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주에 가장 눈에 띄는 재출간 도서는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비봉출판사, 2009)이다. 지난 1996년에 출간됐다가 절판됐었는데, 액면가는 2만원에서 2만 5천원으로 올랐다. 상대적으로 초판이 얼마나 비쌌던가를 알 수 있다(새삼 적시하는 것은 내가 책을 구입하지 못한 이유이기도 했기 때문). 이번엔 소장도서로 마련해둠직하다(게다가 전면개역판이라고 한다). 리뷰기사를 스크랩해놓는다.  

 

한겨레(09. 11. 07) 철학자’ 애덤 스미스의 역지사지 도덕론 

애덤 스미스(1723~1790·그림)의 가장 유명한 저작은 <국부론>이다. 근대 경제학의 탄생을 알린 저작이기도 하다. 그러나 스미스를 유명인사로 만든 출세작은 <국부론>보다 앞서 집필한 <도덕감정론>(1759)이다. 1996년 한 차례 번역·출판된 바 있는 이 책이 출판사의 전면적인 번역 수정을 거쳐 명료한 문장으로 새롭게 나왔다. 



스미스는 ‘경제학의 아버지’로 불리지만, 그 자신은 경제학자라고 생각해본 적이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경제학이 분과학문으로 독립한 것은 20세기의 일이다. <도덕감정론>으로 명성을 얻었을 때 사람들은 그를 ‘철학자 스미스’라고 불렀다. 스코틀랜드 소도시에서 유복자로 태어난 스미스는 글래스고대학과 케임브리지대학을 나온 뒤 1752년 글래스고대학 도덕철학 교수로 임용됐다. 그 자리는 전 시대에 도덕철학자로 이름을 날린 스미스의 스승 프랜시스 허치슨의 뒤를 이어받은 것이었다. 도덕철학은 오늘날의 사회철학에 해당한다. 스미스는 이 시기에 유창한 강의로 학생들의 사랑을 받았다. 도덕철학자 스미스의 강의가 책으로 열매를 맺은 것이 바로 <도덕감정론>이다.

<도덕감정론>은 <국부론>만큼이나 오해의 안개에 쌓여 있는 저작이다. <국부론>이 인간의 이기심을 찬양하는 저작인 데 반해 <도덕감정론>은 이타심을 강조한 저작이라는 것이 그런 오해의 한 양상이다. <국부론>의 이기심을 <도덕감정론>의 이타심으로 제어하고 교정하려 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국부론>에서 시장원리주의를 설파한 스미스가 그보다 먼저 <도덕감정론>에서 복지국가론·후생경제학을 주창했다는 주장도 나온다. 그러나 이런 식의 이해는 스미스의 사상을 통합적으로 인식하지 못한 데서 오는 오류임이 분명하다.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은 동일한 원리 위에 세워진 중층 건물과도 같은 저작이다. <도덕감정론> 위에 <국부론>이 얹힌 모습인 것이다.

‘도덕감정론’ 하면 도덕심 또는 이타심이 떠오르기 십상인데, 도덕감정을 이타심으로 한정하여 이해한 사람은 스미스의 스승 허치슨이었다. 스미스는 스승의 생각을 비판하고, 이타심뿐만 아니라 이기심도 도덕감정이 될 수 있다고 보았다. 그가 도덕감정의 근거로 제시하는 것은 ‘동감(sympathy·공감) 능력’이다. 사람에게는 다른 사람의 기쁨·슬픔·욕구·분노를 함께 느낄 수 있는 능력이 있다는 것이다. 다른 사람의 감정에 공감할 경우 즐거움을 느끼고 그 감정에 공감하지 않을 경우엔 불쾌함을 느낀다.

스미스는 공감하느냐 공감하지 않느냐를 가르는 기준은 ‘적정성’이라고 말한다. 이타심이라고 해서 꼭 공감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아니다. 자신과 가족을 팽개치고 남을 돕는 행위는 그것이 아무리 이타적이라고 해도 공감을 얻기 어렵다. 마찬가지로 자기 이익을 도모하는 이기적 행위도 그것이 적정한 수준이라면 공감을 불러올 수 있다. 처지를 바꿔 생각해보는 역지사지의 상상력이야말로 공감 능력의 비밀이다. 그렇다면 그 적정성을 어떻게 판단할 것인가. 스미스는 여기서 ‘제3의 공정한 관찰자’를 제시한다. 인간 행위의 경험적 축적 위에서 그런 관찰자를 상정할 수 있으며 사람들 각자의 마음속에도 그런 관찰자가 있다고 보는 것이다. 그 관찰자의 공감을 불러일으킬 수 있으면, 이기심이든 이타심이든 도덕성을 획득했다고 볼 수 있다.

요컨대 스미스가 규명하려고 하는 것은 이기심이 사회적 조화와 질서를 깨뜨리지 않고 개인의 발전과 사회의 발전을 동시에 가져올 수 있는가 하는 물음이다. 스미스는 공감의 원리가 이기심을 조절할 수 있기 때문에 그런 조화와 발전이 가능하다고 본다. 마치 중력의 법칙에 따라 하늘의 행성들이 태양 주위를 질서 있게 운행하듯이, 인간의 이기심도 질서에 위배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도덕감정론>의 이런 규명 위에서 <국부론>의 논의가 펼쳐진다.

그렇다고 해서 스미스가 인간의 이기심을 무조건 찬양하는 것은 아니다. 그는 냉정한 경험적 관찰을 통해 이기심의 강력성을 인정하고, 그 이기심이 적정하게 제어되고 공정하게 관리될 경우 사회적 이익 증진에 도움이 될 수 있다고 보았을 따름이다. 스미스가 활동하던 시대는 매뉴팩처(공장제 수공업) 시대였다. 노동과 자본이 분화되지 않고, 자본가도 다른 노동자들과 함께 일하고 먹고 자고 하던 시대였다. 스미스가 생각한 ‘보이지 않는 손’의 조화와 질서는 소박한 단순상품생산 시대의 목가적 세계상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이론을 노동과 자본이 극단적으로 분화된 현대 독점자본주의·금융자본주의 시대에 곧바로 적용하는 것은 잘못이라고 옮긴이는 말한다. 신자유주의 이론가들이 스미스의 ‘자유방임’ 논리를 자신들의 근거로 끌어들인 것은 시대착오인 셈이다.  

더구나 스미스의 ‘자유방임’ 주장은 그 시대의 상업자본가들의 독점과 특권에 대한 통렬한 비판이었다. 그는 이기심이 제어되지 않고 폭주할 경우에 사회를 무너뜨릴 수 있다고 경고했다. “인애가 없어도 사회는 존속할 수 있지만, 정의가 부재하면 사회는 붕괴한다.” 모든 반칙과 특권에 반대하는 ‘급진적 철학자’가 스미스였던 것이다.(고명섭 기자) 

09. 11. 07.   

P.S. '급진적 철학자'로서 혹은 '윤리학자'로서의 애덤 스미스를 재조명한 책들이 없진 않다. 조나단 와이트의 경제학 소설 <애덤 스미스 구하기>(생각의나무)가 대표적이다. 개인적으론 1998년 노벨경제학상 수상자인 아마티아 센의 <윤리학과 경제학>(한울아카데미, 1999) 덕분에 <도덕감정론>의 의의에 대해서 알 수 있었다(센은 펭귄판 <도덕감정론>의 서문을 쓰고 있기도 하다). 제목은 '윤리학과 경제학'이지만, 센은 경제학의 두 가지 기원으로 '윤리학'과 '공학'을 든다(각각 윤리학적 기원과 계산논리적 기원이다). 경제학이 오늘날과 같이 탈윤리적 성격을 갖게 된 것은 윤리학적 기원에 대한 망각이라고 할 수 있다. '절반의 경제학'이라고 할 수 있을까? 센은 이렇게 지적했다.  

이른바 '현대 경제학의 시조'로 불리는 애덤 스미스는 글라스고 대학의 도덕철학 교수였다. 더구나 경제학의 주제는 오랫동안 윤리학의 한 분야 같은 것이라고 여겨졌다. 케임브리지 대학에서 꽤 최근까지 경제학을 '도덕철학 우등졸업시험'의 한 분야로서 가르치고 있었다는 사실은 경제학의 본질에 대한 전통적인 이해를 보여주는 한 예이다.(17쪽)    

해서 이러한 전통에서 일탈한 현재의 '주류 경제학'은 일종의 '돼먹잖은 경제학'이다(거기에 비한다면 센코노믹스는 좀 '돼먹은 경제학'이겠다). 돈은 많이 벌어서 으스대지만 안하무인이고 근본을 모르는 망나니. 소위 '경제학'에 대해 내가 가진 불편한 느낌의 기원도 그런 데 있다. 고등학교 때 '경제'를 배웠지만, 기억에 <국부론>의 애덤 스미스만이 조금 언급되었을 뿐 <도덕감정론>은 다뤄지지 않았고, 경제학의 윤리학적 기원에 대한 소개도 없었다. 그 때문인지 단 한순간도 경제학을 전공하겠다는 생각은 갖지 않았고, 대학에 들어와서도 경제학은 단 한 과목도 수강하지 않았다. 경제학이 도덕철학의 일부였다는 것만 알았어도 생각을 조금 달리했을 지 모를 일이다...   

P.S.2. 대출도서를 반납하기 위해 동네 도서관에 잠깐 들렀다가 애덤 스미스의 <도덕감정론>에 관한 참고도서를 살펴봤다. 별다른 선택의 여지도 없이 몇 권의 책에서 관련 장을 복사했는데, 일단 제임스 버컨의 <애덤 스미스 경제학의 탄생>(청림출판, 2007)이 전체적인 윤곽을 잡는 데 요긴해 보인다. "<도덕감정론>은 흄과 허치슨, 맨더빌, 샤프츠버리, 로크, 홉스를 거슬러올라가, 17세기 시민전쟁의 정치적, 종교적 소용돌이에 말려드는 도덕적 문제에 대한 영국의 오랜 전통의 절정이자 최후를 장식하는 백조의 노래다."(83쪽)라는 게 서두의 평. 저자가 경제학자가 아니라 영국의 소설가이자 비평가라는 점이 이상하지 않다. 한 대목 더 인용하면,  

이 책의 제목은 철학적 저작의 의도를 정확히 대변해준다. <도덕감정론>은 왜 어떤 행동은 옳고 어떤 행동은 그른가를 따지는 것이 아니라, 외적 권위가 필요 없는 세상에서 어떻게 옳거나 그르다고 느끼게 되는가 하는 문제를 설명하려 한다. 이 책은 인간에게 언제나 옳고 좋은 것을 탐구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경우에 인간이 어떻게 옳고 그른 것에 대한 판단을 내리는가 하는 문제를 탐구한다. '왜 여자가 정숙해야 하는가'가 아니라 '왜 남자는 여자가 정숙해야 한다고 생각하는가'를 따진다.(86쪽)  

홍훈 교수의 <인간을 위한 경제학>(길, 2008)은 제목보다는 '고전으로 읽는 경제사상사'란 부제가 더 적합한 책인데, <도덕감정론>에 대해서도 내용을 잘 정리해주고 있다. 박순성 교수의 <아담 스미스와 자유주의>(풀빛, 2003)은 생각 밖으로 알찬 소개서이자 연구서. 스미스의 경제학과 윤리, 혹은 <도덕감정론>과 <국부론>의 관계에 대해서는 7장과 8장, 두 장에 걸쳐서 자세히 다루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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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애덤 스미스를 다시 읽는다
    from 로쟈의 저공비행 2010-12-16 23:26 
    애덤 스미스에 관한 책은 드물지 않게 나와 있고, 그의 <도덕감정론>이 <국부론>만큼 중요하게 간주돼야 한다는 것도 '상식'에 속하지만, 분량이 만만치 않아서 직접 읽어볼 엄두를 못 내는 독자가 나뿐만은 아닐 것이다. 도메 다쿠오의 <지금 애덤 스미스를 읽는다>(동아시아, 2010)은 그런 독자들을 위한 책으로 보인다. 이미 일본에서는 베스트셀러였다고 하니 '좋은 입문서'에 대한 관심으로도 읽어봄직하다는
 
 
펠릭스 2009-11-07 17: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술의 기본 미덕은 '공감'인데요. 쌍방의 적정 수준을 유지함으로서
의식이나 물질의 흐름(소통)이 일어난다는 말같습니다. 대학1학년때
경제학개론(고교때 정치경제) 수강후로 오늘 처럼 일상의 경제용어를
공부했습니다. 윤리학과 경제학 문장들은 선문답같아 쉽지 않습니다.

로쟈 2009-11-07 17:27   좋아요 0 | URL
사실 주류 경제학은 '경제공학'이라고 개명해야 한다는 생각입니다(첨단의 '금융공학'처럼). 인간과 삶에 대한 지극히 협소한 이해에 근거하고 있으니까요. '제몫 찾아주기'가 필요한 듯싶습니다...

[해이] 2009-11-07 21: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헛 사야지 ㅋㅋ

로쟈 2009-11-07 22:01   좋아요 0 | URL
^^

다이조부 2009-11-07 21: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처음에는 2만원에서 5천원 올랐는데 그렇게 많이 오른건가 싶었는데, 다시 생각해 보니까

당시 책값이 비쌌네요.

제가 2001년 대학신입생때 김밥집에서 서빙을 하면 꼴랑 시간당 2000원을 받았는데,

요즘 그런 일을 하면 5000원까지 받을 수 있거든요.

로쟈 2009-11-07 22:01   좋아요 0 | URL
네, 요즘 책값들에 견주면 3만원은 넘어갈 텐데, 재판이라서 그 정도로 매겨진 듯해요. 초판은 정말 비쌌죠. 요즘이라면 4만원대 책이었습니다...

koreack 2009-11-11 03: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경제공학' 공부하고 있는 박사과정생입니다. 경제학에 대한 그 불편하신 감정은 이해가 갑니다마는.. 지극히 협소한 이해라고 하시면 경제학자들 많이 섭섭하겠군요. 주류(어디까지를 '주류'라고 봐야할지도 모르겠네요. 맑스경제학 하시는 분들에게는 어지간한 비판적 학자도 전부 '주류'로 보일테니...) 경제학의 세상을 보는 시각과 방법론, 현실적 영향력에 관해서는 미국에서도 활발한 갑론을박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저도 그렇고 많은 학자들이 크루그만이 말한 것처럼 현란한 수식을 통해 당연한 사실을 하나 증명해 놓고 그 틀을 세상 전체로 확대하고 때로는 남들이 그렇게 보기를 강요하려는 것을 불편하게 생각합니다. 그러나 수리적, 체계적 연구방법과 분석적 시각 자체가 틀렸다고는 생각하지 않고, 또 수리적 틀을 통해 세상을 분석하는 것이 낸 성과와 그 시각은 결코 무시할 수 없다고 생각됩니다.
어쩌면 그래서 다른 학문분야와의 결합이 더욱 가속화되어가는 거겠죠. 오히려 다른 학문 영역을 침범한다고 "제국주의적"이라는 비판을 하시는 분들도 많지 않던가요? ^^ 경제와 인간의 복지, 자유 등에 대한 센의 철학적 논의 역시 의사결정론과 일반균형이론 영역에서 남긴 수리적 분석에 기반하여 나온 것이랍니다. 센의 후기 저작이 아닌 그 논의들만 보셨다면, 역시 "협소하다"는 평을 내리셨을 것 같습니다만. ^^

로쟈 2009-11-08 10:53   좋아요 0 | URL
섭섭해할 경제학자들이 많다면 오히려 다행인데, 정말 그럴지는 의문입니다.^^; 경제공학이란 '비아냥'을 면하기 위해선 경제학의 목적과 용도에 대한 성찰이 필요할 듯해요. 이번 경제위기에 직면해서도 경제학자들의 무능력이 도마에 오른 적이 있는데, 특히나 한국에서는 경제학자들이 무슨 일을 하는지 궁금할 때가 있습니다. C급 경제학자 우석훈씨의 푸념이기도 하지만...

펠릭스 2009-11-08 12:03   좋아요 0 | URL
자연과학은 통제된 실험을 할 수 있지만 경제학은 경제자체가 우리들 이야기이기(경제할동) 때문에 모형을 만들어 예측하기 쉽지 않을 것같아요. 인간의 뇌, 자연의 기후, 경제의 공통점은 '답이없다'지만 예측성 해설만으로는 쉽지 않을 것같습니다. 그런 연유로 다른 학문과 결합이 가속화될 것같구요. 우리의 현실에 유능하고 겸손한 경제학자와 포용적이며 거시적인 정치가가 필요함을 느낍니다. 최근에는
well-being GDP 를 제시한 학자도 있다는데요.

yamoo 2010-07-19 18:30   좋아요 0 | URL
수리적 틀을 통해 세상을 분석하는 성과과 그 시각...인문분야에서 경제학만 그리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정말 설득력 있는 깔끔한 설명방식..원츄입니다~ㅎㅎ

노이에자이트 2009-11-08 17: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민경국은 요즘 지나치다 싶을 정도로 시장의 자유를 강조하는 글을 많이 쓰더군요.아담 스미스는 탐욕스런 상인들을 그 누구보다도 비판했지요.저는 다카시마 젠야<아담 스미스>가 좋았습니다.문고판에 값도 싸구요.저자는 사람들이 아담 스미스를 기업하는 자유를 이론적으로 다져놓은 인물로 오해하는 것에 대해 바로잡으려고 그 책을 썼다고 말했습니다.

로쟈 2009-11-08 18:45   좋아요 0 | URL
대개는 하이예크주의자를 자처하는 학자들이죠. 아담 스미스는 좀 특이한 포지션인 거 같습니다. 같은 자유주의라 하더라도...

koreack 2009-11-11 0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으흠.. 또 왔습니다. ㅎㅎ 이거 괜히 잘못 적었다가 욕얻어먹는게 아닌가 싶긴 하지만... 사실 로쟈님의 블로그를 즐겨 보고, 선배의 선배님이라서 개인적인 이야기도 몇번 들은 적도 있습니다. ㅋ 그러니 미워하진 말아주시고 귀엽게 봐주시길. ^^
말씀하셨다시피 경제학의 목적과 용도, 성격에 대해서도 이야기할 거리가 있겠죠.. 저는 현재의 모습에 불만이 있지만, 한편으로 백안시하는 시각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practice로서의 성격을 지나치게 강조하다보면 (제 생각에는 경제학이 이 측면에 있어서 과도한 기대를 받는 측면이 분명 있다고 생각합니다. 큰 학문 규모에 따른 당연한 귀결인지도 모르지만요) 학문의 성격 자체에 대한 회의까지 도달할 수밖에 없습니다. 구체적 개별 사례를 설명하는 것보다는 일반적 원리를 설명하는 것이 과학의 본질 아니던가요. 베이컨 등등의 시기 정립된 과학의 성격이라는 것도 그러하고요. 물론 모형의 구축과 일반화는 예측을 위한 시도입니다. 하지만 그 결과에 대한 비판이 "쟤는 왜 경제위기를 예측도 못해?"라는 식으로 이어진다면 모든 학문이 유사한 짐을 짊어질 수 있을거라고 생각합니다. 인문학에 구체적인 처방을 내놓으라고, 그렇지 못하니 뜬구름 잡기라고 한다면 그것 역시 공정하지 못한 것 아니겠습니까?
이제 변호 대신 자아비판(?)을 해보자면... 경제학을 공부하면 기본적으로 normative하기보단 positive한 면을 배웁니다. 방법론을 엄밀히 한다는 점에서 나쁘게 보지 않지만, 결국 이것이 개별 학자들의 세계관을 고정시키는 측면이 있습니다. 물리학적인 세계관과 방법론을 원용한 것까지는 좋은데, 잘못하면 프로크루테스의 침대 꼴이 되기 십상이라는 것이지요. 다른 중요한 문제점은 경제학계의 에너지가 "보다 정밀한 모델의 구축"과 "경제학적 틀로 구체적 현상을 설명"하는데 많이 쓰인다는 것입니다. 케인즈와 같이 "천재의 시대"가 가고, 아주 작은 것들의 설명 내지 개선을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여겨진 시대의 단면이지요. 저는 이게 틀렸다고는 말할 자신이 없지만, 그만큼 대다수의 사람들에게 명쾌한 답을 주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고, 이것은 분명 시정되어야 할 부분이라고 생각합니다. 반면 구조적 담론을 제시하는 (주로 좌파경제학 하시는 분들이지요) 분들에게서는 (수리/계량적 방법을 기반으로 하는 입장에서 보기에) 체계성이 떨어지거나, normative한 부분이 너무 많이 보입니다. 창조적인 시각을 제시하기에는, 학계의 분위기도 그렇고 "직업상" 분위기가 주류나 비주류나 너무 빡빡하죠.
하지만 각각 저는 기여하는 부분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경제학자들이 반드시 사회의 큰 틀을 설명해야 할 의무는 없다고 저는 생각합니다. 오히려 어설피 거대담론을 제시하는건 입과 귀만 피로하다고 생각하고요. 임금, 산업, 금융 등 이슈에서 구체적인 기준 하나를 잘 설정하는데 도움을 주는 것도 경제학자들이 할 수 있는 매우 중요한 일이라 생각합니다. 또한 사회적 자본, 건강 불평등이 갖는 심리적, 문화적 함의 등 우리 사회의 보다 복합적인 측면을 보려는 시도들이 계속 증가하고 있습니다. (이래봐야 저는 아직 일개 학생이지만) 아직 대안적 시도들은 한계가 많습니다. 단적인 예로 스티글리츠가 MEW를 만든다고 하는데, 이것이 의미가 있으려면 역사적, 보편적 분석이 가능한 수준까지 가야 하는데 어느 정도까지 가능할지는 모르겠네요..
글이 너무 길었는데, 어쨌든 제 말씀은 이런겁니다. 경제위기로 인해 합리성 가정이 송두리째 날아가고 갑자기 행태경제학에 의존하려는 등의 행동 역시 그다지 생산적이지는 않다는 것이죠. 그런 움직임은 다른 대안에서도 곧 실망을 맛보게 될겁니다. 비판은 활발하게 이루어져야 하지만, "당연하게 여겨지는" 사실들을 발견하는 노력에도 정당한 credit은 가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스미스가 가졌던 혜안을 상당부분 잃은 것은 아쉽지만, 그것을 다시 얻는 방식이 반드시 옛날식이어야 한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지금 경제학자들의 몫이겠쬬.
시간이 있으시다면, 크루그만 등과 주류경제학자들의 논쟁을 살펴보시기 바랍니다. 저는 다른 것을 떠나 이런 논쟁 자체가 사실 상당히 부럽습니다. ^^
http://www.nytimes.com/2009/09/06/magazine/06Economic-t.html
http://modeledbehavior.com/2009/09/11/john-cochrane-responds-to-paul-krugman-full-text/

로쟈 2009-11-11 20:21   좋아요 0 | URL
네, 자세한 댓글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류동민 교수의 <프로메테우스 경제학>을 보니 문제의 지형이 짐작가능했습니다. normative한 맑스주의 경제학도 positive한 설명(수학적 논리에 기초한 설명)을 제시할 수 있다는 걸 보여주려고 한다고 저자는 썼더군요. 거꾸로 이제 positive 위주의 경제학도 어떤 normative를 계획할 수 있는지 보여주면 좋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