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 근대시의 형성과정은 오랜 관심사 가운데 하나인데(연구주제가 아니라 관심주제) 이에 관해 모아놓은 연구서들을 강의를 빌미 삼아 읽고 있다. 강의준비차 책을 읽기도 하지만 책을 읽으려고 강의를 잡는 경우도 많다. 어느 쪽이 먼저인지는 닭과 달걀의 문제 같다.

여하튼 그래서 박슬기 교수의 <한국 근대시의 형성과 율의 이념>(소명출판)을 손에 들고 그간의 생각과 견주어보는 중이다. 한국 근대 자유시 형성과정에서 리듬, 좁게는 운율의 향방이 관심사인데 그 주제를 다룬 몇권의 연구서 가운데 하나다.

문제의 출발점은 ‘근대시=자유시‘냐는 것이다. 자유시란 말은 영어의 free verse를 일본의 우에다 빈이 옮긴 것으로 정확히는 ‘자유-율‘을 가리킨다. 이 자유율을 자유시로 이념화한 것이 근대시 형성과정의 한 문제점이다. 자유율은 운율의 부재를 가리키는 게 아니라 정형적 율격으로부터의 탈피를 뜻한다. 서구에서 그 기원은 프랑스 상징주의부터, 베를렌(느)부터다(보들레르의 <악의 꽃>에 실린 대부분이 정형시다).

김억이 처음 소개한 베를렌의 시에서 정형률 대신에 강조되는 것은 ‘언어의 음악‘이다. 이 언어의 음악이 자유율인 것(이 자유율조차 배제하면 산문시가 된다. 산문으로 된 시). 따라서 음악(리듬)은 자유시에서도 핵심이 된다. 시에서 리듬은 필수 요소이다. 그것이 다른 요소에 대체될 수는 있지만 그 경우에도 리듬은 ‘부재‘로서 존재한다. 부재로 표시된다는 말이다. 한국 근현대시사에서 이를 간과하는 경우가 많아 유감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3)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주말이라고 해도 강의만 없을 뿐 재택근무하는 기분인데 다음주 강의자료를 거의 정리하고 쉬는 참이다. 한국현대시 강의 일정도 있는 김에 최근에 (다시)구입한 책들을 뒤적이면서. 이 부류의 책은 보통 <시론>이나 <현대시론>이란 제목을 갖고 있다.

작고한 김준오 교수의 대표작 <시론>은 다시 구해보니(초판은 1982년에 나왔다) 지난해 7월에 나온 4판 37쇄다. 짐작에 시론 분야의 최고 베스트셀러가 아닐까 싶다(35년간 버텨낸 책이니 그만큼 독자들에게 사랑받았다는 뜻도 된다). 대학교수들이 공저한 서정시학사의 <현대시론>도 개정판이고 내가 구한 건 지난해 3월에 나온 개정판 2쇄다.

서정시학사에서 나온 책으로는 오세영 교수의 <시론>도 있다. 2013년 초판. 여러 문학(이)론을 종합하고 정리한 책이다. 김준오, 최동호, 오세영 교수 다음 세대 저자의 책으로는 권혁웅 교수의 <시론>(문학동네)이 대표격인데 2010년판이므로 벌써 나온 지가 꽤 되었다. 독자적인 시론을 제시하고 있는 책이어서 주목할 만한데 아직 그 체계가 잘 이해되지는 않는다(11개의 장으로 나뉜 ‘시학의 여러 영역들‘이 특히 그렇다). 구성만 보자면 역시 리듬과 심상을 가장 앞세운 김준오의 <시론>이 안정감을 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너무 노골적인 제목이어서 일단 작가에게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지 확인해볼 필요가 있는데, 자격이 있다! 학과는 다르지만 교내 서클이었던 ‘연세문학회‘에서 같이 활동했고(어깨동무하고 보냈고) 그런 인연으로 지난해 개관한 기형도문학관의 유품 수집 총책을 맡았었다니 말이다. 장편소설이라고는 돼 있지만 ‘내가 아는 기형도 이야기‘라고 저자는 밝힌다. 그게 나로서도 책을 구한 이유다(마침 내일이 29세에 요절한 시인의 29주기이고).

˝기형도와 대학 시절 절친한 친구였던 소설가 김태연이 29년간 품어왔던 기형도와의 추억을 풀어낸 소설이다. 저자 김태연은 기형도와 주고받은 편지나 스스로의 기록 등을 토대로 소설 형식을 빌어 이 소설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다.˝

이번 봄에도 기형도 시에 관한 강의를 한두 차례 진행할 예정이라 겸사겸사 참고하려 한다. 30주기가 되는 내년 이맘때에는 관련한 책이 더 나오지 않을까 싶다. 흠, 그렇게 30년이 흘러가는구나...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매번 주말마다 반복하는 일은 필요한 책을 찾다가 포기하는 것이다(가끔 찾을 때도 있다). 내주 강의할 모리 오가이의 책을 찾다가(<아베 일족>도 방에서 못 찾아서 어제 다시 구입했건만 다른 책들도 보이지 않는다) 그냥 손이 가서 들고온 책이 박정대의 시집 <그녀에서 영원까지>(문학동네)다. 재작년 가을에 나왔군.

잠시 펼쳐보았다가 덮어둔 기억이 있는데, 다시 펼쳐보아도 마찬가지다. 이 시인의 시집은 <단편들>(세계사)이 가장 좋았다. 1997년에 펴낸 첫 시집. 1990년에 등단했으니 첫 시집이 더디 나온 셈이었다. 32살 때의 첫 시집이면 많이 늦은 건 아니지만. 첫 시집에 대한 긍정적 인상 때문에 이후에 나온 <내 청춘의 격렬비열도엔 아직도 음악 같은 눈이 내리지><아무르 기타> 등의 시집도 구해본 기억이 있다. 아마 더 이상 따라가지 못한 건 음악에 대한 취향 때문인 듯.

프로필에서 시인은 ˝현재 무가당 담배 클럽 동인, 인터내셔널 포에트리 급진 오랑캐 밴드 멤버로 활동중˝이라고 적는다. 그럼 많은 게 이해가 된다. 이 시집의 온갖 자기도취적 말들이. 횡설수설이. 흥얼거림이. ‘전직 천사‘라는 자기소개가. 그리고 이런 고백이.

˝사실 나는 시를 쓸 때 어떤 구절을 쓰는지 신경쓰지 않을 때가 많다, 계속 음악만 듣는다, 가령 내가 좋은 시인이라면 분명히 괜찮은 구절들을 제대로 써낼 것이 틀림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나는 분위기에 맞는 음악을 들으며 시를 그 음악에 매치시키는 데 더 집중한다.˝

인용한 대목을 포함한 50여 쪽의 기분기술(‘자동기술‘에 견주어)에 ‘의기양양‘이란 제목을 붙인 건 정확해 보인다. 그의 시는(시라고 한다면) 의기양양한 자기도취의 시이다(해설도 자신이 쓴다).

개인적인 유감은 젊은 시절의 빛나는 시들을 다시 읽을 수 없다는 점. ˝시는 내가 태어나기 이전에 이미 씌어졌고 그것도 영원히 씌어졌으며 나는 그저 시를 발견할 뿐이다˝라는 진술에 기대면 나는 그가 ‘물질적 황홀‘들(<단편들>)을 발견하던 때가 정점이었다고 생각한다. 이런 황홀 말이다(시집을 지금 갖고 있지 않아서 정확한 인용인지는 확인이 어렵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비가 내린 다음 수요일이 죽어간다 나는 그리운
햇볕 한 조각 만나지 못하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죽어 갔다
세상의 물빛 머금은 모든 것들은 경건한 자세로
꽃을 피울 태세였지만 꽃의 어깨를 건드려주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월요일이 죽고, 화요일이 죽고
그리고 주말까지 계속해서 비가 내려 습기찬 들판이거나 어두운
영화관에서 팔짱을 낀 채 들꽃이 죽고 들꽃의 시선이 죽고
자막처럼 빠르게, 자동차들은 거리를, 물방울들을 튕기며 사라져갔다
일주일간의 죽음 끝에 햇살은 위장처럼 나부낀다
눈에 보이지 않는 것들만이 죽음을 피해갔다, 음습한
관에서 부활하듯 나는 외출한다, 가로수들이 읽고 있는 거리
거리는 간판들의 무표정과 행인들의 그림자를 안고
도시의 페이지 속에 서표처럼 꽂혀 있다, 피가 마르는 것 같다
봄볕에 불탄다, 유곽과 성당을 지나온 나의 긴 그림자
나는 읽혀지지 않는 한 권의 책과 싸우듯
그렇게 걸으며, 이 거리가 나에게 전해주는 불임의 페이지를
피가 마르듯 그렇게 외로운 가슴의 강들을 스쳐지나며
씨팔, 모든 강들 흘러가 아우성치며 만날
바다를 생각하였다 죽음보다도 깊을
바다의 사랑을 생각하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주의 발견‘으로 엊그제 주문한 책은 프랑스 작가 로랑 비네의 <언어의 7번째 기능>(영림카디널)이다. 2010년 콩쿠르상 신인상 수상작으로(신인상도 있는 줄 몰랐다) <HHhH>(황금가지)가 소개된 바 있다. 지난해 나온 원작 영화를 보고 관심을 갖게 된 작가인데, <언어의 7번째 기능>은 2015년에 발표한 신작. 흥미롭게도 문학비평가 롤랑 바르트의 죽음을 소재로 하고 있다.

˝1980년, 프랑스의 저명한 기호학자이자 문예 비평가인 롤랑 바르트가 교통사고를 당해 병원에 입원했다가 세상을 떠난다. 이것은 역사에 기록된 사실이다. 하지만 롤랑 바르트의 사고는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살해당했다. 또한 누구에게도 말 못 할 비밀문서를 지니고 있었다. 너무나 강력하고 위험해서 세상 사람들로부터 숨겨야 했던 비밀, 바로 ‘언어의 7번째 기능‘을 담은 문서였다.

사건을 조사하기 위해 파견된 정보국 수사관 바야르. 그는 우선 롤랑 바르트의 주변 인물들 탐문에 착수한다. 하지만 대학가의 먹물들이 하는 말을 도저히 이해하지 못한다. 결국 그는 뱅센 대학의 젊은 강사, 시몽을 ‘통역사‘로 데리고 다니며 사건의 실마리를 추적하기 시작하고, 이 둘은 이내 꼬리를 물고 일어나는 ‘소설 같은 사건들‘에 휘말리게 된다.˝

얼핏 움베르토 에코의 <장미의 이름>도 떠올리게 하는 소설인데(지적 스릴러 내지 지식인 스릴러?) 바르트의 그 주변의 지식사회에 대해 얼마간 배경지식이 있다면 더 흥미롭게 읽을 수 있겠다. 제목의 ‘7번째 기능‘은 언어의 6가지 기능에 관한 야콥슨의 이론을 염두에 둔 것이다. 그나저나 <문학 속의 언어학>(문학과지성사) 같은 야콥슨의 책은 정녕 다시 나오지 않는 것일까 문득 궁금하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