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겨울사거리 1
우리는 손을 잡고 햇볕 젖은 내리막길을 따라 걸었다. 가파른 그 길을 내려갈 때는 고개를 조금만 들어도 눈앞이 온통 하늘이어서 마음이 다 부드럽다. 봄은 아직 덜 익었고 마스크만 없었으면 몰래몰래 입도 맞출 우리가 봄과 나란히 익어간다. 우리는 잘 익어간다. 사랑이라는 소리를 자주 내고 잘도 웃는다. 요구하는 대신 욕구하며, 걱정할 자리에서 꼬박꼬박 다정하다. 꼭 잡은 손이 외투 주머니로 들어가는 궤적이 어느덧 우아하고 매끄럽다. 구천구백구십구만 구천구백구십구 번쯤 해본 일 같다. 일억 번째 봄이 오고 있다. 우아하고 매끄럽게, 새콤한 그 봄 속으로 우리가 걸어 들어간다.
--- 읽은 ---
51. 김상욱의 과학 공부
김상욱 지음 / 동아시아 / 2016
배우고 익히고 그 안에서 뭔가 발견하기도 하고 마침내 그것을 통해 끼니를 창출하는 공부를 지닌 사람이 늘 부러웠다. 거기쯤 도달하면 공부의 주인은 마음속에 자기의 안경과 사전을 품게 되고, 그것들을 사용해 세상을 보고 번역한다. 그래서 그의 말에, 글에, 그러니까 생각과 행동에, 그의 공부가 묻어난다. 그것이 역량이고, 곧 그 사람의 실재다. 누군가가 있다는 것, 나 여기 있소- 하고 세상에 목소리를 낼 수 있고 사람들이 그 목소리가 누구의 목소리인지 구분할 수 있는 축복 같고 때론 기적 같은 그 일. 그 시작은 공부다. 그리고 끝도 공부겠다.
물리학자들을 괴롭히는 질문 하나, "빅뱅 이전에 무엇이 있었나요?"
답은 의외로 간단하다. "동방신기."
여기서 웃음이 나오지 않는다면 당신은 비실비실 배삼룡이나 땅딸이 이기동이 누구인지 알고 있음에 틀림없다. 사실 많은 심오한 질문은 따지고 보면 과거에 대한 것이다. 미래에 대한 질문조차 그 단서는 과거에 있다. 미래가 과거와 비슷한 방식으로 작동할 거라는 가정이 없다면 예측하는 것 자체가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_ 김상욱, 『김상욱의 과학 공부』
52. 돈의 속성
김승호 지음 / 스노우폭스북스 / 2020
요즘 이 장르의 책이 손에 잡히면 피하지 않고 읽는 중인데, 이 책은 확실히 독보적인 데가 있다. 하나 마나 한 소리를 하지 않거나, 최소한 하나 마나한 소리를 할 때 쓰나 마나 한 문장을 동원하지 않기 때문에 하나 마나한 소리 그 이상으로 들린다. 명민하다. 명민하였으니 그만한 돈을 벌었겠지- 라고 생각하면 이 칭찬은 하나 마나한 칭찬으로 보일 수도 있겠지만, 모든 돈 번 이들의 글이 다 명민한 것은 아니니 최소한 나도 하나 마나한 소리를 한 것은 아니다. 넓게 읽히고,
욕심은 리스크를 낳는다. 이 욕심이 대중에게 옮겨 붙으면 낙관이라는 거품이 만들어진다. 거품은 폭락을 낳는다. 그러나 자포자기하고 두려움에 떠는 시기가 오면 봄이 오고 해가 뜬다. 이건 굳이 통계나 패턴으로 증명하지 않아도 인문학적인 지식으로 알 수 있다. 모든 욕심의 끝은 몰락을 품고 있다. 그리고 모든 절망은 희망을 품고 있음을 기억해야 한다.
_ 김승호, 『돈의 속성』
53.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오찬호 지음 / 위즈덤하우스 / 2020
좋은 세상은 무엇인지 생각해 본 적이 많다. 답도 가지고 있다. 하지만 정치/경제/사회적 이슈를 놓고 친구들과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좋은 세상이라는 건 그저 저마다의 좋은 세상일 뿐이라는 생각이 든다. 내게 좋은 세상은 네게는 좋은 세상이 아니거나, 우리에게 좋은 세상은 사실 내게 좋은 세상보다는 나한테 조금 덜 좋은 세상이거나. 그래서 모두에게 좋은 세상을 만들자는 깃발 아래 모여든 사람들 중 그 누구도 자기가 원했던 그대로의 세상을 획득하지는 못하고, 차마 좋아지지 않았다고는 말할 수 없지만 그래도 세상 참 좋아졌다고 말하기에는 뭔가 떨떠름한 세상이 만들어지곤 한다. 최악의 경우 가장 강한 한 사람에게만 완벽한 세상이 태어나기도 하고.
더 좋은 세상을 외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높다는 것이 이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는 증거는 아니다. 그냥 더 나은 세상을 만들고 싶은 것이다. 마찬가지로 이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는 뜻이냐며 윽박지르는 사람들 역시 이 세상이 완벽하게 돌아간다고 생각하는 것은 아니다. 단지 저 목소리 높은 사람들이 말하는 ‘더 나은 세상’이 내게도 더 나은 세상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있을 뿐이다.
그냥 우리는 늘 싸우고 있다. 세상은 좋아지기도 하고 더러 나빠지기도 하지만 어쨌든 싸움 속에서 굴러간다. 누군가 선봉에 서서 피 흘리며 싸우는 동안 후열에 숨어 눈치를 보다가 승리의 단맛이 잡힐 것 같다 싶을 때 튀어나와 그 열매에 혀를 대는 인간이 있다. 나다. 내 좋은 세상이 승리하는 데 아무것도 기여하지 않는 스스로의 모자람을 감추기 위해, 키보드 위에서만 정의를 들먹이거나 내게 아무런 해를 끼치지 않을 것이 확증된 가까운 사람들 사이에서만 소리 높여 분노하며 자신의 양심에 밥상을 차려주는 인간도 있다. 그것도 나다. 나는 세상이 큰 틀에서 좋아졌다고 생각하고, 이런 좋은 책과 저자들의 노력에 힘입어 세상은 내가 원하는 쪽으로 조금씩 좋아질 거라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적극적으로 아무것도 하지 말아야겠다는 마음을 품은 게 아니라서 더 비겁한 모양새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 그러니까 이번 생에는, 이 훌륭한 책을 칭찬할 자격조차 없는 걸지도 모르겠다.
두 가지 팩트가 있다. 하나는 이 사회가 그래도 조금씩 나아지고 있다는 팩트이고, 하나는 현재 이 순간에도 불평등에 노출되어 삶이 위태로운 사람이 반드시 있다는 팩트다. 전자는 후자를 드러내는 걸 두려워하지 않을 때 지속적으로 그 방향성이 유지된다. 세상이 좋아지고 있다는 사실이, 세상의 불평등조차 낙관하라는 태도로 이어져서는 안 된다. 지금 아파하는 사람을 보며 한 사회의 불평등을 탓하는 건 확증편향과 무관하다. 오히려 그걸 무시하고 '그래도 과거보다 나아졌다'는 망상에 빠지는 게 보고 싶은 것만 보려는 착각이다.
곳곳에 첨단시설이 즐비해졌다는 팩트는 아무리 더워도 휴게실에 창문 하나 낼 수 없어 생을 마감한 '그' 노동자의 비 극을 덮을 수 없다. 손가락 절단 사고가 과거보다 줄었다고 해서 허술한 안전장치 때문에 끔찍하게 죽는 '그' 노동자의 불행이 기쁨으로 둔갑될 수 없다. 모든 것이 다 배달되면서 개인의 편리가 증가했다는 사실이 하루 열다섯 시간씩 배달하는 '그' 사람의 고충을 해결하지 않는다. 여성도 차별 없이 교육받는다는 변화된 통계 자료가 데이트 폭력으로 목숨을 잃을 수 있는 '그' 당사자의 불안한 마음을 줄여주지 않는다.
_ 오찬호, 『세상이 좋아지지 않았다고 말한 적 없다』
--- 읽는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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