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양의 모양 1

 

 

그렇지만 그건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야. A가 말했다. K는 고개를 저었다. 전기포트에서 이제야 소리가 나기 시작했다. 너무 찬 물을 넣었어. 그러지 않아도 됐는데. K가 생각했다. A는 이 방에 하나뿐인 낡은 소파에 눕다시피 파묻혀 앉아 있었다. 목을 꺾어 뒤통수를 등받이 윗부분에 올려놓으면 신기하게 졸음이 쏟아지는 소파였다. A가 좋아하는 자세였고 K도 그런 A를 보는 게 좋았다. 침을 넘길 때마다 A의 목젖이 도드라졌다. 어디서나 있을 수 있는 일이지만 거기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인가 보지. A가 훽 하니 K를 쳐다보았다. K는 덤덤했다. 커피 뭐 마실래. 이나영? 김연아? 김연아. K가 햐얀색 커피 스틱을 꺼내 탁탁 털었다. 아니, 요즘 김연아 왜 이렇게 예쁘냐? 걔 원래 그랬나? K는 대답하지 않았다. 물 끓는 소리가 한 톤 더 높아졌다. 그래도 그렇지, 개새끼라니. 나더러 개새끼라 그랬다니까? A가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아닌 게 아니라, K도 가끔씩 A는 사실 개가 아닐까 생각할 때가 있었다. 덩치에 맞지 않게 귀여운 동그란 눈. 무해한 눈빛. 다부져 보이는 팔은 만져보면 의외로 말랑거렸다. K는 그의 동그란 배를 슥슥 만지는 것을 좋아했고 그럴 때면 A도 뒤집어 놓은 강아지처럼 기분이 좋아 보였다. 누가, 인담? , 인담. , 역시 인담. 물이 다 끓어 전기포트의 스위치가 달칵 내려앉았다. 그래도 A의 말은 끝나지 않았다. KA의 이야기가 끊어질 때까지 커피 가루가 든 종이컵에 물을 붓지 않았다. 뜨거운 물은 천천히 식을 것이었다. 방이 그만큼 따뜻해지는 동안에.

 

창밖으로 키 큰 나무의 몸통이 보였다. 이른 가을바람이 잎들을 슬쩍 훔쳐보지만 그리 멀리까지 가져가진 못한다. 며칠 전, 사무실 뒤쪽 뜰에 뿌려진 은행알을 줍고 있던 K는 바람에 실려 온 A의 목소리를 들었다. 무슨 말인지는 알아들을 수 없었지만 틀림없는 A의 목소리였다. 사무실 창문 열어놨나 보네. 은행 냄새 난다고 싫어하더니. K는 가만히 눈을 감고 A의 목소리에 집중했다. 소리는 마치 파도처럼 다가왔다 멀어졌다를 반복했다. A가 가까이 있는 것 같다가도 멀리 있는 것 같았다. 잠시 뒤 창문이 닫힌 건지 아니면 A가 입을 다문 건지 더는 아무 소리도 들리지 않았다. K는 눈을 떴다. 주변이 조금 더 어두워져 있었다. 아까보다 조금 더 어두워졌을 뿐이라고 K는 생각했다. 아직 일과는 끝나지 않았고, 저녁은 오지 않았다고. K는 사무실로 돌아가 전기포트에 물을 넣고 스위치를 켰다.

 

K는 다시 전기포트의 스위치를 눌렀다. 물은 금방 끓었다. A가 커피를 받아들었다. 인담 진짜 짱나지 않냐? 걔는 걔대로 자기 일을 하는 거지. 여긴 그런 사람들만 모여 있는 곳이잖아. K가 커피를 홀짝였다. A는 부아가 치밀었다. 왜 내 편을 안 들어줘? 사랑하면 언제나 내 편 돼 줘야 하는 거 아냐? 사랑한다며, , 사랑한다며! K는 종이컵을 입에 물고 A의 눈을 들여다보았다. 지금 화를 내려는 거야, 아니면 울려는 거야? K가 물었다. 인담한테는 화를 내고 너한테는 울려는 거야. A의 표정은 말 그대로였다. 아닌데, 나한테는 화를 내고 인담한테 가서 울려는 것 같은데? K는 마음속으로만 그렇게 놀리고는 조용히 A의 이마를 만져주었다. 내가 네 편인 거, 회사 사람들 다 안다. 내가 그렇게 티를 내고 다녔다. 그래, 안 그래. 그래. 너가 나한테 사랑한단 말 한마디 띡 해주고 말 동안, 내가 너한테 어떻게 했는지 좀 있으면 사장님도 아실 판이다. 그럼 난 모가지 날라가는 건데. 그래, 안 그래. 그래. 그럼 이제 그만 징징거리고 너 사무실로 복귀하도록. 알아들었나? , 알겠습니다. A는 웃으며 씩씩하게 일어섰다. KA의 옷매무새를 다듬었고, A는 사랑스러워 죽겠다는 표정으로 K를 끌어안았다. 사랑해. 나도. 사랑해. 얼른 나가, 사장님 곧 오셔. , 사장님 오시면 말 좀 해줘. 인사담당관 그 새끼 진짜 막말 심해. 나만 그런 게 아니라 애들 다 겁나 힘들어한다니까? 알았어, 알았으니까, 얼른 복귀해. 너 진짜 이러다 인담한테 개 털린다. 알았어, , 나 갈게, 부탁해! A는 늘 문을 닫지 않는다. 들어올 때도 나갈 때도. 제 사무실로 걸어가는 A의 뒷모습이 한 마리의 대형견 같았다. 걸어가는 것만 봐도 기분을 짐작할 수 있는 지나치게 솔직한 걸음걸이. 과연 인사담당관은 인사담당관이군. 사람 보는 눈이 있어. 저게 멍멍이지, 어떻게 사람이야. K는 조용히 문을 닫고 들어와 탁자 위에 나란히 놓인 두 개의 종이컵을 바라보았다. 컵 속에 남은 커피 양은 서로 달랐지만, 합쳐 놓으면 어떻게든 한 컵이 나올 것도 같았다. 탁자와 맞붙은 벽에 걸린 화이트보드에 지휘관 일정이 빼곡히 적혀 있었다. K는 커피를 치우고, 휴지를 뽑아 알콜성 소독젤을 바른 후 화이트보드를 깨끗하게 닦아냈다. 그리고는 작전과로 전화를 걸어서 다음 주 연대장 일정표를 요청했다.

 

9월이 지나갔다. 진짜로 가을이 올 것이다. 마지막 가을이. 가을이 오면 K는 병장이 된다.

 


 

길을 잃는 것그것은 관능적인 투항이고자신의 품에서 자신을 잃는 것이고세상사를 잊는 것이고지금 곁에 있는 것에만 완벽하게 몰입한 나머지 더 멀리 있는 것들은 희미해지는 것이다베냐민의 말을 빌리자면 길을 잃는 것은 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것이고온전히 현재에 존재하는 것은 불확실성과 미스터리에 머무를 줄 아는 것이다.

리베카 솔닛길 잃기 안내서 


 나는 항구라 하였는데 너는 이별이라 하였다

 나는 물메기와 낙지와 전어를 좋아한다 하였는데

 너는 폭설과 소주와 수평선을 좋아한다 하였다

 나는 부캉이라 말했는데너는 부강이라 발음했다

 부캉이든 부강이든 그냥 좋아서 북항,

 한자로 적어본다北港처음에 나는 왠지 이라는

 글자에 끌렸다 인생한테 패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어디로든지 쾌히 달아날 수 있을 것 같았다

안도현북항부분 

 

나는 '다른 노래'는 없다고 생각한다그 노래도 언젠가는 지긋지긋해진다는 뜻이 아니다그저 하나밖에 없는 어떤 개별 단위가 끝나는 것이다삶은 반복되고진퇴하며연속하는 흐르는 시간이 아니다역사가 시간의 서사라는 (역사주의이데올로기 때문에가는 세월은 잡을 수 없지만 '우리에겐 내일이 있다'고 생각한다그렇지 않다인생은 바로 이곳에서단 한번 일어나는 일이다.

정희진나를 알기 위해서 쓴다

 

 

 

--- 읽은 ---


 

148. 페미니즘 : 교차하는 관점들

로즈마리 퍼트넘 통, 티나 페르난디스 보츠 지음 / 김동진 옮김 / 학이시습 / 2019

 

이 책을 쪼개 읽은 긴긴 날 동안 syo는 알라딘에 10개 가량의 글을 썼는데, 한 번도 이 책에 관해 페이퍼에서 언급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발견했다. 나도 참 나다.

 

핑계를 대자면, 이 책은 다른 책들의 핵심정리 쪽집게 요약서라고 봐도 무방한데, syo가 제아무리 요약을 배제한 페이퍼를 표방한들 책 이야기를 하려면 어느 정도의 요약이 들어갈 수밖에 없고, 결국 요약을 요약하는 꼴이 될 텐데, , 그건 정말 하기 힘들다. 결국 이 책은 읽는 것 이외에 마땅한 소비 방법이 없다. 페미니즘을 보듬고 싶건 아니면 뽀개고 싶건, 이거 한 권 정도 책장에 꽂아 놓고 필요할 때마다 필요한 부분을 꺼내 읽는 게 제일 똑똑한 방법 같다.

 

 


  

149. 한 권으로 읽는 칸트

이정일 지음 / 이학사 / 2020

 

함량을 떠나서, 책이라는 물건으로 독서유니버스에 출현하기 위해 갖추어야 하고 통과해야 할 것들이 있다고 생각한다. 작가가 하지 못하거나 하지 않으면 편집자가 해야 하는 일. 예를 들면 중언부언을 죽이는 일 같은 것. 여기서 syo가 말하는 중언부언은 첫 번째 챕터에 나온 말이 일곱 번째 챕터에 거의 그대로 다시 등장하는 그런 것을 가리키지 않는다(물론 그런 것도 이 책엔 잔뜩 있다).

 

문제는 이런 것이다.

 

  ① 칸트에 따르면 범주는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다② 범주의 근원은 경험에 있지 않다③ 칸트는 이를 범주의 형이상학적 연역을 통해 정당화한다④ 쉽게 말해 범주의 근원을 밝히는 문제가 바로 범주의 형이상학적 연역이다⑤ 하지만 사실 범주의 근원이 정확히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지에 대해서는 ― 칸트의 연역에도 불구하고 ― 칸트 전문가들조차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⑥ 하지만 한 가지는 분명하다범주가 경험을 통해 획득된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

  ⑦ 어쨌든 칸트는 범주가 경험에서 유래한 것이 아니라면서 그 근원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명확히 밝힌다⑧ 그리고 그는 이 지점에서 범주를 ― 당대에 많은 사람이 익히 알고 있던 ― 데카르트의 생득 관념과 구별할 것을 요구한다⑨ 어쨌든 범주의 근원을 밝히는 범주의 형이상학적 연역은 여전히 그 타당성을 놓고서 논의가 진행 중이다⑩ 범주의 근원을 밝히는 형이상학적 연역은 그 판독에 있어서 여전히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32-33)

 

- 과 같다.

- 과 같긴 하지만, 맥락상 한번 더 강조할 수도 있겠다.

- 과 완전히 같다. = = = 이다.

- 은 이 맥락에서는 뜬금포다.

- = = .

 

이런 중언부언을 잡지 않아서 위의 두 문단은 알 수 없는 관계를 맺고 말았다. 첫 번째 문단은 범주의 근원이 어떻게 규정될 수 있는지에 대해 칸트 전문가들조차 의견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어도 어쨌든 범주의 근원이 경험은 아니라는 것은 확실하다는 데 방점이 찍혀있다. 반면 두 번째 문단은 범주가 경험에서 획득된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범주의 근원을 밝히는 논의가 계속 이루어지고 있고 의견 일치가 되지 않고 있다는 것을 강조하는 느낌이다. 왜 저렇게 써야만 했을까?

 

칸트에 따르면 범주의 근원은 경험에 있지 않다. 이를 정당화하고 범주의 근원을 밝히는 과정을 칸트는 범주의 형이상학적 연역이라 한다. 그러나 범주의 근원을 정확히 어떻게 규정할 수 있는지는 아직도 논의 중이며, 칸트 전문가들 역시 범주가 경험을 통해 획득된 것은 아니라는 점 외에는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고 있다.

 

대충 이러면 땡 아닌가?

 

초심자에게 중언부언은 때로 나침반이 되기도 한다. , 계속 튀어나오는 거 보니 요놈 요게 핵심이구나 싶으면 밑줄을 박박 그으며 씹어먹겠다고 덤벼들 수 있다. 그런데 중언부언에도 도가 있고, 그게 고장 난 나침반처럼 동시에 여러 군데를 가리키게 되면, , 울어야지 별 수 없다.

 

결론. 저런 대목이 저기로 끝나는 게 아니라서 이 책은 내실이 있음에도 불구하고 훌륭한 책은 아니게 되었다.

 

 

 

 


150. 여름의 빌라

백수린 지음 / 문학동네 / 2020

 

바스라뜨리는 것은 늘 쉽다. 말 한마디로 다 무너져내렸던 그 모든 견고한 것들. 견고해 보였던 것들. 모든 순간이 우리를 움킨다. 헐겁게 한다. 우리는 그저 최선을 다했을 뿐인데, 최선을 다했음에도, 혹은 최선을 다했으므로 결국 한마디 아픈 말이면 충분히 산산조각 날 수 있도록 매일 매시간 허물어진다. 마치 망가지려고 최선을 다했던 것처럼.

 

당신이 움켜쥔 것이 무엇인지, 움켜쥔 마음이 어떤지 나는 알지 못하여 우리는 오해하고 오해한다. 손에 쥔 게 뭔지 좀 보자며 세상이 억지로 내 주먹을 열어내려 들 때, 그제야 비로소 보이는 것들. 모쪼록 늦지 않았으면 좋겠다.

 

 

 

 

--- 읽는 ---

하마터면 열심히 살 뻔했다 / 하완

어젯밤 / 제임스 설터


 

 --- 갖춘 ---

임마누엘 칸트 생애와 철학 체계 / F. 카울바흐

라캉의 주체 / 브루스 핑크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5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0-09-21 18:3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털갈이의 계절 가을이로세. 꼬랑내 풀풀 날 것 같은 노란 은행알 바닥에 흩어지는 날들입니다. 저도 어젯밤 다시 읽고 싶어졌어요. 가벼운 나날도. 그런데 읽을 게 산더미라 아주 나중에 다시 보겠지...무사하고 무탈한 가을 보내시길 빕니다.

syo 2020-09-24 18:19   좋아요 1 | URL
조만간에 설터 한번 싹 털어야겠습니다. 털갈이에는 설터..... 다 읽고나면 왠지 문장 레벨업하는 느낌

반유행열반인 2020-09-24 18:53   좋아요 0 | URL
아 나도 문장 레벨업 하고 싶으다...장인이 되고 싶어...

syo 2020-09-25 00:31   좋아요 1 | URL
기대합니다. 모쪼록 열심히 해 주세요^ㅂ^

2020-09-21 19:3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4 1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고양이라디오 2020-09-23 15: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syo님 <영화는 두 번 시작된다> 읽으셨나요? syo님 평이 궁금해서 여쭤봅니다ㅎ

syo 2020-09-24 18:18   좋아요 1 | URL
앞쪽 1/4 정도 읽다가 반납했는데, 좋았습니다. 이동진 선생님이 기본적으로 한칼 하시니까요. 읽어보시길 권할게요

독서괭 2020-09-24 03: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오 퀴어소설인 건가요?? 2도 나오는 건가요?? 기대할게요~^^
중언부언 깔끔하게 정리해주신 거 보고 엄지척~~

syo 2020-09-24 18:19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연재는 아니고... 저 이야기는 저기서 땡이에요 ㅎ 기대하지 마시길^-^
 

 

I’m still looking up

 

 

1

 

옥상에 스툴을 두 개쯤 가져다 놓았으면 싶다. 밤을 어깨에 이고 서면 멀리 산과 산 사이를 흘러 다가오는 금빛 헤드라이트 물결과 채 달아나지 못한 빛으로 희붐하게 젖은 도시의 이마가 보인다. 하나는 내가 앉고 하나는 침묵을 앉혀 나란히 빛의 요란을 응시하는 것. 하루라는 문장의 온점으로 쓰기에 맞춤한 정경이 늘 거기 그대로 있어서 좋다.

 

 

 

2

 

이 어머니가 반찬을 보내 주셨다. 스뎅 김치통 하나 분량은 넘어 보이는 김치가 세 개의 동그란 통에 나눠 담겼고, 이외에도 각종 마른반찬과 소세지 볶음, 어묵 볶음 같은 것들이 함께 왔다. 이네 반찬은 늘 삼삼하다. 어묵은 간장과 물엿을 조금 넣어 다시 볶았고, 소세지는 케첩과 고추장으로 그렇게 했다. 혼자 살며 계속 느끼는 건데, 반찬으로 배가 아니라 냉장고를 채울 때, 그때야말로 뭔가 진짜로 배가 부르다는 기분이다. 요즘 둘이 살 때보다 오히려 더 잘 챙겨 먹어서, 돼룩돼룩 살이 오르고 있다. 1의 자리에서 반올림하면 앞자리가 바뀌는 체중이 되었다. 딱 한 달 만에. 내 배가 이렇게까지 대놓고 3D는 아니었는데. , 여름이라도 끝나줘서 정말 다행이다.

 

 

 

3

 

요즘 어쩐지 섹스에 대해 관심이 가서 그런 제목을 단 책을 자꾸 뒤진다. 하여간, 나이 처먹고 주책이야. 그것도 운동 잘하면 좋다던데, 운동이나 해서 배나 집어넣지, …….

 

 

 

 

--- 읽은 ---

 


144. 거꾸로 섹스

이금정 지음 / 시그마북스 / 2016

 

거꾸로 섹스하는 방법이 궁금하여 이 책을 들춰볼 사람들에 대한 걱정을 저자 역시 하고있는 듯. 제목은 <거꾸로 섹스>지만 실체는 <똑바로 섹스>에 가깝다. 섹스는 똑바로 알고 해야 신납니다. 이렇게 저렇게 해보시고, 요렇게 조렇게도 해보세요. 우와! 헤헤…….

 

클리토리스의 구조에 대해서 새롭게 알게 되었는데 좀 충격적이어서 아마 이 지식은 복습 없이도 평생 갈듯. 걔가 글쎄, 눈으로 볼 수 있는 만큼이 전체가 아니었다는 사실. 그리고 실제 전체 구조는 라프라스를 빼닮았으며, 우리는 그동안 라프라스의 동글동글한 머리 부분만을 가지고, 그러니까, , 이렇게 저렇게 영차영차, , 아무튼 최선을 다하고 있었던 것입니다…….


 

라프라스 /얼음타입 포켓몬

 

 



145. 1년만 닥치고 영어

모토야마 가쓰히로 지음 / 이지현 옮김 / 다산북스 / 2017

 

1년만과 닥치고와 영어, 셋 다 어렵다. syo에게는 1년이 10년 같고 닥치는 건 세상 힘들다. 영어는 말해 뭣해. 될놈될이고 나는 언제까지나 한 마리의 아임빠인땡큐앤유일 뿐. 1년과 닥침을 잘 감당할 수 있는 이들이여, 화이팅!

 

 

 


146.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데이비드 발다치 지음 / 황소연 옮김 / 북로드 / 2016

 

원제는 Memory Man. 유치하다. 제목 빨 없이도 오직 내실만으로 미 본토를 초토화시킨 다음, 살짝 폼 나는 제목으로 갈아입고 한반도에 상륙. 우리나라에서 메모리 맨이라든가 기억남따위의 제목을 달고 시작했다면 아마 지금의 절반쯤을 팔고 말았을지도. 어떤 책인가 하면,

 

전도가 유망한 것까지는 아니었어도 노력으로 재능의 고랑을 메우며 용맹정진하던 젊은 미식축구 선수 에이머스 데커는, 첫 번째 프로 리그 경기에서 상대 선수의 막강한 태클에 당해 두 번쯤 지옥 문턱에 발을 댔다 뗐다 한 결과,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로 다시 태어났다. 사기 같은 기억력을 이용해 경찰로 전업, 역시 사기 같은 기억력으로 보란 듯 승승장구를 거듭한다. 모든 게 다 괜찮았다. 어느 날 집으로 돌아와 갖가지 방식으로 죽어 있는 처남, 아내, 어린 딸의 처참한 시체를 발견하기 전까지는. 그의 인생은 거기서 또 한 번 끝났다. 모든 것을 기억한다는 것은 아무것도 잊을 수가 없다는 말과 같기 때문에. 그는 모든 것을 잃고 상심에 빠진 돼지 부랑자가 되어 쓰레기 같은 인생을 연명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그와 일하던 동료 경찰이 찾아와 가족을 죽였다는 남자가 자수했다는 소식을 전한다. 경찰서에 잠입, 자수한 남자와 대화를 나눠보니, , 까먹는 게 일절 없는 내 머리로 아무리 생각해도 얘는 아니란 말이지……. 그렇다면 이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이지?

 

그게 대체 어떻게 된 일인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재미있음.


 

 


147.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이진우 지음 / 휴머니스트 / 2019

 

뭐 하나 제대로 아는 게 없는 syo 입에서 나오는 말이니 당연히 모르고 하는 소리지만, 한나 아렌트는 비교적 쉽다. 칸트나 헤겔은 쉽다 쉽다 하는 입문서를 봐도 뭔 어쩌자는 건지 도통 모르겠거나, 겨우 알았다 싶었는데 알고 보면 저자가 후려친 것만 핥아놓고 맛집 찾았다고 설레발을 쳐놓은 것이거나, 뭐 그러기 십상이었다. 그런데 아렌트는 개론서로도 꽤 선명하게 이해할 수 있는 정치철학자다. 그리고 필수선행과목이 없다. 그녀가 15세에 칸트를 섭렵했다지만 그 두 배를 넘게 산 나는 그녀를 읽기 위해 칸트를 읽어둘 필요가 딱히 없고, 그녀가 하이데거와 야스퍼스에게 철학을 배웠다지만, 원숭이에게 철학을 배우기 시작한 나는 그녀를 읽기 위해 하 선생과 야 선생을 경유할 필요가 딱히 없다(물론 알아서 나쁠 건 없다). 사상가 자체가 이렇게 친절한 특성을 지니고 있을 때 노나는 건 독자다. 왜냐하면 그를 다룬 개론서들이 웬만하면 잘 읽히고 어지간하면 함량이 충만하기 때문에. 이 책을 포함해 아렌트 개론서를 여러 권 읽어봤지만 나쁜 건 하나도 없었다. 문제는 그저 회독 수를 늘리는 것뿐.

 

이 책을 읽다 보면, 아렌트의 주저를 직접 읽어도 되겠구나 싶어진다. 이런 느낌을 주는 개론서는 생각보다 흔하지 않다. 있었어도 알고보면 착각이었고…….

 

 

 

--- 읽는 ---

페미니즘 : 교차하는 관점들 / 로즈마리 퍼트넘 통 외

한 권으로 읽는 칸트 / 이정일

여름의 빌라 / 백수린

새의 얼굴 / 윤제림

스트로베리 나이트 / 혼다 데쓰야

Chaeg 2020. 9 / ()(월간지) 편집부

기분이 태도가 되지 않게 / 레몬심리

문명과 혐오 / 데릭 젠슨


댓글(15) 먼댓글(0) 좋아요(5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9-20 11:2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1 18:1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1 18:30   URL
비밀 댓글입니다.

추풍오장원 2020-09-20 11:4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회독 수... 매우 중요하지요 ㅎㅎ

syo 2020-09-21 18:17   좋아요 0 | URL
그렇죠 ㅋㅋㅋㅋㅋㅋ 어디가나 회독이 진리죠.

비연 2020-09-20 13:52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나는 내가 앉고 하나는 침묵을 앉혀... 흠. 이거 좀 멋진데요.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시리즈를 다 읽은 저로선... 그냥 갈수록 쏘쏘다 라고 말하고 싶은. 재미가 없진 않으나.
.. 운동 열심히 하세요. 괜히 엄한 단어 가지고 책 뒤지지 말고 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ㅎ

syo 2020-09-21 18:18   좋아요 0 | URL
얼매나 중헌 단언디, 엄한 단어라니요..... 비연님, 듣는 그 단어 섭섭하겠어요.
난 가능하면 걔랑 친하게 지내고 싶단 말이에요 ㅎㅎㅎㅎ

페크pek0501 2020-09-20 15:3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오늘의 멋진 표현 :
도시의 이마가 보인다.
하나는 내가 앉고 하나는 침묵을 앉혀.
재능의 고랑을 메우며
^^


syo 2020-09-21 18:19   좋아요 0 | URL
ㅎㅎㅎ 역시 syo하면 겉멋이죠! ^-^

난티나무 2020-09-20 15:5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진짜 라프라스 똑 닮았는데요? 알고 만든 건 아닐까요? ^^;

syo 2020-09-21 18:19   좋아요 0 | URL
설마 그럴라구요 ㅎㅎㅎㅎ
근데 진짜 닮긴 했죠? 으아, 내 동심....

독서괭 2020-09-24 03: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프라스 사진 보고 빵 터졌네요 ㅋㅋㅋㅋ

syo 2020-09-24 18:20   좋아요 0 | URL
너무 적나라한 라프라스 사진을 올렸군요...

chaeg 2020-09-27 15:3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라프라스 글을 보고 마시던 커피를 뿜을 뻔 했습니다^^;;

syo 2020-09-29 10:56   좋아요 1 | URL
아아, 이제는 라프라스를 순진한 마음으로 바라볼 수 없게 되어버렸습니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 전혜린 에세이 1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년 6월
평점 :
품절


 

 

오늘과 내일의 흐릿한 경계가 어제와 오늘의 경계로 선명해지는 늦은 시간까지, 전혜린을 읽었다. 전혜린으로 밤을 밝히는 일이 전에도 있었다. 대학교 1학년 때, 침대 머리에 기대 책을 읽다 고개를 들면 창문을 통해 한 뼘짜리 하늘을 겨우 더듬을 수 있는 반지하 하숙방에서 나는 나쓰메 소세키를, 폴 오스터를, 장 그르니에를, 그리고 전혜린을 읽었다. 지상에서 나는 방황하거나 고독감에 잠겨 드는 대신 학점과 친구를 만들었다. 그러나 반지하의 나는 그 좁은 공간이 허락하는 최대치로 방황하고 고독했다. 특히 고독과 그 열심에 관해서 생각해 보면, 나는 놀라울 정도로 노력했던 것 같다.

 

그때 나는 고독이 필요하였고 기필코 고독해지고자 했고 최선을 다해서 고독해졌다. 왜냐하면, 우리는 너무나도 고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이제 막 어른이 된 아이들은 이제 막 어른이 된 아이들과 온종일 함께 밥을 먹고 수업을 듣고는 쓰러지기 직전까지 또 함께 술을 마셨다. 우리는 우리를 고독하도록 허락하지 않았고, 아무도 저절로 고독해질 수는 없었다. 그러나 닭 뼈로 산을 쌓고 빈 소주병을 꽂아 그 산을 푸르게 푸르게 만드는 동안 우리는 우리에게 조금씩 지쳐갔다. 어느 순간, 우리는 고독을 바라는 눈빛을 자기도 모르게 슬쩍 내비치다가도 그게 그저 피곤한 표정인 것처럼 위장하는 아이들과 그걸 보고도 눈치채지 못한 척하는 아이들이 모인 이상한 집단이 되어 있었다. 그러느라 반년이었다. 각자 여름을 지내고 다시 만난 우리는 이제 설탕 가루 주변에 까맣게 모여든 개미떼 같던 우리가 아니었다. 마치 함께인 시간과 혼자인 시간의 황금비율이 적힌 레시피를 손바닥에 적어놓고 태어난 사람들처럼, 고독을 모르고서는 어른이 될 수 없노라는 선고를 듣고 귀환한 사람들처럼 굴기 시작했다. 그러나 고독은 생각보다 어려운 일이었다. 함께 있으면 저절로 우리가 되던 아이들은 혼자 있다고 저절로 고독해지지 않아서 당황하는 눈치였다. 그럴수록 우리는 더 필사적으로 고독을 추구했고, 고독을 달성한 아이들, 예컨대 하루가 마무리되는 시간, 중앙도서관 앞 벤치에 앉아 중랑천을 물들이는 노을을 바라보며 아련한 눈을 할 줄 아는 아이들을 선망했으며, 이제 자신을 품어줄 고독이 충만한 공간으로 뚜벅뚜벅 걸어갈 그들의 발자국 하나하나를 탐냈다. 우리를 우리로 만들어 주는 데는 그저 우리만 있으면 충분했으나, 나를 고독한 나로 만들어 주는 무언가를 발견하지 않고서는 고독해질 수가 없었으므로, 우리는 각자 자신에게 가장 잘 맞는 고독의 씨앗을 찾아서 자기 안으로 침잠하기 시작했다. 내게 그것은 책이었고, 그중에서도 전혜린이었다. 왜냐하면, 수십만 권의 책과 수백억 개의 문장이 넘실거리는 거대한 도서관을 식은 눈으로 뒤적거리다가 하필 이런 문장을, 마치 누가 그렇게 되도록 정해놓은 것처럼 내 앞에 나타난 이런 문장을 만나버렸기 때문이다.

 


우주선이 달세계로 가는 시대에 사는 인간은 영혼의 소박함을 잃은 지 오래된다. 사랑도 변형된 호기심인 경우가 많고 사랑의 행위에서도 지적인, 너무도 지적인 것이 현대인이다. 누구나가 자기의 원칙과 독백 속에 감금되어 있다. 자아에 망집하고 있다. 인간과 인간 사이의 진공관 속을 꿰뚫는 것은 현대에서는 거의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 기적 같은 희귀한 몇 개의 순간에서만 우리는 변신을 한다. 헌신과 희생이 가능해진다. 그 순간이 지나면 생은 다시금 어두운 것, 무표정한 것으로 된다. 그 속에서 아무 관련도 없이 제각기 인간은 산다. 고독한 탐구를 계속한다. (31-32)

 

 

마냥 먹먹해졌다. 고독을 이겨내려 몸부림하다 떠난 사람의 글 속에서 나를 의탁할 만한 고독을 발견한 것에 어떤 섭리 같은 것이 숨어 있는지 그때는 알지 못했고, 그저 오독을 고독으로 바꾸어 내 안에 쌓기에 바빴다. 전혜린의 고독은 크고 깊고 나의 얕은 눈으로는 바닥을 짐작할 수 없을 만큼 어두워서, 그리고 그 어두움 속에 스스로 생을 마감한 어느 예술가의 처절한 기록이라는 아우라가 별처럼 반짝거리고 있어서, 나의 허영이 그의 고독으로 넘치게 배불렀다. 읽는 순간 여기가 아닌 어딘가로 나를 데려가는 문장. 곳간에 쌓아놓은 그녀의 문장으로 20대를 충분히 고독할 수 있었다.

 

그러나 그 고독은 끝내 그녀의 고독이었다. 내 것인 줄 알았지만 내 것이 아니었다. 고독은 오독할 수는 있어도 오해할 수는 없는 것이어서, 내 몫의 고독은 언젠가 반드시 내게 오게 마련이었다.

 

그것은 조금씩 천천히 왔다. 다시 모두가 자기만의 고독을 찾아 나서던 그때로 돌아가 보면, 우리는 고독을 찾으면서도 고독을 찾는 티를 내서는 안 되었다. 여전히 함께 있는 동안은 밝고 유쾌하고 세상에 열려있는 모습을 보여야 했다. 서로에 대한 애정을 말해야 했다. 고독은 그런 와중에 은근슬쩍 흘리듯이 드러나야 폼 나는 것이었고, 너는 잘 모르겠지만 그런 게 있어- 하는 표정이나 깊은 사연이 있어 보이는 눈동자 속에 스치는 빛처럼 들어있어야 섹시한 것이었다. 거기에서 가면이 탄생했다. 우리는 밝은 순간에 고독을 연출해야 했고, 고독의 시간을 걷고 서로를 만날 때 온-오프 스위치를 켜듯이 유쾌함을 연기해야 했다. 나의 진정한 내면은 너무나 깊고 고독하여 네가 차마 이해할 수 없을 거라는 컨셉이 유행하면서 우리는 상대방이 자신을 제대로 이해하기를 바라는 마음과 결코 이해하지 못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교차하는 지점에서 길을 잃고 헤매야만 했다. 결국 누구도 누구를 이해하지 못하면서 모두가 모두를 이해하는 척했다. 연기하지 않는 연기를 하다가 분명히 뭔가를 잊어버렸는데, 그것이 연기하는 법인지 연기하지 않는 법인지도 알 수 없었다. 시간은 수렁에 잠긴 몸을 완전히 빼내지도 못한 나를은 학교 밖으로 밀어냈다. 나는 알았다. 내가 정말 고독해졌다는 사실을. 내 몫의 고독은 그런 모양새였다. 그때 나는 전혜린을 다시 읽어보았는데, 내가 읽었으므로 내 것인 줄 알고 믿고 따랐던 고독은 오롯이 그의 것이었다. 나는 그것을 훔친 것이었다.

 

나는 고독을 오래 점유해도 그것을 소유할 수 없음을 알았다. 그러나 동시에 고독은 나를 오래 점유하면 소유할 수 있다는 것도 알게 되었다.

 

때로는 내 몫의 고독을 누리고 때로는 그것과 싸우느라 나는 바빴고, 전혜린의 고독은 이제 전혜린의 것이 확실해 보여서, 이십 대의 끝물에서 나는 전혜린을 놓아주기로 했다. 전혜린이 세상을 버린 것과 같은 서른두 살의 나이가 되면, 마지막으로 딱 한 번만 더 읽고 이 책을 버리기로 마음먹었다. 책을 상자에 넣어두고, 나는 나의 고독을 마주하러 걸어갔다.

 

고독은 원인이 아니라 증상이다. 고독의 원인은 세상에 널렸고, 외로움을 피할 수 있는 사람은 세상에 없어서, 나도 고독을 넘고 다시 고독해지기를 반복하며 길고 짧은 고독들을 통과해 여기에 왔다. 그리고 고독은 증상인 동시에 하나의 능동적 계기여서, 자신의 고독을 넘어서거나 고독으로부터 무엇인가를 길어 올리는 저마다의 방식을 찾아낼 수 있다는 것을 어렴풋하게나마 배웠다. 내가 고독 속에 들어가 웅크리고 있을 때, 전혜린의 문장이 내게 남긴 흉터들은 약인 동시에 독이기도 했던 이유가 거기에 있다. 오늘에 와 생각건대, 고독은 발견하는 것이 아니라 발명하는 것이다. 고독은 사서 깃들거나 세 드는 것이 아니라 건축하는 것이었다. 나는 전혜린의 고독에 세 들지 않고 전혜린을 재료로 나의 고독을 건축하려고 무진 애를 썼다. 그렇지만 생이 완결될 때까지 고독은 완결되지 않을 것이어서, 나는 잠시 고독하지 않을 때를 틈타 또 공구함을 채우고 헛간을 손본다. 비울 것을 비우고 새로운 공간을 마련한다. 안녕, 전혜린.

 

전혜린의 문장을 처음 만났던 그때, 나는 그가 이 책에 들어갈 글을 처음으로 쓰던 나이보다 어렸다. 그리고 오늘 내가 쓰는 모든 문장은 전혜린이 쓴 가장 나이 든 문장보다 더 나이 든 문장이다. 그의 책을 마지막으로 덮으며 궁금한 것은 이제 하나 남았으니, 내가 전혜린을 관통하여 여기에 온 것인가, 전혜린이 나를 관통하여 저기로 간 것인가, 이제는 그것만 곰곰이 생각해 보기로 한다.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68)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2020-09-19 01: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20-09-20 10: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독서괭 2020-09-19 08:1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머 이 글 참 좋아요~~

syo 2020-09-20 10:51   좋아요 0 | URL
^ㅂ^> 허허허...

페넬로페 2020-09-19 09: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오래전에 읽은 책이네요~~
한때 전혜린 열풍이 불 정도였어요^^
기억이 가물가물해서 내용은 잘 생각나지 않는데 막연히 독일에 대한 것과 고독이 지금도 느껴지네요^^

syo 2020-09-20 10:52   좋아요 0 | URL
책장 뒤지다가 나타나서 굿바이 스페셜로 한 번 읽었습니다.
그럴 줄 알았지만 예전에 읽을 때랑 느낌이 많이 달라서 깜짝 놀랬네요^-^

stella.K 2020-09-19 18: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출판사가 망했나 봅니다. 책들이 다 품절로 나오네요.
이 책은 어느 출판사에서 새로 내주지 않는 이상 정상적인 방법으론
못 사 볼 모양입니다.
전혜린의 단 두 권의 에세이 중 하난데 사춘기 시절에 한 권 읽고 여태 못 읽있고
있는데 스요님 글 읽으니 이걸 어떻게 읽어 보나 한숨이 나오는군요.ㅠ

syo 2020-09-20 10:54   좋아요 1 | URL
알라딘 중고서점에 잔뜩 깔려 있습니다.
구하기 쉬워요 ㅎㅎ 한숨 쉬지 마시고 나가서 get하시길 ^-^/

scott 2020-09-19 20:54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제친구 엄마가 전혜린 대학 후배였는데 그집에 초판본 (세로로 인쇄된 유학때 주고 받았던 엽서도 있어서 신기해 했었네요. 생이 한가운데에 라는 작품 번역서 첫번째판도 그집에 있었어요. 고독은 사서 깃들거나 세 드는 것이 아니라 건축하는 것이었다.라는 소요님 우리모두 생이 끝날때까지 고독은 끝나지 않네요

syo 2020-09-20 10:57   좋아요 1 | URL
우와. 그분은 전설의 지인이셨거군요 ㅎㅎㅎ 초판본에 엽서라....
고독할 때는 아 이놈의 고독 개나줘버렸음 싶다가도 또 한참 붐빌 때는 고독 링거 좀 맞았으면 싶으니, 인간이란 참 희한한 동물이죠?
 

 

15cm

 

 

내가 울면 금방 따라 울던 너는 언제나 마음속에 울음 가득 넣어 놓고 사는 것인지, 넘치는 슬픔 묻어 놓고 웃음으로 탄성으로 나를 다녀가려다 내 몹쓸 장난에 그만 들켜버리고 만 것인지, 가짜로 우는 나를 보고 진짜로 눈물 맺힌 너를 보니 진짜로 눈물이 맺히던 나는 내 안에 나 몰래 뭘 그리 또 넣어 놓고 사는 것인지, 그런 것들 모두 나의 일이고 너의 일인데 또 나도 너도 모르게 일어나고 있는 일이기도 해서 그렇게 계속 눈동자를 들여다보는 것인지,

 

 

 

--- 읽은 ---

 


140. 책 좀 빌려줄래?

그랜트 스나이더 지음 / 홍한결 옮김 / 월북 / 2020

 

그런 탄식이 떠오른다. 하늘은 왜 이 주유를 세상에 내고도 어찌 또 제갈량을 보냈는가? , 하늘 아래 <있으려나 서점>만 없었더라도…….

 

 


 

141. 청소 끝에 철학

임성민 지음 / 웨일북 / 2018

 

한때 철학이란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질문에 대한 대답이었다. 지금은 신학이며 과학 같은 큼직한 아이들이 지분을 몽창 들고 나르는 바람에 많이 협소해지긴 했지만, 늘 그렇듯 오늘도 세상에는 무수한 질문들이 생겨나고, 그 질문들에게 가장 친하게 구는 학문은 여전히 철학이다. 청소에도, 설거지나 출퇴근 길에도, 월급이 바람처럼 스치고 지나가는 빈 통장과 그래서인가 요즘 유독 바람이 스치는 느낌이 선명한 빈 정수리에다가도 우리는 종종 질문을 한다. 그렇다면 그 끝엔 제일 먼저 철학이 온다.

 

 

 

142. 마카롱 사 먹는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

이묵돌 지음 / 메가스터디북스 / 2020

 

<90년생이 온다>에 대한 90년대생의 답장. 이묵돌이 김리뷰였던 시절 그의 재기와 발랄과 돌진하는 저력 같은 것을 부러워했다. 시간이 흐르고, 읽은 책과 읽을 책이 함께 늘어나고, 나는 나대로 늙고, 읽는 일이란, 책이란, 글이란 무엇인지 한 줌 더 알게 되는 동시에 한 걸음 더 멀어져만 가는 동안, 김리뷰는 이묵돌이 되었고 이제는 완전히 다른 글을 쓴다. 결국 그가 가고 싶었던 길이기를.

 


 

143. 공공성

하승우 지음 / 책세상 / 2014

 

공공의 일을 하면서 공과 공에 대하여 생각할 일이 많았다. 이 앞장서고 이 뒤따르는가. 공과 공이 부딪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럴 때마다 35년 동안 응원해왔던 공 대신 이제 막, 그러나 강력하게 내 말과 글과 생각에 육박하는 공을 묵묵히 편들어야 했다. 그것은 삶의 작은 위기였다. 작아서 타넘어 가기 쉬운 위기였다. 하지만 공이 업무를 마치고 사의 자리에 와서 앉으면, 어두운 구석에서 웅크리고 있던 다른 공이 숨을 쉬는 소리가 들렸다. 나는 이렇게 쉽게는 죽지 않을 거야. 끝까지 너를 괴롭힐 거야. 나는 공과 공을 다시 만나게 할 필요가 있다고 생각했다.

 

 

 

--- 읽는 ---

페미니즘 : 교차하는 관점들 / 로즈마리 퍼트넘 통 외

1년만 닥치고 영어 / 모토야마 가쓰히로

여름의 빌라 / 백수린

시대의 소음 / 줄리언 반스

거꾸로 섹스 / 이금정

열 문장 쓰는 법 / 김정선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 데이비드 발다치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이진우



댓글(10) 먼댓글(0) 좋아요(55)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하나 2020-09-16 19: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왜 公이 앞장서고 共이 뒤따르는가. 공과 공이 부딪는 일은 생각보다 많았고, 그럴 때마다 35년 동안 응원해왔던 공 대신 이제 막, 그러나 강력하게 내 말과 글과 생각에 육박하는 공을 묵묵히 편들어야 했다. 그것은 삶의 작은 위기였다.˝ 오늘도 생각할 거리를 묵직하게 던져주시는 syo님.

syo 2020-09-16 20:51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 제가 뭘 던진다기보다 그냥 하나님께서 생각장인이신 것 같은데요.
대단하십니다 짝짝작^-^

반유행열반인 2020-09-16 19:1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이런 거요? 😢요런 거요?

syo 2020-09-16 20:51   좋아요 1 | URL
ㅎㅎㅎㅎㅎㅎ 똥그란 애들은 다 귀여운 것 같아요.

유부만두 2020-09-16 19:23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하하하 쇼님도 낚이셨다!

서재의 진짜 고수 주유와 제갈은 책장이 없다잖아요!

syo 2020-09-16 20:53   좋아요 0 | URL
낚였지만,
최고 스피드의 경공술을 펼쳐서 시간 소비를 최소화시켰습니다! 후후.

추풍오장원 2020-09-16 19:2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공공성에 대한 syo님의 글은 9급 신규들한테 꼭 보여줘야 할 것 같군요^^ 멋진 글입니다.

syo 2020-09-16 20:54   좋아요 0 | URL
ㅎㅎㅎ 저만한 생각들은 다들 하고 있을 것 같은데요.
옆에서 보면 저 같은 사람보다 훨씬 생각 많아 보여요 ㅎ

han22598 2020-09-16 23: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책 좀 빌려줄래?˝ 제가 자주 하는 말인데..ㅎㅎ 그런데 저 책은 주위에 빌려줄 수 있는 사람이 없을것 같네요 ㅋㅋ

syo 2020-09-18 23:10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 그래서 못 빌려 읽으신다면 그건 또 그거대로 크게 괘념치 않으셔도 될 일 같아요....
 

  

 

적을 만한 특별한 일은 없었지만 특별하지 않은 일은 적기에 너무 많다. 홍차를 마시고 있다. 소금을 줄이고 있다. 책을 많이 읽는데, 줄이는 중이다. 다시 장갑을 끼지 않고 설거지하기 시작했다. 구름이 몸을 열고 산의 콧잔등에 빛을 부었다. 그것은 이내 사라졌고 비가 잠깐 내리기도 했다. 돌아오는 길에 보니 빨간 고추는 그대로 매달려 있었다. 저녁을 거를 셈이다. 졸리다. 리뷰 대회에 참가해보자 싶어 책을 샀다.

 




 

--- 읽은 ---



134. 회사 밥맛

서귤 지음 / arte / 2020

 

물론 당연히 말할 것도 없이 기어이 기필코 기를 써도 회사란 밥맛이다. 그런 내용 아닌 건 아니지만, 실제로 회사에서 먹는 밥맛에 관한 이야기다! 재미있어글도 솔찬히 쓰고(음식 묘사가 침샘을 융단폭격한다) 주인공 캐릭터 표정도 너무 귀여워서귤 작가님은 글도 그림도 둘 다 세구나지금보다는 훨씬 더 많이 팔리고 읽힐 만한데…….




 

135. 희망은 과거에서 온다

김진영 지음 / 포스트카드 / 2019

 

선생님은 노련한 강의자셨지만 아마도 쉽게 가르치기보다는 제대로 알게 해야 한다고 생각하셨던 듯. 그리고 이런저런 장소에 남아 있는 선생님의 강의를 들어보면 체계적이라기보다는 두서없는 쪽에 가깝다. 좋게 말하자면, 그야말로 벤야민적인데- 싶달까. 하여튼 그런 저간의 사정들이 강연록을 풀어 쓴 이 책을 읽기 어려운 책으로 만들고 말았다. 구어를 옮겨오는 과정에서 발생할 수밖에 없었다고 이해하고 모른 체해주기에는 지나치게 빈번한 문법 오류도 한몫하지만, 그냥 강연 내용 자체가 벤야민을 아예 모르는 사람이 읽기에는 지리멸렬에 가까운 게 크다. 결국 이 책은 시중에 나와 있는 벤야민 개론서 가운데 제일 처음 손에 들만한 책이 되지 못하고 말았다.

 


 

 

136. 북항

안도현 지음 / 문학동네 / 2012

 

<너에게 가려고 강을 만들었다>를 참 좋아했고, <간절하게 참 철없이>를 더없이 좋아했는데, 두 시집이 각각 내 어떤 사랑과 관련이 있었기 때문이다. 너무 좋아했기에 시가 사랑에 닿았고, 사랑과 이어져서 시가 더욱 좋았다. <북항>은 때마침 사랑과 아무런 관계없이 읽었는데, , 좋았다. 그렇다면 그냥, 좋은 시라서 좋았던 것이겠다.

 

황현산 선생님이 해설을 통해 칭하길, ‘은유의 울타리라 하셨다. 이런, 감히 더 할 말이 없겠다.

 

 

 

137. 이사

마리 유키코 지음 / 김은모 옮김 / 작가정신 / 2020

 

이런 걸 호러 소설이라고 부르는 건가? 이 장르에 관해 조예가 없다 보니 이 책이, 그리고 이 작가가 그 판에서 어느 수준에 이르렀는지 제대로 알지 못한 채 평하게 된 것 같아서 송구스런 마음이 없지 않지만, 어쨌든 syo의 감상은 이렇다.

 

잔재주, 썩 귀여웠습니다.

 


 

 

138. 똑똑한 나를 만드는 철학 사용법

오가와 히토시 지음 / 전경아 옮김 / 글담출판 / 2020

 

공부법-지적 생산에 관한 기술책이다. 이 저자는 철학에서 뭔가를 띡 떼와서 실용적분야에 비비는 일을 즐기거나 그걸로 재미를 꽤 본 모양인데, 매번 느끼는 바지만 그가 말하는 철학과 실용 사이가 매끄럽게 들러붙어 있진 않다.

 

예를 들어, 지식을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정리하는 방법(이 방법 자체는 뭐 굉장한 영업비밀도 아니고 딱히 특별하지도 않다)을 설명하면서 칸트의 12범주를 가져와 붙이는데, 칸트가 12범주를 만든 것은 철학적으로 의미 있는 사실이고, 카테고리로 분류하여 정리하는 것은 실용적인 방법이긴 하지만 칸트가 그런 일을 했다는 것이 카테고리 분류법의 실용성을 증명하거나 최소한 보충하는 일은 아니다.

 

나는 두 가지 중 하나라고 생각한다. 저자는 칸트의 분류법을 보고 아, 공부한 거 정리할 때도 이렇게 나눠서 하면 좋겠군- 하는 이미지를 연상하는 식으로, 철학자들의 사상을 가져와서 실용적지식 기술과 인상적으로 연결했을 수 있다. 혹은, 책으로 쓸 몇 가지 지적 생산 기술(이렇게 계속 기술 타령하는 것도 웃기다. 별것 없다.)을 먼저 정해놓은 다음 거기에 제일 덜 어색하게 갖다 붙일 수 있는 철학자와 그 사상을 찾아 매칭시켰을 수도 있다. 오가와 히토시가 낸 다른 책을 읽고 미루어 짐작건대, 후자일 것이다.

 

나쁘다는 게 아니라, 별것 아니라는 뜻이고, 그걸 별것처럼 보이게 만들려 애썼다는 뜻이다.

 


 


139.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전혜린 지음 / 민서출판사 / 2004


한때 내가 두른 모든 고독의 치수를 재는 줄자와도 같았던 전혜린을 지금 내려놓으려고 마지막 배웅을 했다. 그를 찍은 모든 사진이 나보다 젊어졌으니 이제 약속을 지켜야겠다. 벌써 좀 늦었다.

 

 

 

 

 

--- 읽는 ---

페미니즘 : 교차하는 관점들 / 로즈마리 퍼트넘 통 외

문학사를 움직인 100/ 이한이

한나 아렌트의 정치 강의 / 이진우

마카롱 사 먹는데 이유 같은 게 어딨어요? / 이묵돌

청소 끝에 철학 / 임성민

모든 것을 기억하는 남자 / 데이비드 발다치

 

 

 

--- 갖춘 ---

문명과 혐오 / 데릭 젠슨

프랑스 언어학의 이해 / 김이정 외

현상학이란 무엇인가 / 피에르 테브나즈

/ 최희봉

복자에게 / 김금희

 

 



댓글(8) 먼댓글(0) 좋아요(56)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0-09-14 18:4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멋진 하늘. 멋진 하루 보내셨길. 보내시길.

syo 2020-09-16 18:55   좋아요 1 | URL
멋진 하루 보내고 계시길.

stella.K 2020-09-14 19: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삼시세끼중 한끼만이라도 남이 해 준 밥을 먹으면 좋겠슴다.
어쩌다 저는 삼순이로 태어나 삼시세끼 밥을 챙겨 먹어야 하는 운명인건지...ㅠ

벤야민 강의실 읽어보고 싶네요.

syo 2020-09-16 18:55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 돈 있으면 남이 해준 밥 실컷 먹을 수 있는 건데 ㅠㅠ
벤야민에 관심 있으시면 한 번 읽어보시는 것도 뭐 ㅎ 관심 없으시면 저 책 가지고 관심 가지시기는 어려울 것 같기도 하고...

수이 2020-09-14 19:5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니 그대가 프랑스의 언어학이라니_ 혹시 프랑스 유학 준비중?!

syo 2020-09-16 18:54   좋아요 0 | URL
그럴리가요. 언어학에 포인트를 둔 것이어요.

청아 2020-09-14 20: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하늘 저거 실화입니까👍

syo 2020-09-16 18:53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 저런 거 정말 오랜만에 봤어요. 금방 사라지더라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