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시마 선생은 대학의 연구자이다. 그는 학생들을 지도는 하지만 강의나 회의의 의무는 상대적으로 덜한 자리에서 묵묵히 조용히 꾸준하게 연구를 한다. 그의 연구 주제는 .... (책에 나와있는데 독자가 이해하지 못하리라는 것을, 이해시킬 마음도 없는 저자가 써놓았다) 컴퓨터 계산과 숫자와 논리와 공학과 연결이 있다. 


화자인 '나' 하시바는 어린시절 글자를 늦게 뗀 연유로 독서에는 별 취미를 못 가졌지만 공학이론서를 힘겹게 읽어낸 후로 공학도의 길로 계속 걸어가는 사람이다. 


기시마 선생과 하시바의 세계는 공학 계산의 세계, 분명하고 숨기지 않는 정당한 세계, 상아탑의 세계다. 돈이나 겉치례에 얽메이지 않고 문제를 찾고 분석하며 해결하는 '순수한 희열'에 종이에 4색볼펜의 잉크가 닳도록 계산을 해대는 사람들이 만드는 세계. 


이 책이 그려내는 대학의 실속 없고 어설픔, 대학원의 어색한 리듬은 남성 중심이다. 세 명의 여자인 학부 동창 시미즈 스피카, 대학원 동기 사쿠라이, 계산기센터의 '마돈나' 사와무라 모두 그 조용한 세계에서 행성처럼 겉돌다 튕겨져 나온다. 깨끗하고 조용한 연구의 세계에는 사회 생활 뿐 아니라 어른 생활인의 일과도 필요없다. 그런건 다른 '누군가'가 대신해 준다. 하찮은 일을 담당하는 사람들이. 


아내가 연년생으로 아이를 낳고 집안을 돌보는 동안 '가족을 위해서 더 열심히' 할 일을 하겠다고 마음 먹는 하시바, 그에게 같은 전공을 공부한 동갑내기 아내는 '훌륭한 여자'이고 아이들은 '잘 자고 순하다'. (이 부분을 읽고 눈물이 났다) 부인이 자신에게 왜 집안일이나 아이들 문제는 꺼내지 않고 그의 학교 일만 물어보는지, 하시바는 신경쓰지 않는다. 그는 회의와 업무에서 벗어나 자유롭게 연구할 수 있는 해외파견 기간 동안 일본으로 돌아가기 싫은 마음이 든다. 기시마 선생에 비해 그는 자신이 덜 조용하고, 덜 완벽한 세계에 있다고 생각한다. (연애도 결혼도 그렇게 쉽게 한 녀석이)


슴슴하게 조용하게 그려지는 하시바의 일과를 따라가다보면 미지근한 녹차를 마시는 기분이 든다. 마음이 정리되고 차분해진다. 매일 이렇게 연구하고 책읽고 몸을 발전기 삼아 두뇌를 활성화시키는 상상도 해본다. 그러다가 눈을 돌리면 아이들 밥 때, 세탁기는 완료 음악을 뾰로롱 낸다. 경단녀 시미즈 스피카의 세계를 생각해본다. 덜 조용하고 뜨거운 생활인 어른들의 세계, 나도 아는 그 세계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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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 세기를 힘겹고 소란스럽게 살다 간 유명 저술가와 예술가 여성들의 일생....중 가십거리를 정리해서 묶어 놓은 책이다. 억압과 관습의 시대를 탓하고는 있지만 개인의 치정과 모순, 집착과 광기를 비판하는 데 집중하고 있다. 소개된 인물 중 정말로 '미친' 사람들도 있다. 저자의 맺음말과 역자의 소개글은 그래서 더욱 '이것은 비단 여성들만의 문제가 아니고 운운' 하는데 저자가 페미니스트로 소개되지만 그 시선은 그저 흔한 가십거리를 전달할 뿐이고, 난 연예 뉴스를 대하는 것 처럼 시몬느 드 보부아르, 아가사 크리스티, 조르주 상드 등의 몰라도 그만인 이야기를 읽었다.


덧: 원서의 제목은 여성의 인생, 정도인데 거짓과 비극은 번역하면서 넣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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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래동화에서 지속적으로 학습시키는 여성비하와 불평등에 대해 '참지 않고' 소리 내어 다시 쓴 전래 동화집이다. 

통쾌하기를, 편견을 벗을 기회가 되기를 바란다고 저자는 말했지만...

하아... 읽어 갈 수록 갑갑증은 더하다. 새로 쓴 이야기도 기대 만큼 새롭거나 강렬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뒤집기 혹은 미러링 아니면 응징을 현실에선 이룰 수 없음을, 옛이야기로 만나는 차별과 편견이 21세기에도 계속되고 있다는 걸 매일 보고 있으니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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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다혜 저자의 표현대로 일부 어린이들이 공룡에 빠지는 '공룡기' 처럼 셜록 홈즈 책을 탐독하는 '셜록 홈스기'가 있다. 맞다. 나도 잘난척하는 홈스의 활약상을 어색한 번역투 문장과 펜선 삽화로 접했고 영어공부를 핑계로 아는 이야기를 다시 읽었고 십대 후반이 되면서 다른 탐정들로 다른 스릴러로 건너갔다. 어린아이의 몸에 갇힌 애니메이션 코난과는 다르게 나는 어른 독자로 조금씩 변했다. 


이번 책은 코넌 도일의 인생과 (의외로 20세기에도 오래 살았던 도일) 홈스의 탄생과 인기, 그리고 작가 사후에 지금까지 하나의 문화로 유적지로 어쩌면 신화와 언어로까지 변주되어 자꾸 살아나는 작중 인물과 이야기를 잘 정리해 주었다. 처음부터 마지막까지 '나의 홈스 유산 답사기'를 차분하게 너무 흥분하지 않으며 쓰려고 노력하는 저자의 모습이 보이는 듯하다. 하지만 너무 부럽잖습니까, 코던 도일의 고향 에딘버러에서 코난 도일 이라는 이름의 펍에서 맥주를 (왓슨 라거 입니까? 다른 거였나요?) 곁들인 런치 스페셜이라니. (뭐, 나도 다른 맥주를 마시면서 책을 읽었지만 말입니다) 이거슨 여행기인가 인물평인가 홈스 이별기인가. (아르테에서 시리즈로 내고 있는 클래식 클라우드의 고퀄리티를 이제야 알았고요) 이젠 이다혜 저자도 독자인 나도 홈스기는 예전에 졸업하고 영드 셜록으로 홈스기 리턴즈도 잘 지내왔으니 흥분 좀 가라앉히고 정리해 보는 거지요. 자, 우리의 홈스 사랑이 깔고 있었던 믿음이랄까 정의는 무엇이었고 지금 2020년에도 의리!를 외치며 도일 만세!를 외쳐야 하는 건지. 그게 아니라면 나의 홈스기는 부정해야하고 배신자가 되는 건지. 갖다 버린 그 아이돌들의 씨디 처럼. 갖다 버린 그 소설가와 시인의 책들 처럼.


소설, 그것도 작가보다 더 유명해져서 실존 인물 이상의 유적과 기념물을 가지는 홈스 정도라면 그냥 내버리는 대신 문화와 역사를 다시 따져 보는 대접은 해주어야 한다고 봅니다. 코로나 때문에 에딘버러와 런던에는 못 가도 이다혜 저자의 이 책을 읽으면서. 정리도 잘 되어 있고 내용도 풍부한데 멋진 사진도 (특히 동시대 '당시 신인 작가' 사진이 등장하는 편집은 환상!) 많고 문장도 (말해 뭐해요, 이다혜 기자 글인데요. 음성지원 가능) 야무지다. 하지만 후반으로 갈 수록 마음이 무거워진다. 특히 자료 사진 중 하나, 20세기 초 보어전쟁 (남아프리카에서 네덜란드 출신 이주민에 대항해서 벌인 전쟁)에 젊은이들의 입대를 독려하는 붉은 표지의 팜플렛이 섬뜩했다. 마치 미국 대통령의 MAGA 슬로건이나 욱일기를 보는 기분이 들었다. 그러니까, 그는 과학적이며 정의감 넘치는 완벽한 작가가 아니었다. 그의 중년 이후의 또다른 신념은 기이하기까지하다. 하지만 이미 내 손에 들어온 이야기의 홈스는, 내 아이가 읽는 빅토리안 시대의 홈스는 제1세계 백인 남성 (더하기 신경증 환자에 안하무인)에 머물지 않게 만들 수 있다. 독자가 두 눈 부릅뜨고 따져가며 더 생각해가며 읽으면 되니까. 하지만 꼭 머 그렇게 까지 애써야할까, 재미있는 책이 이토록 많은 2020년에? 그 고민은 이다혜 저자의 이 책을 다 읽고 하도록 하자. 맥주도 마시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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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onnight 2020-06-21 11:39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뤼팽이 더 멋있다는 애들과 다투기도 많이 했었네요. 어릴 적엔ㅎㅎ^^; 이다혜 작가가 쓴 홈스(도일)이야기라니. 바로 보관함에 넣습니다^^

유부만두 2020-06-21 11:44   좋아요 0 | URL
강력 추천합니다!

psyche 2020-06-23 01:5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에딘버러에서 코난 도일이라는 이름의 펍에서 맥주를! 언제가 되면 그럴 수 있는 날이 올까... 아니 당장 내년에 한국 갈 수 있으려나 ㅜㅜ

유부만두 2020-06-24 08:45   좋아요 0 | URL
아아아 ㅜ ㅜ 언니 만날 수 있으면 좋겠어요.
막내네 학교는 2학기 때도 온/오프라인 등교 수업을 한대요.
소풍이나 수학여행은 진즉에 취소고요.
이렇게 디스토피아 월드가 열린 건가 싶어서 우울해요.
 

어디서 이 책을 추천 받았는지는 기억에 없다. 그런데 책이 집에 있네? 그래서 읽기 시작했는데 저자 이름이 가쿠타 미쓰요. 누구야, 이 사람? 했더니 '종이달'의 저자이며 착실하게 달리기를 하고 그 기록을 모아 책도 낸 사람이다. (그 두 권을 다 읽고도 저자 이름을 기억 못한 사람이 나) 10년전까지의 기록을 모아서 6년 전 일본서 출판 된 비교적 요즘 책이다. 


하지만, 책 초반 부에는 저자의 책읽기 애정에 대한 고백 비슷한 글과 등단 후 낯선 작가의 작품 들을 정신 없이 읽어댔다는 반성문이 실려있다. 그래도 뜨끈하게 느껴지는 건, 책이 좋구요, 이야기가 좋아서요, 글자를 하나 하나 따라 읽고요, 감정도 이입 백만 프로 했고요, 울기도 하고 그랬어요, 라는 나랑 많이 닮은 사람이었다. 이름을 기억하겠습니다, 가쿠타 미쓰요. 


중후반의 독서 '감상'문 기록엔 비교적 현대 일본 소설/수필 책에 대한 감상이라 검색해 보니 (책 말미에는 변역/비번역 서들을 구별해 놓았던데 그 표기를 책 머리에 미리 알려 주었더라면 매 꼭지 (2-3쪽)마다 검색하는 수고는 덜었을게다. 우리말 번역서 목록을 만들어 주어서 좋았지만 저자 이름의 철자는 서점 사이트와는 조금 차이가 있다. 모르는 책들이 많고 어찌 보면 비슷비슷해 보이는 책들이 많다. 그러니까 우리 나라에 번역된 일본 소설은 그중에 일부인 것이다. 대체, 얼마나 많이 쓰고 만드는 건지. 


저자의 시각은 매우 고전적이며 (달리 표현하면) 고리타분하다. 즉, 좋은 게 좋은 거고, 옛것의 그윽한 추억을 중요하게 여기는 사람이다. 무엇보다, 일본인이다. 그래서 일제강점기와 2차대전을 배경으로 하는 일본인의 이야기에는 저자의 '눈물 겨운 감상'이 멀게만 느껴졌다. 책읽기에 대한 애정 말고는 딱히 특이한 시각이나 반짝임을 만날 수는 없었다.  


나는 소설을 읽고 뿌듯해하며 알라딘에 몇 줄 남기고, 다른 책을 사고 또 읽는다. 책이 재미있니까. 재미에는 여러 정의와 의미가 담겨있다, 고 '가쿠타 미쓰요'가 (딱 내 맘 처럼) 적어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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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발머리 2020-06-19 22:0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 세 권 표지 전부 익숙한데 한 사람이 쓴 책인지는 몰랐네요 ㅎㅎㅎㅎㅎㅎㅎ <보통의 책읽기>를 찾아봐야겠어요^^

유부만두 2020-06-19 22:14   좋아요 0 | URL
책은 뭐 그냥 보통 입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