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늘 내 나름대로의 방식으로 책 정리를 하려고 했다.

실제로 큰 마음을 먹고 실행에 옮긴 것도 여러번이었는데 그때마다 중도에 지쳐서 될대로 대라 하고 손에 잡히는 대로 쌓아 올려버려서 애초에 놓여있던 공간에 먼지만 겨우 걷어낼 정도로 끝나곤 했다. 거의 대부분의 정리가 그랬다.

 

나는 책을 이렇게 구분했다.

내 방에는 열다섯 개의 구를 가진 책장이 두개있다. 

책장 하나를 가득 채운 것은 장르 소설인데 3분의2의 SF&판타지와 3분의1의 추리&미스테리로 구성되어 있다.

일본 소설은 추리,미스테리쪽이지만 따로 분류했다.

나머지 책장은 한국 소설과 세계문학, 에세이 그리고 일본 소설로 채워졌다.

일본 소설의 절반은 미미여사이고 나머지는 하루키와 히가시노 게이고, 오쿠다히데요, 이사카고타로 등의 이름이 속해있다

한국소설과 세계문학은 각각 세개의 구를 차지하고 있다.

책상 위도 모니터 옆 공간에 역시나 책꽂이가 있는데 그 곳엔 내가 애정하여 자주 꺼내보는 책들을 꽂아두었고,

책상 아래엔 창간호부터 모아온 잡지인 스켑틱과 미스테리아를 따로 쌓아놨다.

꽤나 오래 전 부터 모으기만 해서 책장에 한 줄만 채우면 바닥에 주저 앉을 책들이 많아지기에

책장의 각 구마다 책이 앞,뒤 두 줄로 세워져 있고, 위쪽의 남은 공간도 역시 앞,뒤로 책을 겹쳐놓았다.

그래서 숨도 못 쉬게 답답한 모양새다. 

이렇게 해도 책장에 들어가지 못한 책들이 한가득이라 창문을 정면으로 보고 ㄷ자 형태로 바닥에 나머지 책을 둘러놨다.

아파트는 튼튼할테지만 쓸데없는 잔 걱정이 많은 내가 한쪽에 무게가 쏠리지 않도록 나름 신경 쓴 배치다.

 

언제나 정리는 내 기호의 우선 순위인 장르 소설쪽을 먼저 시작했다.

새로 구입해서 바닥에 놓여져 있던 책을 이리저리 치워가며 비슷한 장르와 작가별로 분류를 한다.

스티븐킹와 제프리디버와 로버트해리스, 마틴옹의 책들을 모아 앞으로 두고 시리즈가 중단된 작가는 뒤쪽으로 간다.

장르 소설의 작가별 분류가 끝나면 일본 소설로 넘어가는데 이때쯤 서너시간이 지난 시점이고, 난 지쳐있다.

그래서 세계문학과 에세이, 한국 소설쪽은 꽂힌 그대로 두고 먼지만 털어내기가 일쑤였다.

 

바닥에 쌓인 책들은 시간이 갈수록 쓰러지고, 위쪽의 책에 눌려 모양이 이그러져서

이러다간 눌린 자국을 펼 수도 없겠다 위기감을 몇 달간 느끼다가 드디어 얼마 전에 공간 박스를 샀다.

그리고 서울 여행을 떠나기 바로 전 날인 금요일에 아버지의 전동드릴을 가져온다.

 

 

     영차! 영차!

 

 

   ?????????

 

 

아니 왜 공간 박스를 9개나 조립했음에도 바닥에 책은 그대로지?

공간 박스의 너비가 생각보다 좁아서 두개의 열로 끼우지도 못하고, 눕히기도 세우기도 애매한 상태가 되어버렸다.

정리를 한 것도, 그렇다고 안 한 것도 아닌 이 어정쩡한 상태를 어찌하면 좋을까?

 

바닥에 앉아 손을 머리에 포갰다. 그리고 일어서서 장르 소설쪽으로 갔다.

구입 한지가 오래된 책들을 하나씩 뽑아서 현관문 앞에 놓아둔다.

어느새 엄마가 들어와 한쪽에 쌓인 책 무더기에 걸터 앉아 잔소리를 시전한다.

그러게 그만 좀 사라니까. 하루 종일 매달려도 다 정리도 못하고, 밥도 안 먹고, 뭐 하는 짓이니?

시간이 있어서 하는거지. 이런 거 정리하라고 주말이 있는거야. 내 대답에 엄마는 눈을 흘긴다.

그만 째려보고 나 커피 좀 줘. 내 부탁에도 엄마는 도통 방에서 나갈 생각이 없어 보인다.

현관 앞에 책들은 왜 내 놓은거냐? 팔거야. 내가 무뚝뚝하게 대답을 하자 엄마가 헛웃음을 켠다.

애써서 사서 이젠 판다고? 제 값도 못 받고 아까워서 어째.

돈 벌려고 파는 거 아냐. 엄마가 나를 빤히 쳐다본다. 나 역시 엄마를 힐끔 쳐다보며 책을 또 하나 빼낸다.

이미 읽었고, 다시는 안 볼것 같은 책을 꺼내 수건으로 먼지를 살살 털어낸다. 그리고 말했다.

새 책으로 채울 공간을 확보하려고 파는거야. 엄마가 한숨을 쉬며 일어섰다.

나 커피 줘. 난 엄마의 뒷 모습에 대고 다시 한 번 말했지만 대답 없이 방문이 닫혔다.

지친다. 바닥에 어질러진 책을 한쪽에 밀어넣고, 대충 쌓아올리기 시작했다.

 

일요일에 남동생은 일찍 집으로 왔다.

직장이 천안인 남동생은 반나절만 머물수 밖에 없고, 자는 것 말고는 하는 일이 없음에도 굳이 본가에 왔다.

난 남한산성을 머리맡에 두고 잠든 남동생을 흔들어 깨워 집 근처에 새로 생긴 알라딘 서점에 갔다.

막상 팔려고 하니 그마저도 아쉬워 몇권은 두고 나왔음에도 제법 묵직한 두개의 쇼핑백을 카운터에 쿵하고 올려 놓는다.

남동생은 직원이 책을 하나하나 들어 먼지를 닦고, 분류하는 작업에 지루 했던지 서가를 돌며 구경 중이었고,

난 가만히 서서 그 과정을 지켜보고 있었는데 막 지루함이 들기 시작할 때쯤 직원이 고개를 든다.

안경을 썼고, 검은색 티를 입었는 데 손에 낀 하얀 목 장갑이 튀지도 않고 잘 어울리는 차림이었다. 

확인 할게요. 직원이 말했다. 여기서 빼낼 책은 없는 건가요?

없어요. 내 대답이 너무 빨리 나가서 스스로 놀라워하고 있을때 직원이 책을 들어 바코드를 찍기 시작한다.

그 와 동시에 내 책들이 나를 떠나가기 시작했다.

소장한지 십년이 넘어서 색도 바래고 윗쪽에 먼지도 쌓여있던 책들은 최저가로 균일한 금액이 찍히고 있었다.

열두 권째가 찍힐 때쯤 이 가격에 파는 거면 그냥 가져가는 게 나은 걸까? 생각이 잠시 들었다.

하지만 난 그 과정을 중단시키지 않고, 지켜 보기만 한다.

서점에 책 보유랑이 풀이어서 팔아줄 수 없다며 아홉권의 책을 돌려 받았다.

그나마 제일 상태가 좋았고, 최근의 책이었는데 서점에 들른 대다수의 사람을은 소장과 비소장의 구분이 나와 비슷한가보다.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총 23권이고 19600원입니다. 직원이 말하며 다시 한번 묻는다. 빼낼 책은 없는 거죠?

없어요. 이번에도 대답은 빨랐다. 알라딘 예치금으로 넣어주세요.

남동생이 다가와 내 손에서 되 돌려 받은 책이 든 쇼핑백을 받아간다.

 

집으로 돌아오는 차 안에서 남동생에게 나의 이상한 기분을 털어놓았다.

무언가 서운한 감정이 들면서도 딱히 그 책들을 다시 내 방으로 가져 올 마음은 들지 않았노라고

이렇게 파는게 현명한걸까? 이 질문에 그렇다라고 대답을 못 하면서, 아니라고도 말을 못하겠다고.

생각이 좀 뒤죽박죽인 상태인데 눈물도 날 것 같다는 이야기를 한다.

 

그럼 팔지 말지. 그냥 그대로 두고 왔냐? 동생의 말에 아마도 이렇게 책을 파는게 처음이어서 그럴꺼야. 내가 대답을 한다.

갑자기 예전 생각이 났다. 한참 폴 오스터에 빠져 있을 때 인상적으로 봤던 책. 

페이지 빼곡히 적힌 글들이 무섭게 찌르며 다가왔던 그의 책들은 한권을 다 읽고 나면 큰 일을 치룬 듯 뿌듯했었다.

그 책에서 주인공이 그랬는데 돈이 없어서 책을 내다 팔고 그랬거든. 내 말에 동생이 무슨책? 이라고 묻는다.

 

 

 


 

  포그의 어머니는 갑자기 죽었다.

  어머니는 미끄러진 버스에 깔려 죽었고, 아버지는 애초에 존재하지 않았다.

  어머니의 죽음에 대한 보상은 대학생활과 그 후에도 얼마간을 지낼 수 있을 거라 생각했지만 

  그를 보살피던 외삼촌의 죽음으로 그런 계획이 모두 틀어지고 만다.

  그렇게 그에게 경제적으로 힘든 시기가 찾아온다.  

  외삼촌에게 물려받은 책을 가구 삼아 문학 위에서 잠을 자고, 식사를 하던 그는

  어느날 봉인 된 상자를 풀고, 책을 꺼내 읽기 시작한다.

  그에게 새로운 책도 있었고, 이미 읽은 책도 있었지만 그는 상관 없었다.

  외삼촌만의 방법으로 분류된 책 상자에서 빼낸 책을 차례로 읽고나서 한쪽에 쌓아 올린다.

  그리고 그렇게 쌓아둔 책을 들고 헌 책방으로 가서 판다.

 

 

나는 그 책들을 읽음으로써 어떻게든 그에게 진 빚을 갚았고, 

이제는 돈이 너무 궁해진 만큼 다음 단계를 밟아 책을 현찰로 바꾸는 것이 지극히 당연한 일로 보였다

 

서점에 갈 때의 두 손의 무게만큼 무거운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온 나는 아직도 바닥에 내 마음처럼 흐트러진 책들을 본다.

난 번번히 책 가짓수를 줄이려고 노력 했지만 그때마다 망설임을 반복해서 뜻을 이루진 못했다.

드디어 책을 팔게 된 오늘. 난 평소보다 단호했고, 확실했다. 예전에 정말 망설임이 있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책 정리를 할때 페터회의 뒤쪽으로 다니엘페낙과 함께 자리 잡고 있던 폴 오스터가 생각났다.

손가락과 걸레로 책 위쪽의 먼지를 슬슬 닦아낸 것도 기억났다.

포그는 생활비를 위해 책을 팔았지만 난 아니었다. 하지만 포그와 내가 공통적으로 가진 것이 있다. 

죄책감이다. 포그는 책을 팔기 전에 다 읽음으로써 책을 물려 준 외삼촌에 대한 죄책감을 덜어냈다. 

내가 가진 죄책감은 책들에 향해 있다. 우스운 건 그 죄책감이 어느 상황에서 오는 것인지 확신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오랜 시간 내 책장에서 먼지만 쌓여있던 책들이 어떠한 사람의 손에 들려 다시 한번 제 기능을 하게 해 주는 것이 맞는 것인지. 그렇다고 한다면 너무 오래 책장에 가둬둔 것은 아니었는지. 아니면 언젠가는 다시 읽으리라 다짐했지만 결국엔 먼지만 묻힌 채 내 곁을 떠나게 한 것에 대한 미안함인지. 그것도 아니면 그저 내 물건에 대한 강한 애착으로 발생한 아쉬움인지.

모두 다 아니면 내가 있는 공간은 포화 상태였고, 조금의 틈이 필요했고, 새로운 걸 채워놓고 싶은 마음에 헌 책을 떠나보냈을 뿐인 단순함에서 오는 것인지. 


문득 포화 상태인 것은 내 방만이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 나에게 필요했던 조그마한 틈이 과연 책 때문일까?


나는 오늘 책을 팔았다. 나는 이 결정을 잘 내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난 이상하리만큼 서운하고, 씁쓸하고, 아쉬웠다. 당분간은 계속 그럴터였다.

 

이젠 다른 이야기를 해보자. 줄거리가 희미함에도 달의 궁전을 다시 보고 싶은 마음이 들진 않는다.

내 기억에 그의 사람들은 늘 끝에 몰려있다. 작가는 책 속의 인물들을 감탄하리만큼 잘 쓰여진 글자로 위협했다. 

또다시 그 부분을 읽고 싶지가 않다. 지금 당장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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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장솜이 예전 것과 틀리던데?


일요일 낮이었고, 동생과 나는 알라딘 중고 서점과 올리브영에 들른 후 집에 돌아온 참이었다. 

엘리베이터 앞에서 동생은 한 손에 비닐 봉지를 들고, 나머지 한 손으로는 자신의 뺨을 쓸었다.

누나가 이번에 준 화장솜 말이야. 얇아서 불편해. 전에 것이 더 좋았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동생을 쳐다봤다. 


몇달 전이었다. 주말에 집에 온 동생이 내방에 들어와서 스킨을 찾는다. 

화장품이 뒤섞여 엉망인 내 책상에 혀를 끌끌 차더니 늘 하던대로 스킨을 손바닥에 톡톡 덜어 얼굴을 두들긴다. 

난 동생 손을 잡았다. 그리고 화장솜을 뽑아 동생 손에 들려주고는 스킨을 적셔준다. 

이렇게 해봐. 이렇게 하면 먼지가 닦이면서 피부 정돈을 할 수 있어. 그 뒤에 다시 스킨을 발라주는거야. 

이걸 몇 번 반복하면 촉촉한 피부를 얻을 수 있지. 동생은 남자가 무슨 화장솜을 쓰냐며 질색한다. 하지만 난 거듭 말했다.

알고 있겠지만 이번 생에 절대 미남이 될 수 없어. 그러니 노력해봐. 잠깐의 창피함을 이겨내면 피부 미남이 될 수 있어. 

어차피 스킨 바를 땐 옆에 아무도 없잖아? 기숙사에서는 혼자 방을 쓰고 있고, 애인도 없으면서.

진지하게 말하긴 했지만 반 장난이었다. 하지만 동생은 설득이 됐다. 

그래서 그 뒤에 벌어진 상황은 나 조차도 놀랬다. 

그 날 숙소로 돌아가는 동생의 가방엔 내가 쓰던 각질 토너와 역시 내가 쓰던 화장솜 한통이 담겨있었다. 

톡에 혼자 방에서 화장솜으로 얼굴 닦을 때 동료가 들어올까봐 걱정이 된다는 글을 필두로 각질 토너 다 썼는데 어디서 구입을 해야하느냐, 나는 화장솜 쓸 때 절반으로 나눠 쓰는데 그 걸로도 충분하다 따위의 글들이 올라왔다.

세안 후 얼굴을 화장솜으로 닦아내는 과정은 나도 상당히 귀찮아서 자주 생략하기도 했는데

동생은 진짜로 피부 미남이 되기로 할 작정이었는지 열심이었고, 결과물 또만 만족스러웠나보다. 


화장솜이 다른 것은 맞아. 내가 말했다. 기존에 쓰던 건 프랑스제 천연 화장솜이야. 두껍고, 부드럽지. 비싼만큼 좋은거고.

이번에 산 것은 인터넷으로 화장품 살때 가격 맞추려고 산거야. 대용량이고, 싸고, 얇아. 그래서 잘 찢겼을 거야.

띵 소리와 함께 문이 열리고 동생과 난 말 없이 엘리베이터에 오른다. 잠깐의 침묵 후에 내가 말했다.

일단 그거 쓰고 있어. 내가 프랑스제 구입해서 놔둘테니 추석에 가져가라. 

원하던 답이었나보다. 이제는 진짜로 피부 미남이 된 동생이 온 얼굴에 가득 미소를 담고 말한다.

그것도 종류가 몇개 되는 거 알지? 네모난 거 말고 동그란 것으로 사. 뭐 남성용으로 알콜이 든 화장솜이 있다고 보긴 했는데 난 그런거 싫어하니깐 그냥 화장솜 사두면 돼. 꼭 동그란 것으로. 동생의 손에 들린 비닐 봉지가 유달리 달랑 거린다. 

담긴 것은 러쉬사의 팩이었다. 당연히 동생 것이다. 유명한 팩인데 몰랐냐는 동생에게 난 실제로 몰랐지만 알은 체를 했었다.

현관문을 열고, 동생이 먼저 들어갔다. 뒤 따라가는 내 눈이 점점 더 가늘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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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에서 깼지만 깨지질 않는다.

눈도 떴지만 떠지질 않았는데 그렇다고 감긴 것도 아니어서 난 조심조심 침대 모서리를 더듬으며 실내화를 신는다.

친구는 벌써 일어나 신나는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입고 있었다.

눈도, 코도, 볼도, 온 몸이 그야말로 빈틈 없이 야무지게 부은 상태로 서 있으려니 친구가 말한다.

나 너무 개운한 것 같아.

그녀는 술을 알맞게 마셨고, 그로 인해 적당히 취한 채 잠들어 일찍, 그것도 가뿐하게 일어났다. 

화장실도 다녀와서 너무 시원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자신의 말에 전혀 거짓이 없음을 알려준다.

난 술을 거의 못 마셨고, 책을 보느라 늦게 잤는데 울면서 잠든 탓에 하룻밤 사이 팅팅 부었다.

화장실을 못 가서 배도 더부룩 했다. 


 

 지하철보다 버스로 형무소까지 가는 것이 더 낫다는 친구의 판단에 버스에 오른다.

 서대문 형무소까지는 몇 코스 되지 않지만 버스 안에서 난 굳이 책을 꺼내놓는다.

 의도치 않게 가져와 날 힘들게 한 녀석. 그래서 기어이 읽어주리라 다짐했다.

 매고 온 가방은 여행을 오기 전까지 데일리 가방이었다.

 난 데일리 가방엔 비교적 최근에 구입한 책들을 하나씩 넣어두곤 했는데

 근래엔 출근을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으로 한 탓에 책도, 독서도 모두 망각 했나보다.

 그래서 토요일 급히 나오면서 아이패드와 크레마를 교환하고, 화장품 가방을 담으면서도 

 바닥에 깔린 책은 발견하지 못 했다.

 무거운 가방은 수첩 대용으로 쓰는 노트와 늘어난 화장품 파우치로만 생각 했것만... 

 주인도 알지 못하게 바닥에 엎드려 자신을 어둠 속에 감추고선

 당당히 무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호텔을 나오기 전 정리를 위해 가방을 뒤집어 물건을 쏟아낼 때 툭 떨어지는 녀석의 모습이라니... 

아~ 이게 머야!!! 내 비명에 조식을 먹기 위해 문 앞에서 오맹불망 나를 기다리던 친구가 쳐다본다.

친구는 배가 고팠고, 그녀보다 늦게 일어났기에 씻는것도, 옷 입는 것도 느렸던 나를 기다리느라 지친 표정이었다.

별일 아니라며 친구에게 손짓을 하는 내 얼굴은 울상이 되서 갓 쪄낸 찐빵마냥 뜨거워졌다.

옷과 같이 택배로 보낼까? 고민을 하면서 그나마 부피를 덜 차지하도록 노트와 크레마 앞 쪽에 꼭 겹쳐 세워둔다.



앰브로즈가 죽었다. 죽기 전 그는 요양을 위해 여행을 떠났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기묘한 야량을 지닌 그는 어릴때 고아가 된 필립을 데려다가 연민으로 키웠다.

필립에게 앰브로즈는 아버지였고, 형이었고, 후원자였다. 앰브로즈에게 필립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였다.

기묘한 아량이라는 말은 내 표현이 아니라 작가가 실제 책에 쓴 말이다.

도착하는 여행지마다 오던 앰브로즈의 편지에 언젠가부터 사촌 레이첼이 등장한다.

그 시점에서 난 앰브로즈가 레이첼을 사랑하게 됨을 예상 할 수 있었는데 필립도 같은 생각이었는지는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앰브로즈는 오랜 시간 여성에 대해 냉소적이었고, 늘 필립이 우선 순위였기에 사촌으로 등장한 레이첼이 

마침내 아내가 되었을 땐 필립의 마음은 배신감과 상실감으로 가득찼다. 그래서 그녀를 질투했고, 나중에는 경멸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필립과 앰브로즈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알기에 책을 읽고 있는 나 역시 필립과 같은 마음이어서 앰브로즈의 죽음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 필립에게 레이첼이 전갈을 보내왔을 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지 이여자? 와서 뭘 어찌하겠다는 거지? 와서 앰브로즈의 재산을 가로채기라도 하려는 건가?

책을 읽는 나도 필립도 그녀를 의심하고 싫어했다.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드디어 두 사람은 저택에서 마주쳤고, 필립도 레이첼도 서로를 보며 당황한다. 레이첼에게 필립은 또 다른 앰브로즈 였고, 필립이 마주한 상복 차림의 레이첼은 그가 상상한 것 처럼 나이가 들었다던가 화려하다든가 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작고, 소박했고, 눈이 컸고, 앰브로즈의 필립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름답다. 내가 말했다.

친구와 나는 아직 오픈 전인 서대문 형무소 앞에 서 있었는데 내 말에 친구가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는

앞으로 보이는 나무들을 가르키며 저 곳이? 라고 물었다. 

아니. 문장과 문장이 이어지는 페이지의 섬세한 글들이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대답하려는 찰나 9시 30분이 되었고, 문이 열렸기에 우리는 매표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난 들고 있던 책을 가방에 넣고, 어깨 끈을 단단히 잡아당긴다. 

아직 덥진 않았지만 곧 더워질 것이기에 팔목까지 내려오는 겉옷의 소매를 걷어올리기도 했다. 


친구와 헤어져 전시실을 돌아보며 앞에 쓰여진 안내문을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 읽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늘 영상과 사진에서만 보던 그 방에 들어섰다. 빼곡히 사진으로 도배된 그 방.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자식들이었고, 형제들이었을, 우리의 아름다운 이웃이었을 분들

벽 한켠에서 사진들을 바라보는 내 코 끝이 찡해진다.

부탁하건데 지금의 나에게 과연 이 분들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할 수 있을수 있느냐 묻지 않았으면 한다.

난 그 분들이 받은 고통을 알고, 그 분들의 최후를 알고, 그 분들의 후의 삶을 알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열정은 현실과 타협으로 고개를 숙였는데 대신 이기적인 마음과 불안감이 한켠에 크게 자라 있었고,

내 가족과 내가 겪을 삶에 대한 공포는 손쉽게 내 의지를 조정한다.

그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조국을 위해 나섰던 그 분들을 따라가겠다고 바로 대답이 나오지는 못할 것 같다.

이런 내가 너무 싫고, 부끄럽고, 한심하다. 그렇기에 이 분들이 더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난 언제나 비치된 모든 글들을 꼼꼼히 읽어서 진행이 느렸는데 그럴때면 앞쪽의 관람객과는 멀어지고 뒤에 있는 관람객은 나를 앞지르곤 했다. 그런데 웬일로 내 앞에 가던 모자는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일정하게 걷는다.

배낭을 맨 편한 차림의 엄마가 일곱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에게 안내문을 손으로 짚으며 설명을 해준다.


잘 봐. 여기가 먹방이래. 이 좁고 어두운 곳에서 생활하면서 얼마나 많이 힘드셨을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야구 모자를 쓴 아들은 뒷 모습은 지루함이 묻어있다. 그래도 용케 엄마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지 않고 따라다닌다.

응. 힘들었을 것 같아.

그렇지? 이런 곳에서 힘들게 생활하신거야. 나라를 위해서. 우리 아들은 어떤 생각이 들어?

엄마의 질문에 아들이 뭔가 대답을 했는데 이때쯤 난 그들과 벌어지기 시작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엄마는 아들의 귀를 가볍게 꼬집기도 했고,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고, 팔을 쥐었다 폈다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꼭 잡고서 천천히 이동을 한다. 안내문이 나오면 엄마가 읽어주고, 질문을 했고, 아들은 대답을 했다.


그걸 보면서 난 웃었다. 그리고 바래본다.

아직 오지 않았고, 오게 될지 아닐지도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언젠가는 왔으면 하는 내 미래의 모습이기를


종묘로의 이동도 버스가 더 낫다고 친구는 말했다. 버스에서 내려 종묘로 가면서 난 풀린 소매를 다시 단단히 걷어 올린다.

날이 뜨거워서 도로도 뜨거웠고, 신발을 통해 발바닥으로도 뜨거움이 올라왔다. 

세시간을 걸었던 탓에 종아리가 많이 아팠는데 어깨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시원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근처에는 마땅한 카페가 보이질 않아서 그냥 묵묵히 종묘를 향해 걸을 뿐이었다.


해설사는 30명이 조금 넘는 관람객을 그늘로 이동을 시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역사와 궁궐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이유때문에 지금 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과거에 쓰였던 종묘 관리소에 대해 설명을 하고는 그 옆에 건물을 가르키며 저곳은 지금의 종묘 관리소라고 알려준다.


제가 굳이 이 현대 건물을 설명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 건물은 아마도 지금은 중요하지 않겠지만 앞으로 데려온 자녀들이 크게 되면 그 또한 역사가 될 겁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주세요. 그래서 후에 다시 방문해 그런 부분을 기억하고 보게 되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이렇게 종묘를 보기엔 정말 좋은 날이죠.

그리고 잠깐 서로간의 대화를 멈추고 주변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세요. 평소에 듣기 힘든 소리들을 들어 보세요.

 

잠깐동안 주변의 말 소리가 줄어들었고, 난 해설사의 말대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실제로 주변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나무밑으로 자그마한 동물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어어, 하는 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는 나무 아래에선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도 들렸다.

문득 몇 년전 홀로 했던 여행이 생각났다. 여러번 망설이다 결국엔 가방을 매고 갔던 제주도.

눈 보기가 힘든 제주도는 그 날따라 강풍이 불었고, 내가 막 비자림으로 들어 선 순간에는 함박눈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하얗게 덮였던 비자림에서 어느새 난 이어폰을 빼고, 깊숙히 눌러쓴 모자를 벗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주변은 온통 하얗고, 모든 게 정지한 듯 했다. 그 시간, 그 공간은 처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작게 새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커졌다. 바람이 불자 가지들이 서로 몸을 부벼대며 쏴아 소리를 냈다.

내 숨소리가 들렸고, 심장 소리도 들렸다. 심지어 내가 내뿜는 입김에도 소리가 들렸다.

귀에서 빼낸 이어폰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고, 내 몸에도 눈이 쌓여 주변과 동화 되어갔다. 

순백의 공간은 내 머릿 속도 침투해서 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숲 속에 오롯이 나 혼자 서 있었다. 

그때의 기분이, 그 느낌이 떠올랐다.

 

종묘 투어는 마지막을 향해갔다. 이제는 할당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해설사가 손짓을 하며 관람객을 부른다.

 

여기 오세요. 이쪽으로요. 그러면서 사진을 찍으려 이동하려는 사람들을 말린다.

사진은 좀 더 나중에 찍으시고 우선 여기 와서 정면을 보고 눈으로 담으세요. 

사진에 담으려 하지말고 마음에 담으세요. 이 곳이 어떤 곳인지 건물만 보지 마시고 새겨주세요. 

이건 저의 부탁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곳에 어쩐 분들이 모셔져 있는지 어떤 용도로 사용 되었는지 알려주세요. 

정말 좋지 않습니까? 입장료 천원 한장으로 우린 이렇게 많은 것을 보고, 알아 갈 수 있습니다.

 

난 해설사의 말에 탄성을 지른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족 단위로 온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아이들이 너댓명 된다.

어떤 아이는 한눈을 팔며 뒤에 있는 풀을 뜯으며 놀고 있었고, 어떤 아이는 아빠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몸을 꼬고 있었다.

또 다른 아이는 얌전히 엄마 무릎에 앉아있었고, 너무 어린 한 아이는 유모차에서 부모의 부채질에 눈만 똘망똘망 뜨고있다. 

그렇지 내가 지금 이곳은 지금의 역사만이 아니라 미래의 역사도 될 터였다.

너무 지루하다며 보채는 아이에게 아빠인듯한 사람이 말한다. 

지루해도 봐야지. 이건 역사야. 원래 역사가 지루한 부분이 많아. 하지만 재미있는 부분은 더 많아.

친구는 해설사의 말을 안내문에 받아적느라 여념이 없다. 


난 주변 말소리와 섞여 들려오는 새 소리를 들으며 그때 제주도의 비자림에서처럼 말 없이 역사의 한 부분에 서 있었다.

고집을 부려 종묘에 오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마를 하느냐는 물음에 레이첼은 잘 못한다고 대답하며 어쩌면 필립이 도와주면 탈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분명하다. 그녀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 문장에 그게 담겨 있었다. 

필립이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바랬다.

하지만 필립은 이런 내 마음을 모른다. 직접 레이첼을 말에 태워 영지를 구경 주겠다는 그의 말에 난 절망한다.

레이첼은 주택의 고용인들과 영지의 소작인들, 마을 사람들에게 주인마님으로 불리우며 인정 받는다.

오랜 시절 여성의 손길이 없었던 저택은 생기가 돌았고 향기가 났다.

필립은 앰브로즈에게 받은 두통의 편지를 레이첼에게 보여 주었다. 편지 속의 앰브로즈는 온통 레이첼을 의심하고 있었다.

레이첼은 자신의 남편이 병을 얻었고, 그로 인해 성격이 변해 자신을 감시했다고 털어놓는다.

편지의 내용은 일정부분 맞지만 그렇게 된 건 레이첼이 아니라 앰브로즈 때문이라는 거였다.

레이첼은 앰브로즈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앰브로즈는 편지를 통해 레이첼이 뭔가 저질렀다고 믿었다.

필립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중에 죽은 앰브로즈가 아닌 레이첼을 믿고 만다. 

그렇게 되버렸다. 애초에 그렇게 될 일이었다. 필립의 마음 속에서 자라던 레이첼에 대한 복수는 점차 희미해진다.

 

난 친구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이어폰을 빼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전날 호텔에서 숙면을 취했다고 본인이 직접 말해 놓고는 기차에 올라서도 단 한번도 깨지않고 잘도 잔다. 부럽기도 하다.

난 친구가 자는 동안 왼쪽 손목이 시큰거려서 양손으로 번갈아 책을 들었고, 손목을 돌리고 털어서 통증을 줄이기도 했다.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어서 오가는 카트를 기다리다가 안 오는 것에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일어나서 자판기를 찾으러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책만 보고 있었는데 읽는 내내 인상을 쓰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글인데 읽으면서 이렇게 화가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 향수병 걸린것 같아. 가방을 챙기며 일어서다가 친구의 말에 난 웃어버린다.

설마 너 고향이 광주인 걸 아직도 몰랐던 거니?

알아. 친구는 하품을 했다. 향수병 걸린 것 같은 기분이야. 다시 서울 가고 싶어.

친구의 말을 뒤로 하고 난 아직도 시큰거리는 손목을 탈탈 털며 플랫폼에 내려섰다.

 

레이첼은 돈 한푼 물려받지 않은 미망인이라는 가여움을 필립에게 심어주면서도

거기에 넘어가서 필립이 내민 호의를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양 눈물 짓고, 한숨을 쉬며, 답답해 한다.    

나는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안다.

글을 읽고 있는 나 뿐만 아니라 언제나 필립 곁에서 친구가 되어주는 루이즈도 알지만 필립는 모른다. 모른 척 한다.

 

아 필립... 그녀와 결혼한 앰브로즈가 남긴 유언장에 그녀가 없는 이유를 조금만 추리 해봐.

왜 자신의 아내에게 왜 한푼도 남기지 않았을까? 옆에서 조언하는 루이즈의 말을 질투로 인한 것이라 치부하지 말아줘.

대부와  앰브로즈의 편지를 통해서 필립은 레이첼에 대한 경고를 받지만 25살 생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이 젊은 영주는 불길하게 피어오르는 의심은 단숨에 꺼 버리고 그 자리에 순수한 사랑의 불씨를 던져 놓는다.

첫 사랑이었다. 그에게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 열정의 상대였다.

 

필립. 어리지만, 믿음직하고, 똑똑하면서 어딘가 보호해주고 싶은 필립.

자신을 옆에서 에스코트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사촌이라고 부르며 웃고, 자신과 관련된 남자들에 대한 질투를 굳이 숨기려는 수고조차 않은 채 온 힘을 다해 사랑을 호소하는 그에게 레이첼은 어떻게 끌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왜 이곳으로 오라고 했어요?" 그녀가 물었다.

"당신을 비난하려고요."

"무슨 비난요?"

"그건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의 가슴을 찢어놓았으니 살인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다음엔요?"

"거기까진 계획하지 않았어요.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이 고통을 겪게 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지켜 볼 생각이었죠. 그런 다음엔 떠나보내려 했던 것 같아요."

"너그럽네요. 내가 받아야 할 대우보다 너그러운 처사에요. 그래도 당신 계획대로 성공은 한셈이에요. 원하는 걸 손에 넣었잖아요. 당신 성에 찰 때까지 계속해서 나를 지켜봐요."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무언가 변화가 일었다. 얼굴은 아주 창백하고 평온했다.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발로 짓이겨 그 얼굴을 가루로 만든다고 해도, 두 눈동자만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절대 뺨으로 흘러내리는 일도 없고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앰브로즈는 내가 형편없는 군인이 될 거라고 늘 이야기했죠. 난 냉혈한이 되어 총을 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내 어머니는 내가 기억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여자가 우는 건 본적도 없어요." 나는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벽난로 앞 의자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촌, 2층으로 올라가세요." 내가 말했다.

 

필립이 레이첼에게 사촌이라고 부르는 부분에 심장이 가늘게 떨린다. 

무심코 어떤 남자가 내 귀에 커즌이라고 속삭이는 걸 상상해버렸다. 단호하고 냉정하다.

1951년에 발표 된 소설의 대사들은 깍뜻한 예의 속에 세련됐고, 유머스러웠다.

말들의 향연에 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최근에 이런 문장을 본적이 없다.

읽는 내내 앞으로의 내용이 구상적으로 그려지지만 그 과정이 지루하지 않고, 섬뜩하게 아름다우며 절묘하다.

작가는 피 한방울 등장 시키지 않고 주인공을 막장으로 몰았다.

난 저릿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까지 그 과정을 함께 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깨닫자 그 뒤는 순식간이었다. 필립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너무나 커져서 집착으로 변했다. 

그는 그녀 주변의 모든 것을 질투했다. 심지어 이미 죽은 그녀의 남편이었던 앰브로즈 마저도 질투 했다. 

질투를 통해 레이첼에 대한 사랑을 키웠고, 질투 때문에 마지막엔 그녀를 놓았다.

 

25살 생일을 앞두고 책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필립은 그가 상속 받을 유산을 레이첼에게 넘긴다는 서류를 작성했다.

그건 자신의 생일에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었고,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니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녀에 대한 열정과 숭배의 증표였고, 필립이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난 정말 이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책 속에 들어가서 레이첼을 밀어내고 필립에게 호통을 치고싶다.

정신 차려 필립. 이 여잔 앰브로즈를 죽였고, 너에게도 해를 입히려 하고 있어. 

이렇게나 빤히 보이는 데 왜 너는 모르는거야.

하지만 난 책 속에 들어갈 수 없고, 레이첼이 앰브로즈를 죽였다는 건 반복해서 쓰여진 원예에 대해 많은 상식을 가졌다는 레이첼의 모습에서 짐작한 것이지 실제로 그녀가 죽였다는 건 나오지 않았다.

레이첼을 미워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통했다. 난 레이첼이 너무 싫다.

 

앰브로즈는 죽기 전에도 사후에도 필립에게 편지로 계속 레이첼에 대한 경고를 한다.

사후에 작성된 그의 편지는 분명히 필립에겐 도착하지 못 할 처지였지만 필립에 대한 앰브로즈의 강한 사랑은 순탄치 않은 경로로도 어떻게든 필립의 손에 편지를 쥐어준다. 필립은 레이첼에 대한 사랑으로 앰브로즈의 의심과 본인의 복수를 덮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착각일 뿐. 앰브로즈는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고, 끊임없이 경고했다. 


"나의 골칫덩이 레이첼이 마침내 내게 일을 저질렀다." 필립은 그의 경고를 못내 무시하려 했고, 무시했다. 그랬던 그는 자신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던 생일 날 이후 갑자기 변해버린 그녀의 태도에 당황하고, 폭주한다. 대부와 루이즈 말대로 그녀는 애초에 돈이 목적이었다. 끝내 모른 척 했던 필립은 그 사실이 변명의 여지 없이 들어난 후에도 레이첼에게 계속 사랑을 갈구한다. 그에게 돈은 중요치 않았다. 오직 레이첼만을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냉랭하다. 

그녀는 필립과 다르게 돈이 중요했고, 재산을 얻었으니 그녀의 사랑도 끝이났다.


묘한 방식이긴 해도 레이첼은 나름대로 우리를 사랑했다고 나는 믿었다. 다만 우리가 필요 없게 된 것뿐이었다.

 

이젠 필립의 마음 속에도 작았던 의심이 조금씩 커진다. 모든 것을 잃은 지금에서야 주변의 말들이 들린다.

이탈리아에서 온 레이첼의 자산 관리인인 레이날디에게 온 편지를 찾기 위해 뒤진 서랍에서 발견 한건 독으로 쓰이는 열매였는데 필립은 앰브로즈의 편지 속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편지 속의 앰브로즈는 갑작스런 열병과 통증과 구토에 시달린다고 했다. 레이첼은 그런 그를 최선을 간호했다고 말했다.

필립은 열병에 걸렸고,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레이첼은 죽어가던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살아났다.

어느 쪽인 진짜인지. 어느 부분까지 믿어야하는 건지. 필립의 혼란스러운 마음 속에서도 여전히 레이첼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의심도 커져서 두 개의 마음이 팽팽한 균형을 이룬다. 

그러다 잠시 의심쪽에 추가 더 놓아져서 균형이 무너졌을 때 는 산책 나가는 레이첼을 붙잡지 않았고, 

정원 공사장의 일꾼이 아직 공사가 덜 끝나서 주의해야 한다는 다리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레이첼이 산책으로 집을 비운 사이 필립은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나오질 않는다. 


작가님 왜 이러세요. 이제 책은 열장도 남지 않았는데 증거는 어디에 있나요? 나는 숨이 막힐 것 같다.


겨우 찾은 편지엔 레이날디의 손을 빌려 써진 필립을 걱정하는 레이첼의 모습. 그녀는 분명히 독을 가지고 있고, 그걸 사용했다고 필립도 나도 생각했지만 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찾을 수가 없는 건지. 원래 없었던 건지 모호한 그때 의심쪽으로 기울었던 추가 다시 균형을 맞춘다. 필립은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지 않은 레이첼을 찾아 달려나간다. 레이첼은 다리 아래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필립은 그녀의 손을 잡지만 숨이 멎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필립이 아니라 앰브로즈였다.

 

난 계속 레이첼이 앰브로즈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을 보는 순간 내 그런 생각에 의구심이 든다.

난 공연한 사람을 오해 한걸까? 동시에 여러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레이첼은 앰브로즈를 정말 사랑한 건가? 그녀는 정말 앰브로즈를 독살 했고, 마찬가지로 필립을 죽이려 한 걸까?

레이첼의 죽음은 자신의 저지른 죄에 대한 댓가였을까? 아니면 오해로 인한 애처로운 죽음이었을까?


방문이 열리고 엄마가 불쑥 내 방에 들어 왔을 때 난 아직 엎드려 있었고, 

소설의 처음과 끝을 반복해서 읽으며 글 속에 있는 포터닝스 교수대가 어떤 의미인지를 곱씹는 중이었다.

엄마는 늘어진 티를 입고서 눌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충혈된 눈으로 안자냐고 묻었다.

내가 몸을 일으켜 책상 위의 시계를 본다. 또 날을 넘겨서 일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 됐다.

이제 자려고. 대답하며 집에 도착 후 한쪽에 던져둔 가방을 열어 내일 출근과는 상관 없는 물건들을 꺼낸다.

목과 어깨가 그리고 종아리가 뻐근했다. 

집에 오자마자 한풀이를 하듯 큰 컵으로 가득 커피를 마신 탓에 피곤했지만 눈은 초롱했다.


옛날엔 포터닝스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하지만 더는 아니다.


무슨 의미인 걸까? 손목이 시큰거리기 시작해서 난 책을 덮었다. 

집에 도착한 것은 몇시간 전이지만 책을 덮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내 여행도 끝이 난 기분이다.


불을 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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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자기가 가봤던 블루스퀘어 서점이 얼마나 좋았는지 종종 말하곤 했다.

위에서 내려오는 등이 책 모형이야. 여기 저기 앉아서 쉴수도 있고, 분위기가 너무 좋아. 

그래서 이번 서울행에 꼭 거길 같이 가봐야 한다고 했다. 하지만 난 그때 서점에 대해 별 감흥이 없었다.

책으로 가득찬 서점은 언제나 설렘과 흥분을 주었지만 이 날은 읽을 거리가 크레마에 가득이었고,

무거운 가방엔 마음에 드는 책을 있던들 바로 구입해서 담지도 못 할터였다.

게다가 파주 북소리에서 가득 꽂힌 서가는 나름 만족스러워서 

여기보단 블루스퀘어 서점이 훨 나아 라고 이야기하는 친구에게 

아 그래? 맞장구를 쳐주긴 했어도 

서점은 서점이야. 서점은 그냥 책이 있는 곳이야. 그 책들이 주는 분위기는 서점마다 다 틀려 라는 혼자만의 생각을 한다.


서점은 딱 친구 말대로였다.

책이 많았고, 여기 저기 앉아서 책을 보거나 쉴 수 있는 의자가 있었고, 위에서 내려오는 등은 책 모형이었다.


좀 이따가 다시 만나~

친구는 손을 흔들곤 서가 사이로 사라졌다.


난 서점 중간에 오도카니 서서 친구를 바라보고, 

아동용 책장 사이 앉아 있는 부부와 그들의 귀여운 애기를 바라보고,

복층처럼 위치한 책장 앞 의자에 앉아 아래의 오고가는 사람들을 보고 있는 커플을 바라봤다.

유리벽으로 보이는 테라스의 사람들을 바라봤고, 

책장 사이 조그만 의자에 앉아 홀로 책을 보고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고, 

서점내 커피 전문점에 줄을 서 있는 사람들을 바라봤다.


난 지금 뭘 해야하나. 

가방은 무겁고, 옷도 무겁고, 다리도 무겁다.


사람들을 피해 한쪽 책장으로 비켜서니 익숙한 사진이 커버로 쌓인 책이 보인다.

피 묻은 칼을 들었고, 얼굴 또한 피가 묻어 날카롭게 앞을 응시하고 있는 이준기였다


언젠가 같이 일하던 레지던트가 드라마 달의연인-보보경심에서 

강하늘과 아이유의 절절한 애정신이 참으로 좋았다 라고 했었다. 두 손을 가슴에 꼭 모은채로

중국에 드라마가 먼저 나왔는데 그때 등장하는 남자 배우들이 모두 변발을 했음에도 꽤나 인기가 좋았다 라고도 했다.

볼만한 드라마가 있느냐는 내 질문에 대한 답이었고, 보보경심과 구르미그린달빛을 권해 주면서 한 말이었다.


개인적으로 로맨스는 싫어하진 않지만 그렇다고 따로 찾아 볼 정도로 좋아하진 않아서,

아니 시간 맞춰 드라마를 따로 챙겨보지 않아서가 맞겠구나.

이런 저런 이유로 당시에는 보지 않았던 드라마들을 최근에 몰아보기 시작 했는데 그 중 하나가 달의 연인이었다. 

비록 레지던트가 좋았다는 강하늘과 아이유의 이야기가 담긴 초반 이후로는 중단 했고,

그 뒤에 본 구르미그린 달빛도 비슷한 회차에서 중단하긴 했어도 대충의 줄거리는 알고 있엇다.

궁금해서 변발의 남배우들이 나오는 중국 드라마를 찾아 보기도 했지만 역시 초반에 중단했다.


난 로맨스 소설은 읽은 적이 거의 없다.

하지만 읽지 않아도 

드라마 성균관 스캔들과 해를 품은 달이 드라마화 되기 전에 미리 내용을 알 수 있을 정도로 접해 있기는 했다. 

세상의 모든 로맨스를 다 자기것화 했던 여동생이 책이건 드라마건 조곤 조곤 이야기를 해 준 까닭이다.

시집 가기 전 여동생은 티비 앞에 앉아 로맨스 소설을 들고 있었고, 난 컴퓨터 앞에 앉아 미드를 보며 게임을 했다.


그래서 왕에게 날리는 살을 여주인공이 받아내는데...  

여동생이 말을 하면 몬스터를 향해 열심히 마법을 날리며 난 물었다.

살을 왜 날리는거야?

왕을 해하려고 날리는 거지

그걸 여주인공이 받아낸다고?

응! 그래서 그 뒤에 어떻게 되냐면.......



잠시 이준기를 바라보다가 첫 페이지를 펼친다.


- 때는 한여름이었다. 초봄의 새파란 새싹은 봄날이 온 걸 기뻐하는 것처럼 가벼운데 한여름의 초록 잎은 그에 비해 묵직했다


고개를 든다. 로맨스 소설 아니던가?

잠시 정면을 바라보다가 주위를 둘러보며 앉을 곳을 찾기 시작했다.

아까 전에 본 부부와 애기가 자리를 비워 아동용 책장 앞에 작은 의자가 비어있다.

사람들이 오면 비워주기로 하자 생각을 하고 가서 가방을 내려 놓고 자리를 잡았다. 



   교통사고를 당해 정신을 잃었던 현대의 25살 장효는 

   청나라 강희제 시절 8황자의 측복진 동생인 귀족 가문의 마이태 약희로 깨어난다.

   약희가 후에 십황자의 부인이 될 곽라라 명옥과 한바탕 싸움을 할때 

   난 아동용 서가에서 다른 의자로 자리를 옮겼다.

   치렁한 옷자락을 밟아 넘어질 뻔 해서 책을 놓칠새라 꼭 쥐고 의자에 앉아 있으니

   얼마 안 있어 친구가 다가와 건너편에 앉는다. 

   내가 말했다.

   가려면 말해. 난 좀 읽고 있을 게.

   친구는 재미있으냐 물었고, 

   나는 겉표지의 이준기 사진때문에 편견에 사로 잡힌 이상한 기분이 들어 대답을 한다. 

  


쉽게 읽혀. 재미도 있고, 그런데 좀 오글거려.

친구는 책으로 고개를 돌렸고, 나도 다시 읽기 시작했다.


13세의 약희는 어리지만 실제 그 안의 영혼은 어리지 않기에 그 시절 약희가 보여주는 현대 여성의 행동은

늘 다른 사람의 눈에 띄었고, 매력적이었다. 그래서 사랑을 받았고, 그 때문에 위험에 처하기도 했다.

8황자에게 귀한 팔찌를 선물로 받았지만 팔찌의 원래 주인은 자신의 언니인 측복진 약란이란 걸 알게 된 약희가

팔찌를 빼려하자 좋아하는 사람에게 준거라며 8황자는 빼지 못하게 한다. 

언니를 좋아 해서 2년간 그녀를 기다렸던 그가 이제는 동생인 약희를 부인으로 맞겠다 말한다.


자 이제는 다들 예상 가능하겠지만 이상하면서도 너무 당연한 로맨스 공식인 주인공 심리 상태가 나온다.


약희는 자신의 언니를 사랑하는 마음과 8황자가 언니에게 보여준 사랑을 알면서도 자신의 팔목의 팔찌는 빼지 않는다.


갈까? 친구의 목소리가 들렸다. 읽고 있던 책은 다시 꽂아 뒀는지 어느새 빈손이었다. 나도 책을 덮고 일어섰다.

블루스퀘어 근처에 있는 디저트 카페는 눈이 핑 돌아갈 예쁜 케이크들이 많아서 정신 없이 구경을 했다.

다 맛 보고 싶었고, 다 사가고 싶었다.

이동을 해야 하기에 좀더 보관이 쉬운 빵을 사들고 애초에 계획했던 케이크는 포기를 했더니 

아쉬운 마음이 들어 괜히 진열장 유리를 더듬었다.


이제 숙소에 돌아가서 짐을 놓고 나와서 전 집을 가자.

우리는 들뜬 마음이었고, 편의점에서 맥주와 안주를 사면서 모든 게 계획대로 되리라 생각 했었다.

숙소에 도착한 친구는 한쪽면 절반을 채운 유리창에 탄성을 지르더니 

옷을 벗고 목욕 가운만 걸치고는 침대에 올라 창 밖을 향해 만세를 부른다.

나가기로 한 거 아녔어?

친구는 좀 앉아서 맥주 좀 먹고 나가자고 했는데 그 말을 들은 난 아마도 오늘 일정은 여기가 끝이 될거라 짐작을 한다.

이제 5시가 갓 넘은 시간이었다.

웃으며 친구와 같은 복장에 같은 자세로 누워 티브이를 켜서 야구 중계를 틀어 놓는다.


맥주를 냉장고에 넣고, 마른 안주와 빵은 테이블이 없어 대신 의자를 끌어다가 펼쳐놨다.

침대에서 의자로 손을 뻗기가 힘들었던 난 그냥 바닥에 앉아 빵을 먹기 시작했는데

한 손으로 먹다가 떨어진 빵 부스러기를 쓸어 모으고 한 손으론 크레마를 켰다.

그리고 맥주를 냉장고에 넣기 전, 친구가 화장실에 갔을때 모바일로 결제를 한 보보경심을 다운 받는다.

로맨스 소설을 구입한 나에게 놀라워 하면서, 결제 버튼을 누를때 딱히 고민을 안 했다는 사실엔 더 놀라웠다.


약희는 궁녀가 되어 자금성 생활을 시작한다. 

건청궁에서 황제에게 드릴 차를 끓이면서 한국에선 이준기가 역할을 맡았던 4황자와 본격적으로 엮기기 시작한다.

현대에서 이미 4황자가 옹정제가 되는 것을 아는 약희가 앞으로 황제가 될 그에게 단순히 밉보이기 싫다는 의도로 시작된

그의 대한 정보 캐기는 여러 사람들과 당사자인 4황자에게 엉뚱한 오해를 불러 일으키게 된다.

그리고 그러한 과정을 겪으면서 4황자는 약희에게 관심이 가게 된다. 그래서 키스를....


그렇지~ 이렇게 되는거지~ 실실 웃고있으려니 안치홍이 안타를 친다.


맥주를 손에 든 친구가 두 손을 머리 위로 들었고, 나도 같이 두 손을 들고 좌우로 왔다 갔다 흔들며 노래를 한다.


안타 치고~~~ 도루 하고~~ 


기아는 3회에만 9점을 냈다.

냉장고에서 맥주를 하나 더 꺼내 온다. 바닥에 다시 앉아 맥주를 마시고, 쥐포를 먹고, 맥주를 마시고, 빵을 먹었다.

친구도 맥주를 마시고, 쥐포를 먹고, 다시 맥주를 마시고, 과자를 먹는다. 손으로는 침대를 내리치며 응원가를 부른다.


내가 말했다.

화순고 김선빈이 처음 기아에 올때 내가 엄청 신나했잖아. 기억나? 친구가 고개를 끄덕인다.

친구는 한참 김종국 선수에게 빠져있던 시기였는데 

경기 후 정류장에서 그땐 갓 신인이었던 김선빈을 알아보며 인사하니 좋아하더라는 말을 해준다.

그 김선빈이 결혼을 한 건 알아?

친구 눈이 두배는 더 커진다. 

선수에 대한 열정은 예전과 달라져서 순위와 점수만 보는 친구임을 알기에 

아마도 이사실은 모를 거라 생각하고 이야기를 한건데 대체나 모르고 있었다.

작년에 했어. 내가 웃으며 말했다. 군대 가기 전에 미리 혼인 신고는 했다더라

아.... 친구가 탄식 한다. 벌써 시간이 그렇게 흐른거야? 그 어린애가 결혼을 했어?

나는 킬킬거렸다. 벌써 10년 전이야. 맥주를 친구의 맥주와 부딪히며 외친다.


브라보~ 그리고 덧붙였다. 이따 흰머리 뽑아줄게.


약희는 여 주인공 버프를 받았기에 일을 잘하고, 똑똑하고, 겸손하다. 그래서 황제인 강희제의 신임을 받는다.

심지어 미래의 사람이라 역사가 앞으로 어찌 될지도 알고 있다. 

건청궁의 생활이 진행 될수록 8황자와 4황자의 사이도 점점 분명해 지는데 

8황자는 4황자와 대립관계에 있었던 인물이었던 만큼 계산적인 사람이었고 이건 사랑도 포함이었다.

약희는 초원을 달리는 말 위에서 8황자 품에 안겨 그에 대한 애정을 처음으로 내보이는데 그것을 눈치 챈 팔황자가 말한다.


"네 마음속에도 내가 있었던 거야!" 

그는 내 귓가에 부드러우면서도 깊은 한숨을 쉬더니 다시 중얼거리듯 반복했다.

"너도 날 생각하고 있었어!"


어유~ 어유~ 어유~ 오글거려. 어유~ 어떻게 하지. 

난 자리에서 일어나 침대에 누워버린다. 기아는 6회에 4점을 더 냈다. 

친구는 말이 없었는데 그렇다고 중계를 보고 있었던 것도 아니었다.

곧 잠들겠네. 생각을 한다. 

문득 친구가 나를 보더니 묻는다.

뭐 보는거야? 

아? 이거? 나는 갑자기 무언가 부끄러워 진다. 그냥 판타지?

친구는 다시 맥주를 마시기 시작했고, 난 왜 보보경심이라 바로 말을 못했는지 이유를 생각한다.


약희는 8황자에게 황제자리를 원하느냐 묻고 그 자리를 원하는 거라면 자신은 그와 함께 할 수 없다고 한다.

4황자를 견제하는 8황자는 미래의 옹정제의 미움을 타지 않으려는 약희의 행동을 오해하고 

왜 그러는지 정확하게 설명을 할 수가 없기에 약희도 답답하기만 하다.


친구는 침대에 들어가 이불을 덮는다. 난 티비와 불을 끄고, 침대에 기대 앉아 독서등을 켰다.


드디어 그 일이 일어났다.

8황자는 4황자를 잡기 위한 덫을 놓고, 거기에 4황자는 걸려들었지만 13황자가 나서 대신 죄를 고한다.

강희제는 진노하고 13황자는 구금당하는데 기생 녹무는 13황자와 함께 하기 위해 약희에게 부탁을 한다.

약희는 강희제에게 녹무를 13황자에 지내게 해달라 간청하지만 강희제는 허락대신 약희에게 벌을 내린다.

약희는 친한 친구인 13황자를 위해 무릎을 꿇었고, 비가 왔다.

그 순간 8황자는 자신에게서 약희가 완전히 벗어났음을 알았고, 4황자와 약희는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실히 하게 된다.



4황자는 이때의 일을 결코 잊지 않는다.

약희에 대한 확실해지고 깊어진 애정도 8황자의 계략도 모두 잊지 않는다.

황제 자리 다툼에서 계략으로 8황자를 내쳤음에도 후에 옹정제가 되어서도 8황자를 끊임없이 압박한다.

실제 역사가 그러했고, 드라마도 그리한다.


마침내 4황자가 황제에 올라 옹정제가 되고, 약희는 그의 여자가 되어 곁에 있게 되지만 그녀는 곧 알게 된다.

8황자와 연인관계에 있을 때 그에게 자신이 해주었던 미래에서 온 말.

그로 인한 나비효과로 4황자는 누명을 썼고, 13황자는 10년간 청춘을 버리는 구금을 당했고,

약희 또한 소중한 아이를 잃고 절대 임신하지 못하는 몸이 되었다는 걸.

또한 언니의 죽음 이후로 4황자 곁에 있으면서 점점 자신의 사람들은 죽는다는 사실에 절망한다.

견딜수 없었던 약희는 14황자에게 부탁을 하여 그의 측복진으로 옹정제의 분노를 뒤로 하고 자금성을 떠난다.

하지만 약희에게 죽음이 다가오고 그럴수록 그녀는 4황자가 그립다.

죽음을 앞에 두고 그녀는 옹정제에 대한 마음을 글로 쓰지만 편지를 오해한 옹정제는 보지 않는다.

마지막으로 보고 싶었던 옹정제를 보지 못하고 그녀는 죽는다.



눈물이 떨어졌다.

아이 씨... 나는 왜 여행와서 기분 좋게 호텔 침대에 누워선 질질 짜고 있는거냐.

아. 수치스러워.

내가 왜 로맨스를 읽으면서... 심지어 오글거린다니까? 

잘 읽히긴 하지. 정말 잘 읽히긴 하는데 진짜 오글거려. 읽는 내내 그 부분이 신경 쓰여서 힘들었어.



옹정제는 상소문을 통해 마이태 약희가 죽은 사실을 안다. 

황제가 보낸 밀정이 숨어있음을 간파한 14황자가 일부러 약희에게 친밀하게 대하는 모습을 보고 받은 옹정제는 분노했고

더이상 약희에 대한 동향을 올리지 마라 명령한다. 그로 인해 그녀가 죽어가는 것을 보고 받지 못했던 그는 그녀가 죽고 나서야 상소문을 통해 상황을 알게 되어 큰 충격을 받는다 



그가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며 혼잣말을 했다.

"믿을 수 없어! 약희가 이렇게까지 짐을 미워할 리 없다!"

그러다가 무슨 생각이 났는지 책상을 뒤지기 시작했다. 

상소문을 하나하나 바닥에 집어 던지던 그가 마침내 윤제가 '황제 폐하 친전' 이라고 써서 보낸 편지를 찾아냈다. 

윤진은 떨리는 손으로 편지 봉투를 열어 보았다. 뜻밖에도 안에 봉투가 하나 더 들어있었다.

봉투에는 역시 '황제 폐하 친전' 이라고 쓰여 있었다.

그보다 더 익숙할 수 없는 필체가 눈에 들어오는 순간, 윤진의 눈앞이 새까매졌다. 

그가 비틀거리자 윤상이 얼른 그를 붙잡았다. 윤진의 손에 있는 편지 봉투를 보는 그도 눈앞에 뿌옇게 흐려졌다.



나도 눈앞이 뿌옇게 흐려졌다. 심지어 흐느꼈다.

친구는 다행히 자고 있어서 독서등 아래 엎드려 울고 있는 내 상황을 알지 못했고, 앞으로도 모를 것이다.

진짜 미치겠다. 나는 여기서 왜 이렇게 통곡을 하고 있는 건가?

머리는 빙빙 돌고, 약희 언니가 죽을때부터 울은 탓에 너무 오래 울어서 이젠 머리까지 아프다. 



약희가 죽고, 옹정제와 등을 돌렷던 8황자와 9황자도, 옹정제와 가장 가까웠으며 대신 죄를 뒤집어썼던 13황자도 죽었다.

그는 천하를 발 아래에 두었지만 혼자였다. 

누구도 넘보지 못할 곳에 있었지만 외로웠고, 그 외로움을 알아줄 사람도 없었다.



옹정 8년 음력 섣달그뭄

....................................  

사랑도 미움도 모두 떠나고 이제 그만 남아 있었다.



새벽 한시가 넘었다. 

내일은 아니다 날이 바뀌었으니 오늘은 일찍 일어나 조식을 먹어야 하고, 서대문 형무소와 종묘를 가야한다.

너무 울어서 눈과 목이 아프다. 독서등을 끄고 누워 두통이 오는 머리를 손으로 감쌌다.

여행으로 온 흥분과 맥주가 더 해져서 그런 것 같다.

그래서 이렇게 감정 이입이 되었나보다. 그냥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친구는 가늘게 코를 골며 자고 있있고, 그런 그녀를 보자니 문득 흰머리 뽑아주기로 했던 약속이 떠오른다.


모로 누워 나도 잠을 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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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19 16:4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재밌다... 재미있게 완전 빨려들어가서 읽었어요!!

버벌 2017-09-19 16:41   좋아요 0 | URL
올 재미있게 읽으셨다니 너무 좋습니다. 락방님 저 최근에 읽은 책중 가장 기억에 남고, 집중해서 읽은게 보보경심이랍니다. 이게 도대체 어찌된 일인지..ㅋㅋㅋㅋㅋㅋㅋㅋ
 

여행을 가기로 했고, 6시 45분 서울행 기차를 예매했다. 

6시에 지하철역에서 만나기로 한 친구가 약속 시간에 나타나질 않는 나 때문에 애가 타고 있을때 나는 꿀잠 중이었다


들려오는 알람 소리에 습관처럼 종료 버튼을 누르려다 

일어나세요 문구 대신 친구의 이름이 뜨는 걸 보는 순간 내 모든 시간이 정지했다.


미안해

통화 버튼을 누르며 아직은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을 친구에게 사과를 한다.

미안해. 재차 사과한다.

어디야?

진짜 미안해. 빨리 갈게. 먼저 기차역에 가 있어.

대답 없는 친구의 숨소리엔 짜증과 급함이 섞여있었다.

아마도 제 시간에 도착 못할 나를 두고 어찌 해야할지 머릿속으로 계획을 수정 중일것이다.


샤워를 하고, 머리는 축축하게 두고, 민둥민둥한 얼굴에 발칙한 레드오렌지 립스틱만 올려둔다.

책상 위를 쓸어 화장품 가방과 전날 미리 챙겨둔 속옷 주머니를 가방에 담았다.

애초에 입고 가려던 꼬까옷 대신 바닥에 널려있던 옷들을 걸친다.


콜 택시가 도착하자 얼굴과 목덜미에 미역처럼 달라붙은 머리카락을 치우지도 못하고 차에 뛰어들었다. 

젖은 머리와, 거친 숨소리와, 핸드폰을 들었다 놨다하는 나를 보며 기사님이 묻는다.

늦었소?

난 고개를 두번 세번 끄덕였다. 

6시 45분 출발이라는 말에 기사님은 간신히 도착은 하겠지만 이라며 말끝을 흐린다.


이른 시간이라 아직 도로에 차는 적었고, 

기차역과 우리집 거리는 멀지 않았고,

친구와 커피 한잔 할 시간은 있어야 할텐데 라며 나와 같이 가슴 졸여주는 기사님 덕분에 

6시 37분에 기차역에 도착을 해서 친구의 따가운 눈초리를 받아냈다.


기차는 제시간에 출발을 했다.

배가 고파왔다. 커피도 간절했는데 머리는 계속 축축했다. 

화장기 없는 얼굴엔 발칙한 레드오렌지가 있었다.


좌석에 앉아 어지러운 가방 속에서 화장품 도구가 든 포켓을 꺼냈다가 도로 집어넣는다.

각종 색조 화장품들과 메이크업 붓들이 들어있어 부피가 크다.

그 옆엔 쿠션과 거울이 들어있는 핸드백용 소형 파우치도 있었다.

고작 1박2일에 무겁게 이걸 왜 가져온 걸까? 아침에 풀 메이크업 할 시간도 없을텐데

이번 여행은 많이 걸을거라서 가방을 가볍게 하려던 게 어제까지의 계획이었는데

가방 자체가 무게가 있는 가죽 가방이었고,

담겨진건 부피가 큰 노트에 화장품가방 두개에 입은 옷은 또 어떻고?

날씨 생각 안하고 걸쳐입은 아우터는 길이가 길어서 무겁고, 그 때문에 더웠다.

아까부터 입술만 둥둥 뜬 내 얼굴이 일그러진다.  



일단 계획은 이래. 친구가 말했다.

서대문 형무소는 내일 갈거고

응.

오늘은 숙소근처에 박물관들을 가보자. 오후엔 블루스퀘어와 그 근처에 있는 디저트가게를 가는거야.

응.

일단 나는 점심 먹을 곳을 찾아볼게 

전이 먹고싶어.

내 말에 친구가 좋은 생각이라며 이번에는 숙소 근처 전집을 검색해서 나에게 보여준다.

일단 박물관을 가고 블루스퀘어를 들르고, 디저트가게에서 케잌을 사는거야. 그리곤 숙소에 와서 짐을 두고, 

전집을 가서 포장이 된다고 하면 포장을 하고, 아니면 거기서 먹고 들어와서 숙소에서 맥주를 또 먹자.

응. 졸린 음성으로 대답을 하는 내 시선이 정면 티비의 광고에 꽂힌다.

파주 북소리가 내일까지네?

친구가 고개를 든다.

뭐라고?

파주 북소리 축제가 내일까지야.

친구는 파주까지 가는 길을 검색했는데 먼저 검색이 된 내가 말한다

합정역에 거기 가는 버스가 있어 2200번 잘 오는 버스는 아니라고 하는데?


자~ 일단 계획은 이래. 친구가 다시 말했다.

파주를 가서 둘러보고, 박물관은 일단 시간이 안될 듯 하니 상황을 보고, 

내가 말을 자르며 단호하게 말한다. 난 케잌을 포기 할 수 없어.

그건 나도 그래. 친구가 대답한다.

그러니까 이렇게 하는거야. 친구는 말을 이었다.

파주에 갔다가 오후에 블루스퀘어에 들르고 케이크를 사고, 숙소에 들렀다가 전집을 가는거지. 어때?

잠시의 생각 후에 내가 대답했다.

파주 가는건 상관없지만 지금 작가와 만남같은 이벤트는 다 예약이 찼을테고,

시간도 안되서 제대로 거길 느끼지 못 할텐데? 우리가 미리 알지 못했잖아.

그냥 가는 것에 의미를 두면 안될까? 

그런 곳을 잘 모르는 친구는 축제라는 단어에 무언가 대단한 볼거리가 있을걸로 생각을 한 듯하다.

보나마나 거리 조금 걷다가 금방 지겨워 할텐데. 

하지만 생각과는 다른 대답을 난 한다. 오늘 난 지각을 했으니까.

그래 가보자. 파주 가보고, 오후에 케이크먹자.


기차를 내려 지하철을 두번 타고 합정역에 내려 2200번 정류장을 찾기위해 잠깐의 삽질을 했더니

어느 순간 파주행 버스 안이었고, 

자리가 없어 친구와 따로 떨어져 앉은 내 귀에 넬의 기억을 걷는 시간이 두번째로 재생 될 때쯤 북소리 현장에 서 있었다.   


건물에 들어서자 오픈된 공간에 이름모를 작가님이 독자들과 소통중이었다. 

난 잠깐 이야기를 들어볼 심산으로 벽에 가득히 꽂힌 책들을 손가락으로 쓸며 서 있었고, 친구는 그냥 지나친다.

그러다 책 한권을 꺼내들고 읽기 시작했는데 친구는 어느새 사라지고 없다.

친구와 나는 늘 따로 행동하다가 마지막에 만나곤 했기에 사라져가는 친구를 난 굳이 따라가지 않는다.



 

 남자는 강마을에 있었고, 동생의 여자를 기다렸다.

 동생은 장애가 있었고, 독실한 신자였고, 자살을 했다.


 그가 동생의 여자에게 섬이 자꾸 자기를 부른다고 말했다.

 강마을에 도착 후 연결된 전화기 너머 여자는 죽고 싶다고 그에게 말한다.

 그런 그녀에게 자신도 같은 생각이라며 오라고 한다.

 이곳으로,

 죽기 위해 강마을로 오라고 한다.

 여자는 정리하고 오겠다고 했지만 

 그 문장을 읽기 전 그녀가 오지 않을 것을 난 이미 알고 있었다.

 그리고 두사람의 대화 속에 동생의 죽음이 연관 되어 있음을 알았다.



“안 오면…… 날더러 어쩌라는 건가.”  


소설의 첫 페이지.

마지막 열차가 떠나고 비어있는 대합실에서 그가 뱉은 이 한마디에 모든게 함축되어 있었다.


결번이라는 소리만 들려오는 그녀와의 연결음을 뒤로 하고 몸이 구겨진채 그가 걸었다.

연결이 끊긴 그녀의 존재가 애초에 존재 한것인지 아닌지 모호한 생각의 경계에서 그가 죽으러 간다.

거동이 힘들었던 동생처럼 걸어 강마을에 있는 섬으로 죽으러 간다.


그 섬에서 그는 주막에 들어간다. 그리고 여주인에게 술을 청한다.

자신의 아들의 할아버지를 아버지로 만들어 사는 여주인은 그와 마주보고 앉아 대화를 한다.

삶에 대해서, 그녀는 그 삶을 비극과 희극에 비유한다. 

그러다가 그녀가 그에게 당신은 죽을 수 없으니 돌아가라며 호통을 친다.


“고통을 겪는 시늉을 하는 네 행동이 동생의 죽음을 더 우습게 만들잖아! 그걸 몰라서 하는 말이야!”


구토를 위해 뛰쳐나온 그가 의식을 잃어갈 무렵, 의식이 아니라 세상이 바뀌는 무렵, 아니 새로운 세상이 나타날부렵 

그 무렵 그가 뒤돌아 본 주막이 있던 자리는 노적가리가 하나 세워져있을 뿐이다.


그는 거기에서 자다가 뛰쳐나온 것일까?

그렇다면 지금까지 일은 다 꿈인가?

어디서부터 어디까지가 꿈인걸까?

죽지 못할거니 돌아가라며 호통치던 여주인이 있던 주막?

연결되지 않았던 동생의 여자?

장애가 있는 동생의 자살?

동생이 처음 자신의 여자를 소개시켜준 날?

아니면 그의 삶 전부인건가?


그가 들어간다. 그 노적가리로 옛날이야기로 쌓아올린 것 같은 그 노적가리로 따뜻할 것만 같은 그곳으로 사라진다.

이렇게 그의 이야기가 끝인건지, 또 다른 이야기가 될지



<인형의 마을>에 실려있던 첫번째 단편 "노적가리 판타지"를 읽어낸 후 난 도로 책을 꽂아 놓는다.

손가락으로 지긋이 제목을 눌러보곤 중얼거린다.


“안 오면…… 날더러 어쩌라는 건가.”  


뒤에선 아직도 작가와의 대화가 이어지고 있었고, 날은 더웠고, 입고 있는 아우터로 인해, 

그리고 책을 많이 읽는다며 허세를 부리면서 정작 한국 작가들에 대해선 무지한 나로 인해 더 더웠다.

시원한게 필요했다. 


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녀는 복도를 지나 다른 공간으로 갔다고 한다. 중간에서 그녀를 만나 시원한 에이드를 마셨다.

친구는 벌써 지겨워지고 있었다. 그렇다고 말은 하지 않았지만 난 알 수 있었다. 


그래도 둘이 같이 건너간 다른 전시실에 있던 타자기 모형앞에서 그녀는 프로필에 바꿀 사진을 찍었고,

그걸 꽤 마음에 들어했다. 


오다 보았던 피노키오 박물관은 직원이 어른끼리 왔으면 별다른 흥미가 없을거라고 말해줘서 도로 나왔다.


이제 가자!


도로의 한가운데 서서 드디어 친구가 말했다. 도착 후 한 시간이 겨우 지났을 뿐이었다.

파주까지 에이드 마시고, 프로필 사진 찍으러 온거냐? 내가 웃으며 묻고나서 말을 덧붙였다.

다음엔 계획을 세워서 작가와의 대화같은 것도 예약하자.

내 말에 친구는 그러자고 말하며 온 것에 의미를 두는거지~ 라고 다시 말한다.


실실 웃음이 나온다.


6시 20분에 집을 나섰는데 1시가 되어가는 그 때에 우린 도로에서만 4시간을 보냈고, 이젠 또 이동하러 가야했다. 

하지만 걷는 것은 오래지 않아서 다리가 아프진 않았는데 어깨는 무거워서 아팠다. 그리고 더웠다.


이제부터는 많이 걸어야할 텐데 옷을 벗어 집으로 택배를 보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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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7-09-18 16:1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나 만나러도 한 번 오라니깐욧!!

버벌 2017-09-19 10:15   좋아요 0 | URL
연락할 생각을 했어요. 한데 쑥스러워서 ㅠㅠ 발칙한 레드 오렌지 보여드리고 싶었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