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림픽공원
1
바람 아래 앉아 있었다.
시를 읽었다.
움직이는 것이 많아 좋았다.
2
다시 바다에 대해 오래 생각한다. 모래와 바람과 큰물이 있고 그 모든 것들이 스쳐 내는 소리가 저녁과 어울려 늠실대는 곳.
나는 바다면 좋았다. 좋은 것이 참 많지만 바다가 참 좋았다. 바다에서 보낸 모든 시간이 다 좋았고 모든 시간의 바다가 다 아름다웠다. 그래서 모든 순간 바다를 생각하지만 유독 바다가 생각나는 순간도 있어서 일 년에 한두 번은 바다를 앓는다.
어떤 마음을 가지고 찾아가든, 바다에 찾아가면 어떤 마음이 된다. 바다는 너무 크고 넓고 철썩거리고 바람에도 간이 배어 있고 그렇게 수억 년을 그 자리에 있던 지구의 거대한 기억 같은 장소여서 바다 앞에서 바다 말고는 다른 생각을 할 여유가 없다. 두고 온 세상을 온통 잊어버린다. 그렇게 해주는 장소는 이 우주에 딱 두 군데뿐이라 늘 그곳 주위를 빙빙 맴돈다. 어느 방향으로 걸어도 그곳에 바다가 있어서 이 별은 참 다행이다.
앉아 있으러 갈까. 천천히 가는 버스나 기차를 타고.
3
계급투쟁은 계급을 구성하고 폭로하면서 동시에 계급을 제거함으로써 두 개의 억압된 계급 사이의 모순을 해결한다. 모든 여성이 경험하는 여성과 남성 사이의 계급투쟁은 성별 사이의 모순을 해결하고 제거하는 동시에 이해되게 한다. 우리는 모순이 항상 물질적 질서에 속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갈등(혁명, 투쟁) 이전에 반대 범주는 없다는 것이 중요하다. 차이가 있을 뿐이다. 대립의 폭력적 현실과 차이의 정치적 질서는 투쟁이 발생하고 나서야 비로소 선언이 된다. 대립(차이들)이 기존에 주어진 것으로 나타나면, "자연적인" 갈등이나 투쟁이 없다면, 변증법도, 변화도, 운동도 없다.
_ 모니크 위티그,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46쪽
계급이라는 단어를 들으면 제일 먼저 어떤 이미지가 떠오르시나요? 혹시 영화나 드라마 속에서 본 신분제 사회의 모습이 떠오르셨나요? 혹은 시가를 입에 문 배 나온 양복쟁이 자본가가 $라고 쓰인 돈주머니를 손에 쥐고 있는 모습을 누덕누덕 기운 멜빵 청바지를 입은 노동자가 렌치나 곡괭이 같은 것을 들고 노려보는 장면 같은 건 어떠신가요. 그런 그림이 제일 먼저 떠오르셨다면, 당하셨네요. 당하셨어요.
계급이라는 단어가 주는 전근대적인 이미지 때문에 오해하기 쉽지만, 계급은 세상 어디에나 있습니다. 우리가 ‘클라스class’라는 단어를 사용하는 용법을 떠올려 보면 알 수 있겠지만, 우리 사회는 온갖 장르의 영역에서 계급사회입니다. 아침에 일어나셨으면 방문을 열고 거실로 나가보세요. 가족들이 있나요? 그 가족들 사이에서 당신의 계급은 어디쯤인가요. 아, 혼자 사시나요? 그렇다면 가족을 이루고 사는 계급에 비해 혼자 사는 계급인 당신이 겪어내야 할 각종 경제적·관습적·안전 비용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만원버스를 타고 출근하시나요? 클라스 오지시네요. 외제차 타고 출근하신다구요? 클라스 오지시네요! 점심은 뭘 드시나요. 혹시 비건이신가요? 옆자리에 앉은 동료는 오늘 점심부터 삼겹살을 굽자고 하시네요. 지구는 두 분 중 누구를 옹호할까요? 윤리는요? 자유와 자기결정권은 또 어떨까요?
사회라는 구조체 속에 산다면, 모든 것이 계급입니다. 사물의 기본 입자는 쿼크, 전자 뭐 그런 애들이 아니라 계급입니다. 이 말이 이상하신가요? 당신이 이 말을 이상하다고 느끼게 만들려고 계급이 얼마나 많은 것들을 암암리에 안배해 왔을까요?
차별에 대해서 생각해볼까요. 우리는 보통 수많은 종류의 차별을 병렬적인 문제로 놓습니다. 그런 체제 하에서는 성, 계급, 장애, 인종, 종교, 지역, 경제력, 정치력 등등에서 발생하는 각종 차별을 각자의 방식으로 해결해야 하는 각자의 문제로 취급되게 만드는 경향이 없지 않습니다. 이쪽 평면에서의 피해자인 우리가 저쪽 평면에서의 가해자라는 사실을 인지하기가 쉽지 않죠. 모니크 위티그의 도식에서는 저 모든 차별 및 폭력이 계급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묶이는 것으로 보입니다. 남녀는 성별이 아니라 하나의 계급, 흑인과 백인은 인종이 아니라 저마다 하나의 계급.
이렇게 계급의 관점으로 볼 때 생기는 장점이 있습니다. 일단, 내게 피해를 입었다고 주장하는 계급의 목소리를 들으며, 혹시 내게 피해를 입힌 계급이 내가 입은 피해를 부인하거나 인지하지 못했듯, 나 역시 그런 것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해보기 쉬워지지요. 그리고 무엇보다, 계급이라는 것은 전적으로 사회의 산물이기 때문에, 내가 입고 있는 계급 피해는 어떤 이유에서든 자연화/당연시되지 않는다는 점이 크겠네요.
그러니까 모니크 위티그의 관점에서 보면 이런 느낌일 것 같습니다. 우리가 ”나는 여혐 1도 없다니까?, 내가 얼마나 여자를 좋아하는데!“ 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을 보며 안타까움을 느끼는 이유는 ‘혐오’라는 용어를 좁게, 사전에 나오는 단 한 줄의 의미로만 좁게 사용하며, 언어의 사용이 그렇다 보니 사고의 사용 역시 협소해지는 메커니즘을 목격했기 때문일 것입니다. 마찬가지로, 남녀 문제가 계급 문제의 일종이라는 명제를 부인하는 사람들을 보며, ‘계급’이라는 단어를 신분적 혹은 경제적인 영역에만 국한해 사용하면서 놓치게 될 여러 돌파구들을 아쉬워해야 하지는 않을까요. ‘혐오’라는 용어를 확장적으로 사용하듯 ‘계급’이라는 용어의 외연을 크게 볼 필요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성(sex)은 없다. 억압받는, 그리고 억압하는 성이 있을 뿐이다. 성을 생산하는 것은 억압이며, 그 반대가 아니다. 반대편은 성이 억압을 생산한다고 말할 것이다. 혹은 억압의 원인(기원)은 성 그 자체에서 발견된다고 말할 것이다. 이미 존재하는 사회에서(혹은 사회 바깥에서) 성은 자연적인 분할이다.
_ 같은 책, 45쪽
성이라는 것이 존재하고 그 자연적인 성질로 인해서 억압이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사회가 억압의 기원을 자연적인 것으로 돌려 억압을 유지하기 위해 성이라는 것을 만들었다는 의미 같습니다. 이런 전복은 재미있잖아요. 이것은 사회가 ‘성차’를 만들었다는 것이 아니라 ‘성’ 자체를 만들었다는 뜻에서 전복적입니다. 성은 당연히 자연적으로 존재하는 것이고 단지 그 두 성 사이의 차이만이 사회적으로 조작된 것이라는 관점이 낳게 될 다른 억압과 차별이 있습니다. 그 억압과 차별이 ‘성’의 바깥에 있는, 이를테면 LGBT에게만 가해지는 것이 아니라, ‘성’이 인정하는 바운더리 안쪽에 있는 여성에게도 가해질 수 있다는 관점이 독창적이네요. 심지어 이미 사회가 존재하고(그리고 존재한 이상 이제는 그 바깥에서조차) 성은 자연적인 분할로 취급받는다는 명제는 짜릿한데도 있구요.
아무튼 마르크스는 모니크 위티그를 대하기가 난처하겠습니다. 모니크 위티그가 ‘이제까지의 모든 역사는 계급투쟁의 역사이다’라는 마르크스-엥겔스의 선언을 누구보다 강하게 옹호하는 것처럼 보이지만, 막상 들여다보면 그 계급이 주로 ‘경제적’ 평면에서 발생한다고 생각했던 마르크스의 또 다른 주된 주장을 완전히 승인하고 있지는 않으니까요.
3.5
모니크 위티그의 문장은 syo에게 재미있습니다. 그리고 굉장히 선명하게 읽힙니다. 그래서 오해를 해도 선명하게 오해할 것 같아서 읽는 내내 기분이 좋습니다. 모호한 오해보다 위험한 것은 모호한 이해밖에 없으니까요. 예를 들면 다음과 같은 문장을 쓰는 순간의 모니크 위티그의 기분에 대해 조금은 알 것 같다고 할까요? 왜냐하면 우리(?)가 문장을 가지고 하는 짓(?)이 비슷하거든요.
”그러므로 성(sex)은 없다. 억압받는, 그리고 억압하는 성이 있을 뿐이다.“
이 문장에서 앞의 ‘성’과 뒤의 ‘성’은 어떤 관계일까요.
”어떤 마음을 가지고 찾아가든, 바다에 찾아가면 어떤 마음이 된다.“
쪼랩 글쟁이 syo가 앞에 써놓았던 이 문장에서 앞의 ‘어떤’과 뒤의 ‘어떤’은 또 어떤 관계일까요.
--- 읽은 ---
85. 카카오프렌즈 러브 1
오쭈 지음, 흑부 그림 / 대원앤북 / 2019
귀여워서 봐줬다. 진짜.
86. 잘라라, 기도하는 그 손을
사사키 아타루 지음 / 송태욱 옮김 / 자음과모음(이룸) / 2012
읽어버렸으니 이제 어쩔 수 없게 되었다는 말에 사로잡혔다. 그 말이 참 아프고 기쁘다.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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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첫 번째 과학 공부 / 박재용
스포츠와 여가 / 제임스 설터
이기는 몸 / 이동환
일곱 해의 마지막 / 김연수
모니크 위티그의 스트레이트 마인드 / 모니크 위티그
오늘 밤은 굶고 자야지 / 박상영
제주에서 혼자 살고 술은 약해요 / 이원하
SQL 첫걸음 / 아사이 아츠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