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둑의 계절
옥상에서 시집 한 권을 마저 읽었다. 여기에 의자 하나 두었으면 하고 지난가을부터 생각했는데 그렇게 되지 않았다. 햇볕이 무거워 허청허청 거닐며 시를 읽었다. 봄빛에 녹은 시어가 종이 위에 번지면 잠깐 고개를 들고 우리에게 시간을 주었다. 바람은 딱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마음이 동네처럼 조용했다. 조용하게 그러나 확실하게 봄은 오고 있다. 이제 아무 때고 옥상에 오르면 흘러오는 계절의 등뼈를 만질 수 있다. 눈을 감아도 눈꺼풀 너머로 스미는 빛이 있다. 사람은 눈꺼풀도 얇지만 마음 꺼풀도 얇아서 봄이 한 번 스미면 정말로 봄이 오는 날까지 저 혼자 섣부르게 빛난다. 자꾸만 시집에 눈이 가고, 종종대며 옥상에 오른다. 말없이 빙빙 돌다가 뭔가 훔쳐 내려온다. 봄은 도둑질하기 좋은 계절이다.
--- 읽은 ---
58. 흄
최희봉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4
흄은 사실 관념론자가 아니었나 싶어질 정도다. 헤겔이 관념론자 소리를 듣는 이유는 모든 게 사실 관념이고 정신이 하는 짓이라고 여겼기 때문인데, 흄도 만만치 않다. 니들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그것들 사실 다 관념이고 신념일 뿐이란다- 라는 말을 굉장히 쎄게 한 사람 중 하나가 흄이다. 물론 그 주장 자체를 경험론적 논리로 펼쳐내긴 했지만, 흄이 지나간 자리에는 진리와 법칙은 메마르고 오직 신념과 관념만 남았다. 칸트 동공에 지진 날 만도 하다.
우리의 기초 신념들의 참된 근거에 관한 흄의 주요 논제를 간략하게 정리하자면 이렇다. 흄은 인식론의 정통적인 정당화 프로그램을 사전에 봉쇄하면서, 이러한 믿음의 행태는 결국 우리가 그렇게 믿는 것이 자연적이라고 생각하는 행태라는 관찰로 만족해야 한다고 제안한다. 즉 우리의 기초 신념들에 관련된 문제는 합리적 정당화의 문제라기보다는, 궁극적으로 우리가 지닌 몇몇 특정 성향들을 기술하는 것의 문제라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우리는 단지 그런 사실들을 믿는 것이 자연적이라고 생각할 뿐이다. 흄은 신념 또는 확신을 합리적 추론의 문제가 아니라 자연적 반응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_ 최희봉, 『흄』
59. 엑시트 EXIT
송희창(송사무장) 지음 / 지혜로 / 2020
뭐 어떻다 평하지 않겠다. 한 땀 발췌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듯하다.
내가 운이 좋았을 거라고? 아니면 특별한 능력을 가졌을 거라고?
글쎄다. 이 책을 읽어보면 나는 지극히 평범한 사람이었고, 방법만 알면 누구나 부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될 것이다. 나 뿐만 아니라 나의 제자들 중에도 평범함에서 출발하여 부자가 된 수많은 이들이 있으므로, 이를 결코 운 때문이라 할 수도 없다.
이 세상은 결코 운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에게 정해진 운명이나 팔자 따위는 없다. 누구든 조금만 노력하면 자신의 꿈을 현실로 만들 수 있는데도 그러한 사실을 모르기 때문에 노력조차 하지 않은 채 그대로 현실에 갇혀있는 삶을 살아가는 것이다.
_ 송희창, 『엑시트 EXIT』
60. 지지 않는 하루
이화열 지음 / 앤의서재 / 2021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 알고 싶다면 나를 펼쳐보라며 먼저 손 내미는 책들은 많았다. 나는 늘 행복을 원했고 그런 책들의 믿음직스럽지 않은 손을 속는 셈 치고 잡아보는 일이 잦았다. 그러니까 행복이란 이런 거구나- 하는 느낌으로 마무리된 독서는 턱없이 적었고, 그나마의 깨달음도 알쏭달쏭하게 와서 알쏭달쏭하게 사라져갔다. 이 책을 다 읽고 나는 왜 이제까지의 행복탐색독서가 그런 허망한 결말의 연속이었는지 명확히 알게 되었다. 그건, 문장 때문이었다. 그리고 태도 때문이었다. 모든 이야기에는 그 이야기가 최대한의 울림으로 읽는 이의 마음을 흔들 수 있게 만들어주는 저마다의 문장이 있다. 그리고 그런 문장에는 그 문장이 최대한의 역량을 발휘하게 해 주는 글쓴이의 삶과 태도가 있다. 드물게 그 요소들이 모두 맞아들어갈 때, 어디서나 들을 수 있을 것 같은 이야기조차 황홀한 요동으로 독자를 휩쓸고 가는 일이 간혹 생긴다. 어떻게 해야 행복할 수 있는지 이제 다 알게 되었다고 할 수는 없겠으나, 이 책을 읽은 즉시 조금은 행복해졌다는 말은 자신있게 할 수 있겠다.
각자 즐거움을 연주하는 법을 배우지 않는다면 인간은 이 부조리한 삶의 희생자일 뿐이다. 유한한 삶에 대한 두려움, 실패에 대한 두려움, 고통에 대한 두려움, 타인의 시선에 대한 두려움. 이 모든 두려움이라는 병의 백신은 자신만의 즐거움을 연주하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라는 생각을 한다.
_ 이화열, 『지지 않는 하루』
61. 에드거 앨런 포 단편선
에드거 앨런 포 지음 / 전승희 옮김 / 민음사 / 2013
지금 내 나이쯤 먹었을 때, 포는 시를 통해 영원까지 남을 거라 칭송받는 명성을 획득했고, 그러는 중에도 꼬박꼬박 단편들을 써내는 중이었다. 곧 어린 아내가 폐결핵으로 죽고 우울증에 빠진다. 그리고 몇 해 못가 짧은 생을 마감한다. 포가 살아 계속 글을 썼다면, 쿤데라 할아버지만큼 장수하여 20세기의 초입까지 살다 갔다면, 문학 세상은 그만큼 풍성해졌을 것이다,
라고 말할 수 있었다면 겁나 폼났겠지. 그렇지만 포의 글을 읽는 일은 늘 즐겁지가 않다. <검은 고양이>는 되게 잘 읽히고, <군중 속의 사람>은 진짜 놀란 토끼 눈으로 읽기를 마칠 정도지만, 무슨 폭풍 속의 바다를 헤매는 이야기들은 도저히 졸지 않고 다 읽어낼 수가 없다. 하필 맨 앞에 그게 하나 있어 가지고..... <도둑맞은 편지> 신박하긴 한데 지루하다..... 포는 진짜, 누가 죽어 나가야지 재밌다. 매 작품 첫 페이지를 마주할 때마다 syo는 간절하게 기도했다. 죽여 주소서.....
하여튼 인간 심리를 묘파하는 실력으로 보자면, 포가 공부만 했었어도 프로이트 같은 이름들의 이름값을 다 해먹었을 것 같긴 하다.
그러나 나는 도착적인 심리란 인간 감정의 원초적 충동 중 하나, 즉 인간을 인간으로 만들어 주는, 인간으로부터 결코 분리해 낼 수 없는 본질적 기능 내지 감정 중의 하나라는 사실을, 내 영혼이 살아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는 것만큼이나 분명히 믿고 있다. 해서는 안 된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에 사악하거나 어리석은 행위를 저질러 보지 않은 사람이 과연 존재할까? 법에 어긋나는 짓임을 알면서도 바로 그 이유 때문에 최상의 판단력을 무시하고 그 법을 위반하려는 충동에 끊임없이 사로잡히는 존재가 바로 인간 아니던가?
_ 에드거 앨런 포, 「검은 고양이」
62. 간절하게 참 철없이
안도현 지음 / 창비 / 2008
수제비, 닭개장, 안동식혜, 진흙메기, 건진국수, 무밥, 민어회, 물메기탕, 전어속젓…… 햇살 쪼이며 시집을 읽다가 저절로 배가 불렀다. 그런데 내려와 가스레인지 앞에 섰더니 어쩐지 금세 배가 고파졌다. 새알심을 넣고 미역국을 끓여봤다. 몇 수저 들고 나니까 언젠가 어느 섬에서 먹었던 미역국이 떠올랐다. 당연히 미역국을 먹으러 간 것은 아니었고, 그 지역에서 제일 맛있다던 뭔가를 파는 가게에서 기본적으로 내놓은 상차림의 일부였다. 그날 거기서 무얼 먹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 않고, 그날 거기서 마주 앉아 무얼 먹던 그 사람의 표정이 어땠는지도 가물가물하다. 떠오르는 건 미역국뿐이다. 쇠그릇에 담겨 나왔던 미역국. 생각보다 탄탄했던 새알심의 질감. 그때 그 두 사람에겐 간절함이 있었다. 그렇게 간절하다니, 지금 생각하면 참 철없다. 시간이 흘러 그 간절함은 사라졌고, 이제 생각만 참 철없이 남았다. 그런데 가끔은 그때 그 철없음 생각이 간절하다.
집에서 멀리 나가 혼자 어둑하게 누워 있고 싶을 때가 있다
당신은 나를 찾아 눈에 불을 켜고 밤 등대처럼 울지 모르겠으나, 나는
_ 안도현, 「민어회」부분
--- 읽는 ---
마키아벨리, 군주론의 탄생 / 마일즈 J. 웅거
왜 칸트인가 / 김상환
머더봇 다이어리 : 인공상태 / 마샤 웰스
비전공자를 위한 이해할 수 있는 IT 지식 / 최원영
여자를 바라보는 남자를 바라보는 한 여자 / 시리 허스트베트
그들은 어떻게 세상의 중심이 되었는가 / 김대식
사회학의 쓸모 / 지그문트 바우만
독일 현대사 / 디트릭 올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