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 명의 중노년 층 남자가 의문사하고 그 배후엔 그들의 연인이었던 가자이 마나코가 있다. 이 여인은 비대한 몸에 평범한 얼굴로 치정살인극과는 거리가 있어보인다. 이 사건을 취재하는 여기자 리키는 가자이의 음식에 대한 애착 (하지만 여러 곳에서  모아온 듯한 평범한 음식 관련 글)에서 해법을 찾을 것만 같다. 리키는 용의자와 위태로운 관계를 만들어가는데 그 시작, 그리고 끝은 버터이다. 리키는 서서히 자신의 몸과 마음이 버터로, 가자이의 이야기로 변하는 것을 깨닫는다.


아쉽게도 책은 생각만큼 흥분되지 않았다(?). 요리 과정이나 맛의 단계의 묘사가 치밀하지 않아서 자꾸 딴 생각이 들었다. (실제 부엌에서 이러다간 손을 베거나 간을 못 맞춘다) 클라이 막스일 최후의 대만찬 장면도 뜬금없다. (헛헛해서 졸라의 '목로주점'의 생일잔칫상 묘사를 다시 읽을까 싶다) 남성 위주 사회의 편견과 허세를, 그리고 필연적인 찌질함과 폭력을 고발한다고는 하지만 (리키의 아부지 정말 우리나라 집밥 타령하는 (할)아부지들 같았어) 지겹고 익숙한 인물들이라 작가가 이리 저리 꼬아놓았는데도 그 모습이 버겁다. 살인과 사망 이야기가 여럿 언급되지만 그 살벌함이 아쉬워서 미야베 미유키를 다시 읽고 싶어진다. 여러 겹의 이야기를 쌓으면서 여러 인물들을 배열했는데 인물의 모습이 들쭉날쭉하다. 고른 맛이나 결이 아니라 읽다가 지겨워졌다. 하지만 코스 요리를 중간에 멈출 수는 없잖아? 작가의 (도시락) 전작들보다 무거운 주제에 길이도 두배로 늘어나서인지 작가의 이야기 통제력이 아쉽다. 다시 한 번, 음식 묘사가 너무 해 ㅜ ㅜ 내 상상에서 종이 맛만 났다구. 더구나 작가가 잘 숨지도 못해서 투박하게 드러나기도 한다. 유즈키 센세, 머리카락이랑 손가락이랑 다 보여요, 이걸 어째요. 하지만 이 소설을 지금 읽기로 한 내 선택이 잘못인지도 모른다. 동물성 지방 버터와 풍성한 (칼로리의) 음식을 섭취하는 행위, 욕구, 보살핌, 이런 키워드가 빡빡하게 들어찬 소설이 명절 직전에 잘 소화될 리는 없다. 곧 버터 대신 식용유와 참기름의 냄새가 내 머리카락과 온 몸에 밸텐데....아, 냄새. 그렇다. 이 소설은 맛, 풍미, 버터의 육감적인 (책에서도 잠깐 언급되는 우유는 피라는 말, 우유 생산을 위해 소는 일년 내내 인공수정을 거쳐 임신 상태라는 데서 오는 폭력성이 무섭다. 인물들은 우유를 뺏긴 송아지들은 언급하지 않지만) 맛 보다는 장면 묘사에 동반되는 냄새/향기가 생생하다. 맛에 필수요소인 향을 살린 이 소설은 그런 의미로는 나를 흥분(?)시킨 셈이다. 하지만 대부분이 좋지 않은 냄새;;;; 문장을 읽으면서 바로 생생하게 코에 와닿는 냄새;;; (나 변태 맞네)


슈퍼마켓 특유의 차가운 사과와 젖은 상자 냄새가 훅 풍겼다. (6)

인기척 없는 플랫폼에 내려서자마자, 촉촉한 모래와 달콤한 물 냄새가 훅 밀려왔다. (235) 

집에 돌아와서 열쇠로 문을 열고, 손잡이를 돌리자 마른 냉기가 쏟아져나왔다. 샤프심과 세제가 섞인듯한 딱딱한 냄새가 기세좋게 밀려와서, 바깥 복도의 차가운 공기에 녹아들었다. (312)

잡초 타는 냄새 비슷한 향이 희미하게 떠돈다. 반갑게 느껴지는 것이 분했다. (343)

목 언저리에서 과자 빵과 똑같은 냄새가 났다. (345)

잠시 후 문이 열리고 몇십 배 농축 된, 남의 집 특유의 달짝하고 시큼한 냄새가 기세좋게 얼굴에 확 뿜어졌다. (355)

서양산 박하향이 지나가는 듯한 막힘없는 필체에 길잡이를 발견한 기분이 들었다. (401)

숨이 막힐 것 같은 담뱃진과 중년 남자의 피지와 청주 냄새가 뒤섞인 냄새. (518)

고개를 든 그녀에게서 달콤한 물냄새가 났다. (561)


책을 덮고 나서 생각나는 디테일들은 일본 문고판에는 가름끈이 있다(591), 작가의 전작 <서점의 다이아나>에서도 프랑스와즈 사강을 읽는 여고생이 나오는데 여기서도 사강이다. 편협한 인물을 그리기엔 사강만한 작가가 없나보다. (조금 움찔했음) 자상한 어머니는 마들렌느를 구워준다(220), 무가당 소주는 알지만 무가당 맥주는 무얼까(502), 책에서 은유 겸 반복적으로 언급하는 <꼬마 삼보 이야기>를 읽었다. 외국 버전의 '떡 하나 주면 안 잡아먹지'. 삼보는 자기 떡/옷도 되찾고 버터 (생각난 김에 유툽에서 프랑스 버터 만드는 영상을 봤다.


그리고 일본 홋카이도 유제품에 대한 맛깔나는 묘사와 버터 품귀 현상 이야기는 만화 '백성귀족'에도 나온다.)로 변한 호랑이들을 맛있게 먹으니 우리나라 해님달님 버전 보다는 더 맛있(?)는 결말인 셈이다. 호랑이버터는 삼보 어머니가 팬케이크 반죽에 넣었다. 후라이팬 이야기는 안나옴. 정작 내가 먹고 싶은 것은 제목과는 동떨어진 음식 <나나쿠사죽>, 1월 7일에 먹는 봄나물 일곱 가지 넣어 끓인 죽이다. (내가 치아가 약해서 그래)


뒤죽박죽 페이퍼가 보여주는 나의 엉망진창 내면세계. 내가 딱 내일부터는 열심히 음식을 할거다. 그리고 청소도 할거다. 가지이 상 본가의 먼지 이야기 나올 때 또 움찔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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얄라알라 2021-09-18 22:28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향기 묘사가 정말 다양하네요^^

유부만두 2021-09-22 17:19   좋아요 1 | URL
네, 이번 책은 읽으면서 맛보다는 향기가 더 가깝게 느껴졌어요. ^^

미미 2021-09-18 23:00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ㅋㅋㅋㅋ목로주점 생일잔치와 피로연 잔치상 모두 쇼킹했어요! 포도주는 얼마나 물처럼 마시는지 저도 따라서 집에 있던 포도주 클리어했답니다😳

유부만두 2021-09-22 17:19   좋아요 1 | URL
아이고 맞죠! 그 사람들 먹성이 얼마나 좋고 말술인지! 상다리 부러지고 집기둥도 뽑혔잖아요ㅎㅎㅎ

페넬로페 2021-09-19 12:09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얼른 목로주점이 읽고 싶어요~~
‘미야베 미유키‘ 작가 찜 합니다.
그려요
그냥 이 또한 지나가리니 음식 맛있게 하시고
먼지는 눈에 잘 안보여요, ㅎㅎ^^

유부만두 2021-09-22 17:20   좋아요 2 | URL
저 미야베 미유키 신작 읽으려고 챙겨놨어요.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