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감벤과 사도 바울'(http://blog.aladin.co.kr/mramor/1010259)에 이어지는 페이퍼이다. 내친 김에 지젝의 바울론에 대해서 정리해두고자 한다. 그래봐야 두 개의 문단, 각각 <믿음에 대하여>(동문선, 2003)과 <혁명이 다가온다>(길, 2006)의 한 문단을 읽어보려는 것뿐이다(두 책은 비슷한 시기에 출간됐다). 대신에 국역본의 부정확한 대목들을 교정해두도록 한다. '그리스도에서 레닌까지'란 제목은 <믿음에 대하여>의 서문에서 따온 것이다.
먼저, <믿음에 대하여>의 8-9쪽. 조금 이전에 7쪽에서 밝히고 있는 이 책의 전제. "이 책의 기본 전제는 비록 그 전제가 잔인하게 들릴지 모르겠지만, 만약 누군가가 자유-민주주의적 지배권을 포기하고 믿을 만한 급진적 지위를 주창하려 한다면 그것이 담고 있는 유물론적 해석을 승인해야 한다는 것이다." 원문은 이렇다: "The basic premise of this book is that, cruel as this position may sound, if one is to break the liberal-democratic hegemony and resuscitate an authentic radical position, one has to endorse its materialist version. IS there such a version?"(이후에 원문 대조는 생략하거나 부분적으로만 하도록 한다.)
번역문은 포기할 만한 내용인데, 누락된 마지막 문장을 포함하여 다시 옮기면, "이 책의 기본전제는, 비록 이 입장이 잔인하게 들릴지도 모르겠지만, 우리가 자유민주주의의 헤게모니를 분쇄하고 진정으로 급진적인 입장을 부활시키고자 한다면 그 유물론적 버전을 승인해야만 한다는 것이다. 그러한 버전이 과연 존재하는가?" 정도이다.
진정 급진적인 정치적 입장이란 "정치를 일련의 실용주의적 개입이 아니라 (대문자)진리의 정치(politics of Truth)를 주장하는 입장이다. 오늘날 이러한 입장은 '전체주의적'이란 이유로 기각된다. "오늘날 이러한 장애로부터 탈출하여 진실의 정치를 표방하는 입장은 레닌으로의 복귀라는 형태를 취하게 된다." 다시 옮기면, "이러한 교착상태에서의 탈출, 곧 진리의 정치에 대한 재단언은 레닌으로의 회귀라는 형식을 취해야만 한다."
레닌으로의 회귀는 <혁명이 다가온다>의 핵심적인 메시지이기도 한데, <믿음에 대하여> 또한 동일한 반문에 답하면서 주장을 전개한다. "왜 단순히 마르크스가 아닌 레닌인가? '제대로 된 복귀라면 원래 진영으로으 복귀여야 하지 않는가?' 오늘날 '마르크스로의 복귀'는 이미 학술권에서 별다른 관심사가 되지 못하고 있다. 여기서 우리는 어떤 마르크스를 고려하고 있는가? 한편으로 포스트모던 소피스트들의 마르크스, 메시아적 약속의 마르크스, 다른 한편으로 현대 세계화의 역동성을 예견하고 월스트리트 거리에서조차 회자되는 마르크스이다."
역시나 마지막 문장에 누락된 단어들이 있다. 이를 포함해서 다시 옮기면: "왜 그냥 마르크스가 아니고 레닌인가? 오늘날 '마르크스로의 회귀'는 이미 학계에서 나름대로 유행이다. 이 너나없는 회귀들에서 우리는 어떤 마르크스를 갖게 되었나? 한쪽에는 문화연구의 마르크스, 포스트모던 소피스트들의 마르크스, 메시아적 약속의 마르크스가 있고, 다른 한쪽에는 오늘날 세계화의 동학을 예견한 마르크스, 월스트리트에서조차 그러한 인물로 환기되는 마르크스가 있다."
"이들 마르크스들이 지닌 공통점은 정치 본령의 거부이며, 레닌에 의거하게 되면 이 두 가지 함정을 피할 수 있게 된다." 원문은 "What both these Marxes have in common is the denial of politics proper; the reference to Lenin enables us to avoid these two pitfalls." 다시 옮기면, "이 두 가지 계열의 마르크스들이 갖는 공통점은 정치다운 정치에 대한 거부이다. 레닌으로의 회귀는 이 두 함정들을 피할 수 있도록 해준다." 이후의 지적들은 <혁명이 다가온다>의 주장들을 예견하게 해준다.
먼저, 지젝은 레닌의 개입이 갖는 두 가지 특징을 지적한다. 그 하나는 레닌의 외부성이고, 다른 하나는 폭력적인 전치이다. 차례대로 살펴본다.
(1) "첫째로 마르크스와 관련해 볼 때 레닌의 외부성을 아무리 강조해도 지니치지 않을 것이다. 그는 마르크스의 '친정집단'에 속하지 않았고, 마르크스나 엥겔스를 전혀 만난 적이 없다. 더욱이 그는 '유럽문명'의 동부 경계지역 출신이었다. 오로지 이 같은 외부적 위치에서만이 그 이론의 본래적 충동을 살려내는 것이 가능하다." '친정집단'은 'inner circle'의 번역이다. '동부 경계지역'이란 물론 러시아를 가리키는데, 러시아 내에서도 레닌은 타타르 출신이라고 해서 권위를 인정받지 못했다. 반복하자면, 이러한 외부성, 외부적 위치에서만 이론의 충격을 되살려낼 수 있다.
그리고 이제 드디어 바울에 관한 대목이다. "바로 이와 동일하게 그리스도교의 기본 교리를 정식화했던 바울 역시 예수의 친정집단 소속이 아니었으며, 라캉이 프로이트와는 전적으로 상이한 이론 전통을 수평자로 사용하여 '프로이트로의 복귀'를 완수한 것도 마찬가지 논리이다." '수평자'는 'leverage'의 번역이며 '지렛대'라 옮기는 게 낫겠다. 요컨대, 성 바울은 그리스도의 이너서클(측근)이 아니었고 라캉 또한 전혀 다른 이론적 전통을 지렛대로 삼아 '프로이트로의 회귀'를 달성했다는 것.
라캉에 대한 부연설명: "프로이트는 이것의 필요성을 인식하고 있었으며, 그가 학식을 통한 입회에 기초를 둔 자신의 폐쇄된 공동체로부터 벗어나기 위해 외부 출신의 비유대인인 융에 신뢰를 준 것도 이 같은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그의 선택은 초라한 것이 되고 말았는데, 왜냐하면 융의 이론 자체가 입회에 기초한 학식으로 기능했기 때문이다. 융이 실패한 곳에서 성공한 사람은 라캉이었다." '이것의 필요성'이란 '외부성'의 필요성을 가리킨다. 그러한 외부성을 끌어오기 위해서 프로이트는 일부러 융을 수제자로 삼았지만 결과적으로 '배신'당한다. 프로이트의 적통을 잇는 것은 국제정신분석학회에서 '파문'당하는 프랑스인 이단자 라캉이다.
여기서 사도 바울과 라캉의 역할은 동일시되며, 이것은 마르크스-레닌의 관계에서 레닌의 역할로 반복된다. "결과적으로 사도 바울과 라캉이 원래의 가르침을 다른 맥락으로 재수록한 것과 동일한 방식으로(사도 바울은 그리스도의 수난을 자신의 승리로 재해석하고, 라캉은 소쉬르를 반사경삼아 프로이트를 읽는다). 레닌은 마르크스 이론의 원래적 맥락을 상이한 역사 시기에 적용함으로써 마르크스의 원이론을 대체하거나 탈색시켰으며, 그런 다음 효과적으로 그것을 보편화하였다." '재수록하다(reinscribe)'는 '재기입하다'로 옮기는 게 낫겠다. '그리스도의 수난'은 '십자가에 못박힘'을 가리키고 '자신의 승리(his triumph)'는 '그의 승리(영광)'가 아닌가 한다.
마지막 문장은 원문과 대조해야 이해가 가능하다. "Lenin violently displaces Marx, tears his theory out of its original context, planting it in another historical moment, and thus effectively universalize it." 번역문에서 '탈색시키다'란 말은 어디에서 나오는 건지 모르겠다. '원랙의 맥락을 상이한 역사 시기에 적용'한다는 것도 문맥에 맞지 않는다. 다시 옮기면, "레닌은 마르크스를 폭력적으로 전치시키고, 그의 이론을 원래의 맥락에서 떼어내어 다른 역사적 순간에 이식시킴으로써 그것을 효과적으로 보편화한다."
그리하여, 우리가 얻게 되는 것은 그리스도-바울, 프로이트-라캉, 마르크스-레닌이라는 쌍이다. 이때 '우편'에 놓이는 바울-라캉-레닌은 모두 '외부성'이라는 공통점을 갖는데, 참고로 이 '외부성'은 <혁명이 다가온다>의 2장에서 '당의 외부성'과 '정신분석가의 외부성'으로 변주된다(이에 대해서는 따로 다루기로 한다).
(2) "'원래의 이론'이 잠재적인 정치적 개입능력을 실현하게 되는 것은 이같은 급격한 변개를 통해서이다." 원문은 "[I]t isonly through such a violent displacement that the 'original' theory can be put to work, fulfilling its potential of political intervention." '급격한 변개'는 'violent displacement'를 옮긴 것이고 앞에서 내가 '폭력적인 전치'라고 옮긴 것이다. 다시 옮기면, "이론이 갖고 있는 정치적 개입 역량을 실현시키면서 '원래의' 이론이 작동되게 하는 것은 오직 바로 이러한 폭력적인 전치를 통해서이다."
"레닌의 독특한 의견이 처음으로 명백히 소개된 저술이 <무엇을 할 것인가>(1902)라는 점은 의미있다. 이 저술은 필요한 타협을 통해 이론을 현실에 적용한다는 실용적 의미에서가 아니라 반대로 모든 가능한 타협을 무시하고 명료한 급진적 관점 - 우리의 개입이 해당 상황을 변개시킬 수 있는 방식에서만 개입이 가능한 - 을 채택한다는 의미에서 레닌의 무조건적 상황 개입의지를 보여준다." '변개시키다'는 'change'의 번역이고, '해당 상황(the coordinates of the situation)'은 '상황의 좌표들' 혹은 '현실의 좌표들'을 가리킨다. 그리고 '모든 가능한 타협'은 '모든 기회주의적 타협들'을 뜻한다.
그러니까 레닌의 관점은 이론을 현실에 적용한다는 게 아니라 무조건적인 개입을 통해서 현실의 좌표들을 변화시키고 이론을 관철시킨다는 것이겠다. "이 점은 인민의 구체적 필요와 요구를 고려하는 전문지식과, 자유로운 사고력으로 무장한 채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논쟁 이면으로부터 나와 새로운 문제들에 직면할 필요를 강조한 오늘날의 제3의 '포스트 정치' 방식과 관련지어볼 때 현격히 대비된다."
'제3의 포스트정치(Third Way 'postpolitics')'는 "'제3의 길'식의 탈정치"라고 옮기는 게 낫겠다. 번역문은 이런저런 오역으로 도배돼 있는데 다시 옮기면, "여기서 극명하게 대비되는 것이 제3의 길의 탈정치(학)이다. 이 탈정치는 과거의 이데올로기적 구분을 뒤로 제쳐놓고 구체적인 인민들의 필요와 요구를 고려하는 전문지식과 자유로운 토의로 무장하고서 새로운 이슈들과 직면할 필요성을 강조한다." 여기서의 구도는 '레닌주의냐, 제3의 길이냐'가 되겠다.
"이처럼 레닌의 정치는 제3방식의 실용주의적 기회주의뿐 아니라, 라캉이 상실된 것에 대한 자기애라 부른 바 있는 중도좌파적 태도에도 진정한 반격이 된다. 진정한 레닌주의자와 정치적 보수주의자간의 공통점은 이들이 자유주의적 좌파의 '무책임성'을 거부하다는 사실이다. 확고한 보수주의자와 마찬가지로 진정한 레닌주의자는 행동을 취하고 아무리 못마땅하다 하더라도 자신의 정치 프로젝트를 실현하는 과정에 뒤따르는 모든 책임을 떠맡기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제3의 길'을 '제3방식' 등으로 옮긴다는 것은 상식 이하다. 여하튼 여기서 레닌주의와 대비되는 것은 이 제3의 길뿐만 아니라 '자유주의적 좌파'도 해당한다(지젝은 기든스 등의 '제3의 길' 혹은 '탈정치'에 대해서 한번도 동감을 표한 적이 없다). 번역문의 '중도좌파'는 'marginalist Leftist'를 옮긴 것인데, 상용되는 표현 같지는 않다. '자유주의적 좌파'를 가리키는 게 아닌가 싶다. 여하튼 이 대목은 지금의 국내정세와도 잘 맞아떨어지는 듯하다. '무책임성'을 '무능력'이라고 바꿔넣으면 더더욱 말이다(신자유주의적 좌파?).
이런 '무책임성'이란 무얼 가리키는가? "결속과 자유 등 대규모 프로젝트를 옹호하지만, 구체적인 그리고 때로는 '잔인한' 정치적 조치라는 실제적 모습을 띠고 대가를 지불해야 할 때는 이를 회피하는" 태도이다('결속'이 아니라 '연대'라고 번역해야 한다). 그러니까 손에 물/피 안 묻히고 말빨로 해결하려는 좌파가 자유주의적 좌파이다. 자유주의적 좌파 또는 민주적 사회주의자들이 이에 해당한다.
"이들은 진정한 혁명을 원하였지만, 그것을 위해 치러야 할 실제적 대가는 피하고 아름다운 영혼을 간직하며 자신의 손을 더럽히려고 하지 않았다. 이처럼 허상적인 급진 좌파의 입장(인민에게 진정한 민주정을 제공하기 원하지만 반혁명과 싸울 비밀경찰도 없고 자신들의 학술적 특권도 전혀 위협받지 않는)과는 대조적으로 레닌주의자는 보수주의자처럼 자신의 선택에 따른 모든 결과를 떠안는다는 면에서, 즉 권력을 차지하고 그것을 행사하는 것이 의미하는 바를 완전히 인식한다는 면에서 신뢰할 만하다."
'신뢰할 만하다'는 'authentic'의 번역이다. '진짜다'란 의미이다. 즉, 인민을 위한 진정한 민주주의를 원하지만 비밀경찰과 같은 물리력/강제력을 갖고 있지 않은 정부나 말로만 급진적인 강단좌파 같은 유사-좌파가 아니라 진짜-좌파라는 얘기이다. 지젝은 여기서 레닌주의자(a Leninist)를 오히려 보수주의자(a Conservative)와 동급으로 비교하고 있는데 이 둘의 공통적인 핵심은 자기의지의 무조건적인 관철과 그에 대한 책임이다. 그리고 바로 그러한 면에서, 이전에도 한번 언급한 바 있지만, 레닌주의자에 가장 가까운 모델은 박정희와 정주영이다(박정희는 브레주네프와 마찬가지로 소프트-버전의 스탈린 아닌가?).
어쩌다 보니 서문의 마지막 단락에까지 도달했다(젠장, 한 문단만 읽는다더니?). "레닌으로의 복귀는 한 사고가 이미 특정 집단조직 안에 뿌리내리고 있지만 아직 일정제도(확립된 교회, IPA, 스탈린파 정당국가)로는 안착되지 못한 독특한 순간을 포착하려는 시도이다. 그것은 '좋았던 옛 황금시대'를 향수적으로 재현하는 것도 실용적 기회추구 입장에서 옛 프로그램을 '새로운 조건'에 조정하는 것도 아니며, 현 세계의 조건하에서 범세계적인 자유주의적 자본주의자의 세계질서를 전방위적으로 저지하며 나아가 진실의 입장을 대변하고 억압된 진실의 관점에서 현 세계 상황에 개입하기 위한 정치 프로젝트를 주입하려는 레닌적 몸짓의 반복을 의미한다."
이미 지적한 대로 '진실'이라 옮겨진 것은 모두 '진리'로 교정되어야 한다. 더불어, '사고(a thought)'가 아니라 '사상'이다. '레닌으로의 회귀'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의하고 있는 대목인데, 강조점은 어떤 '유일무이한 순간(unique moment)'을 포착하는 것. 이 순간은 이행의 모멘트이기도 하다. 이 모멘트의 포착으로서의 '레닌으로의 회귀'는 다르게 말하면 레닌적 제스처를 반복하는 것이다. 레닌적 제스처란 무엇인가? "전지구적 자본주의-자유주의 세계질서의 전일성을 침식할 수 있는 정치적 기획을 시작하는 것이다. 더 나아가 이 기획은 억압된 진리의 관점에서 현재의 전지구적 상황에 개입하면서 스스로가 진리의 대변자로서 행동하고 있다고 당당하게 단언할 것이다."
요컨대, "우리는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과 관련하여 행했던 일, 즉 범세계적 다중문화 정책을 오늘날의 제국과 관련하여 수행해야 한다." '정책(polity)'은 '정체'(정치체제)의 오역이다. 다시 옮기면, "그리스도교가 로마제국에 대해 행한 일을 우리는 오늘날의 '제국', 이 전지구적 다문화적 정치체제에 대하여 행해야 한다." 그것이 이 서문의 타이틀 'From Christ to Lenin... and Back', 곧 '그리스도에서 레닌으로, 그리고 다시 레닌에서 그리스도로'가 뜻하는 바이다.
06. 12. 01.
P.S. 서두에서 <혁명이 다가온다>의 한 문단을 읽겠다고 한 건 분량상 다른 자리에서 행하도록 하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