폴리티컬이코노믹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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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에게 연휴란 휴일이 아니라 노동의 중첩이었다. 三은 명절 연휴를 맞아 대구가 아닌 성남행을 택했고, 덕분에 syo는 혼자 있을 때보다 두 배 이상의 요리와 두 배의 설거지와 세 배의 빨래와(얜 왜 이럴까) 일곱 배 정도의 인간 스트레스를 감당해야 했다. 아오, 저 가부장가장 새끼. 심지어 두부는 나중에 니 혼자 먹어라-라고 당당하게 선언하는 바람에, 신에게는 아직 3kg의 두부가 남아 있사옵니다…….
사람 난 자리는 몰라도 든 자리는 안다더니. 진짜 자립해야 돼. 내가 돈만 있었으면 저런 화상이랑 같이 안 살 것을. 우리 관계는 입장 바꿔서 내가 돈을 벌고 얘가 살림을 해도 내가 빡치는 불평등 구조다. 아주 가끔 생색이라도 내듯 설거지를 하긴 하는데 세척이 끝난 프라이팬을 검지 손가락으로 주욱 밀어보면 십중팔구 손끝에 기름이 맺힌다. 세탁이 끝나는 소리가 들렸을 테고, 내가 허공에 수건을 탁탁 터는 소리가 들리지 않았을 리가 없을 텐데, 방안의 그는 기척이 없다. 결국 나 혼자 두 명분의 옷과 수건과 속옷을 다 널고 이제 남은 양말들(나는 백수라 나갈 일이 없어서 양말 빨래는 100% 그의 것이다)을 얹으려는 찰나, 방문을 스윽 열고 나오더니 양말 두어 개 건조대에 띡 걸쳐 놓는다. 정말 기가 막힌 타이밍이다. 그러고는 괜히 널려 있는 수건의 균형을 맞추는 척, 팬티들의 각을 잡는 척 건조대 근처에서 십몇초를 머물더니 나와 슬쩍 눈을 마주치고는 책상에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본다. 노동량은 최소화, 양심에 밥 주기는 최대화하는 그의 호모 이코노미쿠스적 마인드는 정말 존경스러울 지경이다. 뿐이랴. 물건 쓰면 제 자리 두는 법이 없다. 벨트를 풀어 아무 데나 던져놓고, 드라이를 하고 드라이어를 아무 데나 던져놓는데, 그 두 아무 데나가 또 기가 막히게 겹치는 바람에 벨트가 완벽한 위장술을 발휘해 드라이어 선 속에 숨었다. 그걸 끝내 못 찾고 자는 나를 깨워 내 벨트를 빌려서 차고 출근한다. 치우고 정리하는 사람은 늘 따로 있는 법이다. 지가 무슨 엔트로피의 화신인 줄 아나보다. 같이 회사 다니던 시절, syo가 10시까지 야근하고 11시에 집에 돌아와 보면 테이블 위에 라면 먹은 흔적들 그대로 올려놔서 온 집에 라면 냄새가 진동을 한다. 보면 방에 드러누워 핸드폰 게임을 하거나 자고 있다. 겁나 지치고 짜증 난 목소리로 야- 한 음절 내뱉으면, 주인마님 드실 수정과에 침 뱉다가 걸린 삼쇠 같은 얼굴을 하고서는 아, 치운다는 게 그만 깜빡 졸았네- 운운하며 느릿느릿 고무장갑을 낀다. 누운 건 존 게 아니지, 적극적으로 잔 거지. 퇴근하고 7시에 라면 먹었는데 11시가 깜빡은 아니지, 질 좋은 수면이지. 그리고 삼쇠 놈이 씻은 그릇과 냄비는 어차피 내가 쓰기 전에 다시 설거지를 하게 될 것이다…….
연휴가 끝나면 이혼이 급증한다는 글을 읽은 적이 있다. 실제로 통계가 뒷받침하고 있었다. 그러나 이제는 통계도 필요 없게 되었다. 바로 여기, 내가 온몸으로 그 주장을 뒷받친다…….
공갈협박범 딜레마의 결론을 정리하면 이렇다.
1. 비합리적인 상대에 맞서 합리적으로 싸우는 것은 종종 비합리적이다.
2. 비합리적인 상대에 맞서 비합리적으로 싸우는 것은 종종 합리적이다.
3. 이 게임(그리고 현실세계에서 일어나는 비슷한 상황들)을 숙고해보면, 게임에 임하는 합리적 방법이 무엇인지 분명하게 말하기 어려울 때가 많다. (심지어 '합리적'의 의미가 무엇인지도 확실하지 않다.)
4. 입장을 바꿔 생각하며 상대의 행동을 예측하는 노력이 필요하다. 하지만 노력한다고 되는 것은 아니다. 당신과 상대는 결국 다른 사람이다. 상대가 어떤 것에 반응하고 왜 반응하는지 알기는 어렵다. 주어진 상황에서 남들은 어떻게 행동할지 예측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하다.
_ 하임 샤피라, 『n분의 1의 함정』
타인과 함께 사는 일은 서로의 생활 습관, 집이라는 장소에 대한 인식과 시선의 차이를 알아차리면서 화들짝 놀라는 일이 아닐까. 놀란 뒤 필요한 건 서로에게 맞춰 가려는 의지와 노력이다. 병아리의 말처럼, 함께 살기 위해서는 서로를 정! 말! 사랑해야 한다. 사랑이 추상적인 감정이 아니라 노동이라면, 정말 사랑한다는 말은 정말 열심히 노동하겠다는 의지와 같은 말이다. 관계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감정노동, 가사노동, 돌봄노동 등의 다양한 노동을 어느 한쪽만 감수해선 안 된다. 사랑한다는 백 마디 말보다 한 번의 노동이 서로를 살아 있게 하니까. 제발 함께 사랑(노동)해 주세요.
_ 홍승은, 『두 명의 애인과 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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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yo는 많이 읽는 편이다. 권 수에 집착하는 건 아니지만- 이라고 말하는 순간 그 사람은 많이 읽건 적게 읽건 이미 독서의 양에 집착 중인 것이다. 집착하지 않는 사람에게 그 주제는 언급 거리 자체가 되지 않는다. syo는 그냥 읽는데, 어떤 날은 많이 읽는데도 더 많이 읽고 싶고, 어떤 날은 면적을 줄이고 줄여서 점처럼 뾰족한 독서를 하고 싶기도 하다. 그런 걸로 보면 어떤 날은 권 수에 집착을 하는 것 같으면서도 또 어떤 날은 그러지 않는 것도 같다. 집착은 있는 것 같은데 집착 자체에 대한 집착은 없는 듯. 그럼 뭐, 건강한 축이다.
syo는 부지런히 쉬운 책을 읽는다. 원전을 사 놓고도 개론서를 읽고, 가끔 쓰레기를 만나는 위험을 무릅쓰고서 에세이를 장복 중이며, 뭘 다뤘건 만화라면 일단 펼쳐는 본다. 깊이 있는 책은 깊겠지만 행복은 깊은 곳에만 있는 것은 아니어서, 아, 지금 너무 좋다, 그냥 좋다, 행복하다, 하는 순간적인 감정 상태를 자주 만나는 것이 삶의 목표인 사람은 깊이 있는 책을 읽지 않아도 좋다. 물론 읽어도 좋겠지만.
읽으면서 내가 읽는 방식과 목적에 대해 자꾸만 생각하는 일은 좋다. 그건 무조건 이득이다. 심지어 읽는 시간을 좀 깎아서 생각하는 데 쓰더라도 너끈히 남는 장사다. 이게 무슨 말인지, syo가 뭐 어떤 감정을 말하려 하는지, 그리고 그걸 굳이 말로 하려다 보니 그 표현이 얼마나 서투르고 또 부정확한지, 읽는 사람들은 다 알 거다. 그게 재밌다. 쟤가 지금 무슨 말을 하려는지 아는데 그걸 잘 표현을 못하네, 혹은 쟤가 표현은 잘 못하는데 그게 어떤 말인지는 알겠네. 세상에는 표현을 잘 못해내기 때문에 그 못함까지 포함하여 그 못함을 유발하는 뭔가를 기가 막히게 알아채게 만드는 경험들이 있다. 아는 사람들끼리 넌지시 주고받는 마음. 말로 하는 데 만져지는 것 같은 것. 카오스의 시그널.
모두가 힘든 시기를 지나고 있습니다. 매일 수없이 쏟아지는 정보와 이미지에 지쳐 이제는 자신만의 알맹이를 돌보고 싶을 때가 많을 것입니다. 폭발적으로 성장하던 영상 콘텐츠 시장은 이제 그 기술의 정점과 함께 종말을 향해 달려가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물론 생각지도 못한 더 큰 기술력을 자랑하는 매체가 우리를 한순간에 장악해 버릴지도 모르겠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어느 때보다도 자기 자시노가 서로의 삶을 바라보는 진실한 이야기에 집중하는 시간을 보내고 있습니다. 마음의 근육을 단련시켜주는 글을 읽고, 서로간 격려의 말을 주고 받고, 이를 곰곰이 되새기며 명상이나 수행을 하려는 움직임도 많아지고 있는 요즘입니다. 화면 속 이야기들도 모두를 구해내는 수퍼히어로가 아닌 우리의 시선이 미처 닿지 않는 곳에서 피어나는 작고 아름다운 이야기에 더욱 집중하는 것 같아 보입니다. 기술의 발달로 이제는 누구나 그럴싸한 사진과 영상을 제법 잘 만들어내기도 합니다. 어쨌거나 이 모든 것들을 만들어내는 동력은 결국 진심과 진실이라 생각합니다. 따뜻한 온기를 가진 사람의 어여뿐 마음 같은 것 말입니다. 그래서 저는 수많은 서사를 진실하게 담고 있는 책이 더욱 소중하게 여겨지는지도 모르겠습니다.
_ (주)책(월간지)편집부, 『책Chaeg 2021. 1. 2』
세상을 바라보는 위치와 방향과 방식을 자각하고 반성해야 한다. 다시 말해 세상을 알 수 있게 해주면서 동시에 우리 눈을 가리는 것이 무엇인지를 묻는 것에서부터 더 넓고 깊은 인식이 시작된다.
_ 한형식, 『마르크스 철학 연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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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들이 남자들과 다른 방식으로 공적 질서 안으로 들여지는 것과, 공적 질서로부터 여자들이 배제되는 것, 이 두 가지 상황은 모순적이지 않고 동시에 일어날 수 있다. 이 두 가지 중 하나만 존재했다면 이것들은 지금만큼 강력하진 않았을 것이다. 우리가 첫 번째 명제를 주장할 때, 저쪽은 두 번째 명제를 내세우며 부인할 수 있고, 우리가 두 번째 명제를 주장하면 저들은 반대로 첫 번째 명제를 들먹이며 부정할 수 있다. 우리가 두 가지 말을 하면 그들은 ‘비논리적’이라는 비논리적인 말로 도피할 수 있게 된다. 그러니까 언뜻 보면 공존이 불가능해 보이는 저 두 명제가 실제로 공존하면서 서로의 존재를 위협하는 것이 아니라 위협으로부터 서로의 존재를 지탱하는 것이다. 마치 적대하는 두 나라의 군부 세력들이 군비축소를 외치는 자국 시민들로부터 자신의 덩치를 지키기 위해 서로를 이용하듯.
--- 읽은 ---
45. 서른과 마흔 사이
오구라 히로시 지음 / 박혜령 옮김 / 위너스북 / 2020
스탠퍼드 설립에 관한 일화는 근거 없는 낭설로 밝혀진 지 오래지만, 책 쓰다가 구글에 한 번 때려 넣어보지도 못할만큼 이런저런 업무로 많이 바쁘셨나 보다. 출간 당시 55세였던 저자가 그때까지도 바빴다는 건 좋은 시그널이다. 저자가 시키는 대로 30대를 보내고 나면 나도 55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쁠 수 있겠구나. 심지어 이런 낭설(들어만 봐도 딱 이상하다)의 진위 같은 거 확인해보지 않고 인용하는 세심하지 못한 일처리 감각을 지녔음에도 저리 바쁠 수 있다니, 작은 단점 같은 건 무시해도 좋을 정도로 훌륭한 지혜가 듬뿍 담긴 책이겠구나 하는 믿음이 생긴다.
인생의 진검승부는 30대에 펼쳐진다. 20대에는 제아무리 빨라봤자, 또래보다 3~4년 정도 앞설 뿐이다. 하지만 30대에 들어서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30대의 10년이라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느냐에 따라 남은 인생의 모두가 결정된다. 30대에도 여전히 20대의 혈기와 낭만적 생각, 구체화되지 않은 막연한 비전과 꿈을 고집한다면, 돌이킬 수 없는 나락으로 떨어져 다시는 특별한 삶을 누릴 수 있는 기회를 얻지 못할 것이다.
_ 오구라 히로시, 『서른과 마흔 사이』
그러나 30대가 다 저물어 가는 마당에 보면 이 문단은 뭔가 저주에 가깝다?
46. 차이나는 클라스 : 국제정치 편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작진 지음 / 중앙books / 2020
딱히 감상이라고 할 만한 게 생기지는 않는 독서였다. 책이 좋지 않아서 그렇다기보다 형식이 강연 형식이라는 것, 국제정치와 관련한 지식 전달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다는 것, 뭐 그런 것들 때문이 아닐까 싶다. 우리 각자의 머릿속에 들어 있는 ‘교양’의 바운더리는 조금씩 다를 것이다. 국제정치에 관한 지식이 그 안에서 큰 영역을 차지하고 있는 분들에게는 이 책이 어떤 의미일까. syo의 교양나라는 국제정치보다는 양자역학에 노른자를 내주는 약간 변태 같은 곳이라서, 그냥 흐음- 흐음- 하는 독서로 마무리 되었다.
저는 ‘도덕적’이라고 간주되던 세대의 ‘정치적’ 실패가 우리 사회에 냉소주의무력감패배주의를 팽배시킬까 두렵습니다. 86세대의 마지막 시대적 과제는 다음 세대에게 지옥(헬조선)을 물려주지 않는 것, 다음 세대에게 성숙한 민주주의를 실현할 기회를 제공하는 것, 그렇게 기품 있게 자신의 자리를 다음 세대에게 넘겨주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이를 위해 86세대 등 기성세대는 68혁명의 부재가 자신을 어떻게 기형화했는지 성찰할 필요가 있습니다. 청년세대는 보다 적극적으로 정치적 변화에 동참하고, 스스로 새로운 세상을 만들어가야 합니다. 인류 역사는 해방의 역사였고, 모든 해방은 ‘자기 해방’이었습니다. 흑인을 해방시킨 것은 흑인이며, 여성을 해방시킨 것은 여성이었고, 학생을 해방시킨 것은 학생이었습니다. 누구도 대신 해방시켜줄 수는 없습니다.
_ JTBC <차이나는 클라스> 제작진, 『차이나는 클라스 : 국제정치 편』
47. 징구
이디스 워튼 지음 / 이리나 옮김 / 책읽는고양이 / 2019
역자 후기에 따르면 이디스 워튼은 생전에 친구인 헨리 제임스 짭 소리를 자주 들었다고 한다. 제임스 녀석도 친구가 됐으면 아니라고 해줄 법도 한데, 그런 분위기에 은근슬쩍 동조했다는 듯. 그런 정보를 모르고 읽었는데 진짜 헨리 제임스의 느낌이 있었다. 그러니까 인물의 감정과 생각이 변화하는 한 계단 한 계단의 높이가 낮아서 어떨 때는 마치 언덕처럼 느껴지는 부드러운 흐름 같은 것. 흉내낸다고 될 게 아닌 이런 능력이 닮은 걸 놓고 아류라고 할 수 있는지 모르겠다. 그냥 헨리 제임스가 가지고 있었던 재능을 이디스 워튼도 갖고 있었던 것 아닐까. 오히려 발랄한 데가 있는 이디스 워튼 쪽이 나는 더 좋았다.
“처음엔 다 그렇게 좀 아픈 법이지.”
“아빠!”
아버지가 걸음을 멈추자 예상치도 못했던 표정이 담뱃불 빛에 드러났다.
“나도 다 겪은 일이거든.”
“네? 아빠가요?”
“내가 말 안 했던가? 아빠도 한때 소설을 썼었어. 대학을 막 졸업했을 땐데, 의사 되기가 그렇게 싫더라. 그래, 난 천재가 되고 싶었어. 그래서 소설을 썼지.”
의사가 말을 멈추자 테오도라는 연민의 정을 담아 조용히 아버지를 붙잡았다. 마치 물에 빠진 사람이 미쳐 날뛰는 파도 속에서 구원의 손기를 만난 것 같은 기분이었다.
“아빠… 아, 아빠!”
“일 년 걸렸어. 일 년 내내 정말 힘들여 글을 썼지. 다 썼는데 아무데서도 출판을 안 해주더구나. 그때 집으로 돌아오던 걸음이 생각나서 널 마중 나왔지.”
_ 이디스 워튼, 「에이프릴 샤워」
48.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이주윤 지음 / 한빛비즈 / 2019
숨만 쉬어도 고통받는 이 땅의 천만(?) 비혼/미혼인들이여, 민족 최대의 명절이라 최대의 잔소리/헛소리/개소리/뻘소리/쉰소리 폭격이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다들, 무고하신지요. 저는 괜찮습니다. 쏘쏘. 어떻게든 살아냈습니다. 이제 추석까지는 한 세월이 남았으니, 우리는 충분히 먹고 넘치도록 마시면서 최선을 다해 행복의 적립금을 쌓아야 합니다. 그때까지 수많은 다른 미혼/비혼인들의 말을 듣고 글을 읽으며 혹시나 발생할지도 모를 불안을, 그러니까, 내가 좀 이상한 게 아닐까, 남들 다 사는대로 못/안 살고 있는 것은 아닐까, 나만 이 모양 이 꼴인 것은 아닐까, 따위의 어두운 생각들을 씻어냅시다. 모양도 꼴도 우리는 모두 어슷비슷합니다. 이렇게도 다들 하루하루 잘 살고 있습니다. 그러는 와중에 또 누구는 상대적으로 좀 더 진지하고, 누구는 또 좀 더 웃기고 그럽니다. 그러는 와중에 진지하던 사람이 좀 웃긴 일을 벌이기도 하고, 웃기던 사람이 좀 진지해지기도 하면서 그렇게 삽니다. 나는 문제 없다고 파워당당하다가도, 어쩐지 세상 행복한 저것들을 보면 괜히 얄미워 끝없이 시니컬해지다가도, 또 어떤 날에는 내가 지닌 넓고 시원한 자유의 촉감과 면적에 소스라치게 행복해하기도 하면서. 우리가 다들 그렇게 유사합니다.
전 부치러 고향에 내려간다. 지하철을 타고서 경기도 평택시로 내려간다. 가양역에서 9호선을 타고 노량진까지 가서, 노량진에서 1호선으로 갈아타고 평택역에 내린다. 노량진역 에스컬레이터, 내 앞에 선 남자와 여자가 손을 꼭 잡고 있다. 남자는 회색 코트를, 여자는 분홍색 코트를 입었다. 남자는 못생겼고, 여자는 그저 그렇다. 명절 연휴 첫날에 에스컬레이터에서 손을 잡고 있다니. 지난달에 결혼한 모양이지. 아니나다를까 여자의 손가락에서 다이아 반지가 빛나고 있다. 여자여, 너는 시댁에 가는가. 시댁에 도착하면 너희는 붙잡은 그 손을 놓게 되겠지.
"이제 왔니? 좀 빨리 오지 않구선."
너는 시어머니의 빈정거림에 서둘러 분홍 코트를 벗고 앞치마를 두를 것이다. 그러고는 거치적거리는 반지를 빼내어 주머니에 넣겠지. 너의 다이아 반지는 컴컴한 주머니 속에서 빛을 잃는다. 너의 손을 절대로 놓지 않을 것 같던 남자는 이제 너의 손이 아닌 리모컨을 잡고서 네가 아닌 텔레비전을 본다. 여자여, 너 전 부치러 시댁에 가는가.
_ 이주윤, 『제가 결혼을 안 하겠다는 게 아니라』
49. 퀀텀
로랑 셰페르 지음 / 이정은 옮김 / 과포화된 과학드립 물리학 연구회 감수 / 한빛비즈 / 2020
양자역학이라는 것을 대중에게 이해시키기 위한 시도는 양적으로 부족하지 않은 것 같다. 그 어떤 철학자의 개론서보다, 양자역학을 개론하는 책이 이제 더 많을 것이다. 그러니까 이제 읽으면 된다. 당연히 한 권 한 번 읽어서는 모르겠고, 될 때까지 그냥 읽고 까먹고 읽고 까먹고 하다가 어 됐네, 하면 되는 것. 그 많고 많은 책 중에 그래도 빼도 될 책을 골라본다면, 아마 이 책은 절대 거기 끼지는 않을 것 같다.
감수자 네이밍 센스 지렸다.
우리 지구인은 삶을 평면으로만 인식합니다. 참 이상한 습성이죠. 지평선을 보며 미래를 읽으려 하고, 또 미래를 살피며 스테이크가 완벽하게 익었는지 알아내려 하죠. 머리 위에 있는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습니다. 우린 위를 가끔 흘끗 쳐다볼 뿐이죠. 몇몇 천진한 사람들은 용감하게도 지구의 안정적인 유한성 너머를 의구심 어린 눈으로 바라봅니다. 하지만 대부분 이런 실존적인 아찔함에 부딪치기를 꺼리죠. 그래서 자신들의 평면적 문제로 돌아갑니다. 구름, 비, 태양. 이 정도가 우리의 수직적인 시야와 하늘, 그 너머의 방대함을 떠올릴 때 생각나는 전부죠. 우리는 소우주에 틀어박혀 무한히 큰 것과 무한히 작은 것 사이에서 살아갑니다. 카망베르 치즈가 투명한 덮개 속에서 숙성하는 것처럼요.
_ 로랑 셰페르, 『퀀텀』
50. 자본주의
홍기빈 지음 / 책세상 / 2010
자본주의 세상에서 자본자본 사는 우리는 다른 어떤 생명체보다 자본주의에 대해 상세하게 알고 있을 것만 같지만 막상, 그래서 자본주의가 대체 뭔데? 하는 질문을 들으면 그, 그거슨- 하면서 꿀도 안 먹었는데 말을 먹게 된다. 그러면서도 대부분의 우리는 하루 중 사랑한다는 말을 하는 것보다 자본주의라는 단어를 입에 올리는 빈도가 더 크고, 자본주의가 다 그런거지- 하는 말을 체념과 달관과 풍자가 섞인 현자의 말로 받아들이는데 암묵적 합의가 되어 있는 것도 같다. 자본주의, 대체 그게 뭐길래?
이 책에 따르면, 놀랍게도 자본주의란 딱히 한 번도 제대로 정의된 적이 없는 개념이다. 정확히 말하면 수많은 사람이 정의하였지만 그 정의에 포함되지 않는 것들이 늘 있어왔고, 그 포함관계를 둘러싼 싸움이 당연히 정치적인 동시에 경제적이기도 해서, 정의 대상이 정의하는 사람들의 역량을 아득히 뛰어넘는 바람에, 결국 모두가 아는 듯 모두가 모르는 희한한 단어가 된 듯하다. 나는 그런 단어란 오직 사랑뿐이라고 생각했는데, 와, 역시 자본주의. 사랑보다 더 많이 입에 오르는 자본주의.
스피노자의 말처럼 어떤 것을 정의한다는 것은 ‘그것이 아닌 것’도 함께 밝히는 것이다. 이 모든 ‘현실 자본주의’ 체제들을 순수한 시장 경제가 아니라는 이유로 자본주의 범주에서 배제하려 든다면, 자본주의는 일부 마르크스주의자들이 주장하는 ‘진정한 사회주의’처럼 역사에서 한 번도 실현된 적이 없다는 말밖에 되지 않는다. 반대로 그렇다고 해서 이것저것 가리지 않고 다 자본주의라는 명칭으로 부르다가는 자칫하면 파시즘 경제, 소련 경제, 최근의 중국 경제까지 모두 다 자본주의라는 이름을 달게 될 위험이 있다. ‘자연적 자유의 체제’로 자본주의를 정의하는 것은 신자유주의 우파 혁명의 불을 댕길 이상과 당위로서는 의미가 있을지 모르지만, 현실의 경제 체제에 대한 규정으로서는 최소한 앞에서 본 것과 같은 수많은 논쟁에 휘말려 있다고 할 수밖에 없다.
_ 홍기빈, 『자본주의』
--- 읽는 ---
잊혀진 여성들 / 백지연 외
돈의 속성 / 김승호
김상욱의 과학공부 / 김상욱
혐오의 시대, 철학의 응답 / 유민석
한 번 보고 바로 써먹는 경제용어 460 / 신성출판사 편집부
비전공자를 위한 이해할 수 있는 IT 지식 / 정지훈
문학을 읽는다는 것은 / 테리 이글턴
스피노자의 동물 우화 / 아리엘 수아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 오찬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