토니 마이어스의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앨피)를 읽었다. 분량도 많지 않지만, 좋아하는 철학자에 관한 책이어서 단숨에 읽었다, 는 아니고, 며칠 걸려 읽었다. 중간에 다른 일들이 항상 끼어들기 때문인데, 생각해보니 오고가는 전철에서 가장 많은 분량을 읽은 듯하다. 복사한 원서까지 무릎에 펴놓고...

일단 우리말 번역본은 아마도 좀더 편안하게 독자에게 어필하기 위해서, '갖은 짓'(친근한 표현으로)을 다했다. 그냥 '슬라보예 지젝'으로 돼 있는 원서의 제목을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로 바꿔놓았을 때 이미 힌트를 얻을 수 있는 것이지만, 책의 소제목들도 대부분이 옷을 갈아입거나 분칠을 했다(가령, "The curse of Jacques: Limitations on the influence of Zizek"이란 절은 두 대목으로 나뉘어 각각 "다른 사람들이 싫어하는 혹은 생뚱맞은", "데리다와 라캉을 중재하려는 시도는 실패한다!"라 이름붙여졌다). 그리고 용어들도 가급적 이해하기 쉬운 걸로 바꾸었으며(가령 '누빔점'으로 번역되던 point de caption은 '소파 고정점'으로 바뀌었다) 원서에는 한 장도 들어가 있지 않은 인물사진/참고사진 등도 꽤 여러 장 집어넣었다(이런저런 이유로 책의 분량은 142쪽짜리 원서의 2배 가량이 되었다. 부록으로 원서에 없는 글 한편이 국역본에는 더 들어가 있더라도). 한마디로 편집자가 부릴 수 있는 수단은 다 부려본 게 아닌가라는 인상을 책을 읽으면서 받았다. 해서 한국어 독자들이 훨씬 더 친근감 있는 지젝을 만날 수 있는 멍석은 마련된 셈(*point de caption은 point de capiton의 오타이다. 이유가 없지는 않은 게 275쪽 '찾아보기'에 point de caption으로 잘못 타이핑돼 있고, 나는 그걸 받아적었던 것. 본문 134쪽에는 제대로 표기돼 있다) .

책이 나오기까지의 자초지종과는 무관한, 약간 도취적인 역자서문을 뒤로 하고 본문으로 들어가면, 한 입 크기로 잘 썰어놓은 지젝을 만나게 되는바, 우리말로 된 '가장 쉬운 지젝 입문서'란 선입견에 걸맞는 내용들이 펼쳐진다. 솔직히 두드러진 경력의 소유자로 보이지 않는 저자이지만 이 만한 '정리력'을 선보이는 게 영미학계의 '내공'이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1급 학자들을 뒷받침하는 2급 학자층이 두터워야, 즉 미드필드가 두터워야 새로운 이론/업적이 나오든가 말든가, 골도 들어가든가 말든가 한다. 골대 앞에 한 명 세워놓고 골이 들어가기만을 기다리는 건 전근대적인 방식이자 요즘의 동네축구도 못되는 방식이다. 하긴 핑계거리가 없는 건 아니다. 이들은 영어사용자들이고, 지젝이 영어로 쓴 책들을 읽은 것이기 때문("지젝은 유연하면서 쉽게 이해되는 문체로 글을 쓰는데"(229쪽) 같은 소리를 들으면 기분 나쁜 한국 독자들도 있겠다). 애당초 지젝이 한국어로 책을 썼다면, '나'라도 이런 정리를 못하랴 싶다. 하지만, 핑계는 핑계로 내버려두기로 하자.  

어쨌든 이 슬로베니아 출신의 '괴물' 철학자는 영어권 학계/이론계에 등장한 지 불과 15년 정도만에 '우리 시대의 사상가' 명단에 당당하게 자신의 이름을 등재시켰다. 그리고 일부 회의적인 시각과 비판에도 불구하고, 저자 마이어스의 주장대로 그의 파괴력/영향력은 갈수록 확고해질 가능성이 높다(마이어스의 마지막 문장. "한마디로, 지젝은 존재하게 될 것이다!Quite simply, Zizek will have been." 그러니까 그의 크기가 다 드러나고 제대로 평가받는 건 미래의 일이 될 거란 얘기). 적어도, 1989/1991년 이후 탈냉전 시대, 그리고 2001년 9.11 이후에 '가능한 철학'이란 무엇인가를 가장 잘 보여주고 있는 그의 작업들은 그가 '우리 시대의 철학자'로서 전혀 손색이 없다는 걸 확증해준다. 마이어스의 책은 그런 '지젝 따라잡기'로서 (현재로선) 더없이 유익한 길잡이이다. 그리고, 그런 의의를 책 제목에 반영하자면,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보다 더 적절한 제목은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두려워하랴?"가 될 것이다(초심자라도 두번쯤 책을 통독하게 되면, '웬만한' 지젝을 읽기 시작할 수 있을 것이다. 때때로 다시 참조해가면서).    

번역본의 뒷표지에도 박혀 있지만, 마이어스가 지젝의 사상을 요약하기 위해서, 그에게 영향을 준 세 사람(헤겔, 마르크스, 라캉)에 대한 설명 이후에 내세운 핵심 이슈는 다섯 가지이다. (1)주체란 무엇이며, 왜 그토록 중요한가? (2)탈근대성에서 끔찍한 것은 무엇인가? (3)현실과 이데올로기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 (4)남성과 여성의 관계는 무엇인가? (5)왜 인종주의는 환상인가? 등. 이들 각 장마다 말미에 내용요약(Summary)까지 박스 처리돼 있는 책의 내용을 다시 요약한다는 건 동어반복이겠는지라(나중에 '읽기'를 시도한다면 모를까), 여기서는 국역본을 보완하는 의미에서 몇 가지 오타와 미심쩍은 대목만을 지적해둔다. '이보다 더 쉬울 수 없는 지젝'이지만, 혹 옥의 티 때문에 독서의 재미가 반감되지 않을까라는 우려도 갖게 되기 때문에. 즉, 몇 가지 지적사항만 고려한다면, 책은 지젝 입문서로서 나무랄 데 없다는 걸 거듭 강조해둔다.

-32쪽에서 지젝의 동료이자 두번째 아내였던 '레나타 살레클(Renata Salecl)'의 올바른 표기는 언젠가 지적한 대로 '레나타 살레츨'이며 이미 도서출판b에서도 '살레츨'로 표기하고 있다. 여담이지만, 지난 3월말에 지젝은 아르헨티나에서 세번째 결혼식을 올렸다. 30년 연하의 신부와(첫결혼을 일찍 한 그이기에 아마도 세번째 신부는 자신의 아들보다 나이가 더 어릴 듯하다). 마이어스가 요약해주고 있는 지적 경력에 따르면, 지젝은 1971년 그러니까 22살에, 철학과 사회학 학사를 취득하고, 1975년에 400쪽에 달하는 학위논문을 쓰고 석사학위를 취득한다. 그리고는 대학교수직을 얻을 뻔하지만, 그의 '강의'가 학생들을 물들게 할지 모른다는 당국자들의 우려 때문에 결국 얻지 못한다. 그는 동료였던 믈라덴 돌라르와 함께 이론정신분석학회를 창설하고(지젝이 회장, 돌라르가 부회장이었다. 둘이 시작한 학회였고), <제문제>란 잡지와 <아날렉타>란 시리즈도 낸다(마이어스에 따르면, 지젝은 자신의 책에 대한 악평이나, 있지도 않은 책에 대한 서평을 잡지에 게재하기도 했다).  

그러다가 지젝은 1979년 류블랴나 대학의 사회학연구소의 연구원이 되는데, 당국의 염려/배려에 따라 그는 강의 부담이 전혀 없이 순수하게 연구만을 수행하게 된다(이 때문에 지젝은 방한강연시 자리를 옮길 생각이 없노라고 조크를 섞어 얘기했다. 굳이 의무적인 강의까지 해야 하는 미국 등지의 대학으로 유명세에 걸맞게 옮길 이유가 없다는 것). 그리고 1981년에 철학 박사 학위를 취득(한 인터뷰에 따르면 그의 박사학위논문은 하이데거에 관한 것이었다). 그리고는 슬로베니아를 방문했었던 라캉의 사위 자크-알랭 밀레르의 초청으로 친구인 돌라르와 함께 프랑스로 건너가서 밀레르의 세미나에 참석한다(그 세미나를 통해서 비로소 라캉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고 지젝은 고백한바 있다). 지젝은 세미나에 참석하는 한편, 밀레르의 정신분석도 받게 되는데, 이때 두 사람간에 트러블이 있었는지 1985년 밀레르의 지도로 지젝은 정신분석학 박사학위논문을 쓰게 되지만, 밀레르로부터는 논문의 출판을 거부당한다. '좌절'한 지젝은 슬로베니아로 돌아가며 정치활동에 뛰어든 그는 1990년에 슬로베니아 대통령 후보에 출마하기도 한다. 그러는 와중에 출간한 것이 1989년의 (영어권)데뷔작 <이데올로기의 숭고한 대상>이다. 이후에 그가 현재까지 (영어로) 낸 책이 최소 26권 이상인바(나는 그 중 24-5권 정도를 갖고 있다), 올해도 최소 2권 이상이 나올 예정이다(얼마전에는 란 연구서가 출간되기도 했다).  

이러한 경력에서 마이어스는 두 가지 중요한 모멘트를 지적한다. 비주류/비제도권적 성향과 관련한 것인데, "이와 같은 비제도성으로 인해 적어도 두 번(한번은 석사논문과 관련해서, 다른 한번은 두번째 박사학위와 관련해서) 기성제도에 편입할 기회를 놓쳤지만, 지젝은 제도에 대한 이런 저항을 통해서 자신의 위치를 발견했다... 지젝 이론의 놀라운 성공은 부분적으론 이른 시기에 겪은 실패와 그 실패 속에서 자기 자신을 체제와 이질적인 존재로 인식할 수 있었던 데서 비롯됐다는 것이다."(37쪽) 이러한 교훈을 따르자면, 이론가로서 성공하기 위한 요건은 '실패'이다. 그것도, 두 번. 지젝의 말을 비틀자면,  "이론가는 반드시 두번 실패해야 한다." 마이어스는 주체에 대한 지젝의 특이한 관점/이론이 이러한 자기경험과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지적하는데, 그럴 법한 견해이다.

-58쪽. 라캉의 두 타자에 대해 설명하는 소단락에서 마지막 문장. "따라서 이런 타자성은 동일화 과정으로 내면화될 수 없다는 점에서 상징계의 타자성보다 훨씬 더 극단적이다."(58쪽) 여기서 '상징계'는 '상상계'의 오타이다. 문맥상 '이런 타자성'이란 게 '상징계의 타자성'이므로 원서와 대조하지 않더라도 오타라는 걸 알 수 있다.

-112쪽. "왜냐하면 어머니의 초자아적 명령 아래에서 이 딸에게 남겨진 유일한 쾌락의 통로는 고통의 강도에 개입하는 것뿐이기 때문이다."에서 '고통의 강도'는 'a degree of pain'을 옮긴 것인데,  별로 중요하진 않지만, '얼마간의 고통' 정도의 뜻이 아닐까 한다. 다른 대목들에서 읽기 편한 쪽으로 옮겨주고 있기 때문에 '고통의 강도'란 표현은 좀 낯설다. 113쪽 소단락에서 "이런 은폐야말로 법이 작동하는 데 필요한 긍정적 조건이기 때문이다"에서는 positive의 역어로 '긍정적'보다는 '실정적'이 낫지 않을까 싶다. 이건 오역을 지적한다기보다는 내 생각이 그렇다는 것이다. positive만 하더라도 우리말로는 적극적/긍정적/능동적/실정적 등으로 옮겨지는바, 일반적인 예상과는 다르게 번역에서 애를 먹는 경우는 상응하는 우리말이 없을 때가 아니라 이처럼 너무 많을 때이다(주체/주어/주제로 번역되는 'subject'나 반성적/반사적/성찰적/재귀적으로 번역되는 reflexive도 마찬가지이다).

-115쪽에서, "이 예수상이 전하는 진짜 메시지는 실재 예수를 주창한 자들에게는 결코 오직 않을 그의 부활이 아니라, 실제 예수가 몸소 보여준 자기발전의 영적 편력이다." '오직 않을'은 물론 '오지 않을'의 오타이고, 시제상 예수의 부활은 미래가 아니라 과거에 일어난 것이다(미래와 관련된 건 '부활'이 아니라 '재림'이다). 원문은 "Resurrection, which... never actually happened"이므로, "실제적으로는 일어난바 없는 부활" 정도의 뜻으로 옮겨져야겠다.

-119쪽. 오역이랄 건 없지만, 좀 모호한 대목: "지금까지 타자 속에서 찾으려 했던 것을 이제부터는 우리 자신 속에서 찾으라고 요구한다... 여기서 타자란 그 자체로는 그/그녀의 주체가 못 되는 상상적 사본, 사실상 그/그녀를 향한 메시지로 자기충족적인 자아(타아)의 측면이다." 뒷문장의 원문은 "[T]he Other is reduced to the other, an Imaginary counterpart who is not a subject in his/her own right, but in effect, an aspect of a self-sufficient ego (the other) with a message for him/her."(59쪽) 여기서는 대문자 타자Other와 소문자 타자other 간의 구별이 중요한데, 다른 대목들에서 Other를 '대타자'라고 옮겼으므로, 처음에 나오는 '타자' 역시 '대타자'라고 옮겨져야 한다. 그리고 소문자 타자라는 것, 이런 대타자의 상상적 대응물(counterpart)이다. 그런 한에서, 이 소문자 타자는 (대타자와 같은) 제 값의 주체가 아니며, 단지 자기-충족적인 자아의 측면에 불과하다. 대략 그런 정도로 이해될 수 있는 부분이다.

-147쪽. 첫문장에 '좌파 이데올로기는 한물 갔다가도 얘기되는 오늘날"에서 '좌파'는 동사 leave의 과거분사형left를 명사로 잘못 옮긴 것이다('이데올로기 일반론'이 갑자기 '좌파 이데올로기론'으로 둔갑할 이유가 없다). 그리고, 편집상의 실수인데, "지젝은 두 죽음.."으로 시작되는 대목부터 149쪽 전체는 147쪽의 "상징적 죽음과 실재적 죽음"이라는 소단락에 이어지는 내용이다. 아마도 책을 급하게 내느라고 꼼꼼하게 교정을 보지 않은 탓으로 보인다(재판을 찍는다면, 마땅히 교정되어야 할 것이다). 해서, "이데올로기에서 현실을 구분해내는 법"이란 장의 결론은 이렇다. "현대 정치의 문제는 그것이 비정치적이라는 것, 현존하는 자본주의 사회 체제를 자연적인 것으로 받아들인다는 점이다. 이 구조를 바꾸기 위한 첫 단계는 그 '자연성'이 이데올로기적 형성물임을 폭로하는 것이며, 그런 비판을 위한 첫걸음은 그것의 실행가능성을 수립하는 것이다. 그것이 지젝의 모델이 지향하는 목표이다."(147쪽)

-154쪽. "지젝은 이 공식(=라캉의 성차 공식)의 난폭한 수용에 언제나 경의를 표하지는 않는다." '난폭한 수용'은 'outraged reception'인데, 내가 보기에는 라캉의 성차공식에 대해 '불편해하는', 혹은 '다혈질적인 반응' 정도의 뜻이다. 지젝은 (라캉처럼) 그런 반응에 그다지 개의치 않는다는 것. 조금 내려가서, "이론이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보다 독실한 신임을 얻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드는 이 시대에, 이런 전략은 확실히 참신한 우상파괴처럼 느껴진다." 원문은 "In an era where theory often spends more time establishing its pious credentials than actually articulating nuanced thought..."이다. 번역문은 '이론'과 '사유'를 비교의 대상으로 놓았는데, 이건 오류이다. 이론이 뭐하는 것보다 뭐하는 데 더 시간을 많이 보내는, 즉 더 전력하는 시대에, 란 뜻이어야 한다. nuanced thought란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라기보다는 (여러 가지 뉘앙스를 갖고 있어서) '다소 모호한 사유'란 뜻이다. articulate란 것은 그걸 분명하게/명료하게 한다는 뜻이고. 지젝은 그런 뉘앙스를 즐기지 않고 대놓고, 아주 공격적으로 말한다. 에둘러 말하지 않는 것, 그게 지젝다운 면모이다.   

-159쪽. 이것도 편집상의 실수인데, "마르크스가 자유, 평등, 사유재산, 벤담의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에 대해 논할 때"가 말이 되는가? 173쪽에서는 한 문장이 누락됐다. "이런 의미에서, 사랑은 이데올로기와 비슷하다." 다음에 "우리는 그것을 '성적 차이의 이데올로기'라고 말할 수도 있을 것이다."(we may even say that it is the ideology of sexual difference.)가 빠졌다. 마지막 문장의 '일치'는 '화해' 혹은 '조화' 정도의 뜻이다(남성과 여성의 '일치'가 불가능한 건 상식적인 차원에서도 당연하지 않은가?). 원문은 "[I]t is not possible to reconcile 'man' with 'woman'."

-224쪽. 이건 궁금한 점이다. 지젝 비판가들을 다루면서 마이어스가 "Theorists such as Teresa Ebert and Denise Gigante..."라고 한 대목을 번역본은 "좌파 페미니스트로 유명한 테레사 에버트, 프린스턴 대학 영문학 박사과정에 있는 데니스 히간테 같은 좌파 이론가들은"이라고 옮겼다. 역자가 얼마나 '수고'했는지 단적으로 알 수 있는 대목이다. '테레사 에버트'와 '데니스 히간테'의 뒷조사까지 했으니 말이다. 그런데, 'Gigante'가 '히간테'로 표음된 것은 어떤 근거에서인지?(일부 인구어에서 g와 h 사이에 호환성이 있다는 건 알지만, 이 경우에도 그런 건지 궁금하고 Gigante란 이름만 갖고 이 사람의 출신 국적까지 파악되는 건지 신기하다.)  

앞에서 언급했지만, 마지막에 부록으로 실린 글 "향락과 그것의 정치적 부침"은 역자에 따르면, "지젝의 이 책의 한국어판 출간을 기념하여 보내준 미발표 원고"(235쪽)인데, 대부분, 즉 241쪽에서 252쪽까지는 이미 작년에 당대비평 특별호 <아부 그라이브에서 김선일까지>(생각의나무)에 "아메리카 하위문화의 사막에 오신 것을 환영합니다, 또는 럼스펠드가 아부 그라이브에 관해 알고 있는 모르는 것"이란 제목으로 실렸던 것이다. 물론 다른 대목들도 아주 새로운 내용은 아니다(알베르트 슈만에 대한 더 자세한 내용은 <환상의 돌림병>을 참조할 수 있다). 개인적으로 유감스러운 건, 252쪽에서 Walter Benjamin을 '발터 베냐민'으로 표기한 것(이전에도 지적한바 있지만, '벤야민'이란 기존의 표기가 어떤 점에서 결격인지 나로선 이해할 수 없는 노릇이다. 유식한 자들의 이런 '상징폭력'은 불쾌하다. 저서도 아니고 번역서인 경우엔 상식과 관행을 존중하면 된다).

원서의 Further Reading은 번역서에서 '지젝의 모든 것'이란 제목으로 갈무리돼 있다(이 책이 2003년에 나온지라 작년에 나온 <이라크> 등은 서지에서 빠져 있다). 이 책을 읽지 않은 독자들을 위해서 몇 가지 간추리면, 마이어스는 먼저 지젝의 책 중 단 한권만 읽는다면 <이데올로기라는 숭고한 대상>을 권하겠다고. 그가 어려운 책으로 꼽는 것은 <부정성과 함께 머물기>(근간)이고, 초심자가 읽기에 가장 좋은 책은 <환상의 돌림병>이다(국역본은 물론 '만만찮다'). 최근에 나온 <까다로운 주체>는 "가장 이해하기 쉬운 편"에 속하는 책이지만, "부분적으로는 무척 어렵"다. 그리고 <믿음에 대하여>는 "지젝의 다른 저작에 대한 사전 지식 없이도 쉽게 읽을 수 있는(그래서 가장 많이 팔린) 책"인데, 우리의 경우엔 유감스럽게도 가장 못 믿을 책이며 따라서 가장 안 팔린 책이다(나도 뜯어말린 책이지만). 현재까지 나와 있는 지젝 선집으로는 라이트Wright 부부가 편집한  <The Zizek Reader>(Blackwell, 1999)가 있다. 지젝의 원문을 '한번' 읽어보고픈 독자에게 한권만 추천하라고 한다면 이 책을 꼽을 수 있겠다...

05. 05. 16.

P.S. 한 가지. 248쪽에서 언급되고 있는 영화 <이중처벌Double Jeopardy>의 국내 출시명은 <더불 크라임>(1999)이다. 토미 리 존스와 애슐리 저드가 나오는 영화. 애슐리 저드가 찍은 이 계통의 영화들 가운데에서는 가장 뛰어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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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쟈 2005-05-18 17: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중복이어서 이전 글을 삭제했더니 아니다 다를까 댓글도 사라져버렸네요. 자명한 산책님과 self-so님의 양해를 바랍니다...

lizom 2005-05-2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자가 로자님에게




다른 사람의 번역본을 꼼꼼하게 원문 대조까지 하면서 읽는 건 정말 쉬운 일이 아닌데, 이토록 꼼꼼하게 읽고 교정까지 해 주신 건 지젝에 대한 로자님의 각별한 애정과 출판 기획자 겸 번역자로서의 소명의식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감사합니다.




말씀 하신 대로, <누가 슬라보예 지젝을 미워하는가?>는 출판사(앨피)의 공격적인 개입이 두드러진 번역서입니다. 번역에서부터 교정까지 모든 작업을 번역자에게 일임하고 그저 ‘제본’만 하는 기존 출판사의 안일함과 비교할 때 앨피의 ‘과도할’ 정도의 개입은 제게 신선한 충격이자 출판 기획자의 역할에 대해 다시 생각하게끔 한 기회였습니다. 원고 내용을 완전히 소화하여 소제목을 바꿔 달고, 성실한 교열과 그림 선별 및 해설까지 달아준 앨피의 노력에 대해서는 결과와는 무관하게 박수를 보내야할 것입니다.




제목에 대해: 지적 발랄함이나, 대중적 스타일에도 불구하고 지젝이 한국의 지식사회에 안정적으로 터를 잡지 못한 건 그의 이론이 접근하기 ‘두려울’ 만큼 난해해서라기보다는, 그의 입장에 ‘미워할’ 만한 점이 있기 때문이라 생각합니다. 그만큼 논쟁적이라는 거죠. 그 ‘미워할 만함’에 그의 작업이 지닌 생산성이 있다고 생각합니다.




신자유주의와 제국적-민족주의로 재무장한 우파와 교착 상태에 빠진 구좌파 양쪽에 대해 공격의 칼날을 휘두르는 지젝의 논의는 확실히 한국 사회의 지식인들에게 시사하는 바가 큽니다. 다만, 저는 지젝의 사유 ‘결과’보다, 그 사유의 ‘과정’에 더 많은 관심을 기울여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칸트, 헤겔, 마르크스를 현대의 이데올로기 비판에 입각해서 재독해 할 필요성을 던져 주는 데 지젝의 ‘가치’가 있다고 생각합니다.




오역에 대해: 영국식 영어문장에 익숙지 않아 정확치 못하거나 불명확한 번역이 있음을 인정합니다.


112쪽 ‘고통의 강도'는 ’얼마간의 고통’으로 고치는 게 맞습니다.(참고로, 말씀하신 대로 저는 원문의 내용을 훼손하지 않는 한, 한국어스럽게 번역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113쪽 ‘긍정적positive 조건’의 positive는 ‘실증적’과 ‘긍정적’의 두 가지 뉘앙스를 동시에 가지고 있는데(그래서 보통은 실정적으로 번역했는데) 이 경우는 부정되어야 할 것처럼 여겨지는 ‘은폐’가 오히려 법의 긍정적 조건이 된다는 것을 살려 ‘긍정적’으로 썼습니다.


 관련하여, 항상 고민스러운 reflexive의 번역어를 처음엔 ‘반성적’이라고 했다가, 문맥상 닿지 않는 경우가 너무 많아 ‘무리하게’ ‘재귀적’으로 고쳤는데, 사실, 여전히 불만스럽습니다.


147쪽의 "이론이 뉘앙스가 풍부한 사유보다 독실한 신임을 얻는 데 더 많은 시간이 드는 이 시대에, 이런 전략은 확실히 참신한 우상파괴처럼 느껴진다."(In an era where theory often spends more time establishing its pious credentials than actually articulating nuanced thought...") 는 “이론이 불명료한 사유를 명확하게 하는 것보다 자신의 신자를 확보하는 데 더 많은 시간을 소비하는 시대”로 고치는 게 맞습니다. 지적 감사합니다.




결정적으로, 


147쪽 첫문장 '좌파 이데올로기는 한물 갔다가도 얘기되는 오늘날"의 오역(leave의 과거분사 left를 명사로 잘못 읽은 것)


147쪽의 본문과 상자글 편집 실수.


159쪽. "마르크스가 자유, 평등, 사유재산, 벤담의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에 대해 논할 때" -> <자유, 평등, 사유재산의 배타적 영역과 벤담>


등은 마지막 최종 교정을 거치지 않아 생긴 ‘결정적’실수입니다. 독자 여러분께 사과드립니다.




인명에 대해: 인명 표기는 항상 고민스러운데, 성실한 조사가 관건이겠죠. Denise Gigante를 데니스 지간트로 발음하지 않고 데니스 히칸테로 한 건, Gigante가 giant(거인)에 해당하는 스페인어이기 때문입니다. 스페인어에서 G와 J는 ‘ㅎ’ 에 가까운 [x]로 발음되어, Gigante는 ‘히간떼’로 들린다는 데 착안하여 그렇게 표기한 것입니다. 물론, 미국식으로 ‘지간트’라고 불릴 수도 있지만.




252쪽에서 발터 벤야민Walter Benjamin을 '발터 베냐민'으로 표기한 것은 오타입니다. 죄송합니다.


저 역시 유식한 자들의 ‘상징폭력’에 대해서는 항상 경계해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근데,  로자님이 이번에 번역하신 <까다로운 주체>의 163-164쪽 “실체는 praxis, 즉 능동적 개입인 반면에 주체는 theoria, 즉 수동적 직관이다. 여기서 Sein과 Sollen이, 진과 선이 대립하고 있다.”에서 원어praxis, theoria, Sein, Sollen에 해당하는 한국어(가령, 실천활동, 이론활동, 존재태, 당위태 같은)나 발음표기도 없이 그대로 남겨둔 것이 혹 그 상징폭력에 해당하는 건 아닐까요?


 다시 한번, 꼼꼼한 지적 감사합니다. 아무쪼록 <누가...>와 <까다로운 주체>가 서로 상승작용하여 지젝이 많이 읽히는 데 기여하기를 바랍니다. 건강하십시오.


로쟈 2005-05-21 2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상세한 답변에 감사드립니다. 제 생각에도 편집진이 '과도하게' 개입하는 과정에서 마지막 교정은 좀 소홀하지 않았나 싶은 것이었습니다. 그럼에도, 굉장히 읽기 편한 번역이어서 몇 가지 '옥의 티'들이 못내 아쉽더군요. 그리고 저는 <까다로운 주체>의 번역자가 아닙니다. 아마 '로카드님'과 혼동하신 모양입니다.^^

로즈마리 2005-06-07 0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두 분 다 대단하시네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