휴일을 지나면서 즐찾이 1200명을 넘어섰다. 작년까지만 하더라도 즐찾이 1000명쯤 되는 게 이 서재의 '적정규모'라고 생각했었는데, 진작에 목표달성은 한 셈이다. 목표? 한 사람에게 연애편지를 쓰는 게 아닌 이상 개인적인 주절거림이라도 '사회적 의미'를 갖기 위해선 어느 정도의 독자층은 필요하기 때문이다. 그런 목표치마저 갖고 있지 않았다면 나는 훨씬 게으른 알라디너가 됐을 것이고(언제부턴가 주간페이퍼의 달인 1위를 고수하고 있다. 부끄러운 일이다!) 대부분의 페이퍼를 비공개로 돌렸을 것이다.

조촐한 기념거리를 찾다가(그렇다고 이벤트까지 열 생각은 없고) 7년전 이맘때 일기를 들추게 됐다. 모스크바통신에도 가끔씩 일기를 정리해서 (남부끄러운 줄 모르고) 올려놓은 적이 있었는데, 또 그런 생각이 발동한 것이다. 나이테 하나를 그어두기 위해서는 비교거리(과거의 흔적)도 있어야겠기에 정래해놓는다(정리라는 건 몇몇 고유명사를 삭제한 것이다). 마침 알라딘에 처음 리뷰를 올리던 시점이기도 하다. 그래서 '노아의 외투'란 제목을 달고 있던 일기의 타이틀도 '로쟈의 기원'으로 바꾼다. 잠시 기억을 되새기는 이 일기 읽기는 <오! 수정>으로부터 <로스트 하이웨이>까지의 여정이다.

00. 6. 15
정확히는 16일. 2시가 되어 간다. 김대중과 김정일의 만남이 2-3일간의 뉴스를 모두 채우고 있다. 그 틈에 나는 삼성동 코엑스에 있는 멀티플렉스에서 홍상수의 <오! 수정>을 봤다. 폴 토마스 앤더슨의 <매그놀리아>와 다시 본 <부기 나이트>에 이어서. 홍상수의 영화적 작업은 어쩌면, 니체, 프로이트, 맑스가 가져온 정신사적 가치의 전도와 비슷한 맥락에서 평가될 수 있지 않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이건 글로 쓸 만한 거리가 될 듯하다. 그가 말하는 ‘표면’이란 게 심층이라고 믿어져 온 것들을 적나라하게 까발리는 표층 해석학과 유사하지 않나 하는 것.

흑백인 것과도 연관이 되겠지만, 그의 영화 속 세계는 70년대 후반쯤의 정서에 고착되어 있어 보인다. 몇몇 모티브들은 결코 90년대의 것이 아니다. 핸드폰이 그나마 유일하게 동시대와 연결지어주는 매개물인데(그리고 지하철 안산선), 인물들과 정서, 그리고 인사동이라는 배경 모두가 이전 세대의 것에 속한다. 홍상수식 아나크로니즘? 이건 약점은 아니어도 빈틈은 된다. 그에 대해서 말할 수 있는 빈틈.



<매그놀리아>는 소문 대로, 알트만의 <숏컷>을 떠올리게 할 만한 규모와 주제와 긴장을 갖고 있는 영화. 29세에 이미 장인의 경지에 이르렀다는 건 놀랄 만한 일이다. 타란티노와 비슷하면서도 다른 방향에서 그는 이미 믿을 만한 자기만의 세계를 갖고 있다. 그건 그가 대가라는 의미이다.

번역 독촉이 온 모양이다. 새로운 적의를 갖고 다시 일손을 모아려 보아야겠다.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를 비교하는 글을 빨리 완성하고도 싶고. 몸과 마음, 그리고 돈이 각기 따로 노는 세상이라니!..

 


00. 6. 18
어제 산 책은 러셀 자코비의 <유토피아의 종말>. 번역본은 ‘무관심 시대의 정치와 문화’란 부제를 달고 있다. 내가 어떤 문제로 무력감과 고민에 빠져 있는지를 이 책은 잘 요약하고 있다. 어떤 대안을 제시하고 있는지 필자의 결론이 궁금하다. 사회주의 유토피아의 기획은 분명 파산했지만, 그렇다고 유토피아에의 꿈마저 포기하고 살 수는 없다. 그것은 부르주아 유토피아의 야만성과 부도덕성 때문이다.(<부르주아 유토피아>도 사서 볼까?) 월러스틴의 <역사적 자본주의/자본주의 문명>도 읽고 있다. 내가 가진 문제틀은 두 가지로 요약된다. 사회적 정의와 (개인에게서) 예술적 창조의 문제. 정의(justice)와 가능성(possibility)의 문제. 사회적 정의와 시적 정의의 문제. 요약하면, 정의의 문제. 

 

그러고 보면, 리자드 로티의 문제틀을 그대로 따온 것 같기도 하다. 이 둘이 매개될 수 있는 것인지는 아직 확실하지 않다. 아직 분명하게 말하지 못하겠다. 그렇지만, 그것은 나의 삶에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되는 문제이다. 여기에 관심을 집중해 보기로 하자. 도스토예프스키에 대한 논문도 이 문제를 다룰 수 있을까? 유령들('공산주의라는 유령')의 실체화/현실화. <공산당 선언> 읽기도 병행해야겠다. 1848년. 최초의 유토피아 종언론.(1807년 예나를 제외하면) 그리고 2차 대전 종전 후 1950년대 초반. 이어서 1989년, 1991년. 루카치도 빨리 읽어야겠고...



00. 6. 21
독서대학에 가서 <롤리타> 강의를 들었다. 나보코프 얘기보다는 프로이트 얘기가 더 많이 나왔다. 그래서 프로이트에 대해선 몇 가지 배웠지만, 나보코프와 <롤리타>에 대해서는 기대만큼 얻을 것이 없었다. 일단, 지나치게 포스트모더니즘이니, 작가의 죽음이니 하는 풍문에 의존하여 작품을 미리 재단하는 듯했다. 실재(리얼리티)의 파악 불가능성 하나만으로 작품의 이해를 대신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리고 ‘사랑’이란 주제에 대한 너무 지나친 집착. 이건 일종의 미스리딩이 아닐까 싶다. 어린 시절에 대한 향수라는 주제를 잘 짚어내고, 이야기가 몇 차례 굴절되는 과정에 대해서는 주목하고 있으면서도, 완강하게 버티고 있는 나보코프 대신에 사실주의 작가 퀼티의 죽음을 놓고 작가의 죽음을 얘기한다는 것은 동의하기 힘들다. 내가 더 잘 쓸 수 있는 부분을 더 찾아봐야겠다.

라캉의 정신분석학 입문서 한 권을 그제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요즘 전철에서 읽고 있는 책은 <유토피아의 종말>. 다원주의와 대중문화에 대한 비판의 복원은 신선해 보인다. 그것이 결코 새로운 것이 아니면서도 신선해 보이는 것은, 다들 쉽고 편하게 지나쳐버리는 주제이고 태도이기 때문이다.

보이드의 나보코프 전기 두 권과 데리다와 문학에 대한 연구서 등이 주문해서 사고 싶은 책들이다. 내일은 도서관에 있는 나보코프 자료들을 복사하고 1학기 성적처리를 할 예정이다. 학원일은 학생들이 하나 둘 늘어갈 것 같아 걱정을 조금 덜었다. 다만 문제는 시간이고, 돈이다. 읽어야 할 책은 많지만, 그걸 읽을 시간을 나는 돈버는 데 투자해야 한다. 이걸 계급의 한계라고 부를 수는 없는 걸까?

 



00. 6. 22
학교에서 나보코프와 도스토예프스키 자료들을 복사했다. 나보코프는 분량이 많아서 복사비만 만 오천 원이 더 들었다. 그리고 구내서점에서 문예미학회에서 나온 <해체론과 맑스주의>를 샀다. 주로 대구 지역의 인문학 교수들이 주축이 되어 꾸려나가는 학회인데, 교수들도 나름대로 열심히 ‘통 굴리기’를 하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한 가지 사례. 데리다와 해체주의에 대한 국내 연구자들의 이해 수준을 가늠해 보기 위해서 사들었다. 사실 해체론과 맑스주의란 주제를 처음 부각시킨 마이클 라이언의 책을 이전에 대출해 놓기도 했다. 해체론과 맑시즘, 그리고 정신분석학과 문학사회학, 대략 이런 것들이 문학에 대한 접근방법으로서 나에게 의미있어 보이는 것들이다. 데리다를 읽어야 하고, 맑스와 가라타니 고진을 읽어야 하고, 프로이트와 라캉, 그리고 슬라보예 지젝을 읽어야 하며 루카치와 부르디외를 읽어야 한다. 그리고 들뢰즈까지.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를 다루려는 계획을 어느 정도에서 매듭지어야 할지 고민중이다. 충분히 다룰 수는 없고, 어느 선에서 타협해야 하는데, 그걸 정하기가 쉽지 않은 것이다. <유토피아의 종말>에서의 지식인 비판을 흥미롭게 읽고 있다. 저자인 자코비의 <사회적 건망증>도 읽어 보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한다. 다 동의하는 건 아니지만 자신의 주장고 요점을 명확히 하고 비판할 대목에 가선 눈치보지 않는 것이 매력적이다. 마치 미국판 강준만의 글쓰기 같기도 하다.

 



00. 6. 25 
돌잔치에서 돌아오는 길에, 신간으로 서평에 오른 <미>란 책을 사들었다. 의대 교수가 쓴 진화심리학 계열의 책. 표지 장정이 맘에 안들고, 교정도 불충실하지만, 관심있는 주제여서 일단을 손에 넣었다. 이런 식의 책들은 일주일에 한 권씩 읽을 수 있을 것 같다. 

푸코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를 읽는다. 아니 읽어야겠다. 김상환 교수의 '니체, 프로이트, 맑스 이후'란 글에 다시 자극을 받은 것이다. 그 글은 푸코의 글에 대한 상세한 주석의 형식을 취하고 있다. 이른바 (새로운) 해석학의 문제. 아르키메데스의 점을 포기할 때 우리가 진리에 대한 점근선으로서 가질 수 있는 최선은 해석학이다. 인식과 들어올림의 문제.  

 

여러 가지 글거리들이 있다. 가령 나보코프와 프로이트, 나보코프와 히치콕. 양손잡이 세계. 그리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 망명 문학 등등. 그것들의 상당수가 포기되거나 폐기처분 될 걸 생각하면 마음이 편치 않다. 논문 준비도 있고. 책을 사거나 복사하는 일에만 들어가는 돈도 만만치 않고... 내가 과연 무얼 이룰 수 있을까?

 



00. 6. 27 
맬컴 보위의 <라캉>을 그제부터 읽고 있다. 오역은 아니라도 해도 잘 이해할 수 없는 내용들이 많이 나온다. 라캉 자신이 쓰는 용어들에 신조어가 많고 또 전․후기의 용례와 강조점이 다른 까닭에 다 따라가기가 힘든 것이다. 일단은 윤곽만 잡을 생각이다. 이후에 벤베뉴토와 아니카 르메르, 마이클 페인, 마단 사럽 등의 입문서를 읽으면 어느 정도 감이 잡힐 것이다. 그의 <에크리>를 짬짬이 읽어가면서.

00. 6. 28
학교에 들러서 몇 권의 책을 반납하고 다시 대출했다. 파스테르나크와 라캉에 관한 책들. 맬컴 보위의 책은 거의 다 읽었다. 김상환 교수의 강의 교재가 데리다의 <우편엽서>와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이었다. 다른 책을 한두 권 더 보고, 르메르의 책을 읽을 계획이다. 물론 데리다를 읽는 건 그것보다 늦어질 것이다. <마르크스의 유령>을 읽는 일도 지난 봄에 잡혔었지만 실행되지 못했다. 여러 모로 밀린 책들이 많다.

인터넷을 통해 이것저것 검색하다가 지젝과 리네츠키(Linetski)의 글을 상당수 프린트로 뽑았다. 지젝은 근래 가장 저명한 헤겔파(혹은 셸링파) 라캉주의자이자, 문화이론가이다. 반면에 바짐 리네츠키는 처음 듣는 이름인데, 현재 이스라엘의 헤브루대학 교수로 있다고 한다. 러시아 태생인듯한데, <안티-바흐친: 나보코프에 관한 가장 좋은 책>이라는 러시아어 저서까지 갖고 있다. 흥미가 있어서 찾을 수 있는 모든 글을 뽑아놨는데, 간혹 이렇듯 지명도 있는 신예 학자들을 만날 수 있는 건 행운이다. 그의 <안티-바흐친>을 구해보고 싶다.

내일은 다시 국립도서관에 가볼 작정이다. 스프링 제본할 책이 몇 권 있고, 간 김에 라캉 연구서도 한두 권 복사할 계획이다. 라캉의 도스토예프스키 읽기? <에크리>의 영어판 색인에는 도스토예프스키란 이름이 딱 한번 나온다. 라캉이 좀 더 여러 번 말했다면, 어떤 말을 했을까? 그걸 내가 대신 말하고 싶어진다.

 

 

 

00. 6. 29
국립도서관에 가서 라캉과 데리다, 그리고 들뢰즈 연구서들을 복사했다. 장 뤽 낭시와 라쿠-라바르트의 라캉 연구서를 챙긴 건 수확이다. <라캉과 정치적인 것>, <하이데거와 데리다>, <안티오이디푸스 입문>, <문자의 타이틀> 등이 제본한 책들이다.

00. 7. 3
마단 사럽의 <알기 쉬운 자크 라캉>을 읽었다. 맬컵 보위의 <라캉>에 이어 읽은 것인데, 보위의 것보다는 읽기가 수월했다. 보다 평이한 문체로 서술되어 있기 때문인데, 그렇다고 해서 라캉의 전보가 손에 잡힌 건 아니다. 아직 개념정리가 확실히 되지 않은 부분이 많다. 라캉 사전을 참조해 가며 더 읽어나가야 할 것이다. 라캉 읽기 혹은 라캉 사용하기와 관련해서는 세 가지 유형을 떠올려 본다. 지젝과 제임슨, 그리고 페미니즘(이리가레와 크리스테바)이 그것이다.

지젝의 책들은 대부분은 제본하여 갖고 있고, 인터넷에 떠있는 아티클들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제임슨의 책들은 대부분은 구할 수 있다. 한두 편의 주요 논문 정도만 찾으면 된다. 페미니즘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이 셋과 모두 맞물려 있는 것이 영화이다. 영화에서는 무엇보다는 메츠를 읽어야 한다. 이런 것들이 앞으로의 독서 계획에 포함될 것이다. 그리고 물론 데리다가 있다. 포우에 대한 라캉과 데리다의 읽기를 비교 검토해 보는 것(바버라 존슨이 한 일).

한길사의 로로로 시리즈 중에서 <히치콕>을 도서관에서 대출했다. 자신의 영화에 대해 평가하면서 포우가 문학에서 한 일을 자신은 영화에서 해보고자 했다는 히치콕의 증언은 매우 의미심장하다. 이 포우를 중심으로 하여 히치콕은 나보코프와 만난다. 그리고 라캉과도 만난다. 히치콕과 나보코프는 재미있게도 1899년생 동갑내기이다. 이들에 관해서 뭔가 재미있는 글이 씌어질 수도 있을 듯하다. 히치콕의 영화들에 대한 관람 계획도 필요하다.



라캉 읽기와 관련해서는 일단 그의 컨텍스트를 먼저 읽기로 한다. 보위나 사럽의 책들은 약간 어중간한 형태의 전기라 할 수 있겠는데, 아니카 르메르나 마이클 페인, 그리고 데리다의 글들은 라캉의 텍스트를 주의깊게 읽는 작업에 해당한다. 거기에 대하여 라캉의 컨텍스트에 집중하고 있는 책들이 셰리 터클의 <라캉과 정신분석 혁명>, 그리고 스튜어트 슈나이더만의 <자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이다. 새물결에서는 루디네스코의 방대한 라캉 전기가 번역되어 나올 거라고 한다. 

그래서 컨텍스트에 대한 책들을 먼저 읽고, 텍스트에 대한 책들은 직접 <에크리>를 읽는 작업과 병행해 나갈 작정이다. 물론 라캉의 텍스트 읽기는 프로이트 읽기와 병행되어야 할 것이다. 컨텍스트 읽기와 함께 지젝과 권택영의 책들을 읽어볼 생각이다. 그래서 일단 7월에는 컨텍스트 읽기, 8월에는 텍스트 읽기가 목표이다. 도스토예프스키와 러시아 문학에 대한 적용 가능성은 항상 탐색거리이다. 가령, <우리들>에서의 거울 이미지. 그리고 폰비진의 <미성년>. 타르코프스키의 영화들. 나보코프의 소설들의 경우.



00. 7. 4
강남 동화서적에 들렀다가 시공사에서 다시 번역되어 나온 마틴 제이의 <아도르노>를 샀다. 지성의 샘에서 나온 번역본을 이미 갖고 있는데도, 잠깐 잊었었다. 다행히 새 번역의 가독성이 훨씬 좋다. 물론 아도르노의 이론을 직접적으로 다루고 있는 부분들은 여전히 난해하다. 그의 <부정의 변증법>도 마찬가지겠지만, 번역 불가능성의 사례로서 지적될 만한 철학자 중의 한 사람이 바로 아도르노인 듯하다. 하지만 새 번역을 통해서 프랑크푸르트 학파 연구의 전문가인 마틴 제이의 권위 있는 해설을 어느 정도 따라갈 수 있다는 건 다행스럽다. 

 

특히 관심있는 부분은 아도르노의 <한줌의 도덕>(혹은 <미니마 모랄리아>). 그가 나치를 피해 미국으로 잠시 망명해 있던 시기의 저작이고, 또한 가장 니체적인 책으로 평가된다. “오직 스스로를 이해하는 데 실패한 사유만이 참되다.” 음미해 볼 만한 부분이다. 한 가지 새롭게 알게 된 건 모더니즘 작가로서의 베게트에 대한 그의 높은 평가. 그는 자신의 <미학이론>을 베케트에게 바치려고 했단다. 라캉 읽기에 불쑥 끼어든 아도르노 읽기이지만, 나는 곧 라캉으로 다시 돌아가겠다.

 



TV문화기행 코너에서 토마스 하디 편이 방송되는 걸 봤다. 테스가 겁탈 당하는 장면이 세 차례에 걸쳐 개작되었다는 사실, 그리고 로렌스의 <아들과 연인>, <무지개>, <채털리 부인의 사랑>이 바로 <테스>의 계보를 이어받은 작품이라는 게 새로 알게 된 내용이다. 거기에 덧붙이자면, 그의 고향 마을의 농촌 학생들은 그에 대해서 전혀 알고 있지 않았다.

장 주네의 희곡 <하녀들>을 구해봤으면 싶다. 어디 번역되어 있을 것도 같은데, 전혀 검색이 되지 않는다.

 

00. 7. 8
며칠간 인터넷 자료들과 대출한 책들을 인쇄하고 복사했다. 어제 뽑은 것 중에서 제일 흥미로왔던 건 히치콕과 나보코프를 비교한 글. <이미지>란 잡지에 제임스 데이빗슨(비디오 평론가)이 기고한 것인데, 사실 히치콕과 나보코프를 비교해보는 글은 내가 먼저(!) 구상한 것이기도 하다. 그가 들고 있는 공통점은 다섯 가지이다. ①게임 이론 ②카메오 출연 ③자기 지시적 기법 ④분신들과 “신빙성 없는 화자” ⑤공통적인 문학적 영향(특히 포우). 어쨌거나 수고가 반 이상 덜어지게 되어 다행이다. 참고문헌을 보면 히치콕과 나보코프를 다룬 글은 이게 거의 유일하지 않나 싶다. ‘최초’라는 자리를 놓치게 되었지만, 기분이 나쁘진 않다. 친구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랄까...

 

00. 7. 11
셰리 터클의 <라캉과 정신분석 혁명>을 다 읽었다. 알라딘에 서평까지 올렸다. 라캉 이론의 테두리를 긋는데 도움이 되는 저작이지만, 이론의 내면까지 들어가지는 않는다. 사실 그걸 목적으로 하지도 않은 책이지만. 정신분석의 사회학이면서 일종의 지성사인데, 프랑스에서 프로이트 혁명이 지니는 의의와 그 변모 과정을 잘 개괄하고 있다.

오늘 읽은 부분에서 인상적인 대목: “정신분석의 비전에서 가장 급진적인 것은 우리 내부의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을 추구하는 것이며 라캉은 받아들여질 수 없는 것과 자신 안에서 대면하도록 끊임없이 촉구한다고 많은 분석가들은 믿는다. 이것이 라캉 세미나의 위력이다.”(304쪽) “정신분석의 핵심은 도저히 받아들여질 수 없는 진실, 즉 인간이 자신의 중심이 아니라는 것과 대면하는 것이다.”(307쪽) 그런 점에서 미국식의 적응주의적, 실용주의적 정신분석은 일종의 ‘자살 행위’이다. 그 다음. “알튀세르와 라캉에 있어 '과학만이 전복적이다'”(310쪽) 두 이론가가 모두 왜 그렇게 과학(과 수학)에 집착하는지는 이해할 수 있다.

또 “사람들이 정치와 언어에 대한 생각을 표현하는 방식에 미친 라캉의 영향은 프랑스의 새로운 대중적인 철학(신철학)과 알렉산더 솔제니친에 대한 프랑스인들의 평가에서 나타난다.”(311쪽)는 대목. 솔제니친의 <수용소 군도>(1973)가 제일 먼저 출간된 곳은 프랑스였다. 터클의 책에서 가장 재미있는 부분은 그래도 미국에서의 라캉을 다룬 에필로그이다. “라캉의 정신분석의 프로테스탄티즘은 자기를 형성하는 인간을 강조한다. 그것은 개인에 대한 일종의 시작(詩作)이다. 라캉에게 시인과 정신분석가는 언어에 대한 그들의 관계에 의해 밀접히 연결되어 있다.”(332쪽)



“정신병은 엄밀하고자 하는 시도이다. 이런 의미에서 나는 정신병자라고 말하고 싶다. 항상 엄밀해지고자 노력해 왔다는 이유만으로도 나는 정신병자이다.”(라캉) ‘정신병자’ 라캉의 전략은 과학적인 것에서 시적인 것으로 도약하는 것이다. “그는 어렵고 엄밀한 작업을 피하기 위해 시적인 합리화를 한다고 생각되는 사람들에게는 수학의 필요성을 역설했고, 과학적 엄밀함이 시야를 좁게 만들 수 있는 사람들에게는 시의 필요성을 역설했다.”(334쪽) 그리하여 “라캉은 정신분석을 과학으로 재발견하고자 하는 야망을 가진 시인이다.”(336쪽)

라캉 독서 계획. 슈타이더만의 <자크 라캉, 지적 영웅의 죽음>을 읽으면, 콘텍스트는 끝난다.(루디네츠코의 책이 역간되면 콘텍스트에 포함될 것이다.) 페터 비트머의 <욕망의 정복>이나 아니카 르메르의 <자크 라캉>이 텍스트로 이어질 것이다. 그리고 지젝의 <삐딱하게 보기>.

00. 7. 14
어제는 국립도서관에 가서 몇 권의 책을 복사했는데, 그 중 어얼리치의 <모더니즘과 혁명>, 그리고 <사회주의 이후의 러시아 사상>이란 엔솔로지는 전권을 다 복사했다. 그만큼 수지가 맞는 책이었다는 얘기. 특히 어얼리치의 경우는 그렇다. 1994년에 하버드대학출판부에서 나온 책이다.

7월도 보름이 후딱 지나갔다. 해야 할 일은 손끝도 대지 않은 채, 아니 손끝만 댄 채. 방향 상실의 세월이 생각보다 더 길어질 듯하다. 불행도 헹복도 말할 수 없는 시간... 



00. 7. 16
로로로 시리즈의 <히치콕>을 마저 읽었다. 대출한 지 보름이 지났다. 너무 밋밋한 전기. 영화감독의 개인사라는 게 그의 작품세계만큼 흥미로울 수는 없는 법이고, 주요 작품들을 자세하게 분석하기에는 분량이 너무 짧다. 그냥 히치콕에 대한 윤곽을 잡는 데 유용한 책. 더 두꺼운 전기나, 대담, 연구서들을 봐야 할 듯하다. 트뤼포와의 대담이 어느 구석에 처박혀 있는지 모르겠지만, 도널드 소포토(Donald Spoto)의 저명한 전기는 갖고 있다. 물론 그에 관한 참고문헌은 수백 권을 헤아리지만...

작년, 1999년의 키노 12월호는 히치콕에 대한 오마주에 바쳐지고 있다. 지젝의 책들과 더불어, 라캉과 더불어, 히치콕을 다시 읽을 기회가 있었으면 싶다. 물론 나보코프와 비교도 해볼 만한 작업일 것이다.  

00. 7. 19
인터넷 서점 알라딘에 올린 서평 중 <미- 예쁜 유전자만 살아남는다>에 대한 다소 부정적인 평은 아직 올라오지 않았다. 히치콕에 대한 것만 올라와 있었다. <유토피아의 종말>에 관한 것도 한번 더 올려봤는데, 이것도 올라오지 않으면 문의해볼 생각이다. 또 인터넷 카페로 개설한 <도스토예프스키>가 꼭 1년이 되었다. 한 살을 먹은 것. 회원수가 119명. 내일로써 120명이 채워졌으면 싶다. 3일에 한 명 꼴로 회원이 는 것이니까 실적이 모자란 것은 아니다. 다만, 어느 카페나 마찬가지지만 비활동 회원이 많다는 것. 매일 들르는 회원은 10명이 채 못되는 듯하다. 반면에 칼럼은 실족이다. 새로 칼럼을 띄우지 않은 지 두 주가 넘은 듯하고, 회원들도 더 이상의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다른쪽으로 업종 전환을 해야 할 듯.

새로 나온 신간 중 몇 권이 눈에 띈다. 마음에 내키는 책들은, 모아둔 것까지 하면 10여 권쯤 될까. 뭐라도 당첨이 되었으면 싶은데... 정말 뭐라도 하고 싶고, 해야 할 것 같다. 번역에 다시 치이고 있다. 막상 시간은 내지 못하면서 부담은 크다. 리포트도 그렇고. 어떻게든 타개책을 마련해야 할 터인데... 정신분석에 요즘 마음이 갈 만한 이유들이 어쨌든 있는 것이다!



00. 7. 23
알라딘에 올리는 서평들은 잘 올라가고 있다. 세 편이 추천서평에 꼽혀 있는데, 우수작으로라도 뽑히면 좋겠다. 10만원 정도면 책가뭄을 얼마간 해갈할 수 있을 듯하기에.

어제는 EBS에서 데이비드 린치의 <엘리펀트 맨>을 보고, 오늘은 비디오로 <로스트 하이웨이>를 다시 봤다. 린치는 정신분석적 접근을 강력하게 요구하는 감독 중의 한 사람이란 걸 확인하게 된다. <로스트 하이웨이>의 경우는 나보코프와 마찬가지로 두 세계 모델(‘다른 세계’)이 유력한 해석의 방안처럼 보인다. 물론 그 자세한 읽기는 보다 많은 노고를 필요로 할 것이다.

00. 7. 25
김형효 교수의 하이데거 연구서를 손에 들었다. <하이데거와 마음의 철학>. 주로 초기작인 <존재와 시간>의 ‘소화’에 초점을 맞추고 있다. 내년에 속편을 낼 예정이라고. 동서양 철학을 아우르는 박식함과 성실함에 경의를 표하게 된다. 글 또한 일정한 수준은 꾸준히 유지하고 있어 반갑고. 다만, 글쓰기의 문턱에 대해서 아직은 가볍게 생각하는 듯하다.  

불교나 노장 사상을 가지고 하이데거나 데리다의 해체론을 읽는 건, 물론 얼마간 성과를 낼 수 있을 터지만, 역시 근원적인 한계를 가질 법하다. 그것은 불교나 노장 모두, 언어를 불가피한 장애물 정도로 다루기 때문이다. 일종의 사다리로 취급하는 것이다. 진리에 도달하면 버려야 하는, 아니 진리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버려야 하는. 김 교수의 문체가 진지하되, 유희와는 거리를 두고 있는 것도 이러한 까닭이겠다. 물론 모처럼 개성적인 하이데거 연구서가 나온 것은 반가운 일이다. 올해에 새로 나온 연구서만 세 권쯤 된다. 신상희 박사의 <시간과 존재> 연구서와, 권순홍 교수의 <존재와 탈근거>가 그것이다. 언제나 집중하여 읽을 수 있는 시간과 경제적 여유을 가질 수 있을까?

 



인터텟에서 나보코프에 관한 비평 자료들과 함께 데이비드 린치의 <로스트 하이웨이>에 관한 글들을 뽑았다. 린치와 지젝을 비교한 장문의 글도 있었는데, 독어여서 입맛만 다셨다. 지젝 자신이 이 영화에 대한 책도 쓰고 한 모양이다. 아무튼 정신분석학자들의 구미에 상당히 잘 들어맞는 감독임에는 틀림없다. 그러고 보면, 그의 영화들을 다 챙겨보기도 했다. TV 시리즈 <트윈 픽스>도 거의 본 것 같고, <사구>(듄)도 잘 기억이 나진 않지만, 비디오로 빌려다 본 적이 있다. 그의 필모그라피 중에서 <로스트 하이웨이>가 가장 최신작이다. 내가 좋아하는 것? <와일드 앳 하트>와 <로스트 하이웨이>. 전자는 아마도 가장 먼저 본 영화였기 때문에 기억에 남는 듯하다. <이레이져 헤드>도 좋아할 만한 영화는 아니지만, 생각거리를 주는 영화이다...

07. 07. 16. 


P.S. 여름일기가 7월로 끝난 건 그해 8월에 아이가 태어났기 때문이다(적어도 나는 그해 여름에 '생물학적 아버지'가 되었다. 애당초 '노아의 외투'란 제목이 붙여진 건 그래서였다). 이후로 정신없었던 건 당연하고 게다가 아이는 한달 동안 병원신세까지 졌었다. 그래도 비교적 건강하게 자랐고, 내가 알라디너 8년차에 들어선 올해 8살이 되어 학교엘 갔다. 쑥쑥 자나라는 아이와 비교해본다면 나의 '지적 성숙'이란 게으르기 짝이 없다(아이는 '또 알라딘!'하면서 서재질을 할 때마다 나에게 주의를 준다!). 릴케라면 '부도덕'하다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하기야 DNA보다 분투하기란 얼마나 어려운 노릇인지...

 

P.S.2. 그럼에도 이 정처없는 질주는 당분간 계속될 것이다(http://www.youtube.com/watch?v=pD3_9yd72Ks)...


댓글(19) 먼댓글(0) 좋아요(1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비로그인 2007-07-16 13: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회가 새로우시겠어요 :)
1200 즐찾이라 와우...
여튼 축하드리고 갑니다.

로쟈 2007-07-16 15:40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마늘빵 2007-07-16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1200이라... 엄청나군요. 아마도 저 정도 숫자는 바람구두님과 로쟈님 뿐일듯.
그나저나 저 아이가 로쟈님을 많이 닮은거 같은데요? 눈과 볼이 :) 저는 비록 사진으로만 봤지만. 귀엽습니다.

로쟈 2007-07-16 15:41   좋아요 0 | URL
저도 기여분이 있을 텐데, 사실 아이는 엄마의 판박이입니다...

드팀전 2007-07-16 17: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많다고 좋은 건 아니지만 ^^ 일단 축하해요.
로쟈님 책은 결코 만만한 책들은 아닌데 이렇게 즐찾이 많은 건 사람들이 그만큼 인문사회분야에 관심이 많다는 것을 반증하나...라고 하고 싶지만 그렇지만은 않은 것 같기도하고 ^^(김창렬이 유행시키고 있다는 '같기도' 버전)
앞으로도 좋은 책 많이 올려주시길.

로쟈 2007-07-16 18:25   좋아요 0 | URL
워낙에 댓글들이 없는지라 저는 그 숫자가 다 허수가 아닌가 싶을 때도 있습니다. 단 다른 보람이 없기 때문에 그 '허수'에라도 의미부여를 하는 것이죠.^^;

퍼그 2007-07-16 19: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읽어야 할 책은 많지만, 그걸 읽을 시간을 나는 돈버는 데 투자해야 한다." 저도 항상 시달리는 고민인데, '규모'는 다르더라도 '본질'은 같을 듯합니다. 그리고 아마 허수 아닐 거예요. 말하긴 어렵지만 그... 하여간 댓글 달기가 그렇게 쉽지만은 않은 사람도 있거든요. 1200 즐찾 축하드립니다!

로쟈 2007-07-16 23:27   좋아요 0 | URL
인문학이 원래 밥벌이 잘 못하는 기생학문이잖아요(그래서 왕후장상의 학문이란 말도 하고). 퍼그님은 능력있는 배우자를 만나길 바랍니다.^^

필라멘트 2007-07-16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이 뜸한 건 달았다간 수준이 들통날까봐 그런거죠. 허수는 아닐겁니다. 댓글을 달고싶어도 웬만한 지적 내공자가 아니고선 왠지 머뭇거려지는.. ㅎㅎ

로쟈 2007-07-16 23:42   좋아요 0 | URL
오히려 제 '바닥'을 드러내는 글들도 많은데요.^^; 게다가 제 딴엔 부러 흰소리도 많이 하는데 잘 먹히지 않네요.--;

작은앵초꽃 2007-07-17 03: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언제나 많은 것을 얻어가고 있습니다^^ 아이가 참 예뻐요.

로쟈 2007-07-17 09:12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유명인사분들이 오늘은 많이 오셨네요.^^

프레이야 2007-07-17 07:5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즐찾 1200돌파, 축하합니다.
쉽지않은 책들에 읽기만 하거나 채 읽지못하고 지나갈 때가 많았지만
그중 한 사람으로서 계속되는 질주를 기대합니다.
참, 일전에 언젠가 보았던 로쟈님의 사진 속 얼굴이 아이의 얼굴에 그대로
있네요. 참 똘망똘망하니 예쁩니다.^^

로쟈 2007-07-17 09:14   좋아요 0 | URL
똘망똘망한 거라도 절 닮은 거라고 아이에게 주입시켜야겠습니다!^^;

조선인 2007-07-1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의 경우 2001년 1월 11일에 첫 리뷰를 쓴 전 즐찾 294명. 한편으로는 로쟈님에 비해 부끄럽다고 생각하면서, 다른 한편으로 사적인 블로그를 즐겨찾는 사람이 294명이나 된다는 것에 움찔해버립니다.

조선인 2007-07-18 17: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아아앗, 축하의 말을 빼먹었네요. 축하드려요. 로쟈님은 그럴만하다구요. ^^

로쟈 2007-07-18 18:28   좋아요 0 | URL
감사합니다. 즐찾이 어느 정도 이상이 되면, 사적인 블로그만은 아닌게 돼 버리죠(사서 고생하기도 하고--;). 한 20명까지는 '사생활'을 만끽할 수 있(었)을 텐데요. 흠...

이매지 2007-07-18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댓글달다가 무식이 탄로날까싶어 조용히 읽고 추천만 하고 간 것도 많은걸요 :)
어쨌거나 로쟈님의 즐찾 1200 축하드립니다 :)

로쟈 2007-07-18 23:24   좋아요 0 | URL
알고 모르고는 몇 걸음 차이나지 않습니다. 앎에 흥미를 느끼느냐가 사실 더 중요하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