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서글프게도 어떤 존재에 대한 사랑으로서의 우리 사랑은 어쩌면 현실적인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P9

나는 차창 너머 작은 검은 숲 위로 부드러운 솜털 같은 부분이 장밋빛으로 고정되어 꼼짝하지 않는깊게 파인 구름을 보았는데, 그 빛을 흡수하여 물들인 날개의깃털이나 화가의 충동적인 몸짓이 칠해 놓은 파스텔처럼 변하지 않을 장밋빛이었다. 하지만 난 이 빛깔이 무기력하거나 변덕스럽게 느껴지지 않고 오히려 필연성이자 삶 자체인 듯 느껴졌다. 이내 이 빛깔 뒤로 빛의 공간이 몰려왔다. - P30

그리하여 그녀들은 자신들이 알지 못하는 삶의 형태에 대한 욕망이나 호기심, 새로운 존재의 마음에들고 싶어 하는 희망을 모두 제거하고 대신 그 자리에 가장된경멸이나 작위적인 쾌활함을 채워 넣었는데, 이러한 제거는만족감의 표지 뒤에 불쾌감을 느껴야 한다는, 또 자신에게 끊임없이 거짓말을 해야 한다는 불편함을 초래했으며, 바로 이런 두 조건이 그녀들을 불행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이 호텔에있는 사람들은 아마도 형태는 다르지만 모두 같은 방식으로행동한다고 할 수 있었는데, 그들은 자존심 때문에, 또는 적어도 어떤 교육 원칙이나 지적인 습관을 위해 미지의 삶에 참여한다는 그 감미로운 불안감을 희생했다. - P68

그 시간 호텔 안에는 전기 불빛이 넘쳐흘러 식당은 거대하고 경이로운 수족관이 되었고, 그 유리 벽 앞에서 어둠에 가려 눈에 보이지 않는발베크 일꾼들이나 어부들, 또 프티부르주아 가족들이 유리에 코를 대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낯선 물고기나 연체동물의 삶만큼이나 경이로운 식당 안 사람들의 사치스러운 삶이금빛 소용돌이 속에서 느릿느릿 흔들거리는 모습을 바라보았다.(유리 벽이 그 경이로운 동물들의 잔치를 언제까지 보호해 줄 수있을지, 또 어둠 속에서 탐욕스럽게 구경하던 그 신분 낮은 사람들이어느 날 수족관 안으로 들어와 그들을 잡아먹을지를 아는 것은 중요한 사회문제다.) - P73

부인이 과거에 아름다웠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주 희미하게만 그 흔적이 남아 있었으므로 그 망가진 아름다움을 복원하려면 프랑수아즈가 아닌 다른 훌륭한 예술가가 필요할 듯 보였다. 왜냐하면 나이 든 여자가 지난날 얼마나 아름다웠는지를 이해하려면 쳐다보는 것만으로 부족하고 얼굴 모습 하나하나를 해석해야 하기 때문이다. - P100

다시 말해 이 두 세계는 발베크 만의 한쪽 끝에 위치한 바닷가 주민들이 또 다른 끝에 위치한 바닷가를 바라보듯이 서로를 허구적이고 거짓된 시각으로 보고 있다. - P1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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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 하순에서 7월 초에 걸쳐 어느 고등학교에서 일어나는 이야기다. 제목에서 말하듯 체육관에서 학생이 살해당한다. 범인을 밝혀내는 과정인데 후반부에 꽤 길게 사건 관계자들 모두를 모아 놓고 '천재' 전교 일뜽 (빼면 일본 소설은 얘기가 안되나봐요) 오타쿠 남학생이 추리 강의를 한다 (푸아로인줄). 더해서 뽀나스로 이 사건의 배후의 더 나쁜 손, 다른 인물을 폭로한다. 


장마비 이야기가 계속 나와서 읽으면서 창문을 자꾸 바라보게 된다. 빗소리와 선풍기소리와 환풍기 소리 (이 더운 날씨에 국을 한솥 끓이는 중이었다. 집나가고 싶어서)에 정신이 사나웠다. 소설은 만화책 같은 표지(노랗거나 빨간 우산을 쓴 여학생은 안나옴)와 적나라한 제목에도 불구하고 꽤 정석적인 범죄 추리 소설이 펼쳐진다. 


천재 고딩이 학교 동아리실에서 숙식하는데, 그 방/집에 경찰들이 찾아오자 이 녀석은 가만히 앉아있고 친구 여학생과 후배 여학생이 차를 끓이고 과자를 준비해 대접하드라? 가부장제도 선행학습이니. 범인은 잡았으나, 더 독한 사람이 배후에 있었고, 고3 '의리파' 남학생이 죽었으니 슬픈 일이고, 경찰 아저씨들은 어버버 대머리에 땀만 흘린다. 시리즈로 수족관과 도서관에서도 살인사건이 일어난다. 이렇게 흉을 봐놓고도 난 아마 다 읽겠지. 여름이니까. 



쾌청한 하늘 위로 작은 구름이 유유히 떠다닌다. 잔 안에 남은 얼음이 상쾌한 소리를 내며 녹았다.
벌써 7월. 여름이 바로 코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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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이버 2021-07-04 19:24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딱 지금 읽기 좋은책이네요^^ 푸와로 아저씨 좋아하는 저로써는 끌리네요...
리뷰 읽다가 가부장제 선행학습에서 빵터졌습니다ㅎㅎ

유부만두 2021-07-05 17:59   좋아요 1 | URL
사람이 죽는 이야기이긴 하지만 장마철에 어울리는 추리/설명 소설이에요. ^^
탐정 주인공 학생이 영 마음에 들지는 않았지만요. (설명하는 장면만 푸와로에요)

붕붕툐툐 2021-07-04 21:11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제목 너무 좋다! 여름에 딱!ㅎㅎㅎㅎㅎ

유부만두 2021-07-05 17:59   좋아요 0 | URL
여름 장마철에 딱! 이죠.
 

억울하게 죽은 여자들이, 혼령이 되어 늦게나마 입을 열어 사대부 남자 관리에게 도움을 청한다. 그리고 여자 귀(鬼)들은 그 남자들의 시스템 안에서 억울함을 풀고 은혜를 갚는다. 


이 여자들의 죽음에는 현실이 반영되어 있다. 전쟁, 질병, 강간, 살해, 명예살인, 처첩 고부 간의 갈등, 계모의 구박 등. 그 죽음의 배경에는 아무 것도 안하거나 적극 범죄에 참여하는 아버지, 오빠, 남편, 나라의 관리들이 있다. 은혜 갚는 대신 화를 불러오며 붙어있는 귀신들도 있고, 연정을 고백한 후 죽어버린 귀신도 있고, 후손들을 보호하려 애쓰는 모성애 넘치는 귀신도 있고, 몇 년 무덤 속에 있다가 다시 살아나는, 시침 뚝 떼고 환생하는 시체들도 있다. 하지만 이야기들이 전해지는 통로가 유학자 남정네들이니 어쩔 수 없이 여자 귀신에 답답증이 도질 즈음, 책의 마지막 부분 <여성, 신이 되다>가 우리 나라의 천지창조 신화에 등장하는, 환웅과 웅녀 이전 시대의 여자 거인 '신'에 대한 이야기의 파편들을 들려준다. 하백의 딸 유화부인이 인간이라기 보다는 농경의 여신이라는 해석, 그녀 역시 그리스 로마 신화의 여신/님프 들 처럼 하늘에서 내려온 '것'에 당해 임신하고 비범한 인물 - 건국 시조를 낳는다는 부분이 흥미롭다. 삼신 할미나 마고 할미, 바리데기가 겪은 여자들의 고초들은 아무리 '신'이 되었다지만 여자 사람들의 기억이 쌓여있는지라 갑갑하기만 하다. 아직도, 여자들은 억울한 일을 당해도 목소리를 낼 수가, 들어주질 않아서 스스로 목숨을 끊기도 한다. 그녀의 일이 나라 지키는 것이었어도 다르지 않다. 


책에는 수 많은, 겹치기도 하는 억울한 아랑, 장화 홍련,이생규장전 류의 이야기들이 실려 있고 그에 비해 해석/분석 부분은 탄탄하지 못하다. 10년 전 나온 최기숙의 <처녀귀신>과 많이 겹치는 데 그 책은 처녀, 억울함, 글과 영화에 남은 여자 귀신과 그 한의 정서를 탐구했다면 이번 책은 '왜 여자는 억울하게 죽고 나서야 입을 여는가, 누가 해원을 하는가, 여자 '신'의 존재는 어떤 의미인가'를 고민한다. (별로 다르지는 않...) 끝까지 통쾌함 보다는 고민만 쌓아놓는다. 그러니 우리는 죽기 전에 입을 열고 손을 놀려 이야기를 해야한다. '자궁가족' 이라는 개념으로 결혼 한 여자가 자신의 세를 불리는 과정을 (아들을 낳아야함) 설명하기도 하지만 여자들 사이의 연대는 보이지 않아서 아쉬웠다. 여자들이 서로 챙기는 것은 만신/무당의 굿에서 서로를 품고 달래는 정도일까. 여러 이야기 들 속에서 서양 신화와 고전에서 읽은 것들과 닮은 장면이 많아서 흥미로웠다. 하지만 책은 .... 기대만큼 무섭지도 않고, (일단 귀신들이 너무 순해서 가해자들을 찢어죽이질 않음) 유학자 남자들에게 기대기만 해서 아쉽다. 그래서 책을 그만 읽을까, 할 때, 짠, 우리의 할매 신들 이야기가 나와서 다행이었다 (지만 지리함은 어쩔 수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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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미 2021-07-01 12:45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예전에는 무섭기만 했던 전설의 고향도 여성주의 시각에서 보면
이젠 무섭기보다 가슴아플것 같아요.😔

유부만두 2021-07-01 12:48   좋아요 4 | URL
맞아요. 여성들이 왜 죽었는지 부터 고구마에요. ㅜ ㅜ
범죄의 처벌도 제대로 못하는 지금 세태가 실은 더 고구마고요. 마음이 아프고 갑갑하고 그래요. 하지만 할매 신들 이야기들은 흥미로웠어요.

수이 2021-07-01 13:41   좋아요 5 | 댓글달기 | URL
전 커다란 가위 들고 막 찢어죽일 거 같은데 ㅎㅎㅎㅎㅎ 근데 이게 또 현실에서 일어난다면 저도 가만히 있겠죠. 근데 귀신 되면 정말로 커다란 가위 들고 막 자르고 다닐듯 해요 ㅋㅋㅋㅋ 이 책도 흥미로운데 도서관에 곧 들어온다고 하는지라 조만간 읽어볼게요 유부만두님

유부만두 2021-07-01 22:41   좋아요 0 | URL
인용 부분이 많아서 이야기 책 읽는 기분도 들어요. 잘 몰랐던 신화, 전설도 생각해 보는 기회였고요. 하지만 납량 도서는 아니고, 오히려 열받게 만들기도 하니 시원한 음료는 꼭 챙기고 읽으세요. ^^

몰리 2021-07-01 16:11   좋아요 4 | 댓글달기 | URL
그러니 우리는 죽기 전에 입을 열고 손을 놀려 이야기를 해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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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월의 메시지로 삼습니다!

유부만두 2021-07-01 22:41   좋아요 1 | URL
그렇지요?!!!! 이야기를 해야합니다! 부지런히!
 

예전에 정희진 작가의 독서책 한 권, 그 단 한 권을 읽고 작가의 '투박함' 혹은 공격성, 아니면 기존 질서, 정전에 대한 무시에 놀란 적이 있다. 그리고 한동안 그의 책을 읽지 않았다. 이번 책은 다시 독서, 책읽기와 신념에 대한 글이라 오랜만에 마음을 다잡고 읽었는데 (그러니까, 정희진 작가를 싫어하지 혹은 그에 - 나 나름대로의 기준에 맞추어 - 실망하지 않기 위해서) 읽으면서 계속 나 따위가 감히, 라는 생각만 들었다. 


이 책이 다루는 스물일곱 권, 그 중 내가 읽은 단 두 권에 대한 내용 보다도 정희진의 문장이 내 마음 속에 들어왔다. 특히 철학적 개념을 짚어내며 짧고 곧은 문장으로 논지를 펼 때, 한 단어 한 단어, 괄호 안의 영어나 한자어와 함께 부옇던 '어떤 생각'을 단단하게 붙잡아 주며 내 앞에 섰다. 곧고 단단하게 읽고 고민하는 그에 비해 나의 책읽기는 얼마나 허랑방탕한가. 하지만 가끔, 혹은 자주 정희진 작가의 '치열한' 글을 만나면 괜찮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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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우가 인간의 말과 글을 (독학으로) 배워서 편지를 남겼다. 상상력이 풍부하고 호기심이 많은 이 여우8은 철자법이 매우 서툴지만 지적 능력과 공감 능력은 어느 인간 못지 않다. 그가 비관적인 미래를 바꿔보려 인간에게 협력을 구하며 애쓰는 것이 안타깝다. 그에 더해 책이 기대보다 재미가 없어서 더 안타까웠다. (어쩜 조지 손더스의 전작 '바르도의 링컨' 만큼이나 재미가 없어서 마음이 아팠다.)


동물의 목소리, 더 나아가 동물의 글을 '그대로' 전하는 소설은 이미 만난 적이 있다. (소세키의 고양이는 글을 쓰지는 않았고 이야기만 전했지, 아마?) 직접 타자를 쓰느라, 혹은 글자를 쓰느라 (해부학적 어려움을 안고) 고생하는 개를 두 마리 안다. 온다 리쿠의 '충고'의 개는 주인에게 닥친 위험을 경고하고 장자자/메시의 개 리트리버는 타자기를 사용해서 오랜 시간 주인과의 인연, 인간의 생활사를 관찰하고 있다. 



자연의 친근하고 순수한 시선으로 인간의 파괴적 행동을 묘사하고 자신의 의견을 전달하는 여우8의 편지는 의미가 크다. 하지만 -해요, 투의 어느 정도 귀엽고 (하지만 애써 안 귀여우려 쿨하게 군다) 망가진 철자로 수십 쪽의 이야기를 따라가기는 지치는 일이다. 나 역시 멍청한 인간이기 때문인지도 모른다. 





(혹시나 저 '안녕하세요 저는 소설가의 개이고'에 관심이 생기는 분들께, 재미 없어요. 읽지 말아요. 저도 이 책 추천한 친구랑 싸웠어요.) 


그나저나 동물 목소리 (여우8 보다 덜 똘똘한) -새오체는 영화 <검은 사제들>의 돼지의 편지글 패러디가 가장 기억에 남는다. 이게 다 인간 편의주의고 인간 중심이고 인간 나쁘고 못됐고. 압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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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자냥 2021-06-26 15:07   좋아요 3 | 댓글달기 | URL
책 추천한 친구랑 싸웠 ㅋㅋㅋㅋㅋㅋ

유부만두 2021-06-26 18:55   좋아요 3 | URL
친구 추천을 믿고 꾸역꾸역 완독했는데, 정작 친구는 책 앞부분만 읽고 재미있다고 했던 거였어요. ㅎㅎㅎ

미미 2021-06-26 15:25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어떤 내용으로 싸우셨을지 궁금해오ㅋㅋㅋㅋㅋㅋ저 <아무튼 스릴러>에서 읽고 다짜고짜<나와 춤을> 사서 ‘충고‘읽었어요~♡ 짧지만 넘넘 귀엽고 마음아팠어요! 흑흑

유부만두 2021-06-26 18:55   좋아요 2 | URL
책이 재미가 심하게 읍드라고요. ㅋㅋㅋㅋ ‘충고‘는 은근 슬프고 번역체가 귀여웠어요.

붕붕툐툐 2021-06-26 22: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싸움을 부르는 책이군요!ㅎㅎㅎ
기대보다 재미가 없어서 안타까운 거 넘 웃겨요!ㅎㅎ

유부만두 2021-06-27 07:47   좋아요 0 | URL
붕붕툐툐님께 웃음을 드렸다니 기쁩니다. 네. 전 그걸로 오케이에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