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때 내 별명이 드라마 아가씨였다. 자칭, 타칭이었다. 드라마를 남들보다 많이 본 건  아닌데, 보기 시작하면 좀 집착해서 보는 습성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드라마를 볼 때의 원칙은

1. 1회부터 본다
2. 빼놓지 않고 본다

이다. 따라서 난 남들이 입소문으로 재밌다고 하기 전에, 내가 볼 드라마를 스스로 간택하여, 1회부터 빼놓지 않고 보곤 했다. 그래서 남들 다본 드라마 중에 내가 안본 것들도 꽤 된다.

저 두가지 이유는, 내가 드라마 아가씨로서 요즘 드라마를 거의 못보고 있는 이유가 되기도 한다. 내가 도무지 드라마를 빼놓지 않고 볼 수 있는 여건이 되지 못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회사에 들어간 이후로는 거의 본방송을 보지 못하고 다운로드로 근근히 연명하는데, 궁금한 건 못참는 성격이라 이미 완결된 드라마를 다운로드해서 보는 경우엔 거의 잠도 안자고 보는 편이다. 백수 시절, 네멋대로 해라는 하루만에 봤었고, 대장금도 며칠에 걸쳐 (일주일 안쪽) 다 봤고, 드라마 카이스트도 거의 비슷한 수준이었다. 난 각기 다른 저 세 드라마를 굉장히 좋아한다.

다른 두 드라마는 워낙 유명하니 넘어가고, 비교적 덜 유명한 카이스트에 대해 잠깐 얘기해 보자면 카이스트는 대학을 졸업하고 보니 또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 드라마다. 의외로 많은 사람들이 좋아하지는 않지만, 은근 마니아가 있는 명작이다. 다음 카페 내에, 카이스트 시즌1 멤버 그대로 (작가와 피디까지) 다시 드라마를 찍는 것을 추진하는 모임이 있었다. 물론 추진을 적극적으로 했다기보다는 그냥 같이 향수에 젖는 모임이었고, 나는 뒤늦게 카이스트를 좋아하게 되어 눈팅족으로 함께했다. 이 모임은 이은주가 사망한 뒤에 희망을 잃었다. 이은주가 연기했던 구지원 캐릭터도, 강성연이 연기했던 민경진 캐릭터도, 너무너무 좋아한다. 내가 가진 모습과 갖고 싶은 모습, 갖지 못할 모습을 많이 가지고 있는 캐릭터.

그렇지만 회사에 다닌 이후로는 다운로드 받아서 보기를 결심하는 것도 쉽지 않다. 집착할 내모습이 보이기 때문에 시작을 못하는 슬픔. 올 해는 한국 드라마 두개, 일본 드라마 하나를 봤는데, 셋 다 매우 좋았다. 예전엔 드라마에 대한 정보를 빠르게 수용하고 시작일을 눈빠지게 기다렸다가 선택해서 보는 얼리어답터였다면, 요즘은 검증된 드라마만을 보는 후기 수용자. 한국 드라마 썸데이는 김민준과 배두나 때문에 봤는데 꽤 괜찮은 편이었고, 고맙습니다,는 정말 눈물을 줄줄 흘리면서 봤다. 올 한 해 이 드라마 때문에 정말 고맙습니다,라고 말하고 싶을 정도로. 그리고 일본 드라마는 노다메 칸타빌레. 깔깔 웃으면서 봤었지. 노다메양을 사랑하면서, 치아키 센빠이는 멋있지만 실은 좀 느끼하다고 생각하면서. '다시 이몸을 차면 용서하지 않을 거야'에서 실은 닭살이 좀 올라왔다며 -_-

후기 수용자의 장점이 검증된 드라마를 본다는 데 있기에 실패 확률이 적다는 데 있다면, 단점은 같이 흥분해줄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고맙습니다 끝나고 석달 있다가 나 고맙습니다 보며 질질 울고 있어요, 라고 말하면 누군가 응 그 드라마 나도 좋았어, 라고 말은 해주지만 두손을 부여잡고 같이 흥분하기에 이미 상대의 감흥은 많이 다운돼 있기 때문이다. 스포일러나 되어주지 않는다면 감지덕지한 일이다. 다음날 드라마 기사를 검색하며 맘설레하는 일도 못한다.

아일랜드를 보던 때, 나는 아일랜드 팬카페와 수많은 주변 아일랜드 팬인 친구들과 함께 울고 웃었다. 재복이 말대로라면 '대구리 빠개지도록' 고민한 거지. 아 도무지 그 의미는 뭐였던 거야, 라며 떠다니는 수많은 기호들에 의미를 부여하고, 다음회를 기다리며, 세계를 아일랜드가 하는 날과 하지 않는 날로 구분했었다. 이제 그런 재미를 누리지 못하는 것이다.

생각해보면 저 두가지 원칙을 없애면 되는데, 1회부터 못봐도, 매번 못챙겨봐도 그냥 보면서 그 순간을 함께하면 되잖아, 근데 저 원칙을 잘 못없애겠다. 드라마도 내게는 잘 완성된 하나의 작품이어서, 한 회를 빼놓고 보면 마치 소설을 100페이지쯤 건너뛰고 읽은 것 같은 아쉬움이 든다. 그래서 본방송으로 챙겨볼 경우에도 수요일 드라마를 못보면 목요일 드라마도 안봤다. 리모콘 쪽으로 부들부들 가려는 손을 꼭 부여잡으며 참아야 하느니라,를 외쳤다. 내 원칙이 스스로의 발목을 붙잡는 셈이다.

참, 나는 드라마만큼 시트콤도 좋아한다. 드라마는 작가주의, 시트콤은 PD 주의를 표방하는데, 작가주의 라인업은 아래와 같다

웬디양의 드라마 작가주의 라인업

인정옥 (아일랜드, 네멋대로 해라)
노희경 (꽃보다아름다워, 굿바이솔로, 거짓말)
이경희 (고맙습니다, 미안하다 사랑한다)
고은님 (첫사랑 - 드라마는 요거 하나, 영화 번지점프를 하다 시나리오)

요 라인업 드라마들은 가능한 한 챙겨보려 하고,
그 외에도 여기 빼놓고 넘어가기 아까운 드라마로

결혼하고 싶은 여자 (사랑스런 명세빈에게 녹았었지)
러브레터 (아, 안드레아!)
떨리는 가슴 (얼마전 마노아님이 언급하셨던, 종합선물세트같은 드라마)

시트콤은 PD 주의인데, 이는 시트콤 PD의 경우 늘 함께 해오는 작가들과 함께하기 때문에 PD의 브랜드네임만 보더라도 확실한 경우가 많기 때문이다. 시트콤 PD 주의 라인업은 아래와 같다

웬디양의 시트콤 PD 주의 라인업

노도철 (안녕 프란체스카, 소울메이트, 두근두근 체인지)
김병욱 (순풍산부인과, 웬만해선그들을막을수없다, 똑바로살아라, 거침없이 하이킥)
김석윤 (달려라 울엄마, 올드미스다이어리)

이 3명의 PD는 각각 우리나라 시트콤 계의 한 획씩을 그은 PD이다. 나는 이 셋을 정말이지 우열을 가릴 수 없을 만큼 좋아한다. 안녕 프란체스카와 거침없이 하이킥, 똑바로 살아라, 올드미스 다이어리 중에 제일 좋은 작품을 고르라는 질문은 평생 누구도 내게 하지 말아줬으면 좋겠다.
  
노도철 PD  옆의 커플같은 신정구도 빼놓을 수 없다. 나는 소울메이트 쪽을 함께한 조진국 작가보다는 프란체스카와 두근두근체인지를 함께한 신정구 작가의 코드를 좋아한다. 신정구 작가는 두근두근체인지로 시트콤 작가 상을 수여할 때 '춤이라도 추고 싶은 심정'이라며 춤을 추며 소감을 얘기할 때 알아봤다. ㅋㅋ

쓰다보니 너무 길어졌다. 애국주의는 아니지만, 나는 미국 드라마나 일본 드라마보다는 한국 드라마, 한국 시트콤이 제일 좋다. 내가 물론 미국이나 일본 쪽 작품을 충분히 접해보지 않았던 이유도 있지만, 그리고 앞으로 기회가 된다면 접해볼 의향도 있긴 하지만, 그보다는 아직 만나지 못한 한국의 드라마들을 더 만나보고 싶은 마음이 크다. 올해도 놓친 드라마들이 너무 많았다. 얼렁뚱땅 흥신소 같은 작품은 정말 너무 궁금하고, 보고 싶고, 모두가 열광했으나 혼자만 못봤던 하얀거탑도 꼭 보고 싶다. 언제쯤 볼 수 있을까?


PS

쓸모없는 사견을 하나 붙이자면 나는 미드, 일드, 라는 말을 들을 때마다 사실은 물냉, 비냉, 이라는 말을 듣는 것처럼 거슬린다. 이건 개인적인 이유의 까칠함이고, 미드, 일드, 라는 말을 쓰는 사람들에 대한 비하나 악감정의 표현은 아니다. 이 까칠함을 전체로 확산시키고 싶은 생각도 없다. 그냥 뭔가 말이 되다 만듯한 느낌이라는 생각이 나 혼자만 든다. 이 말을 거슬린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살면서 나 한명 밖에 못봤으니, 뭐 크게 신경쓸 일은 아니다만, 그냥 난 마음에 안드는 말이라고 소심하게 제일 흐린 회색으로 한번 얘기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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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지붕뚫고 하이킥
    from 내가되는꿈 2009-09-20 21:14 
      독서의 계절 가을을 맞아 독서량이 바닥을 치고 있는 요즘, 사실 가을은 드라마의 계절이 아닐까, 라는 의구심을 스스로에게 품게 하는 삶을 살고 있다. 나를 버닝하게 만든 두 드라마는 선덕여왕(이건 다 알라딘 또 모님 때문) 그리고 지붕 뚫고 하이킥 (빨리 시작한 건 옆에서 부채질 해준 알라딘 치 모님 때문이기도 하고 ㅋ) 이 두 작품 모두 실은 이전에 페이퍼로 쓴 적이 있는 나의 드라마 작가주의와 시트콤 PD 주의에 부합하는 작품들이어
 
 
깐따삐야 2007-12-13 00: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이스트 민경진 케릭터 와빵 좋아요. 항상 봐도 딱부러지는 웬디양님 페이퍼.^^

웽스북스 2007-12-13 01:41   좋아요 0 | URL
맞아요 정말 와빵 좋아요 흐흐 와~ 빵 좋아요 막 이러고 ㅋㅋ
제 페이퍼가 딱부러지는 이미지였군요, 흐흐 삶이 그게 안되니까 페이퍼라도 그러고 싶었나봅니다

antitheme 2007-12-13 01: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카이스트는 저도 열심히 봤었습니다.

웽스북스 2007-12-13 01:41   좋아요 0 | URL
흐흐 은근 인기가 많았었나보네요 ^^

Mephistopheles 2007-12-13 01: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처음부터 보고 흠뻑 몰입했던 최근(?)드라마는 미안하다 사랑한다 였던 기억이 납니다.

웽스북스 2007-12-13 01:42   좋아요 0 | URL
아이고 최근이라기엔 너무 3년전인 사건 ㅠ_ㅠ
메피님도 많이 바쁘셔서 드라마 잘 못보시죠? 흑

순오기 2007-12-13 01: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위에 거론된 드라마중에 제대로 본 게 하나도 없네요.
그래도 아일랜드가 그 중 많이 본 것이네... ^^

웽스북스 2007-12-13 01:43   좋아요 0 | URL
아일랜드는 시청률이 낮았는데, 본 사람은 주변에 은근 디게 많아요
다들 어둠의 경로로 봤나, 이니면 내 주변 사람들만 많이 본건가 ㅋㅋ

마늘빵 2007-12-13 08: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네 멋대로 해라,가 좋았고, 아일랜드,를 제대로 못 본 것이 한이라는. 네 멋대로 해라의 이나영 캐릭터와 아일랜드의 김민정 캐릭터를 매우 좋아해요. 그런 여자 어디 없나.

웽스북스 2007-12-13 10:09   좋아요 0 | URL
아, 아일랜드는 왜 제대로 못보셨나요- 슬프답 ㅠ_ㅠ
네멋,을 좋아했다가 아일랜드에서 인정옥에게 돌아선 사람들이 많아요- 저는 흔치 않게 아일랜드를 먼저 보고 후에 네멋을 챙겨봤었답니다. 네멋 할 때는 이상한 드라마 보느라 못봤었어요. 그리고 저는 아일랜드를 더 좋아해요 ^^ 이나영과 김민정 캐릭터는 굉장히 매력적인 캐릭터죠. 전 가끔 이재복이 그립답니다. 그래서 김민준 나오는 드라마를 좀 챙겨보는데 이재복은 없더라구요. 역시 인작가언니만이 가능하다는! ㅋㅋ

프레이야 2007-12-13 12: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집에 드라마아가씨 한 명 있어요. 제 작은딸이라고.. ㅎㅎ

웽스북스 2007-12-17 22:51   좋아요 0 | URL
어머, 혜경님 작은 딸이 벌써 아가씨에요? ^^

다락방 2007-12-17 22: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그 유명한 드라마들 중 뭐 어느것 하나 본게 없어요.
한때 『거침없는 사랑』이 제가 올인하던 드라마여요.
시트콤은 『논스톱』을 제일 좋아했구요, 지금은 『김치치즈스마일』에 푸욱 빠져지내요. 후훗 :)

웽스북스 2007-12-17 22:50   좋아요 0 | URL
흐흐 논스톱은 우리 현빈동생 나올 때 한참 봤었는데 ㅋ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