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젝의 <삐딱하기 보기>(시각과언어, 1995)를 다시 읽는다. 같이 읽을 원서는 'Looking Awry'(MIT출판부, 1991). 작년 2월쯤인가 나는 책의 3부를 마저 읽었고, 1-2부는 아주 오래 전에 읽었더랬다(당시에는 원서를 갖고 있지 않았다). 지젝의 영화론에 대한 글을 쓸 일이 생겨서 이 참에 그의 영화책들을 전반적으로 다시 훑어볼 계획을 세우게 됐다. 어디까지 진행될는지는 모르겠지만, 하여간에 시작은 <삐딱하기 보기>부터이며, 내가 의도하는 건 '<삐딱하게 보기> 제대로 읽기'이다.

'제대로'라는 건 읽는 흉내를 내는 게 아니라 읽는 것처럼 읽겠다는 얘기. 혹은 <나의 결혼원정기>(2005)에서 홍만택(정재영)의 말투를 빌면, “다 자쁘뜨러”, 곧 '다 자빠뜨려'가며 읽는다는 것이다('다 잡뜨라 Do zavtra!'는 러시아어로 “내일 또 만나요!”라는 뜻이다. 이게 한국에 오면 "그녀들을 자빠뜨리기?"로 와전되지만). 다음에 다시 만날 때까지 가능하면 말끔하게 정리해두는 것이 그 목표이다. 무릇 고전들이란 그렇게 '다 자빠뜨려'가며 읽어야 하는바, <삐딱하게 보기>나 데리다의 <그라마톨로지> 등은 내가 조만간 자빠뜨릴 계획으로 있는 책들이다(물론 <그라마톨로지>는 상당한 견적이 나오는 책인지라 언제 작업에 들어갈지 장담할 수 없지만, 아마도 내달쯤 집에서 인터넷을 하게 되면 계획은 생각보다 빨리 구체화될 수도 있을 듯하다. 작업의 '속도'가 현재와는 비교가 되지 않을 테니까). 계획상으로야 올해 쓸 책만도 댓권이지만, 머릿속으로야 무얼 못하겠는가.

untitled 250

먼저,  머리말부터 읽어본다. 지젝은 자신이 하고자 하는 작업의 내용이 발터 벤야민의 추천에 따르는 것임을 밝힌다. 벤야민은 뭐라고 추천했는가? '고도로 정신적인 문화적 산물들'을 '통속적이고 평범하며 세속적인 문화적 산물들'과 나란히 독해하라! 예컨대, 모차르트(1756-1791)의 오페라 <마술피리>에 등장하는바, 사랑하는 커플(love couple)의 숭고한 이상형(사랑한다면 이들처럼!)과 모차르트와 동시대인이었던 칸트(1724-1804)의 결혼에 대한 정의를 병치시키는 것. 칸트는 뭐라고 정의했던가? "결혼이란 반대의 성(性)을 가진 두 성인 사이에서의 성기의 상호사용에 대한 계약이다"! 독신자이긴 했어도 역시나 래디컬한 칸트이다. 해서 내가 병치시켜놓은 것은 오페라 <마술피리>의 한 장면과 미국의 사진작가 신디 셔먼의 'Untitled #250'이다. 좀 삐딱하다고? 하지만, <삐딱하게 보기>에서 지젝이 내내 하는 일이 이런 삐딱한 짓 아닌가!

지젝식의 '삐딱한 짓'이 의도하는 것은 책의 부제대로 '대중문화를 통한 라캉 이해(=입문)'을 독자들에게 제공하는 것이다. "이 책의 작업은 자크 라캉의 고상하기 그지없는 이론적 주제들을 현대 대중문화에서 본보기가 될 만한 경우들과 아울러, 또한 그것들을 통해서 해독하는 것"이다(나중에 지젝이 밝힌 바에 따르면, 그 자신이 라캉을 이해한 방식이기도 하다. 그러니까 이러한 독해에 선행하는 라캉이 있다기보다는 이러한 통해와 '아울러', 이러한 독해를 '통해서' 비로소 그 자신도 라캉에 대한 이해에 도달했던 것. 이런 게 '변증법적 학습' 아닌가?).

 

 

 

 

대중문화의 사례들로 그가 자주 참조하게 되는 것은 히치콕(물론 요즘에는 '진지한 예술가'로 간주되지만, 히치콕은 당대에 가장 '대중적인' 감독이었다)을 비롯하여 필름 느와르, SF소설, 탐정소설, 감상적인 키치(Kitsch), 그리고 스티븐 킹 등을 망라한다. 라캉의 공식 '사드와 함께 칸트를(Kant wirh Sade)'을 라캉 자신에게 되돌려주면서 '히치콕과 함께 라캉을', '패트리샤 하이스미스와 함께 라캉을', '스티븐 킹과 함께 라캉을' 하는 식으로 변주/응용하는 것이다(거기에 간혹 '셰익스피어'나 '카프카' 같은 '위대한 이름'들도 끼어들지만).  

한편으로 라캉에 대한 '삐딱하게 읽기'를 제안하는 지젝은 그러한 독해가 오히려 아카데미에서의 '주류적' 라캉 수용이 놓치고 있는 것들을 더 잘 설명해줄 수 있을 거라고 본다. 그리고 다른 한편으론 라캉 자체가 "히치콕의 <현기증>으로부터 스티븐 킹의 <애왕동물 공동묘지>(황금가지, 2006)에 이르는, 맥컬로우의 <음란한 강박관념>으로부터 로메로의 <살아있는 시체들의 밤>에 이르는 광란의 질주를 정당화하는 데 이용"될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한다. 해서 라캉 교리론(dogmatics)에 대한 '삐딱한 읽기'로서의 <삐딱하게 보기>는 이 양방향의 운동이고 질주이며 탐닉이다. 혹은 그러한 운동/질주/탐닉에 제대로 몸을 맡길 때에야 우리는 제대로 '삐딱하게 보기'의 여로에 들어선 것이 된다. 마치 롤러코스터 같은 여로에.   

해서, "지젝의 세계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이제 곧 '현실에서 실재로'(1부 1장) 이동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럼, 같이 복창해 보실까요? "다 자빠뜨려!"

06. 01. 19-20.

 

 

 

 

P.S. 지난 80년대인가 <성자가 된 청소부>란 베스트셀러가 있었다. 저자가 인도 사람이고 부제가 '산다는 것과 초월한다는 것'이니까 대략 어떤 내용일지 짐작할 수 있는 책이다(검색해 보니, <이슬람 성자가 된 청소부>란 제목의 책도 있다. 하긴 '성자'와 마찬가지로 '청소부'도 종교를 초월할 테니까!). '청소부'란 말이 '환경미화원'으로 대체되기 이전에 나왔던 책이었다. 한데, 제목에서 비치는 그러한 '상향 초월'은 나로선 별로 달갑지 않았다. 제대로 된 초월이라면 거꾸로 '청소부가 된 성자'이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검색해보니, <백화점 청소부가 된 이목사>란 책은 있다. 이재정 목사의 책이란다). '낮은 데로 임하셨던' 그리스도의 모범도 그런 게 아닌가.

 

 

 

 

성서의 대표적인 이야기들에서 가장 많이 주인공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아무래도 '다윗과 골리앗'의 다윗 같다(나중에 '다윗왕'이 되는). '시편'에 실린 노래들의 상당수도 또한 다윗의 노래이다. 거기서 제일 처음 등장하는 다윗의 노래가 시편의 제3편이며, 반란을 일으킨 아들 압살롬에게 쫓겨다니는 신세가 되어 여호와께 간구하며 부르는 노래이다.

1. 여호와여 나의 대적이 어찌 그리 많은지요 일어나 나를 치는 자가 많소이다
2. 많은 사람이 있어 나를 가리켜 말하기를 저는 하나님께 도움을 얻지 못한다 하나이다
3. 여호와여 주는 나의 방패시요 나의 영광이시요 나의 머리를 드시는 자니이다
4. 내가 나의 목소리로 여호와께 부를짖으니 그 성산에서 응답하시도다
5. 내가 누워 자고 깨었으니 여호와께서 나를 붙드심이로다
6. 천만인이 나를 둘러 치려하여도 나는 두려워 아니하리이다
7.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8. 구원은 주께 있사오니 주의 복을 주의 백성에게 내리소서

지난주에 또 교회에 붙들려가 들은 설교가 이 3편에 관한 것이었는데, 내게 가장 흥미로운 절이었으나 목사님의 '진지한 말씀'에서는 다른 절들과 달리 자세히 음미되지 않은 절이 있었으니 바로 7절이었다. "여호와여 일어나소서! 나의 하나님이여, 나를 구원하소서! 주께서 나의 모든 원수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으셨나이다." 영역으로는 "Arise, O Yahweh! Deliver me, O my God! For You have struck all my enemies on the jaw; You have smashed the teeth of the wicked."

주께서 이제껏 나의 원수들의 뺨을 치시며 악인의 이를 꺾어으셨다는 걸 상기시키며 다윗은 한번 더 그래주십사 하고 간구하는 것이다(짐작에 '원수를 사랑하라!'는 계명은 신약의 것이지 구약의 것은 아니다. 아니면 신약의 경우에도 '사랑'의 방식이 좀 특이한 것이든지. 축귀(逐鬼)용 안수기도 같은 걸 생각해 보라). 마지막 구절이 가진 함축을 알기 쉬운 말로 하면, "주여, (이번에도) 적들의 '아구창'을 갈겨주소서!"라는 것. 

물론 이것만이 기도/신앙의 핵심이라고 할 수는 없겠지만, 이를 점잖게 제쳐두는/빠뜨리는 '고상한' 설교말씀에 나는 공감할 수 없다(어떤 이는 이 시편을 '스트레스의 대처'라고 이름붙였다!). 그것은 '다윗의 모범'을 따르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원수를 용서할 수도 있을 것이다. 하지만, 그건 원수의 아구창을 먼저 갈긴 이후의 문제가 아닐까? "기도와 함께 주먹을!"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는 그런 깨달음도 부수적으로 던져준다.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