 여러 이유로 다양한 정신적 질병을 짊어지고 살아가기 마련이다. 인간의 감정은 메말라가고 서로에 대한 공감보다는 미움과 시기 속에서 고독이라는 질병의 늪은 점점 더 깊어만 간다. 누스바움은 철학이란 인간의 욕망을 치료하는 수단이라고 본다. 인간의 감정을 조절하고 치료하는 철학은 인간을 불안정한 정신적 혼란의 상태에서 벗어나 안정의 상태로 나아가게 만든다. 우리의 삶을 이끄는 철학은 유용한 것이어야 한다. 지나치게 합리성, 보편성, 절대성을 추구한 나머지 인간의 감정이 가진 상상력을 고갈시키는 철학은 더 이상 인간의 삶을 풍요롭게 하지 못한다. 문학, 예술적 상상력에 기반한 인간의 삶이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바라는 ‘잘 사는 삶’의 목적이 아니겠는가.(김재홍/ 관동대 교양과 교수)    

09. 11. 10.  

P.S. 개인적으로 누스바움에 대한 관심은 아감벤에 대한 관심과 겹쳐 있다. 그건 <뉴레프트 리뷰>(길, 2009)에 실린 맬컴 볼의 글 '생명정치적인 것의 벡터들' 덕분인데, "인간은 본성상 정치적 동물이다"라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정치학>)을 제사로 삼은 글의 서두는 이런 것이었다.   

"이 아리스토텔레스의 한 문장에서 주목을 끄는 21세기의 두 가지 이론적 담론이 유래한다. 조르조 아감벤이 주권과 신체의 관계에 입각해 도발적으로 재정식화하는 미셸 푸코의 생명정치, 그리고 아마르티아 센과 마사 누스바움이 발전, 정의와 자유를 평가하고 증진하는 수단으로서 전개하는 능력 접근이 그것이다.(...) 둘 다 일정한 의미에서 생명정치적이며, 동일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범주들- 인간과 동물, 정치와 자연-을 교차시켜 형성되고 있다. 그러나 두 담론은 1960년대 이후 인문과학에서 개시된 분할의 반대편에 있으며, 그것들을 동시에 볼 수 있는 시각, 그들의 통찰을 통합하거나 비교할 길은 지금 없는 것처럼 보인다."(410쪽)  

그러니까 똑같이 생명정치에 해당하는 담론을 펼치고 있지만 푸코-아감벤과 센-누스바움이 각기 다른 벡터를 가리키고 있다는 것. 이 '태그매치'를 감상하고 정리하고픈 생각을 작년부터 갖고 있었지만 여러 사정상 실현시키지 못했다(맬컴 볼의 글에 대해서도 몇 가지 지적하고픈 게 있었고). 그 이유 중의 하나는 바로 누스바움의 저작들이 소개되고 있지 않다는 것. 아마티아 센과 누스바움이 같이 편집한 <삶의 질>(1993) 같은 책을 도서관에서 대출해보기도 했지만, 읽을 시간을 따로 낼 수 없었다(누가 대신 정리해줘도 좋으련만).   

다행히 그 사이에 아감벤의 책은 세 권 더 출간됐고, 앞으로도 10여 권은 더 나올 예정이다. 그에 상응하여 누스바움의 다수 저작 가운데 <정의의 프론티어>(2007)이나 <인간성에서 숨기>(2006) 등 뭐라도 더 소개되면 좋겠다. 오웰의 <1984년>을 다룬 공저로 <'1984년'에 대하여>(2005)도 <1984년> 붐이 이는 김에 번역되면 좋지 않을까 싶고. 그걸 기다리느니 그냥 원서를 구해 읽는 게 빠를 듯싶지만, '삶의 질' 문제를 생각하여 독자의 바람을 그냥 적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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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민주주의를 위한 인문학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1-08-07 10:30 
    어제 배송받은 책의 하나는마사 누스바움의 <공부를 넘어 교육으로>(궁리, 2011)이다. 저자가 2008년 방한한 적이 있고, 그때 한 차례 강의를 들었던 기억이 있다. 미국 인문학계를 대표할 만한 여성 학자인데(고전학을 전공했지만 현재는 시카고대학의 석좌교수로 철학과 법학, 윤리학까지 강의하고 있다)국내에는그간에 단독 저작이 소개되지 않았다(공저만 두 권 나와 있는 듯싶다). 사실은 더 무게 있는 책의 출간을 기다리고 있었지만 '인문학과 시
 
 
hikrad 2009-11-11 22:53   좋아요 0 | URL
저는 'Love's knowledge'가 빨리 번역됐으면 좋겠네요. 도서관에 주문했던 책을 빌려 놓고 보니 묵직한 분량의 압박이...^^ 로쟈님이 좋아하신다던 알렝 핑켈크로트의 '사랑의 지혜'와 비교해 보면 재미있겠네요^^

로쟈 2009-11-13 01:23   좋아요 0 | URL
네, 번역되면 좋을 타이틀이 꽤 많지요. 로스쿨 교양서로도 요긴할 듯싶은데, 아직 별다른 기미가 없는 듯합니다...

Jun 2009-11-12 01:2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처음 인사드립니다. 누스바움은 제가 꾸준히 관심을 두고 있는 철학자인데 이상하게도 한국에서는 그녀의 학문적 명성과 국제적인 활동에 비해 관심이 적은 것 같습니다. 최근에 '붐'이 일고 있는 랑시에르나 아감벤과 같은 학자들과 비교해볼 때 그 불균형이 더 뚜렷해지는데요, 그 이유가 과연 무엇인지, 이에 대한 로쟈님의 견해를 여쭤보고 싶습니다

로쟈 2009-11-13 01:27   좋아요 0 | URL
영미 철학자들이 아무래도 덜 '매력적'으로 여겨지는 듯해요. 푸코, 들뢰즈 같은 '화려함'을 보여주지 못하는 것 같고. 누스바움은 다루는 분야가 넓은 학자여서 얼핏 엄두들을 못내는 듯도 싶습니다...
 
내가 생각하는 서평

학술서평의 문제점을 짚은 대학신문의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지난주에 전화로 잠깐 기자의 질문에 답한 적이 있다. 출판대국의 면모에 걸맞은 (학술)서평문화를 갖고 있지 못하다는 지적인데, 하루아침에 달라지긴 어려운 것이 아닐까(일단은 '학술'이 먼저 돼야 학술서평도 뒤를 따를 것이고). 그것도 '문화'라면 매일매일의 한 걸음이 그래도 먼훗날 어떤 궤적을 보여줄지도 모를 따름...   

대학신문(09. 11. 09) 잃어버린 학술 서평을 찾아서   

‘3·5·7’-3조원 시장 규모로 연간 5만 종의 책을 출간하는 세계 7대 출판국 한국. 늘어난 출판량이 질까지 담보하진 않는 법. 서점을 점령한 많은 책은 알맹이보다 화려한 표지와 자극적 제목으로 무장했다. 범람하는 책의 물결 속에서 여차하면 손가락 사이로 주르륵 빠져나가는 ‘진국’을 잡기 위해 독자들이 애용하는 내비게이션은 서평이다. 그 중 학술 서평은 고르기도 읽기도 어려운 학술서를 설명해주며 학술 담론을 제공하는 역할을 한다.

그런데 ‘내비게이션’ 학술 서평이 오히려 길을 잃었다며 성토하는 목소리가 높다. 서평자들과 편집자들은 한국의 학술 서평이 영 못마땅하다는 눈치다. 후마니타스 안중철 편집장은 한국의 학술 서평을 두고 “활성화되지도 전문화되지도 않았다”고 비판했다. 이택광 교수(경희대 영미어학부)는 한 술 더 떠 “학술 서평 문화가 애초에 존재하지도 않았다”고 딱 잘라 말했다. 한국 학술 서평은 서지정보와 출판사 보도자료에 의존하는 ‘신간 소개’ 수준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모호한 성격에 인적·물적 기반마저 열악해
애초 학술 서평은 대중 서평과 구분되는 고유한 정체성을 찾기 쉽지 않다. 인터넷 서평꾼 ‘로쟈’로 이름난 이현우 강사(노어노문학과)는 “일반적으로 서평 대상에 따라 학술 서적에 대한 서평은 학술 서평, 일반교양서에 대한 서평은 대중 서평으로 구분 짓지만 경계가 모호하다”고 말한다. 서평을 구성하는 두 가지 요소인 소개와 비평의 비율을 고려해 소개가 많으면 대중 서평, 비평이 많으면 학술 서평으로 가르기도 하지만 그 비율의 기준도 정의된 바 없다.

출판계와 언론계의 인적·물적 환경도 학술 서평 위기의 주요 원인으로 지목된다. 학계의 좁은 네트워크 안에서는 서평자를 구하기도 어려울뿐더러 구하더라도 저자와 한솥밥을 먹거나 적어도 안면있는 사이인 경우가 많다. 이는 서평자가 저자에 도전하기보다 인간관계를 고려한 ‘주례사 비평’을 통해 체면치레하는 결과를 낳는다. 안중철 편집장은 “최근 학술 서평은 책의 긍정적 측면을 지나치게 부각하거나 출판사의 보도자료를 그대로 싣는 경우가 많다”고 지적한다. 한국 서평의 원형 ‘서발문’을 연구 중인 심경호 교수(고려대 한문학과)는 “학계에 만연한 주례사 비평이 과거 자기 가문의 과시를 위해 낮은 수준의 글까지 엮어 무분별하게 유집(遺集)을 발간하던 세태와 비슷하다”고 꼬집었다.

학술서의 저술량이 적고, 전문 서평지가 없는 현실도 문제다. 권위를 갖고 서평 문화를 주도해야 할 매체가 없으니 학술 서평이 일간지 ‘귀퉁이’ 외에는 설 공간이 없는 실정이다. 주요한 학술서를 평하는데 정해진 매수와 마감 시간에 쫓기는 언론사의 일정은 깊이 있는 서평을 기대하기 어렵게 만든다.

낮은 위상을 반영하듯 서평은 학계에서도 주변부를 맴돈다. 하나의 완결된 논문으로도, 개인의 독창적 연구결과로도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이다. 현재 서평은 한국연구재단과 대학 등의 기관에서 주관하는 연구업적평가 대상에서 제외된다. 외국은 학회 발표, 외부 기고, 서평 모두 교수 개인의 연구 커리큘럼에 기록되지만 한국에서는 논문 위주의 풍토로 서평이 설 자리가 없을 것이다.

◇활성화된 외국 서평, 분화시스템과 학술성 돋보여
외국 서평 매체 중에는 영미권의 『뉴욕타임스 북리뷰』 『런던 북리뷰』, 『뉴욕리뷰 오브 북스』와 프랑스의 『르몽드』지를 추천하는 이가 많다. 전부 해당 분야의 전문가가 집필하며 그 길이도 길다. 종합일간지와 별도로 독립운영되는 『뉴욕타임스 북리뷰』는 서평 기사 하나에 두 달을 할애해 그 수준을 유지하며 서평 의뢰 전, 서평자와 저자, 출판사의 관계를 점검해 ‘주례사 비평’을 방지한다.

분화된 시스템과 탄력적 운영도 강점이다. 일간지 서평이 대중성을, 학회지와 서평전문지 서평이 학술성을 담당하는 것이다. 이택광 교수는 “영미권 대중 서적은 대중문화 전공자가 서평을 쓰고 학술 서적은 학자들이 평가하는 등 필진이 고루 배치돼 있다”며 영미권 서평을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수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는 경영전략도 주목할 만하다. 영미권 서평전문신문 『뉴욕리뷰 오브 북스』는 6개월간 격주로 발행하다 출판계가 뜸한 계절에는 월간으로, 책이 쏟아지는 3월에는 월 3회 발행한다.

학술 담론의 형성을 가능케 하는 논쟁적 성격도 돋보인다. 미국 고등교육 전문지인 『크로니클 리뷰』는 20개 면에 5~6권의 책을 다루는데, 필자의 주제의식을 중심에 둔 학술 에세이를 강화하고 학술 신간을 많이 넣는 것이 특징이다. 영국의 격주간 서평 전문지 『런던리뷰 오브 북스』는 주제가 비슷한 서적 몇 권을 엮어 서평을 쓰고 소논문 형식의 학술 에세이로 논쟁성을 강조한다.

◇서평자의 시각이 담긴 학술 행위로서의 서평 절실해···온라인 공간도 주목
『북새통』 같은 전문 서평지가 성행하던 시절이 있었다. 그러나 서평을 업적으로 인정하지 않는 풍토와 어려운 글을 회피하는 대중들의 성향이 맞물려 학술 서평이 점점 소멸해갔다. 이 때문에 학술 서평의 부흥을 위해선 대중적 차원의 역량을 기르는 것이 필요한 실정이다.

학술 서평의 대안을 신문 지면에서 벗어나 온라인 공간에서 찾는 목소리도 있다. 안중철 편집장은 “자율적 블로그 활동과 온라인 커뮤니티의 활발한 활동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인간관계의 영향으로 ‘주례사 비평’이 되기 쉬운 오프라인 서평과 달리 온라인 공간에서는 외부 영향에서 자유롭게 비판의 목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해 온라인 비평 커뮤니티 ‘비평고원’의 조영일 대표는 “온라인 서평은 지면에 실린 서평보다 영향력이 없고 참여자들의 자발성에만 의존하는 것이 한계”라며 “오프라인 언론사·저널과 연계한 조직적 뒷받침이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학술 서평의 위기는 그 원인이 다양한 만큼 여러 방향에서 대안이 제시된다. 서평에 대한 인식을 제고하고 깊이 있는 서평을 쓸 수 있는 물적 토대를 마련하면서 비판을 꺼리지 않는 태도를 정착시키는 것이 그것이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것은 읽을 만한 책을 판별해내고 저자의 의도를 독자들에게 정확히 전달하는 서평의 고유한 자기 역할을 망각하지 않는 것이지 않을까.(김은열기자) 

09. 11. 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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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irror 2009-11-10 07:25   좋아요 0 | URL
로자님이 처음에 잘 지적하신 듯 합니다. 학술이 제대로 안 되는데 학술비평이 제대로 될 리가 없죠. 이 기사를 쓴 기자는 학술비평이 왜 안 되는지를 묻지 말고, 왜 이 나라에서 학술이 제대로 안 되는지부터 물어야 할 것 같습니다. 과연, 각 전공에서 번역서들을 제외할 경우, 서평할만한 책들이 1년에 몇권이나 나올지 궁금합니다. 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우리나라 학자들의 논문에 그 논문과 관련된 우리나라말로 된 동학들의 논문과 책을 얼마나 인용하고 평가하는지부터 검토해 보는 것이 우선이지 않을까요? 논문과 저서에 우리나라말로 된 관련 논저들을 애초부터 참조조차 하지 않는데, 서평이 제대로 될 수 있을지 의문입니다.

로쟈 2009-11-10 21:53   좋아요 0 | URL
일단 한국어로 쓴 논문이나 책 자체가 마이너리티인 것이죠. 한국학을 제외하면 정말 드물고 드물지 않을까 싶습니다...

sophie 2009-11-10 09:26   좋아요 0 | URL
입성했습니다 ^^ 르몽드 지가 서평으로 유명하군요. 한 번 들여다봐야겠네요.

로쟈 2009-11-10 21:51   좋아요 0 | URL
첫 댓글이신가요? 눈에 띄는 서평이 있다면 종종 소개도 해주시길.^^
 

'공간' 11월호에 실은 서평을 옮겨놓는다. 격월로 서평을 게재하는데, 이번에 다룬 것은 두 명의 디자이너가 쓴 <슈퍼노멀>(안그라픽스, 2009)이란 책이다. 내가 고른 것은 아니고 편집부에서 제안해준 책. 생각할 거리가 없진 않아서 나름대로는 소득을 얻은 책이기도 하다.   

공간(09년 11월호)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감동 슈퍼노멀

슈퍼노멀? 일단 제목이 ‘노멀’하지 않다. ‘규칙’이나 ‘규범’을 뜻하는 라틴어 ‘노르마(norma)’에서 나온 ‘노멀’은 표준적인, 정상적인, 평범한 것을 가리킨다. ‘슈퍼’는 ‘위의’나 ‘너머의’라는 뜻이니까 ‘슈퍼노멀’ 자체가 조어상으로는 모순형용이다. 보통 특별하면 평범하지 않고 평범하면 특별하지 않은 법인데, ‘특별한 평범함’이라니? <슈퍼노멀>(안그라픽스, 2009)은 후카사와 나오토와 재스퍼 모리슨, 두 명의 제품 디자이너가 안내하는 이 ‘특별한 평범함’의 세계다. 책의 부제가 ‘평범함 속에 숨겨진 감동’인데, 덧붙이자면 그 감동에는 예기찮은 놀라움도 포함되어 있다.     

 

책에는 저자들이 발견한 '슈퍼노멀' 오브제 50여 점이 작품 설명과 함께 수록되어 있다. 전시장에 진열된 ‘작품’이기도 한 이 슈퍼노멀 제품들이 첫눈에 주는 인상은 소박함과 단순함이다. 사람들이 쓰레기를 던지는 방향으로 살짝 기울어진 쓰레기통과 철사를 조금 두껍게 하고 간격을 기능에 맞게 조정한 과일바구니, 공기환기구의 창살을 빼다박은 공기청정기와 과장된 아치가 다리부분에 포함된 욕실의자, 그리고 모든 모서리를 둥글게 처리하여 사용자가 손을 다치지 않게끔 배려한 쇼핑바구니 등 우리 일상에서 흔하게 볼 수 있는 물건들이 대부분이다. 그렇다면 무엇이 이 ‘노멀한’ 물건들에 ‘특별함’을 부여할까?       

이 슈퍼노멀의 특별함을 저자들은 일본의 전통적인 미의식을 드러내주는 용어로 ‘와비사비(侘寂)’와 ‘슈타쿠(手澤)’라고도 표현한다. ‘와비사비’는 어떤 물건이 시간이 가면서 갖게 되는 고요한 상태를 가리키는 것으로, 실용적인 미를 통달한 이후에 나타내는 아름다움이다. 물건을 오래 사용하다 보면 물건 속에 깃든 혼이 자연스레 진가를 드러내고 광채를 나타내지 않는가. ‘슈타쿠’는 ‘손으로 윤을 낸’이란 뜻이다. 사용하면서 자연스레 만지고 또 만지다 보니 윤기가 흐르게 된 것을 가리킨다. 모두가 시간이 지나가면서 발생하고 또 얻게 되는 아름다움이다.  

시간의 풍화작용 속에서도 남아 있는 아름다움이라면 장식적이라기보다는 기능적인 아름다움일 수밖에 없다. 슈퍼노멀은 한번 쓰고 버리는 것이 아니라 일상생활에서 반복적으로 사용하게 되는 것이고, 그런 과정에서 사용자와 어떤 일체감을 얻게 된다. 주방의 도마가 그렇고 병따개와 스탠드 옷걸이, 종이클립과 디지털카메라가 그렇다. 이런 것들을 우리 생활의 일부로 늘 우리 곁에 존재하는 것들이다. 저자들이 든 예로, 간디가 살았을 적에 그가 기거하던 방에서 사용하던 단출한 물건들, 즉 안경 한 벌과 밥그릇 하나, 옷 하나가 간디에게는 슈퍼노멀이었다고 할 수 있다.   

요컨대, 두 저자가 정의하는 슈퍼노멀은 이렇다. “슈퍼노멀은 우리가 무언가를 사용할 때 나타나는 아름다움의 메아리입니다.”(후카사와) “슈퍼노멀은 즉각적으로 인지되는 아름다움이 아니라 다른 수준의 아름다움에 대한 논의와 관계있다고 봅니다. 즉, 알아차리는 데 오랜 시간이 걸리고, 사용하다 보니 아름다워지는 아름다움, 매일 일상에서 느끼는 아름다움, 볼품없지만 실용적이고 오래가는 아름다움 말예요.”(모리슨) 

이런 슈퍼노멀이 왜 새삼 주목받고 있는가? 그것은 저자들의 지적대로 새롭거나 아름답거나 혹은 특별한 것을 고안해내는 것이 디자인이라는 통념에 대한 도전이기 때문이다. 디자이너는 흔히 기존의 것을 개선하고 획기적으로 변화시키고자 하지만, 그의 과도한 의욕은 기존의 좋은 다자인마저 무시하거나 간과하도록 만든다. 새롭고 획기적인 것을 기대하는 입장에서라면 이미 알고 있고 오래 쓰고 있는 물건들이 평범하고 추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즉 노멀만 보고 노멀 안의 존재하는 슈퍼노멀의 가능성은 보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관점에서 보면, 일본의 디자이너들이 주창한 슈퍼노멀은 지각의 자동화에 맞서 우리의 지각을 새롭게 갱신하는 것이 예술이라고 본 러시아 형식주의자들의 미학론과도 닮았다. 후카사와와 모리슨은 슈퍼노멀이 ‘이론’이 아니라고 말하지만 “이미 알고 있던 것을 새롭게 자각하는 것”이 슈퍼노멀이라면, 그것은 “지각을 어렵게 하고 지각에 소요되는 시간을 연장함으로써 지각의 과정 그 자체가 미학의 목적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러시아 이론가 슈클로프스키의 입장과 먼 거리에 있지 않기 때문이다.  

물론 차이는 있다. 형식주의 예술론에서는 지각과정을 지연시키기 위해 대상을 ‘낯설게 하는’ 예술적 기법과 예술가의 창조적 개입이 중요하지만, 슈퍼노멀은 그런 ‘창조적 자아’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곧 슈퍼노멀은 우리에게 너무도 친숙하기 때문에 누가 만들었을까란 궁금증도 갖게 하지 않는다. 디자이너의 생각과 예술가의 손길을 관심 대상에서 지워버리는 것이 바로 슈퍼노멀의 고유한 특징이기도 하다. 특별한 기교나 장인의 솜씨 없이도 특별해질 수 있다는 것, 가장 평범한 것이 비범함을 품고 있다는 슈퍼노멀의 발견은 일상 속에 파묻혀 지내는 우리를 뿌듯하게 한다. 

09. 11. 08. 

P.S. 내 주변에도 '슈퍼노멀'이 없을까 둘러보다가 생각이 미친 건 애용하는 형광펜이다. 풀네임은 모나미 에딩 '슈퍼형광'. 요즘은 태국산으로 판매되는데, 그런 탓인지 가격이 저렴하다. 개당 200-250원. 책을 읽으며 줄을 긋기 위해 주로 활용한 게 몇 년쯤 된 듯싶다(주로 초록색만 쓴다). 가장 저렴하고 가장 단순하지만, 내겐 필수품이어서 항상 주머니에 넣고 다닌다. 그 정도면 슈퍼노멀로 손색이 없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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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1-09 00: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게는 수첩(7x11)과 Petit펜입니다. 칼라티를 살때도 가슴 주머니가 있는 옷을 사죠. 돈과 지갑이 없으면 괜찮아도 수첩이 없으면 되돌아가 챙긴후 외출합니다. '간디'의 '슈퍼노멀'을 보니 '소로'의 '시민불복종'이 생각납니다. '톨스토이'에게 영향을 주기 했구요.'소로','간디','톨스토이' 공통점이 있습니다.

로쟈 2009-11-09 19:04   좋아요 0 | URL
네, 세 사람을 묶은 책이 나올 법도 한데요...

펠릭스 2009-11-10 17:57   좋아요 0 | URL
간디의 비폭력주의가 킹목사에게 영향을 주었고요.

me-polaris 2009-11-09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그저께 저공비행을 샀습니다.
저에게는 낯선 작가라 익숙해지기까지 시간이 걸리겠지만 열심히 읽어볼 생각입니다.
여기 제가 사는 버지니아에서 돈을 지불하고 인문계책을 사고 파는 행위는 서점의 주인과
고객에게 어지간히 극적이지요.

로쟈 2009-11-09 19:03   좋아요 0 | URL
버지니아에서 사실 수 있는 <저공비행>이 어떤 책인지 궁금하네요...
 

아감벤에 관한 기사를 검색해보다가 얼마전에 읽게 된 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평론집 <얼굴 없는 노래>(문학과지성사, 2009)로 김달진문학상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한 함돈균씨의 인터뷰 기사다. '이론으로 무장된 세대'라고도 칭해지는 젊은 세대 비평가들이 어떤 태도로 문학에 임하는가를 엿볼 수 있다(최근에 나온 김화영 선생의 <소설의 숲에서 길을 묻다>는 그 대척점에 놓여 있다). 

 

주간한국(09. 09. 22) "2000년대 혁신적 작품 소개하고 싶어" 

2000년대 중반 이후, 젊은 비평가 그룹이 한국문학의 새 기류로 떠올랐다. 강계숙, 복도훈, 신형철, 이수형, 정여울 등 70년대 생 비평가들은 2000년대 초중반 비평을 발표한 이후 각종 문예지의 편집위원으로 활동하며 문학지형도를 그리고 있다. 문학평론가 함돈균은 젊은 비평가 그룹의 대표적인 인물이다. 2006년 <문예중앙> 봄호에 평론 '아이들, 가족 삼각형의 비밀을 폭로하다'를 발표하며 비평 활동을 시작한 그는 불과 2~3년 사이 각종 문예계간지에 잇따라 굵직한 평론을 발표하며 주목받았다.

"2000년대 비평가들은 자기의 평론을 해석에서 나아가 하나의 '읽힐 수 있는 텍스트'로 만들고자 하는 욕망을 전례 없이 가장 많이 드러내는 세대 같아요. 또 비평은 시, 소설처럼 물질적 기반을 가져야 하는데, 2000년대 한국문학은 다양한 층위의 문학작품이 나오고 있고요."

이들 젊은 비평가들의 특징 중 하나는 외국의 문예사조를 적극적으로 소개하고 있다는 점이다. 이들의 평론에서는 이미 일반인에게도 익숙한 자크 랑시에르와 조르조 아감벤, 알랭 바디우 등 해외 철학자들의 이론을 국내 문학 텍스트 분석에 끌어들인 분석을 종종 발견할 수 있다.

"철학은 하나의 세계를 바라보는 세계관인데 우리 문학을 볼 수 있는 방식 중 하나라면 이론을 도입하는 게 문제가 되지 않는다고 생각해요. 다만 잘 변형되어 우리 문학을 분석하는 돋보기가 될 수 있는가, 도입하는 부분에서 자의식이 있어야 하겠지요."

'이론으로 무장된 세대'(문학평론가 정홍수)란 찬사와 '새로운 정치에 대한 모색인지 회피인지 우려와 기대가 엇갈린다'(문학평론가 황정아)란 지적이 함께 따라다닌다. 이는 평론가 함돈균에게도 해당되는 사항이다. 난해한 작품 설명이 독자와의 소통을 멀게 한다는 지적에 대해 그는 "문학적 형식의 소통은 일상의 방식과 다르다"라고 말했다.

"문학은 일상어가 갖는 이데올로기를 거스르는 방식으로 소통하려고 하거든요. 때문에 문학적 소통이 낯선 경우가 많죠. 명쾌하고 쉽게 풀이되는 말과 난해한 말, 다양한 층위의 말이 필요하다고 생각해요." 



지난 몇 년간 발표한 비평은 몇 달 전 평론집 <얼굴 없는 노래>로 엮였다. 제목인 '얼굴 없는 노래'는 그의 문학관을 드러낸 말이기도 하다. 평론가 함돈균이 생각하는 문학은 한 시대의 상식과 이데올로기에서 벗어나 있기 때문에 무언가 결핍된 말이다. 그러니까, 사람을 드러내는 대표적인 신체인 '얼굴'이 없는 '노래'는 한 시대의 보편적 상식을 거슬러 그 시대에 억압된 것을 드러내는 말이다.

그는 종전 문학관에서 시와 소설로 볼 수 없는 자유로운 작품을 선호한다. 그가 김민정, 황병승, 진은영 등의 작품에 주목하는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400여 페이지, 총 4개의 장으로 구성된 이 책에서 그는 2000년대 문학, 그중에서도 시를 중점적으로 소개하고 있는데, 이를 통해 그는 2000년대의 언어 현상, 문학계 전위적인 실험에 주목한다. 시인 겸 문학평론가 권혁웅은 "불과 2년 만에 이만한 두께에, 이만한 수준의 논의로 묶어 냈다"란 말로 그에 대한 신뢰를 내비췄다. 함돈균은 이 평론집으로 얼마 전 김달진문학상 젊은 비평가상을 수상했다.

"문학의 정치성"에 주목한다는 그는 문학의 형식과 내용 모두 혁신적인 2000년대 작품을 소개하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문학의 아이러니 중 하나는 미학적 전위(형식의 새로움)와 정치적 진보(혁신적인 내용)가 만나지 못하는 거라고 생각해요. 미학적 전위의 작가들이 정치적으로 보수적이고, 진보적인 작가들은 미학적으로 가장 보수적인 태도를 갖고 있습니다. 모든 전위는 만난다고 생각해요. 그들을 만나게 하고 싶은 게 저의 바람입니다."(이윤주 기자) 

09. 11. 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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펠릭스 2009-11-09 06: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70, 80, 90, 2000년말의 시간속에 작가-비평-독자의 유기적인 관계는
마치 여당-야당-국민같습니다.

로쟈 2009-11-09 19:02   좋아요 0 | URL
재밌는 비유시네요.^^
 

이번주에 가장 눈에 띄는 재출간 도서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비봉출판사, 2009)이다. 지난 1996년에 출간됐다가 절판됐었는데, 액면가는 2만원에서 2만 5천원으로 올랐다. 상대적으로 초판이 얼마나 비쌌던가를 알 수 있다(새삼 적시하는 것은 내가 책을 구입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 이번엔 소장도서로 마련해둠직하다(게다가 전면개역판이라고 한다).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11. 07) 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역지사지 도덕론 

애덤 스미스(1723~1790·그림)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국부론>이다. 근대 경제학의 탄생을 알린 저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미스를 유명인사로 만든 출세작은 <국부론>보다 앞서 집필한 <도덕감정론>(1759)이다. 1996년 한 차례 번역·출판된 바 있는 이 책이 출판사의 전면적인 번역 수정을 거쳐 명료한 문장으로 새롭게 나왔다.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 자신은 경제학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학이 분과학문으로 독립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도덕감정론>으로 명성을 얻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철학자 스미스’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소도시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스미스는 글래스고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온 뒤 1752년 글래스고대학 도덕철학 교수로 임용됐다. 그 자리는 전 시대에 도덕철학자로 이름을 날린 스미스의 스승 프랜시스 허치슨의 뒤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도덕철학은 오늘날의 사회철학에 해당한다. 스미스는 이 시기에 유창한 강의로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도덕철학자 스미스의 강의가 책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도덕감정론>이다.

<도덕감정론>은 <국부론>만큼이나 오해의 안개에 쌓여 있는 저작이다. <국부론>이 인간의 이기심을 찬양하는 저작인 데 반해 <도덕감정론>은 이타심을 강조한 저작이라는 것이 그런 오해의 한 양상이다. <국부론>의 이기심을 <도덕감정론>의 이타심으로 제어하고 교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부론>에서 시장원리주의를 설파한 스미스가 그보다 먼저 <도덕감정론>에서 복지국가론·후생경제학을 주창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스미스의 사상을 통합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임이 분명하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동일한 원리 위에 세워진 중층 건물과도 같은 저작이다. <도덕감정론> 위에 <국부론>이 얹힌 모습인 것이다.

‘도덕감정론’ 하면 도덕심 또는 이타심이 떠오르기 십상인데, 도덕감정을 이타심으로 한정하여 이해한 사람은 스미스의 스승 허치슨이었다. 스미스는 스승의 생각을 비판하고, 이타심뿐만 아니라 이기심도 도덕감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도덕감정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동감(sympathy·공감) 능력’이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기쁨·슬픔·욕구·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경우 즐거움을 느끼고 그 감정에 공감하지 않을 경우엔 불쾌함을 느낀다.

스미스는 공감하느냐 공감하지 않느냐를 가르는 기준은 ‘적정성’이라고 말한다. 이타심이라고 해서 꼭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가족을 팽개치고 남을 돕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이타적이라고 해도 공감을 얻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기적 행위도 그것이 적정한 수준이라면 공감을 불러올 수 있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상상력이야말로 공감 능력의 비밀이다. 그렇다면 그 적정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스미스는 여기서 ‘제3의 공정한 관찰자’를 제시한다. 인간 행위의 경험적 축적 위에서 그런 관찰자를 상정할 수 있으며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도 그런 관찰자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관찰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 이기심이든 이타심이든 도덕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스미스가 규명하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 사회적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스미스는 공감의 원리가 이기심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조화와 발전이 가능하다고 본다. 마치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하늘의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질서 있게 운행하듯이, 인간의 이기심도 질서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덕감정론>의 이런 규명 위에서 <국부론>의 논의가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냉정한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이기심의 강력성을 인정하고, 그 이기심이 적정하게 제어되고 공정하게 관리될 경우 사회적 이익 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을 따름이다. 스미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시대였다. 노동과 자본이 분화되지 않고, 자본가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하던 시대였다. 스미스가 생각한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와 질서는 소박한 단순상품생산 시대의 목가적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이론을 노동과 자본이 극단적으로 분화된 현대 독점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스미스의 ‘자유방임’ 논리를 자신들의 근거로 끌어들인 것은 시대착오인 셈이다.  

더구나 스미스의 ‘자유방임’ 주장은 그 시대의 상업자본가들의 독점과 특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는 이기심이 제어되지 않고 폭주할 경우에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애가 없어도 사회는 존속할 수 있지만, 정의가 부재하면 사회는 붕괴한다.” 모든 반칙과 특권에 반대하는 ‘급진적 철학자’가 스미스였던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11. 07.   

P.S. '급진적 철학자'로서 혹은 '윤리학자'로서의 애덤 스미스를 재조명한 책들이 없진 않다. 조나단 와이트의 경제학 소설 <애덤 스미스 구하기>(생각의나무)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론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의 <윤리학과 경제학>(한울아카데미, 1999) 덕분에 <도덕감정론>의 의의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센은 펭귄판 <도덕감정론>의 서문을 쓰고 있기도 하다). 제목은 '윤리학과 경제학'이지만, 센은 경제학의 두 가지 기원으로 '윤리학'과 '공학'을 든다(각각 윤리학적 기원과 계산논리적 기원이다). 경제학이 오늘날과 같이 탈윤리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윤리학적 기원에 대한 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절반의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센은 이렇게 지적했다.  

이른바 '현대 경제학의 시조'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글라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다. 더구나 경제학의 주제는 오랫동안 윤리학의 한 분야 같은 것이라고 여겨졌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꽤 최근까지 경제학을 '도덕철학 우등졸업시험'의 한 분야로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학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17쪽)    

해서 이러한 전통에서 일탈한 현재의 '주류 경제학'은 일종의 '돼먹잖은 경제학'이다(거기에 비한다면 센코노믹스는 좀 '돼먹은 경제학'이겠다). 돈은 많이 벌어서 으스대지만 안하무인이고 근본을 모르는 망나니. 소위 '경제학'에 대해 내가 가진 불편한 느낌의 기원도 그런 데 있다. 고등학교 때 '경제'를 배웠지만, 기억에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만이 조금 언급되었을 뿐 <도덕감정론>은 다뤄지지 않았고, 경제학의 윤리학적 기원에 대한 소개도 없었다. 그 때문인지 단 한순간도 경제학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경제학은 단 한 과목도 수강하지 않았다. 경제학이 도덕철학의 일부였다는 것만 알았어도 생각을 조금 달리했을 지 모를 일이다...   

P.S.2. 대출도서를 반납하기 위해 동네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관한 참고도서를 살펴봤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이 몇 권의 책에서 관련 장을 복사했는데, 일단 제임스 버컨의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탄생>(청림출판, 2007)이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데 요긴해 보인다. "<도덕감정론>은 흄과 허치슨, 맨더빌, 샤프츠버리, 로크, 홉스를 거슬러올라가, 17세기 시민전쟁의 정치적, 종교적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도덕적 문제에 대한 영국의 오랜 전통의 절정이자 최후를 장식하는 백조의 노래다."(83쪽)라는 게 서두의 평.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니라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라는 점이 이상하지 않다. 한 대목 더 인용하면,  

이 책의 제목은 철학적 저작의 의도를 정확히 대변해준다. <도덕감정론>은 왜 어떤 행동은 옳고 어떤 행동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 권위가 필요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옳거나 그르다고 느끼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려 한다. 이 책은 인간에게 언제나 옳고 좋은 것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경우에 인간이 어떻게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가 하는 문제를 탐구한다. '왜 여자가 정숙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왜 남자는 여자가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를 따진다.(86쪽)  

홍훈 교수의 <인간을 위한 경제학>(길, 2008)은 제목보다는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란 부제가 더 적합한 책인데, <도덕감정론>에 대해서도 내용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박순성 교수의 <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풀빛, 2003)은 생각 밖으로 알찬 소개서이자 연구서. 스미스의 경제학과 윤리, 혹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관계에 대해서는 7장과 8장, 두 장에 걸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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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2-16 23:26 
    애덤 스미스에 관한 책은 드물지 않게 나와 있고, 그의 <도덕감정론>이 <국부론>만큼 중요하게 간주돼야 한다는 것도 '상식'에 속하지만, 분량이 만만치 않아서 직접 읽어볼 엄두를 못 내는 독자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도메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읽는다>(동아시아, 2010)은 그런 독자들을 위한 책으로 보인다. 이미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니 '좋은 입문서'에 대한 관심으로도 읽어봄직하다는
 
 
펠릭스 2009-11-07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의 기본 미덕은 '공감'인데요. 쌍방의 적정 수준을 유지함으로서
의식이나 물질의 흐름(소통)이 일어난다는 말같습니다. 대학1학년때
경제학개론(고교때 정치경제) 수강후로 오늘 처럼 일상의 경제용어를
공부했습니다. 윤리학과 경제학 문장들은 선문답같아 쉽지 않습니다.

로쟈 2009-11-07 17:27   좋아요 0 | URL
사실 주류 경제학은 '경제공학'이라고 개명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첨단의 '금융공학'처럼). 인간과 삶에 대한 지극히 협소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으니까요. '제몫 찾아주기'가 필요한 듯싶습니다...

[해이] 2009-11-0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사야지 ㅋㅋ

로쟈 2009-11-07 22:01   좋아요 0 | URL
^^

다이조부 2009-11-07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2만원에서 5천원 올랐는데 그렇게 많이 오른건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당시 책값이 비쌌네요.

제가 2001년 대학신입생때 김밥집에서 서빙을 하면 꼴랑 시간당 2000원을 받았는데,

요즘 그런 일을 하면 5000원까지 받을 수 있거든요.

로쟈 2009-11-07 22:01   좋아요 0 | URL
네, 요즘 책값들에 견주면 3만원은 넘어갈 텐데, 재판이라서 그 정도로 매겨진 듯해요. 초판은 정말 비쌌죠. 요즘이라면 4만원대 책이었습니다...

koreack 2009-11-11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공학' 공부하고 있는 박사과정생입니다. 경제학에 대한 그 불편하신 감정은 이해가 갑니다마는.. 지극히 협소한 이해라고 하시면 경제학자들 많이 섭섭하겠군요. 주류(어디까지를 '주류'라고 봐야할지도 모르겠네요. 맑스경제학 하시는 분들에게는 어지간한 비판적 학자도 전부 '주류'로 보일테니...) 경제학의 세상을 보는 시각과 방법론, 현실적 영향력에 관해서는 미국에서도 활발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많은 학자들이 크루그만이 말한 것처럼 현란한 수식을 통해 당연한 사실을 하나 증명해 놓고 그 틀을 세상 전체로 확대하고 때로는 남들이 그렇게 보기를 강요하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리적, 체계적 연구방법과 분석적 시각 자체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또 수리적 틀을 통해 세상을 분석하는 것이 낸 성과와 그 시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래서 다른 학문분야와의 결합이 더욱 가속화되어가는 거겠죠. 오히려 다른 학문 영역을 침범한다고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하시는 분들도 많지 않던가요? ^^ 경제와 인간의 복지, 자유 등에 대한 센의 철학적 논의 역시 의사결정론과 일반균형이론 영역에서 남긴 수리적 분석에 기반하여 나온 것이랍니다. 센의 후기 저작이 아닌 그 논의들만 보셨다면, 역시 "협소하다"는 평을 내리셨을 것 같습니다만. ^^

로쟈 2009-11-08 10:53   좋아요 0 | URL
섭섭해할 경제학자들이 많다면 오히려 다행인데, 정말 그럴지는 의문입니다.^^; 경제공학이란 '비아냥'을 면하기 위해선 경제학의 목적과 용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듯해요. 이번 경제위기에 직면해서도 경제학자들의 무능력이 도마에 오른 적이 있는데, 특히나 한국에서는 경제학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C급 경제학자 우석훈씨의 푸념이기도 하지만...

펠릭스 2009-11-08 12:03   좋아요 0 | URL
자연과학은 통제된 실험을 할 수 있지만 경제학은 경제자체가 우리들 이야기이기(경제할동) 때문에 모형을 만들어 예측하기 쉽지 않을 것같아요. 인간의 뇌, 자연의 기후, 경제의 공통점은 '답이없다'지만 예측성 해설만으로는 쉽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런 연유로 다른 학문과 결합이 가속화될 것같구요. 우리의 현실에 유능하고 겸손한 경제학자와 포용적이며 거시적인 정치가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최근에는
well-being GDP 를 제시한 학자도 있다는데요.

yamoo 2010-07-19 18:30   좋아요 0 | URL
수리적 틀을 통해 세상을 분석하는 성과과 그 시각...인문분야에서 경제학만 그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설득력 있는 깔끔한 설명방식..원츄입니다~ㅎㅎ

노이에자이트 2009-11-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경국은 요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는 글을 많이 쓰더군요.아담 스미스는 탐욕스런 상인들을 그 누구보다도 비판했지요.저는 다카시마 젠야<아담 스미스>가 좋았습니다.문고판에 값도 싸구요.저자는 사람들이 아담 스미스를 기업하는 자유를 이론적으로 다져놓은 인물로 오해하는 것에 대해 바로잡으려고 그 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로쟈 2009-11-08 18:45   좋아요 0 | URL
대개는 하이예크주의자를 자처하는 학자들이죠. 아담 스미스는 좀 특이한 포지션인 거 같습니다. 같은 자유주의라 하더라도...

koreack 2009-11-1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흠.. 또 왔습니다. ㅎㅎ 이거 괜히 잘못 적었다가 욕얻어먹는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사실 로쟈님의 블로그를 즐겨 보고, 선배의 선배님이라서 개인적인 이야기도 몇번 들은 적도 있습니다. ㅋ 그러니 미워하진 말아주시고 귀엽게 봐주시길. ^^
말씀하셨다시피 경제학의 목적과 용도, 성격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거리가 있겠죠.. 저는 현재의 모습에 불만이 있지만, 한편으로 백안시하는 시각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practice로서의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제 생각에는 경제학이 이 측면에 있어서 과도한 기대를 받는 측면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학문 규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지만요) 학문의 성격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 개별 사례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일반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과학의 본질 아니던가요. 베이컨 등등의 시기 정립된 과학의 성격이라는 것도 그러하고요. 물론 모형의 구축과 일반화는 예측을 위한 시도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비판이 "쟤는 왜 경제위기를 예측도 못해?"라는 식으로 이어진다면 모든 학문이 유사한 짐을 짊어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에 구체적인 처방을 내놓으라고, 그렇지 못하니 뜬구름 잡기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변호 대신 자아비판(?)을 해보자면... 경제학을 공부하면 기본적으로 normative하기보단 positive한 면을 배웁니다. 방법론을 엄밀히 한다는 점에서 나쁘게 보지 않지만, 결국 이것이 개별 학자들의 세계관을 고정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세계관과 방법론을 원용한 것까지는 좋은데, 잘못하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꼴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른 중요한 문제점은 경제학계의 에너지가 "보다 정밀한 모델의 구축"과 "경제학적 틀로 구체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많이 쓰인다는 것입니다. 케인즈와 같이 "천재의 시대"가 가고, 아주 작은 것들의 설명 내지 개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 시대의 단면이지요. 저는 이게 틀렸다고는 말할 자신이 없지만, 그만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분명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구조적 담론을 제시하는 (주로 좌파경제학 하시는 분들이지요) 분들에게서는 (수리/계량적 방법을 기반으로 하는 입장에서 보기에) 체계성이 떨어지거나, normative한 부분이 너무 많이 보입니다. 창조적인 시각을 제시하기에는, 학계의 분위기도 그렇고 "직업상" 분위기가 주류나 비주류나 너무 빡빡하죠.
하지만 각각 저는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자들이 반드시 사회의 큰 틀을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어설피 거대담론을 제시하는건 입과 귀만 피로하다고 생각하고요. 임금, 산업, 금융 등 이슈에서 구체적인 기준 하나를 잘 설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도 경제학자들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사회적 자본, 건강 불평등이 갖는 심리적, 문화적 함의 등 우리 사회의 보다 복합적인 측면을 보려는 시도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래봐야 저는 아직 일개 학생이지만) 아직 대안적 시도들은 한계가 많습니다. 단적인 예로 스티글리츠가 MEW를 만든다고 하는데, 이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역사적, 보편적 분석이 가능한 수준까지 가야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네요..
글이 너무 길었는데, 어쨌든 제 말씀은 이런겁니다. 경제위기로 인해 합리성 가정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갑자기 행태경제학에 의존하려는 등의 행동 역시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죠. 그런 움직임은 다른 대안에서도 곧 실망을 맛보게 될겁니다. 비판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들을 발견하는 노력에도 정당한 credit은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미스가 가졌던 혜안을 상당부분 잃은 것은 아쉽지만, 그것을 다시 얻는 방식이 반드시 옛날식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 경제학자들의 몫이겠쬬.
시간이 있으시다면, 크루그만 등과 주류경제학자들의 논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른 것을 떠나 이런 논쟁 자체가 사실 상당히 부럽습니다. ^^
http://www.nytimes.com/2009/09/06/magazine/06Economic-t.html
http://modeledbehavior.com/2009/09/11/john-cochrane-responds-to-paul-krugman-full-text/

로쟈 2009-11-11 20:21   좋아요 0 | URL
네, 자세한 댓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류동민 교수의 <프로메테우스 경제학>을 보니 문제의 지형이 짐작가능했습니다. normative한 맑스주의 경제학도 positive한 설명(수학적 논리에 기초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고 저자는 썼더군요. 거꾸로 이제 positive 위주의 경제학도 어떤 normative를 계획할 수 있는지 보여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