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1/400. 제라늄 (플래너리 오코너)

 

<풍성한 스포일러를 마련했습니다>

 

좋은 사람은 찾기 힘들다, 고 단정했던 작가. 사람 목숨은 질기기도 하지만 농담이나 거짓말처럼 사라지기도 하는 걸 보여준 작가. 설마, 그래도, 차마...는 없는 작가 오코너의 단편집을 읽기 시작했다. 지난 충격에서 배운 것이 있어서 마음을 단단히 먹고 문장을 읽어 내려갔다. (아, 나는 왜 오에 겐자부로의 충격이 채 가시기도 전에 오코너를 만났을까. 어깨와 양 손에 긴장으로 힘이 들어갔다) 도시의 아파트 6층에 사는 딸네 집으로 이사온 시골 할아버지. 딸은 멀리 시골에 혼자 사는 부모님을 몰라라 할 수가 없는 자식된 도리로 아버지를 모셔왔다. 건너편 건물의 창가에 매일 오전마다 내놓는 제라늄 화분을 보는 낙으로, 그 제라늄에서 영감은 고향 마을의 친구들, 자신의 친구겸 종처럼 부리던 흑인 청년과 동네 할머니들을 떠올린다. (흑인의 등장만 제하면 우리나라 소설이라고 봐도 될 만큼 익숙한 설정이다. 하지만 이 익숙한 설정 속에서 허둥대는 더들리 노인의 심정을 따라가는 오코너는 절대로 익숙한 문장을 내놓지 않는다.) 도시는 노인에겐 너무 복잡하고 좁고 낯설다. 게다가 옆집에는 (지하실이 아니라) 바로 벽 하나를 사이에 두고 흑인이, 좋은 옷을 입고, 잘 손질된 깨끗한 손톱을 가진 흑인이 산다. 심지어 이 흑인은 백인 노인의 등을 두드리며 '어르신'이라 부르기 까지 한다. (영어로는 덜 공손한 표현이었으리라) 모든 게 무섭고 충격인 이 백인 더들리 노인에게 층계를 내려갔다 다시 올라오는 길은 사냥철의 산등성이를 오르는 것보다 버겁다. 아, 그리고 무슨 계시처럼 건너편 창가의 제라늄 화분은 저 바닥으로 떨어져 뿌리를 하늘로 쳐들고 깨져버렸다. (여기서 더들리 노인이 추락하고 말 것만 같아서, 큰 숨을 한 번 몰아쉰다. 아니면 그 이웃이 범죄를 저지르던가, 흑인이 실은 살인자일 수 도 .... 이런 최악을 준비하면서 책을 읽게 만든 건 오코너, 당신이에요) 다른 공간, 다른 시절 속, 화분에 옮겨 심은 제라늄 같은 더들리 노인은 잘 살아낼까. 아니면 매정한 이웃의 화분 처럼 깨져버릴까.

 

한번은 딸이 영감을 데리고 장을 보러 갔는데 그가 너무 느렸다. 그들은 '지하철', 그러니까 동굴 같은 땅속을 달리는 철도를 탔다. 사람들은 열차 밖으로 흘러넘쳐서 계단을 오르고 길거리로 나갔다. 또 길거리에서 계단을 내려가 열차를 탔다. 흑인, 백인, 황인이 수프 속 채소처럼 뒤섞여 있었다. 모든 것이 부글부글 끓었다. 열차들은 터널을 나와 운하를 달린 뒤 갑자기 멈춰 섰다. 사람들은 타는 사람들을 밀치며 내렸고, 시끄러운 소리가 울리자 기차는 다시 떠났다. 더들리 영감과 딸은 그런 열차를 세 번이나 타고서야 목적지에 도착했다. 그는 사람들이 왜 집 밖으로 나오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혀가 위장 속으로 미끄러져 들어간 것 같았다. 딸은 영감의 소매를 잡고 사람들 틈을 지나갔다. (12-1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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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은 참으로 느릿느릿 더디기만 했다. 시간이 전혀 움직이지 않잖아, 하고 나는 안절부절못하면서 생각했다. 가축들이 그러하듯, 시간 또한 인간의 엄격한 감독 없이는 꿈쩍도 않는다. 시간은 말이나 양처럼 어른의 호령 없이는 한 걸음도 움직이지 않는다. 그리고 우리는 시간의 웅덩이 속에서 교착 상태에 있다. 할 일이 아무것도 없다. 하지만 아무 일도 하지 않고 그저 갇혀 있는 것만큼 힘겹고 초조하고 뻣속까지 피로감에 찌들게 하는 일은 없다. (100)

 

그들은 우리에게 발치에서 날아오르는 새 같은 공포를 일으켰으나 아직은 골짜기 저편, 바리케이드 뒤로 엽총을 그러안고 우리를 거부하는 어른들, 외부의 비열한 어른들보다는 우리에게 더 가까웠다. 밤이 와도 누구 하나 우리를 부르러 죽음의 거리에서 달려 나오는 상냥한 목소리를 가진 사람들이 없었으므로, 우리는 서로 어깨동무를 하고 입을 꾹 다문 채 참으로 오랫동안 흙을 계속 밟아 다졌다. (115)

 

 

"알아? 너 같은 놈은 어릴 때 비틀어 죽이는 편이 나아. 칠푼이는 어릴 때 해치워야 돼. 우린 농사꾼이야, 나쁜 싹은 애당초 잡아 뽑아버려." (228)

 

 

나는 갇혀 있던 막다른 구렁텅이에서 밖으로 추방당하는 참이었다. 그러나 바깥에서도 나는 여전히 갇혀 있을 테지. 끝까지 탈출하기란 결코 불가능하다. 안쪽에서도 바깥쪽에서도 나를 짓이기고 목을 조르기 위한 단단한 손가락, 우람한 팔은 끈질기게 기다리고 있다. (231)

 

 

그러나 나는 흉포한 마을 사람들로부터 달아나 밤의 숲을 내달려 나에게 가해지는 위험을 피하기 위해 맨 먼저 무엇을 해야 좋을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나에게 다시 내달릴 힘이 남아 있는지조차 알 수 없었다. 나는 녹초가 되어 미친듯 분노하며 눈물을 흘리고 있는, 그리고 추위와 굶주림에 떨고 있는 어린아이에 불과했다. 불현듯 바람이 일고, 그것은 아주 가까이까지 다가온 마을 사람들의 발소리를 실어 왔다. 나는 이를 앙다물고 몸을 일으켜 한층 캄캄한 나뭇가지 사이, 한층 캄캄한 풀숲을 향해 뛰어들었다. (232-2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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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400. 새싹 뽑기, 어린 짐승 쏘기 (오에 겐자부로)

 

작년에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처음 읽었다. 선한 얼굴의 작가 사진과 '만엔 원년의 풋볼'이라는 소박한 제목에 속았다. 첫 장부터 정신없이 얻어맞는 기분이었던 그 장편소설은 덮으면서는 무슨 감상을 말하기가 벅찰 정도의 감동(이라기엔 더 무서운 기분)을 남겼다. 오에 겐자부로가 왜 반폭력주의자로 불리는지 어렴풋이 이해는 하겠는데, 그의 소설 읽기는 역시나 힘겨웠다.

 

폭력을 고발한다는 소설이나 영화를 보면, 복수나 응징을 내세우며 독자나 관객이 가해자의 편에 서서 칼과 총을 휘두르게 되는 경우가 있다. 심한 경우,'악인'과 동행하는 독자는 가해자의 눈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피해자를 (어쩔 수 없이) 짓밟게 된다. 하지만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에서는 살짝 다른 기분이 든다. 그의 소설들 역시 폭력이 넘치고 피와 상처의 묘사가 계속 이어진다. 그런데 책을 읽는 나는 '때리는' 입장이 아니라 '맞는' 인물에 더 가까이 서 있고, 그의 겁에 질린 눈으로 바깥 세상을, 그리고 어느새 바로 내 앞에까지 쳐들어 온 무자비한 전쟁의 위협을 느끼게 된다.  피가 흐르고 상처가 벌어지고 죽음이 닥치는데, '나'는 속수 무책이지만 애써 '아니야!'라고 소리지른다.

 

'풋볼'은 고립된 산속 마을에서 벌어지는 일이고 이번에도 겨울 산속 마을에 닷새 동안 고립되는 소년들의 이야기다. 얼핏 '파리대왕'을 떠올렸지만 이 소년들은 자신들 무리 안의 서열 다툼 보다는 그들만이 남겨진 상황에서 살아남기에 더 집중한다. 채 어른이 되기 전인 소년들이 새사냥을 하고, 버려진 개를 거두고, 빈집을 터는 일은 그들이 당연히 해야할 가장 자연스러운 일인 것만 같다. 하지만 돌아온 어른들은 끔찍한 일을 벌이고, 아이들에게 비겁한 거래를 제안한다. '풋볼'에서 처럼 마을 외곽의 조선인 부락의 소년 '리'는 소설의 배경이 말하는 이중의 피해자의 모습으로 등장한다.

 

'풋볼' 만큼이나 불편하고 섬뜩하고 무서운 이야기인데, 왜 그랬을까, 지저분하고 잔인한 장면의 묘사가 아름답게 느껴지기도 했다. 역시 노벨상 수상 작가의 힘인가. 제목이 말하는 '새싹 뽑기'는 한가로운 농촌의 정경에 대한 것이 아니라 늙은 촌장이 소년을 협박하며 하는 표현이다. 멋스러운 양장 표지와 다시 한 번, 인자한 오에 겐자부로의 사진에 속았지만, 후회는 않는다. 정신없이 무자비한 전쟁의 속으로 던져진 다음, 그 안에서 작가의 인간에 대한 믿음을 보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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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장소] 2015-03-04 2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 이 작가의 책을 사둘껄..후회한다니까요..ㅠㅠ;

유부만두 2015-03-05 10:02   좋아요 1 | URL
그런 책이 저도 많아요....

오에 겐자부로는 정말 착하게 생겼잖아요... 주위에서도 `좋다`고만 해서 무방비 상태로 책을 읽었는데, 충격과 공포 속에서 ... 그래도 문장이나 이야기가 좋았어요. 강하게 두들겨 맞는 느낌이지만, 오에 겐자부로는 훌륭한 작가에요.

[그장소] 2015-03-05 10:1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에 겐자부로 책이..있으신가봐요..부럽네요.^^
일본 문학을 이제 막 시작하는 병아리 수준이다 보니..너무 얕아요. 대출해본 책들이 더 많고..사서 볼걸..후회하죠..뭐~.
어쩐지..지금 책값이나 그때나 물가변동을 보면 그게 그건지도 모르는데.. 손해보는 느낌인지..어이없죠?

유부만두 2015-03-05 17:52   좋아요 1 | URL
저도 오에 겐자부로의 소설을 작년에야 처음으로 읽었어요. 저도 병아리에요~
도서정가제 실시 이후, 구간을 사게될 땐 저도 책값에 망설이게돼요.... 어쩔 수 없나봐요. ^^

[그장소] 2015-03-05 18: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째..정가제 이후 책욕심은 더 불타버리는
이상 현상이..생겼어요.뭐 언제 오를지 모른다. 그런 생각이 드는 건지도 모르겠고요.
후회는 이미 충분히 했다는 자괴감이..충동을
부추키는 역도 함께말이죠..
 

108/400.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 (김연수)
옛 연인이 보낸 이메일은 십 년 전 두 사람이 로스코의 벽화를 보고 난 후 들렀던 카페와 옛 노래 그리고 그 노래를 들은 어느 일본인 이야기를 전한다. 낯설고도 친숙한 그 옛 일본 노래를 찾아 듣다가 오지은의 노래가 생각났다. 아련한 느낌. 여기, 그곳, 지금, 과거, 나, 너 그리고 삶과 죽음의 붙잡기 어려운 꼭지점들이 섬세한 노랫가락으로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끊.어. 진. 다.



109/400. 아이를 찾습니다 (김영하)
부모들이 꾸는 가장 끔찍한 악몽. 차마 입에 올릴 수도 없는 사고.

대낮에 눈 깜짝할 새 아이가 사라진다, 그리고 생활은 무너지고 시간은 흐른다. 십일 년 후, 중학생 나이가 되어 돌아온 아이는 모습도 남이고 사투리 억양도 남이 되어버렸다. 이 무섭고 잔인한 소설이 어찌 끝나는지 알아야겠기에 책을 덮지도 못하고 끝까지 읽긴 했는데... 아직 내 심장은 미치도록 불안하다. 이런 불행은 그냥 갑자기 뒷통수를 후려치듯 오는구나. 무섭다. 이런 내용인줄 알았다면 읽지 않았을텐데. 무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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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의다락방 2015-03-03 14:3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예전에 오지은의 날 사랑하는게 아니고 라는 노래에 빠져 무한반복하던때가 생각나요. 오랜만에 들어봐야겠어요^ ^

유부만두 2015-03-03 15:35   좋아요 0 | URL
아~ 저도 좋아하는 곡이에요!!

라로 2015-03-03 15: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단편 두 편을 읽으신 거지요???^^

유부만두 2015-03-03 15:34   좋아요 0 | URL
네;;

라로 2015-03-03 15:42   좋아요 0 | URL
지난 번 댓글에 단편,,, 이라고 하신 글이 생각이 나서요~~~ㅋㅋ
그래도 책 넘 많이 읽으세요!!! 전 어제 남편이 북플 하는 거 보다 책 읽는 게 좋다는데,,, 북플하면서 책 더 안 읽게 되었다는 끔찍한 이야기~~~~ㅠㅠ

2015-03-03 17:55   URL
비밀 댓글입니다.

라로 2015-03-03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지은?? 찾아서 들어볼게요. 김영하의 소설은 끔찍한 얘기군요~~ㅠㅠ 먼저 읽으셔서 알려주시니 감사합니다!!

유부만두 2015-03-03 17:53   좋아요 0 | URL
오지은 노래 좋아요...

김영하 단편은 무시무시했어요.. ㅠ ㅠ
하지만 제가 아롬님의 독서를 미리 차단하는 게 아닐까, 걱정되네요.
제가 아롬님의 독서.기미상궁, 인가요? ^^ ;;
 

시로이 하카 (하얀 무덤)

작가 김연수의 텀블러에 올라온 단편 BGM

읽Go 듣Go 달린다 — 이번 문학동네 겨울호에 ‘다만 한 사람을 기억하네’라는 소설을 발표했습니다.


http://yeonsukim.tumblr.com/post/10434461436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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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부만두 2015-03-02 23: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듣다보니 오지은 노래 생각이 나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