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겨레에 '고금변증설'이란 꼭지가 있다. 오늘에야 알았는데, 강명관 교수의 칼럼란이다. 주자학과 돈에 대한 이번주 꼭지를 '사회적 독서'에 옮겨놓는다. 말미의 소회처럼 나도 주기적으로 우울하기에.

한겨레(08. 01. 05) 조선엔 ‘주자학’ 현대엔 ‘돈’이 교주님

1653년 윤7월 21일이었다. 송시열과 유계, 윤선거는 충청도 강경의 황산서원에 모였다. 송시열이 연기에서 배를 타고 강물을 따라 내려가 유계를 방문하고 여러 사람을 초청해 뱃놀이를 했는데, 시도 짓고 술도 마시며 즐거운 하루를 보냈다.

사건은 그날 밤에 일어났다. 황산서원의 재실에서 하룻밤을 묵게 되었는데, 윤휴의 학문 성격을 어떻게 볼 것인가로 이야기가 번졌다. 송시열은 윤휴가 주자의 경전 해석에 반기를 든 이단이라 못을 박았다. 윤휴는 송시열만큼이나 주자학에 정통한 사람이었다. 또 정통했기 때문에 주자의 해석에 문제가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윤휴의 학설은 곧 성리학의 발전인 셈이다. 그는 단지 경전의 해석에 있어 주자와는 다른 주장을 내세웠을 따름이다. 문제는 송시열의 경직된 주자 옹호였다. 송시열은 윤선거에게 윤휴가 이단이라면서 계속 그와 관계를 끊으라고 다그쳐 왔지만, 윤선거는 그럴 마음이 없었다.

그날 밤 송시열은 마음을 독하게 먹었다. “윤휴는 이단이다. 나의 말에 동의하고, 윤휴와 관계를 끊어라!” 윤선거는 나름대로 생각이 있고, 또 박절한 사람이 아니었나 보다. 송시열의 말을 듣고 이내 수긍하지 않는다. 송시열의 말이 더 거세게 나갔다. “하늘이 공자를 이어 주자를 세상에 낸 것은, 실로 만세의 도통을 위한 것이다. 주자 이후 드러나지 않은 이치가 한 가지도 없고, 밝혀지지 아니한 글이 한 구절도 없다. 그런데 윤휴는 감히 자기 견해를 내세우며 제 하고 싶은 소리를 거침없이 내뱉는다. 그대는 성혼 선생의 외손이면서도 도리어 그의 편을 들어 주자에게 반기를 드는 세력의 졸개가 되고 있으니, 무엇 때문인가?”

송시열에 의하면 모든 진리는 주자에 의해 밝혀졌기에 더는 진리에 대해 시비하거나 연구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대목을 읽으면서 나는 늘 궁금했다. 송시열이 살아 있다면, 그에게 질문할 수 있다면 묻고 싶다. 모든 진리가 주자에 의해 완전히 밝혀졌다는 그 말이 요지부동의 진실일 수 있는 근거는 어디에 있는가라고 말이다.

사실 진리가 주자에 의해 완전히 밝혀졌다는 말은, 그 말을 하는 자신, 곧 주자의 말을 진리라 설하는 자신의 말이 곧 진리라는 말이다. 어찌 좀 수상하다. 어쨌거나 송시열의 호된 다그침에 윤선거는 윤휴를 비난하는 말을 몇 마디 내뱉었다. 한데 내심 승복하지 않았기에 조금만 더 깊은 이야기를 하면,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항변했다. “의리란 천하의 공적인 것이다. 지금 윤휴에게 감히 말을 못하도록 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 주자 이후에는 딴 말을 할 수 없다면, 진순과 진역과 같은 학자들은 어찌하여 경전에 대해 이런저런 주장을 할 수 있었단 말인가”

‘의리란 천하의 공적인 것’이란 말은 진리는 천하의 모든 사람이 공평하게 참여해 연구할 수 있는 학문적 주제란 말이다. 이 말은 윤휴의 주장이기도 했다. 윤휴는 일찍이 “주자만 천하의 이치를 알고 나는 모른단 말인가?”라고 말한 바 있었던 것이다. 사실 말이야 맞지 않은가.

윤선거의 항변에 송시열이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지만 근거 없는 수사에 지나지 않는다. 송시열은 황산서원의 모임 뒤에도 윤선거에게 편지를 보내 윤휴와 단절할 것을 줄기차게 요구했다. 그 이면에는 아마 윤휴에 대한 열등감도 있었을 것이다. 더욱이 윤선거는 송시열에게 “윤휴는 너무 뛰어난 인물이다” “그대가 윤휴를 너무 겁내고 있는 것이다”는 등의 말을 하지 않았던가. 송시열이란 이름에 접할 때마다 나는 늘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에 나오는 호르헤를 떠올린다. 다른 수도사가 이단의 서적에 접근하지 못하도록 살인도 서슴지 않았던 그 늙은 수도사 말이다.

황산서원에서 모임이 있었던 그해(1653)는 조선 건국(1392)으로부터 거의 2세기 반 뒤였다. 조선은 그로부터 2세기 반이 지나 망한다. 말하자면 그해는 조선조의 꼭 중간이다. 나는 그해 그 모임이 조선 역사를 전후로 가르는 사건이라 생각한다. 송시열의 발언 이후 주자학은 조선에서 절대 진리가 되었다. 조선 전기의 다양한 문화와 사유가 무너지고 성리학의 이념적 독재가 시작되었던 것이다. 그것은 곧 사회와 국가가 쇠락하기 시작한다는 것을 의미했다.

인간을 해방시키는 것이 진리다. 하지만 진리가 독점적인 절대진리가 되는 순간, 그것은 인간에게 족쇄를 채우고 인간을 압살한다. 호르헤가 지키고자 했던 기독교가 진리의 이름으로 인간을 억압했던 것처럼, 성리학 역시 같은 구실을 하다가 역사에서 퇴장했음을 우리는 익히 알고 있다. 기독교의 신이 진리가 아닌 지금, 성리학의 진리가 더는 진리가 아닌 현재, 진리란 이제 없는가. 혹여 그 진리를 대신하고 있는 것은 없는가. 상대주의가 편만한 세상이니, 진리는 개인에 따라 다르고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어리석은 나의 생각을 말하자면 결코 아니다. 인간 행위의 준칙이 되는, 인간의 모든 소원을 들어주는, 그러기에 모든 사람이 숭배하는 유일한 진리는 지금도 존재한다. 바로 ‘돈’이다. 그것은 다른 말로 하여 ‘화폐’이고 ‘자본’이다. ‘돈’ ‘화폐’ ‘자본’은 이 종교의 삼일일체이고, ‘유전천국(有錢天國)’ ‘무전지옥(無錢地獄)’은 그 교리의 핵심이다. 인간은 이제 더는 다른 것으로 평가되지 않는다. 한 인간의 가치는 그가 갖고 있는 화폐량과, 그 화폐에 의한 소비능력으로 평가될 뿐, 윤리적 실천, 진리를 향한 기원 따위는 서푼어치의 값도 없다. 우리는 물신교라는 신흥종교의 충실한 교인일 뿐이다. 대통령 선거가 끝났다. 나는 진보와 보수를 막론하고, 오직 물신교를 철저히 섬기겠다는 공약만을 보았다. 정말 우울하다.(강명관/부산대 교수·한문학)

08. 01. 05.

P.S. 같은 지면에 실린 기사 '도덕성이 밥먹여 주냐'(http://www.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261055.html)도 같이 읽어둠 직하다. 현단계 우리 사회의 자화상이 아닌가 싶다(누가 도덕성을 담지했었는지는 의문이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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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8-01-05 12:24   좋아요 0 | URL
그러고 보니 두 사람이 정말 닮았네요. 무섭고 비겁한 것두요.

로쟈 2008-01-05 18:27   좋아요 0 | URL
송시열과 호르헤 말씀이시죠. 물신교를 대체할 무엇이 현실화될 수 있을지 좀 비관적이네요...
 

<그리스 비극>에 대한 서평을 옮겨오기 위해서 교수신문 사이트에 들어갔다가 챙기게 된 기사는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에 대한 '확대서평'이다(확대서평? 아마도 자세한 서평이란 취지인 듯하다). 필자는 지난달에 '노무현과 탈정치 리더십'(http://blog.aladin.co.kr/mramor/1751979)이란 페이퍼를 올리면서 알게 된 안병진 교수다. 그는 '합의주의적 자유주의에 대한 비판'으로 무페의 이론적 입장을 정리하고 지난 대선 결과와 연관짓고 있다. 초점이 민주주의가 아닌 자유주의에만 너무 맞춰진 게 아닌가 싶지만(게다가 국역본에 대한 서평이라고 하기는 어렵다) 여하튼 자료로 스크랩해놓는다.

교수신문(07. 12. 31) 헤이! 리버럴리스트, 상상력의 한계를 넘어서시지

무페의 책 서평 청탁 전화를 받으면서 번역의 적절한 타이밍에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왜냐하면 이미 1993년에 출간된 이 철학서적은 바로 2007년 한국의 선거 과정 및 더 나아가서는 참여정부 5년 실패의 핵심을 마치 예언하듯이 시사해주고 있기 때문이다. 2007년 대통령 선거의 특징에 대해 많은 평론가들이 지적하는 것을 한 단어로 요약한다면 ‘ABR’(Anything But Roh) 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사실 다수의 유권자들이 노무현 정부를 심판하는 이른바 ‘회고적 투표’ 양태를 보였다는 점에서 이는 그리 틀린 평가는 아닐 것이다.

하지만 흥미로운 것은 이명박 후보가 당선될 수 있었던 것은 그가 2007년의 노무현이었기 때문이라는 사실이다. 이는 단지 그가 상고출신이거나 자수성가 스타일의 공통점을 가지고 있음만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다. 보다 본질적으로는 그가 여의도 바깥의 아웃사이더로서 한나라당을 접수해, 이후 열린우리당 혹은 386으로 상징되는 ‘여의도 특권층’과 선명한 대립각을 형성했다는 의미에서 그러하다. 이러한 관점이 잘 농축된 ‘욕쟁이 할머니’ 등의 일련의 정치광고들은 2002년 노무현 후보의 ‘눈물’ 광고만큼이나 감동적이었다.

1993년 출간된 책이 2007년을 예언하다
반면 이른바 개혁파의 대표주자인 정동영 후보의 ‘가족 행복 시대’나 ‘개성 동영’은 대립각이 불분명하고 분노를 조직하지 못하는 ‘합의주의적 정치’ 방식의 구현이었다. 그는 이후 뒤늦게 전투적인 리버럴인 문국현 후보의 ‘진짜 경제 대 가짜 경제’ 프레임을 차용했지만 어울리지 않은 옷처럼 어색한 캠페인에 그치고 말았다. 주목해야 할 것은 정동영 후보의 이러한 미적지근한 합의주의적 정치는 어떤 측면에서는 그간 5년간 노무현 정부의 부분적 특성을 징후적으로 드러낸 것에 불과하다는 사실이다.



노무현 정부 초기에 필자가 경악했던 것은 대통령의 대화와 타협의 정치에 대한 천진난만한 기대와 발상이었다. 이는 이후 합의주의적 관점이 강한 울리히 벡에 대한 대통령의 열광, 합의주의 기대의 절정으로서 대연정 프로젝트로 나타났다. 반면에 그 강요된 합의주의적 정치의 틈새를 뚫고 홍준표 의원의 부동산 정책 같은 보수적 포퓰리즘이 득세한 바 있다. 

바로 위의 정치지형이 무페가 이 책에서 핵심적으로 고민하는 문제의식이다. 무페는 하버마스적인 합의의 정치를 꿈꾸었던 노 대통령이나 정책에서 정치의 적출 수술을 꿈꾸는 매니페스토 운동을 비웃기나 하듯 정치적인 것에서 적대성은 영원히 제거가 불가능한 존재조건임을 강조한다. 그의 문제의식이 빛나는 것은 놀랍게도 파시즘의 이론가 슈미트의 인생에 대한 비관적 통찰을 회피하지 않고 수용하면서도 이를 역으로 자유주의 정치의 활력소로 승화시키고자 하는 점 때문이다. 그에게 정치의 진정한 역할은 이런 적대적 힘들 간의 헤게모니 투쟁을 자유주의 정치의 틀 자체를 붕괴시키지 않는 활력 있는 ‘경합적 민주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이다.

여기서 급진 민주주의자인 그의 자유주의 틀에 대한  존중이 많은 이들을 혼돈스럽게 할 수 있을 것이다. 특히 자유주의가 때로는 모욕적으로까지 들릴 수도 있는 한국의 기이한 맥락에서는 더욱 그러하다. 예를 들어 필자는 한 학술회의에서 참여정부를 자유주의적이라고 지적했다가 한 정부인사가 보수적 집단으로 매도라도 당한 듯이 정색을 하고 항의를 해서 당황한 적이 있었다. 하지만 급진적 민주주의자인 무페조차 스스로 자유주의자임을 자랑스럽게 생각한다. 그는 다만 자유주의의 경계를 부단히 넓히는 혁신의 관점에서 자유주의를 수용하고 있다. 그러하기에 더 급진적인 스펙트럼의 지젝 같은 학자는 무페의 시도가 자유주의의 헤게모니에 결국 포섭된다는 의구심을 표시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자유주의의 스펙트럼 넓히기 시도는 자유주의에 대한 제한된 상상력에 갇혀있는 서구나 한국의 자유주의나 좌파 정치진영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크다. 

무페가 하버마스나 롤즈 등의 합의주의적 정치관에 의구심을 표시하는 것은 그가 대화와 타협 자체를 부정하기 때문은 아니다. 단지 그는 집단적 정체성간의 투쟁과, 사실은 냉정한 배제에 기초한 ‘구성된 합의’를 마치 ‘포괄적인 합리적 합의’로 포장하려는 관점의 허구성을 지적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러한 합리주의적 탈정치관의 지배는 의도하지 않는 부작용을 양산한다는 점이 무페의 중요한 통찰이다. 왜냐하면 이들 탈정치적 관점은 적대적 힘들을 건강한 방식으로 표출시킬 통로를 제시하기보다는 합의주의적 외관 하에 회피하고 억눌러 결과적으로는 의도와 정반대로 다양한 근본주의적 정체성의 정치를 강화시키기 때문이다. 무페는 현재 서구에서 예외라기보다는 흔한 현상으로 등장하고 있는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의 만연을 그 대표적 징후로 들고 있다.



합의주의적 자유주의에 비판적
우익 포퓰리즘이나 파시즘은 지젝의 표현처럼 단조롭고 무기력한 합의주의적 자유주의 정치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향락’(jouissance)을 시민들에게 제공한다는 점에서 비록 뒤틀린 형태이지만 어쨌든 정치의 본래적 힘을 잘 이해하는 담론이라 할 수 있다. 반면에 무페는 이 책에서 자유주의 이론들이 대중적 욕망에 근거한 파시즘의 현상을 단지 병리적인 예외로 협소하게 이해하고 있는 것을 정치의 본질에 대한 몰이해에서 기인하는 것으로 보고 있다.

무페의 이론은 개인주의적이고 합리주의적인 자유주의 이론에 대해서만 의미 있는 비판을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서구와 한국에서 그 대안으로서 인기를 끌기 시작하는 공동체주의 이론에 대해서도 의미를 제공한다. 즉 미국의 에치오니의 공동체주의 운동이나 한국의 공동체 자유주의 운동은 모두의 합의를 선험적으로 전제한 특정한 공동선의 관념을 주창한다.

하지만 무페가 보기에 이는 경합적 민주주의의 원리를 이해하고 있지 못한 탈정치적 관점의 변종들이다. 반대로 그는 선험적 공동선의 존재 대신에 상호 헤게모니의 충돌 속에서 일시적으로 우위를 점하는 경향에 의해 ‘갈등적 합의’(conflictual consensus)를 이루고, 이는 곧 부단히 도전받아 새로운 갈등적 합의로 이어지는 민주주의적 과정을 중시한다. 다시 말해 그에게 있어 공동선이란 부단히 추구하지만 “결코 도달할 수 없는 하나의 소실점”에 불과하다.

그의 이러한 관점은 최근 한국에서도 주목받기 시작하는 진보적 공화주의 철학의 공공선 개념과 수렴될 수 있는 지점이다. 호노한 등의 현대적 공화주의 이론은 공동체주의나 전통적인 시민공화주의와 달리 공동선의 선험적 규정이 아닌 민주적 구성을 주장하고 있기 때문이다. 단 호노한은 무페의 구성적 외부의 두려움에 대항하는 시민 공동체의 문제의식에서 한 발 더 나아가, 상호 의존된 시민 간의 동료관계 같은 보다 포괄적 규정으로 한 발 더 이론적으로 진전하고 있다.

결국 이 책에서 무페의 자유주의에 대한 고민들은 서구나 한국에서 자유주의의 새로운 이론적, 실천적 혁신을 풍부하게 고민할 수 있는 무기들을 제공해준다. 특히 최근 자유주의 정치진영이 선거에서 참패한 한국의 맥락은 더 큰 적실성을 가진다. 현실 자유주의의 위기가 역설적으로는 자유주의 사상의 이론적, 실천적 혁신의 장기적 계기가 될 수 있다. 더구나 탈정치적인 CEO 정치론의 지배력이 갈수록 커지는 한국의 상황은 새로운 이론적 고민의 과제를 던져준다. 무페의 책은 그 성찰의 여정으로의 좋은 입구가 될 수 있을 것이다.(안병진/ 경희 사이버대·정치학)

08. 01. 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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섬나무 2008-01-02 16:20   좋아요 0 | URL
아래 홍기빈 박사의 칼럼과 더불어 새 해를 맞는 포스트로써 적절해보입니다. 어떤 방향타처럼 말입니다. 변함없이 자리를 지키고 계신 로쟈님께도 2008년이 좋은 한 해 되시길 빌어드립니다.

로쟈 2008-01-02 17:50   좋아요 0 | URL
네, 섬나무님도 새해 복많이 받으시길...

krinein 2008-01-03 09:52   좋아요 0 | URL
글 가져갑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8-01-03 11:22   좋아요 0 | URL
네, 새해 복많이 받으세요.^^
 

해가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책읽는 습관까지 바뀌는 건 아니어서 여전히 몇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다. 어느 한권을 집중해서 읽는 것보다 좋은 습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사정상(혹은 필요상) 여러 권의 책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최근의 발견이라 할 만한 책이지만('한비자의 발견'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책만 읽을 수는 없어서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에서도 몇 페이지, 그리고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서도 몇 페이지를 읽는다(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룰 예정이다).

무페의 책은 어제 이번주 '시사IN'에 실린 기사 '최장집 교수의 대선 후 진단'("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를 읽은 탓에 다시 생각이 났는지도 모른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7). 어제 귀가길에 최장집 교수 등의 <어떤 민주주의인가>(후마니타스, 2007) 를 찾았지만 이젠 어지간한 서점들에서는 구하는 책을 찾을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오늘에야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 등과 함께 주문했다.

 

 

 


나는 시간착오적인 기대이지만, <어떤 민주주의인가> 같은 최장집 교수의 일련의 책들과 <한비자, 권력의 기술> 같은 책을 5년전쯤에 노대통령이 미리 숙독할 수 있었더라면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란 생각마저 든다(나중에 역사적 평가가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참여정부의 개혁이란 건 결국 실패한 것 아닌가).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다른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현 정부의 '정실주의 인사'니 '코드 인사'니 하는 걸 한비자라면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뛰어난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다른 사람이 나를 애정으로 대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지, 다른 사람이 애정을 베풀어 나를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애정으로써 나를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는 자는 위태로우며, 내가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방법에 기대는 자는 안전하다."(<한비자, 권력의 기술>, 160쪽에서 재인용)

저자가 이 대목에 대해서 이런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리더는 다른 사람의 충성을 기대하는 이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충성을 다 바친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지겟작대기나 똥장군도 왕 노릇할 수 있다. 모든 일이 충성스러운 신화와 관료조직에 의해 완벽하게 돌아가는데 리더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리더는 전혀 충성스럽지 않은 이들을 데리고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크게 부족한 것은 한비자의 이런 냉철한 시각이다. 지도자가 자신에 대한 '충성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들어 쓸 때는 최선의 인재를 발탁할 수 없다. 신하 또는 부하의 충성을 기대하지 않을 때, 리더는 되레 사람을 능력 본위로 바라보고, 능력 본위의 인사를 할 수 있다. 자신과 친한 사람,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 같은 사람을 등용하는 인사는 저잣거리의 필부도 할 수 있는 인사다."(160-1쪽)

 

 

 

 

저자가 한비자와 묵자의 말을 풀이하면서 또 이렇게 덧붙인다: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들만으로 조직을 구성하는 건, 그가 이끄는 조직을 돌돌돌 흐르는 시냇물이나 타닥타닥 타는 작은 모닥불 수준으로 만드는 일이다. 광야는 바위와 흙과 모래와 먼지와 바람과 티끌과 나무와 풀과 숲을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에 광야인 것이며, 바다는 모든 개울과 내와 강의 흙탕물과 폭우가 씻어 온 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다인 것이다."(164-5쪽) 정치인 노무현은 결국 노사모의 탁월한 리더였을 뿐이라는 걸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이번 대선결과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평가 인터뷰에 이어서 실린 시사IN의 정치면 기사는 흥미롭게도 이명박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인선을 주된 화제로 삼은 것인데, 이에 대한 기자의 분석은 이렇다.

"이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은 전임 대통령들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한국 정치사에서 최대 라이벌로 통하는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인사 스타일 면에서도 정반대였다. YS는 마음에 둔 인사라도 언론에 사전 노출되면 취소해버리는 '깜짝쇼'를 즐겼다.(...) 반면 DJ는 언론의 하마평을 중시했다. 측근이나 하마평에 오른 이들은 가급적 언론에 거명되게 하려고 애썼고, 이 때문에 '언론 검증'이라는 유행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직 두 사람에 비하면 시스템주의자였다.(...) '국민 참여'라는 이름으로 여론의 천거를 받은 점도 노무현식 인사의 특징이었다."

"이명박 당선자는 스타일상 양김보다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한 면이 좀더 많다. 자기 판단을 믿으며, 한번 맡기면 주의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당선자는 도덕성이나 정치적 신념, 역사적 평가 같은 가치 기준보다는 실무 능력을 최우선으로 친다.(...) 일로 평가하고 일을 잘하면 다음 일을 주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 당선자 주변에는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평생을 바친 가신도, 정치적 동지도 없다. 서로 쓰고 쓰이는, 그야말로 '용인(用人)' 관계다." 그리고 이런 점이 "새로운 정치 실험일 수는 있지만, 자칫 위태로울 수 있다"고 한 한나라당 의원은 지적했다 한다.

 

 

 

 

또 한가지 특징적인 것이라면 "10년 이상 인연을 맺은 참모가 거의 없"는 상황에다가 김유찬, 김경준 두 측근에게 배신을 당한 전력이 있어서 이 당선자에게 '배신 콤플렉스'까지 있다는 점. 경험적으로 이 'CEO형 정치인'은 "애사심과 충성심을 논하지 말라"는 한비자식의 인사관을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에 내가 유일하게 기대하는 건 이러한 용인술 혹은 인사 스타일의 효과이다(고려대 인맥이 대거 움직일 거라는 소문은 나돌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측근정치와 가신정치로부터 탈피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

다시 <한비자, 권력의 기술>의 저자의 말을 옮기면, "이렇게 믿을 놈이 하나도 없는 상황, 어떤 놈이 진짜 충신인지 간신인지 모르겠는 상황, 누가 이중 첩자인지 어떤 연놈이 산업스파이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기업체의 리더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한비자의 답은 간명하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칠 것을 기대하지 마라. 대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그것은 신하들이 또는 부하들이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라는 것이다."(159-60쪽)

   

이명박 리더십이 과연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이 될 것인지는 다시 5년후에 판단할 수 있을 테지만 적어도 '자폐적 정실주의'(강준만)의 그늘에서는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당선자 자신이나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희망사항을 피력하면서 냉정하게 지난 대선에 대한 평가 두 가지를 인용한다.

먼저 최장집 교수와 함께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공저한 박상훈 박사: "우리 유권자들, 결코 보수적이지 않다. 이명박 정부를 불러들인 것은 노무현 정부다. 민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와 성장주의라는 나쁜 조합을 만들고 정당화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대선 결과가 큰 정치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상당수가 추구한 것이 '신자유주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드러났다. 하층 배제적인, 중산층 위주의 민주주의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새로운 보수적 민주파의 형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민주파 내부의 기득권층이다. 보통 사람들은 노무현 정부에서 특별히 혜택받은 것이 없는데 왜 정권 교체에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가."(시사IN 인터뷰)

그리고 한겨레21에 실린 홍기빈 박사의 칼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니 희망찬 새해를 시작해봐야겠다...

한겨레21(07. 12. 27)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NEVER SAY DIE. 죽는 소리 마라. 당신 12월19일 저녁에 술 마셨는가? 국민들 원망했는가? 대한민국이 실망스러운가? 한국의 운명이 어찌될꼬 하면서 <중경삼림>의 진청우(금성무)처럼 애상에 젖었는가? 혹시, 이민갈까 하는 소리까지 했는가? 

온갖 감정적, 논리적 호르몬의 막가는 분출을 잠깐 누르고 돌아보자. 5년 전에는 ‘노란 바람’이 있었다. 10년 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있었고, 이회창씨가 김영삼 허수아비를 불사르는 진풍경이 있었다. 그리고 15년 전에는 민자당 합당의 사생아로 나온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년 전에는 온 국민이 달려들어 물과 불에 목숨을 잃어가며 만들어준 절체절명의 ‘어시스트’를 김씨 성 가진 두 양반이 죽을 쑤어 개를 준 바 있다. 그래,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버텼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007이든 747이든 대통령이 된들 별일 있겠는가. 너무 걱정하시는 것은 좀 쓸데없이 간장만 혹사하는 게 아닐까.



나태와 안일을 털어버릴 때
아니다. 근거가 있다.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한다. 50% 더하기 13% 정도가 한목소리가 되어 “꺼져라, 진보 개혁!” 하고 외친 셈이 아닌가. 이런 정도의 압도적인 숫자가 대선에 나온 적이 있었는가. 그래서 두렵다. ‘우리’는 이제 왕따가 되었고,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참에 한 큐에 다 쓸어버리자고 막갈 기세다. 이 정도라면 지난 20년간의 파란만장한 한국 정치에서도 보지 못한 초유의 사태다. 이제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까. 나는 또 어디로 갈까. 그러니 어찌 취하지 아니하리오….

근데 잠깐 물어보자. 노무현 정권이 이라크 파병에 대연정 운운할 때 당신은 무얼 했는가? 김대중 정권이 IMF 핑계로 사방을 마구 ‘잘라’댈 때 얼마나 몸으로 버텼는가? 김영삼 정권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한다고 나댈 때는 뭐라고 할 생각이나마 했던가? 우리는 그저 코스닥에 열광했다가 부동산에 열중했다가 중국 펀드로 몰려갔다가 우리 애들 특목고 못 들어갈까봐 핏대를 올리며 살지 않았나? 그러면서 비정규직을 무시하고 시민운동을 정권의 앞잡이로 매도하며 혼자 고고한 듯 떠들지 않았는가? 그런 ‘호세월’이 얼마나 가기를 기대했던가? 이런 날이 올 줄 정말 몰랐나?

그래서 말인데, 정말 잘됐다. 이제 우리는 지난 십 몇 년간의 온갖 나태와 관성과 안일을 털어버릴 준비를 할 기회를 만났다. 흙 묻은 운동화를 털고, 잊어버릴 뻔한 소주병 쑤시는 법을 기억해내고, 보도블록을 어떻게 쓰다듬어줘야 해체되는지도 다시 떠올릴 때가 되었다. 진짜 상대를 만났다. 박근혜나 이회창이 되었다면 ‘독재자의 딸’ 어쩌고 ‘차떼기’가 어쩌고를 안주 삼아서 또 5년을 헛되이 보냈을 것이다. 정동영이 되었으면 ‘좌파 신자유주의’를 논하며 또 시대의 아이러니를 핑계 삼아 담배와 술만 작살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의 새 대통령은 돈을 알고 비즈니스를 알고 5년·10년짜리 계획을 세울 줄 알며, 만인을 ‘성공시대’로 몰아칠 줄 아는 분이다. ‘최선진 금융기법’도 알고 한반도를 쭉 째서 물을 흘릴 계획도 세우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본 축적과 경제성장률로 연결되는지를 또 아는 분이다. 한마디로, 이 땅에 꼭 맞는 ‘한국형 신자유주의’ 파라다이스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할 실행력을 가진 분으로 보인다.

5년 동안 우리는 무척 바쁠 것
나태와 안일에 젖은 우리 시민들을 위해 이보다 더 훌륭한 파트너가 어디 있을까. 당신, 지난 몇 년 혹은 몇십 년간의 우리의 늘어져 있던 삶이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인 줄 인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되짚어 나를 너를 우리 전체를 함께 새로 젊게 만들 에너지를 아직 느끼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서울 게 무언가. 오히려 이렇게 말하자. 이건 최고의 기회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만세. ‘삶의 허무와 권태’ 따위는 우리에게 없을 것이다. 최소한 5년간 우리는 살아남으랴 개개랴 어쩌면 또 한편으로 싸우랴 무척 바쁠 테니까.(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08.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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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x3 2008-01-01 23:3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 곳을 즐겨찾습니다.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이 글 덕에 한동안 회의적이고 혼란스럽던 생각들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8-01-02 09:54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구요.^^

로이73 2009-06-18 10:0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태안반도의 원유 유출 사고가 점입가경으로 치닫고 있다. 오늘이 고비라고 하는데 현재까지의 기름 오염만으로도 이미 서해안의 생태계를 무너뜨릴 최악의 참사로 기록되는 듯하다. 무엇보다도 방심과 부주의, 행정적 오판과 무사안일이 빚어낸 '인재'라는 것이 안타깝고 답답하고 참담하다(묵시록적인 사건이 아닌가라는 생각마저 든다). 프레시안의 기사를 몇몇 사진과 함께 옮겨놓는다.

프레시안(07. 12. 11) "당신이 사는 곳도 태안반도처럼 될 수 있다"

지난 여름에 태안반도를 여행하고 싶었다. 아내가 오래 전부터 태안을 가고 싶다고 하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일 저런 일에 치이다가 결국 못 가고 말았다. 얼마 뒤 가로림만을 막고 조력발전을 하겠다는 계획을 추진하고 있다는 기사를 보고 긴장하고 분노했다. 조력발전을 명분으로 가로림만을 방조제로 막아서 개발하겠다는 계획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다면 개발업자들과 지주들은 한몫 단단히 챙기겠지만 가로림만은 크게 훼손되고 말 것이다. 가로림만 조력발전계획은 시화호 조력발전계획, 강화도 조력발전계획 등과 함께 반드시 막아야 할 신개발주의의 개발계획이다. 자연과 문화를 내세우며 자연과 문화를 대대적으로 파괴한다는 점에서 신개발주의는 구개발주의보다 더 교활하고 위험한 개발주의이다. 복원을 내세워서 개발을 강행한 '청계천 복원 사업'은 그 대표적인 예이다.


  
그런데 뜻밖의 사고가 태안반도를 덮쳤다. 2007년 12월 7일 아침 7시 15분에 인천대교 공사에 사용되고는 거제로 이끌려가던 거대한 크레인이 유조선을 들이받아 유조선에 구멍이 나서 무려 1만500kl의 원유가 바다로 흘러든 것이다. 이 끔찍한 사고가 일어나고 나흘째인 12월 10일 밤 현재, 태안반도의 바다 8000여ha가 기름으로 뒤덮였고, 양식장이 밀집한 가로림만도 위험하다고 한다.
  
8000ha는 무려 8000만㎡이고, 평수로는 무려 2420만 평이다. 여의도의 27배를 넘는 넓이의 바다가 기름으로 뒤덮인 것이다. 정말이지 끔찍한 대참사가 아닐 수 없다. 기름으로 뒤덮이는 순간, 생명의 바다는 삽시간에 죽음의 바다가 되고 만다. 수많은 생명체들이 기름에 뒤덮여 고통스럽게 허덕이다가 죽는다.
  
1990년 8월에 발발한 걸프전에서 이라크의 사담 후세인은 쿠웨이트의 유정들을 파괴했고, 이 때문에 많은 원유가 바다로 흘러들어 많은 생명체들이 죽었다. 영문도 모른 채 기름에 뒤덮여 허덕이며 죽어가던 가마우지의 모습은 걸프전의 끔찍한 상징이 되었다. 그런데 지금 아름다운 태안반도에서 똑같은 모습을 보게 되었다. 머나먼 아라비아해에서 벌어졌던 무서운 일이 지금 여기의 생생한 현실이 된 것이다.


  
더욱 무서운 것은 이 대참사가 2차 오염, 3차 오염으로 이어지고, 결국 수십년의 세월이 흘러도 제대로 복원되기 어렵다는 사실이다. 기름을 제거하기 위해 뿌린 유화제도 바다에 해롭기는 마찬가지이다. 기름오염은 곧 유화제 오염으로 이어진다. 유화제는 바닥으로 가라앉으면서 바다를 깊이 죽인다. 기름과 유화제는 공기 중으로 날아오르면서 공기도 심각하게 오염시킨다. 이미 태안반도 일대의 공기는 크게 오염되었다고 한다.
  
여기서 우리는 현대 사회의 위험문제에 대해 주의를 기울일 필요가 있다. 우리는 수많은 문명의 이기를 사용해서 대단히 편리하고 풍족한 삶을 살고 있다. 그러나 모든 문명의 이기는 자연을 파괴할 수 있으며, 따라서 자연 속의 존재인 우리 자신을 파괴할 수 있다. 이런 점에서 독일의 사회학자인 울리히 벡은 현대 사회를 아예 '위험사회'라고 부른다. 실로 우리는 편리하고 풍족할 뿐만 아니라 지극히 위험한 사회에서 살고 있다.


  
'위험사회'는 서구의 이야기가 아니라 현대의 과학기술을 사용하는 모든 나라의 현실이다. 그런데 같은 '위험사회'에도 정도의 차이가 있다. 한국은 삼풍백화점 붕괴사고에서 잘 드러났듯이 아주 심한 위험사회에 속한다. 극히 위험한 과학기술을 관리하는 사회체계가 너무나 부실하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위험을 가중시키는 부패의 문제도 포함된다. 이런 상태를 개선하고자 정부는 소방방재청을 설립하고, 대대적인 위험대책을 수립했다.
  
정부의 정책이 크게 개선된 것은 분명하다. 그러나 다시 이런 대참사가 일어난 것이다. 이것은 과연 피할 수 없는 것이었을까? 흔히 '인재'로 표현되는 '위험한 과학기술을 다루는 부실한 사회체계'의 문제는 해결된 것일까? 이제까지 제시된 주민의 증언이나 수사내용으로 봤을 때, 그렇게 보기는 아무래도 어려울 것 같다. 다음과 같이 주민들은 '표박지'가 아닌 곳에 대형선박들을 무단정박했던 사실을 지적하며 '인재'라고 주장했다. 

사고 지점에 가장 인접해 큰 피해를 입은 태안군 소원면 의항리 주민들은 피해가 확산된 것이 어설픈 대처에 따른 '인재'라고 주장했다. 주민들은 배의 주차장과 같은 표박지가 아닌 곳에 유조선과 화물선을 정박해 이 곳을 지나는 배들과 충돌의 위험성이 상존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런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고 성토했다. 사고 지점은 대산지방해양수산청에서 고시한 표박지와 3마일 떨어진 지역으로 기름유출 대재앙을 불러온 주원인이라고 주장했다.
  
태안군 어선 조합원인 이모(60)씨는 "태안화력에 들어가기 위해 순서를 기다리는 유조선 등이 이번 사고 지점에서 며칠 머물렀다"며 "표박지로 고시한 곳이 아닌 곳에 며칠 동안 정박해 있어 단속을 건의해도 대산해수청은 이를 외면해왔다"고 말했다.('분통을 터뜨리는 주민들', <국민일보>, 2007년 12월 10일)


  
또한 대산해양수산청과 크레인의 예인선 사이에 규정대로 소통이 이루어졌는가, 그리고 양자가 해야 할 일을 제대로 다 했는가에 대해서도 커다란 의혹이 제기되고 있다. 쉽게 말해서 사고를 막아야 할 당사자들이 제대로 할 일을 했다면, 충분히 막을 수 있는 사고였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수사를 통해 더욱 명확히 밝혀지겠지만, 이제까지 드러난 사실은 다음과 같이 너무나 엉터리 같은 것이어서 믿고 싶지 않을 지경이다.
  
해경 조사에서 대산해양수산청 관계자들은 "예인선이 호출에 응답하지 않았고, 크레인을 실은 부선과 예인선을 잇는 와이어가 끊어진 상황도 전혀 보고 받지 못했다"며 예인선 측에 책임을 미뤘다. 이에 대해 예인선 관계자들은 "관제실에서 VHF 16번으로 호출해야 하는데 12번으로 호출하는 바람에 교신이 안됐다"고 주장했다. 관련 법규에 따르면 선박들은 항상 VHF 통신 16번 채널을 켜놓고 항만 당국의 비상호출에 응답해야 한다.
  
그러나 정작 의혹이 쏠리는 부분은 휴대폰 통화 이후다. 관제실과 예인선 선장간 통화가 있은 뒤 1시간 정도면 예인선이 유조선을 충분히 피해 갈 수 있었는데도 그러지 못했다. 만약 이미 예인선과 부선을 잇는 와이어가 끊어져 손을 쓸 수 없는 상황이었다면 관제실과의 통화 때 이를 보고했어야 하는데 하지 않았다. 이후로도 충돌 때까지 와이어가 끊어졌다는 보고는 관제실에 접수되지 않았다.
  
대산해양수산청도 안이한 대처로 의혹을 사고 있다. 항로 이탈과 충돌 위험을 인지한 뒤 예인선을 VHF로 두 차례나 호출하고, 휴대폰으로 경고까지 했지만 이후로는 충돌 시까지 별다른 확인 조치를 취하지 않았다. 당시 크레인은 대산해양수산청의 경고에도 불구, 항로를 크게 벗어나 유조선에 더 가까이 접근하고 있었지만 관제실은 뒷짐만 지고 있었다.(''죽음의 바다' 책임회피만 둥둥', <한국일보>, 2007년 12월 9일)
  
삼풍백화점은 왜 붕괴했는가? 붕괴를 막기 위한 여러 제도와 절차가 있었으나 부패로 말미암아 전혀 작동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번의 사고에서도 제도와 절차가 멀쩡히 있었으나 제대로 작동하지 않았다. 그것이 부패 때문인지, 단순한 태만 때문인지, 혹은 그저 실수였는지는 앞으로 밝혀질 것이다. 그러나 기구를 설립하고, 법률을 제정하고, 제도를 마련하는 것으로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는 것은 이미 분명하게 밝혀졌다.


  
인간과 자연에 대한 전체론적 이해를 추구했던 미국의 인류학자 그레고리 베이츤(*베이트슨)은 <정신의 생태학>(*<마음의 생태학>)에서 오늘날 겸손은 도덕적 덕목이 아니라 과학의 요청이라고 지적했다. 핵발전소를 비롯한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을 연구한 미국의 조직사회학자 찰스 페로우는 조직적 복잡성 때문에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을 완전히 안전하게 관리할 방도는 없다고 결론지었다. 우리는 이러한 위험연구의 성과에 진지하게 귀 기울여야 한다.
  
태안반도의 대참사는 위험사회 한국의 무서운 실상을 확연히 입증하는 생생한 증거로 남을 것이다. 이런 문제의 재발을 막기 위해 우리는 지구 자체를 파멸로 몰아넣고 있는 현대 과학기술의 위험, 이러한 위험을 결코 안전하게 관리할 수 없는 현대 사회체계의 위험에 전면적으로 대응해야 한다. 핵발전정책의 중단, 대형 송전선로 건설의 중단, 그리고 '경부운하' 구상의 폐기 등은 그 구체적 과제의 예이다.
  
낙동강과 한강에서 비슷한 문제가 일어난다고 생각해 보라. 이미 1991년 봄에 낙동강에서는 비슷한 문제가 한 달 새 두 차례나 일어나기도 했다. 위험사회 한국은 파멸을 향해 치달리고 있다. 우리의 과제는 무조건 경제, 무조건 성장이 아니다. 파멸을 향해 치달리는 위험사회 한국의 무서운 실상을 바로잡는 것, 이것이야말로 우리의 진정한 과제이다.(홍성태/상지대교수)

07. 12. 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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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유 2007-12-11 20:14   좋아요 0 | URL
사진 블록에 가져갑니다..

로쟈 2007-12-11 21:31   좋아요 0 | URL
사진 몇 장은 한겨레에서 가져왔습니다.

살라흐앗딘 2007-12-12 09:29   좋아요 0 | URL
시험공부하다가 잠깐 쉬는 새에 들어왔는데, 맨 위의 바다새 사진을 보니 더 심란하네요;;

로쟈 2007-12-12 22:44   좋아요 0 | URL
주변 어민들의 삶 또한 바다새의 처지와 다를 바 없는 것 같습니다.--;

책사랑 2007-12-13 08:30   좋아요 0 | URL
이런 "위험사회"의 모습이 이제 전세계화되었다는 점이 더 큰 문제인 것 같습니다.
울리히 벡은 이미 그런 것을 간파했던지 올해에 "세계 위험사회"(Weltrisikogesellschaft)라는 책을 독일 주어캄프 출판사에서 펴냈습니다. 2008년 한국어판이 도서출판 길에서
출간될 예정입니다.

로쟈 2007-12-13 08:36   좋아요 0 | URL
책사랑님의 '출판 열정'에 감복하게 됩니다.^^
 

<민주주의의 역설>(인간사랑, 2006)을 읽으며 샹탈 무페에 관한 자료들을 찾다가 읽게 된 건 작년 여름 <동향과 전망>에 실린 한 논문에 대한 소개기사이다. 소개에 따르면, 노무현 리더십의 한계를 잘 짚어주면서 라클라우/무페의 급진적 민주주의의 입장이 무엇인가도 잘 가늠할 수 있도록 해주는 논문이 아닌가 싶다. 내공이 있는 필자다, 싶어서 찾아보니 안교수는 "한나 아렌트, 에릭 홈스봄 등 세계적 지성이 주도했던 미국의 New School for Social Rearch에서 미국 대통령제를 전공"했고, <노무현과 클린튼의 탄행 정치학>(푸른길, 2004)란 저작과 <제국의 슬픔>(삼우반, 2004) 같은 번역서를 갖고 있다. 노무현 정부의 '실패'가 '탈정치 리더십'에 기인한다는 그의 진단에 공감한다(경제 최우선주의를 내세우는 이명박의 경우도 사정이 나을 성싶지 않다).

 

 

 

 

한겨레(06. 06. 03) 노대통령 ‘탈정치 리더십’이 실패 불렀다

노무현 대통령의 리더십을 ‘탈정치 리더십’이라고 비판한 글이 〈동향과 전망〉 여름호에 실렸다. 갈등의 정치에 힘입어 대통령에 올랐지만, 정작 이를 본격적으로 작동시키지 못해 실패에 이르렀다는 분석이다. 안병진 창원대 교수는 이 잡지 최근호 특집에 실린 ‘탈정치론의 시대’라는 논문에서 “갈등을 완전히 제거하고 열정을 기피하는 정치는 오히려 정치에 대한 시민들의 기피를 불러온다”며 “이는 보다 강렬한 향락을 제공하는 파시즘적 정치에 필연적으로 정치의 주도권을 빼앗기게 된다”고 지적했다. 5·31 지방선거 결과를 예측이나 한 듯한 글이다.

‘승부수를 던져 싸움을 즐기는 정치인’이라는 게 노 대통령에 대한 세간의 이미지였다. 그러나 안 교수는 “국정을 운영하는 노 대통령의 문제의식이 매우 탈정치적”이라고 평가했다. 새로운 접근법이다. 노 대통령의 리더십을 탈정치적이라고 평가하는 이유는 ‘정치’의 핵심적 요소인 “집단적 갈등, 각 세력 간의 헤게모니 경쟁, 대중적 욕망과 정서 등”을 의도적으로 멀리하기 때문이다. 탈정치 리더십은 정치가 시민들의 욕망과 적대적 열정을 표출하는 장이라는 사실에 눈감는다. 적대적 갈등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부정하거나 억누른다. 현실적으로 존재하는 힘의 차이나 헤게모니 경쟁 등을 무시한 채, 합리적인 대화와 타협만을 신격화한다.

정치사상가인 샹탈 무페의 문제의식을 빌려온 안 교수가 보기에 대연정, 선진한국 건설론, 한-미 자유무역협정(FTA) 조기 체결 등 노 대통령이 제시한 핵심의제들은 합리주의의 모양을 띤 탈정치 담론들이다. “정치의 정수를 배제한 채, 대화만을 극단적으로 강조”하고 있다. 분단과 재벌 체제 등 적대적 차원의 정치의제가 그 어느 나라보다 강렬한데도, “노 대통령이 현재 전개하는 담론들은 매우 탈정치적인 합리주의 관점을 내포하고 있다”는 것이다. ‘좌파 신자유주의’는 좌우 구분 자체를 혐오하는 노 대통령의 이런 생각이 잘 드러난 표현이다.

 

 

 

 

 

 

 

 

 

 

 

이는 참여정부 탄생 과정을 배반하는 과정이기도 했다. “참여정부의 탄생은 기득권 질서에 대한 적대적 열망과 이와 구분되는 새로운 정치적 정체성의 추구가 역동적으로 분출”된 결과였다는 게 안 교수의 판단이다. 당시 대선 후보로서의 노무현은 “정서적 분노와 집단적 열정을 선거에서 표출해 논쟁적 민주주의로 전환시키는 매개”였다. “갈등적 합의를 통해 활력있는 정치를 한국사회에서 최초로 구축하려 한 의의”를 가진 참여정부는 이후 정반대의 길을 걸었다. “정치 내부로 시민들의 힘을 투입시키는 정치의 핵심 운영 원리를 배제하고, 행정·입법·사법부 엘리트 간의 갈등과 협력으로 정치 영역을 제한했다.” 그러나 대화와 타협은 어디서도 실현되지 않았다. 오히려 시민적 참여 원리가 배제된 정치권에선 “서로를 정치의 장에서 완전히 배제하려는 정치”가 횡행했다.

안 교수는 그 결과에 주목한다. 사람들은 “단조롭고 무기력한 합의주의적 자유주의 정치가 결코 제공할 수 없는 ‘향락’의 정치에 빠져든다”고 경고했다. ‘우익 포퓰리즘’이 대표적이다. 지방선거 전에 이 글을 쓴 안 교수는 홍준표 한나라당 의원이 서울시장 후보 공약으로 내건 ‘아파트 반값 분양’을 그 사례로 꼽았다. 실현 여부와 관계없이 국민들의 어떤 ‘열망’에 호소하는 힘이 크다는 것이다. 안 교수의 분석법을 원용하면, 이명박 서울시장의 청계천 효과 등의 실체도 이해할 수 있다.

안 교수는 “정치의 틀 자체를 붕괴시키지 않으면서도, 적대적 힘들 간의 헤게모니 투쟁을 활력있는 논쟁적 민주주의로 전환시키는 것”을 대안으로 제시했다. 그는 이를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라는 개념으로 정리했다. “사회의 적대적 갈등을 회피하고 보편적 외관을 가장한 특수한 내용의 합의를 강요하는 것이 아니라, 적절한 기제를 통해 표출시키고, 이를 통해 부단히 다수의 합의를 창출해내는 정치”가 핵심이다.(안수찬 기자)

07. 12. 10.

 

 

 

 

P.S. 안교수가 '공화주의적 민주주의'라고 제시하는 대안을 샹탈 무페는 그냥 '자유민주주의'라고 부른다. '민주주의의 역설'이란 곧 '자유주의'와 '민주주의' 사이의 내적인 긴장 관계, 역설관계를 가리키며(자유민주주의의 수호를 자처하는 세력들이 흔히 이 '역설'을 이해하지도 견뎌내지도 못한다는 게 한국식 자유민주주의의 역설이다), "적대적 힘들 간의 헤게모니 투쟁"이 바로 정치이다. '탈정치 비판'에 대해서는 무페의 책들 외에도 지젝의 <혁명이 다가온다>를 참조할 수 있다. 책의 한 장이 '탈정치에 반대하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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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팀전 2007-12-11 09:50   좋아요 0 | URL
^^ ^^마지막 세권의 책..다 보관함에 있는데 언제 볼지 모르겠어요.
내년에는 지젝을 좀 보려구요

로쟈 2007-12-11 12:28   좋아요 0 | URL
<역설>과 <혁명>의 경우에 강추할 만한 번역서들은 아닙니다. 미리 단서를 붙여둡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