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까지나 복된 연애

 

 

1

 

행복하다고 느끼는 순간은 짧고 드물어서 기억에 잘 새겨놓고 가끔 하나하나 되짚어 본다. 그건 일련의 동작들로 이어지는 하나의 긴 체조와도 같다. 그 과정은 선언에서 시작한다. 나 지금 너무 행복해. 절대 생략해서는 안 될 그 한마디 말이 누빔점이 되어 행복한 순간을 기억의 밤하늘 별처럼 때려 박는다. 행복은 연역되지 않고 100퍼센트 귀납으로 찾아온다. 행복이라는 종합적 개념이 있어서 행복하기 위한 요건들을 계시하는 것이 아니라, 아 이런 게 행복이구나- 하고 느끼는 개별적 경험들을 통해 우리가 우리 몸에 맞는 행복을 지어 입는다. 오늘 조용히 누워 그 옷을 이리저리 살펴보았다. 어디 솔기가 터진 곳은 없는지, 보풀이 보기 싫게 일어나진 않았는지, 변색되고 추레해진 부분은 없는지, 열심히 들여다보았다.

 

내가 행복했던 순간에, 나는 항상 혼자가 아니었다. 가까운 곳에, 때로는 너무 가까워 제대로 바라볼 수 없을 만큼 가까운 곳에 누군가 함께 있었다. 늘 그랬다.

 

 

 

2

 

올해부터 나라에서 청년이라는 이름을 달고 하는 각종 지원 사업에 낄 수 없는 나이가 되었다. 국가공인 중년남 syo. 그래서 그런가, 요즘 들어 부쩍 추억 속에서 헤엄치는 것 같다. 경로당 담당으로 일하면서 가장 많이 보고 겪은 게 어르신들의 추억에 잠긴 눈빛과, 그 추억이 넘쳐서 결국 터져 나온 입말의 쓰나미와, 그랬던 내가 지금은 경로당에서- 하는 회한 같은 것들의 혼합물이었다. 설마 나도 이제 내 안에 나만의 경로당을 설치한 것인가. 벌써…….

 

 

 

3

 

다정한 친구는 연애가 적성에 맞지 않아 이번 생은 이제 글렀다고 말했다. 하지만 syo는 아직 아무것도 포기하지 않았다. 나는 할 거야. 다 할 거야. syo는 폭신폭신한 침대에서 사랑하는 사람이랑 찰싹 붙어서 끌어안고 도란도란 영화나 음악, 책 이야기하다가 쪽쪽 입 맞추다가 슬쩍슬쩍 만지다가 눈빛이 아련해졌다가 야해졌다가 장난스러워졌다가 불을 켰다가 껐다가 파스타를 먹었다가 샌드위치를 먹었다가 다시 이 모든 과정을 처음부터 반복하다가 잠들었다가 살짝 눈 떠보면 사랑하는 사람이 잠들어 있다가 살짝 눈 뜨는, 그런 게 제일 행복했던 사람이었다. 늘 그랬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는 것들이 있다가슴이 무너지는 것들아내는 내 인생의 절반을 요구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였다그의 시계를 풀어주고 그를 내 품에 갖는 것그건 형언할 수 없는 행복이었다그를 사랑하는 것은그런 행복은 세상에 없었다.

제임스 설터포기


  바다의 폭이 얼마나 되나 재보려고 수평선은 귓등에 등대 같은 연필을 꽂고 수십억 년 전부터 팽팽하다

 

  사랑이여

  나하고 너 사이 허공의 폭을

  자로 재기만 할 것인가

안도현, <전문

 


 

 

--- 읽은 ---

 


160. 세로토닌

미셸 우엘벡 지음 / 장소미 옮김 / 문학동네 / 2020

 

사랑밖에 딱히 해 본 게 없는 사람은 모든 책을 사랑으로 읽으려 시도하게 되는 걸까. 나는 이 책을 사랑이 망해서 인생이 망한 남자의 방랑기로 읽었는데, 공쿠르 받은 사람은 과연 뭐가 다르긴 다른 건지, 이게 현대인의 우울과 권태 뭐 그런 거대한 과녁을 겨냥한 소설인 모양이다. 친구가 되기는커녕 아예 상종하고 싶지도 않은 인간형의 한 남자가 뭐 하나 제대로 해내지도 못하고 시종일관 등신같이 굴다가 끝나는 400페이지짜리 이야기인데, 이런 뼈대를 가지고 이렇게 쓰다니 거장은 거장. 프랑스에서 노벨상이 나오면 우엘벡이라는 이야기도 있던데.

 

앞쪽은 지지부진한데, 7부 능선쯤 도착하면 페이지가 휙휙 넘어간다. 이제 그쯤 되면 주인공도 슬슬 사는 것도 지치고 뭐 의욕도 없고 그렇거든. 그 와중에 1인칭이다 보니 그 시점부터는 서술 자체도 되게 아무 말을 아무렇게나 할 테니 아무나 듣든지 말든지 하는 식으로 툭툭 내던지는데, 거기서부터 매력이 터진다고 할까.

 

경로당은 65세부터 가입이 가능하니까, 58년생으로 우리 아버지랑 동갑인 우엘벡을 아직 할배라 부르진 않겠다. 하지만 우엘벡 아재도 커서 필립 로스 같은 야한 할배 소설가가 될 거니까, 나는 그 계보를 좋아하니까, 앞으로도 잘 부탁해요.

 

 


 

161. 언어의 역사

데이비드 크리스털 지음 / 서순승 옮김 / 소소의책 / 2020

 

소소의책 출판사에서 나온 ‘~의 역사시리즈 중 한 권인데, 원제는 ‘A LITTLE BOOK of LANGUAGE’. 이 출판사에서는 같은 컨셉의 표지와 제목을 가지고 <철학의 역사>, <고고학의 역사>, <세계 종교의 역사> 등을 펴냈는데, <언어의 역사>는 그 최신작이다. 문제가 있다면 이 책 <언어의 역사>는 언어의 역사에 대한 책이라고 보기는 좀 떨떠름하다는 점이다. 말 그대로 언어의 책이고, 언어란 본질적으로 역사의 산물이며 지금 이 순간에도 신나게 유동하고 있다는 점에서 보면 <언어의 역사>라는 제목이 또 완전 딴소리는 아니지만. 이 책은 오히려 역사 이외의 부분에서 더 빛난다. 호들갑을 떨지 않는 유머 코드도 나쁘지 않고, 각각은 길지 않은 40개의 챕터가 빠르게 교체되면서 지겨울 틈을 주지 않는다.

 

 

 


162. 열 문장 쓰는 법

김정선 지음 / 유유 / 2020

 

단문 단문 지겹도록 들어서 귀에서 단물 날 지경이었다. 그래서 단문 강조하는 책만 보면 그래, 과연 그래서 니는 얼마나 잘 쓰나 보자며 눈에 쌍심지를 켜고 꼬투리 거리를 찾던 삐뚤어진 살쾡이 시절도 겪었다. 그런데 요즘은 글쓰기 책에서 단문을 강조하는 것에 고개를 끄덕이는 중이다. 그게 다 유튜브 때문이다. 요즘 늘그막에 유튜브라는 걸 보기 시작했는데, 아니 이 훌륭한 콘텐츠를 만들어 내는 능력자가 어떻게 스무 글자 겨우 넘는 문장에서조차 주술 호응을 못 맞출까- 하는 생각을 계속 하게 된다. 그럴 거면 더 짧게 써요……. 아니, 짧게 안 써도 되니까, 제발 이 책 한 번 읽어보소…….

 

김정선 선생님은 줄임표[]를 자꾸 쓰면 자기가 하는 말에 자신이 없어 보인다고 어지간하면 쓰지 말라고 하셨다……. 정말 정확한 분석이세요…….

 

 

 


163. 인간이란 무엇인가

백종현 지음 / 아카넷 / 2018

 

, 칸트 입문은 김상환으로……. 으악, 죄송합니다…….

 

 

 

 

--- 읽는 ---

밤에 읽는 소심한 철학책 / 민이언

프로이트 심리학 강의 / 베벌리 클락

연필 / 헨리 페트로스키

체공녀 강주룡 / 박서련

돈의 흐름으로 보는 세계사 / 미야자키 마사카쓰

세상은 온통 화학이야 / 마이 티 응으옌 킴

인생학교 섹스 / 알랭 드 보통

죽은 자의 집 청소 / 김완

 

 



댓글(17) 먼댓글(0) 좋아요(62)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반유행열반인 2020-10-01 06:41   좋아요 2 | 댓글달기 | URL
아무 것도 포기하지 맙시다 ㅎㅎㅎ귀납적이고 연역적으로 삼단논법적으로도 행복합시다. (사랑하는 사람과 있으면 행복하다-나는 사랑하는 사람과 있다-나는 행복하다.)

syo 2020-10-01 23:23   좋아요 1 | URL
어디서든 열심히 사랑도 하고 행복도 하고 그러고 삽시다. 반님도 화이팅.

독서괭 2020-10-01 08: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청년 기준이 만 34세까지인가요? 전에도 느꼈지만 syo님 저와 동년배인 듯?? 중년이라니요 저는 이미 몸은 중년 같지만.. 아 마음도 이미 건너 갔나..ㅠㅜ

syo 2020-10-01 23:23   좋아요 0 | URL
저는 진작부터 우리가 동년배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습니다 동년배여...

추풍오장원 2020-10-01 09:3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빨리 좋은 여자를 만나셔야 할 것 같습니다...^^

syo 2020-10-01 23:24   좋아요 0 | URL
ㅎㅎㅎㅎㅎㅎ 급할 건 없구, 차분하게 잘 살다보면 잘 되겠거니 하고 있답니다요

stella.K 2020-10-01 18: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정말 나이들면 옛날 생각이 점점 심하게 나더군요.
이러다 치매에 걸리는 건 아닐까 싶기도 해요.
치매가 옛날 기억은 또렷한데 최근 기억은 잘 생각나지 않은 거라잖아요.ㅠ

스요님은 아직도 젊은데... 그래서 청년의 기준을 다르게 정해야 한다던데.
50센가 55세까지 청년으로...
옛날에 58년 개띠들은 유난히 더위를 잘 탄다는 말이 있던데 앞으론 바뀔지도 모르겠군요.
야한 할배, 야한 할매로.ㅎㅎ

syo 2020-10-01 23:25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 청년은 늙기 쉽고- 그런 말 들었을 때 열심히 살아둘 걸....
단정하게 나이들어가는 게 또 목표입니다...

문모운 2020-10-01 20:36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아 진짜 중년 뭐야... 제발... 웃기지 좀 마!

syo 2020-10-01 23:25   좋아요 0 | URL
청년이여.... 중년의 고뇌를 아시는지?

비연 2020-10-03 00: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쇼님이 중년을 얘기하니.. 난 뭔가 잠시 생각... 에잇.

syo 2020-10-04 16:02   좋아요 0 | URL
그런 좋은 말이 전래됩니다. ˝같이 늙어가는 처지˝

비연 2020-10-04 16:07   좋아요 0 | URL
이럴 때 하는 말이 있죠... “뛔엑!”

나비종 2020-10-03 21: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행복하다고 느꼈던 순간들을 떠올리게 되네요. 뭔가 시작하기 전에 행복하다는 생각을 했던 것 같아요. 누군가를 만나러 가는 길에,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면서 마지막 버튼을 누를 때... 떠올리는 행복 속의 누군가들은 제각기 다르지만ㅋㅋ 드라마의 예고편처럼 느껴지는 설렘이 좋았나 봅니다.
행복이 귀납으로 찾아온다는 말씀, 100% 공감이 되면서 조금 슬퍼지네요. 귀납은 과거형이니까.^^

syo 2020-10-04 16:05   좋아요 2 | URL
오늘 느낀 행복이 행복의 개념에 더해져서 귀납적으로 정말 행복한 행복이 될 수 있도록 오늘을 열심히 행복하면 되겠습니다.

대체 뭐라고 쓴 거지??

공쟝쟝 2020-10-05 08: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역시.... F형 인간!! 난 가장행복할 때 항상 혼자였다!!!!! 우화화🔥🔥🔥🔥🔥

syo 2020-10-06 13:04   좋아요 0 | URL
ㅋㅋㅋㅋㅋㅋㅋㅋ 자가발전이 가능한 스타일이군! 부러운 데가 있다....