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47/400. 마흔아홉 살 (박완서)

 

박완서 작가의 단편은 무섭다. 음침한 내 속 마음을 혼자서만 알고 덮고 있으려 했는데 다 꺼내서 글자로 따박따박 옮겨놓아서 섬찟, 하고 놀라면서 읽었다. 이것이야말로 작가의 힘, 이라고 생각했다. 마흔 아홉 살 나이가 내게서 그리 멀지 않아 우울한 마음인데다가 동창들 사이의 대화나 봉사회 모임의 대화가 너무 적나라해서 다시 놀랐다. 그중 제일은 소설 마지막, 복부 비만 묘사였다. 흑.

 

세월이 빠져나간 자리의 허망함이여. 그 여자는 요새 부쩍 더해진 식탐이 걷잡을 수 없이 도지는 걸 느꼈다. 조금씩 같이 먹은 줄 알았는데 김밥과 순대는 거의 그냥 남아있었다. 그 여자는 그 소박하고도 느글느글한 것들을 짐승같은 식욕으로 먹어치우고 인삼차를 한 잔 더 시켰다. 금년부터 치수를 28로 늘려 입었는데도 바지 허리는 만복을 이기지 못해 짤룩하게 뱃살과 허릿살을 갈라놓고 있었다. 명치가 등에 붙을 듯이 날씬하다가도 생명만 잉태했다 하면 보름달처럼 둥글게 부풀어오르던 배는 이제 두꺼운 비계층으로 낙타 등처럼 확실한 두 개의 구릉을 이루고 있었다. 허리의 후크를 풀자 역겨운 트림이 올라왔다. 자신이 비곗덩어리에 불과한 것처럼 느껴지면서 메마른 설움이 복받쳤다. 위선도 용기도 둘 다 자신이 없었다. 울고 싶은 갈망과는 동떨어진, 여자들이 찧고 까불고 비웃는 소리가 귓전에서 잉잉댔다. (108)

 

 

148/400. 후남아, 밥 먹어라 (박완서)

 

이번 소설도 마찬가지. 세월이 흐르고 나이 먹어가면서 내가 베푸는 것도 무언가 과거의 허전함을 그리고 갈증을 메꾸려는 행동이 아니었나, 생각했다. 남들보다 피붙이가 먼저 부러워해주고 살짝 시기도 해주어야 잘살고 있나보다 싶은 마음. 그런데 알고 보니, 존재감 없는 후남이, 앤 여사의 호적 이름을 큰 소리로 부르며 밥 먹어라, 했던 엄마의 목소리와 밥 냄새에 울컥 무너진다. 박완서 작가의 단편은 무섭다. 다 들켜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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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몽 2015-04-09 19: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박완서님 글 저도 너무 좋아합니다.
어쩜 그리 공감이 가고 재미있던지..

유부만두 2015-04-11 20:50   좋아요 0 | URL
정말 그래요. 전 나이가 들어가면서 박완서 작가님 책을 더 좋아하게되었어요.

라로 2015-04-11 06:3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유부만두님 글도 때론 박완서 작가님 글처럼 그렇게 잘 표현하시는데!!진짜로 저 자주 감탄해요!!^^

유부만두 2015-04-11 20:50   좋아요 1 | URL
ㅎㅎ 무슨 과찬의 말씀을~
 

146/400. 안주 (미야베 미유키)

 

기담을 들으며 청자와 화자 둘 다 위로를 얻는다. 얼마전 읽은 피리술사의 전편이다. 제목은 暗獸의 일본어 발음표기로 술안주가 아니었다;;; 빈집에서 사람을 그리워하며 생겨난 말랑말랑한 작은 존재는 나무에 올라 달도 보고 우우우, 아버버 소리로 노래도 부른다. 사람이 내뿜는 기氣로 자신이 스러지는데도 몸을 내던져 할머니를 구하기까지한다.  일본 애니영화 센과 히치로의 행방불명에서 나온 검은 덩어리의 아기 버전이 이 안주일지도 모른다.

 

이번 책은 살아있는 사람의 시기, 질투, 욕심이 재앙의 원인이 되는 경우를 다루고 있다. 4편 중 두 편에 그나마 사람이 아닌 귀신/혼령이 등장하는데 이것들 마저 어린아이의 모습으로 나온다. 그러니 달래고 이해시킬 수 있지만 어른 인간들의 질투와 욕심은 다스리기가 어렵다. 모든 비극은 여기에서 시작한다. 심심풀이로 읽으려 했는데 한밤중 책을 덮고나니 저 방구석에 웅크리고 있던 나 자신의 욕심을 알아보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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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4-11 06: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술안주인 줄 알았어요!!ㅋㅎㅎㅎ 전 앞으로 유부만두님 올리신 리뷰 보고 아는체도 하고, 읽을 책도 고르고 그럴까봐요~~~ㅎㅎㅎㅎ
검은 덩어리라면 영어로는 no face 라고 불리는 그것 말인가요??? 제 아들이 한동안 엄청 무서워 했더랬죠. 큰아들. ㅋ

유부만두 2015-04-11 20:52   좋아요 0 | URL
저 영화 속의 no face 는 무서웠지만 `안주` 는 짚신크기의 작은 ... (동물도 원혼도 아닌) 존재에요. 심지어 귀여워요;;;

라로 2015-04-11 06: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네요!! 밑에 올리신 사진 보니까 no face. 저도 좀 별로였어요. 사실. ^^;;
 

 

 

 

 

 

 

 

 

 

 

 

 

 

"조운선 침몰 사건, 백탑파 미스터리 "
이야기는 '사고'에서 시작한다. 전국의 조운선이 동시에 침몰하는 기이한 사고가 발생했다. 조선 명탐정 김진은 동료들과 함께 임금의 은밀한 어명에 따라 침몰 사건의 진실을 향해 접근한다. 그리고 조운과 세곡을 둘러싼 이권과 탐욕이 무고한 생명을 숱하게 앗아간 것이라는 사건의 실체적 진실을 향해 다가간다. 김진과 함께 사건을 해결하던 이들 홍대용, 이명방 등은 안개가 가득한 바다 위에서, 이 사건의 전모를 명백히 밝히기 위해 조운선과 자신들의 운명을 하나로 엮어 위험한 함정을 파게 되는데.  (알라딘 책 소개글)

 

과적이 침몰 원인이고 선원들은 전원 살아남았다. 게다가 부정부패가 원인이 된 조직적인 사건이었다. _ 김탁환 (창비 라디오 책다방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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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4-11 06:4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런 일은 늘 있었군요,,, 과적!!! 새월호 사건은 정말 필연이었을까요!!ㅠㅠ

유부만두 2015-04-11 20:53   좋아요 0 | URL
부정부패는 언제나 있나봐요..
 

"그러고 보니 스티븐스 씨, 당신이 대체 어떤 책을 읽으시는지 궁금해지네요."

"그냥 책이오, 켄턴 양."

"그건 알아요, 스티븐스 씨, 과연 어떤 책이냐, 그게 제 관심사죠."

고개를 쳐든 나는 캔턴 양이 나를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았다. 나는 얼른 책을 덮어 품에 끌어안고는 벌떡 일어섰다.

"이봐요, 캔턴 양." 내가 말했다.

"프라이버시를 존중해 달라고 말하지 않을 수 없군요."

"책을 가지고 뭘 그렇게 부끄러워하세요, 스티븐스 씨? 난 뭔가 난잡한 내용이 아닐까 의심스럽군요."

"캔턴 양, 그게 말이나 됩니까? 당신 표현대로 '난잡한' 것이 어찌 우리 나리 서가에 꽂혀 있을 수 있겠소?"

"제가 비록 베짱이 없어서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학구적인 책 중에도 지극히 난잡한 대목들이 담긴 게 많다고 들었어요. 자, 스티븐스 씨, 뭘 읽고 계시는지 한번 보게 해 주세요."

"캔턴 양, 부탁이니 날 혼자 내버려 둬요. 모처럼 잠시 여가를 즐기는 사람을 이렇게 쫓아다니다니 있을 수 없는 일이오." (204)

 

실랑이 끝, 켄턴 양은 책을 빼앗는데....

 

 

그녀가 손을 내밀더니 내 손아귀에서 가만가만 책을 빼내기 시작했다. 그녀가 그러는 동안 나는 외면하고 있는 게 좋겠다고 판단했지만 그녀가 워낙 바짝 붙어 있어, 고개를 다소 부자연스러운 각도로 비튼 후에야 시선을 돌릴 수 있었다. 캔턴 양은 아주 천천히, 내 손가락을 한 번에 하나씩 풀어 내며 책을 차지해 가고 있었다. 그 과정이 내게는 아주 긴 시간처럼 느껴졌는데, 그동안에도 나는 어렵사리 그 자세를 계속 유지하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머나, 스티븐스 씨, 별 창피할 것도 없는 책이잖아요. 감상적인 연애소설일 뿐인데."

(205-206)

 

하, 이 달콤한 장면에서 당황한 스티븐스 씨의 얼굴이 또 그의 코앞에서 장난하는 캔턴 양의 장미꽃 향수가 떠오른다. 그리고 이어지는 스티븐스 씨의 변명. 연애 소설은 훌륭한 어휘 구사력 습득을 위하여 읽는 것일 뿐이라고. 연애소설의 황당하고 감상적인 줄거리는 시간낭비처럼 느껴지지만, 자신은 원칙을 세워두고 읽는다는 그. 아, 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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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4-08 15: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이부분에서 무슨 책을 읽고 있는지 궁금해서 죽는 줄 정도는 아니지만 답답했다는요~~~ㅋㅎㅎㅎㅎ 가즈오 이시구로 넘 얄미웠어요~~ㅋㅎㅎㅎ 독자를 갖고 놀아~~~~^^;;;

유부만두 2015-04-08 17:27   좋아요 0 | URL
그쵸 그쵸.

막 변명하고 부끄러워하는 스티븐스 씨가 상상되서 우습기도 했고요.
 

145/400. 남아 있는 나날 (가즈오 이시구로)

 

처음부터 장애물이 있던 책이다. 저자가 일본인이라니, 그런데 영국의 전통 있는 가문의 집사가 화자라니. '섬긴다'라는 말과 '주인님'이라는 말이 자꾸 걸려서 이야기 속으로 빨리 들어설 수가 없었다. 일본 출생의 영국 작가의 눈으로 제2차 대전중 벌어진 영국귀족의 집사 이야기를, 그 집사의 프로페셔널한 눈으로 돌이켜본 인생과 역사를 나는 어떤 눈으로 읽어야하나, 감이 잡히지 않았다. 아주 천천히 화자의 얼굴이 영국인, 그것도 '품위'있는 신사들의 신사라고 자부하는 깨끗한 오십대 남자의 얼굴이 보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 사람이 허당이다.

 

다른 이들이 다들 보는 사실을 이 사람만 못 보고 (혹은 못 본 체하고) 지나간다. 자신의 개인적 사무라고 미뤄두었던 아버지의 임종, 사랑스런 여인의 구애와 이별도 지나고 나서야, 아, 그때 내 가슴 속엔 어떤 감정이 있었던가 곰곰 생각해볼 뿐이다. 자신이 모시는 주인이 세계사의 축에 근접했었기에 자신도 벅찬 긍지를 느꼈다고 결론낸다. 하지만 그 역사의 축이 얼마나 잘못 돌아갔는지, 지금도 그는 인정하기 힘들다. 

 

이 답답하고 어이없지만, 겉모습만은 완벽한 귀족인 아저씨는 지난날을 돌아보며 처음 휴가에 나섰다. 주인을 위해선 아주 작은 불편함을 느낄 가능성도 이삼중으로 계산해서 발을 놀리는 사람이, 자신을 위해선 외출복도 장만하지 못했고, 자동차의 냉각수나 연료도 미리 챙기질 못한다. 그리고 남들에게서 받는 환대에 어쩔줄 몰라한다. 모른다. 이 남자의 동사는 바로 '모른다'로 입을 닫는 것일까. 책임을 지지 않는다. 어쩌면 '나는 없다'.

 

그러다 이 남자도 깨닫고, 알게되고, 가슴이 찢어지는 경험을 한다. 그는 자신이 실수했다, 고 후회의 말을 할 수도 없다. 그는 그저 충직한 하인으로 믿고 따랐을 뿐. 이제 그는 바쁜 일로 서둘러 자리를 뜨는 대신, 바로 서서 그 여인의 눈에 맺힌 눈물을 본다(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가 울고 있지 않았을까). 하루 중 제일 좋은 저녁때, 전등이 들어오는 해변에서 하루쯤 더 머물까, 생각하는 이 허당, 혹은 허깨비 남자는 이제라도 '알게' 될까. 자신의 이름이 스티븐스 말고 그 앞에 퍼스트 네임도 있다는 걸. 격조있는 농담이 실은 아주 썰렁해서 웃기는 하지만 아주 재미있지는 않다는 걸. 그런데 묘하게 재미있는 이 소설이 그를 참 쓸쓸하게 그리고 있다는 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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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로 2015-04-07 15: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리가 늘 잘 되어 있는 유부만두님의 리뷰!!

유부만두 2015-04-07 18:52   좋아요 0 | URL
늘 칭찬해주시는 아롬님!!

라로 2015-04-07 15: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근데 위에 글에는 댓글을 못 달아요????? 댓글 허용하지 않는다고???ㅠㅠ

유부만두 2015-04-07 18:53   좋아요 0 | URL
아, 그런가요? ... 지금 고쳤으니 댓글 달아주셔요? ^^

북극곰 2015-07-01 09: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가 엄청 좋아하는 책! 젊은 애들 연애이야기도 간질간질 달달해서 좋지만, 중년을 넘긴 이 사람의 연애는 그와는 비교할 수 없게 아주 가슴이 아리더라구요. ^^

유부만두 2015-07-04 15:38   좋아요 0 | URL
아, 북극곰 님께서도 이 책을 좋아하셨군요! 맞아요, 스티븐스 씨의 연애는 너무 쓸쓸해서 가슴이 아렸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