잠에서 깼지만 깨지질 않는다.
눈도 떴지만 떠지질 않았는데 그렇다고 감긴 것도 아니어서 난 조심조심 침대 모서리를 더듬으며 실내화를 신는다.
친구는 벌써 일어나 신나는 표정으로 콧노래를 부르며 옷을 입고 있었다.
눈도, 코도, 볼도, 온 몸이 그야말로 빈틈 없이 야무지게 부은 상태로 서 있으려니 친구가 말한다.
나 너무 개운한 것 같아.
그녀는 술을 알맞게 마셨고, 그로 인해 적당히 취한 채 잠들어 일찍, 그것도 가뿐하게 일어났다.
화장실도 다녀와서 너무 시원하다고 말하는 그녀의 표정은 자신의 말에 전혀 거짓이 없음을 알려준다.
난 술을 거의 못 마셨고, 책을 보느라 늦게 잤는데 울면서 잠든 탓에 하룻밤 사이 팅팅 부었다.
화장실을 못 가서 배도 더부룩 했다.
지하철보다 버스로 형무소까지 가는 것이 더 낫다는 친구의 판단에 버스에 오른다.
서대문 형무소까지는 몇 코스 되지 않지만 버스 안에서 난 굳이 책을 꺼내놓는다.
의도치 않게 가져와 날 힘들게 한 녀석. 그래서 기어이 읽어주리라 다짐했다.
매고 온 가방은 여행을 오기 전까지 데일리 가방이었다.
난 데일리 가방엔 비교적 최근에 구입한 책들을 하나씩 넣어두곤 했는데
근래엔 출근을 대중교통이 아닌 자가용으로 한 탓에 책도, 독서도 모두 망각 했나보다.
그래서 토요일 급히 나오면서 아이패드와 크레마를 교환하고, 화장품 가방을 담으면서도
바닥에 깔린 책은 발견하지 못 했다.
무거운 가방은 수첩 대용으로 쓰는 노트와 늘어난 화장품 파우치로만 생각 했것만...
주인도 알지 못하게 바닥에 엎드려 자신을 어둠 속에 감추고선
당당히 무게의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호텔을 나오기 전 정리를 위해 가방을 뒤집어 물건을 쏟아낼 때 툭 떨어지는 녀석의 모습이라니...
아~ 이게 머야!!! 내 비명에 조식을 먹기 위해 문 앞에서 오맹불망 나를 기다리던 친구가 쳐다본다.
친구는 배가 고팠고, 그녀보다 늦게 일어났기에 씻는것도, 옷 입는 것도 느렸던 나를 기다리느라 지친 표정이었다.
별일 아니라며 친구에게 손짓을 하는 내 얼굴은 울상이 되서 갓 쪄낸 찐빵마냥 뜨거워졌다.
옷과 같이 택배로 보낼까? 고민을 하면서 그나마 부피를 덜 차지하도록 노트와 크레마 앞 쪽에 꼭 겹쳐 세워둔다.
앰브로즈가 죽었다. 죽기 전 그는 요양을 위해 여행을 떠났는데 그게 마지막이 될 줄은 아무도 몰랐다.
기묘한 야량을 지닌 그는 어릴때 고아가 된 필립을 데려다가 연민으로 키웠다.
필립에게 앰브로즈는 아버지였고, 형이었고, 후원자였다. 앰브로즈에게 필립은 자신의 뒤를 이을 후계자였다.
기묘한 아량이라는 말은 내 표현이 아니라 작가가 실제 책에 쓴 말이다.
도착하는 여행지마다 오던 앰브로즈의 편지에 언젠가부터 사촌 레이첼이 등장한다.
그 시점에서 난 앰브로즈가 레이첼을 사랑하게 됨을 예상 할 수 있었는데 필립도 같은 생각이었는지는 그려지지 않았다.
다만 앰브로즈는 오랜 시간 여성에 대해 냉소적이었고, 늘 필립이 우선 순위였기에 사촌으로 등장한 레이첼이
마침내 아내가 되었을 땐 필립의 마음은 배신감과 상실감으로 가득찼다. 그래서 그녀를 질투했고, 나중에는 경멸했다.
그녀를 만나기 전까지는 그랬다.
필립과 앰브로즈가 서로를 얼마나 사랑하고 아꼈는지 알기에 책을 읽고 있는 나 역시 필립과 같은 마음이어서 앰브로즈의 죽음을 확인하고 집으로 돌아온 필립에게 레이첼이 전갈을 보내왔을 땐 화가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뭐지 이여자? 와서 뭘 어찌하겠다는 거지? 와서 앰브로즈의 재산을 가로채기라도 하려는 건가?
책을 읽는 나도 필립도 그녀를 의심하고 싫어했다. 어떻게 좋아할 수 있겠는가?
하지만 드디어 두 사람은 저택에서 마주쳤고, 필립도 레이첼도 서로를 보며 당황한다. 레이첼에게 필립은 또 다른 앰브로즈 였고, 필립이 마주한 상복 차림의 레이첼은 그가 상상한 것 처럼 나이가 들었다던가 화려하다든가 하는 모습과는 거리가 멀었다.
작고, 소박했고, 눈이 컸고, 앰브로즈의 필립에 대한 추억을 공유하고 있었다.
아름답다. 내가 말했다.
친구와 나는 아직 오픈 전인 서대문 형무소 앞에 서 있었는데 내 말에 친구가 귀에서 이어폰을 빼고는
앞으로 보이는 나무들을 가르키며 저 곳이? 라고 물었다.
아니. 문장과 문장이 이어지는 페이지의 섬세한 글들이 아름다워서 나도 모르게 한 말이었다.
대답하려는 찰나 9시 30분이 되었고, 문이 열렸기에 우리는 매표소를 향해 걷기 시작했다.
난 들고 있던 책을 가방에 넣고, 어깨 끈을 단단히 잡아당긴다.
아직 덥진 않았지만 곧 더워질 것이기에 팔목까지 내려오는 겉옷의 소매를 걷어올리기도 했다.
친구와 헤어져 전시실을 돌아보며 앞에 쓰여진 안내문을 하나하나 시간을 들여 읽는다.
그러다가 마침내 늘 영상과 사진에서만 보던 그 방에 들어섰다. 빼곡히 사진으로 도배된 그 방.
누군가의 아버지였고, 어머니였고, 자식들이었고, 형제들이었을, 우리의 아름다운 이웃이었을 분들
벽 한켠에서 사진들을 바라보는 내 코 끝이 찡해진다.
부탁하건데 지금의 나에게 과연 이 분들처럼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고 헌신할 수 있을수 있느냐 묻지 않았으면 한다.
난 그 분들이 받은 고통을 알고, 그 분들의 최후를 알고, 그 분들의 후의 삶을 알고 있다.
내 안에 있는 열정은 현실과 타협으로 고개를 숙였는데 대신 이기적인 마음과 불안감이 한켠에 크게 자라 있었고,
내 가족과 내가 겪을 삶에 대한 공포는 손쉽게 내 의지를 조정한다.
그래서 아무런 조건 없이 조국을 위해 나섰던 그 분들을 따라가겠다고 바로 대답이 나오지는 못할 것 같다.
이런 내가 너무 싫고, 부끄럽고, 한심하다. 그렇기에 이 분들이 더 대단하고, 존경스럽다.
난 언제나 비치된 모든 글들을 꼼꼼히 읽어서 진행이 느렸는데 그럴때면 앞쪽의 관람객과는 멀어지고 뒤에 있는 관람객은 나를 앞지르곤 했다. 그런데 웬일로 내 앞에 가던 모자는 나와 비슷한 위치에서 일정하게 걷는다.
배낭을 맨 편한 차림의 엄마가 일곱살쯤 되어 보이는 아들에게 안내문을 손으로 짚으며 설명을 해준다.
잘 봐. 여기가 먹방이래. 이 좁고 어두운 곳에서 생활하면서 얼마나 많이 힘드셨을까?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야구 모자를 쓴 아들은 뒷 모습은 지루함이 묻어있다. 그래도 용케 엄마에게 잡힌 손을 뿌리치지 않고 따라다닌다.
응. 힘들었을 것 같아.
그렇지? 이런 곳에서 힘들게 생활하신거야. 나라를 위해서. 우리 아들은 어떤 생각이 들어?
엄마의 질문에 아들이 뭔가 대답을 했는데 이때쯤 난 그들과 벌어지기 시작해서 잘 들리지 않았다.
엄마는 아들의 귀를 가볍게 꼬집기도 했고, 머리를 쓰다듬기도 했고, 팔을 쥐었다 폈다 하기도 했다.
그러면서도 손은 꼭 잡고서 천천히 이동을 한다. 안내문이 나오면 엄마가 읽어주고, 질문을 했고, 아들은 대답을 했다.
그걸 보면서 난 웃었다. 그리고 바래본다.
아직 오지 않았고, 오게 될지 아닐지도 장담할 수 없지만, 그래도 이왕이면 언젠가는 왔으면 하는 내 미래의 모습이기를
종묘로의 이동도 버스가 더 낫다고 친구는 말했다. 버스에서 내려 종묘로 가면서 난 풀린 소매를 다시 단단히 걷어 올린다.
날이 뜨거워서 도로도 뜨거웠고, 신발을 통해 발바닥으로도 뜨거움이 올라왔다.
세시간을 걸었던 탓에 종아리가 많이 아팠는데 어깨의 아픔에 비하면 아무 것도 아니었다.
시원한 커피를 마시고 싶었다. 하지만 근처에는 마땅한 카페가 보이질 않아서 그냥 묵묵히 종묘를 향해 걸을 뿐이었다.
해설사는 30명이 조금 넘는 관람객을 그늘로 이동을 시키면서 설명을 시작했다.
그는 역사와 궁궐을 사랑하는 사람이고 그 이유때문에 지금 해설사로 자원봉사를 하고 있는 것이라 말한다.
과거에 쓰였던 종묘 관리소에 대해 설명을 하고는 그 옆에 건물을 가르키며 저곳은 지금의 종묘 관리소라고 알려준다.
제가 굳이 이 현대 건물을 설명하는 이유는 하나입니다.
이 건물은 아마도 지금은 중요하지 않겠지만 앞으로 데려온 자녀들이 크게 되면 그 또한 역사가 될 겁니다.
아이들에게 이런 사실을 말해주세요. 그래서 후에 다시 방문해 그런 부분을 기억하고 보게 되면 더 좋지 않겠습니까?
오늘 날씨가 참 좋습니다. 이렇게 종묘를 보기엔 정말 좋은 날이죠.
그리고 잠깐 서로간의 대화를 멈추고 주변의 소리를 들어보세요.
새소리와 바람소리를 들으세요. 평소에 듣기 힘든 소리들을 들어 보세요.
잠깐동안 주변의 말 소리가 줄어들었고, 난 해설사의 말대로 가만히 귀를 기울였다.
실제로 주변에서 새소리가 들렸다. 나무밑으로 자그마한 동물이 나타나기도 했는데 어어, 하는 사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뜨거운 햇살을 가려주는 나무 아래에선 나뭇잎이 바람에 스치는 소리도 들렸다.
문득 몇 년전 홀로 했던 여행이 생각났다. 여러번 망설이다 결국엔 가방을 매고 갔던 제주도.
눈 보기가 힘든 제주도는 그 날따라 강풍이 불었고, 내가 막 비자림으로 들어 선 순간에는 함박눈이 쏟아졌다.
순식간에 하얗게 덮였던 비자림에서 어느새 난 이어폰을 빼고, 깊숙히 눌러쓴 모자를 벗었다. 왠지 그래야 할 것 같았다.
주변은 온통 하얗고, 모든 게 정지한 듯 했다. 그 시간, 그 공간은 처음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그러다 작게 새 소리가 들리더니 점점 커졌다. 바람이 불자 가지들이 서로 몸을 부벼대며 쏴아 소리를 냈다.
내 숨소리가 들렸고, 심장 소리도 들렸다. 심지어 내가 내뿜는 입김에도 소리가 들렸다.
귀에서 빼낸 이어폰은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렸고, 내 몸에도 눈이 쌓여 주변과 동화 되어갔다.
순백의 공간은 내 머릿 속도 침투해서 하얗게 만들어 놓았다. 아무도 없었고, 아무 생각도 나지 않았다.
그렇게 숲 속에 오롯이 나 혼자 서 있었다.
그때의 기분이, 그 느낌이 떠올랐다.
종묘 투어는 마지막을 향해갔다. 이제는 할당된 시간이 얼마 안 남았다며 해설사가 손짓을 하며 관람객을 부른다.
여기 오세요. 이쪽으로요. 그러면서 사진을 찍으려 이동하려는 사람들을 말린다.
사진은 좀 더 나중에 찍으시고 우선 여기 와서 정면을 보고 눈으로 담으세요.
사진에 담으려 하지말고 마음에 담으세요. 이 곳이 어떤 곳인지 건물만 보지 마시고 새겨주세요.
이건 저의 부탁입니다. 그리고 아이들에게 이곳에 어쩐 분들이 모셔져 있는지 어떤 용도로 사용 되었는지 알려주세요.
정말 좋지 않습니까? 입장료 천원 한장으로 우린 이렇게 많은 것을 보고, 알아 갈 수 있습니다.
난 해설사의 말에 탄성을 지른다. 주위를 둘러보니 가족 단위로 온 분들이 대부분이어서 아이들이 너댓명 된다.
어떤 아이는 한눈을 팔며 뒤에 있는 풀을 뜯으며 놀고 있었고, 어떤 아이는 아빠에게 잡힌 손을 빼내려 몸을 꼬고 있었다.
또 다른 아이는 얌전히 엄마 무릎에 앉아있었고, 너무 어린 한 아이는 유모차에서 부모의 부채질에 눈만 똘망똘망 뜨고있다.
그렇지 내가 지금 이곳은 지금의 역사만이 아니라 미래의 역사도 될 터였다.
너무 지루하다며 보채는 아이에게 아빠인듯한 사람이 말한다.
지루해도 봐야지. 이건 역사야. 원래 역사가 지루한 부분이 많아. 하지만 재미있는 부분은 더 많아.
친구는 해설사의 말을 안내문에 받아적느라 여념이 없다.
난 주변 말소리와 섞여 들려오는 새 소리를 들으며 그때 제주도의 비자림에서처럼 말 없이 역사의 한 부분에 서 있었다.
고집을 부려 종묘에 오길 정말 잘 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승마를 하느냐는 물음에 레이첼은 잘 못한다고 대답하며 어쩌면 필립이 도와주면 탈 수 있을 것 같다고 한다.
분명하다. 그녀는 불순한 의도를 가지고 있다. 이 문장에 그게 담겨 있었다.
필립이 넘어가지 않았으면 좋겠다. 정말 바랬다.
하지만 필립은 이런 내 마음을 모른다. 직접 레이첼을 말에 태워 영지를 구경 주겠다는 그의 말에 난 절망한다.
레이첼은 주택의 고용인들과 영지의 소작인들, 마을 사람들에게 주인마님으로 불리우며 인정 받는다.
오랜 시절 여성의 손길이 없었던 저택은 생기가 돌았고 향기가 났다.
필립은 앰브로즈에게 받은 두통의 편지를 레이첼에게 보여 주었다. 편지 속의 앰브로즈는 온통 레이첼을 의심하고 있었다.
레이첼은 자신의 남편이 병을 얻었고, 그로 인해 성격이 변해 자신을 감시했다고 털어놓는다.
편지의 내용은 일정부분 맞지만 그렇게 된 건 레이첼이 아니라 앰브로즈 때문이라는 거였다.
레이첼은 앰브로즈가 정상적이지 않다고 말하고, 앰브로즈는 편지를 통해 레이첼이 뭔가 저질렀다고 믿었다.
필립은 세상에서 가장 사랑하는 두 사람 중에 죽은 앰브로즈가 아닌 레이첼을 믿고 만다.
그렇게 되버렸다. 애초에 그렇게 될 일이었다. 필립의 마음 속에서 자라던 레이첼에 대한 복수는 점차 희미해진다.
난 친구를 흔들어 깨웠다. 그녀는 이어폰을 빼고 크게 기지개를 켰다.
전날 호텔에서 숙면을 취했다고 본인이 직접 말해 놓고는 기차에 올라서도 단 한번도 깨지않고 잘도 잔다. 부럽기도 하다.
난 친구가 자는 동안 왼쪽 손목이 시큰거려서 양손으로 번갈아 책을 들었고, 손목을 돌리고 털어서 통증을 줄이기도 했다.
커피가 너무 마시고 싶어서 오가는 카트를 기다리다가 안 오는 것에 실망했지만
그렇다고 일어나서 자판기를 찾으러 가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 책만 보고 있었는데 읽는 내내 인상을 쓰고 있었다.
너무 아름다운 글인데 읽으면서 이렇게 화가나는 것도 처음이었다.
나 향수병 걸린것 같아. 가방을 챙기며 일어서다가 친구의 말에 난 웃어버린다.
설마 너 고향이 광주인 걸 아직도 몰랐던 거니?
알아. 친구는 하품을 했다. 향수병 걸린 것 같은 기분이야. 다시 서울 가고 싶어.
친구의 말을 뒤로 하고 난 아직도 시큰거리는 손목을 탈탈 털며 플랫폼에 내려섰다.
레이첼은 돈 한푼 물려받지 않은 미망인이라는 가여움을 필립에게 심어주면서도
거기에 넘어가서 필립이 내민 호의를 자신은 전혀 의도하지 않았던 양 눈물 짓고, 한숨을 쉬며, 답답해 한다.
나는 그녀가 보여주는 행동이 뭘 의미하는지 안다.
글을 읽고 있는 나 뿐만 아니라 언제나 필립 곁에서 친구가 되어주는 루이즈도 알지만 필립는 모른다. 모른 척 한다.
아 필립... 그녀와 결혼한 앰브로즈가 남긴 유언장에 그녀가 없는 이유를 조금만 추리 해봐.
왜 자신의 아내에게 왜 한푼도 남기지 않았을까? 옆에서 조언하는 루이즈의 말을 질투로 인한 것이라 치부하지 말아줘.
대부와 앰브로즈의 편지를 통해서 필립은 레이첼에 대한 경고를 받지만 25살 생일을 얼마 남기지 않은 이 젊은 영주는 불길하게 피어오르는 의심은 단숨에 꺼 버리고 그 자리에 순수한 사랑의 불씨를 던져 놓는다.
첫 사랑이었다. 그에게 그녀는 처음이자 마지막 열정의 상대였다.
필립. 어리지만, 믿음직하고, 똑똑하면서 어딘가 보호해주고 싶은 필립.
자신을 옆에서 에스코트하며 나직한 목소리로 사촌이라고 부르며 웃고, 자신과 관련된 남자들에 대한 질투를 굳이 숨기려는 수고조차 않은 채 온 힘을 다해 사랑을 호소하는 그에게 레이첼은 어떻게 끌리지 않을 수 있을까?
"나를 왜 이곳으로 오라고 했어요?" 그녀가 물었다.
"당신을 비난하려고요."
"무슨 비난요?"
"그건 모르겠어요. 아마도 그의 가슴을 찢어놓았으니 살인이라고 하지 않았을까요?"
"그런 다음엔요?"
"거기까진 계획하지 않았어요. 세상 그 무엇보다도 나는 당신이 고통을 겪게 하고 싶었어요. 당신이 고통스러워하는 걸 지켜 볼 생각이었죠. 그런 다음엔 떠나보내려 했던 것 같아요."
"너그럽네요. 내가 받아야 할 대우보다 너그러운 처사에요. 그래도 당신 계획대로 성공은 한셈이에요. 원하는 걸 손에 넣었잖아요. 당신 성에 찰 때까지 계속해서 나를 지켜봐요."
나를 바라보는 그녀의 눈빛에 무언가 변화가 일었다. 얼굴은 아주 창백하고 평온했다.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러나 내가 발로 짓이겨 그 얼굴을 가루로 만든다고 해도, 두 눈동자만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 같았다. 절대 뺨으로 흘러내리는 일도 없고 바닥으로 떨어지지도 않은 눈물이 그렁그렁 맺힌 채로. 나는 의자에서 벌떡 일어나 방을 가로질러 걸어갔다.
"소용없는 짓이에요. 앰브로즈는 내가 형편없는 군인이 될 거라고 늘 이야기했죠. 난 냉혈한이 되어 총을 쏠 수 없는 사람입니다. 내 어머니는 내가 기억하기도 전에 돌아가셨고, 여자가 우는 건 본적도 없어요." 나는 그녀를 위해 문을 열어주었다.
하지만 그녀는 벽난로 앞 의자에 앉은 채로 꼼짝도 하지 않았다.
"사촌, 2층으로 올라가세요." 내가 말했다.
필립이 레이첼에게 사촌이라고 부르는 부분에 심장이 가늘게 떨린다.
무심코 어떤 남자가 내 귀에 커즌이라고 속삭이는 걸 상상해버렸다. 단호하고 냉정하다.
1951년에 발표 된 소설의 대사들은 깍뜻한 예의 속에 세련됐고, 유머스러웠다.
말들의 향연에 난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최근에 이런 문장을 본적이 없다.
읽는 내내 앞으로의 내용이 구상적으로 그려지지만 그 과정이 지루하지 않고, 섬뜩하게 아름다우며 절묘하다.
작가는 피 한방울 등장 시키지 않고 주인공을 막장으로 몰았다.
난 저릿한 마음으로 페이지를 넘겨 마지막까지 그 과정을 함께 했다.
그녀에 대한 사랑을 깨닫자 그 뒤는 순식간이었다. 필립의 그녀에 대한 사랑은 시간이 갈수록 너무나 커져서 집착으로 변했다.
그는 그녀 주변의 모든 것을 질투했다. 심지어 이미 죽은 그녀의 남편이었던 앰브로즈 마저도 질투 했다.
질투를 통해 레이첼에 대한 사랑을 키웠고, 질투 때문에 마지막엔 그녀를 놓았다.
25살 생일을 앞두고 책은 절정에 이르고 있다. 필립은 그가 상속 받을 유산을 레이첼에게 넘긴다는 서류를 작성했다.
그건 자신의 생일에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었고, 그녀에게 주는 선물이니 자신에게 주는 선물이나 마찬가지라 생각한다.
그녀에 대한 열정과 숭배의 증표였고, 필립이 그녀에게 할 수 있는 최고의 선물이었다.
난 정말 이제 심장이 터질 것 같았다. 할 수만 있다면 책 속에 들어가서 레이첼을 밀어내고 필립에게 호통을 치고싶다.
정신 차려 필립. 이 여잔 앰브로즈를 죽였고, 너에게도 해를 입히려 하고 있어.
이렇게나 빤히 보이는 데 왜 너는 모르는거야.
하지만 난 책 속에 들어갈 수 없고, 레이첼이 앰브로즈를 죽였다는 건 반복해서 쓰여진 원예에 대해 많은 상식을 가졌다는 레이첼의 모습에서 짐작한 것이지 실제로 그녀가 죽였다는 건 나오지 않았다.
레이첼을 미워하는 것이 작가의 의도였다면 적어도 나에게는 통했다. 난 레이첼이 너무 싫다.
앰브로즈는 죽기 전에도 사후에도 필립에게 편지로 계속 레이첼에 대한 경고를 한다.
사후에 작성된 그의 편지는 분명히 필립에겐 도착하지 못 할 처지였지만 필립에 대한 앰브로즈의 강한 사랑은 순탄치 않은 경로로도 어떻게든 필립의 손에 편지를 쥐어준다. 필립은 레이첼에 대한 사랑으로 앰브로즈의 의심과 본인의 복수를 덮었다고 생각했겠지만 그건 착각일 뿐. 앰브로즈는 언제나 그와 함께 있었고, 끊임없이 경고했다.
"나의 골칫덩이 레이첼이 마침내 내게 일을 저질렀다." 필립은 그의 경고를 못내 무시하려 했고, 무시했다. 그랬던 그는 자신을 받아들였다고 생각했던 생일 날 이후 갑자기 변해버린 그녀의 태도에 당황하고, 폭주한다. 대부와 루이즈 말대로 그녀는 애초에 돈이 목적이었다. 끝내 모른 척 했던 필립은 그 사실이 변명의 여지 없이 들어난 후에도 레이첼에게 계속 사랑을 갈구한다. 그에게 돈은 중요치 않았다. 오직 레이첼만을 원했다. 하지만 그녀는 그에게 냉랭하다.
그녀는 필립과 다르게 돈이 중요했고, 재산을 얻었으니 그녀의 사랑도 끝이났다.
묘한 방식이긴 해도 레이첼은 나름대로 우리를 사랑했다고 나는 믿었다. 다만 우리가 필요 없게 된 것뿐이었다.
이젠 필립의 마음 속에도 작았던 의심이 조금씩 커진다. 모든 것을 잃은 지금에서야 주변의 말들이 들린다.
이탈리아에서 온 레이첼의 자산 관리인인 레이날디에게 온 편지를 찾기 위해 뒤진 서랍에서 발견 한건 독으로 쓰이는 열매였는데 필립은 앰브로즈의 편지 속 내용을 기억하고 있었다.
편지 속의 앰브로즈는 갑작스런 열병과 통증과 구토에 시달린다고 했다. 레이첼은 그런 그를 최선을 간호했다고 말했다.
필립은 열병에 걸렸고, 두통에 시달리고 있었다. 레이첼은 죽어가던 그를 살리기 위해 노력했고, 실제로 살아났다.
어느 쪽인 진짜인지. 어느 부분까지 믿어야하는 건지. 필립의 혼란스러운 마음 속에서도 여전히 레이첼을 사랑했지만 이제는 의심도 커져서 두 개의 마음이 팽팽한 균형을 이룬다.
그러다 잠시 의심쪽에 추가 더 놓아져서 균형이 무너졌을 때 그는 산책 나가는 레이첼을 붙잡지 않았고,
정원 공사장의 일꾼이 아직 공사가 덜 끝나서 주의해야 한다는 다리도 그녀에게 알려주지 않는다.
그리고 레이첼이 산책으로 집을 비운 사이 필립은 증거를 찾기 위해 노력하지만 나오질 않는다.
작가님 왜 이러세요. 이제 책은 열장도 남지 않았는데 증거는 어디에 있나요? 나는 숨이 막힐 것 같다.
겨우 찾은 편지엔 레이날디의 손을 빌려 써진 필립을 걱정하는 레이첼의 모습. 그녀는 분명히 독을 가지고 있고, 그걸 사용했다고 필립도 나도 생각했지만 그 증거는 어디에도 없다. 찾을 수가 없는 건지. 원래 없었던 건지 모호한 그때 의심쪽으로 기울었던 추가 다시 균형을 맞춘다. 필립은 정신이 들었다. 그리고 산책을 나갔다 돌아오지 않은 레이첼을 찾아 달려나간다. 레이첼은 다리 아래에서 차갑게 식어가고 있었다. 필립은 그녀의 손을 잡지만 숨이 멎는 순간 그녀의 입에서 나온 이름은 필립이 아니라 앰브로즈였다.
난 계속 레이첼이 앰브로즈를 죽였다고 생각했다. 그건 확실하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마지막을 보는 순간 내 그런 생각에 의구심이 든다.
난 공연한 사람을 오해 한걸까? 동시에 여러가지 질문이 떠오른다.
레이첼은 앰브로즈를 정말 사랑한 건가? 그녀는 정말 앰브로즈를 독살 했고, 마찬가지로 필립을 죽이려 한 걸까?
레이첼의 죽음은 자신의 저지른 죄에 대한 댓가였을까? 아니면 오해로 인한 애처로운 죽음이었을까?
방문이 열리고 엄마가 불쑥 내 방에 들어 왔을 때 난 아직 엎드려 있었고,
소설의 처음과 끝을 반복해서 읽으며 글 속에 있는 포터닝스 교수대가 어떤 의미인지를 곱씹는 중이었다.
엄마는 늘어진 티를 입고서 눌린 머리를 하고 있었다. 충혈된 눈으로 안자냐고 묻었다.
내가 몸을 일으켜 책상 위의 시계를 본다. 또 날을 넘겨서 일요일이 아니라 월요일이 됐다.
이제 자려고. 대답하며 집에 도착 후 한쪽에 던져둔 가방을 열어 내일 출근과는 상관 없는 물건들을 꺼낸다.
목과 어깨가 그리고 종아리가 뻐근했다.
집에 오자마자 한풀이를 하듯 큰 컵으로 가득 커피를 마신 탓에 피곤했지만 눈은 초롱했다.
옛날엔 포터닝스에서 교수형이 집행되었다.
하지만 더는 아니다.
무슨 의미인 걸까? 손목이 시큰거리기 시작해서 난 책을 덮었다.
집에 도착한 것은 몇시간 전이지만 책을 덮는 그 순간에야 비로소 내 여행도 끝이 난 기분이다.
불을 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