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통사고로 오래 잠들었다가 깨어난 오기. 사십대 지리학 교수인 그는 동승했던 아내가 사망한 걸 알아도 턱부상으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하지 못한다. 몸도 움직이지 않는다. 통증도 느낄 수 없다. 그에게 남은 '가족'은 장모 뿐이다.
대강의 줄거리를 알고 시작했는데도 긴장하면서 읽었다. 등장인물 누구도 편들고 싶지 않았다. 오기도, 그 부인도, 장모는 더더군다나. 그런데 이런 불쾌감을 안고도 계속 읽을 수 있던 건 소설이 '안전하게' 한방향으로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끝이 보였다. 제목의 그 홀. 구멍. 구덩이. 어차피 빠지게 되어있다. 이미 빠져 있었고, 피할 수는 없다.
오기의 부인이 겪었던 허영과 좌절이 낯설지 않다. 그 부인의 이야기가 더 흥미롭게 깔려 있다고 상상했다. 가짜 같고 엉성해 보이지만 그만큼 더 괴상한 장모와 함께. 생각해 보면 여기 저기, 끔찍한 아가리를 벌린 구멍들이 일상 도처에 깔려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