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주 시사IN(355호)에 실은 북리뷰를 옮겨놓는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문해교육>(학이시습, 2014)을 골라서 읽고 적었다. 문해교육에 대해서는 데이비드 아처와 패트릭 코스텔로의 <문해교육의 힘>(학이시습, 2014)도 나란히 출간돼 눈길을 끈다.

 

 

시사IN(14. 07. 05) 읽고 쓰면서 세상 밖으로

 

<페다고지><희망의 교육학> 등 교육학 고전으로 잘 알려진 파울로 프레이리의 <문해교육>을 읽었다. 브라질 월드컵이 한창 진행 중인 것도 브라질의 세계적인 교육사상가에게 주목하게 만든 이유이지만 문해교육 프로그램이 프레이리의 대표적 교육개혁 프로그램이었다는 점에서도 관심이 갔다. ‘파울로 프레이리의 글 읽기와 세계 읽기’가 부제인데, ‘읽기와 쓰기 교육’으로서 문해교육에 대한 강조는 새삼스럽지 않지만 ‘글 읽기’와 ‘세계 읽기’를 같이 묶는다는 점이 눈에 띈다. 프레이리 문해교육론의 핵심이기도 하다.

 

글 읽기와 세계 읽기는 어떤 관계인가. “세계 읽기는 항상 글 읽기에 선행한다. 그리고 글 읽기는 계속해서 세계 읽기를 내포한다”는 구절에 압축돼 있다. 세계 읽기가 글 읽기에 선행한다는 말은 학습자가 글을 깨치기 전에 이미 세계에 대한 이해를 갖고 있다는 뜻이다. 프레이리는 몬테마리오라는 작은 어촌 마을에서의 경험을 들려주는데, 그는 보니투(bonito)라는 물고기 이름과 함께 채소, 전통가옥, 고깃배, 어부의 그림을 먼저 보여주었다. 그러자 그림을 뚫어지게 쳐다보던 주민들이 “아 여기는 몬테마리오예요. 맞아, 이 그림은 몬테마리오야. 정말 몰랐네”라고 말하며 놀라워했다. 그림(상징)을 통해서 자신들의 세계를 인식하고 재발견한 것이다.

 

이것은 전혀 새로운 세계에 대한 눈뜸이기도 했다. 주민들은 그들이 존재하는 작은 마을을 대상화함으로써 ‘세계의 주인’으로 마주 선 것이기 때문이다. 그렇게 ‘호기심 어리고 비판적인 주체’가 바로 문해교육 과정의 출발점이라고 프레이리는 말한다. 그래서 그의 문해교육의 첫 단계는 학습자들에게 글자보다 그림을 먼저 제시하는 것이다. 학습자가 글자를 기계적으로 암기하기보다는 자기 경험에 근거해 그 글자 자체를 이해하게끔 유도하는 것이다. 그림으로 제시된 상황을 해석하고 읽어내는 과정에서 학습자는 자신의 경험세계에 대한 이해를 새롭게 할 수 있다. 그 학습자가 가난한 민중이라면 “세계에 대한 비판적 독해가 깊어질수록 민중들은 숙명론과는 다른 방식으로 가난을 이해할 수 있게 된다.”

 

 

급진적 교육학을 주창한 <페다고지>의 부제가 ‘억눌린 자를 위한 교육’이라는 점에서도 확인되듯이 프레이리의 주안점은 민중의 해방을 위한 교육이다. 그에게 교육은 지배 이데올로기의 재생산 수단이면서도 동시에 그러한 이데올로기로부터 벗어나게끔 하는 사회변혁의 수단이다. 교육은 억압받는 계급의 사회적 해방을 위한 무기이며, 문해교육은 그러한 무기의 하나다. 그런데 세계 읽기가 글 읽기에 앞선다는 전제를 염두에 두면 해방적 문해교육에 앞서야 하는 것은 사회 변혁이다.

 

문해교육의 의의를 절대적으로 것으로 과대평가하지 않는다는 점이 또한 프레이리 사상의 특징이다. 그는 문해교육을 사회변혁의 유일한 기폭제로 생각해서는 안 된다고 주의를 준다. 니카라과 민중이 혁명을 통해 역사를 장악하자 곧바로 문해교육이 실시되었다. 문해과정은 역사를 장악하는 과정보다는 쉽기 때문인데, 니카라과 민중은 자연스레 자신들의 이야기를 다시 써나갈 수 있었다. 사회변혁이 문해교육에도 획기적 전기가 될 수 있다.   

 

흥미롭게도 니카라과와 대조되는 사례가 미국이다. 1980년대 중반의 통계이지만 당시 미국 민중의 6000만 명 이상이 글을 모르거나 제대로 읽지 못하는 기능적 비문해 상태에 있었다. 유엔의 128개국 가운데 미국의 문해율은 49번째였다. 이러한 대규모의 비문해 인구가 방치되고 있는 것이 제1세계의 대표국가 미국의 현실이라면 미국은 프레이리의 문해교육이 제3세계 국가 이상으로 시급하게 이루어져야 할 곳이기도 하다. 물론 한국은 세계 최고 수준의 문해율을 자랑하는 만큼 사정이 좀 다르다. 월드컵 축구팀의 성적이 브라질이나 미국에 비해 좋지 않더라도 다소간 위안으로 삼을 만하다.

14. 07. 02.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오늘자 중앙일보의 '삶의 향기' 칼럼을 옮겨놓는다. 4주에 한번씩 반년간 칼럼을 연재하게 됐는데, '북칼럼니스트'라는 직함에 맞게 주로 책 얘기를 하게 될 것 같다. 첫 칼럼은 책 이사에 관한 것이다. 지난 주말에 이사를 하고서 아직 인터넷도 개통되지 않아 이래저래 불편한 생활을 하고 있는데, 달리 생각하면 해오던 일이 준 것이니 오히려 편한 생활인지도 모르겠다...

 

 

 

중앙일보(14. 07. 01) 책 이사를 하고서

 

남들보다 책을 좀 많이 읽고 그에 대해 글을 쓴다는 거 말고는 남다를 게 없지만, 간혹 그게 도드라질 때가 있다. 이사할 때다. 이삿짐센터 직원들도 가장 힘들어하는 게 책짐이 많은 이사인데, 그건 책이 부피에 비해 무겁기 때문이다. 한 직원의 말로는 수석 이사 다음으로 힘든 게 책 이사다. 돌덩이를 옮기는 것 다음으로 힘든 일이 책짐을 나르는 일이라는 얘기다.

물론 나도 경험이 없지 않아서 대학원 시절 자취방을 옮길 때 친구의 힘을 빌려 100개가 넘는 라면박스를 나른 적이 있다. 라면 대신에 책이 들어간 라면박스였다. 엘리베이터도 없는 빌라 건물의 3층까지 계단으로 박스를 나를 때마다 다리가 후들거렸다. 내가 기억하는 가장 힘들었던 이사다. 그 이후로는 노력 동원 수준을 넘어섰기에 주로 용달 아저씨나 이삿짐센터 직원들의 도움을 받았다. 이사를 위해 미리 업체의 견적을 받을 때도 책 이사 경험이 많은지가 가장 중요한 확인사항이었다. 대학 연구실이나 도서관 이사를 해본 경험이 있다면 두말할 것 없이 가산점이 주어진다.

지난 주말에 바로 그런 이사를 또 했다. 예전 집에 이사한 지 4년 만에 전셋집을 비워주게 되었는데, 더 이상의 책이사가 부담스러워 아예 내 집을 마련했다. 보통 신중할 수밖에 없는 내집 마련의 고민을 단숨에 해결해준 것이 책인 셈이다. 형편에 맞게 몇 년 전세를 더 살다가 다시 이사를 하는 것이 결코 대안으로 생각되지 않을 정도로 책이 불어난 탓인데, 짐작엔 1만5000권에서 2만 권 사이가 되지 않을까 싶다.

적정 기준이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1만권 이상의 책을 소장하고 있을 경우 충분히 장서가로 분류할 수 있다. 그 정도면 이미 한 장소에 보관하기에는 부담스럽다. 나 같은 경우도 서너 곳에 책을 분산 보관하고 있는데, 이번에 집으로 옮긴 게 대략 전체의 3분의 1 정도다. 이사하기 전에 책장을 충분히 짜놓아서 아직 빈 공간이 조금 남아 있다는 게 이사한 보람이다.

하지만 보람은 잠시다. 일단 마구잡이로 꽂혀진 책들을 마땅한 자리를 정해서 제대로 정돈하는 게 이사보다 더 큰 일로 남아 있기 때문이다. 이건 따로 용역을 줄 수도 없는, 순전히 서재 주인의 몫이다. 이전에 살던 집에서도 가끔씩 애는 써보았지만 결국 4년 동안 온전한 책정리는 끝내지 못했었다. 두 가지 핑계를 대곤 했는데, 인생이 미완성이듯이 책장 정리도 미완성으로 끝날 수밖에 없다는 ‘철학적’ 이유가 하나였고, 군대식으로 잘 정렬된 책장보다는 중구난방으로 뒤섞인 서가에서 뭔가 새로운 아이디어가 나올 수도 있다는 ‘실용적’ 이유가 다른 하나였다.

책들의 위치를 다 기억하고 있다면 모를까, 현실적으로는 필요한 책을 제때 찾지 못하는 일이 잦았으니 실용적이란 말은 어폐가 있다. 그래도 마구잡이 배열이 뭔가 시적이라는 느낌을 줄 때도 있다. 눈앞의 책장 한 칸을 보니 『행복에 걸려 비틀거리다』와 『구텐베르크 은하계』 『나의 햄릿 강의』 『돈을 다시 생각한다』 『영화장르』 『번역이론』 『트랙스크리틱』 등이 두서 없이 꽂혀 있다. 또 다른 칸에는 『문학의 공간』과 『칼 세이건』 『냉전의 역사』 『그레이트 게임』 『물리학으로 보는 사회』 『니체 극장』이 한 편이 돼 있다. 머지않아 자기 자리를 찾게 할 계획이지만 당분간은 이런 무질서도 즐기고 싶다. 장서가의 즐거움이란 게 사실 대단찮다.

‘삶의 향기’란 칼럼을 청탁받으면서 주로 딱딱한 책 얘기나 하게 될 거라며 완곡하게 사양했지만 첫 지면에 ‘무거운 책’ 얘기만 적게 됐다. 무거운 책들과 함께하는 삶은 향기로운 삶이라기보다는 단내 나는 삶이다. 그럼에도 ‘책 속에 길이 있다’는 말을 나는 믿는다. 그 말에 인생을 걸었으니 도박인지도 모른다. 그럼에도 인간의 정신과 일상의 감각을 보존하고 환기시켜주는 가장 강력한 매체로서 책 이상의 것을 나는 알지 못한다. “이 많은 책을 다 읽으셨어요?”라는 질문을 이사할 때마다 받으면서도 “다 읽을 수는 없지요”라고 멋쩍게 답하면서 여전히 책 속에 파묻혀 지내는 이유다.


14. 07. 01.


댓글(0)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격주간 기획회의(370호) 실은 글을 옮겨놓는다. '여행서, 어디까지 갈 거니?'란 특집의 한 꼭지로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읽는 여행서'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을 받고 쓴 것이다. 쓰다 보니 특집의 의도와는 좀 다르게 '모든 책은 여행서'라는 결론으로 빠지게 됐다. 말 그대로 여행서를 다룬 다른 꼭지의 글들이 있어서 상쇄는 되는 듯싶다. 여행서 특집까지 나오게 된 건 정여울 평론가의 베스트셀러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홍익출판사, 2014) 때문인데, 이번에 속편으로 <내가 알고 싶은 유럽 TOP10>(홍익출판사, 2014)이 출간됐다. 다들 어디론가 떠나고픈 게 한국인의 공통 심사인 모양이다...

 

 

기획회의(14. 06. 20) 모든 책은 여행서다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읽는 여행서’에 대해 써달라는 청탁에 응하긴 했지만 단서를 좀 달아야 할 것 같다. 일단 ‘여행 안 가는 사람’을 대표할 만하지 않다. ‘여행가’는커녕 대놓고 여행이 취미라고 말하는 사람들 축에 들지 못한다는 건 분명하다. 그렇다고 ‘난 여행 반댈세’라고 큰소리칠 만한 여행 반대론자도 아니고, ‘여행은 그냥 싫어요’라며 얼버무리는 여행 기피론자도 아니다. 대다수의 사람들처럼 ‘여행이라도 떠나면 좋을 텐데’라고 생각하면서도 막상 시간과 비용을 계산하다가 혹은 아예 그런 계산에 이르기도 전에 여행과는 인연이 멀어지는 부류다. 그렇다 하더라도 등 떠밀려서 떠난 여행이 없지 않아서 인천공항을 드나든 횟수가 두 손가락으로 꼽을 정도는 된다. 많다고 할 수는 없어도 ‘여행 안 가는 사람’이라고 하기엔 애매하다. ‘여행 자주 안 가는 사람’ 정도가 무난한 분류이지 않을까. 하긴 여행 인구가 부쩍 늘어나고 베스트셀러 여행서도 등장하는 보면 ‘여행 좀 가는 사람’에 견주어 ‘자주 안 가는 사람’은 ‘안 가는 사람’에 더 가까운 것인지도 모르겠다.

 

세계문학 작품들도 모두 여행서
물론 여행을 자주 가건 안 가건 여행서도 책인 이상 여행서에 대해 한마디 거드는 게 곤란할 건 아니다. 문제는 ‘여행서’의 정의다. 인터넷서점의 도서 분류표에는 ‘여행’ 항목이 따로 있으니 일차적으로는 거기에 속한 책들이 여행서일 것이다. 요즘 가장 각광받고 있는 정여울의 <내가 사랑한 유럽 TOP10> 같은 책이 대표적이다. 통상 여행안내서나 여행에세이로도 분류되는 책들이다. 하지만 여행의 개념과 범위를 좀 확장하면, 고전적인 여행기들도 여행서에 포함된다. <왕오천축국전>부터 시작해 <동방견문록>과 <이븐 바투타 여행기> 등을 떠올릴 수 있다. 박지원의 <열하일기>와 괴테의 <이탈리아 기행>도 명망 높은 여행기들이다. 그뿐 아니다. 사실 원초적인 입장에서 다시 생각해보면, 모든 책이 자기계발서로 읽힐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로 모든 책이 여행서로 읽힐 수 있다. 그러니까 여행서라는 건 존재론적으로 규정되는 것이 아니라 화용론적으로 규정된다. 어떻게 쓰느냐, 혹은 어떻게 읽느냐에 달려 있다는 얘기다.

 
‘일이나 유람을 목적으로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 여행에 대한 통상적인 정의다. 여행의 목적은 천차만별이고, 심지어 ‘그냥 가봤어’라는 식의 여행도 가능하기에 초점은 ‘다른 고장이나 외국에 가는 일’이겠다. 그렇다면 그렇게 다른 고장이나 외국으로 안내하는 모든 책이 다 여행서 아닌가. 단적으로 말해서, 강의를 위해서라도 매주 몇 권씩 읽게 되는 세계문학 작품들이 내게는 모두 여행서다. 가령 디킨스의 <두 도시 이야기>에서 우리는 19세기 중반 런던과 파리의 여러 역사적 사건과 허구적 인물들을 만날 수 있다. ‘허구적’이라고는 하지만 우리가 실제 여행에서 그냥 스치고 지나가는 사람들보다 훨씬 더 생생하게 살아있는 인물들이다. 실제 경험담과 허구의 이야기를 동일시할 수는 없지 않느냐는 반론이 가능할지 모르지만, 만리장성에 대한 언급도 없다는 등의 이유를 들어 <동방견문록>의 저자 마르코폴로가 정말로 중국을 다녀왔을까 의문을 제기하는 학자들도 있다는 걸 상기해보라. 이 문제는 더 깊이 들어가면 가상과 현실의 차이나 허구세계의 존재론까지 들먹이게 되는데, 실제 여행과 가상의 여행을 구분하는 것이 생각보다 어려운 문제라는 것 정도만 지적하자. 중국에 가본 적도 없는 카프카의 단편 <만리장성 축조 때>가 적어도 만리장성에 대해서만큼은 마르코폴로보다 훨씬 더 많은 생각거리를 제공해준다는 점과 함께.

 

 
여러 가지 사정 때문에 ‘여행을 못 가는 사람’이 아니라 소신을 갖고 ‘여행을 안 가는 사람’이라면 여행에 대한 생각이나 태도가 다를 것이다. 여행을 못 가는 대신에 여행서나 뒤적이는 부류로 이해해서는 곤란한 이유다. 여행을 안 가는 것이 다른 방식의 여행을 이미 충분히 하고 있어서라면, 혹은 좀 특이한 곳을 여행하고 있어서라면 어떨까. 가령 알베르토 망겔의 <인간이 상상한 거의 모든 곳에 관한 백과사전>이나 더글러스 애덤스의 <은하수를 여행하는 히치하이커를 위한 안내서>를 읽고 있는 독자를 생각해보라. 하나는 사전이고 다른 하나는 안내서이지만, 두 권 모두 ‘여행서’로 불릴 만하면서 1200쪽이 넘는다는 점도 공통적이다. 맘먹고 읽어도 일주일은 걸릴 만한 분량의 책들이다. 그런데 과연 어떤 여행이 이런 책의 독서를 대신할 수 있을까. 어디로든 떠날 수 있는 여유가 생겨 인천공항에 가본다 하더라도 ‘상상적 장소’나 ‘은하수’ 여행을 대신할 항공편을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책은 탁월한 여행을 저렴한 비용으로 가능케 한다 
오직 독서를 통해서만 가능한 여행도 있다고 하면, ‘여행 안 가는 사람’들의 여행을 무시할 일이 아니다. 그럼 이 글의 주제를 ‘여행 안 가는 사람의 독서 여행’으로 슬쩍 틀어도 무방할 것이다. 좁은 의미의 여행서 정의에서 벗어나면 우리는 모든 책을 여행서로 읽을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어떤 책들을 분명 실제 여행이 제공해줄 수 없는 놀랍고도 탁월한 여행을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도 가능하게 해준다(우리에게 필요한 수고는 단지 눈을 뜬 채 책장을 두 손으로 펼쳐 쥐고 있는 것 정도다). 당장 쥘 베른의 <80일간의 세계일주>나 <해저 2만리>를 펼쳐보라. 방랑의 고아 라스무스를 따라나서도 좋겠고, 닐스의 이상한 모험에 동반자가 되어도 좋겠다. 혹은 도스토예프스키의 <유럽인상기>나 카잔차키스의 <러시아 기행>을 옆구리에 껴도 좋겠다. 조금 대범하다면 단테의 <신곡>과 함께 지옥으로의 하강도 시도해봄직하다. 그래, 여행의 정수는 어쩌면 지옥 여행인지도 모른다.

 


단테가 상상한 가상의 지옥만 우리의 목록에 있는 건 아니다. 20세기의 지옥이라 할 수용소 생존자들의 소설과 수기도 서가에는 진열돼 있다. 실제로 스탈린치하의 강제수용소에서 8년간 복역했던 작가 솔제니친의 데뷔작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와 대작 <수용소군도>는 어떤가(완간됐던 <수용소군도>가 일부만 다시 출간되고 만 것은 유감스럽다. 우리의 간접 수용소 체험을 절름발이로 만들었다). 나치의 절멸수용소 생존 작가 프리모 레비의 여러 책들, 곧 <이것이 인간인가>에서 <주기율표>를 거쳐 <가라앉은 자와 구조된 자>에 이르는 고발과 증언은 참혹했던 지옥으로 우리를 다시금 안내한다. 역시나 아우슈비츠 생존 작가인 장 아메리의 <자유죽음>과 <죄와 속죄의 저편>도 마찬가지다. 레비와 아메리는 자살로 생을 마감한 한 시대의 증인들이다. 요즘은 다카우수용소나 아우슈비츠수용소가 관광객들의 여정에 포함돼 있기도 한데, 정작 그런 장소들이 담고 있는 기억을 책으로 먼저 확인하지 않는다면 그 여행은 눈 뜬 장님의 여행과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지옥보다는 조금 나은 곳을 찾는다면, 도스토예프스키의 <죽음의 집의 기록>이나 체호프의 <사할린섬>은 어떨까. <죽음의 집의 기록>은 작가가 정치범으로 직접 수감됐던 시베리아의 수용소 체험을 바탕으로 한 소설이고, 무라카미 하루키가 장편소설 <1Q84>에서 언급해 일본에서는 재출간되었던 <사할린섬>은 체호프의 사할린 여행과 현장조사 보고서다. 유형수들의 삶을 조사하기 위해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서 면접카드를 만들고 이를 바탕으로 쓴 것으로 그에게는 러시아의 현실과 러시아 민중의 삶을 재발견하는 계기가 된다. 그와 비슷한 의미를 갖는 책이라면 막심 고리키의 자전 삼부작도 빼놓을 수 없다. <어린 시절><세상 속으로><나의 대학>으로 이루어진 이 삼부작에서 고리키는 자신의 삶을 회고하기보다는 그가 만난 사람들을 기억한다. 고리키란 필명의 뜻대로 ‘쓰라린’ 삶을 살았지만 그는 자신이 만난 도시빈민과 노동자들의 모습에서 자신의 삶을 다시 발견한다. 그런 만남과 분리된 개인적인 삶이 그에겐 따로 없었다. 이러한 민중의 발견은 미국 작가 스타인벡의 대표작 <분노의 포도>가 갖는 의의이기도 하다. 소설이긴 하지만 이 작품 역시 미국 중남부 오클라호마에서 서부 캘리포니아까지 66번 국도를 따라 작가 스스로 이주민들과 같이했던 여정에 토대를 두고 있다. 그러한 경험에 힘을 얻어 썼기에 1930년대 이주 노동자들의 험난한 여정과 힘겨운 삶이 독자에게 생생하게 전달된다. 

 

 

여행의 목적은 독서 
여행자에게는 모든 장소가 여행을 갈 수 있는 곳과 갈 수 없는 곳으로 분류된다면, ‘여행을 갈 수 없는 곳’은 ‘여행을 가지 않는 사람’이 단연 선호할 만한 곳이다. 그런 장소 가운데 내가 특별히 애착을 느끼는 곳은 러시아 작가 플라토노프의 ‘체벤구르’와 미국 작가 포크너의 ‘요크나파토파’이다. 공통점은 둘다 가상의 공간이라는 점. 가상의 공간이라고 해서 저 우주 바깥이나 허구세계에만 존재하는 공간은 아니다. 실제 공간을 모델로 했지만 두 작가가 새롭게 이름을 붙였을 따름이다. 지상에 건설된 공산주의 마을 체벤구르를 찾아가는 여정을 담은 플라토노프의 소설 <체벤구르>는 공산주의 유토피아에 대한 작가의 집요한 문제의식과 깊이 있는 성찰을 집약한 작품이다. 1920년 말에 쓰였지만 러시아에서는 작가 사후 수십 년이 지난 1980년대 말에 가서야 발표될 수 있었다. 부재하는 장소에 관한 소설이기 이전에 아예 부재하는 책이었던 것이다. 하지만 플라토노프는 오늘날 가장 심오한 20세기 작가 가운데 한 명으로 재평가되고 있으며 <체벤구르>는 그의 대표작으로 무게를 더해가고 있다.

 
포크너는 자기 소설의 배경이 되는 미시시피주 고향 지방(카운티)에 요크나파토파란 이름을 붙였다. <소리와 분노><내가 죽어 누워 있을 때><압살롬, 압살롬> 등의 대표작들이 모두 제퍼슨을 행정중심지로 하는 요크나파토파를 배경으로 하고 있어서 ‘요크나파토파 사이클’로 묶인다. 포크너가 소설적 공간으로 새로 고안해낸 지명이지만 요크나포토파는 오늘날 유명한 현실 속 지명이 됐다. 가상의 공간이 현실의 지명이 된 사례 가운데 하나다. 포크너의 소설들에서 요크나파토파는 남북전쟁 이후 몰락해가는 남부의 현실을 집약하고 있는 곳이다. 실제 사진으로 보는 요크나파토파는 낡은 저택들과 황량한 숲으로 우중충한 인상을 심어주지만 그 공간에 깊이를 부여하는 것은 포크너 소설들에 등장하는 인물들의 고독한 목소리다. 갈 수 없는 곳이지만 가고 싶은 곳으로 떠올리게 만드는 것이 이런 소설들의 힘이다. 

 
프랑스 작가 외제 다비는 이렇게 말했다. “세계는 한 권의 책이다. 여행하지 않는 사람은 그 책을 한 쪽밖에 읽지 못한 셈이다.” 이 비유가 적절하다면, 여행의 목적은 독서다. 즉 여행은 세계라는 책을 읽는 한 가지 방식이다. 여행 자체가 독서라면, ‘여행하는 사람의 독서’와 ‘여행하지 않는 사람의 독서’의 차이란 독서 방법의 차이다. 가만히 앉아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고, 반대로 돌아다니면서 책을 읽는 사람이 있을 따름이다. 정리하자. “세계는 책이고 여행은 독서이며 모든 책은 여행서다.” 그러니 애초에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읽는 여행서’라는 게 따로 존재하지 않는다. ‘여행 안 가는 사람’이 아니라 ‘앉아서 여행하는 사람’이고, ‘여행 가는 사람’이 아니라 ‘돌아다니며 책을 읽는 사람’이다.

 
여기까지 쓰고 나니까 <호밀밭의 파수꾼>의 주인공 홀든이 왜 여행을 단념했는지도 이해된다. 물론 서부로 가겠다는 그의 결심을 꺾은 건 여동생 피비가 같이 따라가겠다고 울면서 따라나선 때문이었다. “난 아무 데도 안 갈 거야. 마음이 변했어. 그러니까 그만 울어.”라고 다독거리며 홀든은 피비를 데리고 동물원에 간다. 어릴 적 피비가 회전목마 타는 걸 미칠 듯이 좋아했다는 걸 떠올린 홀든은 피비의 기분을 풀어주기 위해 목마에 태운다. 피비가 목마를 타는 걸 보면서 홀든은 비를 흠뻑 맞으면서도 행복감을 느낀다. “너무 행복해서 큰 소리를 마구 지르고 싶을 정도였다. 왜 그랬는지는 모르겠다. 그냥 피비가 파란 코트를 입고 회전목마 위에서 빙글빙글 도는 모습이 너무 예뻐 보였다. 정말이다. 누구한테라도 보여주고 싶을 정도로.”

 
홀든의 사례에서 알 수 있지만, 여행서를 읽는 것 말고도 ‘여행 안 가는 사람’이 할 수 있는 것이 하나 더 있다. 동물원에 가서 동생이나 아이를 회전목마에 태우고 그걸 구경하는 일. 좀 멋쩍어도 홀든식의 행복은 만끽할 수 있지 않을까. 다음엔 차라리 ‘여행 가서 절대로 읽지 않을 책’에 대해 몇 마디 적어봐야겠다.

 

14. 06. 28.


댓글(0) 먼댓글(0) 좋아요(3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의 공지다. 푸른역사아카데미에서 진행하는 7월 강좌는 나보코프를 읽는다. '로쟈와 함께 읽는 나보코프'(http://cafe.daum.net/purunacademy/8Bko/169). 나보코프의 미완성 유작 <오리지널 오브 로라>가 나온 김에 번역본으로 읽을 수 있는 작품들을 네 편을 골랐다. 7월 7일부터 28일까지 매주 월요일 저녁 7시 30분-9시 30분까지다. 구체적인 일정은 아래와 같다.

 

 

1강 7월 7일 나보코프, <오리지널 오브 로라>

 

 

 

2강 7월 14일 나보코프, <사형장으로의 초대>

 

 

3강 7월 21일 나보코프, <절망>

 

 

 

4강 7월 28일 나보코프 <롤리타>

 

 

14. 06. 17.


댓글(0) 먼댓글(0) 좋아요(2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강의 공지다. 한겨레교육문화센터에서 진행하는 '로쟈의 세계문학: 노벨문학상 수상작 읽기' 시즌3이 7-8월에 진행된다(매주 화요일 저녁 7:30-9:30이고, 8월 12일은 휴강이다), 이번엔 1989년도 수상자 호세 카밀로 셀라에서 2003년 수상자 존 쿳시까지, 여덟 명의 수상작가와 그들의 대표작을 살펴본다.(http://www.hanter21.co.kr/jsp/huser2/educulture/educulture_view.jsp?&category=academyGate9&tolclass=0001&lessclass=0003&subj=F91578&gryear=2014&subjseq=0001&booking=). 구체적 일정은 아래와 같다.

 

로쟈의 세계문학클럽 : 노벨문학상 수상작 읽기 3 (1989~2003)

 

1강 7월 1일_ 카밀로 호세 셀라, <파스쿠알 두아르테 가족> - 1989(스페인)

 

 

2강 7월 8일_ 토니 모리슨, <빌러비드> - 1993(미국)

 

 

3강 7월 15일_ 오에 겐자부로, <만엔원년의 풋볼> -1994(일본)

 

 

 

4강 7월 22일_ 주제 사라마구, <눈먼 자들의 도시> -1998(포르투갈)

 

 

 

5강 7월 29일_ 귄터 그라스, <양철북> -1999(독일)

 

 

 

6강 8월 5일_ V. S. 나이폴, <미겔 스트리트> -2001(영국)

 

 

7강 8월 19일_ 임레 케르테스, <운명> -2002(헝가리)

 

 

 

8강 8월 26일_존 쿳시, <추락> - 2003(남아공)

 

 

14. 06. 14.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4)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