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음주부터는 일부 강의가 재개되지만 코로나 사태가 진정되기까지는 일정이 계속 불확실할 전망이다. 빌미 삼아서 강의책 때문에 미뤄졌던 이론서들을 손에 들고 있는데(서가에서 눈에 띄는 순서라 무작위적이다) 엊그제 빼놓은 테리 이글턴의 <유물론>(갈마바람)도 그중 하나다. 이글턴의 책은 몇년 전에 <신의 죽음 그리고 문화>(알마)를 강의에서 읽은 게 마지막이었다. 몇권 밀려 있는데 일단 <유몰론>과 함께 뒤늦게도 <왜 마르크스가 옳았는가>(길)를 손에 들려고 한다.

슬라보예 지젝의 책도 꽤 밀렸다. 유물론이란 주제와 장단을 맞추기 위해서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인간사랑)를 우선순위에 올려놓는다(유물론과 변증법적 유물론이 바로 동일시되지는 않는다. 이글턴은 유물론자이지만 변증법적 유물론은 미심쩍어 한다). ‘변증법적 유물론의 새로운 토대를 향하여‘가 부제. <자본주의에 희망은 있는가>(문학사상사)까지 손에 들 수 있겠다. 일부 읽었던 책인데 전열을 정비해서 본격적으로 읽어보려는 것. <분명 여기에 뼈 하나가 있다>는 다행스럽게도 어제 원서를 발견했다. 손이 가는 곳에 꽂아두면 독서준비는 일단락.

지난주부터 이렇게저렇게 독서를 시작한 책들이 일이십 권쯤 된다. 이른바 초병렬독서인데, 비유하자면 여러 개의 접시 한꺼번에 돌리기에 해당한다. 그렇게 할 수밖에 없는 것은 읽을 책이 너무 많다는 게 이유다. 그래도 너무 많은 사람을 사랑하는 것보다는 (가능하다는 의미에서) 해볼 만한 일이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이번주 주간경향(1368호)에 실은 리뷰를 옮겨놓는다. 주요 정치철학자들의 공저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난장)을 오랜만에 읽고서 알랭 바디우의 민주주의론을 간추렸다. 총선을 목전에 둔 상황에서는 이론적인 문제를 숙고할 여유가 없지만, 총선 이후에는 여러 모로 생각해볼 문제들을 던져주는 책이다. 알랭 바디우의 공산주의론(바디우는 민주주의에 대해 신랄하게 비판하면서 현단계에서는 그가 정의하는 공산주의를 통해서만 민주주의가 가능하다고 본다)을 이해하는 데 요긴한 글이기도 하다. 바디우가 번역한(번안한) <국가>도 소개됨 직하다...
















주간경향(20. 03. 16) 세계 자체가 실종된 민주주의 세계


<민주주의는 죽었는가?>는 번역본의 제목이고, 원제는 ‘민주주의, 어떤 상태에 있는가?’에 가깝다. 미국과 유럽의 간판 철학자 아홉 명이 제출한 현재의 민주주의에 대한 보고서를 한데 모은 책이다. 10년 전에 나왔지만 지금 시점에서도 문제의식은 전혀 퇴색하지 않은 것처럼 보인다.


주목해서 읽어봐야 할 글이 많지만, 국내에도 많은 책이 소개된 프랑스 철학자 알랭 바디우의 민주주의론을 간추려본다. 그의 글 ‘민주주의라는 상징’에서 상징은 ‘엠블럼’의 번역인데, 바디우가 겨냥하는 것은 플라톤과 마찬가지로 민주주의 비판이다. 민주주의가 ‘현대 정치사회를 지배하는 상징’이라는 것은 바디우만의 견해가 아닐 것이다. 민주주의라는 명분으로 우리는 모든 것을 비판의 도마에 올려놓을 수 있다. 하지만 민주주의 자체는 그 비판에서 제외된다. 곧 우리는 민주주의라는 가림막 뒤에 숨을 수 있다. 바디우는 그 민주주의를 건드리고자 한다. 왜냐하면 오늘날 민주주의는 ‘소수의 사람만이 누리며, 살고 있다고 믿는 성벽의 성벽지기이자 상징’이기 때문이다.


민주주의에 대한 근본적인 비판을 시도하며 바디우가 버팀대로 삼는 것은 플라톤의 주장이다. 플라톤에게 민주주의란 특정한 국가 형태(정체)만을 지칭하는 이름이 아니었다. 민주주의는 그것이 만들어내는 주체의 유형과 분리 불가능하다. 민주주의가 만들어내는 주체, 혹은 ‘민주주의적 인간’은 어떤 주체인가? 그것은 하찮은 향락을 추구하는 이기적 욕망의 주체다. 민주주의는 젊은이들에게 디오니소스적 격정을 심어주며 68세대의 아나키스트가 그랬듯이 “구속받지 말고 즐겨라”라고 말한다. 그리고 노년에게는 모든 가치가 똑같다고 가르친다. 모든 가치가 동질화되면 가치의 표준으로서 돈만이 숭배되고 노인들은 차츰 구두쇠가 된다. 민주주의적 인간이란 탐욕스러운 청년과 구두쇠 노인을 접붙인 인간이다. 

바디우가 보기에 민주주의 세계에서는 세계 자체가 실종된다. 플라톤주의자로서 바디우에게 모든 세계는 차이에 의해서만 구축된다. 세계는 먼저 진리와 의견의 차이에 의해 구축되고, 이어 서로 다른 진리 간의 차이를 통해 구성된다(바디우에 따르면 진리는 사랑과 정치, 예술과 과학, 네 영역에서 발명되고 생산된다). 그런데 만물의 등가성을 통해서 모든 차이가 지워지고 배제된다면 논리상 세계는 출현할 수 없다. 이것은 일종의 무세계이고, 무정부 상태다. “이 무정부 상태는 무가치한 것에 기계적으로 부여된 가치와 다름없다. 보편적 대체 가능성의 세계는 고유한 논리를 갖지 않은 세계이며, 그래서 세계가 아니다.” 

이러한 무세계, 혹은 무정부 상태에서 어떻게 빠져나올 수 있는가. 바디우는 플라톤이 귀족에게만 한정했던 역할을 모든 인간에게 확대 적용하려고 한다. 알려진 대로 플라톤은 <국가>에서 생산자 계급과 달리 수호자 계급은 아무것도 소유하지 않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들에게는 공통적인 것과 공유만이 존재했다. 이러한 수호자 계급의 일반화를 바디우는 “모두를 귀족이 되게 하기”라고 표현한다. 덧붙여 그는 모두의 귀족 되기가 공산주의에 대한 최고의 정의라고 말한다. ‘인민이 스스로에 대해 권력을 갖는’ 진정한 민주주의는 우리가 그러한 공산주의자가 됨으로써만 가능하다는 것이 바디우의 주장이다. 우리의 선거는 무엇을 위한 것인가를 잠시 생각해보게 한다.


20. 03. 11.


댓글(3)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모맘 2020-03-11 14:5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치적 철학이 부족하다보니 이론들 앞에서 항상 혼동이 생깁니다 칼포프 열린사회 에서 플라톤주의를 비판할때는 그것에 매료되었었는데 쌤이 정리해주신 위글을 보니 또 흔들흔들 합니다ㅎㅎ 마스크5부제 실시를 보며 우리가 사회주의냐라고 쓴소리를 하는 사람들을 보며 머리에서 김이 날정도로 화가 나는데, 이럴때는 모든 인간에게 확대한 플라톤의 국가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ㅎ

로쟈 2020-03-11 21:18   좋아요 0 | URL
최소한 바디우의 정치철학을 이해하는 데 유용합니다. 바디우의 민주주의 비판은 자본주의 비판과 연계돼 있어서 자세히 다루긴 복잡하구요..

추풍오장원 2020-04-02 09: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법치주의와 자유시장경제에 뿌리를 둔 현대 대의제 민주주의에 대한 당연하고도 멋진 비판이 아닐까 싶습니다. 대의민주주의에 어떤 당위를 부여하려는 시도도 우린 단호히 거부해야 합니다...
 
 전출처 : 로쟈 > <누명 쓴 사나이> 혹은 '맞는 남자와 틀린 여자'

14년 전에 올려놓은 글이다. 히치콕 영화에 대한 레나타 살레츨의 독해 따라읽기...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지젝 외 2인 공저의 <다시, 마르크스를 읽는다>(문학세계사)를 그제부터 읽기 시작했는데, 비교적 술술 읽히던 서론을 지나 본론에 이르게 되니 역시나 모래주머니를 차고 걷는 것 같다. 번역본만으로는 읽을 수 없어서다(많은 지젝 번역서가 그렇긴 하다). 다른 지젝 번역서에 대한 해제를 쓰기 전에 미리 읽으려고 계획했지만 수정이 불가피하다. 이 책만 독파하는 데 일주일은 걸릴 것 같기에.

독서가 더딘 건 물론 부정확한 번역의 탓이 크다. 본론의 세 장 가운데 첫 장이 지젝이 쓴 ‘마르크스, 객체 지향적 존재론을 읽다‘인데(영어 이니셜을 따서 OOO로 지칭되는 객체지향적 존재론에 대해 이번에 알게 되었다. 대표자가 <네트워크 군주론> 등의 책으로 소개된 미국 철학자 그레이엄 하먼이라는 것도. 나와는 동갑내기다), 첫 문장이 이렇다(원서에서는 한 문장, 번역본에서는 두 문장이다).

˝오늘날 우리가 진정 수행해야 하는 마르크스 읽기는 그의 텍스트에 곧장 파고드는 것도 아니고, 오직 상상력에 의지해서 읽는 것도 아니다. 가령 철 지난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하기 위해 제시된 새로운 이론들에 대해 마르크스라면 어떻게 응대했을지, 연대기 순으로 상상해보는 방식이 그럴 게다.˝

너무 무심한 번역이라 눈을 의심하게 된다. 원문은 이렇다.

˝The reading of Marx we really need today is not so much a direct reading of his texts as an imagined reading: the anachronistic practice of imagining how Marx would have answered to new theories proposed to replace the supposedly outdated Marxism.˝

이 책의 핵심 입장을 담고 있는 문장인데 지젝이 direct reading 대신에 지금 우리에게 필요하다고 강조하는 것이 바로 imagined reading이다. 이것이 어떻게 ˝오직 상상력에 의지해서 읽는 것도 아니다˝라고 정반대로 옮겨질 수 있는지(지젝의 입장은 서론에서도 제시됐었다). 그리고 콜론 다음에 이어지는 것은 이 imagined reading에 대한 설명이다. 소위 한물간 마르크스주의를 대체한다는 새로운 이론들에 대해서 마르크스라면 어떻게 답할지 상상해보자는 것. 그것은 ‘연대기 순‘으로 상상하는 게 아니라 시간을 거슬러서(anachronistic) 상상하는 것이다. 죽은 마르크스를 현재로 소환하는 것이니까.

새로운 이론 가운데 대표격으로 지젝은 ‘객제지향적 존재론‘을 들고서 이를 마르크스가 어떻게 읽어낼지(마르크스에 빙의할 필요가 있겠다) 생각해보려고 한다. 이하의 내용들에서 디테일한 수준에서 오역이나 부정확한 번역이 계속 나온다. 안타깝지만 이 번역서 역시도 대충 읽을 때만 유용하지 않을까 싶다. 꼼꼼하게 읽어나가려는 독자라면 좌절할 수밖에 없을 듯해서다. 이미 34쪽에서 (같은 페이지 안에!) <공산당주의당 선언>과 <공산주의당 선언>이 나란히 등장할 때 교열에 대한 기대는 접었어야 했다(설사 통일한다고 해도 ‘공산주의당 선언‘은 뭔가? ‘공산당선언‘에서 ‘공산주의선언‘까지는 이해가 된다 해도).

그러나 어쨌든 지젝 때문에 또 ‘객체지향적 존재론‘까지 공부하게 되었다. 하먼의 책으로는 브뤼노 라투르를 다룬 <네트워크 군주>(갈무리)와 미학서로 <쿼드러플 오브젝트>(현실문화)이 국내에 소개돼 있는데, 참고문헌을 보니 주저가 몇권 더 된다. 대체 어디까지 읽어야 할지 당장은 엄두가 나질 않는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9)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전출처 : 로쟈 > 지젝의 <사이코> 읽기

16년 전에 쓰고, 14년 전에 정리해서 올린 글이다. <항상 라캉에 대해 알고 싶었지만 감히 히치콕에게 물어보지 못한 모든 것>(새물결)은 현재 절판된 상태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