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격렬한 활동 자체가 곧 현실 세계라면 내가 지금까지 살아온 것은 현실 세계와 털끝만치도 접촉하지 않은 게 된다. 호라가토게(洞時)에서 낮잠을 잔 것이나 진배없다. 그렇다면 오늘부터 낮잠을 안자고 활동의 할부(割賦)를 할 수 있느냐 하면 그것도 어렵다. 나는 지금 활동의 중심에 서 있다. 하지만 나는 그저 내 전후좌우에서 일어나는 활동을 보지 않으면 안 되는 위치로 바뀌었을 뿐 학생으로서의 생활이 이전과 달라진 건 아니다. 세계는 이렇게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거기에 가세할 수는 없다. 내 세계와 현실 세계는 하나의 평면에 나란히 있으면서도 조금도 접촉하지 않는다. 그리하여 현실 세계는 이렇게 움직이며 나를 남겨둔 채 가버린다. 심히 불안하다. - P37

구마모토의 고등학교에 다닐 때도 이보다 한적한 다쓰타야마(龍田山)에 오르거나 달맞이꽃으로 뒤덮인 운동장에 드러누워 세상일을 다 잊은 듯한 기분에 젖은 적이 여러 차례 있었다. 하지만 이런 고독감은 이번이 처음이었다.
격렬하게 움직이고 있는 도쿄를 봤기 때문일까? 어쩌면…… 이때산시로의 얼굴이 빨개졌다. 기차를 함께 탔던 여자가 떠올랐기 때문이다. ……현실 세계는 아무래도 자신에게 필요한 듯하다. 하지만 현실 세계는 너무 위험해서 가까이 다가갈 수 없을 것 같다. 산시로는 빨리 하숙으로 돌아가 어머니에게 편지를 써야겠다고 생각했다. - P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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셰익스피어의 주인공 마법사, 밀라노공작 프로스페로가 여성으로 재설정 되었지만 이 영화판 연극 <템페스트>가 여성서사는 아니다. 남동생에게 지위를 뺏기고 추방된 누나는 딸과 함께 외딴섬에서 칼을 칼며 십여 년을 살다가 폭풍우를 일으켜 섬으로 불러모은 옛 원수들을 (조금 놀래킨 다음에)  모두 용서한다. 시원한 복수 한 판이 아쉬운 셰익스피어의 말년작, 그것도 희극이라 작가는 이해와 용서로 좋게 좋게 모든 것을 보듬는다.

흑인 배우가 연기하는 섬의 원주민 칼리반을 노예삼는 행위는 섬찟해 보이는데 칼리반은 모반 혹은 해방을 꾀하며 또다른 백인 주인 (더 못난 주정뱅이)의 발에 입을 맞춘다. 멍청한 괴물이었지만 그는 프로스페로가 제일 아끼는 건 딸보다 책인 것을 잘 알았다. 영화에선 마지막에 그를 토굴로 쫓으며 가두는 대신 한참 ‘측은하게’ 바라보고 말없이 열린 문으로 보내준다. 그는 이 외딴 섬의 주인 자리를 찾을 것인가? (끝까지 자유 선언은 없다) 여러 겹의 대칭 구조, 술취한 세 머저리와 권력에 취한 세 귀족, 정전/암살 모의가 흥미롭다. 요정이 환상 마술쇼 부리는 데선 ‘한여름밤의 꿈’이 자연스레 떠오른다. 결말부분, 프로스페로가 자신의 신분과 옛 지위를 드러내며 드레스를 입고 (헙, 소리가 나도록) 코르셋을 조이는데 내 속이 다 깝깝했고. 에어리엘의 정신 사나운 cg 장면들은 밍밍한 미란다, 페르디난드 커플과 함께 이 영화의 비추천 요소다. 그래도 역시나 셰익스피어는 대작가고 명배우들의 대사 전달은 힘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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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cott 2021-09-27 00:3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이 작품 좋아합니다. 영화도 봤지만 실제 셰익스피어 글로브 극장에서 봤던 감동은 잊기 힘들 정도로 배우들 연기만큼 무대 장치도 훌륭했습니다 ^ㅅ^

유부만두 2021-09-27 00:37   좋아요 3 | URL
글로브 공연 영상 dvd도 있던데 챙겨야겠군요. 영화 버전은 좀 아쉬운 데가 있어도 재밌었어요. 런던 가서 공연 볼 날이 올까요? ㅠ ㅠ
 

소설가 무코다 구니코의 에세이에 이런 묘사가 있었다.
"요리를 좋아하는 그녀는 외식에서 맛있는 것을 만날 때마다 집중해서 그 맛을 혼에 새겼다." 우와, 진지하시네, 료스케 씨가 놀리는소리가 아득히 먼 곳에서 들려오는 느낌이었다. - P79

"아, 술을 마시면 탄수화물 필요 없다고 하는 사람, 부럽지만, 그 느낌, 난 잘 모르겠어. 여기요, 한 그릇 더 주시겠어요?" - P237

그 사람, 진보적인 척하지만 실제로는 니가타 출신 도련님이라 마누라는 집에 있길 바라는 유형이었어요. 여성관이 상당히 보수적이었죠. 그 세대의 좌파 남자들에게 흔히 있는유형이지." - P280

집안일만큼 재능과 에고이즘과 일종의 광기가 필요한 분야도 없을 텐데, - P363

최근에 약간이지만 요리를 하게 된 뒤로, 청소나 요리는 로큰롤이더라. 사랑이나 다정함이 아니라, 가장 필요한 건 힘이랄까……. 일상을 무디게 넘어가지 않겠다는 투지랄까 ……. - P469

후하게 대접하려고 지나치게 애쓰는 점이 일본인의 나쁜 습관이에요, 처음부터 끝까지 혼자 완벽하게 하려고 하니까 일본에서는 지인을 편하게 불러서 분위기를 즐기는 습관이 정착하지 못하는 거예요………. - P5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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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을 가지 못하는 지금, 여행 이야기 글귀로 시작하는 곁가지 여행 이야기를 읽었다. 이다혜 작가의 여행 이야기를 전에 여럿 읽어서인지 익숙한 톤과 공감을 일으키는 문장이 여럿 보였다. 그 익숙함이 여행이라는 제목과 함께 작은 위로를 준다. 더해서 찾아볼 책 목록도 챙겼다. 책의 부제에서 보이듯이 이번 여행 책은 '일상'에 방점이 찍혀있다. 여행은 다녀 오고, 아예 못/안 떠나고, 길어지더라도 '일상'이 중심이 된다는 말.


여행도 책도 나를 가장 혼자일 수 있게 한다. (121)


루빈은 자라면서 주워들은 교훈을 모아 '어른의 비밀'이라는 긴 목록을 만들었는데, 그중 "내가 매일 하는 일이 가끔 하는 일보다 더 중요하다"라는 말이 그에게 가장 유용했다고 한다. (123)


가장 어려운 수행은 일상을 새로운 마음으로 매일매일 살아가는 일이다. (139)


<이상한 나라의 앨리스>에서 앨리스가 이상한 나라를 여행하면서 쓸 수 있었던 무기는 오직 언어뿐이었다고, 알베르토 망겔은 책에 쓴 적이 있다. 오직 언어만이 체셔 고양이의 숲을 관통하고, 광기를 들추어 낼 수 있다고. 새로운 경험을 자기 것으로 만들려면 그것을 언어화할 수 있어야 한다. 호랑이 굴에 잡혀가도 정신만 차리면 산다는 옛말에서 '정신'은 기실 언어화된 의지를 뜻하는지도 모른다. (173)


동방박사는 현대 대도시에서 아기 예수가 있는 곳을 찾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밤에 불을 밝힌 십자가가 너무 많고 하늘은 공해로 별을 잃었다.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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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1-09-19 11:16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말들 시리즈 읽으면 보관함이 무거워지는 것 같아요 여행이야기이지만 ‘일상‘에 방점이 찍혀있다는게 의외네요~!

유부만두 2021-09-22 17:17   좋아요 2 | URL
그랬어요. ^^ 코로나 시국이라 ‘일상‘의 의미가 더 특별하기도 하고요, 여행 만큼이나 일상의 중요성을 생각하게 됐어요.

새파랑 2021-09-19 14: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표지를 다시 보니 맥주? 🍻
여행가고 싶네요~!!

유부만두 2021-09-22 17:18   좋아요 1 | URL
저도요.... 시댁에 명절 여행 다녀왔 .... 지만 그건 여행 아니잖아요?
 

세 명의 중노년 층 남자가 의문사하고 그 배후엔 그들의 연인이었던 가자이 마나코가 있다. 이 여인은 비대한 몸에 평범한 얼굴로 치정살인극과는 거리가 있어보인다. 이 사건을 취재하는 여기자 리키는 가자이의 음식에 대한 애착 (하지만 여러 곳에서  모아온 듯한 평범한 음식 관련 글)에서 해법을 찾을 것만 같다. 리키는 용의자와 위태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데 그 시작, 그리고 끝은 버터이다. 리키는 서서히 자신의 몸과 마음이 버터로, 가자이의 이야기로 변하는 것을 깨닫는다.


아쉽게도 책은 생각만큼 흥분되지 않았다(?). 요리 과정이나 맛의 단계의 묘사가 치밀하지 않아서 자꾸 딴 생각이 들었다. (실제 부엌에서 이러다간 손을 베거나 간을 못 맞춘다) 클라이 막스일 최후의 대만찬 장면도 뜬금없다. (헛헛해서 졸라의 '목로주점'의 생일잔칫상 묘사를 다시 읽을까 싶다) 남성 위주 사회의 편견과 허세를, 그리고 필연적인 찌질함과 폭력을 고발한다고는 하지만 (리키의 아부지 정말 우리나라 집밥 타령하는 (할)아부지들 같았어) 지겹고 익숙한 인물들이라 작가가 이리 저리 꼬아놓았는데도 그 모습이 버겁다. 살인과 사망 이야기가 여럿 언급되지만 그 살벌함이 아쉬워서 미야베 미유키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여러 겹의 이야기를 쌓으면서 여러 인물들을 배열했는데 인물의 모습이 들쭉날쭉하다. 고른 맛이나 결이 아니라 읽다가 지겨워졌다. 하지만 코스 요리를 중간에 멈출 수는 없잖아? 작가의 (도시락) 전작들보다 무거운 주제에 길이도 두배로 늘어나서인지 작가의 이야기 통제력이 아쉽다. 다시 한 번, 음식 묘사가 너무 해 ㅜ ㅜ 내 상상에서 종이 맛만 났다구. 더구나 작가가 잘 숨지도 못해서 투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유즈키 센세, 머리카락이랑 손가락이랑 다 보여요, 이걸 어째요. 하지만 이 소설을 지금 읽기로 한 내 선택이 잘못인지도 모른다. 동물성 지방 버터와 풍성한 (칼로리의)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 욕구, 보살핌, 이런 키워드가 빡빡하게 들어찬 소설이 명절 직전에 잘 소화될 리는 없다. 곧 버터 대신 식용유와 참기름의 냄새가 내 머리카락과 온 몸에 밸텐데....아, 냄새. 그렇다. 이 소설은 맛, 풍미, 버터의 육감적인 (책에서도 잠깐 언급되는 우유는 피라는 말, 우유 생산을 위해 소는 일년 내내 인공수정을 거쳐 임신 상태라는 데서 오는 폭력성이 무섭다. 인물들은 우유를 뺏긴 송아지들은 언급하지 않지만) 맛 보다는 장면 묘사에 동반되는 냄새/향기가 생생하다. 맛에 필수요소인 향을 살린 이 소설은 그런 의미로는 나를 흥분(?)시킨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좋지 않은 냄새;;;; 문장을 읽으면서 바로 생생하게 코에 와닿는 냄새;;; (나 변태 맞네)


슈퍼마켓 특유의 차가운 사과와 젖은 상자 냄새가 훅 풍겼다. (6)

인기척 없는 플랫폼에 내려서자마자, 촉촉한 모래와 달콤한 물 냄새가 훅 밀려왔다. (235) 

집에 돌아와서 열쇠로 문을 열고, 손잡이를 돌리자 마른 냉기가 쏟아져나왔다. 샤프심과 세제가 섞인듯한 딱딱한 냄새가 기세좋게 밀려와서, 바깥 복도의 차가운 공기에 녹아들었다. (312)

잡초 타는 냄새 비슷한 향이 희미하게 떠돈다. 반갑게 느껴지는 것이 분했다. (343)

목 언저리에서 과자 빵과 똑같은 냄새가 났다. (345)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몇십 배 농축 된, 남의 집 특유의 달짝하고 시큼한 냄새가 기세좋게 얼굴에 확 뿜어졌다. (355)

서양산 박하향이 지나가는 듯한 막힘없는 필체에 길잡이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401)

숨이 막힐 것 같은 담뱃진과 중년 남자의 피지와 청주 냄새가 뒤섞인 냄새. (518)

고개를 든 그녀에게서 달콤한 물냄새가 났다. (561)


책을 덮고 나서 생각나는 디테일들은 일본 문고판에는 가름끈이 있다(591), 작가의 전작 <서점의 다이아나>에서도 프랑스와즈 사강을 읽는 여고생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사강이다. 편협한 인물을 그리기엔 사강만한 작가가 없나보다. (조금 움찔했음) 자상한 어머니는 마들렌느를 구워준다(220), 무가당 소주는 알지만 무가당 맥주는 무얼까(502), 책에서 은유 겸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꼬마 삼보 이야기>를 읽었다. 외국 버전의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삼보는 자기 떡/옷도 되찾고 버터 (생각난 김에 유툽에서 프랑스 버터 만드는 영상을 봤다.


그리고 일본 홋카이도 유제품에 대한 맛깔나는 묘사와 버터 품귀 현상 이야기는 만화 '백성귀족'에도 나온다.)로 변한 호랑이들을 맛있게 먹으니 우리나라 해님달님 버전 보다는 더 맛있(?)는 결말인 셈이다. 호랑이버터는 삼보 어머니가 팬케이크 반죽에 넣었다. 후라이팬 이야기는 안나옴. 정작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제목과는 동떨어진 음식 <나나쿠사죽>, 1월 7일에 먹는 봄나물 일곱 가지 넣어 끓인 죽이다. (내가 치아가 약해서 그래)


뒤죽박죽 페이퍼가 보여주는 나의 엉망진창 내면세계. 내가 딱 내일부터는 열심히 음식을 할거다. 그리고 청소도 할거다. 가지이 상 본가의 먼지 이야기 나올 때 또 움찔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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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9-18 22: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향기 묘사가 정말 다양하네요^^

유부만두 2021-09-22 17:19   좋아요 1 | URL
네, 이번 책은 읽으면서 맛보다는 향기가 더 가깝게 느껴졌어요. ^^

청아 2021-09-18 23: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목로주점 생일잔치와 피로연 잔치상 모두 쇼킹했어요! 포도주는 얼마나 물처럼 마시는지 저도 따라서 집에 있던 포도주 클리어했답니다😳

유부만두 2021-09-22 17:19   좋아요 1 | URL
아이고 맞죠! 그 사람들 먹성이 얼마나 좋고 말술인지! 상다리 부러지고 집기둥도 뽑혔잖아요ㅎㅎㅎ

페넬로페 2021-09-19 12: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얼른 목로주점이 읽고 싶어요~~
‘미야베 미유키‘ 작가 찜 합니다.
그려요
그냥 이 또한 지나가리니 음식 맛있게 하시고
먼지는 눈에 잘 안보여요, ㅎㅎ^^

유부만두 2021-09-22 17:20   좋아요 2 | URL
저 미야베 미유키 신작 읽으려고 챙겨놨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