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향신문에서 기획특집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에서 지난주부터 '우리사회의 담론 풍경'을 다루고 있다. '지식인의 죽음'과 직접 관련되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주도적인 담론의 변화과정이 한국사회사의 축도가 되기도 한다는 점에서 한번쯤 읽어봄 직하다. 이번주 '동아시아론'까지 옮겨놓는다.  

경향신문(07. 07. 14)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Ⅳ-(1)우리사회의 담론 풍경:총론

2007년 여름, 새로운 밀레니엄이 열린 지 오래이건만 우리 사회에서 이제 한 시대가 끝나고 있다는 느낌은 나만의 것일까. 그것은 두 가지 이유, 민주화시대 20년과 이를 결산하는 12월 대통령 선거가 주는 함의 때문인 듯하다. 해방 이후 60여년간 숨가쁘게 달려온 건국, 산업화, 민주화가 이렇게 한 순환을 마감하고 있다. 우리 사회는 어디에 서 있고 어디로 가고 있는가. 실존적 거점과 전략적 방향에 대한 질문에 지식 사회는 어떤 응답을 하고 있는가.

지난 20년 동안 우리 사회 담론의 역사는 민주화 과정에 못지않게 드라마틱하다. 1980년대가 사회 구성체 논쟁으로 대표되는 마르크스주의와 민족해방주의의 분출로 특징지어진다면, 1990년대는 ‘문화의 시대’의 도래와 외환위기의 충격에 대한 대응이 담론의 흐름을 주도해 왔다. 2000년대에 들어와 우리 사회 담론의 지형은 이제까지 제출된 이론적 테제와 경험적 분석들이 심화되고 분화되는 경향을 보여 왔다.

주목할 것은 최근 우리 사회 담론의 지형이 좌파 대 우파, 보수 대 진보의 이분법적 구도를 넘어서 복합 구도를 형성해 왔다는 점이다. 그것에는 이념적 구도와 탈이념적 구도가 혼재하며, 서구주의와 비서구주의가 공존한다. 세계주의 대 민족주의, 현대 대 탈현대, 시장주의 대 국가주의,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개발주의 대 생태주의 등 복합 구도가 현재 우리 인문·사회과학 담론의 풍경을 이루고 있다.



# 세계주의 대 민족주의

세계주의와 민족주의의 충돌은 1997년 외환위기 이후 인문·사회과학 전반을 이끌어온 구도다. 오늘날 세계화가 우리 삶과 사회를 송두리째 변화시키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세계주의 담론은 이중적 속성을 갖는다. 한 편에서 그것은 ‘글로벌 스탠더드’로 표현되는 보편주의를 강조하지만, 다른 한 편에서는 서구 제도 및 가치를 특권화하는 오리엔탈리즘, 다시 말해 서구중심주의를 내포한다.



민족주의는 세계주의에 맞서는 담론이다. 우리 민족주의 담론은 서구의 그것과는 사뭇 다르다. 우리에게 민족주의는 이른바 ‘근대의 발명품’ 이상의 것이며, 무엇보다 제국주의에 맞서는 민족해방주의의 전통을 이어 왔다. 문제는 민족주의에 내재된 집단주의 성향과 과잉 애국주의 경향이다. 이 점에서 ‘민족주의는 없다’는 일각의 주장은 예각적이지만 여전히 음미할 만하다.

민족주의와 세계주의의 충돌에서 주목할 것은 동아시아(또는 동북아시아) 담론이다. 민족국가와 세계체제 사이에 존재하는 지역체제로서의 동아시아의 역사와 사회를 새롭게 이론화하려는 동아시아론은 동도서기(東道西器)론의 21세기 버전이자, 팍스 아메리카나(Pax Americana)의 대항 담론이다. 동아시아론은 우리 안의 보편주의와 특수주의, 현대주의와 전통주의, 오리엔탈리즘과 옥시덴탈리즘의 모순적 공존과 새로운 화해에 대해 진지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 현대 대 탈현대

현대와 탈현대 사이의 논쟁 또한 현재진행형이다. 돌아보면 90년대 초반 문화의 시대와 더불어 촉발된 포스트모더니즘에 대한 토론만큼 격렬한 논쟁은 없었다. 한편에서는 한국적 특수성을 주목해 포스트모던 논의들을 가치 없는 발상이라고 비판해 왔다면, 다른 한편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의 한국적 적용 가능성을 모색해 왔다. 그 결과 ‘미완의 과제’로서의 현대성을 옹호하려는 흐름과 ‘총체성의 폭력’에 저항하려는 흐름이 팽팽히 맞서 왔다.



현재의 시점에서 보면 90년대 초반 포스트모더니즘론의 등장은 시기상조였던 것처럼 보인다. 무엇보다 90년대 중반 외환위기의 충격은 담론의 중심을 문화에서 경제로 이동시켰다. 하지만 세계화, 정보사회와 결합된 포스트모던 현상은 꾸준히 증가해 왔으며 영화, 음악, 미술 영역에서 자신의 영향력을 늘려 왔다. 제도는 여전히 현대적 질서 안에 있되, 의식 및 문화는 빠른 속도로 포스트모던화되는 ‘제2의 현대’ 또는 ‘성찰적 현대’가 우리 사회의 자화상일지도 모른다.

# 시장주의 대 국가주의

지난 40년간 우리 사회 산업화를 지탱해 온 패러다임은 발전국가론이다. 추격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역할을 부각시킨 발전국가론은 시장, 시민사회보다는 국가를 중시하는 이론을 유포시켰다. 전통적 유교 사상과도 잇닿아 있는 국가주의는 초기 산업화 과정에서 국가의 적극적인 역할을 강조한다는 점에서 일견 타당했던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산업화가 어느 정도 진행되면 민주화의 요구가 분출하는, 이른바 자본주의에 내재한 ‘민주주의 효과’와는 양립하기 어려운 담론이기도 했다.



시장주의가 부상한 것은 이런 맥락이다. 시장주의는 시장에서의 경쟁 메커니즘이 경쟁력 및 효율성을 높임으로써 합리성을 제고한다고 주장한다. 세계화 시대가 무한경쟁의 시대인 한 시장주의는 거부하기 쉽지 않은 패러다임이다. 하지만 시장주의는 결과적으로 공공성을 훼손하고 사회적 연대를 위협하게 되는 자기파괴적 속성을 안고 있다. 오늘날 이런 신자유주의 논리는 기업과 대학은 물론 정치사회와 시민사회 등 우리 사회 전 영역에서 지배집단의 새로운 담론의 정전(正典)으로 자리잡고 있다.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시장의 효율성과 국가의 공공성을 결합하려는 담론이다. 김대중 정부의 국정철학으로 제시된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사회민주주의를 갱신하고자 한 서유럽 ‘제3의 길’의 한국적 버전이라 할 만하다. 문제는 민주적 시장경제론이 최근 새로운 시험대 위에 올라 서 있다는 점이다. 세계화 시대 점증하는 사회적 양극화를 어떻게 해소하고 훼손된 사회적 연대를 어떻게 복원할 것인가에 대해 민주적 시장경제론은 응답해야 한다.

# 개인주의 대 공동체주의

개인과 공동체 가운데 무엇을 더 중시할 것인가는 오랜 철학적 질문이다. 인간이 사회적 존재인 한 우리 내부에는 개인적 정체성과 공동체적 정체성이 공존한다. 개인주의가 양도할 수 없는 개인의 자율과 책임에 기반한 근대 자유민주주의의 발전을 가져왔다면, 공동체주의는 사회적 약자를 보호할 수 있는 사상적 지반을 제공해 왔다. 문제는 개인주의든 공동체주의든 과잉에 있다. 개인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 사회는 ‘만인 대 만인의 투쟁’에 빠지게 되며, 공동체주의를 과도하게 강조하면 개인의 자유가 억압되고 권위주의가 강화된다.



이른바 ‘공동체 자유주의’는 이에 대한 대안으로 제출된 담론이다. 서구적 자유주의와 동아시아적 공동체주의를 결합한다는 점에서 이 담론은 80년대 이후 서구 신보수주의 철학을 떠올리게 한다. 하지만 이 담론 역시 문제가 없지 않다. 개인주의를 실현해야 할 영역에 권위주의 통치로 돌아가고 공동체주의를 구현해야 할 영역에 시장적 경쟁을 강제하는 모순적 혼합물이 될 가능성이 존재한다. 개인적 자율과 사회적 연대를 어떤 생산적인 방식으로 결합할 것인가는 여전히 중대한 철학적 숙제이자 사회과학적 과제다.

# 개발주의 대 생태주의

개발주의와 생태주의의 충돌은 민주화 과정에서 형성된 또 하나의 구도다. 생태주의는 인간과 자연, 사회와 자연간의 새로운 공존을 모색하려는 패러다임이다. 생태주의는 근대 문명에 의한 환경의 의식적, 무의식적 파괴가 현재 감당하기 어려운 재앙의 부메랑으로 되돌아오고 있음을 경고한다.



우리 사회에서 추진된 압축적 산업화 과정을 돌아볼 때 생태주의의 진단과 경고는 지극히 타당하다. 하지만 문제가 간단치 않은 것은, 생태 위기를 가져온 개발주의가 여전히 적잖은 국민들에게 친화적이며, 특히 세계화 시대를 맞이하여 성장주의 내지 물질주의 전략이 다수 시민들에게 호소력을 갖고 있다는 점이다. 개발주의와 생태주의 사이에 어떤 가교를 놓을 수 있을지에 대해 우리 인문·사회과학은 새로운 모색을 요구 받고 있다.

# 담론의 탄생을 기대하며

지식사회 담론은 현실의 문제를 반영하는 동시에 그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통로다. 담론의 영역에서 다양한 구도가 공존한다는 사실은 우리 사회가 복합사회 또는 다원사회로 변화돼 왔음을 증거한다. 신자유주의 세계화가 강화되는 추세 속에서도 이에 맞서는 다양한 이론과 대안들이 담론의 경쟁 및 투쟁을 펼치고 있다.



문제는 대안이다. 산업화와 민주화 시대를 마감하는 현재, 우리 사회는 새로운 사상적·담론적·정책적 거점과 전략을 요구한다. 바로 이점에서 우리 사회 담론들은 두 가지 과제를 안고 있다. 첫째, 성찰적 사유와 상상력을 좀더 발휘해야 한다. 성찰성은 타자의 논리를 통해 자신의 논리를 돌아봄으로써 설명력과 설득력을 높일 수 있다. 둘째, 지속가능하고 실현가능한 미래에 대해 좀더 치열하게 고민해야 한다. 새로운 정책은 새로운 비전에서 비롯되며, 새로운 비전은 새로운 담론에서 태어날 수 있다.(김호기|연세대 교수·사회학)

경향신문(07. 07. 21) [민주화 20년, 지식인의 죽음]Ⅳ-(2) 동아시아론

# 담론과 현실 사이의 좁혀지지 않는 ‘갭’

주식 좀 한다는 사람치고 최근 중국 증시의 활황과 관련해서 차이나펀드에 관심을 가져보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골프를 좋아한다면 저렴한 가격의 중국이나 동남아 골프투어 패키지가, 쇼핑에 관심이 많다면 도쿄나 홍콩으로의 쇼핑여행이 괜찮은 여름 휴가의 대안이 될지도 모른다. 이처럼 오늘날 동아시아는 지식인들의 고담준론 속에서보다 평균적 한국인의 일상적 경험 속에 더 빠른 속도로 뿌리를 내려가고 있다. 오늘날 동아시아는 세계에서 가장 빠른 속도로 자본이 축적되고 순환되는 곳이며 그런 의미에서 발전과 성장의 자본주의적 시간이 가장 빠른 속도로 흘러가는 곳이기도 하다. 동아시아를 이 폭발적 변화 속에서 다루는 한 담론은 늘 현실에 뒤처지게 마련이며, 지식은 현실에 대한 스스로의 무능력을 자인하지 않을 수 없게 된다. 그러나 동아시아 담론이 생생한 현실의 필요에서 출발하는 한 이 주제는 논의성과와는 별도로 쉽사리 도외시되거나 도태될 수 없다. 동아시아 담론의 ‘긴 생명력’과 지지부진한 ‘아웃풋’이 공존할 수 있는 비밀은 여기에 있는 셈이다.



# 동아시아 담론의 대두와 그 배경

한국의 지식지형에서 동아시아 담론이 등장한 것은 1990년대 초중반의 일이다. 87년 민주화 항쟁 및 ‘북방정책’의 성과로 사회주의권 국가와의 교류가 시작되면서 지식인 사회를 옥죄었던 이념 콤플렉스가 해소되기 시작한 시기였다. 사회주의는 우리 앞에 맨 얼굴을 드러내기 무섭게 스스로 간판을 내리게 된다. 레닌의 동상이 끌어내려지고 베를린 장벽이 무너지는 사태 속에서 우리의 사고와 행동을 지배해 왔던 냉전은 종식을 선언한다. 세계적 차원에서 진행된 이 새로운 변화에 대해 기존의 비판적 진영이 주목하고 대응해야 할 필요가 비판적 지식집단에서 제기된 것은 당연한 수순이었다. 미국, 일본만이 아니라 중국과 러시아를 포함하는 보다 넓은 주변의 지정학적 구도 속에서 한국과 한반도의 위상을 다시 자리매김하는 작업이 요청되었다.



# ‘창비 그룹’과 동아시아 담론의 제기

이 문제를 하나의 화두로서 비판적 지식계에 제시한 것은 ‘창비 그룹’의 지식인들을 첫 손에 꼽을 수 있다. 이들은 ‘분단체제와 세계체제’라는 패러다임을 빌려 한반도의 현실을 설명하고자 했다. 자본주의도 사회주의도 오래 전부터 형성되어온 자본주의 세계체제라는 더 큰 틀의 부분적 구성요소에 불과하다는 월러스틴의 세계체제론은 사회주의의 실패를 받아들일 수 없었던 비판적 지식인들에게 좋은 이론적 탈출구이자 역사발전이 종착점에 도달했다는 후쿠야마식의 역사 허무주의를 반박할 수 있는 매력적인 이론이었다. 그러나 냉전구도의 세계적 해체에도 불구하고 냉전에 기댄 한국사회의 억압적 질서는 여전히 건재했다. 비판적 지식인의 근본 과제를 분단체제의 극복으로 보는 백낙청을 위시한 ‘창비 그룹’ 지식인들은 자본주의 세계체제의 보편성과 한반도 분단현실의 특수성이라는 양자 간의 거리와 차이를 넘어설 가능성을 찾는 작업이 시급했다. ‘동아시아’는 양자를 매개하는 ‘중간수준’의 범주로서 제기되었다.



# 탈근대적 상상력과 문명적 대안으로서의 동아시아

그러나 이들이 제기한 동아시아론은 ‘과학적 사회주의’와 ‘운동’에 익숙했던 진보적 지식진영의 ‘본류’에게는 크게 어필하지 못했다. 동아시아론이 갖는 진보 담론의 자기쇄신이라는 측면은 묻히게 되고, 반응은 예상치 못한 방향에서 나타난다. 예컨대 잡지 ‘상상’은 서구 중심주의를 넘어서는 새로운 상상력의 원천으로 동아시아를 진지하게 문제 삼았다. 서구 중심적 사유로는 포착될 수 없는 동아시아 고유의 가치관과 문화적 정체성에 대한 발견의 중요성이 강조되었다. 여기서 동아시아론은 근대적 가치에 대한 회의와 그 극복방안을 모색하는 일종의 ‘탈근대 담론’으로서 다루어진다. 창비의 문제제기에 전제되었던 정치적 성격은 탈각되면서 문화론, 문명론적 접근이 이를 대체하였다. 이러한 이면에는 보수적 입장의 문화 민족주의가 자리하고 있었다.



# 전통적 가치와 동아시아의 경제 발전의 상관성

동아시아 신흥공업국(NICs)의 경제적 성공 원인을 유교의 전통적 가치관에서 찾는 유교자본주의론은 서구의 상식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동아시아의 지속적 경제성장을 설명하기 위한 것이었다. 여기에는 동아시아 유교 전통의 계승과 현대사회에서의 창조적 활용을 내세우는 ‘신유가(新儒家, New Confucianism)’의 철학 및 윤리관과 밀접하게 연관된다. 사상체계로서의 신유가 혹은 현실에 대한 설명모델로서의 유교자본주의론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특징은 그 속에 함축된 보수주의적 현실관이다. 유교자본주의론의 한국적 수용 또한 현실에 대한 보수적 긍정에서 출발한다. 예컨대 유석춘은 정경유착과 연고주의 등 유교전통에서 파생된 문화적 토양이 장기적이고 안정적인 경제의 발전에 장애요소가 되기보다 오히려 발전을 촉진시켰다고 주장한다. 이러한 논리에는 어떤 발전이 바람직한가를 따지는 ‘가치의 문제’ 이전에 경제적 성공이라는 ‘사실의 문제’로 논의의 초점을 이동하자는 현실에 대한 보수적 긍정론이 전제되어 있었다.



# 외환위기와 동아시아 지역주의의 발흥

그러나 이러한 보수주의적 현실긍정론은 97년 외환위기를 계기로 근본적인 도전에 직면했다. 거래비용을 줄이고 경쟁력을 강화하는 데 기여한다고 높이 평가되었던 ‘아시아적 가치’가 한국경제를 나락에 빠뜨리는 주범으로 일순간에 내몰리게 된 것이다. 동아시아 담론 또한 시스템의 총체적 위기상황과 긴밀히 연동된다. 서구의 금융 패권 앞에 동아시아는 공동의 운명에 놓여있음을 자각하게 되면서 ‘아시아통화기금’ 같은 금융협력체 구상도 등장하게 된다. 이같은 경험의 축적을 통해 지역 내부의 연대에 대한 관심이 증대되었으며 이는 동아시아 담론이 문화적 공동유산에서 국가의 생존과 발전의 전략적 비전과 연결되는 계기가 되었다. 세계경제의 글로벌한 통합과 더불어 경제의 지역화·블록화 경향의 동시적 진행을 특징으로 하는 ‘신자유주의적 세계화’의 파도는 동아시아에서의 지역주의의 전진에 걸림돌이 되기보다 촉진제가 되었다.



# 국가와 기업, 동아시아 담론의 새로운 생산자

외환위기 이후의 동아시아 지역통합론은 국가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다. 그러나 다국적기업 역시 이 문제에 관한 한 국외자일 수 없었다. 특히 지역경제의 성장엔진으로서 중국 경제가 갖는 막강한 파워는 동아시아에 대한 기업의 관심에 촉매제로 작용하였다. 국책연구소와 더불어 대기업 산하의 경제연구소가 동아시아 담론의 새로운 생산주체로 등장하였다. 막대하게 쏟아져 나오는 보고서들은 동아시아를 바라보는 국가와 기업의 시각을 우리에게 생생히 전달해 준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서 지식인이 주도하는 공공적 담론영역의 의제는 국가에 의해 주도되는 거버넌스와 무관할 수 없으며, 국민경제에 미치는 거대기업의 영향력이 증대되어감에 따라 개별 기업의 문제가 공적 담론장의 중심에 놓이는 일도 빈번하다. 한국 경제의 현주소를 일본과 중국 사이에 낀 신세로 갈파한 어느 재벌 그룹 회장의 세칭 샌드위치 위기론은 그 타당성 여부와 무관하게 어떤 지식인의 담론보다 강력한 권위와 대중적 파급력을 가진다. 이러한 사례는 우리에게 동아시아 담론이 더 이상 지식인 사회 내부에서 폐쇄적이고 고립적인 방식으로 생산·유통될 수 없게 된 담론 생태의 변화를 보여준다.



# 비판적 지식담론으로서 동아시아론의 열린 가능성

동아시아 담론은 유행 담론이 급속이 교체되는 한국 지식사회의 풍토 속에서도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해 왔다. 참여정부의 ‘동북아중심국가론’은 국가적 아젠다로까지 확산된 동아시아 담론의 현주소를 보여준 사례이다. 그렇다면 정작 오늘날 여전히 비판적 입장에 서고자 하는 지식인에게 동아시아 담론은 무엇을 의미하는가? 이 문제를 지속적으로 책임감 있게 다루어 ‘창비 그룹’의 지식인들은 ‘동아시아적 시각’(최원식)에 대한 강조에서 한 걸음 나아가 지식과 사유를 반추하는 ‘지적 실험으로서의 동아시아’(백영서)를 제창한다. 국가나 기업의 ‘현실주의적’ 동아시아 담론과 구분되는 지식인 고유의 성찰적 면모가 두드러진다.

그런데 최근 이들의 지적 행보에는 미묘한 중심이동이 감지된다. 비판적 싱크탱크 집단의 형성을 지향하는 입장에서 동아시아를 ‘한반도의 미래구상’이라는 전략적 목표와 직접 연결시키고 있다. 국가 및 시장(기업)에 대해 취해온 ‘비판적’ 거리의 소멸에 대한 우려가 없을 수 없다. 진보 개혁 담론의 위기가 운위되는 오늘, 동아시아라는 화두는 비판적 지식인들로 하여금 현실에의 적극적 개입과 고유의 비판적 입지의 확보라는 어려운 두 가지 과제를 동시에 밀고 나가는 중요한 시험대가 아닐 수 없다. 향후 이 논의에 세대와 입장을 달리하는 다양한 주체들이 더욱 적극적으로 참여함으로써 동아시아 담론이 갖는 현실적 의미가 보다 풍부하게 드러나기를 기대해 본다.(이정훈|성균관대 동아시아학술원 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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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21 09:25   좋아요 0 | URL
로쟈님 말씀대로 오늘 집을 나서면서는, 한겨레와 더불어 경향신문도 사보려고요. 한국일보는 아침에 집으로 배달되고. 경향에도 읽어볼 게 많은거 같군요.

로쟈 2007-07-21 09:46   좋아요 0 | URL
주말판은 북리뷰들도 들어있기 때문에 본전 이상을 뽑지요.^^
 

이번주에 나온 책들 가운데 몇 권 정도는 눈길을 끄는데, 그 중 하나는 김우창 교수의 신작 <자유와 인간적인 삶>(생각의나무, 2007)이다. 요즘 읽고 있는 <풍경과 마음>(생각의나무, 2006)에 바로 이어지는 책이다. 실물은 어제 구내서점에서 보았는데, 200쪽이 안되는 얇은 분량의 책을 굳이 하드카바로 만들 필요가 있었을까에 대해서는 의문이 들었다. 이런 책이 고급한 장서용이라기보다는 보다 저렴한 보급용으로 읽힐 수는 없는 것일까? 한겨레의 인터뷰 기사를 옮겨놓는다.  

한겨레(07. 07. 21) "비판적 공동체 꾸려 살며 자기 자유 제대로 써야지”

우리 시대의 대표적인 인문학자인 김우창(사진) 고려대 명예교수는 새로 펴낸 책 <자유와 인간적인 삶>(생각의 나무)에서 ‘자유를 기초로 한 인간적인 삶’이 어떻게 이뤄질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가치를 결여한 신자유주의적 삶이나 가치를 강요하는 마르크시즘도 그에겐 대안이 아니다.

그는 생각하는 사회, 즉 ‘비판적 공동체’를 대안으로 제시했다. 공동체가 비록 개인을 도덕 규범에 종속시키는 결과를 가져온다고 하더라도 비판이 허용된다면 보편적 진리의 가능성을 인정하는 것이 될 수밖에 없다는 것이다. 궁극적인 인간성 실현을 위한 매개로서의 ‘심미적 체험’도 강조했다. 심미적 요소는 사람과 사물에 대한 공감 능력을 확대시키는 등 개체로서의 자기 내면의 개발로 이끈다. 김 교수는 독일 시인 프리드리히 실러의 글을 따, 심미적 요소는 자연스러운 사회적 인간관계의 매체가 됨으로써 진정한 정치적 자유의 구성을 가능하게 한다고 밝혔다. 김 교수를 18일 서울 평창동 자택 부근 커피숍에서 만났다.

-민주화 이후 지난 20년 동안 자유가 확대되었다고 말한다.

어떤 종류의 자유인지를 물어야 한다. 요즘 정신질환자나 알코올 중독자, 자살하는 젊은이들이 많다. 자유를 어떻게 써야 할 지를 모른다. 무엇이 자유인가? 서울대 가겠다고 아우성이지만 이유를 물어보면 ‘주변 사람들이 좋다고 해서’라고 답한다. 미국 부모들은 아이들을 학교에 데려가서 주변 환경이나 건물 다 보여준다. 그리고 ‘좋으냐’라고 묻는다. 이건 자기 자유를 제대로 쓰는 것이다. 진짜 자유롭게 산다는 것은 어려운 문제다. 한번 생각해보는 사회가 좋은 사회다. 우리 사회는 그걸 허용하지 않는다. 명품도 정말 좋아해서 산다면 이해가 된다. 하지만 별 이해 없이 사는 것, 우리 사회에서 특히 심하다.

-신자유주의를 ‘목적이 없는 체제’라고 썼다. 그렇다면 ‘목적이 있는 체제’는 어떤가?

신자유주의에 대해 비판만 해서는 안 된다. 무엇을 할 것인지 연구해야 한다. 생각하는 사회, 비판하고 생각하는 사람들이 있는 사회여야 한다. 신자유주의는 ‘너는 이렇게 살아야 한다’는 목적으로부터 삶이 해방된 사회이다. 사회는 수단을 마련하는 경기장이 되었다. 돈 벌어서 네가 알아서 하면 되는 것이다.

자본주의 세계를 ‘자기 욕심만 차리는 세상’이라고 비판하면서 ‘남에게 봉사하라’고 말한다. 남에게 봉사를 강요해도 괴로운 사회다. ‘나의 자유의사로써 그렇게 할 수 있겠느냐’가 과제의 하나다. 금욕적 혁명가인 레닌은 자기를 억제한 사람이다. 그래서 남을 억제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다. 이래서 살벌해진다. 사회민주주의 성향의 네루가 다스린 인도는 제3세계에서 가장 앞선 민주 체제였으나 특권계급의 권리가 많았다. (혁명가들에게) 두 가지 문제가 있다. 다른 사람에 대한 억압을 주저하지 않고, 자신들이 스스로 특권세력이 된다는 것이다.

-신자유주의나 이념의 속박을 넘어 인간적 가치를 실현할 수 있는 사회상을 그려 달라.

정직하고 양심적으로 사는 것이 힘든 사회가 나쁜 사회다. 작은 공동체에서 살아야 한다. 이런 곳에선 거짓말하면 못 배긴다. 세계화의 장점은 우리 생각이 넓어지는 것이다. 넓어지는 세계에서 작은 공동체를 만들어가는 것이 중요하다. 새도시도 자급자족도시로 만들어야 한다. 좋은 학교에 직장도 가급적 있고 가게도 있어야 한다. 도시계획이 굉장히 핵심적인 문제다. 하지만 우리 도시는 그렇게 만들지 않는다. 장사가 되지 않으니까.

(학교 내신도) ‘우리 동네에서 이 학생 우수하다’는 기준으로 해야 한다. 수십만 명 가운데 우수하다는 그런 의미를 넘어야 한다. (속한 집단의 크기는) 작은데 똑똑하다, 그걸 인정해야 한다. 교육부 원칙이 맞다. 선생도 세계적인 1등이 무슨 의미가 있느냐. 학교가 (그 교사를) 존중하는 것이 의미가 있다. 교사도 동네 속에 있어야 한다. 좋은 선생이라고 하는 (동네의) 막연한 평가가 중요하다.

-심미적 체험을 통한 인간적 삶의 형성에서 음악을 특히 강조했다. 하지만 요즘은 시각예술의 시대가 아닌가?

음악은 시간 속에 지속하는 것이다. 시각은 보고 지나는 것이다. 음악은 굉장히 엄격한 구조를 가졌다. 감각적이고 지속적이면서도 엄격한 규칙이 있다. 규칙 속의 자유로운 변조가 이뤄지는 것이다. 음악적 훈련은 학생들이 절제하고 자유롭게 살도록 하는 데 많은 도움이 된다. 미술 작품도 두고두고 생각해야 한다. 무엇을 말하는지 알기 위해 자기 노력을 들여야 한다. 물질적 세계와 자기 노력 그리고 감각이 섞여 들어가는 것이 인간 형성에 중요하다. 미술도 (휙 일람하는 것보다) 걸어놓고 보는 것이나 직접 그려보는 것이 더 좋다.

-심미적 체험은 특권적 체험이라고 썼다. 모두가 체험할 수 있는 길은?

먹고살기 어려운 사람은 하기 어렵다. 하지만 벗어난 사람도 있다. 금욕주의자나 스님들이 그런 예다. 영국에선 미술관을 가장 많이 가는 계층이 노동자들이다. 여러 사람들이 볼 수 있도록 미술을 이곳저곳 옮겨 전시해야 한다. 자동차에 싣고 다니면서 보여줘야 한다. 가야금 연주나 서양 고전음악은 정신적 훈련을 시켜 준다. 시골 초등학교를 지을 때 연주가 가능한 강당을 지을 수 있도록 정부가 지원해야 한다. 또 음악 전공 미취업자들이 시골에서 아이들을 지도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자연스런 인간성을 인정하는 사회가 아니다. 그래서 아이들이 괴롭다. (우리 학생들은) 자연을 과학 공부를 위한 재료로 생각한다. 공부하는 데 도움 받기 위해 자연을 공부한다. 거꾸로 자연을 더 잘 알기 위해 공부해야 한다. 자연이 얼마나 신비로운가, 경이로운가 이걸 알기 위해 자연 공부를 시켜야 한다. 공부를 통해 인생의 경이로움을 알아야 한다. 우리는 그 반대로 인생을 희생해 공부한다.(강성만 기자)

07.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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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디어오늘(07. 07. 19) '개가 하는 인문학’

지난달 말 서강대에서 열린 제3회 ‘맑스코뮤날레’ 둘째날 행사를 보도한 참세상 기사의 제목은 <불붙은 한국학술진흥재단 기금활용>이다. 분명히 ‘계급혁명인가 분자혁명인가’라는 토론주제가 있는데, 이것은 부제처럼 밀려나 있다.

여기서 문제를 제기한 이는 조정환이었다. 그는 “발제문이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예산을 받았다고 한 점이 인상적이고 서먹서먹한 느낌으로 다가왔다”고 하면서 “맑스코뮤날레에서 정부 지원을 받은 논문들이 공공연한 석상에 오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숙고했으면 좋겠다”고 제안했다.
다른 논문이라면 몰라도 마르크스에 관한 것을 정부 지원을 받아쓴다는 것에는 나도 의아한 생각을 하고 있었다. 가령 내가 가끔 사서 보는 반년간지 ‘마르크스주의 연구’는 속표지에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간행”한다는 알림글을 적어두고 있으며,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은 논문을 싣기도 한다.

2006년에 나온 제3권 제2호에는 곽노완의 ‘마르크스 사회(공산)주의론의 모순과 21세기 사회주의’라는 논문이 “2005년 정부(교육인적자원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KRF-2005-005-J00201)”임을 밝히고 있으며, 이정구의 ‘새로운 대안경제의 모색’ 역시 “2005년 정부(교육인적자원부)의 재원으로 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KRF-2005-005-J00201)”라는 표시를 논문 하단에 덧붙이고 있다.

마르크스주의적인 입장에서 연구를 수행하는 이들은 국가가 연구자에게 지원하는 재원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그러한 재원을 가지고 연구를 수행하는 자신의 정체성을 어떻게 규정하고 있는지가 궁금하기는 했다. 어디서 돈을 받든 연구 열심히 해서 학문 발전에 기여하기만 하면 되지 않느냐면 딱히 할 말은 없지만, 그래도 이러한 논문 자체를 통해 자신을 ‘마르크스주의적인 사람’으로 제시하는 이들은 정체성 문제를 고민해볼 필요가 있지 않을까 싶은 것이다.

사실 정부에게서건 맘씨 좋은 자본가에게서건 돈을 받는다는 것은 돈을 받는 것 자체로 끝나질 않는다. 돈을 주고받는 거래관계로 인해, 마르크스도 지적했듯이 인간이 더 이상 스스로를 인간으로 여기지 않는 ‘유적 존재로서 인간으로부터의 소외’상태에 빠지기 십상이다. 이는 간단히 말해서 돈을 주고받으니 돈을 주는 사람이나 받는 사람이나 사람을 사람으로 보지 않게 된다는 것이다. 학문의 발전을 위해서는 돈이 반드시 필요하겠지만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이러한 소외현상은 참혹하기 그지없다.

12년 6개월 동안 이어져 오다가 최근 100회를 끝으로 정리된 부산대의 인문학담론모임에서 한문학과의 강명관 교수는 <다시 대학의 인문학을 생각한다: 공장의 침묵>이라는 글을 발표했다. 이 글에는 참혹한 현상들이 처절하게 거론돼 있다. 몇 가지를 들춰보자.

“생각해 보시라. 우리가 얼마나 변질되었는지, 얼마나 타락했는지. 우리의 일상에서의 대화가 얼마나 처참해졌는지. 학문의 내용은 사라지고 오로지 연구비, 학술진흥재단이 대화의 화제의 중심이 되었고, 또 이따금 어떤 연구자가 거창한 연구비를 수주했다(거창한 연구가 아니라)는 것이 부러움의 대상이 되었다. 이제 수치감도 버린 지 오래다.” “가증스러운 일은, 이런 연구비의 저주를 당연시하면서, 연구비로 연구를 통제하고 연구자를 노예화하는 외적 강제를 열렬히 찬양하는 주구(走狗)도 생겨난다는 것이다.”

강명관의 글을 읽고 나니 요즘 대학의 사정을 대강이나마 짐작할 수 있었으며, 왜 그리 돈을 쏟아부어도 인문학이 발전하지 않았는지도 알 수 있었다. 인문학을 하는 주체가 사람이 아니라 개(走狗)였던 것이다.(강유원/철학자)

참세상(07. 06. 29) 불붙은 한국학술진흥재단 기금 활용

둘째날 전체주제 '반자본주의적 대항지구화운동의 쟁점'과 '분자혁명론'이 오전10시 30분경 시작됐다. 토론 과정에서 윤수종 교수도 지적한 이야기지만, '대항지구화운동'이라는 주제가 직접적으로 다뤄지지는 않았다. 김창근 연구자의 '신자유주의 세계화와 한국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발제에 대해 조정환 연구자가, 윤수종 연구자의 '분자혁명론' 발제에 대해 이득재 연구자가 각각 토론을 부쳤다.

발제와 토론을 한 김창근 연구자와 조정환 연구자는 각자의 생각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은 채 격론을 벌였다. 플로어에서도 토론에 적극 참여했다. 뜻밖에 학술진흥재단 기금 활용 문제가 큰 쟁점이 되었다. '국가'와 '자율'을 둘러싼 해묵은 논쟁이 예상되었으나 연구자들의 현실적인 문제와 연동된 토론으로 이어져 흥미롭고 유의미한 토론으로 기록될 듯하다. (토론 내용을 그대로 싣되, 곳곳에 윤문을 했으며, 일부 누락과 의역이 있음을 밝혀둔다.)

조정환 : 우선 이 발제문이 한국학술진흥재단에서 예산을 받았다고 한 점(김창근 발제문 736쪽 : 이 논문은 2005년 정부(교육인적자원부)의 재원으로 한국학술진흥재단의 지원을 받아 수행된 연구(KRF-2005-005-J00201))이 인상적이고 서먹서먹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지원을 하는 주체가 정부로 되어 있고 그래서 정부 그 자체가 자율적 주체인 것으로 보인다. 이는 엄밀하게 보면 정부라 불리는 괴물이 있어서 국민, 다중으로부터 세금을 빼앗아 마치 자기 자신이 남들에게 시혜를 베푸는 것처럼 행동하는 것이다.

다시 말해 우리의 사유 활동을 국가화 하는 방식이 지금과 같은 방식으로 나타나는데 맑스코뮤날레에서 정부 지원을 받은 논문들이 공공연한 석상에 오르는 것이 어떤 의미를 갖는지 숙고했으면 좋겠다. 좌파 속으로 정부와 국가가 살금살금 기어들어오는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든다. 이 주제와 연관되어서 하는 이야기다.

발표자는 국가자율성이 절대적이냐 상대적이냐에 초점을 놓고 발전국가론이 말하는 상대적 자율성을 말하고 있는데, 사실은 절대적 자율성에 가깝다. 진정한 의미에서의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으로 기금을 바라볼 때 국가의 선명함이 확인될 것이다.

맑스코뮤날레 논문 발표되고 쟁점의 구조, 진폭을 나타나기 위해 배치할 때는 국가 자체 내부의 국가의 기능을 둘러싼 논쟁으로 좁혀져서 혁명적 대화로 발전하기는 어렵지 않을까 생각한다. 어쩌면 (본인이) 적절한 토론자일 수도 있겠다. 논의 출발점을 맑스에서 출발한다.

두 부분 이야기했는데 토대와 상부구조론에 입각해서 정치적인 상부구조에 속한 국가가 토대로부터 상대적으로 자율적이라는 이야기와 정부가 사회로부터 자율적이라고 하는 두 가지 주장인데, 왜 우리가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에 초점을 맞추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 확립 쪽으로 해석해야 하는지 의문스럽다.

토대 상부구조론에서 맑스의 강조는 토대로부터 상부구조의 강한 규정성 문제였는데 (발제문에는) 토대의 상부구조 규정성이 누락되어 있는 것 같다. 구조라는 용어를 통해서 발표자가 염두에 둔 것은 국가에 대한 자본의 규정성이고 자본 중에서도 대자본 재벌의 규정성을 생각하고 있다. 맑스가 토대에서 강조한 경제적 생산관계는 생산영역에서의 사람들간의 투쟁이고 계급적 적대인데 프롤레타리아트를 강하게 의식하지 않을 수 없다. 노동이 문화나 정치에 미치는 강한 규정성, 거꾸로 국가의 노동에 대한 의존성을 빼먹고서 토대 상부구조론의 올바른 접근을 하고 있는가 의문스럽다.

보나빠르티즘 국가가 사회로부터 분리된 것은 사실이다. 맑스도 그렇게 논리 전개를 하고 있다. 하지만 맑스의 초점은 루이보나빠르트 브뤼메르 18일의 최후에 두더지 이야기가 있지 않느냐. 48년 혁명적 상황에서 아래로부터의 투쟁들이 위에 구멍을 파내면서 통치 안정성에 빈틈을 드러낸 게 18일이다. 특 치면 무너지는 것이 국가였다는 것이다.

적어도 맑스에게 국가의 자율성이란 산노동에 대한 모든 상부적 형식들의 의존성을 이야기하는 방편이었다. 그런데 지금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 논문에서는 노동에 대한 관심 없이 초점으로 부상되고 있는데, 유럽으로 치면 유로코뮤니즘, 구조개혁주의 그래서 노동자계급정당들의 제도화가 급격히 진행되는 20세기 후반을 나타낸다. 그 상황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정당운동들이 기본적으로 혁명성을 상실하면서 부르주아 정치권의 야당으로 편입되어가는 과정에서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이 나타난다. 네오맑시즘도 그렇고.

그렇다면 발전국가론이 네오맑스주의로부터 무엇을 빌려오든 간에 기본적인 논점은 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인가 절대적인가 하는 문제는 아니라고 본다. 국가의 자율성이 상대적으로 보이기도 하고 절대적으로 보이기도 하는 상황은 왜 나타나는가. 어떤 상황에서 그렇게 나타나는가를 푸는 것이어야 한다.

결론부터 이야기하면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이야기하는 발표문의 주장은 정도의 차이는 있다 하더라도 국가가 갖고 있는 노동으로부터의 자율성이라는 관념을 신비한 형태로 옹호하고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강조하는 이론 전개이다.

오늘날의 자본이 착취하는 것은 일국의 경제(즉 국민경제) 내부의 노동력이 아니라 전지구화된 삶정치적 공동체 자체이다. 국가는 이제 자본가들의 공동위원회도, 자본이 사용하는 억압적 도구도, 일국 자본들의 집합적 대표자도, 사회적 자본가도 아니다. 그것은 일체의 대의기능을 외면할 정도로 사회로부터 분리된 상태 속에서 사회적 삶의 생산과 재생산 속에 깊이 침투하여 삶 자체를 흡혈하기 시작한 네트워크화된 제국적 삶권력의 기관들 중의 하나이다.

국가가 다중의 삶으로부터 크게 분리되어 있는 상황으로 보고 이 상황을 이론화하는 지배적인 것이 탈근대화론인데, 포스트모더니즘 국가이론의 경우에는 국가가 사회로부터 분리되어 시뮬레이션 역할을 수행하는 것으로 이야기한다. 그러므로 국가는 어느 것으로부터도 구애받지 않는 상대적 자율을 이야기한다.

국가의 자율성을 강조하는 것과 자율적 행위자로서 이야기하는 것 모두 유사성이 있다. 발전국가론이 제3세계 신흥공업국에서부터 국가의 자율성을 이끌어내는가 하면 포스트모더니즘은 유럽사회로부터 찾아내는 것이 다르지만 국가의 자율성이라는 점은 두 개 공히 강조하고 있다,

발제자가 이야기하는 상대적 자율성도 기본적으로는 이 논리 틀에서 진행되는데 사라져버린 기반을 국가의 상대적 자율성을 떠받쳤던 과거를 그리워하는 한 형태라고 본다. 발전국가론 비판 부분은 기본적인 논조에서는 동의하므로 건너뛰고, 상대적 자율성 부분을 문제 삼겠다. 거의 전적으로 국가와 자본의 관계에 집중된 이러한 문제의식 속에서 국가는 노동으로부터 자율적인가 라는 문제가 진지하게 제기되는 것은 불가능하다.

노동계급을 수동적으로 취급한다거나 할 때 이런 이야기가 나올법 한데, 그냥 지나가는 방식으로 서술되면서 역사 속에서 노동계급이 자율적인 행위를 하지 못했다 라고 하는 이미지를 남겨두고 있어 안타깝다.

국가가 정책 결정과 정책 집행에 자율적 주체로 나타날 때에도 그 정책의 주요한 관심사는 응당 노동하는 사람들을 어떻게 착취해서 이들로부터 효율적으로 이윤을 뜯어낼 것인가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어 있다. 산노동에 대한 착취 문제가 있는 한 노동에 대한 국가 정책의의존성은 벗어날 수 없는 지반이다.

국가의 자율성에 대한 모든 담론에 노동의 자율성, 삶의 자율성을 배치시켜야 한다. 엄밀히 말하면 국가의 자율성 개념은 삶의 자율성이라 하겠는데, 삶 자체가 스스로를 자율적으로 운영하지 못하는 특정한 상황에서 나타나는 반영으로 생각해야 한다.

김창근 : 정부 지원문제 관련해서는 그렇게 언급하는 것은 부당하다. 정부의 지원을 받아 연구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지원을 받기 때문에 우리 사상에 문제가 있다거나 하지는 않는다. 내 글에 자본주의적 요소가 슬금슬금 기어와서 사고를 마비시키지는 않았다. 그런 비평은 타당하지 않다. 나머지 비평은 본인이 자율주의 이론을 받아들이지 않기 때문에 그르다고 본다.

국가와 자본 관계를 이야기했다. 물론 노동의 문제를 떼놓고 이야기하는 건 아니다. 자율주의 이론에 따르면 국가는 자본에 완전히 종속된 걸로 나타난다. 국가와 자본을 동일시한다고 본다. 우리가 정치와 경제를 구분하는 이유는 무어냐. 네그리 이야기룰 하는데 제국이 뭐냐, 국가와 결합된 주체다.

노동의 자율성 이야기를 하는데 노동이 자율적이라고 하고 스스로 떨쳐 일어난다고 하면 왜 고민하나,. 다중이 산발적인 투쟁을 하지만 다중 스스로 혼자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우리가 고민하는 것 아니냐. 민중들이 자율성을 갖지 않는다는 것을 의미하는 말은 아니다. 그것을 직접 획득하지 못하므로 우리가 이렇게 토론하는 거 아닌다.

모든 걸 자본과 나머지로 나누는데, 그렇게 설정하면 문제는 굉장히 쉽다. 그러나 현실을 설명하지는 못한다. 정치가 쉬운 문제가 아니다. 여러 계급계층이 존재하므로 고려할 것이 많고 이데올로기 면에서 계속 처절히 깨지는 것 아닌가.

도요차 모델 이야기를 하는데 도요타 모델은 일본의 자동차가 노동자를 가장 강력하게 착취하는 체계이다. 일본에 중소기업들을 적기생산방식이라 해서 도요타 앞에 기다리게 하는 체계다. 노동자 자기가치화를 강조하는 포스트모던에서 노동자 자기 주체를 만들고 국가로부터 자본으로부터 자율을 이야기하는 것이 얼마나 실효성이 있는지 의문이다. 조정환 님은 이런 주장들이 얼마나 현실성이 있는지, 얼마나 현실을 반영하는 지 생각해야 할 것이다.

조정환 : 한국학술진흥재단(학진) 문제는 사유 활동, 학문 활동에서 국기자원시스템에 대해 심각한 문제의식을 가져야 한다고 본다. 이런 구조는 두뇌 활동 자체가 국가에 의해 장악되어가는 과정으로 이해된다. 이 문제는 배경과 효과 등에 대해 토론해보는 것이 좋겠다.

다중이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기 때문에 모였다고 하는데 이는 우리와 다중을 분리시켜버린다. 여기 모인 우리가 다중이고 저 역시 그런 한 사람으로서 지금 바로 우리가 문제를 제기하고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과정에 있다. 국가를 우리 중심에 놓고 국가를 내면화 하는 방향으로 생각할 것인가 아니면 우리들의 삶의 힘을 중심에 놓고 국가를 해체할 것인가가 우리의 쟁점이다.

정치는 간단하지 않고 복잡하다는 것 동의한다. 정치에 대한 사유에 있어 제도와 국가의 세밀한 권력관계에 대한 내부적 역학에 너무 관심을 빼앗겨서 정작 우리 자신이 어떤 상태에 있고, 결집 조직될 수 있고, 우리의 능력이 얼마나 되는 지에 대한 관심은 잃고 있다.

현실 반영이 얼마만큼 현실을 반영하는가 라고 했는데 현실은 생각하기 따라 다르다. 어떤 사람이 현실 문제라고 보는 것을 또 다른 사람은 무관하다고 본다. 돈을 버는 사람들은 우리 모임이 매우 공허하고 비현실적인 사람들이라고 볼 것이다. 어떤 맥락에서 보느냐에 따라 현실은 결정된다.

정성진(플로어) : 조정환 님이 언급한 정부지원금 문제는 저도 연관되어 있다. 사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그랬는데 학진 연구비 지원시스템이 신자유주의 학문정책의 심각한 문제가 있다는 것 공감하고 있다. 그것을 개혁해야 한다는 점도 공감한다. 하지만 개혁이라는 게 국가 정책 비판과 변혁적 개입 없이 단지 회피하는 것으로서의 교육, 학문정책에 대한 답이 나올까? 그렇지 않다.

본인의 학교 이야기해서 그렇지만 연구소를 하고 있다. 국립대학 연구소에서 지난 1999년부터 연구기관 자체를 진보적인, 맑스적인, 사회주의적인 연구자들의 관제고지로 장악해서 제도권 내에서 자본주의 자체를 변혁하고 지향하는 연구센터를 만들어보자는 상당한 동의를 구하고 여태 굴러왔다.

김대중 정부 때부터 중점연구소지원사업에 몇 번 선정된 바 있다. 개량주의적이고 노무현정부의 정책 쪽으로 밀고 나가려는 측면이 있지만, 과감히 맞서며 활동해왔다. 심사 과정을 보면 알 것이다.

지금 밖(로비)에 보면 우리가 2004년부터 간행해온 연구물들이 있다. 조정환 님도 서너 차례 기고활동도 했고 원고료도 드렸다. 조정환 님도 성공회대 사회문화연구소에 있고, 오늘 맑스코뮤날레 장소 제공하는 서강대 사회과학연구소도 중점 연구소로 선정된 바 있다. 맑스코뮤날레 돈 가치를 따지면 7백만 원인데 물론 다른 데서 할 수도 있을 것이다.

연구자 재생산 문제가 심각한 문제로 제기되고 있다. 사회실천연구소에서 우리 나름대로 진보적인 대학원 만들어보자는 이야기도 있고, 조직위에서는 맑스아키데미를 만들어보자는 이야기 나온다. 이 재원이 어디서 나와야 하나.

정부의 돈은 노동의 잉여가치를 착취한 거 아니냐. 그걸 이용해서 자본주의 변혁에 기여하자는 것이다. 정부 지원 받지 않는 걸 원칙으로 하자면 우리 호주머니 친구들 호주머니 털어서 한다는 건데 그것은 무엇이 될 건가. 따져보면 중소자본가로부터 지원받을 것 아닌가. 국가를 매개로 한 개념이 상당히 중요한데 조정환 님이 강조하는 자율주의에서는 그 부분이 배제되어 있다.

제국을 떠나서 코뮨이 자율적인 네트워크를 만들 수 있다고 하는데 그건 있을 수 없다. 국가와 자본에 포섭될 수밖에 없는 것이 현실이므로 자본주의 국가 문제를 넘어가지 않고서는 근본적인 변혁은 가능하지 않다. 한미FTA 대안 문제 관련, 발전주의 국가론 포함해서 개량적인 비판이 한국 사회 진보 구상에서 중요한 문제인데 그걸 피해간다. 국가를 떠나 회피하고 자본주의 극복하는 코뮨 건설된다는 것을 상상한다는 것인데 고전맑스주의 모두 정정되어야 한다. 자본주의 국가와 전면 대결하고 국가권력을 분쇄하는 과정 없이는 가능하지 않다고 본다.

플로어 : 조정환 님이 이야기한 김창근 님 재반론은 부당하다. 국가와 자본은 자율주의적인 개념이 현실의 반영을 제대로 하지 못한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 자율주의적으로 국가를 본다면 국가를 젖혀두고 자본 관계만을 본다는 것인데 현실이 과연 그런가. 국가를 무시하고 산다면 국가는 우리를 가만히 두냐는 말이다. 그런 의미에서 자율주의자들이 국가를 바라보는 개념 자체가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윤수종 : 저의 정체성 일부가 자율주의인데 완전한 자율주의는 아니고. 자율주의가 국가를 완전히 생각하지 않는다고 하는데 그렇지 않다. 저는 국가를 중요하게 생각한다. 글을 쓸 때마다 손끝에서 국가가 느껴진다. 추상적인 논의하면서 자율주의 한쪽으로 몰아부치는데 네그리 주장과 재해석을 두고 여러 생각은 있을 수 있다. 네그리가 국가를 도외시한다고도 생각지 않는다. 너무 단선적으로 이야기 되는 것 같다.

김창근 마무리 발언 : 학진 관련, 대학이 자본주의 속에 있으면서 지배적 엘리트 집단이라는 성격을 갖는다. 대학에 자금 제공하는 학진 역시 그런 성격에서 자유롭지 않다. 학진 자금을 지속적으로 받기는 어렵다. 정성진 님이 이야기를 안 했는데 김대중 정권 때는 어찌보면 학진 자체가 자율성이 많았다. 그러나 점차적으로 좌파쪽 사업은 배제하는 상황이다. 국가의 자율성을 이야기하는데 노무현정권에 와서 그런 자율성이 약화되고 있다.

우리가 국가에 비어있는 부분에 침투하면서 연구자를 키우고 공동연구를 통해 좌파적인 이론을 만들어내는 장으로 삼아야 하지 않을까. 교수 자리도 마찬가지다. 지배계급의 이익에 복무하도록 되어 있는 위치이다. 여러 교수들이 그런 걸 떠나서 좌파이론을 연구하고 만들고 하지 않느냐. 물론 한계가 있겠다. 하지만 끊임없는 비판을 가하면서도 활용할 수 있는 측면이 있을 것이다. 국가에 대한 상대적 자율성을 논할 때 취해야 할 자세라고 본다.

두 번째 문제는 윤수종 님 이야기다. 윤수종 님을 좋아한다. 스스로 자율주의 이야기하면서도 이론에 경직되지 않는다. 다중에서도 노동자계급의 중심성을놓치지 않고 국가의 중요성도 강조한다. 그래서 존경한다. 자율주의를 하려면 윤수종 교수와 같은 건전한 자세를 가져야 하지 않을까 하는 바램을 가져본다.

조정환 마무리 발언 : (사회자의 발언시간 확인에 대해) 내 발언에 제약을 하는 것 같다. 공포심이거나 적대이거나 둘 중 하나인 것 같다. 자율주의가 국가를 회피한다고 하는데 과연 제대로 짚고 있나. 정직한 접근방법인가 비판하고 싶다. 우선 국가에 영합하고 국가의 틀 속에서 그걸 접수해서 뭔가 내용적인 변화를 꾀한다는 벙법이 국가를 변형하고 해체시키는 방법인가. 결코 그렇지 않다. 국가를 강화하고 국가를 보조하면서 마음속으로 비판한다는 건 국가개혁주의의 한 유형이다.

학진에 대한 정성진 님의 태도는 학진 시스템이 우리에게 미치는 영향을 차단하고 해체시키는 것을 안 하는 것이다. 어떻게 좌파 색깔 가질 것인가 고민하며, 학진 재정 통한 학술 통제시스템에 문제제기 하지 않는 한 필연적이 될 수밖에 없다.

현실을 제대로 반영하는가 문제가 다시 나왔는데 전술을 결정할 때는 항상 단일한 것을 강조했다. 구체적 정세 구체적 행동방침 결정하는 것이고 당이 내리는 방침 앞에 객관적 현실은 하나였다. 당이 내리는 전술방침에 대한 현실 판단과 지침은 누구나 따르지 않으면 안 되는 보편적 명령이었다. 그렇게 이야기하는 권리가 누구에게 있나. 생태주의, 패미니즘, 맑스주의자가 보는 현실은 제각기 다르다. 현실은 처한 맥락에서 규정되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현실에 대한 각각의 대응들 속에서 어떻게 연결할 것인가를 고민해야 한다. 다함께라든가 특정 지도적 개인이 생각하는 것을 현실이라고 받아들이는 것을 단호히 거부하는 것을 현실관으로 삼아야 한다. 어떤 사람도 현실을 올바로 본다고 자임하고 강요할 권리는 없다고 본다.

플로어 : 학진, 재생산 이야기했는데 여기 대학원생들이 학진이나 교수 권력관계에 대해 비판적으로 봐야 한다. 석사과정에 있는데 학진으로 말미암아 학진과 교수와의 관계에서 문제의식이 상당히 기각되곤 한다. 학진 기금 활용해서 변혁적이고 진보적으로 사용할 수 있다는 진실한 마음은 동의하지만, 우리 사유와 활동이 거기에 종속되어 기각되지는 않는지 살펴봐야 한다.

전체토론 두 번째 '분자혁명론'은 윤수종 연구자가 발제하고 이득재 연구자가 토론을 부쳤다. 윤수종 연구자는 "분자혁명이 국지적인 미시혁명, 미시적인 국지적 해방 기획의 합계가 아니라, 사회적 영역 총체, 주체화양식 총체에서 무의식의 형성을 있는 그대로 분석적으로 파악하는 것"이라고 소개했다. 레닌주의와 무정부주의의 두 '극단적인 모형'에 대해 이를 일방적으로 폐기처분하기보다는 이해관계에 근거한 기존의 계급투쟁을 다양한 사회투쟁과 결합하면서 장기적이고 복합적이며 누적적 혁명과정을 이루어 나가자는 가타리의 문제의식을 발표했다.

윤수종 연구자는 앞서 논란이 된 학진 문제와 관련, "최근 진보평론이 소수자투쟁을 인정투쟁으로 정리한 기고글을 싣지 않았는데 그 글이 학진에서 상을 받았다는 이야기를 듣고 쾌감을 느꼈다"고 말하기도 했다. 윤수종 연구자의 발제에 대해 이득재 연구원은 토론에 부치는 열 개의 질문이 담긴 글을 제출했다.(코뮤날레 취재팀) 

07. 07.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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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우창 교수의 칼럼에 대해서 몇 마디 적으려고 검색하다가 지난달에 세상을 떠난 미국 철학자 리처드 로티에 관한 기사를 읽게 되었다(나는 부랴부랴 마이리스트 하나 작성하는 걸로 추모를 대신했었다). 기사 끄트머리에 사회적 독서목록에 올려놓은 <인문정신과 인문학>(아카넷, 2007)에 실린 김우창 교수와의 서신대담이 언급되고 있어서 이 페이퍼 또한 '사회적 독서'로 분류해놓는다(대담 내용은 조만간 읽어봐야겠다). 로티에 대해서는 기사를 읽어가면서 몇 마디 덧붙이도록 한다.

동아일보(07. 07. 17) 리처드 로티 교수 “보편적 진리는 없다” 플라톤에 반기

지난달 8일 미국 철학계의 이단자 리처드 로티(사진) 스탠퍼드대 교수가 췌장암으로 숨졌다. 향년 76세. 그는 ‘미국의 데리다’라 할 만큼 포스트모더니즘에 큰 영향을 끼쳤지만 주요 외신에선 그의 죽음을 보도하지 않았고 국내에서도 사정은 마찬가지였다. 그만큼 그는 분석철학 중심의 미국 철학계에서 이단적 존재였다.(*그 정도로 조용했었다면 의외이다. 철학계에서야 이단적이었다 하더라도 그는 저명한 '철학자'였는데 말이다.)



로티 교수는 진리의 보편성을 강조하는 서구 철학 전통을 맹렬히 비판해 상대주의자, 현대의 소피스트, 반()철학자로 공격받았다. 다른 한편으론 제2차 세계대전 이후 사실상 멸실된 프래그머티즘의 전통을 부활시킨 네오프래그머티즘의 기수라는 점에서 진정한 미국 철학자라는 찬사를 받기도 했다.(*그의 주저에 속하는 <실용주의의 결과>(민음사, 1996) 등이 모두 품절 상태라는 게 아쉽다.) 



한국 사회는 1990년대 포스트모더니즘의 열풍 속에 서구 합리주의 전통을 비판한 그의 이론 수입에만 급급했다. 1996년과 2000년, 두 차례나 그를 초청할 만큼 호기심은 컸으나 독일 철학이 강세인 한국에서 그의 철학은 여전히 겉돌았다. 별세를 계기로 그의 철학 세계를 들여다본다.

○ 로티는 왜 문제적인가
1931년 뉴욕에서 태어난 로티 교수는 14세에 시카고대에 입학할 만큼 조숙한 천재였다. 일찍부터 궁극의 진리를 추구했던 플라톤에 심취했던 그는 20세에 플라톤 철학의 한계를 파악하고 결별을 선언했다. 하지만 당시 미국 철학계는 논리와 언어를 중시하는 분석철학이 지배적이었다. 그 역시 분석철학으로 25세 때 예일대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30세에 프린스턴대 교수가 되면서 분석철학의 총아로 떠올랐다.(*그가 분석철학계에서 받은 주목은 저명한 논문모음집인 <언어학적 전회>의 편집을 맡았다는 점에서도 암시된다.)

 

그러던 그가 1979년 ‘철학과 자연의 거울’을 발표하며 플라톤 철학과 분석철학에 반기를 들었다. 그의 첫 주저로 꼽히는 이 책에서 그는 플라톤, 데카르트, 칸트로 이어지는 철학 전통을 본질주의, 정초()주의, 표상주의라고 비판하며 철학은 보편적이고 객관적 진리를 담보할 수 없다고 주장했다. 한발 더 나아가 ‘철학하기’와 ‘문학하기’를 동렬에 놓고 옳고 그른 것이 아니라 얼마나 참신한가가 중요하다고 설파했다.(*국내에는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이라고 어색한 제목으로 번역된 책이다.)



이는 연암 박지원이 정조에 의해 문체반정으로 몰린 것과 같은 파문을 미국 철학계에 가져왔다. 그는 결국 동료 교수와의 갈등 끝에 버지니아대로 옮겨야 했지만 문학과 철학을 아우르며 자신만의 철학을 펴 나갔다.(*로티는 프린스턴대 철학과에서 쫓겨나다시피 하여 버지니아대의 '인문학교수'로 자리를 옮기고 이후에 스탠포드대학의 '비교문학과'에 재직했다.) 

○ 로티는 상대주의자인가
로티는 참된 지식으로서의 진리는 언제든 오류 가능성이 있으며 인간의 문제 해결에 도움을 주는 역사적 조건 하에서만 진리라는 프래그머티즘의 계승자를 자처했다. 이는 프래그머티즘이 실용주의로 번역될 때 발생하는 오류, ‘좋은 게 좋은 것’이라는 적당주의 내지 결과만 중시하는 도구주의에 빠졌다는 오해를 낳았다. 그러나 프래그머티즘 사상가인 찰스 퍼스, 윌리엄 제임스, 존 듀이는 자신이 믿는 진리를 타인에게 강요하는 근본주의의 위험성을 가장 정교하게 이론화한 실천철학가로 재조명되고 있다.(*미국의 프래그머티즘이야말로 우리식으로 하면 '실학(實學)' 아닌가?) 



로티의 네오프래그머티즘은 여기에 공()과 사()의 구분을 도입했다. 타인의 고통을 줄이기 위한 실천이 공이라면 자신의 신념을 이론화하는 것은 시를 쓰는 것과 같은 사적 행위로 바라봐야 한다는 것이다(*이런 관점은 그의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민음사, 1996)에 잘 나타나 있다. 알라딘에는 아예 서명도 뜨지 않지만). 이는 반()철학자라 불릴 만큼 급진적인 로티 철학의 진면목을 보여 주는 대목이다. 실제 로티는 이론적으론 포스트모던 문예철학을 펼쳤지만 이를 정치 현실에 바로 적용하려는 ‘문화적 좌파’를 비판하며 의료·교육·조세 개혁과 같은 구체적 민생정책을 지지했다.



로티 밑에서 박사 후 과정을 마친 이유선 군산대 연구교수는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라는 철학의 기존 담론구조를 버리자는 로티의 말을 상대주의로만 받아들이는 것은 달은 보지 못하고 이를 가리키는 손가락만 보는 것과 같다”고 지적했다.(*이유선 교수의 <리처드 로티>(이룸, 2003)은 가장 평이하면서도 요긴한 로티 입문서이다. 객관주의와 상대주의에 대해서는 리처드 번스타인의 <객관주의와 상대주의를 넘어서>(보광재, 1996)가 아주 잘 씌어진 책이다.) 



○ 관련 저술
로티의 저술은 민음사에서 번역 출판된 ‘철학 그리고 자연의 거울’ ‘실용주의의 결과’ ‘우연성, 아이러니, 연대성’ 등이 있다. 로티의 사상을 다룬 개론서로는 ‘리처드 로티’(이유선·이룸), ‘로티의 신실용주의’(김동식·철학과현실사), ‘로티’(데들레프 호르스터·인간사랑) 등이 있다.(*거기에 덧붙여, 로티가 추천사까지 쓴 마크 에드먼드슨의 <문학과 철학의 논쟁>(문예출판사, 2000)이 로티의 입장과 정신에 충실한 책으로 읽어볼 만하지만 국역본 번역은 암호문 수준이다.) 



한국학술협의회 학술지 ‘지식의 지평’ 최근호까지 2회에 걸쳐 실린 김우창 고려대 교수와 서신대담 ‘아시아의 주체성과 문화의 혼성화’에선 투병 중임에도 진지한 논쟁을 펼친 노학자의 정열을 확인할 수 있다.(권재현 기자)

07. 07. 19.

P.S. 로티에 관한 책으로 두 권만 더 언급하기로 한다. 하나는 <로티와 그의 비판자들>(2000)로 블랙웰출판사의 시리즈물 중 하나이다. 오래전에 교보에서 구입한 책인데 로티의 쟁점들에 대한 다양한 비판과 그의 답변들을 싣고 있다. 다른 한권은 내가 안 갖고 있는 책인데, <자유를 돌보아라, 진리는 스스로 돌볼 것이다>(2005)란 제목의 인터뷰집이다. 원제는 'Take Care of Freedom and Truth Will Take Care of Itself: Interviews with Richard Rorty'. 아마도 로티 입문서로는 가장 적합하지 않을까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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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늘빵 2007-07-19 19:57   좋아요 0 | URL
허...14살에 대학에, 30살에 교수가...

로쟈 2007-07-19 20:40   좋아요 0 | URL
미국에서야 대학에 조기입학 하는 경우가 드물진 않으니까요. 30살에 교수가 된 것도 특별히 이른 건 아니죠. '정교수'가 된 거라면 얘기는 좀 다르지만...
 

며칠전 '영어에 미친 나라'란 제목으로 몇몇 기사를 스크랩해놓은 적이 있는데, 이번주 한겨레21에 이 문제에 대한 강준만 교수의 유익한 분석칼럼이 실렸다. 영어 광풍은 개개인의 광기의 소산이 아니라 한국 근대사의 조건(시스템)이 낳은 자연스런(합리적인!) 결과라는 것. 문제를 보다 넓게/깊게 생각해보기 위해서 필독할 만하다.  

△ 영어 광풍의 시대다. 초등학교 교실에서도 영어는 필수다. 치열한 경쟁이 지배하는 한국에서 경쟁력을 키우기 위해 광풍에 휩쓸리는 건 ‘모순’된 현실에서 ‘합리적 적응’이다. (사진/ 한겨레 이정아 기자)

한겨레21(07. 07. 12) 영어 광풍은 합리적인 행위다

한국인은 왜 영어 공부를 하는가? 한국 최초의 영어 교육 기관인 동문학교가 서울 재동에 설립된 1883년부터 오늘에 이르기까지 120여 년의 긴 세월 동안 한 가지 일관된 이유가 있었다. 그건 바로 영어가 성공과 출세를 위한 필수 도구였다는 사실이다.

120여 년간 성공·출세의 도구

개화기 시절 미국 교육 선교사 헨리 아펜젤러가 지적했듯이, 조선 학생들이 영어를 배우는 목적은 한결같이 ‘벼슬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런 의도가 있었건 없었건, 이 시기부터 영어의 위력을 가장 드라마틱하게 보여준 인물은 이승만이었다.


1886년 6월 정식 학교로 개교한 배재학당에 몰려든 학생들이 배재학당에 가장 큰 기대를 걸었던 건 바로 영어 공부였다. 1894년 말 배재학당에 입학한 이승만도 훗날 “내가 배재학당에 가기로 한 것은 영어를 배우려는 큰 야심 때문이었고, 그래서 나는 영어를 열심히 공부했다”고 회고했다.

개화기의 대표적인 영어 천재는 윤치호로 알려져 있지만, 이승만의 영어 능력도 만만치 않았던 것 같다. 그는 영어를 공부한 지 6개월 만에 배재학당의 신입생반을 맡아 영어를 가르칠 정도로 급성장했다. 이승만은 입학한 지 2년 반 남짓한 때인 1897년 7월에 배재학당을 졸업했는데, 이승만은 각국 외교관들까지 참석한 졸업식 행사의 일환으로 ‘조선의 독립’이란 제목으로 영어 연설을 해 명성을 떨쳤다.

이후 이승만은 미국 유학을 떠나, 조지워싱턴대학 학사, 하버드대학 석사, 프린스턴대학 박사학위를 따냈다. 제2차 세계대전 뒤 미국이 세계 최강대국으로 부상한데다 한반도 문제에 소련과 더불어 결정권을 가지면서 이승만의 영어 실력, 미국 학력, 미국 인맥은 그 누구도 넘보기 어려운 이승만의 독보적인 정치적 자산이 되었다.

해방과 함께 남한에 진주한 미군은 영어를 공용어로 사용한다는 포고령 1호를 발표함으로써 영어 능력이 권력의 원천이 될 것임을 예고했다. 해방 정국에서 가장 먼저 나온 신문은 국문 신문이 아닌 영어 신문이었으며, 좌익 계열 신문인 <조선인민보>의 창간호(9월8일)마저 1면에 영어로 ‘연합군 환영’이라는 톱기사를 실었다는 게 그걸 잘 말해주었다.

미군정 치하에선 영어를 할 수 있는 통역관들이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는 ‘통역 정치’가 판을 쳤다. 그런데 영어 통역을 할 수 있을 정도의 실력을 갖춘 이는 거의 모두 일제 때 해외유학을 했거나 국내에서 고등교육을 받은 대지주 집안 출신으로 해방 전엔 친일, 해방 뒤엔 친미 노선을 취한 사람들이었다. 해방 정국의 정치가 왜곡된 주요 이유 중 하나다.

미국 가려면 교회 먼저 가라

한국 군대 창설의 최대 문제 가운데 하나도 영어였다. 미군과의 소통이 가장 중요했기에 미군정은 1945년 12월5일 군사영어학교를 만들었다. 이 군사영어학교 출신이 한국군을 좌지우지하게 된다.
영어 능력은 개인적 벼락 출세를 가능케 한 유일한 길이기도 했다. 일부 통역관들은 일본인이 남기고 간 적산가옥을 차지하고 온갖 특혜를 챙기거나 중개하는 역할을 했다. <조선일보> 1948년 8월12일자에 실린 ‘악질통역: 건국을 좀먹는 악(惡)의 군상’이라는 제목의 기사는 “밤이 되면 이 집 저 집으로 찝차를 몰고 돌아다니며 뚜쟁이 노릇하기에 분주하여 양쪽에서 몇 푼 안 되는 푼돈이나 얻어먹는 추잡한 통역으로부터 호가호세(狐假虎勢)하여 진주군의 권한을 최대한대로 악용하고 사복을 채우는 통역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비리 유형을 소개했다.

그렇게 영어 능력이 우대받는 해방 정국에서 최초의 베스트셀러는 영한사전이었다. 많은 청소년과 젊은이들이 “그 영어사전 속에 밝은 미래가 있는 것처럼 느끼면서 보물처럼 소중하게 간직하곤 했다”는 게 한결같은 증언이다.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이 된 이승만은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우대했다. 이기붕은 미국 유학생 출신으로 미군정 통역을 하다가 이승만의 비서가 되어 그의 후계자 위치에까지 오르게 되었다. 영국 배를 타던 마도로스였던 신성모도 뛰어난 영어 실력으로 이승만의 사랑을 받아 국방장관에 올랐다.
6·25 전쟁을 겪으면서 한국인은 영어와 미국의 위대함을 온몸으로 느꼈다. 전쟁 중인 1952년에 나온 <샌프란시스코>라는 가요는 “뷔너스 동상을 얼싸안고 소근대는 별 그림자/ 금문교 푸른 물에 찰랑대며 춤춘다/ 불러라 샌프란시스코야 태평양 로맨스야/ 나는야 꿈을 꾸는 나는야 꿈을 꾸는 아메리칸 아가씨”라고 노래했다.

개신교 교회는 그런 이상향의 언어인 영어를 배우고 실제로 그 이상향에 유학을 갈 수 있는 주요 통로였다. 당시 YMCA는 “영어 수학 강습회를 하는 곳이다”라는 말이 널리 퍼질 정도로 영어 강습에 주력했는데, 1950년대 말까지 약 20만 명이 YMCA의 영어 강습회를 수강했다. 그렇게 영어를 익히면서 선교사나 미션계 학교를 배경으로 하면 미국 유학 가기도 쉽고 미국에 가서도 큰 도움을 받을 수 있었다. 그래서 “근자에는 미국 가기 위하여 교회를 이용하려는 사람이 많다”는 말까지 나올 정도였다.

이승만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을 우대한 건 아니었다. 세상이 그랬다. 야당 인사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승만 시절은 물론 그 이후에도 장면, 조병옥, 윤보선, 장준하 등의 경우처럼 정치적 거물들은 모두 영어가 능통한 인물이었다. 5·16 쿠데타 당시 육군 참모총장이었던 장도영도 비록 박정희와의 권력투쟁에서 패배했지만 한국군 장성 중에선 영어가 가장 능통한 인물이었다.

경제 개발기의 수출지상주의, 김영삼 정권 들어 외쳐진 세계화는 영어의 현실적 가치를 더욱 크게 만들었다. 1995년 2월23일 정부는 97학년도부터 초등학교 3~6학년생에게도 영어를 주당 2시간씩 정규 교과목으로 가르치기로 했다고 발표했다. 이후 어린이 영어학원이 급증하는 등 1996년 전국 방방곡곡에서 치열한 ‘영어 전쟁’이 벌어지기 시작했다.

그런 현실에 자극받은 작가 복거일은 1996년 11월 영어를 배우는 데 들어가는 엄청난 비용을 생각하면 그 투자의 효율을 높이는 첩경이 영어의 공용어화라는 주장을 들고 나왔다. 복거일이 1998년 6월 <국제어 시대의 민족어>라는 책을 내면서 영어의 공용어화를 둘러싼 뜨거운 논쟁이 벌어졌지만, 2000년대 들어 한국 사회는 더욱 뜨거운 ‘영어 광풍’에 휩싸이게 되었다. 이는 모두 알고 있는 것이기에, 이제 곧장 오늘의 이야기로 들어가자.

“영어도 한마디 못해? 나가”

2007년 6월23일 밤 SBS의 <그것이 알고 싶다>는 ‘영어 광풍’을 다뤘다. 이 프로그램의 메시지는 전 국민이 다 영어 광풍에 휩쓸릴 필요는 없으며, 영어가 필요한 업종에 종사하는 사람들만 영어를 잘하면 된다는 것으로 압축할 수 있겠다. 맞긴 맞는 말인데, 설득력이 떨어진다. 왜 그런가?

지난 4월 국내 영문학자들이 <영어, 내 마음의 식민주의>라는 책을 냈다. 영어 광풍에 대한 비판적인 시각을 담고 있는 책으로 <그것이 알고 싶다>의 메시지와 통한다. 소중한 작업으로 높이 평가할 만하다. 그런데 아쉬움이 있다. 언론은 이 책을 소개하면서 우리나라에서 가장 영어를 잘하고, 잘 아는 사람들인 영문학자들이 한 이야기라 귀담아들을 가치가 있다고 했지만, 내가 보기엔 바로 그 점이 설득력을 떨어뜨린다.

무슨 말인가? 나도 ‘광풍’이라는 말을 쓰긴 했지만, 나는 그 광풍이 매우 합리적인 행위라고 본다. 광풍을 비판하는 사람들은 영어를 아주 잘하는 사람들이거나 좋은 학벌을 갖춰 이미 사회적으로 성공한 사람들이다.

꼼꼼하게 살펴보자. 한국에선 애초부터 영어 공부의 주목적은 실용성이 아니다. 내부 경쟁용이다. 자녀를 영어권 국가에 유학이나 어학연수를 보낸 부모들은 그 점을 잘 알고 있다. 한국에서 좋은 위치를 차지하기 위한 수단으로 영어를 공부시키는 것이다. 한국 영어 공부 120여 년의 역사가 웅변해주는 것도 그 점이다. 영어 공부는 일종의 권력투쟁이다. 자신은 좋은 대학에 들어가기 위해 영어 광풍에 휩쓸려놓고선 이제 대학을 졸업했다는 이유로 영어 광풍을 비판하는 건 말이 안 될 건 없지만 어째 좀 허전하다.

똑같은 대학, 똑같은 학과를 나와도 영어가 우열을 결정한다. 2006년 3월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서울대 경영학과 86학번 졸업생 51명을 조사한 결과, ‘영어 실력이 우수하다’고 응답한 그룹의 평균 연봉(1억600만원)은 ‘중간 혹은 그 이하’라고 답한 그룹(7천만원)보다 3천만원 이상 많았다. 이는 한국 사회 전반에 통용되는 일반적인 법칙이다.

그래서 계속 영어 광풍에 휩쓸리면서 그 광기를 키우자는 건가? 그게 아니다. 영어 광풍을 비판하는 것으로 그칠 게 아니라 한 걸음 더 나아간 대안을 모색해보자는 뜻이다. 한 네티즌의 반문처럼 <그것이 알고 싶다>의 “PD나 박상원씨도 자녀에게 그런 교육을 하고 있지 않습니까?”라는 물음을 의제로 삼아야 한다는 뜻이다. 또 다른 네티즌의 감상문을 보자.

“영어 무지하게 씹어대는 글 몇 개 썼지만, 사실 나도 영어 공부를 하는 넘 중에 하나로서 내 자신이 모순일세그려. 한국 사회가 날 이렇게 만들었지. 제발 대한민국, 나의 조국아. 힘 좀 키워서 미국넘들이 한국어 배울 수밖에 없도록 해다오. 나이 처먹고 영어 공부하려니까 머리가 안 따라간다. 요즘은 두통까지 생겼잖아.”

아니다. 대한민국이 아무리 힘을 키워도 지금과 같은 방식의 내부 경쟁이 살아 있는 한 우리는 또 다른 광풍을 만들어낼 수밖에 없게 돼 있다. 한 네티즌이 날카롭게 지적했듯이, 우리의 현주소는 “당신 영어 잘하니까 해외 쪽으로 일하는 곳에 특별 채용하겠소”가 아니라 “영어도 한마디 못해? 이거 저질이구만. 나가”라는 식이다.

즉, 문제의 핵심은 ‘내 마음의 식민주의’가 아니라는 것이다. ‘내 마음의 식민주의’가 전혀 없다는 건 아니지만, 누구 못지않게 ‘식민주의’를 혐오하고 증오하는 사람일지라도 기존 시스템하에선 그런 식민주의의 선봉이 될 수밖에 없는 현실에 더 주목해보자는 것이다.

영어 광풍은 우리 ‘대학입시 전쟁’의 정확한 반영이다. 한번 딴 간판이 평생의 경쟁력을 결정하는 상황에서 간판 쟁취를 위해 미쳐 돌아가는 건 매우 합리적이다. 영어 광풍은 그런 합리성의 부분일 뿐이다. 대학입시 문제를 끌고 들어가면 문제의 덩치를 더 키우는 게 아니냐는 반론이 가능하겠지만, 그게 진실인 걸 어이하랴.

사실 정작 흥미로운 현상은 우리의 대학입시 광풍을 약화시킬 수 있는 방안에 대한 최소한의 국민적 합의조차 마련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기껏해야 본질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는 내신 문제를 둘러싸고 대통령까지 나서서 치열한 싸움을 벌이고 있는 수준이다. 왜 그럴까? 당신은 이 물음에 대한 답을 알고 있는가?

우리는 한국 사회와 관련해 ‘쏠림’ ‘소용돌이’ ‘1극 구조’라는 말을 즐겨 쓰지만, 그 원리를 자신의 일상적 삶을 이해하는 데 적용할 정도로 잘 알고 있는 것 같지는 않다. 그래서 지난 2002년 ‘월드컵 현상’과 현재의 ‘영어 광풍’은 정확히 같은 현상이라는 걸 이해하지 못한다. 좋건 나쁘건 우리는 1극으로 쏠려 소용돌이를 일으키는 사회문화적 구조와 습속을 갖고 있는 국민이라는 점을 먼저 이해할 필요가 있다는 뜻이다.

월드컵 현상과 정확히 같은 소용돌이
우리는 자주 그런 특성에 서구적 기준으로 비판을 퍼붓지만, 그게 바로 한국이 세계에서 가장 빠른 경제성장을 이룬 이유이기도 했다는 걸 인정해야 한다. 그런 인정이 문제 해결의 올바른 출발점이기 때문이다. 동전의 양면 가운데 어느 한 면이 싫다고 그것만 없앨 수는 없는 일이다.

광풍은 한국적 삶의 본질이다. 이른바 ‘다이내믹 코리아’라는 말이 정확히 무슨 뜻인지는 모르겠지만 그걸 좋은 의미로 쓰는 말이라면 바로 그것의 옆얼굴인 셈이다. 광풍을 사랑할 필요는 없지만, 혐오할 필요도 없다. 우리가 혐오해야 할 건 ‘승자 독식주의’다. ‘쏠림’ ‘소용돌이’ ‘1극 구조’를 이용해 취하는 이득은 부당이득이기 때문이다.

우리에게 필요한 건 승자 독식주의를 저지하기 위한 방안들을 차분하게 하나씩 실천해나가는 일이다. 특히 개혁이라는 미명을 앞세워 승자 독식주의를 정당화하는 걸 경계해야 한다. 이젠 ‘위에서 아래로’와 ‘큰 것에서 작은 것으로’를 외쳐온 연역적 개혁의 한계를 인정하고 ‘아래에서 위로’와 ‘작은 것에서 큰 것으로’를 실천하는 귀납적 개혁을 병행해야 할 때다. 각종 자발적 시민결사체들이 거대 담론과 정치에만 집중한 나머지 각 분야에서 얼마든지 통제할 수도 있었던 ‘영어 광풍’을 키우는 데 일조했던 건 아닌지 성찰할 필요가 있다.(강준만 전북대 신문방송학과 교수 )

07. 07. 14.

P.S. 본문에서 강준만 교수가 업급한 한국일보의 기사도 스크랩해놓는다. 나도 읽었던 기억이 있는 기사이다.

한국일보(06. 03. 06) [영어가 권력이다] 신분과 계급을 결정

#1. 2004년 외국계로 경영권이 넘어간 금융기관 A사의 L차장. 그는 지난해말 외국인 상사와의 면담에서 “일을 참 잘하는군요. 그런데 영어만 좀더 하면 훨씬 많은 기회가 주어질 텐데…”라는 말을 들었다. 입사 이후 14년간 열심히 일했고 과거 한국인 임원들에게서도 능력을 인정 받았던 터라 칭찬이려니 하고 넘어갔다. 그러나 L차장은 지난달 부장 승진인사에서 탈락했다. 그는 “무능하다고 평가 받던 사람이 영어 잘한다는 이유만으로 승진하는 모습을 보고는 너무 화가 났다”고 말했다.

#2. B사립대의 일문과 교수 K씨. 일본에서 학위를 받았지만 5~6년마다 주어지는 1년간의 연구년(안식년)을 일본에서 보낸 적은 한 번도 없다. 자녀들의 영어교육을 위해 늘 미국 행이다. 초등학교와 중학교 때 미국에서 3년간 생활한 경험이 있는 큰 딸은 특차(토플)로 들어간 외국어고를 졸업하고 곧장 미국 명문대에 입학했다. 2년 전 연구년을 활용해 미국에 데려간 작은 딸(중 3)은 아내와 함께 눌러 앉혔다. “경쟁력이 없는 국내 명문대에 가느니, 영어실력을 쌓을 수 있는 미국 대학을 나오는 게 한국 사회에서 성공하는데도 훨씬 도움이 된다”는 게 K씨 생각이다.

외국어인 영어를 중심으로 신분과 계급이 결정되는 영어권력 사회가 다가오고 있다. 영어가 빈부격차, 도농격차를 확대 재생산하며 양극화를 재촉하는 핵심요인으로 떠오른 것이다. 영어가 진학과 취업, 승진 등에 결정적 영향을 미친지는 이미 오래됐다.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서울대 경영학과 86학번 졸업생 51명을 조사한 결과, ‘영어실력이 우수하다’고 응답한 그룹의 평균 연봉(1억600만원)은 ‘중간 혹은 그 이하’라고 답한 그룹(7,000만원)보다 3,000만원 이상 많았다.

C그룹 인사담당자는 “한국 사회의 개방화가 진전되면서 ‘글로벌 네트워크’로의 접속 가능성을 뜻하는 영어의 가치가 높아졌다”며 “신입사원 채용부터 연봉 책정, 승진에 이르기까지 모든 인사평가의 핵심 기준은 영어”라고 말했다.

영어는 우리 사회의 파워집단을 더욱 공고히 하는 ‘무기’로 작용하며 조기 영어교육을 받기 어려운 소외계층의 상실감을 부추기고 있다. 외교관과 고위 관료 등은 해외 근무나 연수기회를 자녀 영어교육에 적극 활용한다. 실제 중앙부처 국장급 간부 자녀들 중 해외유학 경험자는 절반 이상이며, 부모 귀국 후 현지에 남는 경우도 상당수다.

정부 관계자는 “고위 관료들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등 국제기구 근무에 목을 매는 이유도 자녀 영어교육 때문”이라고 말했다. 고액 전문직과 대기업 임원들 역시 돈을 밑천으로 자녀들의 영어교육에 ‘올인’ 하고 있다.

전병만 한국영어교육학회장(전북대 교수)은 “한국 사회의 분열과 갈등을 촉진하는 영어권력 문제를 해결하려면 소외계층의 영어교육을 지원할 수 있는 획기적인 대책이 나와야 한다”고 강조했다.

한국일보(06. 03. 06) [영어가 권력이다] 영어 잘하는 쪽이 연봉 40% 더 많아

공인회계사와 경영컨설턴트, 금융기관 직원 등 화이트칼라 근로자는 영어실력에 따라 몸값이 평균 30~40% 가량 차이 나는 것으로 조사됐다. 한국일보 기획취재팀이 서울대 경영학과 1986년 입학자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벌인 결과, 졸업 이후 유학이나 개인적 노력을 통해 동료보다 영어실력을 키운 집단의 평균 소득이 그렇지 않은 집단보다 40%나 많았다. 서울대 경영학과의 86학번 신입생은 276명이었으며, 이번 설문조사에는 총 51명이 응답했다. 직업은 국내외 금융기관ㆍ대기업 직원, 공인회계사ㆍ경영컨설턴트, 사무관 이상 공무원, 판사, 변호사 등으로 다양했다.

5점 척도로 평가한 영어실력(점수가 높을수록 우수)이 4점 이상이라고 응답한 사람은 22명이었다. 이들의 작년 연간 수입은 전체 응답자 51명의 평균 수입(8,600만원)보다 2,000만원 가량 많은 평균 1억600만원으로 추정됐다. 반면 영어실력이 2~3점 수준이라고 답한 29명의 평균 연봉은 7,000만원 정도였다. 해외 근무나 연수경험이 있는 경우(27명ㆍ연봉 9,600만원)와 그렇지 않은 경우(24명ㆍ7,400만원)의 연봉격차도 2,200만원이나 됐다.

직업별 분석에서는 공인회계사와 경영컨설턴트, 대기업 직원 등 민간을 중심으로 영어실력이 몸값을 결정하는 현상이 뚜렷한 반면, 판사ㆍ공무원ㆍ교수 등의 경우 영어실력과 연봉과의 상관관계가 나타나지 않았다.

국내 대기업ㆍ금융기관에 근무하거나 공인회계사와 경영 컨설턴트로 일하는 민간분야 종사자 28명(실적급을 받는 외국계 금융기관 직원 4명 제외)을 대상으로 영어실력과 연봉을 비교한 결과, 영어 능통자 12명의 연봉은 평균 1억250만원에 달했다. 나머지 16명의 평균 연봉은 그보다 3,200만원 가량 적은 6,815만원으로 나타났다.

사무관 이상 공무원, 판사, 교수 등 공공부문에서 일하는 10명 중 ‘영어실력에 자신 있다’고 답한 사람은 3명이었다. 이들의 평균 연봉은 5,300만원 가량으로, 다른 8명의 평균 연봉(5,200만원)과 별 차이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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