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두어 장은 작가가 너무 몸을 사리며 말을 돌려서 지루한 느낌이 들었다. 하지만 본격적으로 글을 쓰는 이야기, 그동안 (일본 문단에 대해) 서러웠던 이야기가 나오는 부분 부터는 꽤 읽을 만했다. 무엇보다 무라카미 하루키가 읽었던 책과 작가 이야기가 좋았다. 특히 그의 꾸준함, 일정한 규칙적인 생활 이야기가 마음에 들었다. 


요즘 챈들러를 읽고 연상 작용에 끌려 이 책을 읽으면서 다시 뭔가에 홀린듯이 <노르웨이의 숲>을 다시 읽기 시작했다. 아, 왜 그랬어. 하루에 몇 쪽씩 밖에 못 읽겠다. 이런 인물들이 이런 대화를 한단 말이지. 작가의 설명대로 1인칭 소설의 한계였을까, 대화로 전해지는 장면들은 더 적나라하고 억지로 꾸겨 넣은듯 기괴하게 와닿는다. 


하지만 뭐 이런 소설에 취한 시절의 나도 있었지. 그 나이가 된 큰아이는 다행인지 무라카미 하루키를 모른다. 



이사크 디네센은 ‘나는 희망도 절망도 없이 매일매일 조금씩 씁니다‘라고 했습니다. 그와 마찬가지로 나는 매일매일 20매의 원고를 씁니다. - P151

미국의 금주 단체 표어에 One Day at a time이라는 게 있는데, 그야말로 바로 그것입니다. 리듬이 흐트러지지 않게 다가오는 날들을 하루하루 꾸준히 끌어당겨 자꾸자꾸 뒤로 보내는 수밖에 없습니다. 그렇게 묵묵히 계속하다 보면 어느 순간 내 안에서 ‘뭔가‘가 일어납니다. 하지만 그것이 일어나기 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립니다. 당신은 그것을 참을성 있게 기다려야만 합니다. 하루는 어디까지나 하루씩입니다. 한꺼번에 몰아 이틀 사흘씩 해치울 수는 없습니다. - P180

나에게는 독서라는 행위가 그대로 하나의 큰 학교였습니다. 그것은 나를 위해 설립되고 운영되는 맞춤형 학교고, 나는 거기서 수많은 소중한 것들을 몸으로 배워나갔습니다. - P226

외국 작가로는 제인 오스틴, 카슨 매컬러스를 무척 좋아합니다. 작품을 전부 다 읽었습니다. 앨리스 먼로도 좋아하고, 그레이스 페일리의 작품은 몇 권 번역도 했습니다. - P278

작가 존 어빙을 만나 대화했을 때, 그는 독자와의 관계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를 해주었습니다. "이봐요, 작가에게 가장 중요한 건 독자에게 mainline을 hit하는 거에요. 말이 좀 험하기는 하지만." 미국 속어로 mainlne은 정맥주사를 맞는다, 즉 상대를 addict로 만든다는 뜻입니다. - P283

제임스 조이스는‘상상력imagination이란 기억이다’라고 실로 간결하게 정의했습니다. - P1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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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루마리를 펼치면 종대로 왼쪽에서 오른쪽으로 쓰인 텍스트 뭉치들이 연이어 눈앞에 나타난다. 독자가 이를 읽어가면서 새로운 글을 보려면 오른손으로 두루마리를 펼쳐가고 왼손으로는 읽은 부분의 두루마리를 말아야 한다. 휴지기와 리듬을 요하는 느린 춤과 같다. 독서를 마치면 두루마리는 정반대로 말려 있게 되기 때문에 다음 독자를 위해 두루마리를 되감아 둬야 한다.”


옛날 옛적, 삐삐가 최첨단 통신기술일 적. 영화는 CD도 아니고 비디오 테잎 형태로 대여점에서 빌려 봤다. 다 본 다음에는 파피루스 두루마리 처럼 다시 원래 대로 감아두어야 했다. 스트리밍 영상과는 다르게 그 시절 영화와 내용은 테잎이라는 물질과 더 가깝게 느껴졌고 때론 동일시하기 쉬웠다. 귀신 영상은 테잎에 붙어서 옮아다닐 수도 있을만큼. 공포 영화 <링>이나 테잎을 다 날려먹은 잭 블랙의 영화처럼. 영화 제목이 <Be Kind Rewind> 되감기하는 친절을 베풀어주세요, 쯤이려나? 유명 대여점의 표어도 Rewind is divine 되감기 좀 해서 반납하라고 외친다. 

두루마리 다시 감는다는 이야기에 오늘도 내 생각은 저 멀리 멀리 펼쳐지고 있다. 


마침 블럭버스터 대여점 이야기가 넷플릭스에서 나온다고 한다. 초심을 돌아보는 심정일까. 비디오 테잎 대여점들이 하나 둘 문을 닫고 한 시대가 저물어간다. 그런데 레트로 감성 자극할 뻔한 예고편은 매력이 부족한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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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23-04-24 11:0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추억의 블럭버스터!! 이젠 넷플릭스가 대세,,, 저는 비디오테이프 하니까 예전 처음 미국에 왔을 때, 스트리밍 이런 서비스가 당연히 없었던 고려쩍 이야기라, 한국 비디오 빌려보던 생각나요. 물론 되감아 돌려준 적은 없는 것 같아요.ㅠㅠ 그러고 보니까 세상 많이 좋아졌구요,, 비디오도 빌려 보기 힘들었던 힘들었던 과거를 잘 헤쳐온 것 같아 갑자기 뭉클하네요..^^;; 저도 덕분에 라떼에 빠져봅니다.

유부만두 2023-04-24 11:39   좋아요 0 | URL
저도요. 90년대라 금요일이면 한국 마트에 가서 2주쯤 지난 한국 드라마 등을 빌려봤어요. 정말 고리고쩍 같네요. 그때 깻잎 10장을 2불50 주고 사먹은 기억과 함께! 그땐 비디오 테잎을 빌려와서 보면 리와인드 되있는 게 별러 없었던듯 해요. ㅎㅎ 라떼.... 정말 손이 많이 가는 시대를 살았군요.
라로님, 새로운 생활 응원 합니다. 따로 라로님 서재에 댓글을 달려고 합니다. ^^

레삭매냐 2023-04-24 11:07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블럭버스터 비됴!

언제 그런 시절이 있었나 싶을
정도네요.

비됴 가게에 가면 자동차 모양
으로 생긴 리와인드 기계가 있
었지요 ㅋㅋ

유부만두 2023-04-24 11:41   좋아요 0 | URL
정말 기술이 사람 사는 방식을 이렇게 크게 바꿀지는 몰랐어요. CD만 해도 플로피 디스크만 해도 얼마나 대단한데 요즘은 차원이 다르죠. 그래도 종이책이나 극장 영화는 남을 거라고 믿고 싶어요.
 

<베를린 천사의 시> 도서관 장면


https://youtu.be/rnbIZ2o3gWM
사람들 사이의 검정옷은 공안 정보부원들 아님. 천사들임;;;


한스 샤로운(Hans Scharoun)과 에트가어 비스니브스키(Edgar Wisniewski)가 설계한 베를린 주립도서관을 떠올려보자. 그곳에서 빔 벤데르스는 「베를린 천사의 시의 한 장면을 찍었다. 카메라가 넓은 독서실을 지나 계단을 따라 올라간 뒤 공연장의 특별석처럼 튀어나온 곳에서 드넓은 내부를내려다보는 장면이 있다. 평행하게 정렬된 책장사이로 사람들이 책을 들고 서 있다. 또는 의자에 앉아 다양한 표정을 지으며 책에 집중하고 있다(턱을 받치고 있는 사람, 주먹으로 얼굴을 받치고 있는 사람, 손가락 사이를 프로펠러처럼 돌고 있는 볼펜 등). - P70

한 무리의 천사들이 1980년대 옷차림을 하고 아무도 모르게 도서관에 들어간다. 브루노 간츠는 넓고 짙은 외투에 목을 덮는 스웨터를입고 머리를 뒤로 묶었다. 사람은 그들을 볼 수 없기에 천사들은 자유롭게 사람들에게 다가가서 옆에 앉기도 하고 어깨에 손을 올리기도한다. 또 누군가 읽고 있는 책을 엿보기도 한다. 어느 학생의 볼펜을만지기도 하고 그 작은 물체에서 나오는 모든 말의 미스터리를 가늠해보기도 한다. 그들은 언어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시선과 얼굴을 흥미롭게 관찰한다. 그들은 사람들이 그 순간에 무엇을 느끼고 있는지,
왜 책이 그들을 몰입하게 하는지 알고자 한다.
천사들은 사람의 생각을 들을 수 있는 능력이 있다. 아무도 소리내어 말하지 않지만 그들은 사람들이 속삭이는 말들을 포착한다. 독서는 내적 소통을, 고독의 울림을 만들어낸다. 천사들에게는 놀랍고도 초자연적인 기적 같은 일이다. 사람들의 머릿속에는 독서를 통해읽은 문장들이 아카펠라나 기도처럼 울려 퍼진다.
- P71

영화의 이 장면처럼, 알렉산드리아 도서관은 중얼거리는 말로 가득했을 것이다. 고대에는 눈으로 문자를 인식하면 그 문자를 읽으며텍스트의 리듬을 탔다. 발로는 메트로놈처럼 바닥을 두드렸다. 읽기는듣기였다. 다른 방식으로 읽을 수 있다고 생각한 사람은 얼마 되지 않았다. - P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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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혜윰 2023-04-24 18: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저 영화는 정말 너무 좋아요♡♡♡♡♡

유부만두 2023-04-25 06:01   좋아요 0 | URL
전 클립들만 보고 영화 전체는 아직이에요. 이번 기회에 통독(?)을 해야겠습니다. ^^
 
Galatea: A Short Story (Hardcover)
매들린 밀러 / Ecco Press / 2022년 11월
평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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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대 “인셀” 피그말리온의 우윳빛깔 대리석 여인 갈라테아 이야기.

현실의 여자들을 혐오하며 만든 순수 완벽 여인, 그 여인이 “인간”이 되었을 때 피그말리온이 제일 먼저 한 일이 뭘까? 그는 무엇을 간절하게 원하며 비너스에게 빌었을까? 바로, 육체를 가진 여인과의 결혼! 하지만 부인이 독립적인 “인간”이라는 것은 부정한다. 그는 인생의 동반자를 원한 게 아니었다. 그저 자신의 작품을 감상하고 부리고 주인 대접을 원했다. 대리석 여인의 탄생 순간을 못잊는 나이든 조각가의 집착어린 행동은 끔찍하다. 그는 갈라테아를 윽박지르고 급기야 가둬버리는데 <누런 벽지>와 피츠제랄드도 생각난다.

여혐 신화를 다시 쓴 매혹적 단편. 결말은 아쉬움이 남지만 여성의 침묵 위의 흔한 마무리 happily ever after 를 부순 게 어딘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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레이먼드 챈들러의 <롱 굿바이>의 일본 드라마 5부작을 봤다. 2014년작. 주인공 레녹스의 장인 캐릭터는 꽤 비중있게 나오는데 소설 속 차가운 기업가가 아니라 '미래의 일본'을 비장하게 외치며 신문물 테레비 방송을 우매한 대중에게 던지는 늙은 너구리 정치인이다. 그리고 생뚱맞게 화면엔 2020 도쿄 올림픽 로고가 슬쩍 지나가며 '이제 (1960년) 올림픽도 열릴거야' 라는 기자의 나레이션이 나온다. 하지만 드라마 배경은 일본 도쿄, 소설의 1950년대 중반이라는 거. 현지화를 미묘하게 덜 해서 미쿡 셋트장 기분이 많이 나고 기모노 입은 사람은 안 나온다. 2020년이 어쩔지 이때는 몰랐지.


소설의 비밀스런 주인공 테리 레녹스에 코유키 캐스팅은 꽤 어울린다. 책임감 없고 속없는 말간 얼굴. 대신 레녹스의 얼굴 흉터와 백발은 작은 칼 자국과 불편한 다리로 바뀌었다. 도망자가 가는 곳 멕시코는 대만이 되었다. 이 드라마에서 보이는 대만에 갖는 일본 사람들의 은근한 향수와 편안함은 당혹스럽다. 얼마전 본 에키벤 만화의 대만/오키나와 편에서도 대만의 '일본 통치 시대' 건물과 기차에 대해서 (뿌듯한 얼굴에) 향수를 머금고 설명하는 일본인 캐릭터가 나온다. 이런 뻔뻔한 장면이 꽤나 많이 나와서 당황한 건 오히려 한국의 독자, 나. <롱굿바이>의 미국인 탐정이 멕시코(와 구별하지 않는 남미 여러 나라들 출신의)사람을 대하는 우월감을 일본판 드라마에서는 대만을 상대로 펼치고 있다. 예전 '일본 통치 시대'는 따뜻한 기후와 열대 난초꽃 속의 순수한 첫 사랑이다. 일본 드라마/영화의 단골 주제, 첫사랑 い, 그 좋았던 시절로는 다시 돌아갈 수 없으니 새로운 올림픽의 새일본으로 나아간다는 결말은 아무리 생각해도 징그럽다. 과거를 잘 정리하고 결산을 해야지 미래도 있는 거라고. 근데 어제 또 우루루 야스쿠니 신사에 갔더라?

욕하면서 완주한 일본판 드라마를 챈들러와 분리할 수 밖에 없었던 더 큰 이유는 바로 주인공 탐정 (아사노 타다노부, 극중 이름은 까묵어뿟다) 때문이다. (그렇다고 내가 소설의 말로에게 백점을 준 건 절대로 아니다. 언젠가 그를 향한 나의 욕 바가지 페이퍼를 쓰려고 벼르고 있다) 일본인 주인공은 껑충한 키의 의리있는 매력남 말로 보다는 여느 일본 탐정 드라마의 다부지고 끈질긴 명탐정이었고 분위기만 멋진 사무실 구석에서 정성스레 사이폰 커피를 만드는 그는 ...그래, 하루키 상이었다. 파스타도 만들 것 같고. 키나 외모가 별로인데 여자들이 접근을 하고, 심지어 대부호의 맏딸은 탐정더러 女子し(온나타라시, 여자 꼬시는 매력있는 사람)라고 말한다. 정말 하루키 주인공 같네. 하루키의 소설 롤모델이 챈들러였다더니 겹치는 그림이 꽤 많이 나온다. 바에서 남녀가 함께 마시는 김릿의 색은 영롱하고 배경으론 재즈가 흐른다. 사람들이 하나, 둘, 셋 죽는다. 탐정은 담배를 아주 많이 피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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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3-04-22 12: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다부지고 끈질긴 명탐정인데 ‘여자 꼬시는 매력‘이라니ㅋㅋㅋ 커피도 잘 내린다고요? 하루키가 떠오를 수 밖에 없는데요 ㅎㅎㅎㅎ

유부만두 2023-04-23 11:19   좋아요 0 | URL
네 설거지나 청소도 바지런하게 합니다. 하루키에요 딱. (마라톤은 안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