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가 바뀌었지만 그렇다고 책읽는 습관까지 바뀌는 건 아니어서 여전히 몇 권의 책을 한꺼번에 읽는다. 어느 한권을 집중해서 읽는 것보다 좋은 습관이라고는 생각하지 않지만 사정상(혹은 필요상) 여러 권의 책을 건드릴 수밖에 없다. <한비자, 권력의 기술>(웅진지식하우스, 2007)이 최근의 발견이라 할 만한 책이지만('한비자의 발견'이기도 하다) 재미있는 책만 읽을 수는 없어서 샹탈 무페의 <정치적인 것의 귀환>(후마니타스, 2007)에서도 몇 페이지, 그리고 벤야민의 <기술복제시대의 예술작품>(길, 2007)에서도 몇 페이지를 읽는다(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룰 예정이다).

무페의 책은 어제 이번주 '시사IN'에 실린 기사 '최장집 교수의 대선 후 진단'("바보야 문제는 민주주의야")를 읽은 탓에 다시 생각이 났는지도 모른다(http://www.sisai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07). 어제 귀가길에 최장집 교수 등의 <어떤 민주주의인가>(후마니타스, 2007) 를 찾았지만 이젠 어지간한 서점들에서는 구하는 책을 찾을 수 없다는 것만 확인하고 오늘에야 나보코프의 <말하라, 기억이여>(플래닛, 2007) 등과 함께 주문했다.

 

 

 


나는 시간착오적인 기대이지만, <어떤 민주주의인가> 같은 최장집 교수의 일련의 책들과 <한비자, 권력의 기술> 같은 책을 5년전쯤에 노대통령이 미리 숙독할 수 있었더라면 참여정부의 국정운영이 좀 달라지지 않았을까란 생각마저 든다(나중에 역사적 평가가 달라질지는 모르겠지만 참여정부의 개혁이란 건 결국 실패한 것 아닌가). 정치적 리더십에 대한 다른 접근법을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가령 현 정부의 '정실주의 인사'니 '코드 인사'니 하는 걸 한비자라면 어떻게 바라보았을까?

"뛰어난 지도자가 나라를 다스릴 때는, 다른 사람이 나를 애정으로 대하지 아니할 수 없는 방법을 사용하지, 다른 사람이 애정을 베풀어 나를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다른 사람이 애정으로써 나를 위해 일하기를 기대하는 자는 위태로우며, 내가 하지 않을 수 없도록 만드는 방법에 기대는 자는 안전하다."(<한비자, 권력의 기술>, 160쪽에서 재인용)

저자가 이 대목에 대해서 이런 해설을 덧붙이고 있다: "리더는 다른 사람의 충성을 기대하는 이가 아니다. 다른 사람이 충성을 다 바친다면, 그런 상황에서는 지겟작대기나 똥장군도 왕 노릇할 수 있다. 모든 일이 충성스러운 신화와 관료조직에 의해 완벽하게 돌아가는데 리더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리더는 전혀 충성스럽지 않은 이들을 데리고 일을 성사시킬 수 있는 사람을 말하는 것이다.(...)"

"오늘날 한국 사회에 크게 부족한 것은 한비자의 이런 냉철한 시각이다. 지도자가 자신에 대한 '충성도'를 기준으로 사람을 들어 쓸 때는 최선의 인재를 발탁할 수 없다. 신하 또는 부하의 충성을 기대하지 않을 때, 리더는 되레 사람을 능력 본위로 바라보고, 능력 본위의 인사를 할 수 있다. 자신과 친한 사람, 자신에게 충성을 다할 것 같은 사람을 등용하는 인사는 저잣거리의 필부도 할 수 있는 인사다."(160-1쪽)

 

 

 

 

저자가 한비자와 묵자의 말을 풀이하면서 또 이렇게 덧붙인다: "자신에게 충성을 다하는 이들만으로 조직을 구성하는 건, 그가 이끄는 조직을 돌돌돌 흐르는 시냇물이나 타닥타닥 타는 작은 모닥불 수준으로 만드는 일이다. 광야는 바위와 흙과 모래와 먼지와 바람과 티끌과 나무와 풀과 숲을 모두 받아들이기 때문에 광야인 것이며, 바다는 모든 개울과 내와 강의 흙탕물과 폭우가 씻어 온 물을 가리지 않고 받아들이기 때문에 바다인 것이다."(164-5쪽) 정치인 노무현은 결국 노사모의 탁월한 리더였을 뿐이라는 걸 다시금 되새기게 된다.

이번 대선결과에 대한 최장집 교수의 평가 인터뷰에 이어서 실린 시사IN의 정치면 기사는 흥미롭게도 이명박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에 관한 것이다. 대통령직 인수위원회 인선을 주된 화제로 삼은 것인데, 이에 대한 기자의 분석은 이렇다.

"이 당선자의 인사 스타일은 전임 대통령들과 여러 모로 비교된다. 한국 정치사에서 최대 라이벌로 통하는 김영삼(YS) 김대중(DJ) 전 대통령은 인사 스타일 면에서도 정반대였다. YS는 마음에 둔 인사라도 언론에 사전 노출되면 취소해버리는 '깜짝쇼'를 즐겼다.(...) 반면 DJ는 언론의 하마평을 중시했다. 측근이나 하마평에 오른 이들은 가급적 언론에 거명되게 하려고 애썼고, 이 때문에 '언론 검증'이라는 유행어가 등장하기도 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전직 두 사람에 비하면 시스템주의자였다.(...) '국민 참여'라는 이름으로 여론의 천거를 받은 점도 노무현식 인사의 특징이었다."

"이명박 당선자는 스타일상 양김보다 노무현 대통령과 비슷한 면이 좀더 많다. 자기 판단을 믿으며, 한번 맡기면 주의 반대에도 흔들리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렇다. 하지만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 이 당선자는 도덕성이나 정치적 신념, 역사적 평가 같은 가치 기준보다는 실무 능력을 최우선으로 친다.(...) 일로 평가하고 일을 잘하면 다음 일을 주는 스타일이다. 그러다 보니 이 당선자 주변에는 전임 대통령들과 달리 평생을 바친 가신도, 정치적 동지도 없다. 서로 쓰고 쓰이는, 그야말로 '용인(用人)' 관계다." 그리고 이런 점이 "새로운 정치 실험일 수는 있지만, 자칫 위태로울 수 있다"고 한 한나라당 의원은 지적했다 한다.

 

 

 

 

또 한가지 특징적인 것이라면 "10년 이상 인연을 맺은 참모가 거의 없"는 상황에다가 김유찬, 김경준 두 측근에게 배신을 당한 전력이 있어서 이 당선자에게 '배신 콤플렉스'까지 있다는 점. 경험적으로 이 'CEO형 정치인'은 "애사심과 충성심을 논하지 말라"는 한비자식의 인사관을 체득하고 있는 것이다. 새로 출범하는 이명박 정부에 내가 유일하게 기대하는 건 이러한 용인술 혹은 인사 스타일의 효과이다(고려대 인맥이 대거 움직일 거라는 소문은 나돌고 있지만). 기본적으로 이명박 정부는 측근정치와 가신정치로부터 탈피할 수 있지 않을까란 기대.

다시 <한비자, 권력의 기술>의 저자의 말을 옮기면, "이렇게 믿을 놈이 하나도 없는 상황, 어떤 놈이 진짜 충신인지 간신인지 모르겠는 상황, 누가 이중 첩자인지 어떤 연놈이 산업스파이인지 도무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기업체의 리더는 무엇을 할 것인가. 한비자의 답은 간명하다. 다른 사람이 당신을 위해 충성을 다 바칠 것을 기대하지 마라. 대신 당신이 할 수 있는 일을 해라. 그것은 신하들이 또는 부하들이 당신에게 충성을 바치지 않으면 안되는 상황을 만들라는 것이다."(159-60쪽)

   

이명박 리더십이 과연 '역사를 바꾸는 리더십'이 될 것인지는 다시 5년후에 판단할 수 있을 테지만 적어도 '자폐적 정실주의'(강준만)의 그늘에서는 벗어나기를 기대한다. 그것이 당선자 자신이나 대한민국의 장래를 위해서도 다행스러울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 희망사항을 피력하면서 냉정하게 지난 대선에 대한 평가 두 가지를 인용한다.

먼저 최장집 교수와 함께 <어떤 민주주의인가>를 공저한 박상훈 박사: "우리 유권자들, 결코 보수적이지 않다. 이명박 정부를 불러들인 것은 노무현 정부다. 민주 개혁이라는 이름으로 신자유주의와 성장주의라는 나쁜 조합을 만들고 정당화했다. 그래서 나는 이번 대선 결과가 큰 정치 변화가 아니라고 생각한다. 이른바 민주화 세력의 상당수가 추구한 것이 '신자유주의 민주주의'라는 것이 드러났다. 하층 배제적인, 중산층 위주의 민주주의였다. 김대중, 노무현 정권은 새로운 보수적 민주파의 형성이라고 볼 수밖에 없다. 지금 괴로워하는 사람들은 민주파 내부의 기득권층이다. 보통 사람들은 노무현 정부에서 특별히 혜택받은 것이 없는데 왜 정권 교체에 호들갑을 떨어야 하는가."(시사IN 인터뷰)

그리고 한겨레21에 실린 홍기빈 박사의 칼럼.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니 희망찬 새해를 시작해봐야겠다...

한겨레21(07. 12. 27)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

NEVER SAY DIE. 죽는 소리 마라. 당신 12월19일 저녁에 술 마셨는가? 국민들 원망했는가? 대한민국이 실망스러운가? 한국의 운명이 어찌될꼬 하면서 <중경삼림>의 진청우(금성무)처럼 애상에 젖었는가? 혹시, 이민갈까 하는 소리까지 했는가? 

온갖 감정적, 논리적 호르몬의 막가는 분출을 잠깐 누르고 돌아보자. 5년 전에는 ‘노란 바람’이 있었다. 10년 전에는 국제통화기금(IMF) 사태가 있었고, 이회창씨가 김영삼 허수아비를 불사르는 진풍경이 있었다. 그리고 15년 전에는 민자당 합당의 사생아로 나온 김영삼씨가 대통령이 되었다. 그리고 20년 전에는 온 국민이 달려들어 물과 불에 목숨을 잃어가며 만들어준 절체절명의 ‘어시스트’를 김씨 성 가진 두 양반이 죽을 쑤어 개를 준 바 있다. 그래, 별의별 일이 다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버텼고 여기까지 왔다. 그러니 007이든 747이든 대통령이 된들 별일 있겠는가. 너무 걱정하시는 것은 좀 쓸데없이 간장만 혹사하는 게 아닐까.



나태와 안일을 털어버릴 때
아니다. 근거가 있다. 사람들은 ‘우리’를 싫어한다. 50% 더하기 13% 정도가 한목소리가 되어 “꺼져라, 진보 개혁!” 하고 외친 셈이 아닌가. 이런 정도의 압도적인 숫자가 대선에 나온 적이 있었는가. 그래서 두렵다. ‘우리’는 이제 왕따가 되었고, 그래서 어떤 이들은 이참에 한 큐에 다 쓸어버리자고 막갈 기세다. 이 정도라면 지난 20년간의 파란만장한 한국 정치에서도 보지 못한 초유의 사태다. 이제 대한민국은 어디로 갈까. 나는 또 어디로 갈까. 그러니 어찌 취하지 아니하리오….

근데 잠깐 물어보자. 노무현 정권이 이라크 파병에 대연정 운운할 때 당신은 무얼 했는가? 김대중 정권이 IMF 핑계로 사방을 마구 ‘잘라’댈 때 얼마나 몸으로 버텼는가? 김영삼 정권이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가입한다고 나댈 때는 뭐라고 할 생각이나마 했던가? 우리는 그저 코스닥에 열광했다가 부동산에 열중했다가 중국 펀드로 몰려갔다가 우리 애들 특목고 못 들어갈까봐 핏대를 올리며 살지 않았나? 그러면서 비정규직을 무시하고 시민운동을 정권의 앞잡이로 매도하며 혼자 고고한 듯 떠들지 않았는가? 그런 ‘호세월’이 얼마나 가기를 기대했던가? 이런 날이 올 줄 정말 몰랐나?

그래서 말인데, 정말 잘됐다. 이제 우리는 지난 십 몇 년간의 온갖 나태와 관성과 안일을 털어버릴 준비를 할 기회를 만났다. 흙 묻은 운동화를 털고, 잊어버릴 뻔한 소주병 쑤시는 법을 기억해내고, 보도블록을 어떻게 쓰다듬어줘야 해체되는지도 다시 떠올릴 때가 되었다. 진짜 상대를 만났다. 박근혜나 이회창이 되었다면 ‘독재자의 딸’ 어쩌고 ‘차떼기’가 어쩌고를 안주 삼아서 또 5년을 헛되이 보냈을 것이다. 정동영이 되었으면 ‘좌파 신자유주의’를 논하며 또 시대의 아이러니를 핑계 삼아 담배와 술만 작살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우리의 새 대통령은 돈을 알고 비즈니스를 알고 5년·10년짜리 계획을 세울 줄 알며, 만인을 ‘성공시대’로 몰아칠 줄 아는 분이다. ‘최선진 금융기법’도 알고 한반도를 쭉 째서 물을 흘릴 계획도 세우고 있으며 이 모든 것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자본 축적과 경제성장률로 연결되는지를 또 아는 분이다. 한마디로, 이 땅에 꼭 맞는 ‘한국형 신자유주의’ 파라다이스를 땅에서도 이루어지게 할 실행력을 가진 분으로 보인다.

5년 동안 우리는 무척 바쁠 것
나태와 안일에 젖은 우리 시민들을 위해 이보다 더 훌륭한 파트너가 어디 있을까. 당신, 지난 몇 년 혹은 몇십 년간의 우리의 늘어져 있던 삶이 오늘을 있게 한 원동력인 줄 인정할 수 있을까. 그리고 그 모든 것을 되짚어 나를 너를 우리 전체를 함께 새로 젊게 만들 에너지를 아직 느끼고 있는가. 그렇다면 무서울 게 무언가. 오히려 이렇게 말하자. 이건 최고의 기회다. “더 이상 좋을 수 없다.” 만세. ‘삶의 허무와 권태’ 따위는 우리에게 없을 것이다. 최소한 5년간 우리는 살아남으랴 개개랴 어쩌면 또 한편으로 싸우랴 무척 바쁠 테니까.(홍기빈 금융경제연구소 연구위원) 

08. 01. 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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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ix3 2008-01-01 23:35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이 곳을 즐겨찾습니다. 이제야 인사드리네요^^;)
이 글 덕에 한동안 회의적이고 혼란스럽던 생각들이 정리가 되었습니다.
고맙습니다.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로쟈 2008-01-02 09:54   좋아요 0 | URL
네, 반갑습니다. 도움이 되셨다니 다행이구요.^^

로이73 2009-06-18 10:0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