흔히 '과두재벌'로도 불리는 러시아의 신흥 부유층이자 경제권력인 '올리가르히'에 대해서 이전에 두어 번 페이퍼를 띄운 적이 있다. 가령, '러시아의 부자들'(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aperId=836891)이나 '러시아 백만장자들의 사치'(http://www.aladin.co.kr/blog/mylibrary/wmypaper.aspx?PCID=1909487&paperId=989306) 같은 페이퍼들이 그렇다. 해마다 봄이 오면, '포브스'지는 전세계 억만장자들의 리스트와 랭킹을 발표하곤 하는데, 올해도 예외는 아니었던 모양이다. 프레시안에서 이에 관한 비판적인 분석기사를 기획기사로 소개하고 있기에 다시 옮겨놓는다. '억만장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전체 타이틀이므로 러시아 편은 '러시아 억만장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가 되겠다. '올리가르흐' 혹은 '올리가르히'(복수형)는 소비에트 이후, 포스트-소비에트 러시아를 이해하는 데 있어서 키워드 중 하나이다(같은 제목의 영화도 만들어졌었다. 감독은 <택시 블루스>를 만들었던 파벨 룬긴).

프레시안(07. 04. 02) '억만장자 1000명 시대'의 그림자

미국의 경제 주간 <포브스>는 지난달 초 전 세계 억만장자(billionaire)의 분포를 조사한 결과를 발표하며 "2007년은 인류역사상 가장 부유한 해"라고 선포했다. 재산이 10억 달러(9500억 원 상당) 이상인 억만장자가 작년 대비 153명이 증가한 946명으로 집계된 데다 이들 억만장자들이 보유한 재산의 총액도 작년 대비 35%가 늘어난 3조5000억 달러에 달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전 세계 60억 인구 중 소득 수준 하위 55%의 재산은 줄어들었거나 그대로인 형편을 감안한다면 억만장자가 많아졌다고 해서, 혹은 갑부들이 소유한 재산이 급증했다고 해서 2007년이 "가장 부유한 해"가 된다는 <포브스>의 시각은 다분히 '부자 중심적'이다(*물론 이건 새삼스러운 게 아니다. 모두가 부유하다면 아무도 자신이 부유하다고 생각하지 않을 것이다).
  
미국의 저명한 진보 학자 중 하나로 꼽히는 제임스 페트라스 빙햄튼대 교수(사회학)는 억만장자의 급증 자체에 감격해 하는 <포브스>의 태도를 비판하며 이들이 전 세계 인구 중 1억 분의 1만 누린다는 '집중된 부'를 향유하게 된 과정에 주목할 것을 주문한다. 억만장자들의 대부분이 새로운 기술을 개발하거나 혁신을 통해 기업을 키워 나가거나 또는 일자리를 창출할 수 있는 새로운 사업을 시작하는 대신 주식, 부동산 등을 통해 있는 재산을 불리거나 천연자원을 내다 팔아 돈을 버는데 골몰해 왔다는 지적이다. 이처럼 비생산적 경로를 통해 '그들만의 부'가 최고조에 달하는 순간 나머지 인류는 '역사상 가장 가난한 해'를 맞게 될지도 모를 일이다.
  
억만장자들에게 부를 축적할 '기회'를 제공한 쪽은 '권력'이다. 지배계급과 결탁한 억만장자들은 재산 증식을 위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며 경우에 따라선 범죄도 서슴지 않는다. 
이에 페트라스 교수는 신흥재벌들의 급성장세가 두드러진 러시아와 '검은 돈'이 넘치는 남미의 경우를 예로 들며 억만장자들과 그들의 부가 늘어나는 현상은 오히려 전 세계가 경계해야 할 현상이라고 강조한다.
  
<프레시안>은 페트라스 교수가 이같은 주장을 담아 지난달 21일 미국의 진보성향 매체 <카운터펀치>에 기고한 <억만장자와 세계 지배 계급의 결탁 과정: The Billionaires and How They Made It Meet the Global Ruling Class>을 '러시아편', '남미편', '억만장자는 어떻게 만들어지는가' 등 3부로 나누어 요약, 게재한다. 그 첫 회 '러시아편'은 서방언론들에 의해 '자수성가형'으로 미화된 러시아 신흥재벌, 올리가르히의 실상과 그들이 억만장자 반열에 오르기까지 러시아 정부가 어떤 '기여'를 했는지를 실증적으로 보여준다.


  
옐친 민영화 정책의 최대 수혜자, 올리가르히

젊은 억만장자들이 빠른 속도로 성장하고 있기로는 러시아를 따를 데가 없다. 러시아의 신흥과두재벌인 올리가르히는 권력을 이용해 부의 축적을 이룬 억만장자의 상징이다. 러시아 억만장자들의 3분의 2는 20대 중후반에 재산을 증식하기 시작했다. 1990년대 불명예스런 10여 년 간 보리스 옐친과 '미국의 지시를 받는' 그의 경제 보좌관 예고르 가이다르, 아나톨리 추바이스는 현실적인 가치보다 훨씬 낮은 '정치적인 가격'에 러시아의 국유재산들을 몽땅 팔아먹었다.
  
국가의 재산이 민간으로 이전되는 과정에는 예외 없이 암살, 대대적인 절도, 불법 주가 조작, 사재기 등 '깡패들의 전술'이 동원됐다. 미래의 억만장자가 될 재목들은 러시아 정부로부터 공장, 교통시설, 석유, 가스, 철, 광물 등 1조 달러가 넘는 가치의 국가 재산들을 탈취해 갔다. 그러나 미국이나 유럽의 경우와 달리 러시아의 억만장자들 중에서는 전직 공산당 간부였던 인물은 거의 찾을 수 없다. '공산주의는 비효율적'이란 항간의 주장과는 달리 올리가르히들의 손에 넘어가기 전까지 국영기업들은 저마다 이윤을 창출하고 경쟁력을 평가받고 있었다는 것도 러시아만의 차별점이다.


  
이같은 사실은 올리가르히들이 이 막대한 재산을 넘겨받은 지 10년도 채 안 돼 명백하게 드러나고 말았다. 모든 억만장자들이 부를 축적하는 원천은 건설이나 혁신, 혹은 생산적인 기업 건립에 있지 않았기에 민영화된 기업들은 오히려 경쟁력이 떨어진 것이다. 민영화의 과실을 따먹은 것은 고위 공산당 간부들이 아닌 막 대학을 졸업한 젊은이들이었다. 자본주의에 재빨리 적응한 이들은 정부 고위관료를 매수하거나 협박하고 필요할 경우 암살까지 해서 보리스 옐친 정권이 서방의 '시장개방' 조언을 무분별하게 받아들여 내놓은 민영화 정책의 혜택을 독식해 버렸다.
  
최근 억만장자들의 수를 집계해 발표한 <포브스>는 러시아 '올리가르히'들이 마치 자수성가로 성공한 청년 기업인들인 것인 양 소개했다. 70년 간 러시아 인들의 땀과 피로 지켜온 국영기업들을 강탈한 것이 마치 20대 젊은 '기업정신'의 산물인 것처럼 포장한 것이다. 그러나 러시아의 최대 부호 8명은 모두 경쟁상대의 재산을 강압적으로 빼앗거나 '유령 은행'을 만들거나 알루미늄, 석유, 가스, 니켈, 철강제품 등 국가소유의 천연자원을 탈취하거나 보크사이트, 철 등 광물을 수출해서 부자가 된 경우다. 공산주의 시절 국가가 경영했던 산업 중 어느 한 부분도 이들 올리가르히에 탈취당하지 않은 것이 없다. 건설, 텔레콤, 화학, 부동산, 농업, 보드카, 식료품, 경작지, 언론, 자동차, 항공 등이 모두 이들 손으로 넘어간 것이다.
  
올리가르히 성장, 러시아의 성장과는 무관
  
올리가르히들이 최대 부호로 성장한 바닥을 얘기하기 위해선 옐친의 민영화 정책을 빼놓을 수 없다. 그들은 빠른 시일 내에 최고의 자리 혹은 최고에 가까운 자리에 올라서기 위해 구 소련 정부 관계자들이나 자기 사업의 경쟁자들을 협박하기도 하고 말 그대로 살인을 하기도 했다. 이들이 약탈이나 탈취를 가능토록 한 '핵심 정책 기반'은 추바이스와 가이다르가 설계한 러시아 공기업의 광범위한 민영화 정책이었다. 이 '충격요법'은 크렘린의 경제 자문을 받았던 '하버드 팀'과 클린턴 미 대통령이 전격 지원 아래 추진됐다. 러시아의 자본주의 흐름을 돌이킬 수 없도록 하는 것이 이들의 목표였던 것이다.
  
민영화는 러시아 이 '기업 포식자'들 간의 전쟁을 촉발하는 동시에 러시아 경제의 관절을 꺾어버렸다. 결과적으로 러시아 생활경제 수준이 80% 이상 하락했고 루블의 가치도 바닥으로 떨어졌다. 석유, 가스 등 그 가치를 따지기 힘들 정도로 막대한 '전략적 자원'이 약탈의 기회를 호시탐탐 노려온 억만장자들이나 미국·유럽 등의 석유·가스 다국적 기업에 헐값으로 매각됐다. 마피아와 결탁한 올리가르히들은 일 년에 1000억 달러 이상의 돈을 세탁해 뉴욕, 런던, 스위스, 이스라엘 등지의 제도권 은행으로 보냈다. 이 돈은 미국과 영국, 스페인, 프랑스 등의 부동산을 사는 데 쓰이거나 영국 축구팀을 사거나(대표 올리가르히인 로만 아브라모비치는 영국 첼시 축구팀 구단주임) 이스라엘 은행이나 광물 자원 개발에 투자됐다.
  
옐친 정권 아래에서 이 전쟁의 승자들이 새로운 경제 섹터의 팽창 과정에서 주도권을 잡았다면 푸틴 정권에 이르러서는 이 깡패 같은 올리가르히가 조직을 병합해 몸집을 불리게 됐다. 백만장자 여럿이 뭉쳐 억만장자로 성장한 셈이다. 거들먹거리는 젊은 폭력배이거나 지방의 사기꾼이었던 이들은 급기야 서구의 홍보업체의 도움을 받아 존경할 만한 기업인들로 새로 태어났다. 신흥 올리가르히들은 금융 전문 언론들의 지원을 업어 세계 금융 시장에도 두각을 나타냈다.


  
올리가르히와 푸틴 정권, 사이가 나쁘다고?

그러나 푸틴 대통령의 최근 지적대로 이들 신흥재벌들 앞에는 광대한 선택지가 널려 있음에도 불구하고 새로운 기업 투자나 혁신에는 실패하고 있다. 원자재 생산을 제외하면 올리가르히가 외화를 벌어들이는 경우도 거의 없다. 이들의 생산품들이 국제 시장에서 경쟁력을 가질 수 없기 때문이다. 이들의 주된 수익은 생산이 아닌 주식투자, 은행 예치, 광산 매점 등에서 나오기에 당연한 결과라 볼 수 있다.
  
서방 언론들은 한 줌도 안 되는 옐친 시대에 성장한 올리가르히와 푸틴 정권 간의 불화, 그리고 푸틴 정권에 새로이 재산 불려가고 있는 억만장자들의 성장에 주목을 하는 모습이다. 그러나 이러한 연대식 증명은 결국 옐친 아래에서 성장한 부호들과 푸틴 아래에서 결합한 부호들 간의 불화는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상호간 살인이 줄고 대신 정부 규제 아래 경쟁이 제도화되는 등 푸틴 대통령이 요구한 '새로운 게임의 룰'이 작동을 하자 기업들 간의 병합이 성사되는 '커다란 행운'도 잦아진 것이다.
  
19세기 중반 프랑스 문학가 오노레 발자크는 프랑스 부르주아 그룹이 급성장한 미심쩍은 기원에 대해 "큰 운 뒤에는 큰 범죄가 있기 마련"이라고 지적했다. 대량 약탈과 출혈을 통해 억만장자가 된 21세기 러시아 부호들에게도 가능한 설명이 아닐까.(이지윤 기자) 

07. 04. 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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