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기>는 인물별로 구성이 되어 있어서 읽다보면 중요 인물들은 서로의 이야기에 걸쳐 두 번 이상 출연한다. 사마천의 사기를 만화로 정리한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사기>는 시간 순서로 풀면서 열기편에서 제후 장상들을 우정 출연 시키(며 복습하)는 방식을 취한다. 


예전에 고우영 삼국지를 보면서 잔인하고 선정적인 표현에 거부감이 들었는데 요코야마 미츠테루는 더 묵묵한, 혹은 무뚝뚝한 그림인 편이다. 유방의 침소 장면도 운동경기 같기도, 그저 덩어리로만 보인다. 수많은 참형, 살해, 복수 장면도 (흑백 만화라) 그저 검은 먹물로 (하지만 그 참담함은 담아서) 보여준다. 더해서 여러 고사성어의 유래를 설명하고 전쟁터의 풍광 묘사 (특히 함곡관과 대협곡, 잔도)는 더할 수 없이 훌륭하다. 나는 역사서라기 보다는 '이야기 책'으로 사기를 대하고 있는데 요코야마 미츠테루는 '인간'에 더 집중하고 있다. 인간은 같은 실수를, 범죄를, 기교를 부리고 엎어지고 ... 다시 일어선다. 


하지만 단점이라면 인물들이 서로 너무 닮았다. 그 사람이 그 사람 같아서 <사기>를 처음 접하는 사람에겐 추천하지 않는다. 박시백 작가의 <조선왕조실록>의 다채로운 인물 묘사가 얼마나 대단한지 다시 생각하게 되었다. 


당나라 까지 읽고 덮어둔 <십팔사략>을 다시 이어가야겠다. 언젠가 완성될 이중톈 중국사도 기다리고 있다. 그 전에 막내의 이번 학기 역사 시험 범위를 함께 읽기로 했다. 가능하면 요코야마 미츠테루의 또다른 걸작 <요술공주 샐리>를 찾아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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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10-25 13: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이 책 정말 괜찮은데요. 저희집에서도 만화 삼국지가 그렇게나 인기가 많았다고 하지요.
사기 책 좌르르 놓으니 용그림 너무 근사하네요. 문학동네 배경도 멋지구요!!!

유부만두 2020-10-26 10:14   좋아요 0 | URL
책 정렬을 제대로 하지 않아서 용 등뼈가 부러졌....

이 책 괜찮았어요. 사기 완역본도 많고 만화책으로도 나와있지만 복잡하지 않게 역사 이야기를 짚어주거든요. 특히 후반부의 초한지 이야기가 흥미진진하지요.

만화 삼국지. 저희집에서도 인기죠. 책정리할 때 버리려 했지만 막내가 반대해서 갖고 있어요. 그런데 전 삼국지 보다 초한지가 더 재미있는것 같아요.

비연 2020-10-25 14:2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기>를 읽고 사기꾼을 생각한 저는... 멘탈이 이상한 걸까요. 이 책 읽고 싶네요 ㅎㅎ

유부만두 2020-10-26 10:15   좋아요 0 | URL
ㅋㅋㅋ 비연님 코드가 제 코드랑 맞습니다.
검색에도 사기, 넣으면 ‘사기꾼‘ 관련 소설이 많이 떠요.
요코야마 미츠테루 ‘사기‘ 괜찮습니다. 그 어렵고 복잡한 역사서를 이리 정리해 놓은 작가야말로 ‘사기캐‘ 죠.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읽다가 연상작용으로 읽었다. 애슐리. 하지만 김성중 작가의 단편에서는 여성형 이름으로 쓰인다. 작가 이름도 어쩐지 의미를 더하고.


주인공은 자신의 성 정체성에 대해 고민한다. 자신이 남자의 몸을 가지고 있지만 여자라고, 아니 남자는 아니라고 여기고 어머니께 상의한다. 어머니는 다정하게 그럴 수 있다고, 이미 알고 있다고 말해주며 만약의 경우 '수술' 할 경비까지 마련해두었다고 알려준다. 하지만 어머니는 주인공이 십대일 때 돌아가신다. 성 정체성을, 혹은 자각을 이리 저리 방황하는 것과 동시에 지구에도 변동이 일어나 시간이 멈춰버린다. 그리고 인간들은 시간과 인생, 삶의 정체성에 혼란을 겪는다. 이제 인간은 무한인 존재가 되어버렸다. AI나 기계가 인간보다 단명한 세상에서 주인공은 자신의 정체서에 대해 계속 '퀘스쳐닝'한다. 그 퀘스쳐닝에 대한 언어에 대한 퀘스쳐닝도 함께. 그리고 지구는 다시 ...  


김성중 작가의 전작, 역시 판타지와 sf 소설을 흥미롭게 읽었는데 이번 소설은 의외로 무겁고 자꾸 되짚어서 읽게된다. 성정체성을 정해서 파트너를 만난다, 로 줄여버리면 편편해지는 줄거리이지만 실은 주인공 에디 혹은 에슐리 (방점은 '혹은'에 찍혀있지 않을까)에게는 생존의 모든 문제이다. 그 고민의 깊이가 잘 와닿지가 않아서 아쉽다. 언뜻 천선란 작가가 떠오르기도 했는데 sf 소설에서 넓혀가는 것들 중에는 우리가 사는 곳, 시간, 종족, 물질성, 그리고 성 정체성도 포함된다는 생각이 든다. 단편 안에서 소화되기에는 너무 많은 것들이 들어있어서 좀 더 길게 풀었다면 어땠을까 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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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세랑, 테드 창으로 시작해서 김초엽, 문목하를 거쳤으니 요즘 젊은 작가들의 sf 소설이 더 궁금했고 읽을 자신이 생겨서 드디어 천선란 작가의 단편집을 읽었다. 제목 부터 '물질'이 들어가서 언뜻 '빛과 물질에 관한 이론'과 '깨지기 쉬운 것들의 과학' 이 생각났다. 제목이 과학 같은 소설들.


8편의 이야기들이 그리는 세상은 미래의 지구, 우주, 다른 행성이다. 다 망쳐버린 지구에서도 사람들은 고달프지만 여전히 애닲게 사람의 온기를 찾는다. 너와 나의 경계, 옳고 그름, 같고 다름, 여자 남자의 기준은 하찮다. 표제작인 <어떤 물질의 사랑>은 배꼽도 없고 성별도 정해지지 않은 주인공이 성장해 나가는, 여러 사랑, 경계 없는 사랑을 겪으며 자라나는 이야기다. 후반부엔 초반의 생동감은 줄고 작가의 염려 어린 설명이 많았지만 그만큼 신기하고 사랑스러운 이야기다. 사랑하는 대상에 따라 '바뀌는' 성별이라니. 그걸 심드렁하게 말하는 엄마라니. 표지에서 보여주는 '넌 알에서 태어났어' 이 말을 어떻게 믿으라는 건지. 그래도 좋아. 


sf에 빠지지 않는 AI 이야기로 자동차 사고 시뮬레이션용 Dummy 이야기 <마지막 드라이브>가 따뜻하고 인상 깊었다. 더미도 사랑을 합니다. 임신 중단 이야기 <너를 위해서>는 자녀 출산을 준비하는 태도를 조신한 남성에게 묻고 있는데, 자녀의 미래를 위해서 인생을 내 놓는 게 지금 누군가 생각하면 찬물 한 잔을 마시게 된다. 


모든 이야기에는 사랑하는 이들이, 여자 친구를 기다리고 보호하는 여성, 딸을 찾는 엄마, 여동생을 구하려는 언니, 치매 엄마를 보살피는 딸 등 여성들끼리의 사랑이 주가 된다. 의도적으로 남성을 배제했거나 우매한 적으로 만드는 설정도 있지만 억지스럽지는 않다. 다만 작가의 애착어린 개입이 드러날 때가 많은데, 그래서 결말이 아무리 끔찍하게 보이더라도 어쩐지 희망을 바라게 된다. 비극이고 절망인데 그 절망을 작가가 반쯤 막아준 덕분이다. 네, 사랑을 믿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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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10-12 19:5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10-12 23:07   URL
비밀 댓글입니다.
 

표지가 웃기다고 생각했다. 외출하고 헛되이 지치느니 '고전' 속 여자 등장인물들을 만나고 수다를 떠는게 낫다, 는 표지의 글에 어울리려면 누가 저런 브래지어 차림으로 침대에 엎드려 있겠나. 속옷은 벗고 대신 헐렁한 티셔츠 바람이 낫지. 


그런데 이 책 속에서 말하는 저자/독자 유즈키 아사코는 저런 검은 속옷 차림이 더 어울릴 것 같다. 외모와 나이, 결혼과 연애 이야기가 짧은 서평의 많은 부분을 잡아 먹어서 시시하다....라는 생각이 들었지만 책 이야기, '수다'라 여기고 편안하게 읽었다. 고전 소설이라고 무게 잡고 인상 쓰면서 읽으라는 법은 없으니까. 책 내용은 프랑스,영국,미국, 일본의 "고전 소설"을 읽은 후 감상문인데 일본 소설의 경우 책 목록이 덜 고전적으로 보였다. 


어느 소설을 만나더라도 여자 등장인물의 장점, 강인함 혹은 의연함을 발견해 칭찬하는 저자의 긍정 마인드가 놀랍다. 친구들과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완독하고 핼러윈 파티 겸 코스튬 플레이와 테마 디너를 준비했다니, 고전을 갖고 놀 수도 있다는 게 (그 젊은 나이와 더불어) 부럽기도 했다. 하지만 잡지 엣세이로 젊은 여성 독자를 의식하는지 너무 달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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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0-10-11 1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요즘은 수다 떠는 것같은 느낌이 드는 책들이 편안해서 끌리더라구요. 선선한 가을밤 심심할 때 읽어보아야겠습니다^^*

유부만두 2020-10-11 20:38   좋아요 1 | URL
네. 가볍게 친구랑 책 이야기 하는 기분으로 읽었어요. 읽고 싶어지는 책 목록도 당연히 챙겼고요. 선선한 가을밤....감기 조심하세요~

북극곰 2020-10-12 13:3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엇, 첫 단락 완전 동감인데욧! 비웃비웃 ㅋㅋㅋㅋ 라고 생각했는데,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읽고 파티하는 여자는 다른 건가.... (괜히 시무룩)

유부만두 2020-10-12 16:17   좋아요 0 | URL
저자의 전작들과 글 분위기가 표지의 으잉? 스러움과 닿아있지만, 저자가 완독한 고전들 이야기에는 ‘네...‘하는 자세가 되더라고요. ^^;;; 고전 읽고 ‘놀기도‘하는 젊은 마음이 부러웠고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를 아직 못 읽었지만, 완독 한다면 전 아마 영화를 다시 볼 거 같아요.
 

교통사고로 오래 잠들었다가 깨어난 오기. 사십대 지리학 교수인 그는 동승했던 아내가 사망한 걸 알아도 턱부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 통증도 느낄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가족'은 장모 뿐이다.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시작했는데도 긴장하면서 읽었다. 등장인물 누구도 편들고 싶지 않았다. 오기도, 그 부인도, 장모는 더더군다나. 그런데 이런 불쾌감을 안고도 계속 읽을 수 있던 건 소설이 '안전하게' 한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끝이 보였다. 제목의 그 홀. 구멍. 구덩이. 어차피 빠지게 되어있다. 이미 빠져 있었고, 피할 수는 없다. 


오기의 부인이 겪었던 허영과 좌절이 낯설지 않다. 그 부인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깔려 있다고 상상했다. 가짜 같고 엉성해 보이지만 그만큼 더 괴상한 장모와 함께. 생각해 보면 여기 저기, 끔찍한 아가리를 벌린 구멍들이 일상 도처에 깔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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