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지젝의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인간사랑, 2001)을 다시 집어들었다(앞으로는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라고 적겠다). 지젝에 관한 짤막한 글들을 쓰면서 그의 '기원'에 대한 관심이 다시 돋았기 때문인데, 부분적으로 읽은 것까지 포함하면 세번째 읽기 정도 된다. 지젝의 생각과 어법에 어느 정도 익숙해진 탓인지 책은 수월하게 읽힌다. 그런 수월성에 한몫하고 있는 건 물론 깔끔한 번역이다. 가끔씩 실족하지만 않았다면 모범이 될 만한 번역이었다. 조금 손을 봐서 개정판을 내는 건 어떨까 싶다(<삐딱하게 보기>도 그런 경우이다).

지젝 입문서들도 몇 권 나와 있지만 내 생각에 지젝 읽기의 첩경은 그의 저작 한 권을 꼼꼼하게 완독하는 것이다. 비교적 읽을 만한 번역서 한 권을 가급적이면 원서와 대조해가면서 고시서적 읽듯이 완독한다면 나머지 책들을 읽어내는 건 그닥 어렵지 않아 보인다(나름대로 '지젝이고 라캉대기' 시작할 수 있다). 지젝 읽기의 장벽이라면 그 한 권 읽어내기다.

 

 

 

 

그러한 읽기의 대상으로 예전에 <삐딱하게 보기>나 <혁명이 다가온다> 등을 제시하고 나름대로 운을 뗀 적은 있었지만(http://blog.aladin.co.kr/mramor/803797, http://blog.aladin.co.kr/mramor/1262413, http://blog.aladin.co.kr/mramor/1010978 등의 페이퍼 참조) 지젝으로 입에 풀칠하는 처지가 아닌지라 매듭은 짓지 못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읽기'는 내가 '짓지 못할' 또다른 매듭이다.

내가 갖고 있는 국역본은 초판 1쇄이어서 나중에 첨부된 참고문헌이 빠져 있다. 복사한 원서를 참조할 수밖에 없는데, 번역본이나 원서나 페이지가 튿어져 나가는 등 상태가 썩 좋지는 않다. 그나마 상태가 가장 나은 건 부분부분만 참조했던 러시아어본이다(내가 은근히 자랑스러워 하는 책이다). 대략 그런 연장들을 들고서 지젝의 광맥을 캐보고자 한다.   

알다시피 영어로 씌어진 이 처녀작의 서문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가 썼다. 하지만 이 서문은 당연히 본문보다 나중에 씌어진 것이며 읽는 순서도 그에 따르면 된다고 본다. 처음엔 그냥 대충 읽고 넘어가면 되겠다. 이어지는 건 이후의 지젝의 책들에선 잘 보기 힘든 '감사의 말'이다. 지젝은 이렇게 적었다.

"필자는 파리 8대학의 세미나를 통해서 라캉으로 접근할 수 있게 해주었던 자크-알랭 밀레에게 깊은 감사의 말을 전하고 싶다. 그리고 라캉의 개념적인 장치를 이데올로기 분석의 도구로서 활용하도록 방향을 제시해준 에르네스토 라클라우와 샹탈 무페에게도 고마움을 표한다."(17쪽)

슬로베니아의 류블랴나대학에서 하이데거에 관한 논문으로 박사학위를 받은 지젝은 당국에 요주의 인물로 찍혀 자리를 못 잡고 있다가 밀레의 초청으로 프랑스로 건너가 정신분석학 수련을 받게 된다(간단한 사연은 http://blog.aladin.co.kr/mramor/424267, http://blog.aladin.co.kr/mramor/677684 참조). 기억에 그가 불어로 쓴 최초의 단독 저작 <가장 숭고한 히스테리 환자: 헤겔이 지나간다>(1988)는 밀레의 지도하에 받은 그의 정신분석학 박사학위 논문이다(<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은 특이하게도 불어본이 없는 듯하다).

라클라우와의 관계에 대해서는 스타브라카키스의 <라캉과 정치>가 번역된 걸 계기로 쓴 '라클라우-라캉-지젝'(http://blog.aladin.co.kr/mramor/1033614)을 참고하시길. 지젝이 직접적으로 고마움을 표하고 있는 것은 라클라우/무페의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인데(국역본은 <사회변혁과 헤게모니>), 판권 문제가 어떻게 돼 있는지 몰라도 절판된 국역본이 재출간되었으면 좋겠다. 라클라우를 위해서나 지젝을 위해서나(그리고 물론 그들의 독자들을 위해서나).

안 그래도 어제 부분 복사한 책은 루틀리지에서 나온, 사이먼 크리칠리 등이 편집한 <라클라우: 비판적 독해>(2004)인데, '철학' '민주주의' '헤게모니' 세 개의 장으로 구성돼 있으며 4부는 비판적 독해들에 대한 라클라우의 답변이고 주디스 버틀러와의 서신대담이 부록으로 실려 있다(지젝의 글은 포함돼 있지 않다). 덧붙여 말하면, 버틀러와 라클라우, 그리고 지젝이 공저한 <우연성, 헤게모니, 보편성>(2000)은 도서출판b의 근간 도서이다(올해는 나오는 것인가?). 세 사람의 '화끈한' 논전을 담고 있다.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의 배경으로 읽어야 할 책으론 <헤게모니와 사회주의 전략> 외에 하버마스의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도 필수적이다. 지젝의 서론은 무엇보다도 바로 이 책에 대한 언급으로부터 시작하기 때문이다.

"이른바 '포스트 구조주의' 논쟁을 집중적으로 다루고 있는 하버마스의 책 <현대성의 철학적 담론>(1985)에서 라캉의 이름이 언급될 때는 특이한 사항이 하나 있다. 그의 이름은 고작 다섯 차례 언급되는데, 그것도 항상 다른 이름들과 함께 등장한다."(19쪽)

지젝은 아예 다섯 차례 거명되고 있는 쪽수까지 밝히고 있는데, 이것이 징후적으로 뜻하는 바는 무엇일까? "결국 라캉의 이론은 제 고유의 독립체로 간주되지 않고 있다. 라클라우와 무페의 용어를 사용하자면, 그것은 항상 일련의 등가물들 속에서 제시된다. 자신의 진짜 논쟁대상인 푸코를 포함해 바타이유, 데리다 등에 관해 상세하게 논의하고 있는 이 책에서 하버마스는 왜 유독 라캉과는 직접 대면하길 거부하는 것일까?" 이 수수께끼에 대한 답은 또 다른 흥미로운 사실을 통해서 찾을 수 있다. "알튀세르의 이름이 하버마스의 책에선 거론조차 되지 않는다"는 사실이다.

 

이로부터 얻어낼 수 있는 결론: "따라서 우리의 첫 논제는 오늘날 지성사를 전면적으로 차지하고 있는 대논쟁인 하버마스와 푸코의 논쟁이 이론적으로 더 심원한 논쟁인 알튀세르와 라캉의 대립을 감추고 있다는 사실이 될 것이다." 그러니까 지젝이 보기에 '하버마스 vs 푸코'라는 이론적 대립은 '알튀세르 vs 라캉'이란 본원적인 대립에 비하면 가면이자 유사 대립에 불과하다. "그렇다면 무슨 이유로 알튀세르와 라캉의 대립이 일종의 은유적인 대체를 통해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립으로 전환된 것일까?" 지젝은 이 문제가 "네 가지 서로 다른 윤리적 입장과 네 가지 서로 다른 주체개념"의 문제와 연루된 것으로 본다.

"하버마스에겐 단절되지 않은 의사소통의 윤리학, 보편적이고 투명한 상호 주관적인 공동체에 대한 이상이 있다. 따라서 그 이면에 있는 주체개념은 당연히 초월적 반성이라는 고루한 주체의 언어철학적 판본이다. 반면, 푸코와 함께 우리는 보편주의적 윤리학으로부터 돌아서서 일종의 윤리의 미학화에 도달하다.(...) 스스로를 계발하여 주체로서 창출하고 자기만의 독특한 삶의 기술을 발견해야 한다. 바로 이러한 이유에서 푸코는 주체성의 특수한 방식을 구성하는 주변적인 삶의 방식에 매혹되었던 것이다."(19쪽) 

마지막 문장에서 '주변적인 삶의 방식(marginal lifestyles)'은 '주변적인 라이프스타일'로 이해하는 게 편하다. "예를 들어 사도마조히즘적 세계, 동성애적 세계 등등"인데, 원문이 "the sadomasochistic homosexual universe, for example"이므로 그냥 "예컨대, 사도마조히즘적인 동성애적 세계"라고 하는 게 낫겠다(알려진 바대로 푸코는 에이즈로 세상을 떠났다). 지젝이 지목하고 있는 책은 푸코의 대담집 <권력과 지식>(나남, 1991)이다(절판된 책이지만 오역 범벅이라고 하므로 아쉬울 건 전혀 없겠고 다만 재번역돼 나왔으면 좋겠다. 우리는 어떤 푸코를 읽었던 것인지?). 지젝이 참고하고 있는 건 물론 영어본(1984)이다.

"이러한 푸코의 주체개념이 얼마나 엘리트적-휴머니즘적 전통에 부합하고 있는지를 간파하기는 어렵지 않다. 그것을 가장 그럴싸하게 실현한 것은 내적인 열정들을 통제하고 자신의 삶 자체를 일종의 예술작품으로 만드는 르네상스의 '전인주의적' 이상이 될 것이다. 푸코의 주체개념은 오히려 고전적인 것이다. 적대적인 힘들을 조화시키는 자기-매개의 힘으로서의 주체, 자기 이미지를 복구함으로써 '쾌락의 사용'을 통제하는 방편으로서의 주체. 결국 하버마스와 푸코는 동전의 양면과도 같다."(20-21쪽)

 

 

 

 

푸코의 주체개념과 관련하여 가장 먼저 참고해볼 수 있는 책은 강의록 <주체의 해석학>(동문선, 2007)이겠다. 그리고 <성의 역사>(나남)와 같은 그의 후기 저작들과 <자기의 테크놀로지>(동문선, 1997) 같은 책들. 특히 이 주제에 대해서는 예전에 '미셸 푸코, 혹은 주체의 이론가'(http://blog.aladin.co.kr/mramor/1120854)라고 옮겨놓은 리뷰를 참조하는 게 유익하다.

여하튼 그래서 하버마스와 푸코의 대결구도는 '가짜'라는 것이다. 대신에 "진정한 단절을 도입하는 사람은 바로 알튀세르이다. 그가 분열-간극-오인이야말로 그 자체로서 인간 조건의 특징이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가능하다는 사고는 탁월한 이데올로기적인 발상이라는 논제를 전개할 때, 바로 거기서 진정한 단절이 일어나는 것이다."

 

 

 

 

"이데올로기의 종말이 가능하다는 사고는 탁월한 이데올로기적인 발상"이라는 말은 "이데올로기는 끝났다!"는 사고 자체가 이데올로기 중의 이데올로기라는 뜻이다. 여기서 지젝이 지목하고 있는 책은 알튀세르의 <마르크스를 위하여>(1965)이다. 국내에서 지난 90년대 중반 알튀세르 '열풍'과 함께 <맑스를 위하여>(백의, 1997)라고 번역/소개된 책이지만 현재는 절판된 상태이다. 국내에서의 알튀세르 수용 또한 프랑스 현지에서의 경로를 밟은 것인지?

지젝의 지적대로, "알튀세르 학파의 갑작스런 소멸엔 뭔가 풀리지 않는 것이 있다. 그것은 이론적인 패배라는 말로는 설명할 수 없는 것이다. 마치 알튀세르의 이론엔 곧바로 잊혀져야만 하는, '억압되어야만' 하는 외상적인 중핵이 있는 듯하다."(20쪽) 하다 못해 알튀세르의 대표적인 이데올로기론인 '이데올로기와 이데올로기적 국가장치'(<아미앵에서의 주장>)를 지금은 도서관에서나 빌려서 읽어볼 수 있다. 이건 국내에 적지 않은 알튀세리앵들이 있었던 걸 고려하면 기이한 일이다. 혹은, 지젝이 인용하는 셜록 홈즈의 용어를 빌면 '기이한 사건(curious accident)'이다(홈즈의 국역본에서는 '흥미로운 사건'이라고 번역되지 않았을까?). 

"알튀세르는 윤리적인 문제들에 관해 폭넓은 저술을 남기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체의 폐지나 소외의 영웅주의라고 부를 수 있는 어떤 급진적인 윤리적 태도가 그의 저서 전반에 걸쳐 구혀되고 있다는 것은 분명한 사실이다." 여기서 '주체의 폐지'는 'subjective destitution'의 번역이다. 다른 책들에서 주로 '주체의 궁핍'이라고 직역된 표현인데, 말 그대로 '텅 빈' 주체를 떠올리면 된다(아니 그 '비어 있음' 자체가 '주체'이다).

"핵심은 주체효과를 이데올로기적인 오인으로서 산출해내는 구조적인 메커니즘을 폭로해야 한다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이러한 오인은 불가피하다는 점을 전적으로 인정해야 한다는 데에 있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역사적인 활동의 조건으로서, 역사적인 과정의 작인이라는 역할을 떠맡는 조건으로서 일정한 착각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라면 주체는 일정한 오인을 통해서 구성된다. 이데올로기적인 원인을 소환하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수신자로 '인정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을, 말하자면 미셀 페쇠가 지적했듯이 반드시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는, "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라는 식의 환영을 내포한다."(21-22쪽) 

두번째 문장의 원문은 이렇다: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through which the subject 'recognizes' itself as the adressee in the calling up of the ideological cause implies necessarily a certain short circuit". (2쪽) 'interpellation'에 걸리는 관계사절을 빼면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necessarily a certain short circuit..."이란 문장이고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을 내포한다"는 게 줄거리이다,

문제는 관계사절, 즉 the process of ideological interpellation through which the subject 'recognizes' itself as the adressee in the calling up of the ideological cause"의 번역이다. "이데올로기적인 원인을 소환하면서 주체가 자기 자신을 수신자로 '인정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인 호명과정"에서 '이데올로기적 원인'을 주체소환하는 것으로 돼 있지만 (이데올로기에 의해 우리가 주체로 호명된다는) '호명이론'에서 어떻게 주체가 소환의 '주체'가 될 수 있겠는가? 소환의 주체는 당연 '이데올로기'이고 '이데올로기적 명분(ideological cause)'이 아닌가? 다시 옮기면, "주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소환(호출)하는 수신자로 '인지'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적 호명과정" 정도가 되겠다.

해서 전체를 다시 옮기면, "이런 관점에서라면 주체라는 것 자체는 일정한 오인을 통해서 구성된다. 주체가 자신을 이데올로기적 명분이 소환(호출)하는 수신자로 '인지'하게 되는, 이데올로기의 호명과정은 필연적으로 일정한 단락(短絡),'나는 이미 거기에 있었다'는 식의 환영을 내포하며 이것은  미셸 페쇠가 지적했듯이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한다."

여기서 알튀세르의 제자인 미셸 페쇠(1938-1983)는 '호명이론의 가장 정교한 판본을 제시했던' 철학자로 '호명'되고 있는데(보통은 '담론 이론가'로 알려져 있다), 지젝이 염두에 둔 책은 <팔리스의 진실(Les vérités la Palice)>(1975)이고 이 책은 <언어, 의미론, 이데올로기(Language, Semantics and Ideology)>(1982)로 영역돼 있다(오래전에 복사해둔 책인데 어디에 있는지는 신만이 아실 듯하다). 

한데, 페쇠와 관련하여 국역본의 이어지는 대목은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고 있다. 호명이론이 함축하는 단락에 대한 설명이다. ""당신이 프롤레타리인 이상 프롤레타리아로 호명되었다고 해서 놀랄 일은 없지 않은가?"라는 식의 단락인 것이다. 페쇠는 다음과 같은 유명한 농담을 남긴 막스 브라더스를 언급하며 마르크스를 보충한다. "당신을 보니 엠마누엘 라벨리가 생각나는군요." "하지만 내가 바로 엠마누엘 라벨리요." "그렇다면 당신이 그처럼 보인다고 해도 이상한 일은 아니군요.""(22쪽)

이 대목의 원문은 이렇다: "the short circuit of 'no wonder you were interpellated as proletarian, when you are a proletarian'. Here, Pecheux is supplementing Marxism with the Marx Brothers, whose well-known joke goes: 'You remind me of Emanuel Ravelli.' 'But I am Emanuel Ravelli.' 'Then no wonder you look like him!'(3쪽) 

내가 보기에 역자는 '여기서(Here)'를 '다음과 같은'으로 잘못 옮겼다. 해서 막스 브라더스의 유명한 농담을 페쇠가 직접 '언급'한 것처럼 돼버렸지만 페쇠의 책은 제법 '진지한', 막스 브라더스의 농담이 끼어들 여지는 없어 보이는 책이다(지젝이 아니라면 누가 이론서에 막스 브라더스를 끌어오겠는가?). 다만, 페쇠는 호명이론을 설명하며 'no wonder you were interpellated as proletarian, when you are a proletarian'이라고 말했을 뿐이고, 이게 지젝이 보기에는 "마르크스를 막스 브라더스로 보충하는" 듯한, 희극적인 효과를 수반하는 일이다.     

우리말로는 '마르크스'와 '막스 브라더스'라고 옮기지만 원어는 'Marx'와 'Marx Brothers'여서 그 희극적인/패러디적인 대비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전체 다섯 명으로 이루어진 이들 형제는 독일에서 미국으로 건너온 유대계 이민자 가계이며 1920년대에 최고의 인기를 누린 코미디언들이다(http://www.youtube.com/watch?v=ycZJZY5uPh0 같은 동영상 참조). 아버지의 이름이 원래 사이먼 매릭스(Simon Marrix)에서 샘 막스(Sam Marx)로 개명되면서 본의 아니게 '막스 브라더스'가 되었다고.

여하튼 요점은 알튀세르-페쇠에게서 이데올로기적 호명에 의한 주체형성은 자기-소외의 과정을 함축하며 이것은 희극적인 효과를 유발한다는 것이다. 지젝은 이러한 알튀세르의 소외의 윤리학에 라캉의 분리의 윤리학을 대비시킨다. 하지만 라캉의 윤리학은 따로 다루어야겠다. 이미 날이 어두워졌으므로...

요컨대, 이런 식으로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 읽기는 계속 진행될 수 있다. 마음 먹기에 달린 문제이다...

07. 09. 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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람혼 2007-09-07 13:1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국내에서 한창 푸코가 유행하던 90년대 초반을 기억해보면, 정말로 "우리는 어떤 푸코를 읽었던가"라는 물음을 다시 묻게 되는 것 같습니다. 이어지는 연상으로, 지젝ㅡ그리고 라캉ㅡ에 대해서는 어떻게 될까, 그런 생각도 잠시 해보게 됩니다. 예를 들자면, 나중에 우리가 지젝ㅡ그리고 라캉ㅡ의 '수용사'를 반추해보게 될 때, 어떤 작가의 말마따나 단순히 '지젝이고 라캉대기'의 시기로 기억될 것인지, 아니면 그 어떤 다른 것으로 기억될 것인지, 그런 잡념들이 바로 저 '생각들'에 해당될 테지요. 그런 측면에서 오히려 로쟈 님의 저 제목('Marx and Marx Brothers')은 시사하고 암시하는 바가 더 크다고 생각되는데요, 저로서는 개인적으로 지젝의 이론적 형상과 그 그림자가, '마르크스'보다는 '마르크스 브러더스'로, '히치콕'보다는 '채플린'으로, 그리고 어쩌면 '라캉'보다는 '알튀세르'라는 레테르로 더 기억되고 논의되었으면 어떨까 하는 '은유'의 바람 한 자락 풀어놓게 됩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생각해볼 때, 외형적으로 '퇴조하여 사라진' 듯이 보이는 '알튀세리앙'들의 계보가 어쩌면 현재 '스피노지스트'들의 모습 안에 '변형'된 형태로 '보전'돼오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도 해봅니다. 물론ㅡ이것이 사실이라고 할 때ㅡ이를 이론사적 혹은 이론수용사적 맥락에서 어떻게 '해석'하는가 하는 문제는 또 별개의 것이겠지만요(우리는ㅡ혹은 그들은ㅡ마르크스에 대한 '파생적/현대적' 대안으로서의 알튀세르로부터, 알튀세르의 '근원적/근대적' 보충으로서의 스피노자로, 이행해 간 것일까요?).
덧붙여, "진행중"이라는 '부제'는 언제나 더 큰 기대감을 갖게 합니다. 글 잘 읽었습니다. 언젠가 저도 '알튀세르를 [다시] 읽자'라는 제목으로 페이퍼 하나 써봐야겠습니다.^^

로쟈 2007-09-07 19:37   좋아요 0 | URL
관심을 가져주셔서 감사.^^ 람혼님의 알튀세르 페이퍼를 고대하게 되네요.^^

람혼 2007-09-08 01:41   좋아요 0 | URL
이런 주제의 페이퍼에는 관심을 안 가질래야 안 가질 수가 없습니다. 특히나 지젝에 대한 남다른 애정과 식견을 갖고 계신 로쟈 님의 글임에야...^^

미지 2010-08-06 21: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한참 늦었지만, 이제사, 잘 읽었습니다. 로쟈님께서 오랫동안 지젝을 붙잡아두신 덕에 제가 아주 훌륭한 지젝과 라캉 입문 경로로 진입하고 있다는 든든한 느낌이 듭니다.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